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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
        2014.1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Recently there are increasing numbers of people participating in sports activities. Accordingly, the rate of sports injuries is increasing as well. In this light, this study was conducted to investigate the extent of acute damage and its forms by examining the current state of patients with sports injuries. This research study was conducted between January of 2008 and December of 2010 in Chosun University Hospital through retrospective review of the medical records of patients with sportsrelated injuries. The total number of patients with sports injuries who visited the emergency center was 887. The number of male patients was 726 (81.85%), far more than the number of female patients (18.15%). More than half of the patients, accounting for 419 (47.23%), had injuries on their face; second and common parts, in which injuries occurred, were upper and lower body, accounting for 146 (16.45%) and 193 (21.75%), respectively. The majority of patients did not undergo surgical treatment. Only 113 (12.73%) patients underwent surgical treatment. In addition, more than 80% of them were not hospitalized but 170 of them needed to be hospitalized. Most sports injuries occurred in young male patients. This can interrupt participation in sports activities for a long time and result in lower quality of life. Hence proper preventative measures and scientific treatment methods are needed.
        102.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은 건국 이래 중앙집권 정치를 표방하고 각 행정의 말단까지 수령을 파견하여 통치하고자 했다. 조선 초기 지방관은 지방 세력의 억제 정책 속에서 ‘守令七事’의 임무를 가지고 파견되었는데, 이 임무는 명목상으로는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 조선 중기 지방 사족에 의한 향 촌 지배 주도의 시기를 거쳐, 조선 후기 지방제도는 왜란과 호란의 피해 복구가 끝나고 국가의 안정을 이룬 가운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조선후기 지방제도는 국왕의 왕권 강화책과 맞물려 지방에 대한 역 사, 지리, 호구, 양전 등의 조사와 이를 바탕으로 한 지리서 간행, 통치 강화를 위한 새로운 법전의 편찬을 토대로 이루어졌다. 또한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여 지방의 부역과 조세, 교육 등에 지접 관여하는 한편, 새로 부를 축적한 중인층이나 서얼, 몰락 양반 등은 납속책 등을 통하여 국가 재정 확충과 기득권층으로 편입시켰다. 활발한 사회변동 속에서 한편으로는 수령은 흉년이나 역질 로 인한 구휼이 중요 임무의 하나였 다. 韓範錫은 조선후기 현종13년(1672) 태어나 영조 10년(1734) 74세로 세상을 떠난 무인으로 무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목민관으로서도 여 러 관직을 지냈다. 그는 하동현령으로서 지방 수령의 첫발을 디뎠는데 관직 중 남쪽에서는 제주도의 관찰사, 북쪽 변경에서는 회령부사와 남 병사를 지내면서 특히 목민관으로서 구휼활동에 관심을 보이고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 한범석의 목민관으로서의 자세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여러 방면으 로 그를 조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18세기 국가의 큰 변란이 없던 시기를 살았던 한 무장으로서 목민관의 최우선은 다른 지방관과 다름없이 구휼 문제였으며 상황에 따라 적극적으로 대처한 인물이었다 고 생각된다.
        103.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에도시대의 ‘죽도도해금지령’과 ‘독도 조선령’ 인식은 그 후 메이지(明治)시대에 들어 외 무성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1870)와 󰡔태정관지령󰡕(1877)으로 이어졌다. 메이지 3년, 외무성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에서는 독도를 ‘울릉도의 인도’(竹島ノ隣島)로, 또한 메 이지 10년 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의 󰡔태정관지령󰡕에서는 독도를 ‘울릉도외일도’(竹島外一島)라고 하여 조선령임을 재확인했다. 1870년의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와 1877년의 『태정관지령』은 독도를 울릉도에 부속 된 섬으로 보는 지리적 인식의 산물인 동시에, 안용복사건 당시에 확인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영토’라는 사실을 한 번 더 확인한 것이었다. 다케시마(竹島)문제연구회에서 주장하는 것과 같이, 명칭혼동이나 착오에 의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태정관지령』은 독도영유권 귀 속에 관한 역사적인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메이지정부 최고국가기관인 태정관은 1877년, 영토담당 정부기관인 내무성을 경유하여, 시마네현에 ‘울릉도와 독도를 시마네현 의 지적에 올리지 말 것’을 지시하고, 그 내용을 관보에 해당하는 『태정류전』에도 공시했다. 『태정관지령』은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에 의해 공개된 이래, 주로 일본계 학자들에 의해 서 연구가 많이 된 반면에, 국내에서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다. 연구부족뿐만 아니라 근거자료로서의 가치도 저평가 되고 있다. 일본측에서 『태정관지령』을 부인 하는데 온 힘을 쏟아붓고 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독도 문제에 대한 역사적 논쟁은 『태정 관지령』을 얼마나 잘 활용 하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국제법적인 측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104.
        2013.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Historic Cultural Environment Conservation Areas around Chosun Royal Tombs in Gyeonggi Province are larger than those around other Cultural Assets, so more efficient management tools on the Areas should be needed. This study aims to suggest the directions of policy to modify the existing management tools by analyzing the spatial extent and alteration standards of the 12 Historic Cultural Environment Conservation Areas around Chosun Royal Tombs in Gyeonggi Province.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in most cases, the spatial extents of the Areas are 500m, but the spatial extents should be precisely classified in Gyeonggi Ordinance of Cultural Assets Protection, and be excluded according to the layout of Protection Areas and roads. And the outside view from the inside is more important in Chosun Royal Tombs, so the areas on the axis of the view must be controled by considering the development density(bulk or height of buildings). Second, the same zoning areas must be classified as the same section of the Area allowing for equity, and Finally, the Current Conditions Permission Criteria should be actualized to take into account the difference between the development densities of zoning araes and the Criteria.
        105.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의 목적은 각 계층의 사람들이 지리산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이용해왔 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지리산은 영․호남의 여러 고을에 걸쳐 너르게 퍼져 있고 매우 靈驗하다고 알 려져 있었다. 신라 때부터 국가에서 중요시해왔던 지리산은 조선왕조의 유교적 산천제 정비에 따라 산신의 封爵이 제거되고, 전라도 남원에 神祠를 세워서 제 사지내게 되었다. 지리산 산신신앙에는 불교․도교 등 여러 신앙이 복합되어 있 었다. 지리산에는 聖母祠 이외에 여러 신당들이 세워졌고, 봄과 가을마다 삼남지역 의 무당과 일반 민중에 의한 기도가 성행하였다. 또 지리산은 골이 깊고 여러 가지 작물들이 풍성하여, 생계가 어려운 사람, 도망자들이 이곳을 찾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조선왕조의 불교 억압에도 불구하고, 지리산 주변에는 많은 사찰이 새롭게 들 어섰다. 이런 사찰 중에는 지리산 신을 위한 신당을 세운 곳이 많았다. 불교계 에서는 聖母天王이나 이외의 상징물에 대해서도 불교와 관련시켜서 지리산에 서의 불교의 위상을 높이려 했다. 儒者들은 지리산 신에 대한 별도의 敬拜는 필요치 않다고 여기고 있었고, 무 당이나 불교계의 지리산 제례에 대해서는 경멸하고 있었다. 그들이 지리산을 찾은 것은 경치를 즐기고 문학적 호기를 기르거나, 속세에서 찌들렸던 정신을 환기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일반 민중과 무당, 불교계, 유자층들이 지리산을 인식하고 이용하는 입장은 서로 달랐다. 지리산을 둘러싸고 계층간의 갈등이 폭발하는 경우도 없 지 않았다. 게다가 지리산의 승려․무당이나 골짜기 깊숙한 곳에 사는 민간인에 게는 일찍부터 관의 침탈이 가해져서, 이들의 불만이 고조되지 않을 수 없었다.
        106.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19세기 후반 이후 영남 우도지역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발휘한 蘆沙學 派 문인들의 학문적 연원이 되는 蘆沙 奇正鎭(1798∼1879)의 학문 활동을 韓 末 畿湖學界의 동향과 관련하여 고찰한 것이다. 門戶 分立에 따른 학파 분화, 그리고 이에 따른 다양한 학문적 입장의 대두 속에서 기정진의 主理的 학문 경 향이 가지는 위상을 검토하였으며, 특히 20세기 초반 기호학계의 논란이 되었 던 理 중심의 이기론과 호락논쟁에 대한 입장을 살펴보았다. 기정진은 호남을 중심으로 꾸준히 강학활동을 펼치면서 그 학문적 영향력을 확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호학계의 학문 연원이 되는 栗谷 성리설에 대한 비 판적 입장을 제시하며 자신의 학설을 구체화하였다. 그리고 당시 기호학계의 최대 논란 대상이었던 호락논쟁에 대해 인성물성동이를 중심으로 비판적 지양 의 입장을 취하였다. 리를 중심으로 한 그의 성리설은 실천적 위정척사로 현실 화되었으며, 이러한 그의 학문관은 그의 문인에게 계승되어 호남과 영남 우도 지역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본고는 이러한 그의 학문 활동을 영 남 우도의 학계 지형에 유의하여 전반적으로 검토한 것이다.
        107.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pine trees have been existing in Korean Peninsula since about 7,000 years ago. It is the tree which has been always present in Korean's life and it is the tree which has a potential to become a true identity of Korea's Nature. In This study, the characteristics of pine(Pinus densiflora Sieb. et Zucc.) forest in the "True-View landscape paintings" during the late chosun dynasty were investigated according to the 9-categorization. The result of the study are as follows: 1452 pine tree forests samples are collected from 179 "True-View landscape paintings". The 9 classifications are following; Mountain top, saddle os mountain, foot of hill, Ridge, Valley, Slope, Rock, Soil, Waterside. In the case of the topography, 64.3% of the pine forests are drawn in the ridges. The forests are mainly located on the tops and the saddles of mountains. The current ecological findings also show that the ridges are the most suitable sites for pine trees. the pine forests drawn in the valley are frequently in the foot of mountains and the rock. The slopes(135) and the valleys(267) are mainly located foot of hill.
        108.
        2007.07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의 문헌 기록 호우사상의 특성을 파악하고 구조적으로 간단한 강우모형인 구형펄스모형을 이용하여 평가하였다. 전체적으로 '큰비'에서와 같이 강우에 대한 언급만이 있는 경우가 '큰물', '홍수', '폭우'와 같이 홍수유출 및 이에 따른 피해가 설명되어 있는 경우보다 강우의 재현기간이 작게 나타나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기록된 호우사상은 모두 극치사상이 아닌 것으로 파악되었다. 일관되게 어느 정도 이상의 재현기간을 갖고
        109.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시대의 선원 조직과 항해술과 관련해서는 조운선의 선원 조직과 선단 편성 등만이 알려져 왔고, 일반 선박의 선원 조직이나 항해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조선 성종대 바다에서 표류한 경험담을 기록한 최부의 「표해록」은 그동안 국문학계에서 광범위하게 연구된 바 있지만, 정작 바다에서 조선의 선원들이 어떻게 항해하여 안전하게 중국에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연구된 바가 없었다. 이 소고에서는 최부의 「표해록」에 나타난 조선 시대 선원 조직과 항해술에 대해서 상세히 도출해 내고, 조선 영조대의 장한철의 「표해록」과 비교함으로써 두 선박이 상이한 표류 결과를 내게 된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규명해보고자 한다.
        110.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조 말엽 유행한 명현록에 나타나는 명현가의 전국적 현황과 도별 양상, 경상도 지역 명망 문중 및 그 현조에 대해 고찰한 것이다. 명현록은 처음 ‘道學’의 계보에 연결되는 인물을 수록하는 것에서 비롯되었으나, 점차 道學 뿐 만 아니라 忠節이나 여러 방면의 업적으로 현저한 국가적 공헌이 있는 인물로 수록 범위가 확대되고, 이후 각 성관별로 이를 정리, 수록하는 형태로 진전되었 다. 각 성관별 명현을 수록한 명현록은 뒷 시기로 가면서 명현 후손의 세거지와 사승 관계를 명시하는 것이 기록상 중요시 되고, 뒤이어 이를 경상도라는 일정 권역에 한정해서 명현가와 그 현조의 휘·호·본 정도를 간략히 명시 수록하는 경 우로 나타난다. 한편 이 단계에 이르면 명현록에 등재된 인물은 조선조의 수많 은 명현들 가운데 그들의 후손이 동족 마을을 형성하고 있는 인물만을 대상으 로 하게 된다. 전국의 각 성관별 명현의 후손 거주지를 볼 때 서울이 압도적 다수를 점하여 조선조 말엽에 있어서 서울은 여러 명현가의 소굴로 나타나며, 경상도가 타도 에 비해 많은 등재 인물수를 보임이 주목된다. 고을로는 청주, 진주, 양주, 안동, 성주 등의 순으로 등재 인물의 후손 세거지가 많은 것으로 나타나, 명현가가 지 방 행정의 중심지에 비교적 많이 집중되어 있는 점도 주목된다. 경상도 각읍 명현가를 등재 수록한 수종의 명현록을 통해서 특정 성씨 앞에 특정 촌명을 冠하여 ‘○○金氏’와 같이 불리워진 5백 수십여 문중의 존재가 조 선조 말엽 경상도 지역에서 확인되며, 이들 가운데는 200여 내외의 숫자에 달 하는 명망 문중의 존재도 추측된다. 경상도 각읍 가운데 진주는 도내에서 가장 명현가의 수가 많은 고을로 나타나며, 우도가 좌도에 비해 2배나 등재 인물이 많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이들 지역에서 특정의 현조를 중심으로 동성의 씨 족이 결집되는 움직임이 활발하였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본다. 명현록에 등재된 경상도 각읍 명현가의 현조는, 단성 지역을 중심으로 살필 때, 주로 남명학파가 형성되고 당쟁이 전개되던 선조-인조 년간의 시기에 즈음 하여 지역 사회에서 주목되는 활약을 보였던 유명 인사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 들 유명 인사의 후손은 17-18세기에 걸쳐 향권을 지속적으로 장악하는 유력 씨족으로 자리를 잡았고, 이후 19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도 문집을 남기는 인사 를 많이 배출하는 등으로 해서 여전히 명망을 유지하는 씨족으로 나타난다. 이 같은 제조건을 충족하는 유력 씨족이 조선조 말 명현가로 알려져 여러 명현록 에 기록되어 나타나는 바, 이는 비단 단성 지역만이 아니라 경상도내 다른 고을 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본다.
        111.
        2005.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시대의 기생의 기원과 제도, 기생의 역할, 평양기생학교를 통한 기생의 원래의 의미인 전통적인 조선시대의 아티스트(Artist)임을 재조명하고, 기생학교의 제도와 규칙, 교육과정, 수업시간표, 졸업 앨범, 각종 사진첩을 통해서 조선시대의 기생의 역할과 평양기생학교 등의 재조명 및 분석을 통하여 전통적인 문화를 디지털콘텐츠의 창작소재로 발굴하므로 이를 디지털콘텐츠인 게임콘텐츠, 디지털애니메이션, 드라마, 영화화 할 수 있도록 소재화 하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특히, 조선의 기생의 아름다움과 아트적인 재능, 사회제도 및 기생학교 등을 발굴하여 원화기획(컨셉 디자인) 및 디지털시나리오 화하므로 경제성이 강한 문화콘텐츠로 발전시키며, 평양기생학교의 교육시스템, 교육내용, 학생 현황 등을 발굴하여 육성 및 경영시뮬레이션 게임의 제작 컨셉 도출 및 게임제작, 애니메이션 및 TV드라마, 디지털 애니메이션 및 영화 제작의 문화콘텐츠의 창작소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제안한다.
        112.
        2003.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6-17세기 朝鮮은 정치나 학술의 측면만이 아니라 敎育制度 상으로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는 시기이다. 15세기말 전후까지 朝鮮은 官學敎育을 강화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成宗 대까지 각 府, 牧, 郡, 縣 마다 鄕校가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6세기 중반부터 관학의 보완이자 대안인 書院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이전의 교육제도에 일정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본 고는 교육시스템을 중심으로 한 巨視的인 觀點에서 이 시기의 변화 양상과 그 의미를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조선 전기의 교육체제를 구성하는 한 중요한 요소로서 敎育中心圈域에 주목하였다. 교육중심권역이란 都會라는 제도를 통하여 연결되어 있는 각 지역의 중심향교와 인근 향교의 권역을 말한다. 忠南地域의 변화 양상을 분석한 결과, 이 지역은 15세기부터 16세기 전반까지 公州牧과 洪州牧 등 2개의 중심향교를 중심으로 교육권역이 형성되었으나, 16세기 후반부터 공주목 동부(孔巖 및 儒城地域)와 동남부(連山地域)에 새로운 교육중심지가 부상하기 시작하여, 17세기에는 기존의 교육중심권역이 거의 무력화되고, 동부 및 남동부지역으로 교육중심권역이 재편되어 갔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단지 敎育圈域의 變化만이 아니라, 관학교육체제가 지향하는 敎育機會 擴大의 公的 原理가 後退하는 결과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115.
        1992.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농업기술의 일반적인 농법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의 벼 수확법이나, 저장법 또는 조제법도 고대 중국의 기술과 방법을 받아 형성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벼 수확법의 최적시기는 손실을 막기 위해서 적절한 배수를 하므로써 정해진 수확과 조제를 위한 효율적인 농구가 사용되었으며 또한 벼 저장을 위한 특이하고 창조적인 기술이 교육됨으로서 쉽게 익혀졌다. 그것은, 풍우를 막고 좋은 통기조건을 갖게 했다. 15세기, 16세기에 저장보리의 곤충해를 막기위해 물여뀌 처리 그리고 벼낟알의 탈락을 막기위해 수확기 즉시에 벼베기를 하는 것이 장려되었다. 17세기는 창조적인 기술이 없었다. 18세기, 19세기에 포장에서 저장할 때의 쥐에 의한 해를 방제하기 위한 방법들이 제시되었다. 또한 여러 수도 품종들의 생태학과 장기간의 저장기술에 관한 연구들이 지역적으로 수확의 적시를 취하기 위하여, 또한 적시에 협동적으로 일하기 위하여 필순적으로 강조되었다.
        116.
        1992.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도전의 분양법은 세역위양이었던 중국의 고대농법에서와 달리, 이미 우리나라는 여말에 상경화하였으며, 두과작물의 녹비이용법과 함께 분전법의 실현에 앞서 분종법이나 분과법이 순차적으로 진전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15세기에 이르러 직설 의 도전분전법은 재료를 객토류, 초본류, 분류로 확대분화시켰고 초경과 재경 사이에 시비토록 하되 토양조건이 특수한 도전에는 각각 적의한 시비법을 별도를 기술하였다. 또한 묘종법의 도전에서는 분묘처(못자리)와 묘종처(본답)의 시비술로 나누어 전문화시켰고, 개간지에서는 기경작업과 병행시키는 유기물 환원방식이 체계화 되어 있었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직설보 를 통하여 경상도의 속방을 체계화시켜 조도앙기처의 분양술을 완성시켰다. 여기에서 특기할 것은 분회, 요회 및 퇴비제조술과 사용법이었다. 18-19세기에는 황지회복과 수전이모작 확대를 지원하기 위한 지방보강법으로 시비재료를 최대한 확대하고 저분법과 추비법을 강조하였으며, 시비이론과 함께 작업능률을 높이기 위한 수레 이용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이상으로 보아 도전분양에 있어서는 분원재료상의 제약을 타파하고 추비체계를 확립시켰으며, 저분법과 함께 다비의 필요성에 대한 이론과 인식을 새롭게 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왔다.
        117.
        1992.0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도작법은 한도수경법, 만도수경법, 만도건경법 한도(산도)법, 묘종법, 건앙법, (수도)건파농법으로 분화발전하였으며 특히 건앙법과 수도건파농법은 1600년대(경제)와 1800년대 전반(요지)에 우리나라에서 독창적으로 발달한 농법이다. 한도수경법에서는 침종→최아→구조가 중국의→3→3→3 일(계 9일)과 달리 3→적의→적의일(단 침종 3일만 회정)로 신축성있게 체계화하였고 상경전에서의 수확 직후 추경법, 유교분얼과 추비에 대한 인식, 인분 이용, 시회에 의한 출아촉진법이 추가되었고, 3-4회의 정밀한 배수후 제초법과 내풍내한성을 증진키 위한 중간낙수법 및 탈립손실을 막기 위한 즉시예취법과 직조파법의 실현이 우리나라 실정을 고려한 독특한 재배기술이었다. 만도수경법은 적품종선택, 증파에 의한 입묘확보, 강세분얼 유도, 족종법의 적용 등이 중국전래의 기술을 향상 발전시킨 내용이며, 여기에 평안도 속력을 체계화시킨 '수도건파재배법'은 우리선조들이 실현했던 탁월한 한지도작법의 하나로 평가될 수 있다. 한도(산도)재배법은 중국전래의한 농법이지만 족종법과 뿌리 자극법과 뿌리 내재해적 혼작법을 결합시키고 품종론을 적용시켜 독특한 기술로 현실화 시켰다. 표종법(이앙법)은 이미 직설 이전부터도 있었고 그 이점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한발이 잦고 수원이 불충분한 여건하에서의 의외의 흉작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선초부터도 원칙적으로는 금지시켰다. 그러나 수시로 특정수전(물이 항상 있거나 광작농인 경우)에는 허가되었고, 특히 삼남에서는 지속적으로 묘종법이 확대보급되어 선말에는 대부분의 도작이 묘종법으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도 선초부터 선말까지의 묘종법 기술에서는 제초, 분양(추비포함), 물관리, 정조시이앙법 등의 내용변화와 발전이 이룩되었고, 이들을 기초고 하여 농업생산력은 5배에 이르는 증대가 이룩될 수 있었다. 건앙법은 조한만수의 우리나라 도작여건에 맞추어 독특하게 창안발전시킨 도작법의 하나로서 최근의 '육묘대이앙법'으로 확립되기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해 온 기술이다.
        118.
        199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비곡종법은 중국의 범승지서 부터 이미 확립 된 체계가 있어서 우리나라도 대부분 이를 인용하여 따르는 경향이 있었으며, 취종법은 비정상형의 종자를 선별해 버리고 우량종자를 선택하는 방식이었고, 선종법도 중국은 수선법을 따랐으나 우리나라는 풍선→절별→수선법을 창안발전시켰고, 최근에는 염수선이 첨가되었을 뿐, 모두가 완벽한 기술이었다. 종자흡습도 측정법이나 종자의 설즙 및 요분, 골즙처리법 등은 그 근간이 고대중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우리나라의 농서들도 대체로 이를 인용하거나 다소의 가감을 통하여 수용하고 있었으나 이들 기술이 갖는 타당성은 합리성에 비하여 번거롭고 비현실적이며, 이는 우리나라 입지보다 중국의 한지, Alkali토양에서 오히려 수긍도가 높은 기술로 해석된다. 경지는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작업으로서 천지간에 기통하는 때를 기다려 시행한다는 고래 중국의 농업관을 거의 가감없이 선초부터 선말의 농서에까지 인용하고 있었다. 초경, 추경(혹은 춘경), 기경은 깊게하고 재경, 춘경(흑은 하경), 중경은 얕게 하며, 전자는 저수와 정지를 목적으로 하고 후자는 중경제초를 목적으로 하도록 기술분화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전의 세역법에서 와 달리 상경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추경이 권장되고 있었으나 실제로 추경하지는 못하고 있었으며 이런 상황으로부터 시대를 경과하며 우리나라의 기경법은 녹비작물이용법, 엄경법, 분양법, 때에 따라서 건경법 등과 연계시켜 수행토록 종합처리법으로 발전을 이룩하였다. 뿐만 아니라 15세기까지는 새로운 산전과 연안지로의 경지확장을 위한 개간법을 지원하기 위한 농기구로서 윤목사용법이 창안되었고 17-18세기부터는 내외환으로 황무지화한 농경지를 대상으로 우선적으로 노동생산성을 제고시킴으로써 생산력까지 회복시키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하여 중국고대농법인 반종법과 소누법을 재인용 소개하여 왔으나 큰 성과는 불분명하며 드디어 선말에는 이에 대한 현실성을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119.
        1991.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농사직설 단계에서는 품종보다는 품종군 또는 도종류로서의 조만, 치갱유, 또는 몇몇 지방 품종명이 소개되는 정도였으나, 우리나라의 도작기상이 ‘조한만수의’ 특징을 보일 뿐만 아니라 만하의 풍우 때문에 이들 재해를 회피하여 안전수확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였으므로 15세기 이후의 도종발달은 조파조수집에 적응하고 내재해성을 갖는 쪽으로 서서히 진전되어 왔다. 시대경과에 따라 조도, 유망종, 유수색종, 내탈립종, 내풍성종, 내비성종의 분화와 이들의 정유율증대가 이루어져 왔음으로 알 수 있다.
        120.
        1991.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우리나라 고대농업과 기술을 형성하는 데 직접간접으로 기간역할을 해 왔던 고대중국의 도작기술은, 이미 한전농법과 농본관(정신)을 기원전에 완성하였으며, 특히 심경과 정수 및 토양비옥도 유지를 위한 경전법을 중심으로 도작기술이 발전되었고, 따라서 이앙법, 정조식 심종법, 철제농기구 사용, 수리를 위한 피당 축조기술이 앞섰고, 다양한 지역에서 재해를 회피하거나 다양한 용도의 품질공급을 위하여 벼 품종의 분화가 잘이루어져 왔다. 또한 중국농업의 발상지가 화북이었기 때문에 인희지광의 특성에 맞는 조방적 도작기술로서 화경수누법과 세역법이 태동되었고, 한무제와 ‘참위’학자들의 음역오행설이 농업관과 연계되면서 파종이나 작목선택에 대한 기술이 만술적으로 발달한 경향도 있었다. AD 6세기경의 제민요술 부터 14세기의 왕복 농서 에 이르기까지 도작기술은 지속적, 상가적으로 분화발달되어 왔으나 원대 이후에는 정체된 경향이었다. 이 시점에서 우리나라의 여말 농업과 농사직설 시대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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