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의 시기인 탈식민지기에 들어서면서 일본어교육은 철저히 배 제되었다. 한국어를 국가의 언어로 인정함과 동시에 생활언어와 교육언 어에 있어서 한국어를 되돌리고자, 대한민국 각처에 남아있는 일본어 간 판 및 일본 서적 등 일본어적 색채를 일소시키기 위한 신문화 운동이 일 어났다. 이러한 반일 및 배일 관념의 심화로 인해 일본어교육은 공백기 에 들어갔지만, 장면 정권기, 대(對)일 적극책으로 노선을 변경함에 따라 반일 감정이 조금씩 완화되었다. 이 시기 일본 서적 및 영화 등 일본의 대중문화가 유입되었고 그에 따라 일본어를 배우려는 20대 수요층이 크 게 늘어났다. 전국적으로 일본어 강습소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한일 국교정상화를 앞두고 일본어교육의 필요론을 제기하는 시민들, 개인의 출세를 위해 암암리에 일본어를 학습하는 자들도 많았다. 박정희 정권기 인 1965년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되면서 양국의 경제교류는 활발해졌고 1973년부터 고등학교 제2외국어로 일본어교과목 지정과 대학에서의 일 본어학과 개설 등이 본격적으로 행해졌다. 이를 통해 국민의 주체의식 확립을 위해 ‘부정’적이었던 일본어교육이 ‘수용’이라는 관념으로 시대적 기능이 전환되었다. 본고에서는 해방 이후 일본어교육의 성행 과정과 양 상을 살펴보고 일본어교육이 성행하게 된 요인과 시대적 기능의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향후 한국에서 일본어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의 미있는 시사점을 찾고자 한다.
UN 출범 이후 80년이 되어가는 2022년의 시점에도 추축국으로 표상 되는 독일 및 일본과 관련된 우리의 역사적, 정치적 인식에는 극명한 차 이 및 대비가 존재한다. 즉, 독일의 경우 전후처리 문제에 있어 일본과 대조되는 진정한 반성 및 후속 대처의 모범적 사례로서 우리 사회에 긍정 적으로 다가옴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일단, 조선 말기 이래 유무형의 막대한 피해를 일제로부터 경험하였음에 기인한다. 그리고 해방 및 대한 민국 정부 수립 이후 지금까지 국제법상 식민지 청산 문제가 계속되는 현 실 속에서 인권 담론과 유리된 일본의 자세가 대한민국 각계의 분노를 촉 발하였으며, 그와 대비되는 실행을 모색하도록 촉발한 측면이 존재한다. 하지만 거듭 소환되는 독일의 ‘사례는 침략 및 과거사에 대한 전향적 반성 및 대처의 모범이 될 만한지, 과연 보편적이고 명백한 실행인지 점 검할 필요가 있다. 체코 및 근년의 나미비아에 대한 실행을 보면 독일은 역사적 과오나 국제법상 국가책임 자체는 인정하되, 구체적 배상문제와 관련하여서는 피해자 측에 대한 양비론적 비판이나 국내외법상 근거를 엄 격히 요구하는 경향이 있으며, 관습 국제법이나 지엽적 절차법의 문제를 들어 제소를 방해하거나 배상(reparation)의 형식에 반대하기도 한다. 다 만, 나미비아 피해자 유족들은 최근 독일에 대한 미국내 주권면제 관련 소송에서 패소하였으나 이 패소는 헛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구독일 제국 의 나미비아 헤레로족 및 나마족 학살 사건의 청산 문제 해결을 촉발하기 도 하였다. 또, 독일의 승소는 역설적으로 역사적 가해국의 배상문제에 관한 소극성, 양면성을 보여주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중-동부 유럽 에서의 독일의 수정주의적 시각과도 접점이 존재한다. 우리로서는 향후 잠재적인 사안에 있어서 일본에 대항하는 주권면제 부 인론 등의 논리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설사, 패소한 사안에 대해서도 전투에서 지고 전쟁에서 이기는 효과로 전환 시킬 여지는 없는가?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필요함을 언급하면서, 이번 연구에서의 문제 제기에 갈음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한국전쟁 직후에 식민지 세대 화가ㆍ평론가들이 제기한 추상 담론이 한국근현대 미술사에서 어떤 의미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재검토하는 작업의 일부이다. 추상 담론은 식민지 유산인 《대한민국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미술계가 재편된 가운데 제기되었다. 그들은 한국전쟁 후 폐허 같은 상황에서 이른바 세계화ㆍ현대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설정하고, 서구의 전후 추상 물결을 현대성으로 인식하는 한편, 실존주의 사상과 문학에 공감하는 가운데 추상 담론을 전개했다. 그들은 주로 1930년대 초부터 1940년대 전반기의 동양주의 추상 담론을 재인식하는 가운데 추상을 통하여 동양적/한국적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과 뒤이은 전후 세대가 냉전공간에 현대성을 지시하는 기호로서 추상을 신화화하는 동안, 식민지 근대성을 해체하는 또 다른 시대적 과제는 묻히게 되었다.
이 논문은 김억, 김영랑, 한흑구, 정인섭을 중심으로 식민지 조선 문인들의 “The lake isle of innisfree”의 수용과 전유 양상을 고찰하는 목적으로 한다. 식민지 조선 문단에서 “The lake isle of innisfree”는 ‘세계문학의 보편성’과 ‘식민지 문학의 특수성’을 지닌 예이츠의 대표시로 주목받으며 수용 주체의 문학 기획에 따라 다른 함의로 호명된다. 조선 문인들의 “The lake isle of innisfree”의 수용과 전유는 당대 이들이 기획했던 문학적 전략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나타난다. 김억과 김영랑은 세계문학으로서 “The lake isle of innisfree”를 전유하면서 근대시로서 이 시의 특징에 주목한다. 이에 반해 한흑구와 정인섭은 식민지 문학으로서 “The lake isle of innisfree”를 전유 하며 이 시에 내포된 식민지적 정체성에 주목한다
본고는 이광수의 역사소설 <단종애사>가 당시 식민지 시대의 대중문화(유행가)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밝혀보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광수의 문학이 과도하게 계몽적임을 비판하면서, <단종애사> 역시 그 한계를 띤 작품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점은 시대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다시 생각해볼만하다. 따라서 본고는 <단종애사>가 산출된 시기를 전후한 대중문화 중 유행가 <사의 찬미>, <황성의 적>, <낙화유수>를 살펴본 후 그것이 부재 에 대한 비애의 정조라는 통속적 감정과 관련이 있음을 밝혔다. 하지만 이광수는 대중들의 기대지평에 맞게끔 비애의 정조를 활용하여 통속적인 소설을 창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작가의식을 용해시켜 식민지 시기의 시대정신을 <단종애사>에 담아내고자 하였다. 다시 말해, 통속성 속에 보편성을 담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단종애사>에 나타난 식민지 시대정신은 바로 비애가 어디에서 왔는지 질문할 수 있는 문제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같은 시기에 나왔던 딱지본소설 <단종대왕실기>와 비교해 보았을 때 더욱 선명해진다. 따라서 <단종애사>는 단순히 계몽운동의 한 일환으로 평가하기 보다는, 식민지 시기의 시대정신을 잘 담아내고 있는 작품으로 평가해야할 것이다.
1920년대 한국 농촌을 위한 YMCA와 국제선교사협회의 협력은 계급 이데올로기 혁명을 기획하는 국제공산주의, 정치군사적 통제를 모색하는 제국주의, 또한 상업적 착취를 통한 경제적 부의 확장을 추구하는 강대국 민족주의와 구별되며, 본질적으로 민족의 상호협력과 인류애라는 보편가치를 추구한 기독교세계주의이다. 서구 선교사들은 교회와 국가의 역할을 구별 하는 파송 국가의 정부정책에 순응했지만 국제선교사협회는 거시적인 틀에서 한국의 민족주의자들과 협력하며, 식민정부의 주요 착취대상인 한국의 농부를 위해 종교적, 과학적, 물질적, 인적자원의 국제적 재배치를 총괄 함으로 여타 국제적 흐름과의 차별성을 시사한다. 국제선교사협회는 민족과 인종의 경계를 초월하는 기독교세계주의를 추구했는데, 한국의 농부를 위한 이러한 연대성은 세속국가의 외교경쟁이 가져온 한계에도 불구하고 초국가적 보편가치를 추구하는 중요한 국제주의의 흐름으로 포착된다. 국제선교사협회의 예루살렘대회는 한국의 다양한 교회기관이 교회 자체의 생존에 대한 관심을 넘어 사회병리적 문제의 해결을 위한 범교단적 협력과 기독교 농촌연구회의 조직을 고무했으며 태평양문제연구소로 하여금 한국 학자의 토지문제연구를 지원할 토대를 마련하였다. 또한 대한민국공화국의 토지개혁을 구상할 정부 요원에게 현장지식과 훈련기회를 제공했다. 제국 주의에 관한 거시적 이론을 넘어 구체적인 YMCA농촌운동에 참여하는 국제선교사협회의 활동에 대한 면밀한 자료의 검토는 기독교세계주의가 한국의 민족주의를 폄훼하기 보다 도리어 약소국의 민족역량을 강화하는 자양분으로 작동했음을 입증한다. 한국 YMCA농촌운동과 국제선교사협회의 협력을 연구함에 한국의 민족주의 틀을 넘어서, 일본 식민주의, 피압박민의 민족주의를 대체하며 활동한 국제공산주의, 강대국의 제국주의와 구별되는 기독교 세계주의의 취급이 요청된다.
일본의 개신교회가 식민지 조선에 존재했었다는 사실은 한국이나 일본의 기독교 사학자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혹은 무시되어 왔다.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 기독교인들의 활동과 행동, 사상, 조선인 기독교인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는가 하는 문제는 일본의 기독교, 일본의 종교 정책,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기독교를 이해하는 데에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점을 드러낸다. 그들 스스로의 인식 여부와 상관없이 일본인 기독교인들은 식민지주의 및 기독교의 행위자였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답을 찾기 위해서 본고는 '일본기독교회'(日本基督教会)의 활동에 의해 식민지 조선에 세워진 교회를 특정하였다. 일본기독교회가 발간한 신문 및 출판물, 그리고 식민지 조선의 다른 문헌과 정황을 검토하여 필자는 조선에서의 일본기독교회가 어떻게 시작되고 진행되었으며, 또한 그 대부분이 일본인 식민자들의 교회였을 뿐, 함께 사는 조선인들의 '이웃'이 되지는 못했음을 드러내고자 한다. 황민화 정책이 강화되었을 때 조선과 일본의 기독교는 연합하고 이후로 통합이 되어 일본의 패전까지 지속되었다. 한편 일본인 기독교인들이 남긴 재산의 일부는 몇몇 조선의 교회가 설립되는데 토대가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1952년 이래 한국의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본격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했으며, 고유영토론, 선점론 그리고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을 근거로 한 3대 권원에 대한 주장을 지속적으로 강화해 오고 있다.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영유권은 17세기 중반에 확립되었고, 1905년 각의 결정을 통해 재확인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에 의해 국제적으로 공인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시계열상 1905년 선점론에서 시작하여 1952년 고유영토론을 경유한 뒤 최근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으로 무게 중심을 전환하는 과정속에서, 국제법상 요건의 충족 여부 문제로 환치 및 축소, 역사적 권원으로서의 사실에 대한 왜곡에 더하여 국제법상 법리의 정합성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을 통해 근본적으로 일제식민주의의 침략이라는 본질을 은폐하고자 하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일본의 주장이 국제정치적 역학관계를 바탕으로 이미 결정했거나 실행한 불법행위를 사후적으로 합법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자 명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요컨대,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메이지 유신이래 제국 형성을 위한 대외팽창적 침략정책과 연동됨으로써 1875년 운요호사건,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 등 동아시아 전역에 걸친 일본의 침략전쟁 가운데 한국의 독도주권에 대한 침탈을 무주지선점이란 이름으로 합법화한 것이다. 그러나, 운요호사건을 통해 1876년 2월 26일 근대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에는 국경획정문제가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보완한 태정관(太政官)의 1877년 3월 29일 결정으로 ‘독도 외 1도’는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 외무성의 홈페이지에는 이러한 메이지 정부의 중대한 결정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1962년 7월 13일 한국에 보내온 일본의 의견서에는 오히려 “메이지 초기에도 일본 정부가 다케시마를 일본의 고유영토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선점론과 고유영토론의 이러한 상충적 한계를 전제로 최근 일본이 주장하는 독도영유권 주장의 핵심은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으로, 그 기초과정에서 독도의 이름이 누락되었으나 일본이 제공한 정보에 입각한 딘 러스크(Dean Rusk) 서한을 전제로 실질적으로 일본 영토로 남게 되었다는 논거 역시 일제식민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제기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성격이 징벌적 조약에서 냉전을 전제로 한 반공조약으로 전환됨으로써 1905년의 가쓰라-태프트밀약으로 상징되는 식민주의를 기저에 둔 독도주권 침탈행위의 합법화로 이에 대한 국제법적 불법성과 문제점의 규명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환언하면 일본정부는 1910년 한일강제병합 관련 조약의 경우 무력을 사용한 강박 하에 체결된 조약으로서 법적 효력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일제식민지책임의 면탈을 위해 ‘당시의 법’에서는 합법이라고 강변하고 있는 반면, 한일간 협약체제를 일탈하여 주장하고 있는 독도영유권은 선점론에서 시작하여 고유영토론을 경유한 뒤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으로 무게중심을 전환해 옴으로써 국제법상 시제법의 적용에 있어서도 상충되는 법리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전제에서 일본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는 일본의 독도영유권 논거에 대한 비판에 주목하게 된다. 고유영토론의 실체에 대한 부정론과 그 논거로서 인용되는 1696년 쓰시마번의 도해금지령 및 메이지 정부의 태정관지령을 비롯하여,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의 공포 및 관보 게재에 상충되는 시마네현의 독도 편입은 국제법적 효력이 부재하며,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논거로 제기되는 딘 러스크 서한 역시 1905년 일본의 독도편입 이후 일본이 제공한 제한된 정보에 입각하고 있는 점에서 법리적으로 무효인 것이다. 더욱이 와다 하루키(和田春樹)의 ‘일본의 독도포기론’, 세리타 겐타로(芹田健太郎)의 ‘한국의 독도개방론’, 히로세 요시오(広瀬善男)의 ‘비식민지화 법리론’ 등은 모두 일제식민지책임을 전제로 한국의 독도주권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반면, 독도 주변의 한일공동조업과 독도에 대한 배타적 경제수역(EEZ)의 기점의 불용(不容)을 동일하게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하게 된다. 일제식민지책임으로서의 독도주권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일본의 이익에 대한 사전적 보장을 전제로 하고 있는 해결방안의 타당성은 의문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전제에서 와다 교수가 제시하고 있는 ‘한국의 1948년 쓰시마 영유주장 철회’와 동일한 일본의 조치가 필요하며, 제1차 세계대전까지는 식민지배가 국제법상 합법이라는 주장과 관련해서는 아라이 신이치 교수가 제시한 바와 같이 일본이 한국을 강제병합해 간 시기의 국제법은 국가실행을 중시하는 법실증주의가 주류였던 19세기의 국제법과 달리, 보편적 국제규범에 입각하여 구미의 국제법에도 법의 규범성을 둘러싼 새로운 변화가 제시되던 시기임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일제식민주의 침탈사의 연장선상에서 제기되고 있는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폭력과 탐욕’에 의해 약탈한 영토의 포기라는 가장 기본적인 식민제국주의의 역사적 청산과 배치된다는 점에서 일본은 21세기 동북아평화공동체 구축을 위한 진정한 국제법적 책무를 다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전후 일본의 ‘영토문제’라 하면 오키나와(沖縄)와 북방영토(北方領土)가 주요 대상이었 으며 1972년 오키나와 반환 이후에는 북방영토가 최대 현안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와 센카쿠(尖閣)와 독도에 대한 ‘영토 내셔널리즘’이 높아져 왔다. 그런 가운데 작년12 월 일본총선에서 자민당이 압승하였고 민주당이 참패하였다. 야당에서도 보수 우익 정당들 이 약진한 반면 혁신정당들은 존폐의 위기에 빠졌다. 1955년 체제하 일본정치에서의 보수 -혁신(진보) 대립은 헌법9조, 미일안보, 자위대가 쟁점이었는데 1990년대 후반 소위 ‘총보 수화’를 거쳐 바야흐로 중의원 의원들 중 거의 80%가 헌법‘개정’과 ‘집단적 자위권’에 찬성 하는 등 일본정치의 ‘우경화’가 두드러진다.
일본정치의 보수화·우경화가 한일관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자연 스럽다. 하지만 한일관계사에서는 일본의 보수정치가 항상 부정적으로만 작용한 것은 아니 었다. 그 사실은 1965년 한일협정이래 소위 ‘65년 체제’를 되돌아보면 알 수 있다. 즉, 일본 ‘일당 우위제’ 보수정권과 한국 ‘개발독재’ 정권 사이에서 냉전과 개발의 이익을 일치 시키며 과거청산과 독도문제를 내버려 둠으로서 협조를 이뤄 낸 것이 바로 ‘65년 체제’의 중요한 일면이었다. 따라서 일본정치의 보수화 우경화 가운데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한일관 계에 작용하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일본정치에서의 ‘문 화적 폭력’으로서의 식민지주의와 ‘동맹의 딜레마’ 시각에서 일본의 역사인식과 영토정책을 살펴본다.
This thesis analyses the most popular Korean Protestant magazines “The Youth” and “The Christian News” during the colonial era, in order to examine the Korean Protestant understanding of war and peace of the time. This war, utilizing modern scientific knowledge for military weapons, was an unprecedented disaster that forced Korean Protestants to realize and acknowledge the importance of ‘war’. As Protestantism sought the cause of war in state-ism, scientism, and capitalistic competition, it started to critically view the limitations, contradictions, and necessity for reformation of modern Western civilization, which used to be a role-model. On the other hand, there was critical revision towards historical practices of Christianity, and also search for the ideal Christian response towards war. In general, the human crisis-war-and Christianity was understood as conflicting concepts and Christianity needed to maintain a non-belligerent stance.
The philosophies of Tolstoy and Ghandi’s non-violent social disobedience were also introduced. It is debatable how much their philosophies were understood, but it holds true that there was an introduction to the Korean Protestantism at the time of the philosophical thought that rejected the capitalistic liberalism ideals, that sought the future ideal society in villagecommunities represented by small farmers, and that practiced this through non-violence social disobedience.
But such philosophical thought and search towards peace decreases with the Manchurian Incident in 1931. Eras of Sino-Japanese War and the Pacific war was dominated by arguments of Holy Wars based on definitions of self as absolute right and the enemies as absolute evil.
Such Holy War theories become vastly spread throughout Korean Protestantism during the Korean War and the Vietnam War, generalized as the Korean Protestant response towards war. Today, the Korean peninsula where North and South Korea are hostile towards each other, is a power cake of the world and the possibility of war increases with North Korea’s possession of nuclear weapons. In order to realize the Christian ideals of ‘respect towards life’ and ‘realization of peace’ under such circumstances, there must be critical analysis about the peaceful traditions of colonial times and also the arguments of ‘righteous war’ in order to define what allows wars to be righteous. For Christianity to mediate conflicts of interest and politics, there needs to be much more meditation on what Christianity can do to actively build peace. Moreover, there is a critical need to continuously find and review peaceful movements within church history, such as the ‘The World Day of Prayer for Women Incident’ conducted by women of a nameless church during the Pacific wars, at a time in which the Holy War theory was dominant.
본 연구는 항구도시 칭다오가 20세기 전반에 근대도시로 형성되는 과정에 관한 연구이다. 칭다오의 근대도시화 과정은 동아시아 항구도시의 공통점을 보여주며 강대국 등 정치적 지배 세력에 의해 4개 시기로 구분된다. 첫 번째 독일 점령기 동안에는 칭다오의 구도심 영역이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두 번째 일본 1차 점령기 동안 칭다오의 도심 영역은 북쪽과 동쪽으로 확장되어 기존 도심의 북쪽으로 금융 및 업무시설이 형성되었고 그 북쪽에서 대항에 이르는 지역에는 공업지역이 넓게 형성되었다. 세 번째 북양군벌 및 국민당 통치기 동안 칭다오는 국제적인 상업과 금융, 휴양도시로서 급격하게 확장되었다. 네 번째 일본 2차 점령기 동안 건축 활동은 활발하지 못했으며 이 기간 동안 일본은 중국 대륙 침략의 관문으로서 칭다오를 활용하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