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샤록스 선교사에 대한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로서 그의 선교활동과 사상의 변화를 통해 독립운동을 참여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려고 했다. 그는 초기 이북지역의 선천을 중심으로 의료선교를 진행하면서 ‘정확한 의술이 곧 선교’라는 사상을 그의 의료선교에 적용 했다. 그의 선교 사상은 러·일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에서도 그 의료선교를 멈추지 않고 진행하면서 의료선교의 원칙들을 고수해 나갔 다. 하지만 그는 의료와 교육 선교를 함께 맡으면서 일제의 종교 교육 금지 정책에 갈등을 경험한다. 이는 선교 원칙을 지키려는 그의 선교 사상과 대립을 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105인 사건에 연루되는 어려움 을 겪으며 반일 감정을 보이게 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이후 1918년에는 1919년 3·1 독립운동을 자극 했던 “민족자결론”등을 한국인에게 전하고 3·1 독립운동의 현장에서는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에게 부상당한 사진을 보내는 등 일제 만행을 폭로하는 일에 도움을 주면서 3·1 독립운동의 시작과 말미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이후 일제의 감시를 당하면서 무리한 선교 사역을 펼치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미국으로 귀국하여, 한 달여 만에 순직하게 된다.
본 연구는 1974년부터 2003년까지 김홍도의 주일 낮 예배 설교 중 기도를 주제로 삼는 40여 편을 선별하여, 설교 구성과 내용 그리고 삼중구조의 의의를 밝혀 구령 활동과의 연관성을 통하여 선교적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설교 구성은 신구약 성경 구절을 균형 있게 자주 인용하 였으며, 성경과 교회의 역사에 있었던 기도 인물들 이야기와 기도에 관한 격언들을 적절히 활용함을 보여준다. 설교 주제는 기도의 동기와 원리를 먼저 선포하고, 기도 방법과 결과를 다루고 있다. 이처럼 기도의 동기, 방법, 결과에 대하여 삼중구조로 기도의 실천을 종합한다. 첫째, 개인의 영역에 제한되지 않고, 그 대상이 전방위적으로 통전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교회 역사 속 기도의 인물들과 격언을 인용하여 교인들에게 기도의 실천적인 부분을 강조하게 된다. 셋째, 쉽고 반복되 는 설교 내용은 교인들에게 삶 속에서도 나눌 수 있도록 선교적 기도 영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삼중구조와 각 내용의 균형은 영혼 구원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통전적, 실천적, 선교적이다.
19-20세기 조선 사회는 격변의 사회였다. 개화기 시점에서 서양 과의 무역통상 조약을 맺음으로 강제화 된 개방을 해야 했다. 조선개화 와 더불어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은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입국했지만, 폐쇄적이고 서구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 로 일관했던 조선에서 선교는 상당한 어려움을 맞았다. 이러한 입장에 서 19-20세기 서구 개신교 의료선교사들은 조선에 입국하여 병원을 세우고 가난하고 병든 조선 사람들을 치료하고 보살핌으로 조선에서 기독교 형성의 발판을 마련했다. 의료선교는 조선 개신교 형성의 출발 점이 되었으며 신앙 공동체의 모체가 되었다. 또한 조선 사회를 새롭게 변혁시키는 변혁의 주체가 되었다. 의료선교사들은 조선에서의 선교적 헌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으며, 근대 병원 건립을 통해 선진화된 의료기술을 전수했다. 교육의 불모지지였던 조선에 위생교육 을 통해 복음의 접촉점을 마련했다. 나아가 조선간호협의회를 만들어 여성 리더십을 고취시키는 일 등을 마련함으로 조선 개신교 형성과 선교 사역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인구변화에 따라 OECD에 의해 초저출산국가로 분류 된 상황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많은 부분을 바꿔 놓았다. 이에 각 대학의 생존전략으로써 진행되던 해외 유입 유학생 유치는 정부의 정책적인 지원과 함께 빠르게 성장했다. 최근 코로나-19 발생 에 의한 교육환경변화는 대학인구 감소로 이어지며 유학생 유치에 더 의존하게 되었다. 그러나 무분별한 외국인 유학생 유입정책은 대학 및 사회를 변질시키는 요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개신교대학은 유학생 유치에 총력을 기울이면서도 설립이념과 정체성 을 지켜야 한다는 필연적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본 논고는 미로슬라브 볼프의 십자가 사상을 핵심으로 타자를 적으로 남겨 두지 않겠다는 포용사상과 그 안에 담긴 포옹개념을 통해 힌두교권 유학생 문화와의 접촉을 시도하며 선교의 가능성을 제안하려한 것이다. 결론적 으로 개신교문화를 바탕으로 이어왔던 타문화, 타종교에 대한 배제를 극복하고 타자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며, 개선된 관계 안에서 타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게 될 것을 희망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선교의 도구로서 이혈이 선교현장에 미친 영향을 한․중이혈학회의 해외선교사역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이혈을 활용한 선교 전략을 제안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혈은 의료선교의 극복해야 할 문제와 선교사의 건강문제에 도움을 주었고, 복음의 접촉점으로서 관계 형성과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 교량 역할을 해왔다. 앞으로도 이혈은 선교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제약을 받게 된 의료선교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며, 의료선교에 필요한 재정적 부담을 줄이고, 현지인과 선교사를 대상으로 이혈 교육과 상담을 실시하여 일차적 보건의료의 혜택을 받게 하며, 선교사가 건강문제로 중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역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서서평(Elisabeth Johanna Shepping) 선교사의 간호사로서의 선교사역의 특성을 알아보는 것이다. 서서평 선교사는 간호봉사와 교육과 소외된 자들을 섬김으로써 한국 기독교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서서평의 간호사역을 첫째, 돌봄(caring)의 선교, 둘째, 교육(teaching)의 선교, 셋째, 협력(Cooperation)의 선교로 정의하고 그녀의 선교적 특성을 살펴보았다. 돌봄 선교는 병원간호와 간호사 양성사역, 방문보건사역, 예방사역, 한센환자 간호 사역의 특징이 있다. 그의 교육선교는 여성을 교육의 주체로 설정함으로써 가정 내 선교가 가능했고, 자신을 버리고 타인을 위해 살아감으로써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고자 했다. 또한 그의 협력선교는 돌봄과 선교의 장을 국제적 무대로 넓혀가기 위해 국제공조를 공고히 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무엇보다 서서평 선교사는 간호사역 자체가 선교가 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기초한 통전적(holistic) 선교의 선각자였다.
이 논문의 목적은 초기 이북지역 개신교 선교의 특징인 한국인의 ‘자생적 수용’에 존 로스의 한글 성서가 주었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다. 존 로스는 현지 문화를 존중했던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이런 사상이 그의 성서번역 과정에 나타났기 때문에 한국인의 선교수용에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그에게 나타나는 현지인 중심의 선교 사상과 방법은 그의 유교 이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는 유교를 종교로서 인식하였던 것이 아니라 한국문화로서 이해하였다. 그는 현지문화 가운데 유교문화가 전 계층에 걸쳐 매우 강했음을 인식하였고 선교의 방법에 있어서도 유교가 존중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존 로스 이전의 많은 서구 선교사들은 한국에 선교를 시도하려고 한문 기독교 문서를 전달하였다. 그러나 한문이라는 언어의 특성상 이를 읽고 해석할 수 있는 계층은 제한되었기에 선교문서가 모든 이들에읽혀지지 못했다. 이는 모든 현지에게 선교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성서의 한글번역 작업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음을 의미했다. 이를 위해 존 로스는 한국인과 함께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다. 그는 번역과정에서 이북지역 한국인의 이해와 문화를 중요하게 생각하여 서구 선교사의 입장에서 번역이 잘 되어도 현지인에게 이해가 되지 않으면 이를 수정하였다. 이것은 당시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 한문성 서에 단순히 발음만 한글로 토를 달았던 이수정 역본이 온전한 번역이 아님을 주장했다는 점에서 그의 번역은 단순히 글을 번역하는 차원이 아니라 현지인의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잘 드러낸다.
이런 번역의 결과로 당시 존 로스의 한글 성서가 이수정 역본보다 수요가 더 많았으며, 이는 통계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수요의 결과는 성서의 한글화가 주는 의미가 번역의 차원이 아니라 존 로스의 번역 사상이었던 현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이 선교지에서 중요한 의미를 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This thesis aims to Know the views of the religious reformers including Jan Hus, Martin Luther and Jean Calvin on missionary work, and to know if they actually partake in missionary activities themselves. How did their views on mission influence the way in which future generations conduct missionary work? To approach this theme, we must first establish a clear definition of what missionary work is. And lastly, according to Karl Hartenstein, missionary work is to participate in God’s mission, that is Missio Dei. The author of this paper is interested in the latter definition since this concept seems to have originated from the religious reformers. Jan Hus placed the authority of the Bible over the authority of the church. According to him, the missionary work is to reform the church, when it goes away from the truth of the Bible. According to Martin Luther, the missionary work is the salvation of the world by the promulgation of the Gospel: “only by the belief in Jesus Christ.” According to Jean Calvin, man’s salvation depends upon only God’s sovereignty. Therefore, only God can practice the missionary work by his sovereignty. Like Jan Hus, Luther made efforts to reform the church, when it went away from the truth of the Bible. Jean Calvin taught many theologians in Geneva and sent them to France and other European countries. The religious reformers exerted an important effect upon today’s church. They taught us what is the genuine meaning of missionary work and what must be the direction of today’s missionary work.
Today is the era of welfare. The desire of social welfare has increased rapidly because of the increase of the average life-span and the rate of the aged people over 65 years old among total population. With this social trend, the necessity of welfare for missionaries for effective missionary work has increased. We can find the biblical foundation for missionary welfare where the Bible mentioned reliefs and welfare in the community of faith. A missionary is a member of the community. Even if a missionary is a servant and instrument of God, he/she is a human being. A missionary has family members. He/she can also get a cultural shock and reverse cultural shock, and an unexpected accident. He/she is aging and shall be retired. He/she, therefore, also needs welfare care for his/her physical, mental, and spiritual health in the community, which can increase the effectiveness in their missional works. There are several dimensions of member cares: 1) Care for physical health, 2) Care for emotional and mental health, 3) Care for retired missionaries. In terms of care for physical health of a missionary, Korean missionary societies are further behind than the International Missionary Societies (ig. SIM, OM, OMF, WEC). They have prepared medical and insurance supporting systems very well. In this respect, Korean church needs to establish this kind of missionary infra. For emotional and mental state, a missionary needs sabbatical year for healing, refreshing and maintaining his/her healthy mental state for effective missional work. For the retired missionaries, a supporting system for housing, foods supply and medical service should be provided. His/her various experiences need to be utilized for developing a strategy and policy for a effective missional work of the future generations. Accordingly, we must prepare a system and policy for missionary member care in order to enhance effective missional works within this welfare and aging times. For this, this study has addressed several dimensions of policy and methodology: For a effective missionary member care, fulfillment of desire for self-realization of missionary, establishment of an appropriate organization and a policy for member care with an effective management for care for crisis/accidental incident, a practical strategy at the denominational level, cooperation for win-win strategy among denominations, sending church and missionary societies should be considered. Missional business strategy and brand standardization for 'missional marketing' have been pointed. First, fulfillment of desire for self-realization. According to A. H. Maslow, the desire of self-realization is the highest desire. A missionary also has this desire. Korean church is lacking of this system for fulfilling the desire of self-realization, especially after a missionary retires. Second, organization and policy for caring member. a Community needs an effective organization for achieving its objective. So is a missionary society. Mission can be effective when members in the community can be managed effectively. Third care for crisis/accidental event. A missionary can also meet crisis/accidental event. Only effective management and care can increase the effectiveness of mission. Four, practice for missionary member care. Missionaries are spiritual soldiers. So they need care and management system and practical strategy at the denominational level. Denomination, sending church and society must cooperate one another for win-win strategy. They need missional business strategy like a business company. Through brand standardization, they must try to increase the value of brand. I wish to call it 'missional marketing'.
조세핀 캠벨(Josephine Eaton Peel Campbell, 姜婦人, 姜慕仁)선교사는 1897년에서 1920년까지 한국여성들을 위해 선교에 헌신했던 미국 남감리회 여성해외선교부(Woman’s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의 선교사다. 1898년 배화여자대학의 전신인 ‘배화학당’을 설립하였다. 본고는 캠벨 선교사의 교육선교사상과 교육사업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캠벨의 교육선교사상은 내한하자마자 쓴 첫 보고 서 서두에 잘 나타나 있다.
세상이 복음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 복음이 이 세상을 위해 준비되어 있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 먼 지구의 구석진 곳에 있는 우리에게 얼마나 신실한지요? 어둠속에 머물고 있는 이 사람들을 위해 준비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나는 이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의 축복이요 특권입니다.(J. P. Campbell, "Communication from Mrs. Campbell," 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1897), 15).
캠벨의 교육선교사상에 따른 선교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한국 교회를 위한 여성 지도자를 배출할 학교 설립, 또 하나는 전도사업을 통해 특히 여성들을 위한 교회를 설립하는 일이었다. 한말 일제기 기독교계 여학교는 역사·문화·전통·풍속의 기반 위에 서 있는 ‘한국적 여성’, 초월적 영성을 가진 ‘기독교적 여성’, 민족의 암울한 현실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민족적 여성’이라는 세 가지의 주된 과제를 가지고 교육해야하는 과업을 안고 있었다. 배화의 교육을 담당했던 캠벨과 선교사들 및 교사들은 교육 과정 속에서 위의 세 가지 목표를 가지고 교육사업을 전개해 나갔다. 캠벨의 그리스도적인 인류애를 품고 조선 땅으로 왔다. “소외된 자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하라”는 예수의 명령에 따라 혼신(渾身)으로 선교사라는 ‘도구’ 가 되어 조선의 여성을 끝까지 사랑하며, 대접하며 살다가 1920년 11월 12일 68세를 일기로, 사랑하는 한국 땅에서 별세했다.
본 논문은 한국의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장소였던 장시(market)가 구한 말 초기 선교사들의 전도활동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음을 밝히고, 장시가 복음의 장소로 변화하는 과정을 탐색하려는 목적에서 집필되었다. 선교사 윌리엄 블레어(William Blair)는 복음 전도지로서 “장터는 사람들을 만나기 좋은 장소이며, 복음을 전하기 안성맞춤인 곳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15세 기 중엽에 설치되기 시작하여 17세기에 조선 전역에 확산된 서울 뿐 아니 라 지방 포구를 중심으로 상품 유통의 중요한 발달을 가져왔다. 장시는 조 선 사회의 경제적 활성화를 견인하였을 뿐 아니라 신문물, 신문화의 전파 통로이기도 하였고, 이를 통해 사회 변혁을 이끄는 기능도 하였다. 초기 입국 선교사들은 이러한 장시의 특성을 파악하고 복음 전파의 중 심지로 적극 활용하였다. 로스는 국제 무역 장시였던 만주의 ‘고려문’에서 조선의 상인들을 만나 기독교를 전하고 성경을 번역하였으며, 국경 무역장 시인 의주를 통해 한반도에 복음이 들어오는 데에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1885년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의 선교사들도 한국의 풍토와 민정을 파악하기 위하여 장시를 방문하였고, 19세기 말에는 개항지의 확대와 더불 어 전국 장터에 속속들이 선교 거점이 마련되었다.이처럼 장시는 조선에서의 선교 활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기독교가 이 땅에 들어와 우리 민족과 만나 어우러져 숨쉬기 시작한 토대는 바로 조선 시대 소통의 장이었던 장시였던 것이다.
이 논문은 미국 남장로교 한국선교회의 교육선교를 이끌어 나간 인돈(William A. Linton)의 교육선교를 연구하고, 인돈을 중심으로 남장로교 교육선교의 특징을 역사적으로 조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인돈은 1912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1960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돌아가 사망할 때까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추방당하였던 기간(1940-1946)을 제외하고, 오랜 기간 한국의 전라·충청지역에서 줄곧 교육사역에 헌신하였다. 입국 후 선교초기에는 군산 영명학교에서 성경과 영어교사로 시작하여 곧이어 교장이 되었고, 이후 일제 식민주의 교육정책과 제도 속에서 남장로교가 선교학교의 생존과 교육선교의 맥을 이어가기 위하여 지정학교로 인가를 추진할 때 주력학교인 전주 신흥학교로 이임하여 교장으로 일하며 지정학교 인가의 책임을 맡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며 남장로교가 자진폐교를 결정할 때, 전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선교회 모든 학교들의 폐교를 진두지휘하였다.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지만, 해방 이후 복귀하여 새롭게 설립되는 대전선교지부의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남장로교가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과 고등교육을 통한 한국사회의 기여를 위해 대전에 대학을 설립하고자 하였을 때, 대학설립위원장과 초대 학장으로서 대학의 설립과 교육과 운영의 책임을 감당하였다. 이로써 인돈은 중등교육에서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남장로교 교육선교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발전에 기여하였다.
선교초기부터 끝까지 인돈의 교육선교에서 이어지는 강조점은 교육의 목적이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갈 지도자 양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그것은 불신자에게는 전도하고 신자에게는 교육해야 한다는 남장로교 교육선교의 핵심을 반영하였다. 기독교인 자녀들을 기독교적 교육 환경에서 어릴 때부터 고등교육에 이르기까지 단계적으로 가르쳐서 한국교회를 이끌어 나가는 지도자가 되게 하고 각자 놓인 자리에서 이웃을 돌보고 사회에 봉사하는 책임 있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 교육선교의 사명이었다. 교회지도자 양성이라는 측면에서 남장로교와 북장로교를 비롯한 보수적인 장로교 선교회들의 교육선교의 목적이 대동소이하였지만, 북장로교가 복음전도자 양성에 보다 집중하였다면, 남장로교는 교회와 사회에 기여하는 기독교 지도자 양성이라는 점에서 통전적, 실용적 성격이 강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인돈 자신도 공학도였던 만큼 과학교육을 강조하고, 또한 모든 학생들에게 직업교육을 강조한 점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대전대학에서 볼 수 있듯이, 인문학과 과학과 신학의 조화와 융합, 신앙과 학문과 실용적 삶의 연결은 독특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기독교적 교육환경을 위해, 모든 교사가 진실한 기독교인이어야 하고, 학생들의 다수가 기독교인이어야 하고, 교육의 내용과 삶이 기독교적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인돈의 교육선교의 마지막까지 강조되었다. 교육선교의 목적과 정체성에 대한 신념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반대하여 자진폐교를 결정하고 교육선교에서 물러난 것에서도 잘 드러났다. 이 원칙은, 작지만 기독교적 정체성과 목적이 유지되는 순수한 대학을 만들고자 하였던 모습에서도 나타났다.
This article is to examine of Duncan M. MacRae’s early missionary work in Korea and its characters. Duncan M. MacRae was born at Cape Breton Island in Canada. In 1897, the Foreign Mission Committee of Canada Presbyterian Church advertised for two missionaries to proceed to Korea. At its February 15 meeting the applications of Dr. Robert Grierson and Mr. William Rufus Foote were received and their appointment was made. Because of the financial difficulties, the application of MacRae was rejected. But when Maritime congregations sent the required funds, the F.M.Committee appointed him to the third member of the first group to go to Korea.
Eventually, following graduation from the Presbyterian College in Halifax, Duncan M. MacRae ventured to Korea to do missionary work. MacRae arrived at chemulpo in Korea on September 7, 1898 and arrived in Wonsan Mission Station on February 10, 1899. And then, he constructed Hamheung Mission Station on the northeast coast of Korea in 1904 and lived on Dragon Mountain for almost forty years. In this station, he did the missionary itinerancy around the city of Hamheung to establish church and managed the Christian academy to educate the Korean Christians.
The characters of MacRae’s early missionary work at Hamheung Mission Station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ly, he theologically was a conservative. Through the Canada Presbyterian Church and his mother, MaRae was affected by the traditional Calvinistic doctrines of the sixteenth century and Puritanism of the seventeenth century. Secondly, MacRae faithfully was a vigorous evangelist. Although he did encounter with many danger in a journey, he frequently had gone to the missionary itinerancy to evangelize Koreans. Thus, his vigour and courage for the spread of Gospel made him a legendary figure among koreans. Thirdly, MacRae ecclesiastically aimed at the establishment of independent and indigenized church governed and managed by the native christians. And also, he was quite interested in the Korean traditional culture and religion in order to indigenize Christianity in the Korean soil. Finally, MacRae has an anti-Japanese Sentiment. He has a forceful personality who did not hesitate to risk a security and reputation when he saw Christian beliefs or his beloved Korea jeopardized by the Japanese authorities. For his courage and passionate concern for Koreans, he was respected and admired by Christian and non-Christia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