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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2015.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대곡 성운이 쓴 「남명선생묘갈」을 중심으로 남명의 삶을 살핀 것 이다. 이 묘갈은 남명 관련 여타 비지문 중에서도 특히 ‘남명의 기상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으로 칭송받았다. 대곡은 남명의 평생 知己였다. 때문에 묘갈에서도 언급하였듯, 그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남명의 모습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상 속 남 명의 모습이었다. 특히 학문하는 자로서의 일상적 모습과 스승으로서의 특징 적 면모를 묘갈에서 집중적으로 표현하였다. 왜 ‘일상 속의 모습’이었을까. 남명과 대곡은 당대의 대표적인 재야지식인이었다. 출사하지 않았기에 兼善天下의 공적은 없었지만, 獨善其身의 처세를 통해 후인에게 출사인 못잖 은 영향을 남겼다. 그것은 바로 철저한 자기 학문에 근원을 둔 재야지식인으 로서의 삶이었다. 두 사람이 보여준 재야지식인으로서의 이러한 삶은 ‘일상 의 모습’을 통해 여실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두 사람이 가장 잘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였다. 두 사람은 외형적 처세에서 그 유형을 달리 하였다. 따라서 그동안의 연구가 두 사람을 같은 층위에 놓고서도 서로 상대적인 방향에서 접근하기도 하 였다. 남명은 보다 외향적인 측면에서, 대곡은 남명에 비해 내향적 측면에서 의 접근이었다. 그러나 후학들의 이러한 시각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생전엔 평생의 지 기였고, 사후엔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한 벗으로 인식되었다. 그 기저엔 바로 대곡의 이 묘갈이 있었다. 남명에 대한 대곡의 그 허여지점, 곧 삶의 유형이 다소 달랐을 뿐 당대 재야지식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 확립에 있어서는 두 사람 모두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드러내려고 의도하지 않았 기에 알아주는 이가 드물었지만, 그들만은 서로를 허여하였던 것이다.
        22.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月村 河達弘은 19세기 강우지역에서 활동했던 학자이다. 그는 실용 을 중시하는 학문경향을 가지고 南冥 曺植과 謙齋 河弘度를 존숭하며 慕寒齋에서 강학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인근의 학자들을 운집시키 고 그들에게 남명학파로서의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때 月皐 趙性家ᆞ 溪南 崔琡民ᆞ東寮 河載文ᆞ克齋 河憲鎭ᆞ斗山 姜柄周ᆞ尼谷 河應魯 등이 그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다. 이후 조성가와 최숙민은 하달홍의 인도 아래 보다 체계적인 학문을 위해 노사학단에 나아가 奇正鎭에게 수학하였다. 한편 하재문과 하헌 진은 본거지로 돌아가 寒州 李震相과 교유하였고, 강병주와 하응로는 性齋 許傳에게 나아가 집지하였다. 조성가와 최숙민이 노사학단의 핵심인물로 자리매김한 것에 비해 하재문이 한주학단에서나 강병주가 성재학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 리 크지 않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남명을 존숭하고 학문의 실천성을 중시하는 남명학파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하달홍의 모한재 강학이 남명학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하달홍이 노사학파와 친밀성이 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하달홍은 19세기 하동과 인근 강우지역의 문인들에게 남 명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고 보다 큰 학문을 접할 수 있도록 발판의 역할을 해 주었으며, 이를 통해 그 문인들은 남명학파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각자의 학문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23.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俛宇 郭鍾錫이 지은 「南冥墓誌銘」은, 南冥을 두고 지은 傳記文字 가 운데서 가장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서술이라 할 수 있다. 남명 전기문자 의 최후결정판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남명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빠짐 없이 수록해 놓았다. 묘지명으로서는 매우 긴 작품으로 일반적인 묘지명의 틀과 다른 점이 많다. 면우는 이 묘지명을 지으면서 자료를 최대한 널리 수집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고, 다 완성된 뒤에도 당시 慶尙道 지역에서 문장으로 손꼽히는 제자 深齋 曺兢燮과 晦峯 河謙鎭에게 문제점을 지적하여 같 이 수정하고 보완하여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원래의 請文者 弦齋 曺庸相을 통하여 深齋가 사소한 문제로 지나치게 장기간 문제를 지적하고 나오자, 마침내 자기가 지은 「南冥墓誌銘」은 폐기하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 9년 뒤인 1926년에 간행된 俛宇集 속에 실린 俛宇의 시문 가운 데 南冥을 낮게 평가했다는 혐의를 받을 글이 발견되어, 남명 후손들은 출판하여 보내 온 俛宇集을 거절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俛宇 측과 관계가 멀어져 「남명묘지명」은 실제로 남명 묘소에 묻히지 못 했다. 「南冥墓誌銘」에서 俛宇는, 南冥의 偉大性을 부각시키고, 敬義가 南冥思想의 핵심임을 밝히고, 南冥의 治學方法을 체계화하고, 南冥의 憂國憐民사상을 부각시키고, 南冥의 學德의 특징을 宋朝 諸賢에 비교하 였고, 南冥의 雅號의 의미를 밝히고, 文廟從祀 疏請 등 남명 推崇事業을 소개하는 등, 내용이 가장 다양하면서 풍부하다. 단언컨대, 「南冥墓誌銘」은 남명에 관한 傳記文字 가운데서 가장 종 합적이고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남명이 직접 지은 詩文에는, 남명의 언행과 생활상을 이해할 자료가 거의 없는데, 제자나 친구 後學들이 지은 이런 다양한 종류의 傳記文字 가 존재함으로 해서 남명을 연구하는 자료로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높은 것이다.
        24.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은 수제자인 來庵 鄭仁弘을 자신의 분신으로 여겼다. 내암 도 남명의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남명 사후 그를 추숭하는 일에 전력을 투구했다. 내암이 지은 「南冥 曺先生 行狀」도 이러한 남명추숭 의식의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남명은, 退溪 李滉의 출사 권유를 거절한 이후로 끊임없이 퇴계로부 터 여러 가지 비판을 받아왔으며, 이러한 비판은 퇴계의 문인들에게 그대로 전해져 내려왔다. 남명에 대한 퇴계의 비판은 급기야 남명의 문묘종사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고, 이에 대한 반 작용으로 내암은 죽음을 무릅쓰고 남명에 대한 퇴계의 비판을 해명하 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내암의 노력은 그가 지은 스승 남명의 행장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내암은 남명의 행장에서 남명이 생전에 남긴 글을 인용하는 방식으로 남명의 출처의식과 남명의 학문관을 설파함으로써, 남명의 입장에 대한 옹호는 물론 나아가 퇴계에 대한 비판까지도 불사하는 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25.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金宇.이 지은 .南冥先生行狀.을 鄭仁弘이 지은 .南冥曺先生行狀.과 비교 분석하여 敍事의 특징을 논한 것으로 그 요지는 아래와 같다. 서사구조의 측면에서, 김우옹은 전체를 생애-졸기-행적 세 부분으 로 나누고, 생애와 행적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서술하지 않았으며, 행적 보다 생애에 더 치중하여 기술하였고, 남명의 자질과 교육에 중점을 두어 서술하였다. 서사내용의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학문전환에 대해 정 인홍은 爲學에 포함시켰는데 김우옹은 별도로 구분하여 서술하였으며, 2).을묘사직소.와 .무진봉사.에 대해 정인홍은 간단히 언급하였는데 김우옹은 주요 내용을 직접 인용하였으며, 3)도덕에 대해 정인홍은 심 성수양을 통해 天德을 이룩한 점을 중시한 반면 김우옹은 남명의 資稟 과 氣像에 중점을 두었으며, 4)공부에 대해 정인홍은 格物致知와 存養省察을 모두 언급한 반면 김우옹은 省察克治에 중점을 두었으며, 5)학 문성취에 대해 정인홍은 주자학을 바탕으로 일가의 학문을 이룬 점을 서술했는데 김우옹은 自得과 致用實踐을 급무로 여겼다는 점을 언급하 였으며, 6)국가와 백성을 걱정한 점에 대해 정인홍은 소상하게 서술했 는데 김우옹은 세상사를 잊지 못하는 측면을 간단하게 언급했으며, 7) 교육에 대해 정인홍은 짧게 서술한 반면 김우옹은 남명의 말을 인용하 여 상세히 거론했으며, 8)취향에 대해 정인홍은 언급한 것이 없는 반면 김우옹은 비교적 소상히 서술했으며, 9)전체적으로 정인홍은 남명의 道學者像을 부각시켰는데 김우옹은 남명의 자품과 기상을 바탕으로 高士像을 드러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2편 행장의 서사의 유사성을 검토한 결과, 김우옹이 먼저 행장을 지 었는데 정인홍이 그 내용을 불만족스럽게 여겨 다시 지은 것으로 드러 났다. 김우옹의 「남명선생행장」을 성운의 묘갈명 및 곽종석의 묘지명과 개괄적으로 비교해 본 결과, 1)구성비율의 측면에서 성운은 행적에 비 중을 두었는데 김우옹은 생애에 더 비중을 두었으며, 2)세부항목을 보 면 묘갈명은 25개, 묘지명은 18개인데 비해 김우옹이 지은 행장은 13 개로 현저히 적으며, 3)세부항목 구성비율로 보면 성운과 곽종석은 항 목을 두루 갖추어 서술하고 있는데 김우옹은 특정 부분을 집중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 김우옹이 지은 행장의 서사는 주요 항목을 특징적으로 서술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김우옹이 지은 「남명선생행장」에 대해서는 그 동안 별문제가 없다 가, 근세에 남명의 후손 曺庸相이 「踣德山碑理由」와 「先子門下敍述考證」을 지음으로써 논쟁이 일어났다. 남명 후손들은 김우옹과 정인홍의 행장 및 허목의 신도비명에서 남명의 진면목을 드러내지 못해 남명의 순정한 도학에 대해 후세 의심을 갖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바로잡으려 하고, 남명 문인의 문중에서는 자기 선조의 글을 비난한 것에 대해 정면 대응함으로써 논쟁이 야기된 것이다.
        26.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의 연보는 无悶堂 朴絪이 1628년 덕산에서 남명의 둘째 아들인 칠원 군수을 지낸 慕亭 曺次磨로부터 부탁을 받고 1636년 편찬을 하였 다. 그 후 謙齋 河弘度, 澗松 趙任道, 林谷 林眞., 寒沙 姜大遂 등 私淑人들의 수정 보완을 거쳐 1700년 발간된 .南冥先生別集.에 실려 처음 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 후 1814년 무민당의 후손들이 .무민당 집.을 발간하면서 집안에 전해오던 무민당 手稿本이라고 추정되는 .남 명연보.를 저본으로 삼은 연보를 수록하여, 3종류의 연보가 전하고 있 다. 연보가 발간된 후 내암관련 문자 삭제, 구암과의 절교 문제 등으로 논란이 있었는데 내암 관련 문자는 삭제하는 것으로 정리한 반면 구암 과의 절교 문제에 있어서는 상세하게 기록해야 한다는 무민당의 견해 가 수고본에 그대로 기술되어 있으며, 반면 .남명선생별집.과 후에 발 간된 .무민당집.에는 내용은 대동소이하나 그 분량은 현저하게 줄어들 었다. 1800년대 들어 남명학파 학자들의 문집이 이 지역에서 많이 발간돼 남명 생애에 대한 자료가 많이 발견되어 보충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또 연보의 내용도 일부분 거칠고 오류가 있다고 생각해 1897년 남명 선생편년을 간행했다. 남명편년은 그동안 제기되었던 연보의 오류들 을 바로 잡았을 뿐 아니라 대체로 연보의 기술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 특히 연보에는 덕계 수우당 한강 등 소수 문인들의 受學에 관한 기사가 있는데 반해 편년에는 남명 문인들의 受學에 관한 기사가 현저하게 늘었다. 이는 남명의 遺文들이 전해지지 않은 것이 너무 많아 당시 지역 선비들의 문집에서 관련 자료들을 구해 이를 보충하는데 초점을 맞춘 것으로 보인다.
        27.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의 목적은 우리나라 대표적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의 신명사도에 근거하여 오늘날 유아기 인성교육에 적합한 수업모형을 탐색하는 데 있다. 신명사도에 근거한 본 수업모형은 남명의 실천사상을 통해 개인의 감정 존중과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자기실천화를 고양시켜 조화로운 인성발달로 연결하는 전인교육의 함의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을 통한 정체성있는 인성교육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유아기 전인발달을 도우는 인성교육의 현장연구로 연결될 것이라 기대한다.
        28.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眉叟 許穆이 지은 德山碑 즉 南冥先生神道碑는 1585년에 세워졌는데, 1926년에 南冥 曺植의 후손인 德山 曺氏 門中에 의해 훼손되어 없어지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晉州 鄕校와 德山 曺氏 門中 사이에 법적 소송이 벌어졌다. 진주 향교는, 미수 허목의 글을 없앴다는 이유와 조상의 신도비를 훼손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므로, 비석을 원상복귀하고 도내 유림에게 사죄하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덕산 조씨 문중은, 미수 허목이 지은 비문의 내용에 자기들의 조상이자 만인이 추앙하는 남명 선생을 비하하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실상 문법적으로 본다면, 비문의 내용을 굳이 악의적으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문의 내용이 악의적인 의도에서 지어진 것이라고 덕산 조씨 문중에서 단정하는 이유는 바로 『記言』에 실린 「答學者」에서 미수가 남명을 폄하하고 있다는 뜻을 드러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본고는 남명선생신도비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에 대해 덕산 조씨 문중이 어떤 시각으로 임하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히려는 목적으로 작성된 글이다.
        29.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의 神道碑로서 가정 먼저 세워진 것은 1617년 무렵, 그 문인 鄭仁弘이 찬술하고 정인홍의 문인 裵大維가 글씨를 쓴 것이다. 이 비석은 1623년 仁祖反正에 의해 정인홍이 賊臣으로 몰려 처형되고 난 뒤 사람들의 눈앞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겉으로는 적신으로 처형된 정인홍이 찬술한 글이기에 넘어진 것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퇴계를 은근히 비판한 글이기에 더욱 세워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이 찬술된 것은 1615년에 남명이 영의정에 증직되어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던 조건이 충족되었고, 정인홍이 남명의 문인 가운데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인홍은, 퇴계가 그 문인들에게 편지나 대화를 통해 여러 차례 남명을 비판하였으므로 그것이 알려져 남명이 문묘에 종사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이 글을 쓰기 이전까지 적어도 7편 정도의 글이 남아 전할 정도로 여러 차례 퇴계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였으며, 이 글은 그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명의 일생에 대해서는 대곡이 찬술한 묘갈명이 가장 극진하다고 생각하고, 이 신도비명에서는 오로지 남명의 학문 내용이 유가의 정통에 해당되며, 퇴계의 남명 비판은 잘못된 것이라는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정인홍이 이러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점은 「跋文解」에 보이는 바, 문인으로서 스승의 학문이 誣陷당한 데 대하여 坐視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師生間의 義를 생각한 데서 나온 정당한 행동으로 스스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 알려져 있던 퇴계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이는 정인홍이 광해군 때 實職에서 行公해 본적이 없으면서도 遙執朝權하던 山林政丞이었다는 점과 인조반정이라는 당시의 정치적인 문제에 묘하게 맞물려 있었던 것이 첫째 원인이었고, 다음으로는 당대부터 퇴계가 가지고 있었던 막강한 영향력을 내암이 결국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둘째 원인이라 할 것이다. 정인홍이 정치적으로 패퇴한 인조반정 이후 대부분의 남명 문인이나 정인홍의 문인 후손들이 차츰차츰 남인화하거나 서인화했지만,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일대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400여 년에 걸쳐 남명 정신을 추존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남명의 학문적 영향력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정인홍의 남명 신도비명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한 ‘冥道日月’이라 표현한 기대가 앞날을 내다 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30.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曹植은 退溪 李滉과 더불어 朝鮮을 대표하는 학자다. 그의 사후 그의 생애를 기록한 여러 傳記文字가 존재한다. 그 가운데서도 그의 神道碑는 여느 인물들과는 달리 네 개나 존재한다. 신도비는 하나만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1609년 남명이 領議政에 追贈됨으로 해서 당시 대표적인 제자라 할 수 있는 來庵 鄭仁弘이 神道碑를 지었다. 그러나 1623년 仁祖反正이 일어나 來庵이 처형되자, 죄인이 지은 神道碑는 둘 수 없어 즉각 없애버렸다. 다시 神道碑의 글을 받아 세울 필요가 있을 때, 남명의 손자 曺晉明이 謙齋 河弘度에게 請文했다. 겸재는 자신은 지을 수 없다는 뜻을 표하였다. 대신 西人의 대표적인 학자로서 志節로 널리 알려진 淸陰 金尙憲에게 請文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그러나 淸陰은 지어주지 않았다. 당시 남명의 弟子나 後學들로 주축을 이루었던 大北派가 몰락한 직후라 南冥學派는 매우 곤경에 처해 있었다. 겸재는 南冥學派를 존속시키기 위해서는 西人들과 제휴할 필요를 절실히 느꼈기 때문에 西人 가운데서 영향력이 있는 淸陰에게 청문하도록 주선했던 것이다. 淸陰이 지어주지 않자, 당시 南人의 영수였던 龍洲 趙絅에게 청문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지어주지 않았다. 그 뒤 용주보다 후배로 南人의 영수인 眉叟 許穆과 西人의 영수인 尤庵 宋時烈에게 청문하여 두 편의 神道碑文를 받았다. 그 당시는 德川書院을 南人들이 주도하였으므로 南冥의 묘소 밑에 眉叟가 지은 神道碑를 세웠다. 尤庵이 지은 神道碑文은 나중에 三嘉 龍巖書院의 廟庭碑로 세워졌다. 1764년 『南冥別集』을 만들어 南冥에 관계된 附錄文字를 수록할 때도 眉叟와 龍洲가 지은 神道碑文은 수록되었지만, 尤庵이 지은 神道碑文은 수록되지 않았다. 처음에 南人의 영수와 西人의 영수에게 南冥의 碑文을 동시에 받은 것이 論難의 발단이었다. 두 사람은 學問의 方法이나 文章體裁가 다르기 때문에, 보는 시각에 따라서 그 碑文은 처음부터 문제가 될 수 있었다. 眉叟는 스스로 ‘漢나라 이후의 글은 안 본다’라고 선언할 만큼 六經에 바탕한 古學 위주의 학문을 했고, 文章도 아주 簡明하면서 含蓄的이었다. 반면 尤庵은 철저한 朱子學 신봉자였고, 문장도 朱子처럼 내용 위주의 雄渾, 質朴한 文體를 즐겨 사용하였다. 南冥의 후손들은 애초에 어느 특정 黨派에 얽매인 것은 아니었지만, 眉叟가 지은 神道碑文에서, 제목을 「南冥先生神道碑」라 하지 않고 「德山碑」라고 한 점 , 南冥이 學問淵源이 없이 독자적으로 一家의 學問을 이룬 것처럼 서술한 점, 氣節만 강조한 점, 이미 처형된 鄭仁弘의 이름을 비문에 특별히 기록한 점, 자손을 수록하지 않은 점 등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도 南人系 儒林들이 眉叟를 워낙 尊崇하기 때문에 불만을 가진 南冥 후손들은 어쩌지는 못 하고 오랜 세월을 지내왔다. 그러다가 眉叟가 南冥을 존경하지 않는 느낌을 주는 내용이 담긴 「答學者書」를 남명 후손들이나 西人系列의 인사들이 입수하여 보게 되자, 眉叟가 지은 神道碑에 대한 불만이 더욱 크게 고조되었다. 1879년부터 勉菴 崔益鉉, 淵齋 宋秉璿, 心石齋 宋秉珣, 老栢軒 鄭載圭 등 老論系 學者들이 眉叟가 지은 神道碑文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尤庵이 지은 神道碑를 칭찬하자, 南冥 後孫과 西人系 儒林들은 尤庵이 지은 碑文을 세울 운동을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眉叟가 지은 南冥 神道碑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던 남명 후손들이 1926년에 이르러 眉叟가 지은 神道碑를 넘겨 버렸다. 그러자 南人들은 南冥 후손들을 대대적으로 성토하면서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大邱覆審院에까지 가는 5년 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결과적으로 1차 2차 소송에서는 남인들이 이겼지만 최종심에서는 曺氏들이 이겼다고 한다*. 眉叟가 지은 神道碑는 다시 서지 못 했고, 묘소 밑에는 尤庵이 지은 神道碑만 서 있게 되었다. 두 비석이 다 특징이 있고, 濟南 河經洛의 條卞처럼 자세히 들여다보면 眉叟가 지은 碑文도 큰 문제가 없지만, 이해하기 쉽고 南冥을 尊崇하는 점은 尤庵碑가 더 낫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네 개의 南冥神道碑는 각각 특색이 있고, 또 그 撰者들은 모두 학문적으로나 영향력에 있어서 당대의 최고의 인물이었으므로, 오늘날 와서 보면, 남명을 연구하는 데 네 개의 신도비가 있는 것은 오히려 크게 도움이 된다.
        31.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南冥 曺植(1501-1572)의 4종 神道碑文 중 尤庵 宋時烈(1607-1689)의 「南冥曺先生神道碑銘」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한 명의 인물을 대상으로 당대 최고 문사들이 각각 신도비문을 남기고 그 작품들이 모두 현전하는 경우는 남명신도비문이 유일하다. 송시열이 찬술한 남명신도비문은 남명 조식 사후 100여 년 만에 찬술된 것으로 이전 정인홍ᆞ조경ᆞ허목 보다 학문적 연원이나 사승 관계가 멀다 할 수 있고, 오히려 사후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조식과 송시열은 가장 대치적 관계에서 지어진 작품이다. 그러나 송시열은 정치적ᆞ학문적 입장을 뒤로하고 조식의 不朽한 功業과 序其爲人의 독특한 찬술자세로 남명신도비문을 찬술하였다. 송시열의 남명신도비문은 가장 비지문 창작이 왕성했던 60세 전후에 찬술된 작품이며 영남유림과 조식의 자손들 부탁으로 찬술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10년 전에 지어진 초고본을 다시 찾아 주변 지인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퇴고를 거듭 하며 남명신도비문에 많은 공력을 기울였다. 송시열은 조식의 공로에 대해 세 가지(①貴義賤利, ②可尙恬退’, ③可羞貪冒)로 요약했고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일화를 통해 간략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도록 기술하였다. 조식의 출처관에 대해서는 이황의 말을 인용하며 미화로 여겨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나아가 조식을 성리학자로 최고의 위상이라 할 수 있는 육군자의 반열과 병렬시킨 것은 송시열 이외에 어떤 사람도 하지 못한 일이며 당시 노론 영수로 후대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송시열에게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였다. 송시열은 이황을 포함한 육군자는 조식의 위상과 차이가 없다 생각하였고 바로 이점으로 자신이 조식을 백세의 스승, 영원한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까지 조식을 당파적 영수로 여겨왔다면, 송시열은 당파적, 정치적 외형에서 탈피하여 한 시대의 영원한 師表로 승화시켰다. 바로 이점이 기존 3종의 남명신도비문과의 변별점이며 송시열의 남명신도비문이 지닌 위상이라 할 수 있다.
        32.
        201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神道碑銘은 일종의 墓道文字이다. 묘도문자는 한 인물의 學問, 言行, 德性, 業績, 家系 등을 기록하여 돌에 새겨 神道에 세우는 것인데, 남명의 경우처럼 우여곡절을 겪으며 5종이나 남아 전하는 경우는 사례가 없다. 이 5종의 묘도문자의 撰者는 모두 자신의 입장에 충실한 修辭를 보였다. 대곡 성운은 평생의 벗을 여읜 슬픔과 그리움을 담아 곡진한 修辭로 표현하려는 입장이었고, 내암 정인홍은 무한한 존경심으로 스승을 높이려는 의도였으며, 미수 허목은 퇴계의 남명 비판 이후 견지되어온 남인학파의 견해와 자신의 평소 견해에 입각하여 남명을 高士로 기리는 입장이었고, 우암 송시열은 상대 당파이기에 오히려 자유로운 존숭을 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용주 조경은 미수와 동일한 입장과 견해에서 학자라기보다는 高士로 남명을 기리고 있으며, 사실의 기록과 闡揚의 수사 사이에서 사실의 기록에 치중하는 입장이었다. 龍洲는 南冥을 氣節이 높았던 高士로 평가했고, 그것을 修辭로써 잘 드러내기 위해 다양한 방식을 구사하였다. 이러한 修辭는 直敍와 尊崇의 사이에서 긴장하며 행간에 드러나고 있었다. 또 용주는 남명의 출처에 대해서 때를 만나지 못한 不遇와 高潔自守의 경우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修辭의 방식이 남명을 존숭하고 그 행적의 사실을 드러낸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대곡이나 내암 혹은 우암이 찬한 신도비명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直敍와 簡略함에 더 치중했음을 보았다. 따라서 용주의 修辭는 尊崇 내지 闡揚의 修辭와 事實의 直敍 사이를 오가는 긴장 속에 만들어진 것이며, 용주의 修辭는 오히려 史論의 褒貶에 가깝고 묘도문자의 목적인 揚善隱惡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다.
        33.
        2013.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 시대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의 인간관계를 분석하여 유아기 대인관계교육의 내용 및 방법을 고찰하는 데 있다. 연구 결과 남명의 인간관계는 역할과 도리를 다하는 인간관계, 상대방을 존중하는 인간관계, 마음과 행동을 중시하는 인간관계를 실천한 것으로 분석되어졌다. 남명의 인간관계 실천이 유아기 대인관계교육에 주는 시사점은 덕의 함양과 근본을 갖춘 지식, 그리고 사회ᆞ교육적 가치의 강조이며, 이를 생활에서 실천화하는 방법을 강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34.
        201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지난 20여 년간 진행되어온 남명학파에 관한 연구를 종합, 검토하는 논문이다. 지금까지 남명학파에 관한 연구는 아주 다양한 측면에서 진행되어 왔는데 본고는 그 중에서도 특히 남명학파의 거시적 동향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논문을 모아서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분석대상 논문은 우선 통시적 연구와 시대별 연구로 나누었으며, 시대별 연구는 다시 남명학파의 형성 및 전성기에 관한 연구, 남명학파의 몰락 및 쇠퇴기에 관한 연구, 남명학파의 부흥기에 관한 연구 등 세 시기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사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통시적 관점의 연구는 주로 남명학파의 동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인조반정의 가해자와 피해자 가운데 피해자에 해당하는 북인만 연구해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결과 남명학파의 공(共)보다는 과(過)가 부각되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가해자인 서인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어야 입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것이다. 시대별 연구도 자료의 한계성 때문에 더 이상 크게 진보할 가능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료 발굴은 물론 자료 해석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35.
        201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의 주제는 “南冥 曺植(1501–1572)의 학문에 대한 연구저술의 성과에 관한 분석”이다. 이를 위하여 이 논문에서는 다섯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첫째, 『남명집』과 譯註本의 종류와 그 특징. 둘째, 초기 남명학연구의 문제형성과 관련된 저술. 셋째, 남명학연구의 다양화와 심화정도. 넷째, 퇴계학과의 비교연구의 내용과 의미. 다섯째, 南冥學의 傳承에 관한 두 유형에 관한 분석이다. 이상의 문제에 대한 연구결과 첫째, 『남명집』에 대한 판본정리와 定本化가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남명학의 학문적 사상적 특성을 정리할 때 틀에 박힌 類型化를 지양해야 한다. 셋째, 단순한 비교보다는 남명학의 독창적 성격이 무엇인가를 밝혀야 한다. 넷째, 南冥評傳의 저술이 꼭 필요하다. 다섯째, 남명학파와 門 人등 남명학 전반에 관한 체계적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동안 남명학 연구저술은 대부분 개인이 이미 발표하였던 연구논문을 주제별로 엮어서 출판하였거나, 기획된 목적에 따라 전문연구자들의 개별적 연구논문을 모아서 편집한 책들이다. 이러한 상황은 남명학의 정확한 정체성을 밝히거나, 남명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미흡함을 말하는 것이다.
        36.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정치의 통속적인 정의를 재검토하고 재조명하여 남명의 정치와의 관련성을 부각시키면서 그러한 맥락에서의 연구 성과를 종합적으로 재평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즉, 정치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생각해보면 호모 폴리티쿠스인 남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지평이 열릴 것을 기대해 마지않는다. 예를 들어,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남명의 출처가 정치적 행위의 일부였음을 인식하는 일이 가장 기본적인 단초가 될 것이다. 호모폴리티쿠스 남명의 총체성을 파악하는 일은 또한 텍스트적인 논쟁과 콘텍스트 구성과 관련된 복잡성을 넘어서서 새롭고 건설적인 방법론적 혁신을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 두 가지 방법론을 제안하여 새로운 연구 방향 정립에 기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제 I 장에서는 정치 현상을 보다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차원으로 들여다보고 그에 걸맞은 정치의 정의를 도출하고자 한다. 그 결과로써 정치가 포괄하는 범주가 보다 더 광범위해지고 그 안에서의 질서를 새로운 분류로 구분지어 보고자 한다. 이 시도는 남명의 글과 행위의 많은 부분이 정치의 범주에 반드시 귀속되어 있고 따라서 박병련이 주장한 대로 정치학적 프레임은 남명을 연구하는데 필연적이라는 것을 재삼 강조하기 위함이다. 제 II 장에서는 시도된 새 정의에 따라 남명과 관련된 정치 분야에서의 연구 성과를 회고 하고 그 동향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제 III 장에서는 연구 성과에 대한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경향에 대해 두 가지 도움이 되는 방법론을 제안하고자 한다. 남명을 계승한 후대 남명학파들이 정치 일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남명의 족적, 사상이나 가르침, 그리고 정치 행위 등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37.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설립 20주년을 기념하여 남명문학 분야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고 향후 과제를 살피기 위한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남명문학 연구가 시작된 1980년대 이후의 연구 성과를 장르별로 분류하고, 『남명집』에 수록된 문체 유형에 따라 운문과 산문 분야, 총체적 분야, 비교문학적 분야 등 4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남명문학 연구는 현재까지 100여 편의 성과가 산출되었다. 남명의 창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적지 않은 수치이다. 이의 검토를 통해 몇 가지 문제점을 도출할 수 있었다. 예컨대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남명 삶의 특징적 국면을 강조하는 연구가 지나치게 집중적으로 반복적으로 진행되어 왔고, 또 이를 대변할 만한 소수의 작품만이 지속적으로 재인용되었다는 점, 특정 분야의 연구는 초창기 이후 장기간 정지되어 있다는 점 등이 있다. 연구가 지속되어 성과가 증가했음에도 이러한 양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이는 남명문학 연구가 직면한 총체적 문제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명문학 연구의 절대적 분량을 차지하는 한시에 대한 포괄적인 정리가 필요하다. 『남명집』의 한시와 남명의 일대기를 대조하는 작업이다. 『남명집』의 수록 체계가 시대 순이 아니고 作詩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하지만, 부분적으로라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남명의 삶은 크게 네 번의 전환기가 있었고, 그때마다 뚜렷한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져 왔다. 적어도 이러한 4 시기로의 분류만이라도 가능하다면, 현재 소강상태에 있는 남명문학의 연구는 한층 발전된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38.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2012년 7월까지 남명 조식의 철학사상을 연구한 업적들을 회고한 글이다. 다섯 분야로 나누어 논의의 흐름을 살펴보았는데, 실천유학성에 대한 논의, 남명 성리학의 속성에 대한 논의, 탈유학성의 논의, 공부론의 특징에 관한 논의, 이기론적 성향에 대한 논의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논문들은 남명의 유학이 실천유학이자 脫이론적이라는 데 동의하고, 남명학의 특징을 비교라는 방법에 의하여 탐구한다. 비교 대상으로 삼아진 이들은 이황과 주희였다. 비교를 통해 남명만이 가지는 특성이 많이 드러났으나, 지나치게 차이성을 강조하고자 한 경우 상식에서 벗어난 무리한 주장들을 내놓아 남명학 이해를 오히려 저해한다. 이에 필자는 저술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남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차별화와 함께 동일성을 찾는 작업이 중요함을 제안하였다. 아울러 남명학이 동아시아 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기존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생활 속에서의 체험을 통해 공부해야 한다는 남명의 교훈은 여전히 유효함을 주장하였다.
        39.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의 생애와 발자취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오래 되었다. 어찌 보면 남명 당대에도 이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남명이 돌아간 직후 이에 대한 정리가 본격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남명의 생애 가운데 예민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제자 정인홍의 정치적 부침에 따른 후유증으로 생애에 관한 자료도 여러 차례 여러 사람에 의해 중복하여 지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남명에 대한 생애자료는 그 누구보다도 많이 남게 되었다. 근대에 들어 남명의 생애를 정리하여 소개하는 일에 그리 적극적이지 못하였다. 근대의 인명사서 등에 남명에 대한 내용은 비슷한 시기의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략한 감이 있다. 1990년대 초에 남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남명의 생애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본격적인 연구와 번역, 교정 등은 이루어지 않았다. 다만 최근 들어 다행스럽게 남명에 관한 생애자료가 다시 전반적으로 검토되고 정리되고 있다. 남명의 생애에 관한 정리와 소개, 교정과 연구는 논문, 저서, 소설, 사전, 교과서 및 개설서 등 여러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소설로 지어지고 교과서 및 개설서에 소개되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 논문, 저서 등의 형태로 점점 깊이 있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인터넷 온라인상에 사전적 설명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남명의 생애에 대한 철저한 실증을 바탕으로 생애가 정확하게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남명의 발자취에 관한 정리와 소개는 주로 책으로 몇 권 나와 있는데, 개설적으로 간략히 설명한 것에서부터 특정한 분야 예컨대 한시 등과 관련하여 발자취를 탐방하는 형식으로 된 것도 있다. 그리고 그의 생애의 발자취와 학문적 궤적을 관련지어 연구한 것도 있다. 이들 발자취에 대한 정리와 탐구는 이전의 유적지에 대해 소략하게 소개한 책자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였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발굴하거나 정리가 되지 않은 발자취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40.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남명학연구󰡕 29집 소재 「󰡔南冥集󰡕 諸板本의 刊行年代」라는 오이 환의 논문에 대한 반박 논문이다. 요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남명집󰡕 기유본 문경호 발문의 ‘임인(1602) 년간’은 문집의 편집 작업 이 진행된 시점을 언급한 것이고, 초간된 것은 서문이 찬술된 갑진(1604)년이 며, 장판각에 불이 난 뒤 순찰사 유영순의 후원에 의해 병오(1606)년 무렵에 1 차 중간이 있었고, 다시 이를 부분적으로 수정하고 보유를 추가하여 간행한 것 이 기유(1609)본이다. 둘째, ‘年間’, 즉 ‘즈음’이란 용어가 간행연대를 적시한 용어로 보기에는 분명 하지 않고 너무나 느슨하다. 간행한 것은 분명한 것이고, 문집 편찬을 의논한 것은 오늘날처럼 간행위원회를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1600년의 󰡔퇴계집󰡕 간행 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시기가 불분명하였던 것이다. 셋째, 갑진년 8월에 정인홍이 찬술한 서문이, 문경호가 발문을 실은 그 책에 같이 실려 있다는 것은 문집의 초간이 갑진년에 있었다는 것을 가장 웅변적으 로 말해주는 것이다. 넷째, 초간본의 장판각이 불타고 유영순에 의해 중간이 되었다면 이는 유영순 의 관찰사 재임 기간[1605년 9월-1607년 3월]과 관련시키면 병오(1606)년 무렵이라 해야지, 오이환처럼 갑진(1604)년으로 볼 수는 없다. 다섯째, 오이환이 󰡔고대일록󰡕의 신축(1601)년과 임인(1602)년 등에 보이는 ‘看役’이 문집 간행의 일이라고 해석할 근거가 없다. 더구나 계묘(1603)년 겨울 에 李堉이 鄭逑의 심부름으로 󰡔남명집󰡕의 편집 작업을 주도하던 鄭仁弘에게 특 정한 글을 제외하기를 요구하였는데, 정인홍이 “선생의 문자라면 片言隻字라도 가볍게 취하거나 뺄 수 없다.”며 거절하였으니, 이는 1603년 겨울 이전까지 문 집의 편집 작업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근거 자료가 된다. 여섯째, 이상 네 가지 이유로 임인(1602)년에 󰡔남명집󰡕이 초간되었다고 주장 한 오이환의 설이 설득력을 잃게 된다. 일곱째, 이에 오이환은 유영순에 관한 문경호의 기록이 신빙성이 없다며, 하 징의 「덕천서원기」와 배대유의 「신산서원기」에서의 관찰사 기록 착각의 예를 들었다. 그러나 이는 논리가 닿지 않는다. 하징과 배대유가 설사 관찰사에 대하 여 착각했다 해도, 그것이 문경호의 착각에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증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필자는 그것조차 오이환이 사실이 아닌 주장을 한 것으로 논증하 였다. 여덟째, 우선 하징의 「덕천서원중건기」에서 윤근수가 관찰사로서 재임 기간 [1574년 10월-1575년 10월] 중에 덕천서원의 창건을 지원하였다는 것을 오 이환은 하징이 착각하여 잘못 기록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지만, 재임 중에 그가 지원한 뒤 1576년 봄부터 일을 시작했다고 보면 하징의 기록에 전연 무리가 없 음을 알 수 있다. 아홉째, 배대유의 「신산서원기」는 󰡔모정집󰡕 기록을 보면 ‘방백읍재’ 밑에 윤 근수와 하진보가 각각 세주로 처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세주를 후인이 추기한 것으로 보지 않으려는 것은, 오이환이 배대유가 착각했다고 보기 위함 에 다름 아니다. 배대유는 당시의 관찰사 김수와 김해부사 양사준의 인품을 문 제삼아 그들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애초에 ‘방백읍재’라고만 하고, ‘金方伯睟梁知府思俊’이라 표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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