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understand the shape of the Sijeon (Licensed-Markets) established around the Jongno and Namdaemun-ro Avenues in Hanyang during the Joseon Dynasty in the 19th and 20th centuries and then to examine the relationship with the urban structures of Hanyang City. By investigating the excavation results of the Cheongjin and Gongpyeong areas, drawings, photos, and documentary records related to the city, this study classified the building types in the Jonggak area. As a result, since the 19th century, the basic form of Sijeon with 2 Gan(間, bay) in the front facade and 3 Gan(間) on the side, in other words, 5m in the front and 8m in the side was arranged in parallel, and it was a type with a corridor-type courtyard inside. The inner sides of Jongno Avenue had an atypical flat shape that suited the more free lot, and a courtyard-type plan with a single entrance was also confirmed in the one or two Bang(房, district). This study reflected the operation method of the Sijeon buildings b between the one unit and the other units, which affected the internal spatial structures, and it found that the size and style of the Sijeon buildings were closely relevant to the size of the lots near Jongno Avenue.
This study aims to examine the changes in Pyongyang-bu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and Pyeong-an Gamyeong through gazetteer, pictiroal maps and various literature. The results are as follows. To begin with, unlike other gamyeong, Pyongyang-bu had an exclusive government office facility from the beginning and had a different status because of the route for envoys from Ming. Therefore historical sites related to Gija were important. Second, the importance of Pyongyang city-wall increased even more through the Japanese Hideyoshi invasions in 1592 and the Manchu Invasion in 1636. However, since the post-war restoration was insufficient they focused on defense reducing the size of Pyongyang city wall. Third, as society stabilized, Pyongyangbu's finances were greatly secured. King Sukjong systematically reorganized Pyongyang city wall and facility of Pyongy-an gamyeong. The nothern wall in located high place, Gamyeong and storage in middle height and military force and guesthouse in the center of Pyongyang-bu. I-a and warehouse facilities in the far south were placed around the Daedonggwan. The urban structure that runs from Daedonggwan to Daedongmun was the same as other city. Another pertinent point is Pyeong-an gamyeong had more military facilities and rear garden and pavilion than before. In clunclusion, Pyeong-an gamyeong did not pass through three gates, but only through two gates. And it was characterized by more various space and having more pavilions than other gamyeong.
The Sijeon (Licensed Markets) legally permitted by the government along the Jongno and the Namdaemunro Avenues played a central commercial role in Hanyang. However, after the opening of the port in the late Joseon era, the Licensed Markets suffered a blow and declined due to the introduction of a new product of civilization and the appearance of foreign merchants. Although the Licensed Markets, which have been maintained without major changes for a long time, have played a major role in the urban spatial structure, the exact location has not been still determined, and researches until now has remained limited for such that. In this study, based on the 1912 land survey records, the location of the Licensed Markets pre-and post- 1910 is identified, and the spatial change of the dismantling process is investigated.
본고에서는 주관성을 기저로 ‘一会儿’과 ‘不一会儿’ 구문의 생성조건을 분석하여 두 구문의 차이를 살펴보았는데, ‘一会儿’은 객관량과 주관대량 및 주관소량을 나타내고, ‘不一会儿’은 주관소량만을 나타내며 주관성이 더 강조된다. 그 중 ‘不’는 주관정태표 지사로 작용할 뿐만 아니라 두 구문 사이에 양의 등급성을 구현한다. 나아가 ‘不一会 儿’ 구문의 주관성 획득 과정 및 부정표지사가 여전히 구문에 존재하는 내부 원인을 분석해 보았다. ‘(不)一会儿’ 구문은 전체는 부분을 우선한다는 인지적 현저성을 근거 로 잉여부정구문으로 부호화된 구문 전체를 우선 지각한 다음 구성소로서 부정표지 사의 정보를 지각하고 선택 배치한다. 이때 구문 내 부정표지사 ‘不’의 주관성이 강 요되며, ‘不’는 주관소량의 표지사로서 구문의 표의에는 어떠한 변화도 생기지 않은 채 문장의 표면에 명시되어 화자의 강한 주관정태를 전달함을 알 수 있었다.
This study explores the application aspect of The detailed rules of Census (1896) through the change of Kan numbers in Gyeonpyeong-bang. Although Gyeonpyeong-bang was a high-priority area because of its location, it was difficult to trace the operation of the urban situation due to lack of data. This study is focusing on restoring space and society in the Gyeonpyeong-bang using the information on the type of houses and the number of Kan listed in the family register of Hanseong-bu. The detailed rules of Census sets out provisions for the family registry and the rules of making Tong. Especially when it comes to the rules of making Tong, this rule deals with the code of making ten Hos into one Tong. This study was conducted by dividing the status of the Tong into three types: uncompleted Tong, exceeded Tong without vacant Ho number, and exceeded Tong with the vacant Ho number. Since these three types of Tong are in the process of change towards the complete Tong with 10 Hos, they were thought to be able to demonstrate the specific application of the rules. This study will be meaningful as a case study that expands the point of existing research on the Tong making rules, which was not focused relatively on restoring urban conditions at that time, by looking at the changes in exceptions that deviated from the Sipgajaktong rule.
The former administration office building of Kyeong-seong-bu(京城府) was a building converted from the Japanese residency-general's of Kyeong-seong(京城理事廳) which was originally built as the Japanese consulate in J oseon(日本領事館). It was too worn and too small as a Kyeong-seong-bu administration office even with several annexes. Kyeong-seong-bu tried to build a new big administration office building at the vacant north side of the same site, which was closely faced to the rotary in front of the Bank of J oseon(朝鮮銀行前廣場). But this trial was ended in vain due to insufficient budget. Therefore Kyeong-seong-bu built a new administration office building in another site and moved to it in 1926 with debts. For paying for the debts Kyeong-seong-bu sold the former site after partitioning with new roads through it. As a result the nature of the former site and its surroundings was changed. This study traces the changes and inquires how the authorities in the colonial J oseon and various commercial powers of Kyeong-seong-bu behaved for their own interests in the meantime. It makes use of the historical records and documentary literatures between early 1910s and early 1930s.
본 논문은 부뉴엘이 이미지와 상상력을 극단적으로 활용하여 그려낸 <안달루시아의 개>와 <황금시대>에 나타난 회화적 이미지의 저항적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이는 초현실주의의 환각을 통해 드러난 시선이 어떻게 영화 속에서 왜곡된 이질적인 이미지들로 나타나는가를 밝혀 내는 것이다. 그의 반이성주의 및 반부르주아적 태도는 영화 속에서 각종 억압 체제를 비판하는 힘과 욕망으로 나타난다. 이렇듯, 그의 영화는 초현실주의의 영향, 자신의 신념, 그리고 풍부한 상상력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초현실주의의 기법인 카다브르 엑스키(cadavre exquis)가 영화에 접목된 이중인화의 장면들은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는 기능을 한다. <안달루시아의 개>와 <황금시대>는 꿈과 몽상에 기초한 환각의 서사로 이루어진 초현실적인 영화이다. 부뉴엘의 초현실주의적 미학 원리는 작가의 고유한 시선, 사회제도에 대한 강한 저항의 시선, 그리고 종교적 우상 숭배에 저항하는 신성 모독적인 종교적 시선에서 잘 나타난다. 이 세 가지 시선은 초현실성을 바탕으로 기존의 억압체제를 비판하는 저항의 수단이다. 그의 두 작품은 사회와 종교의 억압성을 비판하고 초현실적 시선으로 자신이 욕망하는 세계를 몽환적으로 그려낸 일련의 저항적 회화이다.
Dasineura jujubifolia was introduced into Korea for the first time in 2011, a gall midge feeding on jujube (Ziziphus jujuba Miller (Rhamnaceae)). Since then the jujube gall midge become a serious insect pest of Jujube in Korea. In this year, we surveyed regulated and alien insect pests by collecting damaged leaf samples from different regions in Korea. Jujube gall midge and its life stage were identified by morphological and genetic characteristics. For molecular identification, we analyzed the cytochrome c oxidase subunit I (COI) sequences of pest. In this study, we report the morphological description and genetic information of D. jujubifolia.
본 논문은 잉여부정현상 가운데 하나인 ‘难免(不)VP’ 구문을 연구하였다. 통시적 고찰을 통 해 ‘难免’의 문법화 과정을 분석하고, 공시적 관점을 결합하여 형식과 의미의 비대칭 양상을 분류하였으며, 문법화 과정을 이끄는 기제 및 통사 층위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없었던 잉여 성분 ‘不’의 인지, 화용 층위에서 역할을 모색해보았다. 먼저 ‘难免’은 동사에서 부사로 4단계 문법화를 거쳤다. 첫 번째 단계는 ‘难免’이 단독으로 술어로 활용되는 시기로 문법화는 시작 되지 않았다. 두 번째 단계는 체언성 또는 용언성 목적어가 후행하기 시작하면서 통사구조 관계가 술목구조로 변하는 시기이다. 여전히 동사성이 강하게 나타나며, 이때 ‘难免’은 ‘难以 避免, 很难避免’으로 확장 가능하다. 또한 후행하는 성분들은 객관적인 조건하에 추측 가능한 결과를 나타내었다. 세 번째 단계는 부사화가 시작되어 과도기적 단계를 거치는 시기로 용언 성 목적어가 후행하는 빈도가 급증하였다. 술목관계에서 술어로 활용되는 ‘难免’의 통사 위치 는 문법화되기 쉬운 부사어 자리이이며, 또한 후행하는 VP의 의미 변화 등과 더불어 외재하 는 구조형식의 변화로 문법화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때 ‘难免’은 동사 또는 부사로 볼 수 있었다. 네 번째 단계는 부사화가 성숙되고 완성되는 단계이다. ‘难免’의 두 형태소는 원래의 의미를 소실하고 완전히 결합하여 더 이상 ‘难以避免, 很难避免’으로 확장할 수 없었다. 또한 재분석과 화용강화를 통해 잉여성분을 포함한 부정형식 ‘难免不VP’가 나타나고, ‘难免’은 완 전히 부사화 되었다. 문법화가 완성된 후 ‘难免(不)VP’ 구문은 후행성분 VP와의 통사, 의미관 계 속에서 긍정형식 또는 부정형식으로만 활용 가능한 경우와 긍정형식과 부정형식이 의미상 차별이 모호해지는 3가지 비대칭 양상으로 나타났다. 또한 ‘难免VP’ 구문과 잉여부정 ‘难免不 VP’ 구문은 전경과 배경의 역전 현상을 통해 ‘难免VP’ 구문은 VP의 발생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 전경이 되어 VP를 지향하고, ‘难免不VP’ 구문은 VP의 발생을 희망하지 않는 화자의 심 리 상태가 전경이 되어 ‘不VP’를 지향함을 알 수 있었다. 객관적으로 동일한 사태(VP)를 주 관적으로 해석해낸 것이다. 따라서 ‘难免(不)VP’ 구문은 개념화자의 인지적 경향성과 인지적 전략에 따라 전경과 배경의 시점이 역전되는 현상을 기저로 통시적 문법화 과정에서 재분석 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또한 ‘不’를 통해 화자가 보다 적극적이고 의도적으로 주관적 의미를 부여하고, 무표 형식인 ‘难免VP’ 구문에 대립되는 유표 형식인 ‘难免不VP’ 구문을 통해 주관 화가 실현된 표현으로 ‘不’는 주관화의 표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본고는 『삼국지』와 『삼국지평화』, 그리고 『삼국연의』에 이르기까지, 여포의 ‘義父殺害’ 고 사가 어떤 양상으로 變容되었는지 살펴보았다. 각각의 작품들은 여포와 정원·동탁과의 관계 및 그들이 여포의 손에 살해되는 과정 등을 相異하게 묘사하였기 때문에, 그 안에 내포되어 있는 여포의 배신 요인 역시 차이가 있다.
역사서 『삼국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여포는 “용맹하나 지모가 없는(勇而無計)” 인물로, 올 바른 정세 판단을 하거나 제대로 된 主君을 알아보지 못했다. 즉, 어리석음이 그를 배신자의 길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겠다.
元代 『삼국지평화』는 여포의 배신에 허구를 더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이 작품 에서 정원과 동탁은 여포가 살해를 저지를 정도로 그를 극단으로 몰아붙였고, 때문에 여포의 살인은 배신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삼국지평화』에서 여포는 反面人物이기 때 문에, 그의 살해 동기를 크게 부각시키지 않는다.
『삼국연의』의 여포는 과도한 자부심을 가진 인정욕구가 강한 인물로, 그의 판단과 행위의 준거가 되는 것은 나르시시즘(narcissism)의 만족 여부이다. 여포는 정원과 동탁으로 인해 나 르시시즘이 억압되자, 그들을 죽이는 배신을 저질렀다. 그는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기중심적으 로 해석하고 판단했기 때문에 배신을 거듭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결국, 『삼국연의』의 유행과 영향으로 인해, 여포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반성을 모르는 배 신자’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dissolution process of Dongnae-bu Dongheon Block(東萊府東軒 一廓) under the Rule of Japanese.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the space orgnization of Dongnae-bu Dongheon Block(東萊府東軒一廓) proved to be clear on the basis of Dongnae-bu Eupji (東萊府邑誌), the ficture of Dongnae-bu(東萊府) and the Original Land Registration Map(地 籍原圖) at the end of Joseon Dynasty. Second, the old government offices, as well as Chungsin-dang(忠信堂), were converted into the local government office for the sake of Japanese colonialism. Third, the old government office and its land were transferred to the banking system(金融組合) and the educational foundation(學校組合) in the interests of Japanese colonist. Finally, the transfer land of civilian industry association forced Mangmi-ru(望 美樓) and Dokjin-daeamun(獨鎭大衙門) to remove to another site and the private lots-subdivision assisted space taking to pieces.
김석주는 20대를 전후해서 대부분의 사부 작품을 창작하였다. 그는 29 세에 대과에 장원하였는데 작품 가운데 과거 답안인 시권에 해당하는 작 품도 다수 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김석주가 부 문학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유가 과거(科擧)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 다. 그는 당시 사부(辭賦)의 대가인 신최로부터 이 문체를 전수받았다. 신 최는 김석주의 작품을 직접 보면서 창작할 때 유념해야 할 사항에 대해 지 적해주었다. 가르침은 자(字) ․ 구법(句法)에서부터 편법과 의장(意匠)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이었다. 문장 학습의 일반적인 방법은 고문가의 작품을 읽어 문장을 운영하는 기법과 사고를 단련하는 것이다. 김석주도 부 문학을 공부하면서 역대 대 가의 글을 섭렵하였다. 이에 더하여 그는 모범이 될 만한 작품을 모의하여 직접 창작함으로써 실력을 키웠다. 이러한 사실은 동료와 함께 스승을 모 시고 별업(別業)을 했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단순히 전범을 모방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창신(創新)의 경지에 이르려고 노력하였 으며, 이로써 당시의 진부한 문풍에서 벗어나 옛 작가의 수준 높은 차원을 회복하려 하였다. 김석주는 다양한 소재에서 부 창작의 실마리를 얻었기 도 하였다. 그는 부뿐만 아니라 다른 문체에서도 모범이 될 만한 작품을 선정하여 그것을 부의 문체로 바꾸어 표현하였다. 그는 마치 책문 과장에 서 책제를 축조하고 전고를 장황하게 훈고하듯이 문장을 전개하여 우월의 식을 표출하기도 하였다. 김석주는 문부를 통해 과거에서 요구되는 고부의 단련을 돕는 한편, 이 과정을 통해 문장력을 향상하였으며 부의 문예적 가 치를 발현하였다. 약관이라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형식미와 수사를 중시하 는 부에 정통한 김석주는 여타의 문장력이 요구되는 과장(科場)에서도 유 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고, 이것은 문과 장원의 원동력이 되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process of lots-subdivision within the block of Gaeksa at Dongnae-bu under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Gaeksa of the old government office was the sanctuary that symbolized the sovereignty. Therefore it was naturally a main object of demolition and then the site was converted to other purpose. And Gaeksa was not only converted into the elementary school and the public market but the historic site also processed to break down for opening the road through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The main reasons of lots-subdivision were the transfer from state property to private ownership and the urban development project. Needless to say, the particular major reason was derived from the intention of Japanese Imperialism to destroy the traditional urban. As a result, Gaeksa can not be recognized the traces of today and contributes to the demolition of the remaining ancient building. Finally the deformed urban structure was left over from destroyed building.
張 維를 한국사부문학의 마지막 大家로 전제하고, 그의 작품 중에서도 주제의식에서 經世에 해당하는 7편을 묶어 논의하였다. 필자의 판단으로 장 유는 李奎報, 徐居正, 申光漢, 許 筠을 잇는 한국사부를 대표할 만한 辭賦家이다. 작품 수량으로는 그를 웃도는 사람들이 있지만 작품의 수준이나 사부문학사적인 면에서 볼 때 앞에서 언급된 네 사람을 빼고는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는 판단이다.經世는 유가 사대부로서 갖춰야 할 사명의식이요, 윤리의식이다. 그래서 이 작품들에 나타난 주제의식은 바람직한 세계로의 지향이요, 세상의 비리와 부조리에 대한 비판이요, 그에 대한 울분과 개탄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사부의 문학적 가치를 높인 작용을 했다. 사부의 형식적인 면도 주요 연구대상이다. 字句形式, 押韻, 構成 등의 체제적인 면을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申光漢은 企齋集에 26편의 辭賦작품을 남긴 한문학사에서 손꼽히는 사부 작가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연구는 그의 문학을 연구한다든지 한국의 사부문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企齋의 사부문학에 대한 어떠한 연구도 없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를 절감하였기에 미력하나마 용기를 내어 본 연구를 내 놓는다. 여기에 적지 않은 잘못이 있을 것이나 이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이를 계기로 한국의 사부문학에 좀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 앞선 것이다. 신광한의 작품이 많으므로 한번에 다 싣지 못하고 우선 失志에 해당하는 8편을 먼저 소개하는 것이다.
중국 명청시대 동아시아의 해역에서는 다양한 형식의 교류활동이 활발했다. 그 가운데 중국과 조선, 일본, 유구(琉球) 등 나라들의 공식적인 교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바다에서 폭풍을 맞은 동아시아 표류민들도 볼 수 있었다. 현전하는 자료에 의하면 정기적인 관주도의 교류들이 빈번하게 진행되었으며, 이 사신(史臣)들이 동아시아 바다를 통하여 자주 왕래한 덕분에 해양인식과 해상위기 대책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해상의 민간인들의 활동은 돌발적 사태로 표류하였으며, 특히 조선의 백성들이 갖는 해양관은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한반도와 중국대륙은 서로 인접해 있다. 이에 따라 공식적인 교류는 안전하면서 편리한 길을 이용하였으며, 민간인들 또한 해상교류를 하였다. 최부(崔溥)와 최두천(崔斗燦) 두 사람은 조선사대부로서 폭풍을 만나 중국 절강으로 들어 갔다. 비슷한 경로로 제주도를 출발하여 영파(寧波) 연안에 상륙한다. 이 논문에서는 그들의 해상활동 관련 기록을 중심으로 조선과 중국 명청 간의 특색 있는 해상활동이나 해양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는 조선 말기에 서인순과 권도용이 창작한 「천령악부」의 내용과 특징을 처음으로 검토하여 소개하였다. 서인순의 「천령악부」20수는 칠언절구 연작시 형태로 구성된 것으로, 함양 지방의 유적지와 명승지를 집중적으로 읊은 죽지 사 계열의 작품이었다. 권도용의 「천령악부」50수는 이동양의 악부시를 참고하 여 창작한 것으로, 작품의 구성방식이나 형식 등이 조선후기 영사악부과 동일 한 계열의 작품이었다. 그러나 이 두 작품은 기존의 죽지사나 영사악부와 크게 다른 특징을 드러내었 다. 서인순의 작품은 민풍습속보다 지방관의 행적을 중시하고, 비판정신보다 지방민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자 하였으며, 작품의 서사적 배경보다 작자의 현 재적 감회를 충실하게 드러내어, 죽지사 다운 특징이 크게 약화되는 현상을 보 여주었다. 권도용의 작품도 함양 지방에서만 작품 소재를 찾고, 이를 시간 순서 에 따라 정리하지 않은 점이 기존 영사악부와 크게 달랐다. 이런 점은 죽지사와 유사한 특징인데, 작품의 소재 선택이나 서술 시각은 죽지사와도 또 달랐다. 민 풍습속보다 모범적인 삶을 중시하고, 충 효 열 등 유교적 덕목을 강조하였으며, 비판과 고발보다 교훈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 그런 점이다. 이처럼 서인순과 권도용의 「천령악부」는 죽지사와 영사악부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실상에 있어서는 크게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변화는 한국 악부시의 말기적 창작 실상을 보다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도 록 해준다는 점에 중요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변화의 방향이 악부시의 고유한 가치를 상실하는 쪽으로 귀결되었던 점에서는 한계 또한 분명한 작품이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