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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
        2019.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낙엽활엽수와 상록활엽수가 혼효하는 곳으로 식물학적 가치가 높은 두륜산도립공원 일대의 상록활엽수림을 대상으로 식생 특성을 파악하고자 진행하였다. 식생 특성을 알아보기 위해 100㎡ 크기의 조사구 40개소를 설치하여 조사·분석 하였다. 두륜산도립공원이 위치한 해남군은 난대림지역으로 40년간의 기상자료를 분석한 결과, 한랭지수 –8℃․월, 온량지수 109.2℃․월, 연평균강수량 1,310.5㎜로 상록활엽수림의 분포적지라 할 수 있다. TWINSPAN에 의한 군락분류 결과, 붉가시 나무군락-Ⅰ, 붉가시나무군락-Ⅱ, 참식나무-푸조나무군락 총3개 군락으로 분리되었다. 두륜산도립공원 내 상록활엽수림은 교목층에 우점하고 있는 붉가시나무가 아교목층에서도 세력을 넓혀가고 있으며, 붉가시나무 외에 교목성상의 상록활엽수인 참식나무와 생달나무 등이 전 층위에서 확인되고 있는 형태로 굴참나무, 졸참나무, 개서어나무 등의 낙엽활엽수가 도태되고 상록활엽수인 붉가시나무군락으로의 천이가 진행되고 있으며, 국지적으로 참식나무군락이 출현하고 있었다. 종다양도는 붉가시나무군락-Ⅰ(1.3208), 붉가시나무군락-Ⅱ(1.4916)에 비해 참식나무-푸조나무군락(1.0798)이 낮게 나타났다.
        4,500원
        64.
        2019.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After the study of Fujishima Gaijiro(1930), although it is common to see that the Tang-ruler(唐尺) was used in the construction of the Silla Sacheonwangsa temple(679), the basis of the discrimination of the construction measure and the detection of the unit length is not actually sufficient since conventional research was done before the excavation. The study was based on archaeological results, which was secured through the excavation research(2006∼2012) of the temple site in recent years, to determine the construction measure and try to detect the unit length. In the analysis of the measured value of the ruins, the numerical data were obtained through measurements on drawings of the ruins, the tendency of conversion measure’s number appearing by dividing each unit length of the Goguryeo-ruler(高句麗尺) and Tang-ruler within a certain range was compared from the Wansu-je(完數制) viewpoint. The research results are summarized as follows : 1)As a result of the analysis of the distance between the site’s center, the case that conversion Cheok’s(尺) number is converged to the unit of Jang(丈) within the range of unit length expresses three times more in Tang-ruler, and it is confirmed that a simple multiple relationship based on the unit of Jang is established between conversion Cheok’s number. 2)As a result of analysis of Bokan(梁間) of the each Corridor site and the measured value of the stonework ruins, it could be confirmed that appears overwhelmingly in the Tang-ruler when conversion Cheok’s number becomes an integer within the range of unit length. The results of the analysis are judged to be a clear basis for viewing the Tang-ruler as the construction measure of the Sacheonwangsa temple. 3)The estimated unit lengths of the construction measure that were obtained from the analysis of the distance between the site’scenter, the foundation stone center distance of the building site and the measured value of the stonework ruins are slightly different. There is a limit to the verification of the construction error about this, however it is difficult to specify, it is mentioned 294.37㎜ which is obtained from the analysis of the distance between the site’s center.
        4,900원
        66.
        2019.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허버트는 『성전』(The Temple)의 앞부분에 「봉헌」을 배치시킴으로써 그의 모든 시상과 삶의 원천으로서 우주만물의 창조자인 신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절대적 관계를 제시한다. 『성전』은 정체성의 공간적 구조를 만들며 「봉헌」과 함께 그것의 앞부분에 위치한 「교회현관」은 살아있는 보이는 성전인 개개인이 ‘교회’ 의 더 깊은 영적 신비로 입성하도록 준비시킨다. 그들은 의식적이고 적극적으로 죄와 대면하면서 사회전반에 역동적인 긴장을 만들고 유지하고 때때로 해결한다. 본 논문은 「봉헌」을 칼뱅주의를 바탕으로 「제단」 , 「희생」 , 「요단강 (I)」 과 함께 연구한다. 「교회현관」 [살수용기] 은 「상인방」과 함께 연구한다. 이로써 ‘교회’로 진입하기 전에 거치는 준비단계인 이 시들이 갖는 의의를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5,200원
        68.
        2019.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Sacheonwangsa temple in Silla was completed in 679, just after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In recent years, we have been critically considering the history of the chronology based on the existence of ‘Geumdang of the previous generation’, which has emerged through the research report of the Sacheonwangsa temple. It is the one to reconsider the construction process of the Sacheonwangsa temple centering on the re-interpretation of the construction time and the character of the first stage of the foundation which was confirmed from within the Geumdang site.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 1)The “Chang(創) of Sacheonwangsa temple” in [Three Affairs that Queen Seondeok had already known] that it is presumed that the construction of the Sacheonwangsa temple, which was designed by Anham before 640 years ago, will convey the fact that the first of the King Munmu's reign (661∼) has been finalized after the initial discussion. 2)Although the theories after excavations are predicated on the existence of ‘Geumdang of the previous generation’, there is no reason to believe that a lasting predecessor building with roof and pillar walls on predecessor buildings is considered to have been built. The foundation was associated with the “build a temple out of coloured silk(以彩 帛營寺)” i.e. ‘Jochang(祖創)’ in 670 years before the construction plan was formally finalized. However, it is presumed that the remains of the platform construction on the premise that it will be used on the construction of Geumdang. 3)The decision to ‘rebuilding(攺刱)’ based on a formal construction plan is determined to be from 670 to 672 years. The maintaining of the original cathedral axis line, to the north on the boundary of the southern limit of the foundation flat portion, the result of developing and embodied the relative position of the Geumdang in the newly determined cathedral unfold and embody, the center of the building base and Geumdang, it is presumed that the centers of them are divided into North and south. 4)The completion of the Sacheonwangsa temple in 679 is understood as the conclusion of ‘rebuilding’ to “build a temple out of coloured silk” i.e. ‘Jochang’ in 670 years. The pent roof of the Geumdang was initially considered not to be in the plan, but it is judged to be before the completion of the Sacheonwangsa temple.
        4,600원
        69.
        2019.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중국 산서성 오대산 불광사에는 구체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독특한 모습의 6각 묘탑이 남아 있다. 각 구성 양식은 구체적인 시대를 비정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어 그 조성 배경과 사상적 의미에 대한 접근이 어려웠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1937년 기록 사진에 남아 있는 조사탑 이층 탑신 직령창 위에 그려진 액방(인방)과 인자 보간(인자형 두공, 인자 화반)의 모습은 남조 중기의 무덤 돌문의 아치형 문미에 표현된 인자 대공의 양식과 유사한데 이를 계승하여 회화적으로 변용된 모습이 당나라 장안의 황족과 귀족 무덤에서 확인된다. 이들과 조사탑의 것을 비교해 보면 8세기 초부터 형태가 유사하며 개원 연간의 것과는 동일한 양식이라 판단된다. 기단부와 평좌 양식도 8세기 전반기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를 통해 불광사 조사탑의 인자 보간 양식은 당나라 시대의 변화를 거친 것으로 결국 조사탑은 8세기 전반기에 서안, 혹은 중앙 정권의 지원 아래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이를 토대로 기존의 관련 자료들을 재검토해 보면 동대전과 조사탑이 있는 사찰의 영역은 오대산과 불광사에 대한 고종과 측천무후의 정치적 움직임과 연관되어 있으며 조사탑은 그러한 배경 속에서 해탈선사의 법손인 업장에 의해 8세기 전반 경에 조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6,900원
        70.
        2018.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대둔산도립공원의 식생구조 및 생태적 특성을 밝히고자 시행되었다. 도립공원 내 42개의 조사구(단위면적 100m²)를 설치하여 조사를 실시하였다. 분류방법 중 TWINSPAN기법과 DCA기법을 사용하여 군락분리를 시도한 결과 갈참나무군락, 일본잎갈나무군락, 소나무군락, 졸참나무-굴참나무군락, 리기다소나무군락, 개서어나무군락, 신갈 나무군락으로 분리되었다. 식생구조 분석결과 각 군락별 우점종이 지속적으로 세력을 유지할 것으로 판단되나, 소나무 군락의 경우는 참나무류와의 경쟁관계에 있어 산림천이적 양상에서 지켜볼 필요가 있다. 흉고직경급별 분석 결과, 우점종간 중・대경목이 많이 관찰되어 군락이 안정된 구조를 갖추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특별한 물리적환경의 변화나 중대한 교란, 병충해 발생 등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상층수관을 우점 하는 종들이 지속될 것으로 판단된다. 연륜 및 생장량 분석결과 우점하는 교목층의 경우 평균 40년 이상의 수령을 보였으며, 연평균 생장량은 군락Ⅰ의 굴참나무가 3.51±2.39mm로 가장 높았으며, 군락Ⅶ의 신갈나무가 1.61±0.90mm로 가장 낮았다.
        4,300원
        71.
        2018.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investigated the dimensional plan of Kor Sork temple in Preah Pithu complex, Angkor by civil surveying, 3D scan, measured integer ratio and regularity. According to epitaph and preceding researches, Khmer temples were built based on structural planing with the constant ratio and regularity by using special construct measure scales "Hasta" and “Byama”. The study assumed the same unit method was applied in Kor Sork temple and identified the regularity of actual measurement value about the temple. The assumed construct measure scale (Hasta) used for the design of this temple is 413mm. The overall apart arrangement of the temple is different in the East-West direction and the North-South direction. In the East-West direction, the whole scale is 180 hasta, and it is divided into 20 hastas. On the other hands, it was confirmed that the North-South direction is 96 hasta and it was divided four quadrants in 24 hastas. Regarding the detailed design, the regularity according to the constant ratio was confirmed. 7 hasta was used as the basic unit on the first floor and 6 hasta were used as the basic unit on the second floor of the terrace. the basement and the central sanctuary is of 6 hasta and 8 hasta were used as the basic standard.
        4,000원
        72.
        2018.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석현리 개명산(開明山)에 위치하는 청련사(靑蓮寺)는 한국불교 태고종 소속의 대표 사찰이다. 청련사는 원래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동 988번지 종남산(終南山) 무학봉(無學峯) 기슭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다가 근ㆍ현대기 불교 종단의 갈등과 해결책으로 2006년 왕십리에서 양주로 이건(移建) 결정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2010년 6월부터 경기도 양주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청련사에 봉안된 불화는 12건이 현전되고 있다. 현재까지 청련사 불화에 대해서는 학위논문을 비롯한 여러 보고서에 일부 소개된 바 있다. 이 글은 필자가 2017년 청련사 소장 불화를 전수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19세기부터 현재까지에 이르는 청련사의 역사를, 불화를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청련사에 소장된 불화는 1866년 <치성광여래도>로부터 1970년대 <팔상도>에 이르기까지 주로 19세기부터 20세기까지 조성된 불화가 주를 이룬다. 그 가운데 가장 이른 연대의 기록을 보이는 <치성광여래도>는 화기에 복장시주(服藏施主)로 두 명의 상궁 이름이 확인된다. 이어 1880년에 조성된 <아미타불회도>, <현왕도>, <감로도> 세 점은 여러 상궁의 후원 속에 조성된 불화로 의미가 있다. 짜임새 있는 구도, 세밀한 필치, 표현 기법 등에서 불화승 축연의 기량을 살필 수 있는 불화로도 주목된다. 이 외에도 민간인들이 시주와 후원 속에 조성된 불화도 봉안되어 있다. 청련사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청련사지(靑蓮寺誌)」에는 1849년 중창에는 시주를 권면하는 상궁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어 5년 뒤에는 왕실의 인척인 홍현주와 영의정을 역임한 권돈인이 불사를 시주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불화의 조성 기록에서 1880년 조성 불화 이외에 상궁이나 왕실의 인사가 후원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청련사는 왕실 인척이나 당대의 권력가, 왕실과 관련된 상궁들의 불사(佛事) 후원을 집중적으로 받았으며 불화와 불전(佛殿)의 구조상 왕실의 원당으로서의 특징을 보인다. 청련사 불화는 19세 말~현대에 이르기까지 청련사의 역사를 고증하는 중요한 자료일 뿐 아니라 19세기~20세기까지 불화의 도상과 양식적 특징, 후원자와 화승을 총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 중의 하나로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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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3.
        2018.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양주 청련사의 조선후기 불교조각 가운데 1670년에 조성된 대웅전의 아미타삼존상과, 1651년에 조성된 원통보전의 관세음보살상을 다룬 것이다. 이 두 조각상은 2017년 2월과 3월 두 차례에 걸친 복장 조사를 통해 제작 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웅전의 아미타삼존상은 1670년(강희 9, 庚戌)에 수조각승 녹원(鹿苑)을 비롯한 인종(印宗)ㆍ도운(道云)ㆍ유경(唯敬)ㆍ사운(思運)ㆍ성심(性諶) 등 6명이 참여해 조성한 17세기 후반의 불교조각으로, 확실한 조성 연도와 조각승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청련사 아미타삼존상은 1670년에 조성된 이후 1913년과 2000년에 개금불사가 이루어졌으며, 1940년에 복장품 일부는 도난되었다. 청련사 관세음보살상은 1651년(효종 2, 辛卯)에 전라도 흥양현 팔영산(八影山) 지장암(地藏庵)의 좌협시보살로 조성된 사실이 조성발원문에 기록되어 있다. 조성발원문의 내용을 통해 아미타삼존상 가운데 좌협시보살로 조성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1940년에 개금ㆍ중수하였던 원문(願文)이 발견되었다. 청련사 원통보전의 관세음보살상이 어떠한 이유로 청련사로 이안(移安)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조선 말기에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왕실 관련 사찰에 여러 지역의 불상들이 이동된 경우가 많았던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양주 청련사의 관음보살상도 화계사와 흥천사처럼 왕실과의 인연으로 고흥능가사의 지장암에서 청련사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9,000원
        74.
        2018.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에서는 조선시대 도성비보사찰로써 염불과 범패 전승이 활발했던 왕십리 안정사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청련사의 어장 상진스님의 전승계보와 범음성의 율적 특징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불교의례에 수반되는 여러 가지 율조 중에 어산 상진스님은 장엄염불을 비롯한 향풍 범패에 주력하였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예로부터 한양 동교파 범패로 이름이 높았던 왕십리의 안정사는 도성비보사찰로서 왕실과 백성들의 극락왕생을 빌어야 하는 ‘현실적 요구’가 있었다. 둘째, 여러 가지 ‘나무아미타불’을 후렴구로 하는 장엄염불은 신라시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민중 친화적인 염불로서 ‘대중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함’이었다. 마지막으로 ‘口傳으로 이어온 염불가락이 신라의 소리’라는 옛 노스님들의 말씀을 듣고 ‘전통을 잇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산 상진스님은 영남지역에서 기초염불과 법기타주의 기초를 익힌 후에 서울의 동방불교대학과 신촌 봉원사의 영산재 설행을 통하여 경제 짓소리와 호적소리에 이르기까지 제반 기량을 익힘으로써 지역성을 초월한 자신만의 범음성의 세계를 구축하였다. 그 가운데 통도사의 성공스님과 팔공산 월봉스님의 염불성에 이르기까지 상진스님의 소리 스승의 폭이 매우 넓었다. 어산상진의 이러한 범음성이 왕십리 안정사의 범래와 합류하여 오늘날 청련사의 불교의례문화 창달에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의 범패는 고풍․향풍․당풍이 함께 전승되어 왔으나 그간 학계에서는 당풍범패에서 유래한 어산 범패에 집중한 결과 향풍범패의 전통과 음악적 특징에 대해서는 간과해 왔다. 어산 상진스님은 기초 염불에서 짓소리까지, 법기타주, 북 가락, 호적 가락 등 불교 의식에 수반되는 제반 기량을 익힌 후에도 장엄염불을 비롯한 향제 염불을 놓지 않고 연마하여 예술적 경지로 끌어 올렸다. 상진스님의 장엄염불은 앞으로 향풍범패 연구에도 기여하는바가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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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
        2018.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신라 흥덕왕 때에 서울 왕십리 남산 산록에 안정사로 창건되었고, 조선 초기 무학대사에 의해 중창된 이후 진호사찰로 자리매김 된 이래, 중창을 거듭하다가 2010년 경기도 양주 개명산으로 이건한 청련사의 시 공간에서 펼쳐지는 불교의 전통의례문화를 살핀 글이다. 먼저 첫째 장에서는 시대와 지역을 지배하는 문화의 의미와 전통문화이자 문화전통인 불교의례에는 전통문화의 가치가 담겨 있고 문화전통의 보고라는 전제 아래 말글을 연다. 둘째 장에서는 역사적으로 한국사찰의 건립 배경이 되는 사상을 알아 보았는데, 호국만다라 사상과 산천비보사상에 입각하여 비보사찰로 건립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셋째 장에서 다룬 내용은 안정사(安靜寺)로 창건되었 고 중창되면서 東靑蓮ㆍ西白蓮의 호국 만다라와 진호사찰로서 청련사가 지정 되었다는 것을 밝혔다. 넷째 장에서는 청련사(안정사)의 역사 속에 남겨진 당우 및 전해진 전적들을 바탕으로 청련사에서 행해진 전통불교의례를 살펴 보았으며, 마지막 장에서는 양주로 이건해온 청련사의 전통문화의 전승 양상을 범패 중심으로 살펴보며, 새로 이주한 양주에서 전개되는 전통의례가 어떻게 문화전통의 역사를 잇고 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짚어 보았다
        7,800원
        76.
        2018.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양주 청련사는 2010년 이전까지 서울 하왕십리 무학봉 바위절벽 아래에 있던 사찰이다. 태고종에 속한 청련사는 조계종과 소유권 분쟁 과정에서 조계종의 승려가 하왕십리의 사찰 구역을 건설업자에게 매각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양주로 이전 건립하게 되었다. 근래까지 안정사라고도 불렸던 청련사의 역사는 1940년대에 만들어진 「청 련사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지에 수록된 조선시대의 상량문 등의 기록에 따르면 청련사는 신라 흥덕왕대에 창건되었다고도 하고, 조선초기 무학대사가 창건하였다고도 하였다. 흥덕왕대 창건설이 나오게 된 배경으로는 당시가 중국으로부터 선(禪)이 전래된 시기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서술하였고, 조선초기 창건설의 배경으로는 무학대사가 종남산 서쪽 계곡에 있던 사찰을 동쪽으로 옮겼기 때문이라고 서술하였다. 청련사는 조선시대에 다섯 번의 중창이 있었고, 일제강점기에 두 번의 중창이 있었다. 이때까지의 중창은 홍수 혹은 화재로 무너진 건물을 새로 짓거나 수리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2010년 여덟 번째의 중창은 사찰 부지를 옮기는 대작불사였다. 이때의 중창은 주지로 있던 백우대사가 주도하였다. 이로써 청련사는 천년 동안 이어온 전통을 양주 계명산 자락에서 다시 계승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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