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의 목적은 전쟁 후의 정의에 있어 정치적, 윤리적 우선순위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살펴 보는 것에 있다. 본고에서는 이를 위해 정 의 전쟁론에 기반하여 전쟁의 규범성 및 윤리성을 검토함으로써 전쟁 후 의 정의에 필요한 요건들을 살펴보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 라엘의 가자지구 하마스 섬멸 작전은 최근 신냉전 담론을 일반화 시키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는 동시에 전쟁 규범의 목소리를 키웠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전쟁들의 정당성과 전투 가운데 벌어지는 제 사건들 에 대한 윤리적 비난 등이 그것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혼란 가운데 전 쟁의 규범성에 주목했다. 정의로운 전쟁이 되기 위한 정당성은 어떻게 형성이 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정의전쟁은 구현할 수 있는가? 사실 이는 규범과 국가이성, 합리적 자조(self-help)행위 간 충돌과 그로 인해 폭로 되어진 규범의 이중성은 권력의 불가분성을 설명한다. 그리고 완성은 전 후 정의에 대한 승전국의 선언으로 끝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동시에 전쟁 피해자의 피해 복구 또한 전쟁 후 정의로서만 복구 가능하다. 혹자 는 이러한 피해자의 피해 복구는 전쟁범죄에 대한 처벌로만 가능하기 때 문에 승전국은 이를 피해 화해를 앞 세워 전쟁의 정당성을 완성하려 한 다고 본다. 그러나 전후의 정의는 오히려 처벌과 화해가 동시에 양립함 으로써 수립된다고 본 고에서는 주장한다. 이러한 연구는 전쟁이 한참인 가운데 전쟁 이후의 정의로운 평화를 구상하는 편린이 될 수 있다는 점 에서 유의미하다. 더불어 현재 전쟁들에 대한 정당성이 아닌 전후의 정 의를 논한다는 점은 연구의 공헌성을 더 한다.
소설 『평양은 선언한다』는 북한의 다른 문학작품과 달리 사회주의 체 제 전환 시기의 이념적 갈등 양상을 비교적 세세하게 다룬다. 본 연구는 소련과 동유럽의 사회주의 체제 전환 과정에서 일어난 북한 체제 내의 갈등 양상을 『평양은 선언한다』를 통해 추적하면서 이러한 정세변화에 대해 북한 체제가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던가, 어떤 메시지를 대내외에 전파하고자 했던가를 분석한다. 당시 북한에서는 핵심 계층과 인텔리 계 층 내에서 소련의 ‘개편’과 관련한 이념적 갈등이 존재했으며, 당과 인민 을 유리시킴으로써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 원인이 된 관료주의와 부정부 패 현상을 우려했다. 소련의 ‘개편’이 다원주의를 추구하여 체제를 붕괴 시키는 길이라는 점을 폭로하고 관료주의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 한다. 소설은 이와 같은 적대적 혹은 비적대적 갈등을 사실적으로 다루 면서도 이러한 갈등을 김정일의 영도력으로 극복하는 과정을 그려 다른 나라 사회주의 체제와의 차별성을 부각한다.
본고는 드포(Daniel Defoe)의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 1719)와 예이츠의 전환기 시를 중심으로 각 작품의 배경이 되는 18세기 초 영국 사회와 20세기 초 아일랜드 사회를 조명한다. 우선 이 연구는 『로빈슨 크루소』가 소설의 발생을 중심으 로 하는 당대 사회적 변화와 이로 인한 세대 및 계층 간의 갈등 구도 속에서 탄생하였다 는 점에 주목한다. 또한, ‘종교적 전통으로의 회귀’에 초점을 맞추어 18세기 초 영국의 사회와 문화 속에서 이 소설이 담당하는 역할과 가치를 고찰한다. 한편 예이츠의 전환기 시는 20세기 초 아일랜드 사회에서의 갈등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문화운동으로 아일랜드 민족을 통합하려는 예이츠의 시도는 아일랜드 민족에 내재된 언어, 종교, 계층의 다양성으로 인해 오히려 분열의 지속, 심화 양상을 보인다. 예이츠는 전환기 시인 1913 년 9월 (“September 1913”)에서 물질주의에 집착하는 가톨릭 중산층에 대한 경계심을 표현하고 중산층에 대항하여 낚시꾼 (“The Fisherman”)에서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한다. 그는 가톨릭 중산층과 영국계 개신교 엘리트 집단 양쪽을 비판하며, 인간애에 기초 한 귀족주의를 지향한다.
본 연구는 일제강점기에 표정(瓢庭) 송병우(宋炳宇, 1874∼1944)가 조영한 익산 함벽정원림을 대상으로 문헌조사, 현장조사 그리고 관련자 인터뷰 등을 통해 원림의 특성과 전환기적 조영 양상을 추적한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삶과 정신세계의 소중한 결정체였던 누정문화가 일제강점기라는 정치·문화적 과도기에 어떻게 계승, 변동되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전환기적 시대 문화가 지역의 근대 정원문화 담론(談論)에 어떤 역할을 끼쳤는지를 조명하고자 한 본 연구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함벽정의 입지와 규모 그리고 기능과 구조를 보았을 때 함벽정 일대는 별서원림으로 서의 성격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함벽정 지붕의 소재인 붉은색 자기와(磁器瓦), 기단·초 석·기둥의 형태, 계단 입구부의 장식성, 공포결구 수법, 사각기둥과 사분합의 문비(門扉) 그리고 화려하고 다채로운 단청과 지붕 합각부의 ‘쌍희자(雙喜字)’ 길상문 등은 일제강점기 지역의 경제 강자가 보여줄 수 있는 전환기적 의장기법의 양상으로 파악되었다. 공간 및 시각구성 그리고 시설 배치 상의 전환기적 설계양상으로는 정자의 규모 및 암대(巖臺)를 활용하여 이루어진 축산(築山), 적극적인 읍경(挹景)의 조망처리기법 그리고 급경사지역에 형성된 5단의 화계(花階)에 적용된 돌쌓기기법을 들 수 있다. 또한 함벽정원림 조성 이후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상황 아래 일제의 수리사업에 동조와 유지관리 과정에서 행해진 양버즘나무, 왕벚나무 등의 대체식재나 보완식재는 전통식재의 규범 혼란 속에서 나타나는 식재상의 전환기적 양상으로 추찰된다.
호남학회 성립 이전에 호남지역에서 상경한 뜻있는 인사들은 주권이 심각한 위협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국권 회복을 갈망했다. 그러한 열망을 품은 당대 호남의 지식인들은 계몽 단체에 참여 하여 활약하는 동시에 국운 회복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재경호남 지식인들은 호남지역의 계몽과 신교육의 진흥을 목적으로 호남학회를 조직하였다. 호남학회를 근거지로 회원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호남을 기반으로 특정 지향점을 공유하는 지식인 공동 체가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본고는 호남학회 활동시기 참여자들의 공론장 형성 활동을 기술하 고자 하였다. 특히 공론장의 주요 의사소통 행위자로 활약한 이들의 공론 표출 양상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호남학회와 『호남학보』를 중심으로 형성된 지식인 공동 체의 성격과 유학적 관계망을 통한 호남 공론장의 특성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근 대전환기 호남의 공론장 연구를 한 단계 더 진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동유럽 국가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냉전체제의 붕괴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변화 등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측면에 있어서 급격한 변화를 경험하면서 민주주의 정치체제, 시장경제체제 그리고 자본주의 문화를 수용하였다. 동유럽 공산체제는 공통적으로 경제위기에 따른 생활수준의 급격한 하락 그리고 글라스노스트(Glasnost, 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 (perestroika, 개혁) 정책으로 서구와의 협력을 모색하였던 고르바초프 (Gorbachev)의 등장 등으로 붕괴하였다. 이외에도 동유럽 국가들은 민주체제전환 과정에 있어서 그들 자체의 공산주의 특색을 보이며 상이한 체제전환을 경험하였고 폴란드와 헝가리의 체제전환은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에게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였다.
동유럽 국가들의 사례와 같이 체제전환에는 심각한 정치적 문제와 중 대한 법적 과제를 수반한다. 공정하고 투명한 방식에 따라 기존의 공산주의 과거사를 정리하지 않는다면 과도기 민주정부가 추구하는 국민 통합 및 상생은 달성될 수 없으므로 전환기 정의(transitional justice)에 대하여 논할 필요가 있다. 정치적 변혁기에 있어 전환기 정의는 국가가 법의 지배(rule of law) 원칙에 따라 합법적이고 공정하게 과거 억압하던 체제의 악행 및 불법행위에 대해 해결하려는 것을 의미한다. 민주체 제로의 전환은 그 과정에 있어 민주적이어야 하고 법의 지배 원칙에 부합되어야 한다. 동유럽의 공산체제 붕괴 이후 과거사 청산 과정에 있어서 국가들은 일반적으로 공산정권으로부터 탄압당하고 희생된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 및 정치적·법적 신분 회복, 가해자 명단 공개 및 심판, 공 산정권 요원과 협력한 자의 활동 제한, 공산정권 당시 작성된 문서의 당사자 열람, 진실과 화해를 위한 위원회 구성 등의 문제를 다루었다. 폴란드와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은 과거사 청산을 진행하면서 피해자들에 대한 정의를 구현하고 공산정권 당시 권력자 및 이에 협력한 자의 권리 를 박탈하여 진정한 주권 국가를 형성하고자 하였다.
이 글에서는 폴란드 및 헝가리 사례를 중심으로 1980년대 체제전환기 두 국가의 과거사 청산 과정을 분석하고자 한다. 이는 과거사 청산에 있어서 어느 방안이 옳고 그른지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각 국가의 당시 상황 및 문제점을 분석하고 공산주의 과거사 청산을 위한 법제 및 그 문제점을 분석하여 시사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폴란드 및 헝가리의 과거사 청산을 살펴봄으로써 향후 통일 한국의 과거사 청산 과정에 있어서도 진정한 과거와의 대면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로써 국민 통합 및 상생의 과제를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중서부지역이나 최근 新자료가 늘어난 강원지역 등과 다른 양상으로 진행되는 영남지역 신석기~청동기시대 전환기에 대한 자료의 검토를 위해 작성되었다.
그간의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전환기 양상연구에 대한 동향은 많은 연구자에 의해 단절 또는 계승이라는 이분법적 연구결과로 점철되어 왔다. 그 배경은 양 시기 집단이 고고자료상 매우 소극적 접촉결과만을 남기고 있다는 점을 주된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양 시기의 물질문화에 대한 구체적 비교·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고 토기나 문양 또는 역연대의 결과도 양 시기가 결코 단절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견해가 우세한 상황이다.
전환기 양상을 검토함에 있어서 그동안 신석기시대는 가장 최후의 토기양식기인 율리식단계에만 집중한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신석기 최후 단계인 율리식토기단계의 경우 대부분의 유적이 패총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취락유적으로 존재하는 청동기시대의 물질문화와 직접적인 비교를 하기에는 이중구연토기라는 한정적 자료에 봉착하여 더 이상의 논의를 하기 힘든 점이 사실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전환기 양상을 급격한 시간적 간극을 통한 과정으로 파악하고 자료의 외연을 후·말기로 확장하여 파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자료의 선정에 있어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유구가 동일 유적·층위에서 확인된 사례를 검토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어 영남내륙지역의 김천 송죽리유적, 밀양 금천리유적, 남강유역의 상촌리유적, 진주 평거 3-1지구유적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 결과 접점이라 할 수 있는 이중구연토기, 문양, 이형토기 등에서 공통분모를 어느 정도 간취할 수 있었고 그러한 공통분모를 양방향적인 교류로 이해하였다.
본고는 중국 도농관계의 역사적 변화궤적을 근대전환기, 중화민국시대, 마오쩌둥 치하 사회주의시대로 구분해서 추적함으로써 오늘날 중국 도농관계의 역사적 맥락을 조명하고자 하는 연구이다. 근대전환기는 전근대 중국의 도농관계를 특징지었던 사회문화적 연속체가 해체 되고 근대적 도농이분법과 도농불평등의 정치경제적 문화적 단초가 마련되는 시기였다. 중화 민국시대에는 중국경제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본격적으로 편입되고, 서구로부터 사회진화론의 개념적 프레임이 도입되면서 도농관계가 문화적으로 급격하게 재구성되는 시기였다. 이에 따라 중국의 도시는 진보의 상징이자 모더니티의 소재지로, 농촌은 봉건적 낙후성과 무지 몽매의 장으로 정의되고 재현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시대 중국의 도농관계는 표면적으로 양립 불가능할 것 같은 이념적 양가성을 통해 구성되었고, 이는 문화혁명기에 절정에 이른 상산하향운동을 통해 극적인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 연구를 통해 조명한 중국 도농관계 변화의 역사적 궤적은 오늘날 중국 도농관계의 문화적 구성과 그것이 중국의 정치경제적 문화적 지형에서 갖는 중층적 함의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적 발판을 제공해줄 것이다.
예이츠는 「1913년 9월」에서 중산층의 물질중시와 현실안주를 비난하면서, “낭만적 아일랜드”가 사라진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영웅적인 투사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죽었지만, 그는 새로운 아일랜드 창조에 중산층과 강경한 민족주의자들을 오히려 방해요인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낭만적 영웅심’이 사라지게 한 현 상황에 자신도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식하면서, 화자인 예이츠의 분열된 혼란스러움이 재현된다. 「1916년 부활절」에서도 부활절봉기에 대한 화자의 유동적인 마음이 잘 나타는데, 봉기에 수반된 폭력에 대한 찬사라기보다는 폭력에 대한 의구심을 드러낸 양가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들에서 재현된 예이츠의 입장과 태도는 고정되거나 미결정의 상태로 끊임없이 출렁이는 이중성을 드러낸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ultimately subjected to the Orientalism, even though this deals with some positive effects in the realm of art and architecture as the scope of study, because through which the relationship between two different cultures will be discussed. That is to say, this research focused not only on how the presentation of ‘avant-garde’ visual art, which is explained as formal ‘purity’ and ‘abstraction’ as the characteristics of modern arts, could be made in the transition to the 20th's World, but also on what is the role and meaning of Eastern thoughts, which is popular in that time, for the new philosophical background of the artistic revolution. As a result, this study found that a lot of ‘avant-garde’ architects such as F. L. Wright, M. Mahony in Prairie School and L. Sullivan, D. Burnham, J. Root in Chicago School, and Lauweriks, H. P. Berlage who introduced Wright's works into the Europe, had possessed the ‘Universal Philosophy’ including Unitarianism, Transcendentalism, Deism, and Theosophy which are all influenced by Oriental religions and thoughts through historic western philosophers, although it is generally well-known that W. Kandinsky and P. Mondrian were belong to that. Furthermore, they gave attention to the Oriental religions and thoughts in that time, eventually made a historical progressive process of unification of thoughts between East and West. In a word, the new universalism was the philosophical background that made the artist's idea and presentation on ‘from Being into Becoming’.
Around 1900, Yeats dreamed and put into practice the national theatre that could lead the crowds into a unified nation. And the theatre he imagined was essentially an occult one in which audience’s minds flow into each other and become one Great Mind professed in the doctrines of ‘Magic’ (1901). After the performances of Synge’s In the Shadow of the Glen (1903) and Padriac Column’s The Saxon Shillin’ (1903), Arthur Griffith attacked Yeats for not serving the nationalist’s cause. The ensuing debates around “the national art versus nationalist propaganda” infuriated Yeats, throwing down his hope for the middle and lower-middle classes. The attack and riots that lasted for a week after the performances of Synge’s Playboy of the Western World (1907), and after that the Hugh Lane controversy, deepened his anger towards them. So some poems that is included in from The Green Helmet and Other Poems (1910) and Responsibilities (1914) are full of the crowds, who pull down the high aristocratic values, laying them as “one common level.” As Yeats’s hope for the crowds vanished, his early theatre project that wanted mass mobilization into a nation changed into the unpopular theatre and an audience like a secret society. He began his work with the Irish theatre by theorizing that a popular nationalist theatre would be an occult one, but by 1915 he desired a theatre as occult precisely because it was not popular. The major difference between the two was the scale on which they operated, namely the nation versus the aristocratic drawing ro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