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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종교개혁 이후 선교에 영향력을 미친 주요 인물들의 선교적 영성을 살펴보고 그 시사점을 찾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하여 초기 경건주의자들, 니콜라스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안들, 그리 고 존 웨슬리(John Wesley)와 알버트 심프슨(Albert B. Simpson)의 선교적 영성을 주로 살펴보았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후 초대교회는 선교부흥을 통하여 지리와 문화의 경계를 넘어 확장되었다. 그 후 선교는 암흑기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17세기 경건주의가 도래하면서 사도들과 제자들을 통하여 초대교회가 보여주었던 영적부흥과 선교부 흥이 다시 점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선교적 영성은 친첸도르프와 모라비안 교도들, 그리고 웨슬리와 심프슨으로 강력한 영향을 주면서 선교적 영성의 흐름을 이어갔다. 경건주의자들과 모라비안교도들의 영성은 신앙고백과 삶의 일치 추구, 도전적인 선교사 파송을 강조하였 다. 웨슬리의 선교적 영성은 성경과 일치된 삶과 기도를 통한 사회변화 를 추구하는 선교를 통하여 영국에 영적부흥을 가져왔다. 심프슨의 영성은 자신이 경험한 사중복음을 선교와 연결시킨 선교적 영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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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2.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동석기는 특이한 이력을 소유한 인물로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노동이민을 가서 성실한 면을 인정받아 공부를 한 후 북감리교회 목사, Christian Church(그리스도의 교회, 유악기) 목사, Church of Christ(그리스도의 교회, 무악기) 전도자(환원운동가), 독립운동가(민족주의자)로 활동하였던 지도자였다.본 연구는 한국교회에 아직도 생소하게 느끼고 있거나 혹 이단은 아닌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정도인 그리스도의 교회운동 즉 환원운동을 소개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시작된 연구이다. 환원운동은 성서로 돌아가자(성서권위회복운동), 초대교회로 돌아가자(원형의 교회 회복운동), 그리스도의 교회로 일치를 이루자(교회일치운동)는 운동을 말한다. 그러나 본 연구가 한 교파를 소개한다는 오해가 있을 수도 있으나 오늘처럼 혼탁한 교파주의와 비성서적 교회들에게는 광야의 외침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동석기의 헌신으로 미국 워싱톤교회 장로회의 결정에 의해 한국에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체계적인 선교를 하였다. 또한 미국 오토크릭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대학교 부지구입비, 건물 건축비, 학교운영비를 부담하도록 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리고 동석기의 환원운동에 매료된 강명석, 강순명, 장성만 같은 인물들이 합류하여 환원운동과 그리스도의 교회를 확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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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12.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Recently, most Christians in Korean have felt shame at watching the status quo of Korean protestantism. Almost everyday, we Christians faced unpleasant news about churches and clergies. At the same time, Christians feel the crisis of church growth and mission. At this moment, it would be significant and meaningful to search for the church reforms in the history of Christianity and to be taught from the past. For this reason, the writer investigated several historical events which caused the church reform consciously or unconsciously. As a result of this research, several types of church reform in the church history could be described as follows. The first case of church reform was accomplished for the purpose of the ecclesiastical and the social change by means of the political struggle. Second, for the purpose of the ecclesiastical and the social change by the revolutionary method. Third, for the purpose of structural subversion by the political struggle. Finally, for the purpose of structural subversion by the revolution. Among these four, because the second type of reform is illogical, the writer would consider the others. The rest of three cases of reform, however, whether it would be successful or not, had the limitation that could not have accomplished the fundamental reform of problems in their own era. For this, the writer has looked for the another way which was named as the fifth way of reformation and the writer considered it as true church reform. Also, it was regarded a genuine church reform as the most effective way of mission. As the fifth way of reform in the church history, the writer analyzed three historical events: the way of St. Francis and his mendicant movement in the twelfth century; the way of religious movement of Beguine in the thirteenth century; and the way of methodist movement of John Wesley in the eighteenth century. The characteristics of these movement would be as follows. First of all, these movements did not happen to struggle or criticize the existing church power and social structure directly. Secondly, even though there were leading persons in these movements, these movements were empowered by the anonymous laities. Thirdly, the participants of these movements proliferated and flourished very rapid within very limited times. Finally, They were so creative that they created new idea, theology, philosophy, and life styles. In conclusion, the writer proposed the fifth way as the ideal both for church reform and growth simultaneously. Through the fifth way, the people who are sick and tired to churches and protestantism in Korea might come into the world of hope, new spirituality, and creative life that they have never felt in the existing ecclesiastical structure. Then, new Christian communities will proliferate such as the above creative religious mov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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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11.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현필은 호남의 그리스도교 신비주의자요 성자로 알려진 이세종, 최흥종, 강순명의 영향을 입고 ‘예수를 잘 믿기 위한 순수 신앙 운동’을 위해 수도원 공동체를 한국에 최초로 설립한 그리스도교 수도원운동의 선구자이다. 그가 설립한 동광원은 ‘예수를 닮아 예수처럼 살아보자’는 순수 신앙운동을 하는 공동체로서 어느 교파에도 소속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제자들이 자신을 우상화 하면서 고기와 약을 먹지 않는 자신의 행위를 동광원의 계율로 만들어 율법이 되어버린 일이 발생하였다. 이에 예수보다 자신이 높아진 역적이라고 선언하면서 스스로 생선국물을 마시고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음으로 예수의 보혈만이 구원을 가져온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면서 율법주의에서 벗어나는 길을 제시해 준 지도자였다. 이렇게 살았던 이현필을 당시 한국교회는 이단이라고 정죄하였는데, 그 근거는 그의 강론을 들은 교인들이 교회를 이탈하므로 교세가 약해지자 목회자들이 퍼트린 유언비어에 기인한다. 즉 성서적인 문제가 아닌 기득권 세력의 횡포, 당시 교회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신비주의 영성과 철저한 금욕주의적인 삶, 호남 신비주의 선구자인 이세종의 제자라는 이유 때문에 비주류 세력으로 보는 오해 때문이었다. 끝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현필의 순수 신앙운동은 한국교회사 특히 호남교회사에서 소홀히 다룰 수 없는 중요한 운동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개혁과 갱신의 방향을 이현필의 교회관, 순수 신앙운동의 정신, 더 나아가 그의 신비주의 영성에서 찾아야 초대교회와 같은 순수성을 회복 할 수 있다고 제언하고 싶다. 특히 이현필의 순수 신앙운동의 정신인 ‘예수를 닮아 예수처럼 살자’는 주장은 한국교회에 ‘제자도’를 소개한 옥한흠의 제자훈련 모토와 맥을 같이한다고 보면서 이 부분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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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22.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목회는 목회자, 회중, 목회사역의 삼대 요소로 이뤄진 삼각구도를 통해 수행된다. 목회에 있어서 이 세 가지는 어느 것 하나 빼놓을 수 없는 중요 한 것들이다. 그런데 그동안 목회론(혹은 목회신학)은 전반적으로 볼 때, 주로 목회자 혹은 목회사역에 집중해왔다. 그 결과 목회론에서 회중은 상 대적으로 관심을 제대로 받아오지 못했고, 따라서 목회자론과 목회사역론 에 비해서 회중을 논하는 ‘회중론’(필자의 조어)이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한편 오늘날 신학 특히 교회론과 선교론은 급변하고 있고, 이런 변화 가운 데 회중에 대한 강조를 빼놓을 수 없다. 본 논문은 바로 이런 학문적 요구에 응답하고자 한다. 이를 위하여 본 논문은 한편으로 교회사에서 회중론의 유산을 간추려보고자 한다. 다른 한 편으로 본 논문은 최근 신학 특히 교회론과 선교론에서 회중을 강조하는 담론들을 살펴보면서, 그것들이 목회론 특히 회중론에 대해 지니는 함의를 간추려보고자 한다. 교회사 가운데 평신도의 중요성은 간헐적으로 강조되 어왔고 대표적인 것은 종교개혁이지만, 본격적으로 신학적 조명을 받게 된 것은 20세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관련 신학은 평신도 신학, 하나님의 백성 신학, 회중 신학 등이다.
        6.
        2020.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한국교회사학회지」에 수록된 아시아교회사와 관련된 논문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창간호부터 53권까지 총 425편의 연구논문 중 7.3%인 31편이 아시아교회사와 관련되는데, 여기에는 한국교회사와 관련 된 6편의 논문도 포함되어 있다. 아시아교회사를 시리아교회, 가톨릭교회, 개신교회로 분류할 때, 상대적으로 아시아 가톨릭교회와 관련된 논문이 매우 적었다(2편). 또한 중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고대시리아교회와 관련된 논문 2편과 필리핀과 버마와 캄보디아에 대한 논문이 3편만 수록되어 아시아 각 지역의 교회사 연구는 매우 미진하다. 그럼에도 2011년까지의 국내에서의 아시아 교회사 연구를 정리한 논문이 수록된 것은 획기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결론에서 본고는 아시아교회사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아시아기독교사학회의 협력, 한중일 삼국의 개신교 수용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 문명교류의 입장에서 총체적이고 다면적인 아시아 교회사 연구, 한국 교회의 아시아 선교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사료 수집을 제안하였다.
        7.
        2020.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창간호부터 2019년까지 「한국교회사학회지」에 수록된 한국기 독교의 역사 연구 논문들에 대한 분석적 연구이다. 「한국교회사학회지」는 해방 후 최초로 발간된 한국의 교회사 학술 연구 논문집이다. 이 기간 동안 135편의 한국교회사 연구 논문이 수록되었다. 이 글은 그 연구 논문들을 분류하여 인물 연구, 사회사, 사상사, 교단사, 문화사 등의 범주로 분류 하였다. 초창기 연구들은 한국교회사의 기초를 위한 연구들이 이루어졌다. 1990년대 이후 연구 논문들의 수가 빠르게 증가하였다. 2000년 이후의 논문들은 체제의 완성도가 높아지고 연구 분야도 다양해졌다. 2010년대의 연구 논문들은 논문 심사의 강화로 논문들의 체제와 논문의 주제들이 더욱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연구 분야는 인물 연구와 사회사 논문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신학사상, 문화사 연구들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후의 연구에서는 통계자료의 도입과 타 분야와 복합적 연구가 필요하다.
        8.
        2020.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근, 현대교회사에 해당하는 시기에 새로운 신학사 상체계가 수립되고 새로운 교회체제인 교파(교단)제도가 출현하게 되었다. 루터교, 성공회, 개혁교회, 침례교, 급진종교개혁세력등으로 대표되는 개신교는 저마다 교단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여러 신앙고백과 신학체계를 확립했고 교단의 운영체제인 감독정체, 장로정체, 회중정체등도 각 교파가 처한 여건과 상황속에서 발전시켜 나갔다. 한국교회사학회 창간이후, 지난 50년 동안 학회지에 실렸던 72편의 논문들은 각 교단 관련 신학과 교회정체, 그리고 일반적인 주제들(교회일치운동 포함)을 다루었다. 하지만 특정 주제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했으며 이에 주제의 다양성 확보와 보다 다양한 교단참여와 적절한 성비 비율을 위한 대책이 시급해 보였다.
        9.
        2020.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979년 6월 창간호부터 2019년 8월까지 「한국교회사학회지」에는 40편의 근대교회사 분야 논문이 실려 있다. 그 40편 가운데 경건주의와 관련된 연구가 15편으로 근대교회사 연구의 38%를 차지하고, 웨슬리와 관련된 연구는 18편으로 45%나 된다. 본 연구는 “「한국교회사학회지」에 실린 경건 주의와 웨슬리 연구를 통해 학회지의 근대교회사 연구를 분석 평가하였다. 경건주의 연구논문들은 대부분 개혁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와 목회자들의 타락과 교회개혁에 대한 열망이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개 신교의 타락을 통렬히 비판하며 등장했던 경건주의에 대해 신학자들이 관심을 갖도록 이끌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웨슬리 연구는 웨슬리안 교단 연구자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어 왔으며, 그 주제도 다양하게 연구되어왔다. 전체적으로 평가해 보면, 그간의 본 학회지 근대교회사 분야는 너무 특정 분야와 지역에 연구가 쏠려 있다. 근대교회사 내에서 보다 다양한 지역과 다양한 분야와 주제를 다루는 연구들을 통해 학문의 균형 있는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경건주의 연구에 있어서도 교회개혁뿐 아니라 예배, 성례, 소그룹과 평신도 중심의 교회 조직 등 목회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연구가 많아져야 한다. 무엇보다 그간의 연구가 지나치게 남성만을 대상으로 연구해 왔다는 점은 문제이다. 가용한 자원 안에서라도 여성들을 재발견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10.
        2020.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한국교회사학회지」에 게재된 16세기 교회사 관련 논문 78편 을 분석하고 평가했다. 1979년 창간호부터 가장 최근인 2019년 8월까지 모두 53권이 발간되었다. 이 53권에는 모두 425편의 논문이 실려 있는데, 16 세기 교회사 관련 논문이 78편으로 18.35%에 해당한다. 이 78편의 논문은 모두 16세기 프로테스탄트 개혁을 다루고 있으며, 대부분 그 핵심 인물 몇 몇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루터 관련 연구가 43편이고 칼뱅 관련 연구가 15편이다. 이러한 연구 현황을 살펴보고 나서 본 논문은 16세기 교회사와 관련된 연구 영역이 크게 확장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향후 연구를 위한 방향을 제시했다.
        11.
        2020.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한국교회사학회지』에 게재된 논문들을 대상으로 중세교회사 연구 40년사를 결산하고 향후 연구과제와 방향을 전망해 보려는 시도이다. 본고에서 중세교회사 범위에 포함시킨 연대는 통상적으로 ‘중세 천년’이라 일컬어지는 500년에서 1500년대이다. 학회지에 발표된 이 시기에 관한 논문 34편을 대상으로 양적 지표와 주제별 연구 현황과 추이를 살펴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국내에서 황무지와 같았던 서양 중세 연구 분야에 용기 있게 도전한 연구자들이 라틴어와 자료접근의 어려움과 같은 열악한 연구 조건을 딛고 발표한 논문의 질은 그동안 국내 연구역량의 강화와 함께 점차 발전해 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본고에서 분석한 34편의 논문에서 다루어진 주제는 다양하고 풍부한 중세교회사 주제에 비춰볼 때 매우 협소하다. 따라서 연구자층과 연구 지평의 확대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12.
        2020.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한국교회사학회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한국교회사학회지」 특집호(55집)에 고대교회사 연구동향 분석과 미래전망에 대해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짐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한다. 본고는 전체 420여 편의 전체 논문 중 77편의 고대교회사 논문을 다루었다. 포스트모던적 사조와 신학적 배경으로 크게 4개의 범주(역사관, 주제, 방법론, 저자)로 나누어 논문들의 성향과 내용을 분석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는 근대적 사고에서 탈피하고 지배담론이나 거대 담론의 해체를 주장하면서 소위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추구한다고 하겠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소외되고 주목 받지 못했던 약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들이 역사 연구의 중심주제로 떠오르고 있다. 탈가부장적, 탈유럽적, 탈교리적, 탈교파적, 탈제도적 사고가 주가 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고로 역사 연구에 다양한 방법론이 시도되고 다양한 접근이 이루고 지고 있다. 물론 전통적인 주제들을 다루는 연구도 활발하게 역사 연구에 기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본 학회의 발전과 학문적 공헌을 위해 학제간 학회나 연구 등 프로그램을 발전시켜 나갈 필요가 있다고 제안하였다. 역사가 신학, 영성, 상담, 윤리, 예배 등과 어우러 질 때 교회 현장은 물론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와 함께 소통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수 있기 위해 노력해야하기 때문이다.
        13.
        2020.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966년 시작된 한국교회사학회가 1999년까지 이룩한 역사를 성장과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 있다. 전체적으로 육하원칙의 틀에 따른 보고의 형식을 따르면서, 우선 창립시기의 인물과 학회의 활동을 시간 순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학회가 하였던 일들을 민경배 교수의 언급에 따라, 연구발표회, 자료집 발행, 학회지 간행 등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이를 위해 어떻게 학회의 재정이 모이고 지출되었는지를 점검 하고 있다. 아울러 이 글은 연구과정에서 제기한 논의 틀로 재구성한 몇 개의 표를 포함하고 있다. 본 연구는 한국교회사학회의 초기의 성장과 발전은 한국에서 교회역사 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학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을 지적한다. 초대 회장 백낙준 교수를 비롯한 이들의 헌신을 통하여 기초가 놓이고, 그 뒤를 잇는 후배와 제자들에 의해 기둥과 외양을 갖추게 되었다. 회원, 임원, 그리고 재정은 꾸준히 증가하였고, 이를 통해 연구발표회, 자료집 발간, 학회지 간행 등의 사업은 분명한 틀과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우선, 이 시기 한국교회사학회의 발전을 더 세밀하고 깊이 연구하기 위하여, 회원들이 개인적으로 보관하고 있는 자료를 수집하여 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 초기 한국교회사학회는 교단적인 신학적 편협성을 뛰어넘는 에큐메니컬 모임으로서의 특성을 보며, 한국사회의 민주화, 평화, 통일의 문제에 관심을 학문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회원 각자의 학문적인 관심과 연구, 그 이상으로 회원들간의 교제가 중심에 있었다.
        14.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MCC)는 1951년에서 1971년까지 한국에서 구제와 교육 사역을 해 왔다.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는 1920년 조직된 이후 전 세계의 분쟁지역 사람들을 구제하기 시작하였고, 다양한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의 구제사역을 펼쳐왔다. 그들이 하는 일은 농업, 물공급, 집 짓기, 보건, 직업 창조, 평화 세우기, 교육 등이다. 이런 활동과 함께 그들은 전 세계의 수많은 다양한 기구들을 파트너로 삼아 지원하고 있다. 그들은 ‘메시야의 평화 선교’ 정책에 기초하여,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인 모든 차원에 대해 관심을 가져왔다.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는 한국전쟁 중인 1951년부터 한국과 관계를 시작했다. 휴전 직후인 1953년 7월에는 한국대표부를 대구에 설립하고 경산에 농장을 개발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한국 활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 네 가지는, 물자구제 사업, 직업학교, 가족/어린이 지원 프로그램, 전쟁 과부들을 위한 재봉기술 교육 등이다.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의 사역은 제자도에 기초하여 공동체 안에 평화를 세우는 일이었다. 이 사역의 구체적인 모습이 개인과 가정과 마을과 한 국가에 대한 구제와 개발이고, 구제와 개발이 지향하는 바는 평화인 것이다. 이 구제사역은 곧 평화를 주고 나누고 세우는 사역이었다. 구제사역과 평화사역은 서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한국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는 인간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종교적 모든 욕구를 포괄하는 선교인 ‘메시야의 평화 선교’에 근거해서 한국전쟁 시기 한국에서 그들의 평화사역을 시작하였다. 진정한 평화는 ‘일용할 양식’과 ‘공동체’가 그 기초이다. 그들은 신앙교육은 하되 교파교육은 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를 설립하려는 사람들을 지원했다. 그러나 메노나이트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앞서 들어온 한국의 교회들을 존중했고, 한국교회들이 놓치고 있는 부분들을 묵묵히 감당해 주었다. 그들은 한국교회를 섬겨 준 것이다.
        16.
        201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paper will be focused on a methodological position of the historical materials. According to the results of the current researches, man has dealt with this question in two directions as the following: the perspectives of historical theology and church history. However, this resolution makes to put each of the disciplines in a intermediate position between these two extremes, or at best in one of the two. Now, for the raised question, psychoanalytical elements should be considered in the whole process of the reconstructing historical fact, because these have been involved in every of the four steps from happening of historical events to reconstruction of the historical realty. The interpretation of the historical materials needs the so-called “paradigm shift” of the methodology. Finally, this will allow to go beyond the limits of the deficiency of the historical materials.
        17.
        201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In 1916 had come Dr. Frank W. Scofield as a Medical Professor at the Severance Medical College in Korea. In 1958 after the reacquisition of independence he visited Korea again but as a state guest, and then acquired the Korean citizenship. His love of Korea and the Korean People has been same now and then. His life as such can be evaluated with threefold frame of reference from Korean Church History. First, he was a Christian man of nationalistic movement for the Korean independence. He contributed for enhancing it in publicizing throughout the whole world the real features of the movement by means of the pictures which he had taken at the very spots of the March-First Independence Movement at the request of Kap-Sung Lee, one of the 33 national representatives. Besides, he visited and took care of many Koreans who had been suffered from severe punishment because of joining it. During this time he heard fact of Japanese putting Koreans to the brutal and barbarous tortures, which caused him to call out for stopping such things to the Japanese authority. It was very meaningful in relation with the movement that he visited the place of massacre at Chaiamm-ni during this time and reported its misery to the whole world, and that he aroused global interest in the Korean independence. He was banished from Korea under the pressure of Japanese regime because of his support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Second, he was a church reformer who succeeded the spirit of the Independence Movement. Dr. Scofield saw a real state of the Korean Church. He hoped that she should return to and stay all the time in the spirit of the movement. He diagnosed her as corrupted in an article with the title ‘Korean Church, Yesterday and Today’ in <Christianity Thought>printed in March 1961. According to Dr. Scofield, the Korean Church, 40 years ago, was devoted to the Bible-study and was alive with a self-sacrificing spirit. But she at that time became secularized and lost power of sanctification. Dr. Scofield emphasized on the fact that she should restore the spirit of the March-First Independence Movement 40 years ago. Third, he has been a medical missionary and educator who accomplishes his mission at his own expense. At the first time, he had come to Korea as a missionary of the Canadian Presbyterian Church, but after reacquisition of the Independence he discarded relationship with any other foreign missionary societies. Though in such a status, he accomplished his mission with self support. Along with the main job of teaching at universities, he grouped young students and led them in the Bible study for hoping them to become future leaders of Korea. Also, he supported regularly social welfare organizations and provided the poor students with scholarship, so that they could complete their education. While he himself lived a thrift way of life, he practiced completely non-possessive life style for the sake of his neighbors. It was faithful living up to his conviction on the Christian value as such that made him fulfilled a admirable life. In short, his whole life manifested a true way of sharing, caring, and praying. His direct involvement in the Korean Independence Movement and missionary works is so marvelous as to one human being. However, the Korean Church has been neglecting in the right evaluation. As for me the only reason for that is due to his independent missionary works as of lay person outside of any denominational relation. Now, it is the urgent task that the Korean Church is to explore his life and thought, and to apply them to herself.
        18.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is a study on the curriculum of church history of the Korean Presbyterian Seminary from 1901 to 1935. The Korean Presbyterian Seminary was established in 1901. The seminary was built for the spread of the gospel not for the research of theology. W. L. Swallen was one of the founders of the seminary and he wrote the first textbook of church history in the Korean language in 1913. The book was entitled Kyohoisaki (敎會史記) : the Book of Church History. The editorial system of the Kyohoisaki was a dictionary of history. The theological foundation of the book was evangelical. A new text of church history of Presbyterian Seminary was published in the 1930’s. The new text’s theological foundation was evangelical, the same as Swallen’s text. But the level of study of church history was developed further. The new text included the advanced objectivity of historical description, methodology of history and the system of editing. The Presbyterian seminary could offer the academical curriculum of the church history in the 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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