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대상지인 김천 공자동은 유가의 시조인 성현(聖賢) 공자(孔子)의 존함을 그대로 차용해 이루어진 지명을 갖는 마을이다. 이러한 공자동을 배경으로 하는 구곡시가에 나타난 지명의 물리적 환경과 인간 활동 그리고 그 의미 간의 상호작용의 산물인 마을의 장소성 구명(究明)을 밝히고자 하였다. 이에 따른 분석과 해석을 통해 도출한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지례향교와 도동서원을 중심으로 16~17 세기 선비문화가 발전한 김천 공자동 설동(設洞)의 가장 유력한 설은 조선초 김천 부항면 출신 병마사 이회(李晦)가 자택에 보관하던 공자의 화상(畫像)을 1650~1670년 사이에 경주 이씨·김해 김씨·밀양 박 씨를 본관으로 하는 세 선비가 인근 지례향교로 옮기면서 공자동이라 명명하였다는 것이다. 이후 인근 지역의 지명까지도 공자와 관련된 고사(古事)와 관련된 인물과 행적과 관련지어 명명하면서 유가의 성 현 공자의 소환을 통한 유가의 이상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지명의존과 장소착근 현상이 심화되었다. 둘째, 공자동이 지속적 마을 형성과 발전을 지탱해온 바탕에는 이곳이 지례면과 김천시를 잇는 길목에 있는 교통요충지라는 이점과 더불어 성현의 존함을 차용한 공자동이라는 지명 자체가 마을의 물리적· 정신적 토대이자 주민의 자긍심을 높이는 소속감과 장소애의 본질로 판단된다. 지금도 존재하는 공자 관련 지명은 대항면 대성리의 공자동·창평, 주례리의 주공, 구성면 상거리의 저익촌·백어·명덕·벽계, 구성면 상좌원리의 문도동 등 다수가 존재한다. 셋째, 공자동의 산수경관이 노래된 황남별곡(黃南別 曲), 공자동구곡(孔子洞九曲) 그리고 구곡단가(九曲短歌)는 공자와 관련한 인명과『논어(論語)』의 고사를 통해 공자에 대한 숭모(崇慕)와 득도(得道)의 열망이 표출된 것이다. 지명 공자동(孔子洞), 창평 (昌平), 주공(周公), 안연대(顏淵臺), 백어(伯魚), 명덕(明德), 저익촌(沮溺村), 문도동(問道洞), 상좌원 (上佐院), 모성암(慕聖巖), 자하령(子夏嶺) 등은 특히 성현 공자를 향한 흠앙(欽仰)과 존양(存養)의 장소 로서, 공자와 유가사상이 깃든 장소의존과 장소애착의 산물이다. 넷째, 벽계천(碧溪川)을 중심으로 설 정된 공자동구곡과 구곡단가의 제1곡 모성암을 비롯한 구곡명과 경물 그리고 구곡 바위글씨는 공자 이외에 무이구곡 문화를 실천한 주자(朱子)의 덕행에 대한 흠모를 바탕으로 유가의 실존과 덕행을 따르 고자 했던 흔적이다. 공자동에서 보여지는 지명과 경물에 부여된 의미경관과 실존경관은 궁극적으로 모두 공자와 주자에 대한 흠앙과 존숭(尊崇)을 통해 유가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조선 선비들의 신 념이 표출된 것으로 공자동 장소정체성의 본질이다. 다섯째, 공자동 구곡 일대의 바위글씨 대부분은 제1곡 모성암과 제6곡 안연대에 집중(75.6%)된다는 점에서 해당 장소가 문화경관적 맥락에서 장소적 중요성과 가치를 지님을 확인하였다. 또한, 모성암의 바위글씨는 장소와 관련한 인물에 대한 흠앙과 존숭 그리고 장소에 대한 찬미의 내용을 담고 있는 반면 안연대 바위글씨는 공자의 제자 안연(顏淵)에 대한 추모와 함께 안빈낙도하고 유유자적한 삶의 동경이 강하게 표출됨에 따라 구곡간의 장소성에는 다소의 차이가 발견된다. 공자동 일대의 지명 등은 공자뿐만 아니라 공자의 아들과 제자, 공자가 숭모한 인물 주공 그리고 공자의 정신이 함축된 것일 뿐 아니라 공자동구곡 및 구곡단가를 통해 주자가 무이산 무이구곡에서 실행했던 덕행 또한 오롯이 담겨 있는 유교적 이상세계를 구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공자동을 중심으로 산재한 지명과 경물명 그리고 구곡명은 유가의 시조 공자와 주자 성리학을 숭모하 며, 철저한 유학자적 삶을 추구하고자 했던 조선 선비들의 관념이 장소화 된 공간임을 확인할 수 있다.
본 연구는 중국의 대유럽 공공외교 전략과 그 핵심 요소인 '공자학원' 에 대해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공자학원은 중국이 세계적인 문화외교 활 동의 일환으로 설립했으며, 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중국문화의 영향력 을 확장하려는 목적을 둔다. 공자학원은 중국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빠르게 확산되었다. 2020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 160여 개 국 가에 540개 이상의 공자학원이 설립되었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유럽 지역은 공자학원 중심지로 두각을 나타내었지만, 최근 일부 유럽 지역에 서는 공자학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증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각은 폐쇄 또는 퇴출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움직임의 배경과 원인을 분석하고, 유럽 내 공자학원의 현황을 체계적으로 조사한 다. 이를 통해 유럽에서의 중국 공공외교 전략의 효과와 한계를 평가하 고자 한다.
『논어』는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와 그 제자의 언행을 기록 한 유가 학파의 경전이다. 그 내용의 대강은 공자의 정치사상 과 도덕 관념 및 교육 원칙을 집중적으로 보여준다. 한편, 『논 어』는 중화민족 문화와 지혜의 결정체이다. 그러나 그 속에 내포된 교육적 내용은 창조적 발전과 혁신적 전환을 거쳐 왔 다. 이러한 전통문화를 기반으로 대학생들의 사상문화 교육을 융합시키는 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논어』 에 내포된 ‘인애’ 사상을 연구하는 것은 당대 대학생들의 우수 한 품격을 함양할 것이며, 아울러 우수한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발양시키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본문에서는 ‘인(仁)’이라는 글자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고, ‘인(仁)’자에 대응하는 해석을 정 리하였다. 그리고 『논어』에 내포된 ‘인애’ 사상과 공자 ‘인애’ 사상의 현대적 가치를 분석하였다. 또한 『논어』의 ‘인애’ 사 상과 결합하여 현재의 중국 대학생들의 사상교육에 시사점을 제공하였다. 마지막으로 공자 ‘인애’ 사상이 사상교육에 이입되 는 경로에 관해 연구하였다.
본고는 孔子의 일평생 활동 중에서 敎學思想에 관해 고찰해보고자 한 글이다. 연구 방향은 ‘孔子의 敎學思想’에 관해 탐구하되, ‘敎’와 ‘學’을 따로 구분하여 그 의미를 탐구해보고자 하 였다. 대상은 공자의 언행 및 제자들과의 문답을 기록한 論語로 하였다.
공자가 행한 ‘爲學의 과정’은 ‘爲己之學’ 즉 자신을 위한 학문을 통한 내면의 성찰이 우선시 되었으며, 지속성을 갖춘 학문적 사색의 과정을 동반하였다. 이는 문물에 대한 博學으로 이어 져 학문적 깊이와 외연의 확대로 이어져 갔다. 스스로 배움을 좋아한다고 강조한 공자의 ‘好 學’에는 학문에 대한 篤信과 ‘正道’를 향한 올바른 방향의 정립이 세워져 있었다. 이러한 학문 의 正道는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워서 위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하는 과정으로 들어가서는 人 事와 天理가 터득된 시의 적절한 權道의 구사로 이어졌다.
공자의 가르침은 ‘詩·書·禮·樂’ 외 政事 등 많은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가르침의 대상에는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일반 백성들에게도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가르침의 문호는 모두에 게 개방시켜 놓았으며, 피교육자가 스스로 깨우칠 수 있도록 단계를 밟아가며 인내심을 가지 고 지켜보는 자기계발식 교육을 행하였다. 가르침의 방식에서는 피교육자들의 장점을 잘 드러내어 격려하였으며, 치우친 점은 스스로 보완할 수 있도록 드러내어 일러주었다. 가르침의 방식에서 돋보이는 점은 상대방과의 문답을 통한 대화의 방식이다. 많은 제자들과 여러 나라 의 군주와의 사이에서 이러한 방식을 적용하였다. 즉 공자의 교학사상은 가르침과 배움이 둘 이 아니라 가르침과 배움이 서로 결부되는 하나의 이미지로 조합된 것이다. 이를 통해 궁극 적으로는 스승과 제자가 함께 성장하는 ‘敎學相長’의 실천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民主主義의 핵심은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기록들을 살펴보면, 古代 中 國의 태평성대에는 백성이 지도자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았고, 지도자는 또 백성의 마 음을 자신의 마음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다름 아닌 현대 정치에 있어서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지도자와 백성간의 진정한 소통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런데 지도자와 백성이 서로 소통하는 국면을 이루기 위해서는, 과연 누가 먼저 나서야 할 것인가? 민주주의의 핵심은 나라의 주인인 백성이라는 뜻이고, 민주주의의 이념을 이행하 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지도자가 그러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동양 전통의 사상들 이 이구동성으로 率先垂範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孔子는 지도자의 솔선수 범 이외에 또 하나의 덕목을 요구하고 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常의 변치 않고 初志一貫하 는 태도이다. 그 이유는 비록 지도자가 솔선수범하여 태평성대를 이루더라도, 초지일관의 태 도를 지니지 못하면, 그 태평성대의 국면은 오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진 나라 이전의 중국 문헌에서 발견되는 특징의 하나는 사람들이 상대방과의 대화중에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다. 공자의 언행에 대한 기록이 많은 두 종류의 책이 있는데, 하나는 『논어』이고 다른 하나는 『공자가어』이다. 이 두 종류의 책에서 우리는 거의 100 개가 넘는 『시경』 인용 사례를 볼 수 있다. 공자는 왜 이처럼 많은 대화에서 『시경』을 말했을까. 이 모든 사례의 분석을 통해서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공자는 자기 말 과 자신의 논리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서 『시경』을 인용했다. 둘째, 공자는 자신의 말에 별 의 미 없는 수사적인 효과를 위해서 『시경』을 인용했다. 셋째, 당시 『시경』은 문화적으로 또 문 명적으로 당시 사회의 정신적 결정체였다. 특히 지식인들의 중요한 정신적 공감대이며 문화 적 공통분모였다. 공자는 당시 귀족과 지식인들에게 귀중한 교재였던 『시경』에 깊이 공감했 다. 보수적인 사상을 가졌던 공자는 그렇기 때문에 그런 문명적 권위와 문화적 공통분모인 『시경』에 자신의 논리를 의존했던 것이다.
최술은 이름 없는 선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의 저술 《수사고신록》은 공자 사적 고증의 압권이다. 정확한 고증을 통해 믿을 수 있는 것만 믿겠다는 최술의 집념과 학구적인 태도는 그를 고증학의 대가로 자리매김한 원동력이었으며, 《고신록》과 그 일부인 《수사고신록》은 先秦史와 공자 사적에 얽힌 난제들을 풀어내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최술은 공자의 사적을 변증하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전적의 신뢰도에 천착했다. 그리하여 《사기․공자세가》와 《공자가어》가 공자의 사적을 왜곡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를 중심으로 고증을 진행했기 때문에 汗牛充棟의 전적을 枚擧하지 않고서도 綱擧目張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최술은 《논어》의 編定에 결정적인 역할은 한 張禹의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논어》에도 純雜이 뒤섞일 수밖에 없음을 밝혔으며, 아울러 공자가 纂輯했다고 일컬어지는 《尙書》․《周易》의 일부분 및 《孝經》과 刪詩說 등에 대해 일목요연하게 辨證을 진행했다. 《수사고신록》은 僞書의 牽强附會로 왜곡되고 날조된 성인 공자의 진면목을 복원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으며, 有機的인 體例를 활용하여 고증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이제 그런 최술의 저술을 바탕으로 중국 고대사와 공자 사적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와 검토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다.
중국(취푸)국제공자문화축제는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자인 공자를 기념하는 현대식 축제로 매년 9월 공자탄신일을 전후해 중국 취푸(曲阜)에서 개최된다. 본 논문에서는 우선 중국공자문화축제의 기원 과 초창기, 성장기, 성숙기 등 세 가지 단계별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또한 공자문화축제의 특징과 지위를 설명하고자 한다. 공자문화축제는 공자의 고향에서의 개최에서 비롯되는 대표성, 공자 제례 문화 및 정부 주최에서 비롯되는 엄숙한, 세계적 영향력으로 인한 국제적 축제의 지위, 다양한 활동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컨텐츠 등의 특징을 갖는다. 끝으로 본 논문에서는 중국공자문화축제가 공자의 업적 기념, 공자 제례 문화의 전승, 유학 연구의 발전, 세계 문화 교류 촉진 등의 측면에서 거둔 정신문화적 효과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Two books have recently been published to argue for diametrically opposite views. One is『Gongjaga jugeoya naraga sanda(The Nation will prosper once Confucius dies)』, which argues for the negative impact of Confucianism on the nation's culture. The other is 『Gongjaga salaya naraga sanda(The Nation will prosper once Confucius becomes alive)』, which puts emphasis upon constructive elements in Confucianism. I believe that it does not matter whether Confucius is dead or alive but it matters whether every individual in this nation is with him- or herself. The purpose of this essay is to explain how Confucius taught everyone to be with oneself, especially for political leaders. In Confucius view, everyone could be a political leader once he or she learns the way(Do; 道). The methods by which Confucius brought up political leaders were peculiar in many respects. First, the teacher never sought for the learner but the learner sought for the teacher. The teacher never failed to teach those who came with proper manners(Ye; 道). Second, the teacher never taught those who did not put an effort as well as those who did not ask questions. Third. the teacher taught how to live a righteous life. Fourth, the teacher tried to bring out the best out of the learner. Since each individual's merits differ from the others', answers to a question from different individuals varied. Fifth, the teacher took into consideration the level of the learner. An adult could at times be taught by utterances but at other times by silence. In short, the teacher must be with the learner, a prospective political leader so as not to lose oneself, and guard the learner so as to shine from one's wit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