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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9.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지구온난화 및 대기오염 등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이 대두되면서 국제해사기구의 선박 대기오염물질 배출 규제 및 협약이 채택 되었으며, 최근 국내에서는 항만지역 등 대기질의 개선에 관한 특별법안이 제정되어 미세먼지 발생량을 줄이고자 다방면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미세먼지 저감대책의 일환으로 노후화된 연안선박의 디젤엔진을 미세먼지 및 배출가스가 없는 배터리 전기추진시스템으로 전환하는 것에 대한 타당성 조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배터리 전기추진시스템은 연료의 연소로 인한 배기가스의 발생이 없으며, 신재 생에너지원의 적용이 용이하므로 유럽이나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수년전부터 신재생에너지를 적용한 배터리 전기추진시스템이 적용 된 소형연안여객선이 운항 중이나 국내에서는 전무하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국내 소형연안여객선을 대상선박으로 선정하여 태양광 발 전시스템이 연계된 배터리 전기추진선박의 적용 여부에 대해 시뮬레이션을 하였으며, 그에 따른 결과를 바탕으로 배터리 전기추진선박의 적용가능성을 확인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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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5.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청구남승도」를 대상으로 조선시대 명승유람놀이의 내용 및 특성을 살핀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청구남승도」에 나타는 명승지의 도별(道別) 분포 결과 전국 팔도 명승을 고르게 안배하고자 했던 흔적이 잘 드러나 있다. 특히 조선시대 5악으로 알려진 삼각산을 비롯하여 금강산, 지리산, 묘향산 그리고 백두산이 모두 포함되고 있으며 천제단이 있는 마나산과 태백산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때 강토에 대한 애착과 역사의식이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또한 조선의 대표적 승경으로 회자되는 관동팔경 10개소가 모두 집경에 포함되고 있으며 평양, 공주, 부여, 경주, 개성 그리고 한양 등 우리나라의 고도(古都)의 명승지가 비중 있게 표시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명승고적을 모두 망라하고자 했던 의지가 잘 드러나고 있다. 「청구남승도」에 표기된 명승 중 2015년 3월 현재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으로 지정된 곳은 총 21개소로 확인되었다. 「청구남승도」에 표기된 명승지의 유형 분석 결과, 자연명승이 58(48.3%), 역사문화명승 62개소(51.7%)의 고른 비율을 보였으며 자연명승은 명산(名山)이 21(17.5%), 못이 7개소(5.8%), 대(대)가 6개소(5.0%), 강이 4개소(3.4%) 등의 순이었으며 역사문화명승은 누정 33개소(27.5%), 사찰 10개소(8.3%), 읍성과 관아 7개소(5.9%) 의 순위를 보였다. 남승도놀이는 전국의 명승을 익히고 팔도의 풍토⋅산물⋅인물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유람놀이로 자연 경승지와 고도(古都) 등 명승고적을 와유(臥遊)하면서 자연 및 문화경승지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놀이였다. 이 놀이는 한민족의 역사의식을 강조하면서 국토의 지리적 위치와 명승지에 대한 지식과 관심을 높이는 교육적 효과를 발휘했을 것으로 현 명승 활용에 시사점을 제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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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어떤 인물이 남긴 문학작품과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을 읽을 때, 그것이 담아내지 않은 혹은 담아내지 못한 행간 사이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가 살아간 시대의 배경 속에 놓고 파악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인물이 선택한 사회적 참여나 은일적 처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시대의 상황이 과연 어떠했는지가 분명하게 설명되어야 하며, 그런 시대 속에서 그 인물이 선택한 처세는 정당한 것이었는가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박내오가 살아간 시대적 상황 속에서 그의 은일적 삶이 가지는 의미를 살펴보았으며, 그 연장선에서 지리산 유람에 나타난 그의 의식과 지향이 무엇이었는지를 짚어보고자 했다. 지리산 유람에 나타난 박내오의 의식과 지향을 살펴봄으로써 그의 내적 정체성이 남명학파에 가깝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이러한 박내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18세기 강우지역의 인물 가운데 남명학파로 거론되지 않은 인물들을 새롭게 발굴하고 연구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7.
        2017.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17세기까지 금강산을 유람한 인물은 모두 32명이며, 이들이 남긴 유람록 작품은 모두 37편이다. 이들이 금강산을 유람한 유람 경로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었다. 금강산을 찾아가는 유람 경로, 금강 산을 유람하는 과정의 유람 경로,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의 유람 경로이다. 여기에서 다시 금강산 내에서의 유람 경로는 내산에서 유람 을 시작하는 경우와 외산에서 유람을 시작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비로 봉을 등정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17세기까지 금강산 유람록에 나타난 금강산 유람 경로의 특징은 다 섯 가지 정도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유람 인물은 한양, 근기지역 중심이었다는 점이며, 둘째 금강산 유람은 주로 내산 중심이었다는 점 이고, 셋째 금강산 유람지의 명칭이 변천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넷째 유람객들의 숙식처는 사찰이었으며, 금강산 내에서의 경로는 주로 승 려들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점이며, 다섯째 유람 기일에 따라 유람의 경로와 일정이 다양하게 나타났다는 점이다. 이런 특징들은 오늘날과 비교해 보았을 때 후대로 갈수록 다른 양상 으로 나타나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게 한다. 금강산 유람 인물이 보다 전국적으로 분포하게 되고, 외산 쪽으로 새로운 유람 경로 가 등장하게 되며, 오늘날 사용하는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등의 용어 가 시대적 추이에 따라 등장하게 되리란 것을 예상해 볼 수 있다. 그리 고 금강산 내에서의 유람 경로도 점차적으로 다양화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8.
        2016.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16-17세기에 찬술된 유학자의 금강산 유람록 27편을 통해 금강산 불교를 고찰한 글이다. 그 유람록을 통해 금강산 소재의 118개 사찰과 암자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高僧이 있는 寺庵에는 많은 제자들이 함께 수행하고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남한산성 축조에 동원되면서 금강산 사찰이 텅 비다시피 했던 때도 있었다. 금강산 유람객들은 대부분 사찰을 숙식처로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유학자와 승려 사이에 교류가 있었고, 유학자들이 승려 비 문을 써주거나 글씨를 써주기도 했다. 대화가 통하는 경우에는 밤늦도 록 定慧나 理氣 등의 철학적 문제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유학자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거나 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줄일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유람객들은 승려들이 메는 가마를 타고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가마를 메는 藍輿僧은 1565년부터 1572년 사이 금강산을 유람했던 楊士彦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鄭曄과 李世龜의 유람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실제 1572년 이전 금강산이나 지리산의 유람록에서는 남여승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남여승의 관습이 확산된 시기는 16세 기 후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明宗代 文定王后 승하 후 불교 계의 위상이 하락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9.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지리산유람록은 조선시대 지식인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그 감회를 기록한 글로, 지리산에 대한 역사적·문화적·종교적 의미가 함축된 총체적 자료이다. 현재까지 모두 100여 편이 발굴되었고, 경남문화연구원에서는 이를 모두 완역하여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시리즈(전6권)로 출간하였다. 이의 출간과 함께 지리산 또는 지리산 유람과 관련한 전문 연구가 폭증하였고, 나아가 우리나라 ‘산의 인문학’이 지닌 가치를 탐색하는 작업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본고는 1985년에 시작된 지리산유람록 연구의 30년사를 점검하는 첫 번째 자리이다. 관련 성과로는 2015년 4월까지 번역서 6권 외에도 학위논문 10권, 연구논문 38편, 단행본 7권이 확인되었다. 초창기 연구는 주로 金宗直·南孝溫·金馹孫·曺植 등 조선전기의 몇몇 유명 작가의 작품에 치중하여 이루어졌고, 첫 번역서가 나오는 2000년 이후에야 비로소 전문 연구가 성행하였다. 전반적인 연구 경향은 대략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조선조 지식인의 지리산에 대한 인식을 通時的 관점에서 살핀 통합 연구, 작품 및 작가에 대한 개별 연구가 동시에 진행되었고, 번역서 출간 이후 자료의 접근이 용이해지면서 관광학·조경학·건축학 등 타 분과에서의 연구가 행해졌으며, 근년에 금강산·한라산 등 타 명산과의 비교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의 검토를 통해 다음 두 가지를 확인하였다. 현재까지 발굴된 지리산유람록은 모두 조선시대 士人의 기록이다. 이는 유람록에 나타난 지리산 인식이 조선조 士人 부류에 한정된 것임을 전제한다. 30년의 짧지 않은 연구기간과 60여 편의 적지 않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간의 연구가 유람자인 ‘조선 지식인의 士意識’을 해명하는 범주에서 일관되게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또한 연구의 범주가 18세기 이후로 넘어가지 못하고 조선 전반기에 치중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전체 유람록의 절반 이상이 19-20세기에 산출되었고, 게다가 18세기 이후의 지리산 유람은 지리산권역의 지식인에 의해 이루어져 왔음을 감안한다면, 그간의 연구가 지나치게 전반기에 편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의 극복을 위한 다양한 접근이 향후 지리산유람록 연구의 과제로 남아 있다.
        10.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지리산유람록에 나타난 지리산지 주민생활사의 자료 가치에 주목하여 역사지리적인 재구성을 시도한 것이다. 지리산유람록은 지리산지 주민의 생활사에 대한 풍부한 1차적 자료를 시계열적으로 제공한다. 지리산유람록이 여타 유산록과 다른 특징은 이 점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이 연구는 지리산유람록에 수록된 주민들의 생활사를 정리하여 재구성함으로써, 지리산유람록에 어떤 내용적 특색이 있는지를 드러낸 연구사적 의의가 있다. 지리산유람록에 나타난 주민생활사는 환경과 생태, 취락과 주거, 토지이용과 농경, 생업과 산물, 시장과 유통, 신앙 풍속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리산유람록에서는 지리산지의 기후 조건이 주민들의 거주와 생활사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실을 적었다. 겨울철 산지 기후는 산간 주민들의 주거와 이동 패턴도 규정했다. 지형 및 토양 조건에 관해서는 수질, 토양, 비옥도 등이 경작 조건을 관련해 언급됐고, 관련하여 토지생산성, 장수요인, 사회적 피난지대 등이 표현됐다. 삼림식생의 수직 분포와 경관에 대한 표현도 있었고, 천연림과 인공림을 포함한 수종들 및 장소 정보가 많이 나타났다. 지리산유람록에서 읍취락의 주거생활사는 하동의 입지지형과 가구 수, 주민생활사에 대한 약간의 정보가 언급되었다. 마을의 경우에는, 지리산권 산촌의 형성 및 사회적 변동과 관련한 자연적·사회적 배경, 변동의 역사적 계기, 인구의 유입과 유출, 지리산권 주거지역 평가 등의 언급이 다수 있었다. 마을의 자연적·지형적 입지유형, 마을경관, 마을 형태와 규모 등에 대한 표현들도 나타났다. 지리산유람록에서는 주민들의 토지 이용과 농지 개간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나왔다. 고도대에 따른 토지이용, 화전 개간 및 일제강점기의 사회적 축소, 벼농사와 관련한 관개 기술 및 모내기 등의 내용이 있었고, 주요 농업지역에 대한 표현도 나타났다. 주민들의 생업과 산물로서 임산물 채취, 농작물 및 닥나무 재배, 기타 공산품 제조와 관에 바치는 공물 등이 있었다. 화개장터의 장날 풍경도 생생하게 묘사되었고, 매매 품목, 물산의 규모와 유통 범위 등이 기록됐다. 지리산유람록에는 지리산의 여러 민간신앙소와 풍속이 기록되었는데, 이를 통해 조선후기까지 지리산지의 민간신앙이 번성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신앙소의 지리적 위치 및 모습, 신당의 관리 및 운영주체 사실 등도 기록되었고, 특히 천왕봉에 있었던 성모사의 시계열적 변화 모습도 파악할 수 있었다.
        11.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일제 강점기 지리산유람록에 나타난 儒者들의 의식과 특징 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일제 강점기 ‘지리산 기행문학’에는 전통적 지식인인 유자의 한문 유람록과 근대적 교육의 수혜자인 학생과 지식인의 한글 기행문이 병존한다. 그리고 양자 사이에는 한문 문집과 한글 신문이라는 언어와 매체의 이질성만큼이나 상이한 인식론적 편차가 존재한다. 성리학적 유람 문화의 전통 속에서 쓰인 한문 유람록과 근대적 담론의 영향을 받은 한글 기행문이 상호 변별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규정할 수 있을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특수성에, 분과 학문별 연구 대상의 배타성 등이 작용하면서 이 시기 기행문학에 대한 종합적인 접근은 시도조차 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본고에서는 일제 강점기 지리산유람록에 대한 한문학 분야의 심층적인 연구와 지리산 기행문학에 대한 문학사적인 접근을 기대하면서, 일제 강점기 지리산유람록에 나타난 의미와 특징 등을 試論的으로 논구하고자 하였다. 먼저 시대적 특수성에 주목하여, 지리산 기행문학에 ‘전근대’와 ‘근대’가 교차·공존하는 양상을 살펴보았다. 근대적 관광 인프라와 정보를 바탕으로 형성된 ‘근대적 유람로’와, 근대적 위생관념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선교사 휴양촌에 투영된 유자들의 자정과 은일 의식 등을 통해 ‘비동시성’의 교차 양상을, 그리고 공동체적 관념상과 원근법적 시각상, 성리학적 이념과 수양관을 바탕으로 한 천인합일 의식과 자연을 대상화하는 주체중심주의적 사유 등에 대한 고찰을 통해 ‘비동시성’의 공존 양상을 검토하였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의 지리산유람록에는 산을 매개로 한 求道의식과 尊賢정신, 그리고 성리학적 수양과 성찰적 태도가 면면히 계승되고 있으며, 더불어 민초들을 긍휼히 여기는 애민의식과 비판의식이 도저하게 관류하고 있음을 논구하였다. 그렇지만 근대 문명의 확산과 그 혜택으로 인해 이상향에 대한 동경과, 儒仙 의식과 仙趣 경향은 현저히 약화되어 수사적 차원에서 그치고 있다는 점 또한 규명하였다. 본 논문은 동일한 시간에 상이한 ‘역사적 시간’을 살고 있는 두 주체들 간의 인식론적 편차를 명징하게 드러냄으로써 한문 유람록과 한글 기행문의 공시적 차별성을 파악함으로써 이들의 영향관계와 통시적 (불)연속성을 문학사적으로 탐문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12.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조선후기 산수 유람의 실태와 그 문화적 양태 가운데 지리산 유람이 보이는 특성을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유람환경에서 변화가 보이던 18세기 후반 지리산 유람의 양상에 주목하였다. 18세기는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유람의 성격과 환경에 있어서도 그 전과 다른 현상들이 발견되는 시기이다. 유람문화가 크게 유행하면서 유람가라고 지칭될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였으며 관련 문예도 풍부하게 창작되었다. 또한 유람주체들의 계층과 성격도 다양화되고 원거리, 장기간 여행이 늘어났다. 이와 더불어 화폐를 소지하고 주점을 이용하는 여행환경의 변화도 일어났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영남지역의 사족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보유한 지역내 명승 유람에 더욱 몰두하는 현상을 보였고 지리산은 그 대표적 유람지였다. 이는 영남지역의 사족이 처했던 정치적 상황과 지역의 전통적 문화특성이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후기 지리산 유람기의 작성자는 대부분 근방의 처사들이었다. 이들 유람에서 보이는 특성 중 하나는 집단적이며 장기적 여행이 이루어진 점이다. 지리산 유람이 이 지방사족들의 집단적 遊樂로서 기능하면서 그들의 사회적 연망을 재확인하고 확대하며 결속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이 유람을 하면서 酒店을 이용하는 장면이 전보다 자주 등장하는 점도 흥미롭다. 18세기 후반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보여주는 일면이다. 이 밖에 지리산 유람자들은 지리산이 남방의 祖宗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천왕봉에 오른 소회를 토로했다. 지리산의 위상에 자부심을 갖고 지방 사족으로서의 자의식을 투영하였음을 엿볼 수 있었다. 이 논문은 이제까지 지리산 유람기의 분석에서 간과되었던 시대적 맥락과 지역적 특수성을 살피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시도가 지리산 유람문화의 역사적 전개를 탐구하는 데 일조하길 기대한다.
        13.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후기 유학자의 산수 유람기 속에는 사찰이나 승려에 관한 기록이 다수 등장한다. 이 기록들은 제삼자의 눈에 비친 사찰과 승려의 실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에 대한 연구가 미흡했을 뿐만 아니라, 유람자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指路僧이나 가마를 메는 藍輿僧에게 지나친 관심을 둠으로써 抑佛의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유람기가 이해되어온 측면이 있다. 하지만 유람기에는 여러 修行僧의 모습도 함께 등장하기 때문에 그 수행승에게 시선을 돌리면 당시의 불교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조선후기 지리산에는 많은 名僧들이 주석하며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본고에서 다룬 16-18세기 유람기에서도 그들의 법명이 등장한다. 가령, 浮休善修, 逍遙太能, 靑梅印悟, 碧巖覺性 등은 당대 최고의 禪師로서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유람기에서는 이들을 따라 공부하는 승려들이 수십에서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깊은 암자에는 長坐不臥하며 수행하는 수행승의 모습도 그려지고 있다. 유학자들은 유람 도중에 만난 高僧들과 대화를 나누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들의 대화 가운데 心性論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1790년에 李東沆은 유람 도중에 만난 승려 道原과 理氣心性에 관해 대화하였고 그 대략적인 내용이 그가 쓴 유람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보건대, 당시 불교계에서 벌어지고 있던 심성에 관한 논쟁이 유학자와 승려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4.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성리학이 자리 잡기 이전, 곧 조선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렵던 지리산유람록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을 기다려 100여 편이나 등장했다. 그리고 성리학적 전통이 무너져 내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유람록을 남기는 전통 또한 사라졌다. 우리는 바로 이 지점에 주목한다. 그리고 자연스레 하나의 물음을 떠올린다. 유람록의 주체이자 성리학을 이념적 토대로 삼았던 선비, 그들은 도대체 왜 지리산 유람 길을 떠났고 수많은 유람록을 남겼을까? 이 글은 이 물음에 대해 배움과 휴식 그리고 선현을 닮기 위한 노력이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선비들이 유람을 떠난 동기를 찾아보고, 그것이 어떻게 넓게는 유학 그리고 좁게는 성리학과 연결되는지를 확인하고 있다. 선비들의 유람은 한편으로 일상의 배움을 이어서 세상을 읽어가는 또 다른 형태의 배움을 위한 길이자,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일상의 긴장을 해소하는 휴식의 길이었다. 그리고 긴장과 이완이라는 두 가지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선비들이 성취하고자 했던 것은 다름 아닌 선현들과 닮은 모습, 곧 자신이 현인 혹은 그와 같은 인격으로 완성되는 것이었다. 선비들에게 긴장과 이완, 배움과 휴식이 둘이 아니었다면, 그것을 통해서 선현을 닮아가는 것 역시 또 다른 길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유람은 선비들에게 세상을 읽는 하나의 방식이었다. 세상 읽기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은 가끔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둘 수 있을 때 더욱 충실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점에서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것과 함께 유람록의 전통이 세워지고, 성리학적 전통이 무너지는 것과 거의 동시에 유람록의 전통 역시 사라지는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선비들의 시대가 끝나면서 이들이 세상을 읽던 방식 역시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5.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조선시대 관인의 생활은 격무에 시달리는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 관인들은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탈속의지를 항상 표출하였다.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귀거래하지 못하는 처지를 하소연하기도 했고, 여가에 가까운 산수를 찾아 잠시나마 탈속의 기분을 즐기며 돌아왔다. 관인들이 탈속을 즐기기 위해 가장 많이 선호한 공간은 산수였고, 유람을 통해서였다. 연속적인 스트레스에 골몰했던 관인들은 산수벽을 관념처럼 지니고 살았다. 번다한 일상에서 벗어나 자연에 귀의하여 자적하는 安分의 삶을 이상으로 여겼다. 관인들의 산수유람 열망은 매우 컸다. 잠시라도 기회가 생기면 산수를 유람하며 탈속의 기분을 즐겼고, 그 기분을 잊지 못하여 또 다시 유람하고자 하는 유람벽으로 이어졌다. 관인들의 유람벽을 더욱 깊게 만들었던 산 중의 하나는 신선세계로 유명했던 지리산이었다. 관인들이 탈속의 기분을 즐기기에 지리산만한 곳도 없었다. 그러나 공무에 바쁜 관인들에게 지리산은 쉽게 유람할 수 있는 산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지리산과 접해있는 군현의 수령으로 부임하거나 공무 차 지날 기회에 짧게나마 유람하고, 평생의 숙원처럼 여기며 갈망했던 지리산 유람의 積翠를 풀었다. 하지만 지리산은 몇 일만에 모두 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관인들의 지리산 유람은 늘 아쉬운 소회로 남았고, 언젠가 또 찾아야겠다는 유람벽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16.
        2013.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의 목적은 ‘우리는 왜 지리산을 찾는가, 지리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라는 답을 찾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써 조선조 유자들에게 지리산이 어떻게 인식되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본 논문은 첫째, 지리산이 大山으로써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조선조 유자들에게 지리산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산, 국토의 중앙에 우뚝 솟은 웅장한 산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가장 높고 웅장한 산이기에 직접 오르고 싶은 산이었다는 사실이다.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항상 ‘가장’은 ‘최고’의 의미로 인식되곤 한다.두 번째로 지리산은 승경을 지닌 빼어난 산으로 인식되었다. 논의의 집중을 위하여 청학동을 제외하고 천왕봉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았음에도 지리산은 빼어난 승경을 지닌 산으로 나타나고 있다. 유람록과 유람시에 묘사된 천왕봉은 승경을 지닌 명산이다. 실제보다 훨씬 아름다운 산으로 관념 속에서 미적 아름다움은 완성되어 갔던 것이다. 그러나 관념 속에서 획득한 미감이기에 구체적인 미적 표현이 약화되어 나타난다는 아쉬움이 있다고 주장하였다.세 번째로 지리산은 탈속의 공간으로 인식되었다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천왕봉에 오르는 일은 세상 밖으로의 입문이며, 천왕봉은 종종 천계의 입구로 인식되었다. 천왕봉은 하늘문이지만 거기까지였다. 즉, 천왕봉은 세상 밖이지만 천계는 아니었던 것이다. 청학동에서 나타나는 선계로의 몰입이 천왕봉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탈속의 공간이지, 선계로는 구현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가 천왕봉의 장소성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천왕봉은 탈속의 공간으로써 세상의 짐이 내려지는 공간이었다.
        17.
        201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에서는 조선조 문인들의 지리산에 대한 인식과 그 변화를 고찰하였다. 조 선시대 유산시는 대체로 몇 가지 투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것을 대별 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지리산을 삶의 터전으로 인식하여, 그 중요성을 부각시 키는 것. 둘째, 지리산에 대한 敬畏心을 담아내는 것. 셋째, 지리산에서 浩然之 氣를 기르고 발산하는 모습을 표현하는 것. 넷째, 지리산을 仙界나 理想鄕의 소 재처로 보아 憧憬하는 태도를 드러내는 것. 다섯째, 지리산과 연관이 있는 인물 을 연상하면서 尙友千古의 자세를 보이는 것. 여섯째, 지리산 등산을 修己, 또는 학문 연마의 비유로 삼는 것. 유산시에 나타난 이런 투식은 곧 지리산에 대한 인식의 유형을 의미하며, 이것은 오랜 기간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하지만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약간의 변화된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즉, 唐詩 風의 서정적인 작품이 등장하기도 하고, 보다 현실적인 사고를 담아내기도 하 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自尊感을 여과 없이 드러내기도 하였다. 또 시 국 변화에 따라 國運을 염려하는 마음이 삽입되기도 하였다. 이것은 문인들의 사고가 근대화 되어가는 한 모습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