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코로나 이후, 한국교회의 전도와 선교가 정체와 침체를 맞이하였다. 4차산업혁명과 포스트코로나시대에 한국교회가 붙잡고 가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영혼구 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영혼구원에 전 생애를 바친 김홍도의 설교, 목회, 사역과 신학이 한국교회와 선교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 논문은 구령열에 대한 선교학적 관점을 김홍도의 구령열이 담긴 「불기둥」을 중심으로 작성하였음을 밝힌다. 더욱이 연구자는 김홍도가 한국교회와 세계선교에 미친 영향을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살리는 ‘구령열’ ‘영혼구원과 복음전도’에 대한 선교학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김홍도의 영혼구원과 사회봉사와 사회에 대한 공공성 의 통전적인 선교에 대한 평가와 과제를 평가하고 논의하고자 한다. 그리고 김홍도를 통한 한국교회의 복음전도와 사회봉사의 통전적 선교 를 논의하고, 전망하고자 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방향성을 찾는 한국교회와 목회자에게 김홍도의 삶은 간결하지만 명확한 길을 제시해 준다. 교회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교회는 위기 상황 속에서도 말씀과 기도 안에서 해법을 찾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설정을 통해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며 성장했 듯이 이제 우리도 헌신의 원리들을 기억하며 다시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 며 영성의 삶을 회복하고 성령충만함 가운데 복음전도와 선교사역을 감당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과 세상에 나누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복음전도와 영적훈련이 헌신의 결과로 이어질 때 그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음을 강조한다. 오늘날 영적 갱신에 대한 필요는 깨닫고 있으나 그 과정에서 헌신과 노력을 게을리하는 현대 크리스천에게 김홍도는 헌신의 삶의 모습을 재조명한다.
선교적인 관점에서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 구세군 창시자인 윌리엄 부츠, 그리고 독일의 디아코니아를 통한 사회개혁의 핵심적인 인물로서 비헤른 목사 등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많이 알려졌 고, 이들에 관한 연구는 많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대단한 선교적 영향력을 행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또한 영국과 유럽교회에 큰 도전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찰머즈(Thomas Chalmers, 1780-1847)목사의 근린운동(Neighbourhood Movement)은 선교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의 업적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찰머즈 목사의 근린운동은 교회가 디아코니아적 선교사 역을 감당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정책적 지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이 논문에서는 찰머즈 목사의 성장배경 과 그가 전개한 근린운동의 배경, 그리고 근린운동의 정책과 방향성뿐 만 아니라 그 근린운동을 통한 결과 및 영향성에 대하여 고찰함으로써 효과적인 디아코니아 선교사역을 위한 시사점을 제공하려고 한다.
삼척의 이사부 축제는 지역적 연고가 있던 이사부라는 역사인물을 현대의 축제의 소재로 활용함으로써 대내적으로는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임을 부각시켰으며, 대외적으로는 독도를 비롯한 영토수호의 역사인물임을 드러냄으로써 범지역적 축제로 확산시키는 효과를 창출해 내었다. 이 연구의 결과 다음과 같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었다. 첫째, 우륵의 12기에 나타난 사자연행과 이사부의 목사자 전투는 진흥왕 이전 신라사회에 사자문화의 유입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신라의 통용된 사자연행예술은 전쟁에서 강력한 무기로 존재했다. 따라서 이사부가 우산국 정벌에서 사용한 목사자는 당대에 신라에 유통된 외래문화였으며, 이후 사자는 여러 연행예술로 발전된 것이다. 둘째,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에서는 사자탈과 같은 이동형 목각양식이 이용되었다. 이것은 이사부의 해군부대가 우산국 전투에서 목사자의 전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근거리에 접근하여야 했기 때문에, 고정형 목각양식으로는 우산국 사람들을 속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사부의 목사자는 고정형 목각양식이 아니라, 탈과 같은 이동형 목각양식을 추구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이사부는 삼척 강릉지방의 지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과거 강릉단오제에 모셔졌을 뿐만 아니라 현재 삼척 오분동 마을에서도 모셔지고 있다. 이렇듯 1500년 전 역사인물 이사부는 지금까지 삼척 지역에서 신격화 되어 숭앙받는 역사적 인물인 것이다. 따라서 이사부 축제는 삼척 지역의 지역사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는 축제의 이념적기반 위에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넷째, 삼척시는 이사부 축제를 국가의 외교문제와 연관시킴으로써 국가와 연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하였다.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은 울릉도를 생활권으로 하고 있는 독도를 포함하는 것으로서 2005년 일본의 다케시마(독도)의 날 재정으로 고조된 한일 외교문제와 연관된다. 따라서 삼척시는 축제에서 이사부의 소재를 독도 및 해양에 확장시킴으로써 축제향유 계층을 국민으로 확장시켰으며, 더불어 국가차원의 지원 계기를 마련함으로써 축제의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이렇듯 삼척시의 이사부 축제는 기존의 지역 역사인물을 발굴하여 연결시킨 결과물이다. 이 과정에서 투영된 자치단체의 축제화는 이사부를 포장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지역 경제 활성화라는 취지 아래 다양한 국가사업과 연계함으로써 지역의 문화기반을 마련하게 된 모범 사례라 할 수 있다.
본고는 우원 이호빈목사의 전기적 바탕에서 그가 한 평생 추구한 예수 살기 공동체운동을 역사적으로 검토하고, 오늘 위기 상황에 있는 한국교회에 어떠한 개혁적 대안을 제시하는가 하는 점을 논구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우원 이호빈목사의 한 생애는 그의 가족 경험과 신학의 시절 공동체생활(communal life)을 기초한 예수 공동체영성에 있다. 그의 영성은 교회 개혁을 위한 예수 교회운동으로, 그리고 교회와 사회 개혁을 위한 중안 신학교 설립 운동으로, 마지막에 교회와 사회, 세계의 개혁을 위한 흘리에 자연 공동체운동으로 확대되고 발전하였다. 우원의 삶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곧 예수와 함께 혈연을 넘어선 새로운 가족 공동체로서 예수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었다. 운동은 일회적일 수 없다. 우원은 부단히 예수 공동체형성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에 대해 후학들이 무엇이라 평가하든지 그는 예수 공동체운동을 한국 교회 역사 속에서 일관되게 꾸준히 추진한 실천가요, 영성가이다.
이 글은 우원 이호빈 목사(友園李浩彬, 1898-1998)의 독립운동과 토착적 신앙운동으로서 예수교회운동을 창조적으로 해석하여 인류보편사적이고 민족사적이고 한국교회사적인 맥락과 의미를 밝히려는 작업을 시도했다. 우원의 기독교 복음에 바탕을 둔 새로운 생명운동과 평화운동은 근대 제국주의와 서구적인 근대 기독교 패러다임을 넘어선 지평에서 주체적인 한국기독교인의 삶의 세계를 열어냈다. 이것을 선교사들의 ‘서도서기 패러다임’과 초기 한국기독교의 주체적인 입장인 ‘대도대기 패러다임’을 넘어선 ‘한도한기 패러다임’으로 파악했다.
In the 1930s, new theologians who studied abroad, due to Japan’s cultural policy of the 1920s, wanted to recognize the Bible and theology of their own subjective opinion, and get out of the fundamental conversation of theology of the early Western missionaries. It caused a debate between Conservative and Progressive theology in the early churches in Korea. Through the “Hypothesis of Moses Copyright negation” and “Problem of the Interpretation of Women’s Rights”, which were condemned issues by Presbyterians in 1934, and also the “Abingdon Bible Commentary Incident in 1935”; early Korean church leaders, pastors, and even missionaries, who were educated by Conservative western missionaries, judged the change of the new theologians’ view. Pastor Sun Joo Kil, a leader of the “Pyong Yang Revival Movement” which was initiated by Missionary Hady in 1907, held his Bible crusades, and his successful spiritual revival movement kept until 1910. After him, Pastor Ik Doo Kim started the Healing Crusade, as a new step of the spiritual revival movement in 1920. There was also another man who wanted to revive the Korean church, based on the contemporary churches. He tried to reform the churches, not to be conservative but to be focused on spiritual approaches. His name was pastor Yong Do Lee. Unfortunately, Pastor Yong Do Lee’s Shimuyan, works were only recorded for five years from 1928 to 1933. He died when he was only 33. In spite of his short life, the Korean Churches were influenced greatly and changed by him. He was also thought as an enthusiastic and mystic theologian, and also even a preacher who had the element of heresy. The main theme of this thesis focuses on the renewal missions of today's Korean Churches based on Pastor Yong Do Lee’s works for renovating them. This research guides and provides the material to find out a certain way to build up the revival of the Korean Churches’ growth and advance.
Rev. Kil Sŏn-chu was amongst the first generation of indigenous Protestant Christian leaders. In 1897 he was converted to Christianity at the age of 29 and served as a lay Christian leader while he took a course of study intended for native local preachers. In 1907 he was ordained as a pastor and began preaching in the Changdaehyŏn Church, the central church in P’yŏngyang. In Korea, until recently he is known as the evangelistic pastor who stuck to saving soul and was indifferent to the national issues like Korean independence and cultural changes. In this paper I try to show that Kil Sŏn-chu was not only a devout evangelistic pastor but also was concerned with issues related to Korean independence and cultural changes. This study is divided into the five sections. Following the introduction, the second section gives a historical overview of Korean society at the time in which Kil Sŏn-chu lived, and offers his vitae. The third section deals with the ways that he was conscious of the Korean nation and expressed his willingness to devote himself to the Korean nation in his political and cultural activities. The fourth section traces the motives behind the development of eschatological worldview or faith by Kil Sŏn-chu and thereby explains the way his patriotic concern with the Korean nation was reflected in his eschatological faith. In Kil Sŏn-chu’s life there are shown three different aspects inthree subsequent periods. The first period is from his conversion to Christianity to before his decision to save his soul. He identified the Korean nation as people bound together by a shared history and state. He was engaged in political activities for Korean independence. The second period is from the decision to save his soul to before he was in prison. He was interested in the cultural elementsof the Korean nation. He considered culture as the means for the Korean nation to survive or exist further in this world. The third period is from his release from prison to his death. In his Eschatology, he developed his own concept of eschatology and propagated the gospel of Jesus’ coming being followed by the millennial and eternal world.
이 연구는 한국 도시산업선교운동의 선구자 조지송의 생애, 산업선교정 책, 그의 노동자선교 신학 사상을 고찰하고, 그의 활동이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 안에서 어떻게 보편성을 획득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조지송은 보수 적 친미 반공적인 신앙을 가지고 남한에 온 피난민이었다. 그는 산업전도 를 하면서 산업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비인간적으로 저임금과 장시간 노 동에 시달리는 노동자의 현실을 발견했고, 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선교 정책을 네 단계로 발전시켰다. 1 회사 사주와 협력하는 노동자 전도 2. 훈 련된 평신도를 통한 공장 전도 3. 노동조합을 통한 노동자 선교 4. 소그룹 안에서 여성 노동자의 의식화와 주체성 회복을 통해 산업현실을 개혁하는 산업선교. 조지송은 노동자 기독론과 노동조합 교회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변화된 노동자의 성숙한 인격과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되는 헌신성에서 희망 와 용기를 발견했다. 독재정권과 비윤리적 기업과 협조해서 산업선교를 탄 압하는 제도교회를 거짓교회로 보았다. WCC와 CCA는 한국의 도시산업선 교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그것은 한국의 도시산업선교운동이 세계교회 와 인류 노동사회를 향해 보편적인 희망을 제공하였기 때문이다.
이 연구는 강두송 목사의 글 “婦人問題”을 중심으로 1920년대 초 그의 여성인권 신장에 관한 관점을 고찰하고 현재적 함의와 교훈을 살펴보려는데 목적을 둔다. 그는 고린도전서 11장 2절부터 16절까지를 본문 말씀으로 설정하여 이 글을 작성했으며 1922년 일본강점기에 출판된 『宗敎界諸名 士講演集』에 게재되어 있다. 강두송의 글 “婦人問題”에 나타난 여성인권에 대한 성경적 관점들과 그 현재적 함의에 부각된 주요 논지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고린도전서 11장 2절부터 16절 말씀에 대한 그의 사적인 분석을 다루었다. 그는 이 본문에 기초하여 남녀의 인권과 인격의 동등성, 사도 바울의 고린도 여성 성도들을 향한 엄격한 훈계, 시대적 관례 순응과 온건한 개혁추진 등을 제시하고 있다. 둘째, 가정에서의 남편과 아내의 차별대우, 가혹한 오이코스(οἶκος)의 울 타리 철폐, 동등한 교육기회의 부여, 퇴폐문화 퇴치 등에 관한 담론을 살펴 보았다.
이 글의 목적은 인명진 목사의 정치참여 활동을 11번으로 구분해서 분 석했고 끝으로 그 정치참여의 신학적 근거를 검토했다. 인명진은 1970년대 산업선교를 통해 노동자 인권과 권익을 대변했고 네차례 감옥 생활을 했 다. 1980년대 인명진은 강제 추방되고 외국에서 다양한 혁명 사례를 분석 했고, 정치 혁명이 아닌 신앙에 근거한 인간 변화의 공동체 운동을 대안으 로 생각하게 됐다. 1982~84년 한국사회의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은 극좌로 이념화되어 인명진의 사상은 개량주의로 비판받는다. 1986 그는 민주화운 동 국민운동 본부 대변인으로 활동하면서 정치지도자 김영삼과 가까운 관 계를 맺고 그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다. 이것이 훗날 보수 정당과 친분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됐다. 김영삼 정권하에서 그는 목사의 정체성을 지키면 서 행정개혁과 KBS 이사직에 참여했다. 2006년 보수 정당 한나라당이 부 정부패로 위기에 처했을 때 윤리위원장직을 맡아 부패한 정치인을 징계하 는 개혁에 참여했으나 정치구조를 바꿀 수 없는 한계를 경험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된 이후 새누리당에서 97일 동안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탄핵을 수용하고 대국민 사과를 했고, 헌정질서를 따라 당에서 대통 령 후보를 배출하고 그 직을 사임했다. 그는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큰 비 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활동을 기독교 목회의 사회적 책임으로 여겼고, 죄인의 친구가 되어야 하며, 교회는 보수 진보를 떠나 소금 역할을 해야 한다는 신학적 주장을 했다. 한국교회사와 정치사에서 진보적 사회운 동을 했던 목사가 보수 정당을 대표해서 비상대책활동을 한 것은 아주 특 이한 정치참여 경험이다.
이 연구는 한석원(韓錫源) 목사의 “責任의 自覺”(1922)과 이 글이 갖는 현재적 함의를 내연(內燃)과 외연(外延)의 원리에 초점을 맞추어 분석하려 는 데 목적이 있다. 그는 갈라디아서 6장 5절의 말씀(“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을 성경본문으로 설정하여 이 글을 저술했다. “責任의 自覺”은 1922년 7월 일제강점기에 출판된 『宗敎界諸名士講演集』(개신교 저명한 선각자들의 설교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한석원의 글 “責任의 自覺”에서 보여주는 핵심적인 논점들과 주요사안 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석원이 논하는 ‘내연’으로서의 책임의 자각에 대해서 고찰했으 며 고결한 인격, 경건한 신앙심, 탁월한 자격, 영성, 지속적인 각성, 성경읽 기와 기도, 잘못된 습관을 교정하는 일, 믿음과 행위의 일치(信行一致) 등 이 내연에 해당된다.
둘째, 한석원의 첫째 논지를 확장하여 계속해서 그가 논하는 ‘외연’으로 서의 책임의 자각에 대하여 다루었다. 그는 진정한 이타주의는 성경적 청지기 정신과 자기희생에서 비롯된다고 확신했으며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범주를 넘어서서(외연하여) 가정, 교회, 사회, 민족, 그리고 국가를 대상으 로 반드시 이타주의를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석원 목사가 남긴 의미심장한 발자취와 그가 남긴 주요 공적에 비추 어 볼 때 본 연구자는 향후 그와 연관된 연구를 외연함으로써 이 주제 외 에도 문서선교, 주일학교 교육활동, 청년운동, 기독교윤리관, 출판 목회사 역과 기독교 서적 보급 등 다양한 방면의 담론으로 연계될 수 있기를 기대 한다.
본 연구는 김창준(金昌俊) 목사의 설교 “最大의 模範”을 통해 ‘모범자 로서의 예수상’을 분석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그는 베드로전서 2장 21절 말씀을 본문으로 설정하여 이 글을 작성했다. 본 연구에서는 김창준의 ‘모범자로서의 예수상’을 분석하기 위하여 1922년 『宗敎界 諸名士 講演集』 에 수록된 “最大의 模範”을 고찰했다.
첫째, ‘겸손’에 대해: 김창준이 생각한 그리스도인의 지고의 과업으로서 겸손의 기초적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살폈으며, 그 원리들로서 예수 그 리스도의 비하(卑下), 비하의 실제적 체험과 실천, 그리스도인의 공평무사 (公平無私)한 태도 등에 대해 논했다.
둘째, ‘책임감’에 대해: 책임감과 관련된 의미심장한 교훈들을 다루었으며, 그 예로서 구원을 성취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헌신, 믿음과 행위의 일치 (信行一致), 자기성찰, 대소사 모든 소임에 최선을 다하는 신자의 삶 등을 고찰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열정적 사명감의 조화에 큰 비중을 두었다.
셋째, ‘이타적 사랑’에 대해: 김창준의 논리적 논증에 따라 이타적 사랑에 대해 살폈다. 그는 죄인들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사도들과 초기 교회 성도들의 이웃을 위한 헌신적인 삶, 그리고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이타적 사랑을 피력했다.
부연하여, 본 연구자는 향후 김창준과 관련된 연구가 확장되어 이 주제 외에도 ‘그의 신앙과 삼일독립운동’, ‘그의 신앙과 사회주의 사상’, ‘그의 목회사역’ 등 다방면의 연구로 진척되기를 바란다.
배은희 목사는 대한제국 말기에 기독교로 개종하여 숭덕학교를 운영하다 한일합병당시에 투옥되는 경험을 하였다. 이 투옥의 경험이 그의 독립운동의 씨앗이 되었다. 그는 3.1운동에 가담하였고 1919년 10월에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장로교 목회자 중심의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국민회에 평의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921년부터 전주 서문외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유치원, 숭덕학교, 여성야학을 운영하였고 1927년 전주 신간회 회장을 하였으며, 1929년부터는 독신자선교회와 협동조합운동을 통해 농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반대하다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그는 전주에서 임시시국대책위원회와 전주청년단을 조직하여 치안유지활동을 하였다. 그는 12월 28일 이후 반탁운동이 벌어지자 전주를 중심으로 이승만이 조직했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지부들을 조직하여 반탁운동에 참여하였고, 1946년 1월 13일에 전북지부를 조직하였다. 전북대표로 활동하며 2월 8일에 독촉국민회가 조직될 때 5명의 고문 아래 있는 18명으로 구성된 참여의 구성원이 되었다. 그는 독촉국민회에 가담한 이후에 이승만의 반탁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고 1947년 10월에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1947년 7월에는 이승만의 승인을 받아 민족대표자대회를 조직하였고 김구의 비상국민회의와 통합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비상국민회의는 임정의 법통론을 주장하였던 반면에 민족대표자회의는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주장하여 통합에 실패하였다. 통합에 난항을 겪자 민족대표자대회와 독촉국민회가 연합하여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나섰고, 배은희는 총선거 실시를 위한 중심인물로 활동하였다. 배은희는 총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운동을 추진했던 이승만의 정책에 독촉국민회와 민족대표자대회를 통해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던 목회자였다.
이 논문은 한국장로교회 동사목사의 기원과 제도적 확립 및 확장과정, 폐지에 이르는 역사적인 과정을 연구한 것이다.
동사목사라는 직제는 미국장로교회의 영향으로 190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3회 노회에서 8명의 한국인 목사를 선교사와 함께 일하는 동사목사로 임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이 직제는 제도적 확립과 확장 과정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확대 시행되어 1914년 제3회 총회에서 목사를 위임목사, 임시목사, 위임동사목사, 임시동사목사로 구분했으며, 1917년 제6회 총회에서는 목사를 칭호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하고, 1929년 제18회 총회에서 헌법 중 정치 제4장 4조에 목사칭호 조항을 추가함으로서 동사목사의 제도적 확립을 완결했다. 목회 현장에서는 선교사와 한국인 동사목사 뿐만 아니라 1920년대를 전후해서는 한국인 위임목사와 한국인 동사목사가 함께 목회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이후에는 한국인 위임목사와 위임동사목사, 한국인 위임목사와 임시동사목사가 목회하는 형태로 세분화 되었다.
동사목사 직제는 한국장로교회 안에서 공동목회를 통한 협동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했는데, 이와 같은 직제가 해방 이후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지속된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영락교회에서 한경직과 강신명이 위임목사와 동사목사로 공동목회를 한 경우다.
그러나 동사목사 직제는 1955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제40회 총회에서 부목사 직제를 신설하면서 폐지되었다. 이런 결정은 동사목사 직제의 역사적 공헌을 간과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결국 동사목사의 폐지와 부목사의 신설은 공동목회를 통한 협동적 지도력 대신에 위임목사 중심의 단일지도체제로의 변화를 가속화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 글은 한국 장로교 여성 가운데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은 최덕지 (1901-1956)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하여 무너진 한국교회를 회복 하기 위해 해방 직후에 전개한 교회재건 운동을 살펴보고, 그의 교회론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시도한다. 그의 교회론에 대한 교회사가들의 평가는 지금까지 대체로 매우 부정적 이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교회론을 ‘극단적 분리주의’ 혹은 ‘극단적 분파주의’ 혹은 ‘도나투스주의’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들의 평가는 최덕 지의 재건운동에 대한 자세한 분석과 교회론에 대한 깊은 신학적 해석에 기초한 것이 아니다. 본고는 이런 연구의 공백을 메꾸기 위한 하나의 시도 이다. 최덕지의 교회론을 정확하게 평가하기 위해 그의 교회재건 운동을 해방 직후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위치시키고 ‘도나투스파 교회론’을 해석학 적 도구로 사용하여 그의 설교를 분석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최덕지의 교회론을 ‘극단적 분리주의, 혹은 분파주의’ 혹은 ‘도나투스주의’라고 단순하게 말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재건운동과 재건교회 설립은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교회의 분열을 낳았고, 그의 교회 론에 도나투스주의와 매우 유사한 성격-장점과 한계 두 측면 모두에 있어 서-이 많은 것도 부인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최덕지의 교회재건 운동은 교회의 거룩성 회복을 위 해서는 큰 공헌을 하였으나, 교회의 일치 유지를 위한 노력은 부족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교회의 거룩성 회복이야말 로 보다 중요한 시대적 과제였던 점을 감안하면, 그의 공헌이 한계보다 훨 씬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최덕지의 교회론이 지금 주님의 몸을 수없이 많은 조각으로 찢어놓고 만신창이로 만든 한국교회에 주는 교훈은 실로 무겁다. 참된 교회의 회복 을 위해서는 ‘일치를 해치지 않는 거룩성’과 ‘거룩성을 해치지 않는 일치’ 를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연구가 최덕지의 교회재건 운동에 대한 재평가를 위해 그리고 오늘 한국교회의 분열된 현실의 뿌리 이해와 일치의 길 모색 그리고 더 나아가 통일 이후 북한교회가 직면하게 될 해방직후와 유사한 배교자 치리 문제를 예견하고 미리 준비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성봉은 신자가 회개의 십자가와 체험의 십자가, 그리고 율법을 극복한 십자가와 자신과 세상을 매장한 십자가를 발견할 것을 늘 강조하였다. 그 리스도인의 신앙은 바로 십자가의 이런 단계적 체험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 이다. 본고는 이성봉의 생애와 설교, 사역을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의 십자 가의 도의 여러 단계들을 논하였다. 십자가 신앙은 이성봉의 설교사역에서 뿐만 아니라 생애 전 과정에서 적용되고 구현되었다. 그에게 십자가는 실 제였고 전체였다. 오늘날 십자가의 도가 “죄 용서”라는 기초적 수준에서 취급되는 하락한 교회 상황에서 이성봉은 십자가가 모든 것임을 말로써 삶 으로써 죽음으로써 보여주었다. 십자가는 인간 예수의 나약한 죽음만이 아 니었다. ‘사람의 아들’ 예수는 구속을 위한 심판의 제물로서 자신의 목숨을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드렸고 성령은 그분의 보혈을 취하여 살아 있는 피가 되게 하여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의의 증표가 되게 하셨다. ‘마지막 아담’으로서 예수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육체로써 아담 안에 있는 모든 부 정적인 것들을 다 처리하셨다. 십자가는 우리의 육신도 끝냈고 자아도 종 결시켰고 세상도 종식시켰다. 이성봉의 사역이 진실로 가치 있고 회상 되 어야할 이유는 부흥사역의 횟수와 결과라는 단순한 외적 성취가 아니다. 십자가의 도로써 승리한 사역자였기 때문이다.
This study aims at reviewing satisfaction on facility modernization project of traditional market by case study on integration & move method of 2 markets (Seongbuk 5 day market & Geumgye daily market). Following this study, it asked 182 merchants & customers at Naju Moksagoeul Market about satisfaction and performance on integration & move and the facility modernization project of traditional markets. According to results of the survey, not only merchants but also customers are satisfied with the modernization project. But in detail, valuations between 5 days market and daily market, and between merchants and customers are different. For example, merchants regard as negative, but customers as positive about move of the markets from city to outside. About half of respondents answer that number of market visits and sales volume after move of the markets are higher than before. More than 80% of respondents answer that culture & tourism market programs are helpful to the market revitalization.
Despite his popularity, the Rev. James S. Gale has not been given sufficient scholarly attention. How could it be? It appears that while Gale has been known as a missionary and a scholar of Korean studies, this two-fold identity has not been appreciated in a comprehensively way: scholars tend to interpret two aspects of his identity as contradictory ones or simply juxtaposed ones rather than as mutually interacted ones. In this context, in the area of Korean studies, they have seen him mainly as a Korean expert, without paying attention to his being a missionary; on the other hand, in the realm of Korean Christian studies, they have largely viewed him as a missionary, without properly relating this to his expertise in Korean studies. This article aims to overcome this discrepancy in the understanding of Gale in the contemporary studies, secular and Christian, in Korea. The thesis of this article is that the mutually integrated two-fold identity of Gale is the key to the understanding of his thought and work; that is, he was a scholar of Korean studies as a missionary.
Such characteristics of his being a scholar of Korean studies as a missionar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he prepared himself as a missionary in Korea through cultural identification, through which he gradually overcome his paternalism; second, he equipped himself with expertise in Korean studies, which enabled him to be a first-class cultural missionary, namely, a theologian of missionary indigenization; and last, he bequeathed his legacy as a missionary scholar, which paves the way for Korean studies as mission. Thus, he challenged the understanding of both missionary works and a missionary.
It is well-known that the Rev. Kyung-Chik Han was very active in world mission. Interestingly, however, there has been few, if not any, studies on his ministry of world mission. This study reviews his ministry of world mission, summarizing it into several patterns, clarifying its main issues, and evaluating its historical legacy.
His ministry of world mission can be divided into several patterns, which is closely related to the development of his pastoral ministry. The patterns are as follows: first, the period of pasturing a migrant church (1945-1950); second, that of representing the Korean Church to the world churches (1950-1955); third, that of participating in ecumenical mission (1955-1966); and last, that of participating in evangelical mission (1966-2000).
We may recapitulate the Rev. Han’s ministry of world mission as follows. To begin with, let us examine his strong points: first, with the idea of evangelism being the core, he expanded his ministry, starting from national evangelization to world mission; second, he carried out both gospel ministry and relief ministry; third, he greatly contributed to the mobilization of the Youngrak Presbyterian Church and its daughter churches for world mission; fourth, he enhanced the church’s awareness about the world churches, and thus let it naturally accept the challenge of world mission. However, it is necessary to point out his weaknesses: first, his framework of the two-faced ministry, gospel and relief, gradually became behind the times, as he failed to respond to the new ideas of world mission; second, his role in introducing the ideas of ecumenical mission to the Korean Church was limited; third, thus the Korean Church in general, including him, remained under the influence of the viewpoint of traditional mission; fourth, owing to his close relationship with the evangelicals, his leadership was gradually confined to the evangelical camp. In conclusion, it can be safely said that he was a missionary activist rather than missionary thinker, and that he contributed to the mobilization for mission rather than the vitalization of missi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