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25

        2.
        2022.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examines the process of the introduction of stupa, which has originated in India, to the Xinjiang Uyghur region and the features of the stupas in the Xinjiang Uyghur region in detail. This study examines the layout of the buildings in temple compounds and the types, structural elements, and construction methods of the stupas in the Xinjiang Uyghur region in particular by looking into the content of the Da Tang Xi Yu Ji and remaining stupas, which provide examples of stupas at the time. This study finds that due to the characteristics of dry deserts, stupas in Xinjiang Uyghur region, where assimilation between Eastern and Western cultures is seen, were mostly made by pressing clay into a mold and had no interior spaces. Also, construction materials and techniques had been developed and improved in a way that enabled stupas to combat the challenging desert conditions. However, the stupas in this region differed significantly from the wooden tower-like stupas discovered in central China(zhongyuan 中原). The shape of the dome of most stupas in Xinjiang Uyghur region was chosen under the influence of the Gandharan style. Some of the stupas in the region have taken the general forms of the wooden stupas and the others have taken many forms, from cylindrical drums to towers. Also, there have been forests of stupas and stupas similar in form to chaityas and stupas of Vajrayana. Such different forms were transformed and modified through regional history and it was related to the peoples and cultures that produced and used stupas. Stupas evolved into distinct forms in Xinjiang Uyghur region in this way.
        4,900원
        3.
        2021.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고대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재원은 조세로 거둔 곡물이며 이를 보관하기 위한 창고는 주로 산성 등에서 확인되고 있다. 당시 금석문과 산성에서 출토된 목간 내용으로 볼 때, 사찰 안에 창고가 존재했고, 산성 내 창고에는 보리와 같은 곡물을 60섬(石) 단위로 일정하게 관리했음을 알 수 있다. 이번에 경주 성건동 500-18번지 유적에서 조사된 다 수의 대호를 매납한 대형 건물지는 삼랑사 안에 마련된 창고로 장류와 같은 액상식품과 쌀 등을 보관하던 창고로 추정된다. 성건동 창고유적에서 확인된 대형 창고는 <매호식 건물>로 구분되며 건물 안에 대호를 안전하게 관리하기 위해서 일정한 높이로 흙을 성토한 부분이 존재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 성토부에서는 대호를 절반 정도 묻어둔 모습과 파손된 대호를 수시로 교체한 모습이 확인되며, 대호 위에 토제 뚜껑을 사용한 점은 저장물에 대한 보관관리가 상시적으로 이루어 졌음을 알려준다. 창고 유적에서 출토된 국자는 청동제와 목제 또는 조개껍질로 만들어 사용했는데, 보관중인 저장품이 변질되지 않도록 관리하기 위해서 필요에 따라서 다른 재질의 국자를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호 안에서 출토된 숯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장류를 담글 때 백탄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당시 식생활 모습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당시 창고유적과 비교한 결과 경주 성건동 500-18번지 유적의 창고건 물은 삼랑사와 관련된 저장시설로 생각되며, 당시 황룡사, 실상사 등 당대 사찰 내 위치한 창고 모습을 알려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이러한 창고가 운영되기 위해서는 국가나 관청의 관리가 존재했음을 알려주므로, 향후 조사가 확대된다면 창고의 구조에 따른 차이가 확인될 것으로 판단된다.
        9,000원
        7.
        2019.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subjects of this study were limited to Silla buddhist temple remains in the 6~8th century, where the excavation survey report was published and the details of the remains of the corridor are revealed. Since the corridor completes the structure of temple and is involved in formation of the space, the building plan for corridors is thought to have an intention linked to the entire temple. Thus, more closer study is required for this construction plan to identify the role of corridors. The corridor is a building that has a low architectural hierarchy and completes the layout and composition of the temple. In the unit planning of the corridor, unit were designed to be of a certain size in the temple layout. Then, the overall scale was made by adding the fixed size of unit. The combination of corridors are the combined points of paths and were used as visual points. The structure of the corridor was constructed to be adjusted according to the size of the main compartment of the building to which it was connected and inserted under the roof of the building. The adjustment of the unit changed in the range of 0.5 to 2 of Silla’s system of measurement. The usage of embedded pillar in the corridor presents a new perspective on Silla architecture.
        4,000원
        8.
        2018.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 후기 들어와 울릉도․ 독도에 대해 수토정책이 취해져 그 관리가 강화되었 다. 이 수토정책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문헌자료에 의해 이루어졌고 고고학적 연구는 거의 전무하다. 필자는 이 점에 착안하여 수토 관련 유적․ 유물을 찾기 시작 하였으며, 이 글에서는 그동안 찾아낸 울진지역의 고고학적 자료들을 소개․분석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고고자료들이 울진지역에서 나타나는 연유를 울릉도의 행정 체계에서 찾아보았다. 특히 대풍헌에 남아 있는 수토 관련 7점의 현판과 「완문」․「수토절목」의 고문서는 울릉도․ 독도 수토 시 수토사들이 항구에서 바람을 기다렸다는 『조선왕조실록』 의 편린을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또 삼척영장과 월송만호의 윤회수토 담당부대로서 그 유적지인 월송포진성이 울진에서 확인되어 그 실체를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평해군수 심의완 영세불망비 또한 울릉도 연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이 꾸준히 울릉도․ 독도를 관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물적 자료이면서 조선 정부가 평해군수에게 울릉도 첨사를 겸직하게 하는 『고종실록』의 행정체제 변화 기사를 입증하는 금석문으로써 그 의의가 있다. 이러한 자료들은 조선이 울릉도․ 독도를 우리의 영토로 인식하고 정기적으로 섬의 상황을 파악하려고 수군을 보냈던 문헌기록을 입증해주는 고고학적 자료들로 울릉도․ 독도 수토연구에 귀중 한 1차 사료들이라 하겠다.
        13,700원
        9.
        2018.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울릉도 수토에 관한 연구는 다양한 방면에서 진행되어 왔다. 우선은 조선후기 울릉도 搜討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한 현황의 사실 관계와 제도적 정착에 대한 연구를 비롯하여 울진 지역의 수토 관련 越松浦鎭城과 待風軒 등에 대한 연구, 그리고 수토사가 그려 온 울릉도 지도 및 대풍헌 현판 등 자료에 대한 연구나 사료에 대한 해제 등도 있으나 수토사와 관련하여 포괄적인 측면에서의 관련 유적에 대한 연구는 없었다. 본 논문에서는 여러 기록을 통하여 수토사 관련한 유적지를 연구하였다.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울릉도 수토 관련 유적지는 삼척 수군 관련 유적지, 수토 수행과정에서의 대풍소나 祭儀 神堂, 수토에 참여한 인물 관련 유적지, 기타 관련 유적지가 있는데 이를 각각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삼척수군진이 설치되어 있던 삼척포진과 관련된 유적지인데, 이와 관련하 여서는 軍船을 정박시키는 포구였던 삼척포와 수군의 각종 장비와 물자를 보관하 고 첨사가 군관을 거느리고 주둔하였던 삼척포진성이 그 핵심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유적에 대한 조사에서 수군진성의 하부가 지하에 매립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둘째는 삼척에서 울릉도로 항해하는 과정과 관련된 유적이다. 삼척에서 출발하는 수토군들은 먼저 모든 장비를 갖추고 營下에서 바람을 기다리다가 적당한 바 람이 불 때 바다로 나가서 출발하였는데, 이 때 바람을 기다리는 대풍소와 안전 항해를 기원하는 여러 가지 제사를 곳이 있었다. 특히 1872년에 만들어진 지방지도의 삼척부 지도를 보면 삼척수군진성으로부터 오십천 건너편 고성산(오화리산성이 있는 곳) 근처에 붉은 선 안에“東海”라고 표시해 놓은 것이 있는데 이곳이 동해신제를 지낸 곳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 삼척의 수토 관련 유적으로는 후망소, 수토사 인물 유적, 울릉도 유적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울릉도 수토가 실시되는 동안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에서는 임시의 거처를 만들고 바다를 감시해야 했는데, 그러한 후망소가 어느 곳에 설치되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는 울릉도에서 돌아오는 선박이 표류할 경우 동해안 지역에서 도달할 가능성이 있는 곳에 설치되었을 것이며, 대풍소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척후가 있었다고 하는 삼척의 藏吾里浦(근덕면 장호리), 그리고 『陟 州志』(上)에 바닷가의 망대인 海汀候望으로 기록된 介谷, 宮村, 馬頭, 窟岩, 龍場 이 그와 관련된 곳일 가능성이 크다. 아을러 고려시대에 삼척 지역에 설치된 戍所 인 桐津戍․臨遠戍가 있던 곳도 바다를 감시하고 방어하는 중요한 요충지였으므로 이곳도 후망 장소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수토를 수행한 인물과 관련된 유적지(혹은 유물)는 삼척지역에서 현재 뚜렷하게 확인되는 곳이 없다. 삼척영장으로 울릉도 수토를 수행한 장한상은 경북 의성에 묘가 있고, 이준명은 경기도 성남시에 묘가 있으며, 구억은 충남 공주에 묘가 있다. 여타의 수토를 수행한 것으로 확인된 삼척첨사의 관련 유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육향산에 있는 삼척영장송덕비 가운데 울릉도 수토를 수행한 삼척영장 송덕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월송포 만호가 수토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월송만호의 上官은 삼척영장이었기 때문에 삼척영장송덕비 자체는 관련 유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조선전기에 울릉도를 세 번씩이나 왕래하며 수토 임무를 행한 삼척사람 김인우의 유적은 앞으로 확인될 가능성이 있는 바, 향후 적극적으로 자료를 발굴하여 선양할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울릉도에 소재하는 수토 관련 암각문이나 표석, 김인우와 관련된 태하리 성하신당 등도 관련 유적지에 해당하나 본 논고에서는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였으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았다.
        9,000원
        10.
        2018.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research investigates and analyzes the distribution, creation period and creators, design characteristics, and process of change undergone by existing meandering streams used for the floating of wine cups(Liú shāng Qū shuǐ) in China. This study was conducted through literature review, fieldwork investigation and internet research. This research presented a categorization method and standard for discussion toward future research in this field by first categorizing Liú shāng Qū shuǐ facilities into five style categories: Lántíng style(A), Natural stream style(B), Cut stones excavation style(C), Broad natural rock carving style(D) and waterway style(E); this classification was carried out in addition to categorizing the Curved-stream banquet sites of B and C that are characterized by the stone carving style into the subcategories of Cut stones excavation and Broad natural rock carving styles. It is said that the ancient Liú shāng Qū shuǐ facilities of China are the product of natural landscape water systems and Pungryu(elegant lifestyle) culture; from the middle ages of the Tang and Song dynasties, garden forms changed to reflect miniascapes and an imitation of a landscape style, which represented a gradual transition from a tradition that entailed moderation in drinking and natural landscapes that copied Pungryu to those that were symbolic and placed more emphasis on games and amusement. Later in the modern Ming and Qing dynasties, the Cut stones excavation style became the mainstream approach for Curved-stream banquet sites. From this development, it seems that the Curved-stream banquet sites of China gradually evolved from Pungryu facilities used for water systems to garden facilities for amusement. However, the Lántíng⋅Natural stream⋅Cut stones excavation styles seem to have been continuously passed down in eclectic forms throughout all periods of Chinese history.
        4,800원
        11.
        2017.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paper aimed to identify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the chimi excavated from ancient ruins, especially middle gate remains of Bunhwangsa Temple in the Unified Silla period. Middle gate had planned 3 × 2 with 295㎜ measuring unit and gabled building. Detailed study of the shape of chimi of the middle gate restored by related field experts reveals as follows. 1) Height of chimi is 4.5(130.6㎝) of Tang’s system of measurement classified as large one. 2) The front and back side square hole is made for transverse timber placement. 3) Position of chimi is not the end of the ridge of roof, it moved toward the center. 4) Construction method of chimi is structured with smaller beam and center column. 5) Width and height of the ridge is less than 38㎝ and 54㎝ to be approximately, Width and height of the gabled ridge is less than 38㎝ and 50㎝. 6) This chimi is considered to be very unique when compared to existing ancient restored chimis, it is designed to be advantageous to the chimi construction.
        4,000원
        12.
        2016.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paper aimed to identify a main-path remains in the Hwangnyongsa temple site based on studying published the excavation survey report and researching relics related to the path in the ancient temple site. Hwngnyongsa temple, there were three type’s paved footway, straight path to the central axis line of the layout, outside path around the main buildings and the front square of the lecture hall. These remains were expected that installed for some purposes, such as marches, touring, sort of a Buddhist ceremony been performed at the time of Silla. Straight path shows there were two rows of the main access inside the roofed corridor. A row consisted of the 2~3 pieces processed stone(Jangdaeseok) altogether with 92cm width and combined with square stone and stepping stone on the end of the road. It is regarded as very characteristic form and one of the architectural elements of Hwangnyongsa temple in Unified Silla period.
        4,000원
        13.
        2014.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t was identified by the excavation that architecture remains were confirmed buddhist temple consist of ruins of main building of a temple, auditorium site, ruins of stone pagoda, embankment, pedestrian Facilities and drainage etc. in the Gwangmyeong-dong site. The site has been held temple arrangement with 1 main building of a temple, twin Pagodas from the Unified Silla period to Goryeo dynasty. The temple constructed after that was destroyed the architecture in the Unified Silla period. It seems that aristocrat or royalty power of within group of the nearby remains of city which was constructed in the Unified Silla period build and visit the temple. Considering there are excavations, it assumes that the temple had been constructed during the last days of the Unified Silla, was closed up during the mid-Goryeo Dynasty.
        4,000원
        14.
        2014.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Recently, conservation and utilization of cultural heritage has been regarded as importance. So, various research papers about maintenance of the remains have been presented in many conferences. But most of researches have focused on introduction about maintenance methods and explanation about maintenance concepts of remains. And even in case of a few papers treated post-evaluation about maintenance of the remains the criteria of the evaluation has tended to somewhat subjective. So,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show the objective post-evaluation indexes which was developed by Delphi · AHP methods. This research was proceeded in two stages. First, we arranged the evaluation index in a hierarchy to be made through the analyses about references and researches about maintenance of remains. 304 evaluation articles were elicited through the process. And then, elicited evaluation articles were classified with 'conservation' and 'utilization'. Second step was to figure out importance and validity of hierarchical evaluation articles with twice questionnaire surveys. This research used interval scale to comprehend validity and AHP method to evaluate relative importance of each other articles.
        4,800원
        15.
        201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King Seong carried out the large-scale construction transferring the capital from Wungjin (Gongju) to Sabi (Buyeo) in 538. But because most of the Buyeo area was the low swamp in the time, it needed above all to form a site before transferring the capital. Until recently, in addition to the scientific excavation, the relief excavations for the construction of new building or the formation of road were conducted on many sites in the Buyeo area. As a result, many remains which were formed on the low swamp including the temple site of Neungsan-ri, Dongna Castle, the remains of Ssangbuk-ri (280-5 Bukpo, Hyeonnaedeul) and the remains of Gua-ri were identified. Also in these remains, the various engineering construction methods irrespective of the nature of remains were used for the purpose of the soft ground reinforcement as follows: mattress method of construction, pile designation, stone alignment, filing of decomposed granite soil, culverts and storage tanks. Especially, the mattress method of construction and the pile designation are thought to be the traditional engineering construction method at least in that they are appeared since the Three Han Sates era. And these soft ground construction methods had an effect on the construction of reservoir in Japan at the time. In the future, the construction method for soft ground reinforcement shall be concerned and studied further in the architecture and the civil engineering as well as the archeology.
        5,100원
        16.
        201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중국의 유상곡수거(流觴曲水渠)는 대부분이 암석에 조영됨으로서 인공적인 색채가 매우 강하였으며 왕희지의 난정 이후 곡수 유배거는 정자 내부로 조성하는 경향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유상곡수를 주제나 모티브로 한 다수의 그림에서 왕희지의 난정기(蘭亭記)에서 보이는 배경 산악의 숭고미와 자연성 높은 계류와 수림을 배경으로 ‘일상일영(一觴一詠)’하는 선비들의 행태를 담는 비기하학적유상곡수 형태를 기본적 도상(icon)이자 텍스트로 하고 있음이 발견된다. 중국 소흥의 ‘난정’ 유상곡수연 유거는 그 후 복원된시설이긴 하지만 유상곡수 문화의 일대 전환점이자 획을 그은 정원시설이자 풍류문화의 산실이었다 할 만하다. 곡수연(曲水宴)관련 풍류문화는 국내에서 삼국시대로부터 고려, 조선, 근세에 이르기까지 면면히 전승되는 양상을 보여주는데 곡수거의 조영형태는 중국으로 부터의 도입 초기에는 정형적인 인공형태를 보였으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차로 한국의 풍토환경과 정서에 부합되는자연스러운 곡수로 형태로 조영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물의 도입이 용이한 자연 계류수 또는 암반과 관련시켜 돌을가공하여 수로를 만들었다. 즉 암반 위에 타원형의 수로를 음각(陰刻)하거나 웅덩이 형태로 소용돌이를 만들어 곡수연을 즐길수 있도록 하거나 자연 지반에 음양석 형태의 자연석이나 경석을 이용하여 굴곡 수로를 만드는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또한 현대에 들어서도 유상곡수의 문화를 살리기 위한 조경시설과 풍류문화가 면면히 이어짐은 매우 반가운 현상으로‘유상곡수’가 전통조경 및 휴양레크레이션 문화를 담는 문화콘텐츠이자 문화로 정착되기를 기대한다.
        4,600원
        17.
        2010.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최근에 신라장군 이사부의 동해안 출항지가 새로운 논점으로 제기되면서, 지금까지 ‘강릉출항설’과 ‘삼척출항설’이 대두되고 있다. 본 연구는 우산국을 복속한 이사부의 동해안 출항지에 대한 실체적 규명의 필요성이 시급히 요구됨에 따라, 이에 대한 해결을 모색하는 방안의 일환으로서 강원 영동지방의 강릉․동해․삼척지역으로 공간적 범위를 제한하여 역사고고유적을 바탕으로 접근해 보았다. ‘강릉출항설’에 대한 검토 결과, 안목항(지금의 강릉항)은 남대천 하구의 바깥쪽에 위치하고 암석해안으로 구성된 규모가 매우 작은 포구이기 때문에 대규모 兵 船의 출입에는 매우 부적합한 장소로 판단된다. 또한 남대천 하류역의 일대는 주변이 모두 사구지대와 저습지로 형성된 관계로 당시 하천의 정확한 고환경을 알 수 없으나 그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생각된다. ‘삼척출항설’에 대한 검토 결과, 오십천 하구와 하구 남쪽에 접한 오화리산성의 구조와 지리적 입지, 산성내 출토유물을 고려하면 그 가능성에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진다. 대체로 삼국시대 5C ~ 7C대의 신라고분들이 군집을 이루고, 據點城 내지 治所 城이 함께 존재하고 있는 지역은 영동지방에서 비교적 큰 하천에 속하는 강릉 연곡천ㆍ남대천ㆍ군선천ㆍ주수천 일대, 동해 전천 일대, 삼척 오십천ㆍ마읍천ㆍ가곡천 (호산천 포함) 일대로 파악된다. 신라가 동해안 지역 중에서 가장 먼저 삼척에 군사적 전진기기의 성격을 띠는 州를 설치한 것은 이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주목하여, 동해 연안해로(해상교통로)를 독점적으로 확보 ․ 지배하여 동해안 영동지방의 진출과 북방교역의 전진기지로서 最適地가 바로 삼척이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실직지원에서의 말갈세력 격파, 실직원에서의 고구려변장 살해, 실직성의 습격, 니하성 축성 등 일련의 기사를 통해서 泥河가 고구려와 말갈세력의 주요한 삼척 침입루트로 파악되며, 실직성 습격에 따른 니하성의 축조는 실직성(삼척)의 지정학적 중요성, 즉 해상루트와 관련된 핵심적인 전진기지로서 신라나 고구려 입장에서 모두 중요한 지역이었다고 이해된다. 이사부 출항지 문제해결과 관련하여 필수적인 요건으로서 대규모의 신라군선이 정박할 수 있는 넓은 자연항포구와 그에 수반되는 군시시설로서 성곽의 존재성으로 파악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수군 기능과 관련하여 신라군사가 주둔했던 신라성곽들을 제시해 보았다. 그 가운데서 하천의 하구에 가장 가까이에 소재하는 오화 리산성이 입지와 규모면에서 볼 때 예국고성을 제외한 다른 산성보다도 훨씬 뛰어나고 압도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산성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단정을 내릴 수는 없지만, 삼척 오십천 하구 그리고 그에 접해 있는 오화리산성이 이사부가 우산국 정복을 위해 출항했던 당시 출항지와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항포구와 유적지인 것으로 추정된다.
        14,000원
        18.
        2010.04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부산․진해 경제자유구역 미음지구부지 문화재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유적을 대상으로 하였다. 조사결과 조사구역 전체를 감싸는 형태의 체성부가 확인되었으며 조사구역 남-북을 가로지르는 형태로 조사구역의 동쪽은 석축으로, 서쪽은 토축으로 체성을 축조한 형태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남쪽 토축구간 및 동쪽 석축구간에서 각 1개소씩 문지 2개소가 확인되었으며 인수구와 퇴수구가 갖추어진 배수시설이 북쪽 체성부 및 동쪽 체성부, 동문지에서 확인되었는데 체성부에서 확인된 수구는 정방형 및 장방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동쪽 체성 인수구의 좌우로 길이 약 28m, 폭 50㎝ 크기의 석열이 이어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이 석열의 기능은 성내에 차서 흘러내리는 우수로부터 체성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구릉 정상부에서 확인된 체성부를 중심으로 조사대상지의 서쪽과 남쪽을 아우르는 형태로 외황으로 추정되는 완만한 ‘V'字형의 구상유구가 확인되었다. 구상유구의 전체 길이는 약 110m이고 폭은 약 3~5m, 잔존깊이는 약 1.2~2.0m 이다. 출토된 유물은 기와편 및 자기편으로 기와편이 다수를 차지한다. 출토기와의 문양은 어골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자기류는 청자편, 백자편 및 분청사기편이 확인된다. 구랑동 유적은 고려시대 州鎭城과 함께 군사적 주요 거점에 설치된 일종의 감시초소의 역할을 하였던 戍의 성격을 띠는 유적으로 판단된다. 고려는 건국초기부터 신영토의 개척과 방비를 위하여 주요지점에 주진성을 점진적으로 축성하였는데 주진성은 거주성으로 치소나 군창 등이 형성된 것으로 생각되며 이보다 평면둘레가 작았던 수는 둘레 100~200m의 토성 또는 석성으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각각의 주진성의 관할 하에 있었다. 구랑동 유적은 해안지역의 요충지인 이곳에 전방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戍를 설치, 운영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고려전기에 동, 남해안을 약탈하여 막대한 피해를 주었던 동여진 해적에 대한 대비 목적과 더불어 점차 동여진의 침입이 줄어들고 일본과의 교섭이 진행되면서 점차 내왕이 잦아지자 이에 대한 경계의 목적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6,900원
        19.
        2010.0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우리나라는 연해와 島嶼地域이 많고 또 바다와 연결되는 하천이 많아 일찍부터 물자와 사람을 운송하는데 선박을 이용하였으며, 자연히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활용하게 되었다. 그런데 수군에 대한 연구는 주로 軍制, 軍役, 兵船, 營鎭, 수군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고, 특히 비교적 사료가 많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수군 유적에 대한 연구는 주로 고려말 이후의 浦鎭이나 水營에 대한 것이 이루어졌으나 연구 논저가 많지 않다. 특히 강원도 동해안 지역의 수군 유적과 관련하여서는 조선시대 수군진성에 대한 것과 최근 이루어진 異斯夫 관련 심포지움에서 발표된 연구논문 이외에는 없는 실정이다. 이 논문에서는 삼국시대 이래 수군의 운용과 배치, 그리고 강원도 동해안 지역의 유적 가운데 이와 관련 지울 수 있는 浦鎭(병선 정박처나 수군의 鎭)이나 성곽 유적에 대해 연구하였다. 기록을 통해 볼 때 이미 삼국시대부터 수군을 전투에 활용하고 있으며, 고려,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이는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신라는 船府를 두었고, 고려시대에는 船兵都部署․司水寺가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군사체제에 수군이 완전히 정규군으로 편제되어 수군 병종을 따로 설치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 도별로 수군절도사를 두고 예하부대를 배치하여 방어태세를 갖추었다. 조선초기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는 6개 水軍萬戶鎭이 설치되어 병선 17척, 군병 1,103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특히 이 가운데 삼척포에는 병선 4척에 수군 245명이 배치되어 강원도 지역에서는 가장 중요한 수군기지였다. 이후 『경국대전』에 규식화된 수는 병선 16척(無軍小猛船 2척 포함) 수군 420명(소맹선 수군을 1척당 30명으 로 산정) 정도로 감축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로는 삼척포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폐지되었다. 강원도 연해지역의 수군과 관련된 유적으로는 삼척의 오화리산성을 비롯하여 강릉의 방내리토성을 포함한 그 주변유적과 영진항, 안인포 일대, 강릉 석교리토성과 사천진, 양양의 대포영성과 광정진성터, 삼척의 삼척포 진성터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조선초기 수군만호가 배치되어 있었던 속초포가 있고, 기타 명확하지는 않지만 고려시대에 선병도 부서와 관련된 유적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는 그 위치나 유적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속초 포는 현재의 속초항 일대로 여겨지나 일대가 모두 개발되어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기록에 나오는 쌍성호 浦 鎭이 이것을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쌍성호는 현재 속초시에 있는 청초호를 말하는데 아마 어느 시기엔가 바다와 연접한 潟湖인 청초호를 병선 정박지로 사용한 것이라고 판단된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영동지역에는 명주(강릉)의 寧平戍 등 9개의 戍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戍는 일종의 소규모 감시초소를 말하며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바다를 감시하기 위한 海防의 일환으로 연해지대를 따라 설치한 것이었으나 이것이 고려시대 수군에 의해 운용된 것인지 아니면 일반 陸守軍에 의 해 운용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또 『關東誌』에 의하면 강릉의 連谷津, 梧耳津, 注文津에는 모두 斥候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있고, 󰡔만기요람󰡕(軍政編 四 海防 東海)에도 삼척의 藏吾里浦(근덕면 장호리) 가 동해 방면의 선박이 정박하는 곳이고 斥堠가 있다고 하였고, 平海의 仇珍浦ㆍ正明浦ㆍ厚里浦에 역시 척후 가 있다고 하였는데 이것이 水軍 척후인지 陸守軍 척후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동해안의 수군내지는 海防遺蹟은 현재까지 별도로 연구된 바도 없고, 고고학적 조사도 미흡하다. 향후 더 많은 고증적인 연구와 조사가 필요하다.
        10,200원
        20.
        2008.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전기 청동기시대에 대한 연구는 유구와 유물의 분석을 통한 편년, 그리고 주거지를 대상으로 한 취락연구가 주를 이루어 왔으며, 이에 대한 많은 진전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개별적인 유구분석과 연구는 주거지에 국한되어, 주변에서 확인되는 수혈유구에 대해서는 내부에서 출토되는 유물의 양이 적고 구조를 밝힐 수 있는 시설도 없어 연구대상에서 제외되어 왔다. 그러나 수혈유구는 취락의 일부를 차지하면서 변화하며 사회·경제적으로도 큰 의미를 담고 있음을 밝힐 수 있었다. 수혈유구는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넘어오면서 기능 뿐 아니라 유구자체, 입지와 취락 내 위치, 그리고 분포 양상 등에서 기존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전개되어 나간다. 초기에 발생한 수혈유구는 신석기시대 저장공과 유사하게 저장의 기본적인 기능을 갖지만 점차 취사 및 의례 등의 여러 기능을 동시에 갖게 된다. 평면형태와 내부시설은 방형의 노지가 설치된 수혈유구에서 원형의 무시설식 수혈유구로 변화하면서 깊이 또한 점차 깊어지게 되고 후기의 송국리형 저장공으로 대표되어 간다. 입지에서도 변화의 양상이 파악되는데, 구릉의 정상부에서 점차 사면부 및 곡부로 이동하는 모습이 관찰된다. 이와 함께 주거군 사이에서 개별적으로 위치하다 점차 주거군의 외부, 즉 취락의 외곽에서 수혈유구는 군집되어 설치된다. 이러한 변화는 취락의 구조 변화와 그 궤를 같이하며 사회경제적 의미의 변화도 반영함을 알 수 있었다. 개인적이며 임시적인 구조물의 성격에서 벗어나 점차 취락 내 중요위치를 차지하며 공공재의 성격을 띠어 나가게 되면서, 전문적 관리자의 등장을 초래하고 이로 인해 계층화의 발생도 일어나는 것을 판단할 수 있었다.
        8,700원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