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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2019.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대학생의 성격강점과 의사소통유형이 대인관계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여 대학생의 건강하고 원만한 학교생활을 위한 상담 프로그램 개발 및 교육과정을 위한 기초자료를 제시하고자 시행하였다. 연구 대상자는 서울과 충청권 거주 대학생으로 2018년 5월 7일부터 5월 28일까지로 총 204부 의 자료를 t-test, ANOVA, Pearson’s Correlation Coefficient, Multiple regression으로 최종 분석하였다. 연구결과는 지성적 성격강점과 감성적 성격강점, 의사소통유형 및 이성친구 유무를 예측변수로 대인관계만 족도를 설명하는 선형회귀모형은 통계적으로 유의하였고(F=26.57, p<.001), 회귀모형의 설명력은 대인관 계만족도 총 변화량의 45%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대학생의 대인관계만족도를 증가시키기 위해서 의사소통 교육프로그램 개발의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격강점에 관한 자기인식을 높이는 상담프로그램 개발의 기초자료로 유용할 것이다.
        4,000원
        46.
        2019.09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47.
        2019.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After opening Suwon railway station in 1905, a new road was constructed between Suwon station and Paldalmun(the South gate). It was the starting point to change urban structures of Suwon and shape the new city scape. In 1914, administrative districts of Suwon were reorganized. Suwon-myeon (township, a subdivision of Suwon-gun) was promoted to Suwon-eup(town) in 1931. Suwon-eup expanded its territory and changed the address system from ‘li(里)’ system to Japanese address system, ‘Jeong(町)’ in 1936. From 1920s, road system was changed and transformed Suwon’s urban structures. A straight road was built from Jongro intersection to Janganmun(the north gate) in 1928. Another straight road was constructed between Suwon station to Padamun in the early 1930s. Public office buildings used the Hwa Seong HaengGung(華城行宮) and some of building moved to new location with new buildings. Main buildings of most schools in Suwon were reconstructed since 1930s. Commercial buildings and stores were sprung up and had their own characteristics by region. Around Suwon station, there are more hotels and restaurants than other areas. Rearranging administrative areas, developing road system and new buildings transformed Suwon’s spatial structures. Constructing new roads formed a straight road passing through Suwon. After reorganizing administrative areas, this road turned to be the central axis of Suwon. Buildings in new style on the axis made the modern cityscape in Suwon.
        4,000원
        48.
        2019.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歷史는 勝者의 論理’라고 흔히들 말한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의해 660년 7월 18일 멸망하면서, 百濟의 마지막 수도였던 ‘扶餘’는 불타고 한반도 역사의 전면에서 완전히 사라져 統一新羅時代와 高麗·朝鮮時 代에 걸쳐 ‘작은고을’로 겨우 命脈을 유지해 왔다. 1300여년이 지나 또 다른 침략세력인 ‘日本’에 의해 한반도가 植民支 配를 받는 기간에 아이러니하게도 ‘부여’가 일본 아스카 문화의 뿌리라는 것과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구축하려는 숨은 의도에 의하여 역사의 전면으로 재부상하게 된다. 1914년 전국 郡·面統合을 주도한 오하라신조(小原新三,1873.-1953.)는 조선에 오기 전 일본 나라현(奈良県)의 사무관으로 재직하면서 아스카·나라시대의 문화와 백제문화가 깊은 관계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던 사람 으로, 작은마을이었던 부여군(10개면)을 주변의 3개군(석성군·임천군·홍산 군)을 흡수하여 부여군(16개면)으로 통폐합하여 부여군의 위상을 제고(提 高)하였다. 이어 1915년 충남도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경복궁에서 열린 공진회에서 ‘부여팔경 디오라마’를 제작하여 116만 여명의 관람객에게 부여를 홍보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한편, 1915년 ‘공주’와‘논산’에서‘부여’간, 정기 교통편이 개통되는 등 타 도시와 교류 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1927년에 조선팔경 선정시 작은고을이었던 ‘부여’를 선정하는 등 다방면에서 ‘부여’의 位相提高노력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예부터 이름이 있던 곳들을 대상으로 부여의 23곳 관련 그림엽서들이 발행되었고, 그 중에서 발행 주체가 명기된 4곳은 부여고적 보존회(1915-1929), 재단법인 부여고적보존회 (1929.2.20.-1939.5.30.), 산구팔경당(山口八景堂), 다까바다게상점(高畠商店) 등이고, 발행 주체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것들도 다수 살펴보았다.
        6,700원
        49.
        2019.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이상은 초현실주의적 작품 경향을 보이는 난해한 작가이다. 그의 대표작 <날 개>의 ‘나’는 ‘아내’에게 생계를 의존하면서도 아내의 직업과 화폐에 기반한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 해 모른 채 살아간다. 아내의 내객이 아내에게 돈을 주고 가는 행위를 궁금해하던 ‘나’는 아내의 외 출을 틈타 경성의 밤거리를 돌아다닌다. 돈을 하나도 쓰지 않고 아내에게 주면서 손님들이 아내에게 돈을 주고 가는 쾌감을 깨닫기도 한다. 이 글에서는 다섯 차례에 걸친 ‘나’의 외출과 귀가가 지니는 의미를 밝히고자 하였다. ‘나’는 외출을 거듭할수록 자본주의가 진행된 도시의 문명과 화폐 경제 체제에 대해 이해할 뿐 아니라 아내의 직업 이 무엇인지 알아가게 된다. ‘나’는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아내 방의 윗방에 기거하지만 이내 자본주 의 체제의 성의 상품화 문제를 인식한다는 점에서 전근대의 지식인이라 할 수 있다. <날개>는 ‘나’의 외출과 귀가 모티프의 반복을 통해 식민지 체제와 함께 이식된 서구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깨닫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좌절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5,700원
        50.
        2018.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Since the late 19 century, the Choseon dynasty forcibly opened the door to western countries, including Japan. In addition, cultural propagation called ‘modernity’ caused subtle changes in dietary life. Based on the theory of colonial dual society, this study examined the dietary modernity in Kyungsung (mid 1930s~early 1940s) when 50 years had passed since the Open-Door policy. Three films, <Turning point of the youngsters>(1934), <Sweet Dream>(1936) and <Spring of Korean Peninsula>(1941) (those made in 1930s~1940s) were analyzed. Twenty six scenes [14 scenes from <Turning point of the youngsters>, five scenes from <Sweet Dream>, and seven scenes from <Spring of Korean Peninsula>] related to the dietary life from films were chosen and classified according three criteria (degree of modernization, main influential countries, and benefit groups from modernization). The degree of modernization of all films was more than 80%. The average proportion of the countries that affected modernization were western (35%), western-Japan (28%) and Japan (20%). Approximately 33, 53 and 14% of the upper, middle, lower classes, respectively, benefited from diet modernization. The main places where modernized dietary culture could be enjoyed were cafes, western restaurants, tea rooms, and hotels. The main food or beverages that were considered as modernized dietary culture were liquor (especially beer), coffee, and western meals. People in Kyungsung in the mid 1930s~early 1940s experienced modernity in dietary life differently according to the social classes and these culture changes were generally accepted as a symbol of modernity.
        4,300원
        51.
        2018.10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연속적인 맥락에서 보이는 아름답거나 흥미있는 현상, 자연특질에 있는 장소를 ‘경승’ 또는 ‘승경’이라 한다. 또 승지, 승구, 승소, 승적과 유사한 의미로 ‘명승’이라는 단어가 주로 사용된다. ‘명승’은 동양의 대표경관으로 현재 중국, 일본, 대만, 남‧북한이 지정 관리하는 문화재의 한 유형이기도 하다. 한반도 명승의 최초 유행은 그동안 중국에서 유래된 소상팔경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상팔경도는 북송시대 송적이 그리기 시작하여 널리 유행하여 명승을 소재로 한 산수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팔경문화는 많은 문인과 화가들에 의해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명승을 널리 알리는데 기여했다. 한국의 팔경은 명승을 바탕으로 이를 향유한 계층인 고려 후기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 선계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부터 ‘송도팔경’과‘신도팔경’등이 유행하면서 승경을 팔경화하는 고유 팔경의 전통이 확립되었으며, 이것이 우리나라 명승의 시작으로 인정되어 왔다. 이는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시대의 일반적 현상이라 취급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명승이 여말선초에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면 최초의 명승 개념은 어디서 누구에게서부터 시작되었을까? 또 다른 의문을 가지게 된다. 이제는 우리나라에 전래되고 유행한 명승에 대해 다양한 역사적 맥락에서의 심층적 고찰이 요구된다. 근대기 국가차원에서 법령이 마련된 것은 1933년 조선명승고적천연기념물보존령에서 출발한다. 그 후 우리나라 명승은 1946년 북한이 먼저 자체 법령으로 분리되고 1962년 문화재보호법으로 남한이 자체의 법령을 배포함으로서 최초의 자주적 법령체제가 완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2006년에 문화재청에서 명승지정보호 활성화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전까지 1970년에 최초로 지정된 명승은 국보나 보물, 사적 등의 보존관리에 치중하던 문화재정책으로 인해 국민적 공감대를 얻지못하고 성숙되지 못한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한 채 유지되어 왔다. 명승 문화재를 지정하던 초기에는 사적과 차별적인 다른 문화재 주변의 자연환경을 포함한 대면적의 문화재라는 개념을 반영하는데 그쳐 과거 전래명승에 대한 자료수집이나 현장조사 등 과거 우리 명승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었다. 또한 집경형식의 연속경관 형식을 취한 팔경은 국토개발로 인해 단절되고 파편화되어 명승의 대표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한반도내 명승은 조선시대에 와서 크게 유행했으며 일제강점기에도 일부지식인층이나 일본인들에 의해 명승 관련 정보가 끊임없이 생산되었던 동양 고유의 문화경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해방이후 6.25동란을 겪으면서 점차 그 수가 사라져갔고 1970년 최초의 명승이 지정되기 시작한 시기에는 전래명승에 대한 기록이나 정보가 명승 지정시 반영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 본 연구는 한국 명승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역사적 접근으로 한반도내 유행했던 지식인층이 저술한 명승관련 문헌자료수집과 분석을 통해 한국명승의 개념 확립과 변화 과정 속의 나타난 특징을 발견하는데 기초자료 구축을 목적하고 있다. 연구방법은 시대별 사회 지식인층이 작성한 문헌자료의 내용분석을 중심으로 고려시대, 조선시대,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주요내용을 기술하였다. 먼저 고려시대에 나타난 명승에 대해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는 불교국가로 많은 사찰들이 건립되어 명성을 떨쳤지만, 원림을 중심으로 한 정원문화와 명승을 유람하고 감상하는 활동도 유행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고려시대 현전하는 기록이 많지 않아 자세한 경향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조선시대 명승 문화가 발달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은 기정사실이다. 고려시대 문인들이 명승을 유람하고 유람기 등으로 남긴 기록을 여럿 확인할 수 있고 그중에서 금강산은 당대 최고의 명승으로 회자된 것으로 보인다. 그 중 대표적으로 지순(至順) 2년(1331, 충혜왕1) 2월에 안축(安軸)이 쓴 『근재집 』 권1, 의「경포신정기(鏡浦新亭記)」에 명승에 대한 기록이 나타난다. 오늘날 경포대는 관동팔경 가운데 가장 빼어난 경관미를 자랑하는 곳으로 평가된다. 그렇지만 처음 경포대가 건립될 당시에는 사실상 무명의 공간에 불과했고 고려시대 일반적인 사람들은 금강산과 총석정만을 명승으로 손꼽았다. 안축에게 태정(泰定) 병인년(1326, 충숙왕13)에 지금의 지추부학사(知秋部學士) 박숙(朴淑) 공이 관동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 경포대에 정자를 짓고 기문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는데 박숙은 영랑의 정자터가 있었던 곳에 정자를 다시 짓고 이 곳의 장소성을 부각시켰다. 이 사건은 고려시대에 명승적 개념에 입각한 사고의 기록이라는 것에 의미를 두게 한다. 안축의 명승에 대한 개념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은 다음과 같다. 천하의 사물 중에 대체로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이치를 담고 있다. 크게는 산수, 작게는 조그마한 돌멩이나 한 치의 나무에 이르기까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없다. 유람하는 사람들이 이 사물을 둘러보고 흥취를 붙이고 이를 통해 즐거움으로 삼으니, 이것이 누대와 정자가 만들어진 까닭이다. 형상이 기이한 것은 드러나는 곳에 존재하여 눈으로 완상할 수 있고, 이치가 오묘한 것은 은미한 곳에 숨어 있어서 마음으로 터득한다. 눈으로 기이한 형상을 완상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나 지혜로운 사람이나 모두 같아서 한쪽만을 보고, 마음으로 오묘한 이치를 터득하는 것은 군자만이 그렇게 하여 그 온전함을 즐긴다. 하고 그 가치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명승경관에 대해 자세히 언급한 내용도 나타난다. 경포호(鏡浦湖)는 맑고 깨끗하여 바람 따라 잔물결이 찰랑거렸다. 멀리 있는 산은 골짜기가 천 겹이어서 구름과 이내가 아득하였고, 가까이 있는 산은 봉우리가 십 리에 뻗어 초목이 푸르렀다. 항상 갈매기와 물새가 나타났다 잠겼다 하고 왔다 갔다 하면서 대(臺) 앞에서 한가하게 놀았다. 봄 가을의 안개와 달, 아침저녁의 흐리고 갬이 이처럼 때에 따라 기상이 변화무쌍하다. 이것이 이 경포대의 대체적인 경관이다. 하는 대목이다. 조선시대의 명승은 유학의 발달에 힘입어 최고의 중흥기를 맞게 된다. 공자가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라고 한것은 기이한 것을 완상하여 한쪽만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오묘함을 터득하여 온전함을 즐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명승을 즐겼으며, 이는 ‘명승문화’ 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이다. 특히 유교적 자연관과 수련문화가 지배한 조선시대에는 명승문화가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사람들은 명승 유람을 통하여 자연과 친화함으로써 산수지락(山水之樂)의 감흥과 인지지락(仁智之樂)의 경지를 얻는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 명승을 향유하는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본질적 가치나 활동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천인합일(天人合一)의 일체감을 얻고자 하는 중요한 실천 활동이었다. 명승에 대한 구체적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임경제지’ 등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이중 ‘임원 경제지’ 이운지 편에는 명승을 여행할 때 갖추어야 할 행장과 재료, 용도, 제조법, 가치, 사용법, 효과 등 명승의 여행법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명승의 유행정도를 알 수 있다. 채제공의 번암집에 보면 “여러 유명한 노선생들은 거의 모두 몸소 좋은 경치 좋은 곳을 점령하여 살면서 글 읽고 학문하는 곳으로 삼고 사후에는 제사하는 곳이 된다. 그러한 땅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바둑을 벌여 놓은 것처럼 많다. 그러나 그 사람이 거기에 가지 않으면 명승이 또한 스스로 나타나지 못한다. 이것은 서로 기다려서 이루어지는 이치이다.”라고 명승의 개념과 가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명승 문화의 유행은 ‘청구남승도’ 놀이에도 응용되어 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아녀자나 유생들에게 전국 각지의 명승 120곳을 놀이판에 담아 곳곳을 누비면서 그곳의 정취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기도 했다. 근대시대의 명승은 과거 전래된 명승에 대한 추적이나 평가, 근대문물과 함께 유입된 유원지 문화가 명승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과거 전래된 명승에 대한 내용들은 일본인이나 신지식인들에 의해 책자로 발간되는 일이 잦았다. 일제강점기에 발간된 조선의 명승・고적과 관련된 비롯한 다양한 서적은 조선시대 지리지 등 고문헌을 참고하여 작성되었는데 일제강점기 초기에 작성된 나루시마 사기무라[成島鷺村]의 『 조선명승시선(朝鮮名勝詩選), 1915 』의 서문에서 조선시대 명승관련 고서를 탐구하여 집대성한 결과를 밝히고 있는 대표사례에 해당된다. 명승에 대한 보호체계가 시작 된 것은 일제강점기 문화재 관련 법령과 정책이 도입되면서 부터이다. 먼저 일본에서 제정된 「사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법(1919)」을 기준으로 1922년에 11개소가 명승으로 지정되고 이후 조선에서는 「조선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령(1933)」을 통해 ‘고적 및 명승’ 5건과 ‘명승 및 천연기념물’ 2건이 지정되었다. 그러나 당시 지정되었던 명승은 현재 사용하는 명승 문화재의 개념과는 다른 개념의 것이였다. 현재 통용되는 역사와 문화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명승’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에 대두되었다. 명승기정기준은 1962년에 제정되었고 1979년에는 7개소만이 명승으로 지정되었었다. 한국의 명승은 유형별로 산악형, 계곡형, 하천형, 도서해안형, 원림형, 옛길형, 산업형으로 구분되고 최근 문화경관적 가치가 확대되어 지정시 반영되고 있다. 2018년 한반도내 명승은 총 111개소에 달한다. 전래 명승의 고찰을 통한 한국 명승만의 특성이 명승 지정에 반영되어야 한다.
        52.
        2018.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의 목적은 GIS의 공간분석 기법을 이용하여 일제 강점기에 제작된 「조선오만분지일지형도」의 지형 재현 정확도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좌표가 보정된 이미지 형태의 지형도로부터 등고선을 추출하였다. 비교를 위한 기준은 현재의 1:25,000 수치지형도의 등고선이다. 등고선으로부터 DEM을 추출하여 지형면 분석, 중첩분석, 3D 분석, 수문 분석 등을 수행하였다. 음영기복, 고도 차이, 지형단면, 하계망의 위치, 하천차수 및 길이, 곡률도, 능선의 위치 등을 통하여 지형 재현의 정확도를 정성적 혹은 정량적으로 평가하였다. 북한산과 설악산 주변을 사례로 분석을 수행하여 얻은 주요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성적 평가와 정량적 평가 모두에서 서울에 인접한 북한산 주변 지형도의 지형 재현 정확도가 설악산 주변보다 높게 나타났다. 둘째, 특수지형의 기호화 방식, 삼각측량 결과를 바탕으로 한 고도 재현 등 당시 지도제작 방식이 국지적으로 현재와 다른 혹은 부정확한 지형 재현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셋째, 지형에 대한 접근성과 관찰가능성이 지형 재현의 정확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설악산 주변의 경우 접근 및 관찰이 용이한 남쪽 사면의 정확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반면, 접근성이 떨어지는 북쪽 사면은 매우 부정확하게 재현되었다. 북한산과 설악산 주변 지형 재현 정확도의 차이는 지도화하는 지역이 식민지 지배와 개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4,800원
        53.
        2018.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일제 강점기의 국어는 근대후기 국어와 현대국어를 잇는 과도기로서, 두 시기의 표기상의 특징이 혼재하고 있다. 이 시기에 출판된 근대적 성격을 띤 한자 자전의 한글 뜻풀이 표기 방식은 현대국어 표기법이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본고는 일제강점기 자전의 한글 뜻풀이를 국어의 음운 현상과 연계시켜 그 표기 양상과 특징을 살펴봄으로써 당시의 한자 자전이 지닌 자료적 가치와 시대적 위상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5,200원
        54.
        2018.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일제 강점기하의 한국 사회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시기부터 일본의 독점자본세력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상륙하였다. 그 결과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은 일본의 대규모 공장이 건설되었고, 공업단지 건설과정에서 그 지역에 오랫동안 살아왔던 거주민들은 삶의 기반을 잃고 쫓겨나 노동자로 전락하였다. 또한, 한국인이 운영하던 가내수공업과 중소기업도 상당수가 도산하였다. 1930년대의 한국 노동소설은 당시의 노동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불경기로 인해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도 악화하였다. 불경기로 인해 재고가 쌓이자 공장주는 공장의 생산 시설을 감축하여 운영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노동자들에게 감원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감원에서 살아남더라도 임금을 삭감당하거나 노동시간이 증가하는 등 실질적 노동 강도는 더 세어졌다. 또한, 공장주들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위한 안전시설에 대한 투자를 제대로 하지 않아 많은 노동자들이 사고로 다치거나 사망하기도 하였다. 한편 여성 노동자들은 남성 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 이외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상대적인 저임금과 성희롱에 시달려야 했다. 이러한 유형들이 1930년대 노동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당대의 노동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동 환경에 대응하여 KAPF 소속 작가들은 노동소설을 통해 노동자들이 다양한 노동자 단체를 활용하여 노동자 조직을 확대하고, 단결과 연대를 통해 회사 측의 부당한 처사에 대항하는 모습을 작품화했 다. 21세기의 한국은 신자유주의의 영향으로 다시 노동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 구조조정, 노조 사찰 및 노조 파괴 공작, 위험의 외주화, 정규직과 비정규직, 성희롱과 기업주의 갑질 등 노동자들의 삶이 힘들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1930년대 노동소설에 대한 고찰은 시사점이 크다고 하겠다.
        6,100원
        57.
        2018.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is to find out the process of changes concerning the cadastral records that consist of the cadastre, the cadastral map and various registers of land in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cadastre and cadastral map were the most important part of them and became the basis of cadastral records. These two registers were first made out according to the Project of Colonial Land Survey in the year 1912. As the influx of foreign Weights and Measures was greatly influenced by the foreign concession since 1876, the traditional units of the Weights and Measures had abolished finally. The extortion of sovereignty led a rapid change to the Weights and Measures in 1910. Japan compelled us to change into Japanese System of Measurement. From that time on, Lot(筆地) and Pyeong(坪) were settled down on the registers of land.
        4,000원
        58.
        2017.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was conducted to examine the 2nd broadcasting cooking program of Gyeongseong Radio from April 26th 1933, when the 2nd broadcasting for Koreans started, to December 1941. From its opening date, there were continuously regular cooking programs such as ‘Recipes’ and introducing ‘Japchae’. Analysis of names broadcasted in cooking programs included a total of 452 foods (328 types); specifically, 332 Korean foods, 71 Western foods, 24 Japanese foods, 18 Chinese foods, and seven other foods. Korean foods included 35 staple foods, 223 side dishes, 64 deserts, and 11 sauces. Western foods included seven soups, 25 main dishes, and 25 deserts. Main dishes included many deep-fried dishes, while diverse types of desserts were also introduced. In the case of Japanese food, there were many foods combined with Western food. Chinese food included many types of dumplings and fried rice, as well as many dishes using pork. Among people broadcasting cooking programs, there were 11 whose names were shown in the schedule, all of whom were recognized as the best cooking specialists and educators of the time.
        4,200원
        59.
        2017.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에 통도사의 중흥과 근대한국불교의 개혁을 주도한 김 구하의 개혁정신과 방향을 조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김구하는 일제강점 기인 1908년 이후 수행과 교육과 포교로 불교교단과 통도사를 개혁한 선각자였 다. 기존연구들은 그가 친일반민족 조사대상자의 명단에 오르자 김구하의 제자 들이 김구하의 구국애국과 독립운동을 위한 업적들을 밝히는데 주목하였다. 그 런데 김구하는 구국애국과 독립운동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 한국불교 근대화 를 위해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연구는 개혁실천가로서의 김구하의 업적을 밝히지 못했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는 김구하가 남긴 업적들을 일제강점기에 근대한국불교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수행결사와 개혁론이라는 두 가지 관점으로 고찰하여 그의 개혁방향의 특징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그가 지향했던 한국불교의 개혁방향은 전통불교의 계승과 세간법의 활용이라는 두 가지 특징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특히 전자는 경허의 정혜결사정신 을 계승하였다면, 후자는 범란의 진취적이면서도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개혁실 천에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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