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조이스 문학을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진단한다. 세계문학에 대한 논의가 가져온 새로운 이론적 가능성과 한계를 검토하고 이를 통해 세계문학의 지도에서 조이스 문학의 좌표가 어떻게 새겨질 수 있는지 살펴본다. 결론적으로 이 논문은 세계문학의 개방성과 폐쇄성에 대한 자기반영적 성찰을 통해 세계문학 연구의 학제적 무의식을 밝힌다.
본 논문은 현대문학의 중심에 예이츠를 두고 현대문학의 초민족주의시 학을 구획하고 정의하려고 한다. 20세기의 주된 작가 예이츠, 파운드, 엘리엇과 레이디 그레고리와의 문학적 교류를 다루고자 한다. 이들 중 레이디 그레고리와 파운드와의 관계는 면밀했었다. 예이츠가 극작품을 집필하기 시작할 때 레이디 그레고리의 예이츠에 대한 영향력을 컸었다. 파운드의 경우, 파운드의 초기에 예이츠의 영향력을 강력하였고, 스톤 오두막에서의 협업 이후에는 파운드의 영향은 예이츠가 낭만주의의 시삭을 극복하는 촉매가 된다. 먼저 서두에서 본 논문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려고 하는데, 예이츠는 가족적 사회적 배경을 근거로 예이츠를 바라보며 아울러 아일랜드 안에 서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내외에서 발생하는 아트 운동과 문학운동의 맥락으로 예 이츠를 보려고 한다. 작가 예이츠의 변화를 추적할 때 본 논문은 미시적 및 거시적 관점을 견지하여, 그의 시 세계의 보다 크고 명학한 면을 드러내고자 한다.
본고는 그동안 일반 문학의 하위 장르로 분류되어 이론적 탐색의 사각 지대에 놓여 있던 청소년 문학 의 개념을 이론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것이다. 전 세계 청소년 문학이 일정한 교섭 속에서 영향 관계에 있다. 본고는 이 점에 주목하여 각국 청소년 문학에 대한 논의를 추려 한국 청소년 문학과 비교해 보았다. 독일 청소년 문학은 의도된 청소년 문학으로서 하위 장르의 틀을 갖추고 있다. 영미 청소년 문학은 사실주의적인 접근을 통하여 소수자 담론으로 논의되고 있으며, 일본은 YA문학이라고 하여 경계 허물기 단계에 이르렀다. 이를 통하여 본고는 한국 청소년 문학의 위상을 점검하고 방향성을 모색 하였다. 급성장 추세에 있는 한국 청소년 문학은 ‘청소년을 위하여’ 청소년 주체를 호명하고 ‘지금-여기’를 특화해야 한다. 청소년 문학이 아닌 것을 청소년 문학이라고 묶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 문학의 개념과 범주를 본질에 맞게 구체화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국 청소년 문학은 문학적 모색기에 있다.
환상록의 기하학적 상징은 개인과 문명의 역사의 스케일을 조정하면 서 지도를 그린다. 예이츠는 역사를 입체파의 그림과도 같이 지그재그형식의 가이어의 움직이는 도형의 관점에서 시각화하였다. 가이어는 예이츠가 정신과 역사를 동시에 그 려보는 지도상의 스케일에 속한다. 가이어는 항상 멀리가서는 다시 자신의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셔틀콕과 같다. 외견상 개인과 문명의 역사의 움직임은 미로같이 보인다. 그러나 스케일의 수학적 구조를 지닌 환상록은 정신과 역사의 안과 밖에서 기능하 고, 가이어의 스케일은 결코 변화를 멈추지 않고 소용돌이처럼 지속적으로 움직인다. 예이츠의 가이어의 시학은 바로 스케일의 시학의 원조이다.
이 논문은 세계문학의 관점에서 예이츠 문학을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 을 진단한다. 세계문학에 대한 논의가 가져온 새로운 이론적 가능성과 한계를 검토하 고 이를 통해 세계문학의 지도에서 예이츠 문학의 좌표가 어떻게 새겨질 수 있는지 살펴본다. 결론적으로 이 논문은 예이츠 문학의 세계문학적 가능성을 아일랜드적인 것 과 유럽적인 것의 상호보완적 성격 규명, 그리고 유럽 프레임을 넘어선 상호교차적인 문학적 영향의 흔적을 인식해 내는 것에서 찾는다.
안덕암스님(1913년 8월27일~2003년 10월29일)은 근대 고승 가운 데 한 분이다. 덕암스님은 근대 스님들 가운데 유일하게 모든 불교분 야를 섭렵하신 분이라고 여겨진다. 이런 덕암스님의 어떤 사상이 시 에 투영 되어져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것은 태고보우의 원융사 상과 신라의 원광법사가 화랑의 세속오계로 대중과 화합하며, 『華嚴 經』의 화엄사상을 융합하여 몸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신 보현 보살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安德菴스님은“포교는 불제자라면 누구라도 다해야 하고 다할 수 있는 일이다. 꼭 승상설법만이 포교가 아니고 어떠한 一言一行, 一物 一事라도 중생에게 이롭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고뇌를 除하고 위안 을 받게 하는 것이면 모두가 포교인 줄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 씀하셨다. 이와 같이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하시고 생활하신다. 법제자에 게 전법하신 게송을 제외하고 순수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시의 세계 를 살펴본다.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면서 지으신 시와 태고보우 스님 의 유적지를 순례하면서 지으신 시를 위주로 살펴본다. 여기서 안덕암 스님의 사상이 바로 불이사상이 시에 그대로 녹아 있음을 알 수가 있다.
This paper starts with the hypothesis that Irish literature should be different from English literature in theme, feeling and the technique of expression. The differences the writer has found so far are as follows: the search for the father-omphalos, the personification of nature, the recognition of sex as an origin of creation, the search for aesthetics of darkness, the attachment to silence, the spirit of wandering, the cyclic view of the world and dramatic self-awareness, etc. Since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he Irish writers’ strong attachment to their own tradition has been expressed as their reaction to a sense of lack as reflected in terms such as “center,” “omphalos,” and “search for father.” This phenomenon accounts for the birth of Irish national literature. From Oscar Wilde and Bernard Show in the 19th century to the recent poet, Seamus Heaney, they tried to deanglicize and create their own literature. But through this process, they have not neglected the chance to become a master of the international literature, by using the language of enemy. And each writer has a peculiar method of deanglicizing. For example, Oscar Wilde and Bernard Show who contributed to cosmopolitanism of modern Irish literature attacked and illuminated the English audiences by the reversing play-role. Understanding the enhanced nationalism, W.B. Yeats and other revivalists of Irish literature integrated English culture and tradition into the nationalistic movement. This is why their works were called “the cracked glass of the servants.” J. Joyce and other modernists, in a genuine sense, sought for their original nationality and to do this, they tried to recognize the picture of themselves as paralysis. From the establishment of the Irish Republic to the recent, strong nationalism and internationalism, as it has grown as one of the European countries, have been reconciled. Modern Irish literature has succeeded in regaining its own tradition and reaching top as one of the international literatures, getting through the five phases. During the first phase it showed the spirit to reverse the English cultural system and value by preempting the role of the English. The second phase is the period when they stimulated the national feeling and praised national heros. At the third phase modernists including Joyce, Kinsella, and Clarke attacked the nationalism of the second phase, saying that it was like a bubble full of the imagination the English wanted, and they exposed the realistic viewpoint of Irish life to their literary works. The fourth phase shows the reconciliation between parochialism of P. Kavanagh and cosmopolitanism of J. Montague. The fifth phase shows that with the enforcing of nationalism caused by the Ulster Trouble, harmony of nationalism and internationalism has been sought. The most important element that has led modern Irish literature to the top level is the spirit of omphalos through their confidence in their own culture and the sense of lack, and thereby the attachment to losses in language, land and tradition. Besides these, modern Irish writers haveoriented from the early period the Irish Republic towards an international country. The harmony of regionalism and cosmopolitanism, as well as that of individual interests and community interests, has led the Irish Republic to become one of the best postcolonial countries and cultural models.
본 논문은 죽와 하일호의 시문학 세계의 양상과 그 특징에 대한 고찰을 연구의 목적으로 삼았다. 하일호의 가계는 대대로 남명의 학문적 영향을 입었고 하 일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유학적 도덕성을 견지하여 孝友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한편 학문공부에 근면하고 후학의 지도에서 『소학』의 가르침을 성 실히 전수하였다. 그의 작품에는 가족을 사랑하고 염려하는 가부장으로의 진중 한 모습이나 자손과 후배들에게 평생 체득한 삶의 지침을 전수하는 노년의 문사의 모습, 일상에서 마주하는 소박한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해학 넘치는 모습이 형상화 되었다. 유가적 관념을 형상한 작품 외에, 소박한 일상의 사건과 사물을 묘사한 작품에 나타나는 구체성과 묘사성은 유학자이자 문인으로서의 하 일호의 작품이 갖는 특징이다. 이것은 자국적인 것의 가치를 인식하고 조선어를 활용한 시의 창작을 주장한 그의 독자적 시론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조는 비록 평범하지만 내용은 전실한 시작품의 창작을 강조한 것이나 예에 부합되고 실지로 적용될 수 있는 학문 자세를 강조한 것 역시 그의 시문학 세계의 특징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본고는 滄浪亭 李尙靖(1725∼1788)삶과 그의 문학에 나타난 정신을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조선 후기의 문학이 한창 무르익었던 시대였다. 학문적으로는 義理學과 事理學이 병행하던 때였다. 그가 어렸을 때는 그다지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지는 않았다. 그의 학문 방향은 爲己之學에 있었다.
그가 많은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특히 그가 嶺南 左道와 右道 학자들의 소통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예로 그가 도산서원을 참배하고 그곳 선비들과 교유하였다.
그의 문학에 나타난 정신은 크게 4가지이다. 첫째 큰 국량을 바탕한 追遠精神이다. 그가 선비로서 마음공부를 열심히 하였지만 그의 식견이 편협하지 않았다. 그가 자신의 가문의 전통을 계승하여 집안을 부흥시키려고 하였다. 둘째 經術을 바탕 한 道學精神이다. 그의 학문은 육경에 연원을 두고 많은 책을 읽었다. 그는 知行合一한 道學者였다. 셋째 마음을 바탕 한 義理精神이다. 그가 爲己之學을 바탕으로 義理學 에 전념하였다. 그는 모든 일에 있어 正心이 바탕이 된다고 하였다. 넷째 그의 가슴속에는 尊王攘夷 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가 道德的 理想主義의 실행을 바라고 있었다.
이 글은 默齋 金墩의 文集인 『默齋集』을 중심으로, 그의 詩文을 검토하여 분석한 것이다. 김돈은 아직은 학계나 일반에 잘 알려진 인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 글은 김돈과 그의 문학을 보고하는 첫 보고서라는 의미와 試論이라는 의미를 함께 갖는다.
寒士, 즉 ‘가난하거나 권력이 없는 선비’라는 사전적 정의는 김돈의 처한 입지와 상황을 정확히 반영한다. 그는 가난했고,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문학과 학문의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김돈에 관한 자료가 2권 1책으로 묶인『默齋集』이 전부인 상황에서 그의 학문세계를 온전히 드러내기는 여건상 매우 어렵겠지만, 남아있는 시와 문을 통해 그의 문학세계를 짚어보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것은 묻혀있고 잊혀져있던 남명학파의 실체를 부분적으로나마 복원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또한 이것은 어려운 상황과 처지에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고 剛毅한 정신세계를 이루었던 한 지성을 알리는 작업이며, 그가 남긴 예술적이며 심미적인 문학작품의 가치를 학계에 알리는 작업이다.
김돈이 남긴 시는 169수이다. 남명학파의 문집이 대체로 분량이 적고, 시편이 많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역사에 대한 慷慨를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 몇 편이 있다. 이 작품들은 대체로 충신과 열사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감정을 피력한 것인데, 특히 망국의 역사적 상황 속에 忠節을 다하였던 인물들의 원통함에 공감하고 함께 의분을 토로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김돈은, 평화로운 시기에 비록 知遇를 받지 못했더라도 危難의 시기가 오면 결연히 떨쳐 일어나리라는 결의를 평상시에도 늘 갖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또한 김돈은 헛되이 세월을 보내지 않고 학문을 닦고 덕성을 기르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결연한 의지로 실천해나갔다. 그는 특별히 알아주는 이 없는 ‘寒士’이지만, 부귀영화나 입신양명의 현달을 꿈꾸지 않았다. 그저 매일 학문을 닦고 인격도야에 매진하다가, 만약 위난의 시절이 닥쳐온다면 결연히 떨쳐 일어났던 남명학파의 선배들 발자취를 따르고자 했다. 또 한편으로, 셀 수도 없이 많은 이들이 安貧樂道를 말했지만, 그 진정성은 의심스럽다. 즉, 우선은 가난하지 않은데 가난하다고 한 경우가 많고, 진정으로 도를 즐긴 삶이 아닌데도 도를 운위한 것이 의심스러운 인물들도 많았다. 그런 경우에 비해 김돈은 진솔하다. 가난하기에 가난하다고 했고, 입신양명이나 현달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일생을 학문에 정진했기에 도를 즐긴다고 할만하다. 이는 寒士의 剛毅함이라 요약할 수 있다.
김돈은 剛毅한 지조를 가진 선비였지만, 가족과 친족에게는 더없이 다감한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 평범함이 시로 표현되고 문으로 묘사되고 있는데, 진솔함과 다정함이 묻어나 공감을 자아낸다. 그의 평범함이 오히려 더 비범함으로 다가오는 이유이다. 교유관계가 원만한 사람들은 타고난 성품의 덕도 있지만, 그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에 대한 노력이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김돈은 그런 심성과 노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공부하는 선비라면 文房四友에 대한 나름의 애착이 있기 마련이다. 공부에 꼭 필요한 文房具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金墩의 문학에는 文房四友가 아니라 五友가 자주 등장한다. 다섯 번째 벗이 기도 하고, 이 벗이 있어 五友가 완성되기도 한다는 중의적인 의미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김돈은 매우 다정다감한 감성을 지닌 文人이었다.
芳洲 文國鉉은 둔암-성재-순암-성호-퇴계로 이어지는 학통에서 발견되는 보수적이고 반외세적인 영향으로 일찍부터 서구세력의 동점을 경계했다. 외세에 의한 침탈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그가 제시한 것은 자기 수양과 함께 유학의 부흥과 후진의 양성이었다.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조선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과 국권의 상실의 역사적 상황은 그로 하여금 그의 이념의 적극 적인 실천 보다는 세상으로부터의 도피와 은둔을 선택하게 하였다. 은둔자로 자처하던 방주는 개방적이기 보다는 보수로 삶의 방향을 결정하여 유가의 전통적인 이념을 묵수하면서 혼란한 시대에서도 本性의 유지와 심성의 함양을 통한 인간 도리의 실천 그리고 유가의 전통적인 학문 공부를 통해 미래 사회에서의 재기를 꿈꾸었다. 이 시기의 방주의 학문경향이나 문예관은 조선 500여년을 면면히 이어온 유 가적 학문・문예관을 충실히 계승하기는 하였다. 그렇지만 근대로 들어서는 시 대 상황을 고려하여 평가할 때는 역사의 변화에 순응하지 못하는 또는 동참하 지 않으려는 보수적인 유학자로서의 문예관을 고수한 인물로 평가된다.
이 글은 만성이 그의 시에서 어떠한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러한 관심은 그의 어떠한 생각이 반영된 것인가를 살펴본 것이다. 만성은 그의 시에서 역사와 현실 속에 놓여 있는 인간의 참모습을 찾으려 애 를 쓴 흔적이 역력하다. 이러한 것은 그의 도문일치에 입각한 그의 문학관에 기 초하고 있다. 일반 사대부들도 문학에 대하여 그와 비슷한 생각을 피력한 바 있 다. 그러나 그들의 문학관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매우 단편적이거나 편의적 인 경우가 많다. 예컨대, 잡록 부분에서 잠간 언급하거나, 청탁에 의해 짓는 개인 의 문집 서와 발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매우 체계적으로 문 학론이나, 문론 혹은 시론이라는 글을 지어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문학에 대한 견해를 정리한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의 경우는 또 생각에만 머물고 그의 문학 세계에서 그의 문학에 대한 생각을 구현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만성은 문학관에 대해 피력한 글이 많지는 않으나, 최장한・곽종석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문학관을 일목요연하게 사적 체계를 세워 정리한 것을 볼 수 있 으며, 이러한 문학관은 그의 많지 않은 시작품 속에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올바른 인간에 대한 관심과 수양은 그의 몇 몇 잡저들 예를 들면, 「명덕 설」, 「위인론」, 「입지설」 등에서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러한 것은 그의 시 속에서 나란히 읊어진 한유한, 정여창 등 선현에 대한 그의 생각과 남명에 대한 생각, 그리고 당대의 어진 사람들과의 교제를 읊은 시 등에서 발현되어 있다. 그가 매 화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 특히 납매에 대한 그의 특별한 관심과 이를 바탕 으로 지은 「납매설」은 그의 참된 인간의 모습을 탐구하고 현시하려한 의도를 읽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그가 그러한 인간이 속해 있던 그리고 속해 있는 시간과 공간에 관심 을 가지는 것은 또한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는 역사를 회고하고, 또 시사를 걱정하고, 민속에 관심을 기울이는 등 그가 속해 있는 현실의 과거와 당대에 깊 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만성의 시문학에는 자신의 시대와 그 시대를 열어가는 당대의 바람직 한 인물들과 깊은 교유를 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바로 그의 과거와 과거의 인물 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만성이 바라보는 현실은 없어져야할 대상이 아니고, 보존하고 안존하 고 싶은 곳이다. 시사를 걱정하는 것도 현재를 걱정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걱정 해서이다. 그래서 그의 현실에 대한 인식은 심각한 문제를 찾아볼 수 없다. 다 만 미래의 불안과 걱정이 있을 따름이다. 미래의 불안과 걱정은 바로 굴욕적이 고 처참했던 과거를 돌아보며, 예측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과거는 현재를 보 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미래를 보는 거울인 것이다. 인물의 경우에도 사람을 평가하는 바람직한 기준이 무시되는 현실을 매화를 통하여 비유적으로 이야기하고, 현실 속에서 그러한 인물들을 모색하였으며, 과거에서는 그러한 바람직인한 인물들이 어떻게 살았던가를 인식하고, 현실의 인물들에 교우를 유지하였다.
남명 조식은 자신에 대해서는 실천적 행실을 무엇보다 강조하였고, 대물에 대 한 관점은 실용적 측면을 중시하였다. 이러한 삶의 태도는 그의 문학에 대한 태 도에 있어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문학을 대하여 서도 실용성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는 젊었을 적에 한 때 문학으로 이름을 드러내기도 하였으나, 성인의 학문 을 자신이 공부할 목표로 정한 뒤로부터는 문학을 멀리하였다. 그는 스스로 시 는 완물상지하기 쉬우므로 배워서는 안 된다고 하였고, 그의 제자 정인홍에 따 르면 그는 항상 시황계를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남명이 이처럼 시를 배격하였다면 그의 문집에 시가 있을 수가 없을 것이지 만, 그의 문집에는 많은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는 시 벽이 있어 시를 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다고 하였다. 남명은 결국 시를 멀리 하면서도 시를 짓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물론 시흥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지은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바로 실용적인 목적으로 시를 지었던 것이 다. 특히 문장의 경우에는 이른바 문예문에 속하는 글도 전혀 없지는 않으나, 많은 작품들이 실용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처럼 실용성에 근거하는 남명의 문학관은 작품 속에서 대략 세 가지 정도로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본성이나 바탕과 같은 근본을 중시하는 것이다. 그는 「원천부」에서 온 갖 이치가 모두 본성에 갖추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작품을 지음에 있어서도 이 러한 생각은 그대로 드러나 있음을 볼 수 있다. 둘째는 현실과 일상과 같은 현재를 중시하는 것이다. 그가 「을묘사직소」와 「무 진봉사」에서 드러낸 것과 같이 작품 속에서 현실과 일상을 중시하는 생각은 다른 산문에서 뿐만 아니라, 몇몇 시 속에서도 이러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 셋째는 사실을 중시하고 허명을 싫어하는 것이다. 그가 사실을 중시하였던 점 은 그의 작품 속에서 그가 스스로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특히 묘문을 지으면 서 그는 고인에게 아첨하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훌륭한 학자라는 빈 이름으로 세상을 속인다는 생각을 여러 작품 속에서 밝힌 바 있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남명의 문학작품 속에는 그가 문학을 멀리하면서도 왜 작품을 짓지 안 되었는가 하는 사실과 문학작품을 지음에 있어서 무엇을 강 조하였는가, 그리고 문학작품 속에 드러난 것을 통해서 그가 무엇을 중시하였 는가를 살필 수 있었는데, 이러한 것이 결론적으로 그의 실용주의적 생각과 맞 닿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