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are four types of characters , , , , in oracle bone inscriptions, which are similar and their usage is crossed. Previous scholars did not identify the above four characters as the same character. Through the analysis of philology, the above four characters are identified as monosyllabic variants. In this paper, we believe that these four characters are a word pronounced “si”, indicating that both hands hold a pestle to poke meaning. However, the specific corresponding text of these four characters has not been found. In addition, the so-called phenomenon of “two persons co-divination” is also discussed, and it is considered that whether there is a phenomenon of “two persons co-divination” in oracle bones inscriptions lacks definite evidence and needs to be discussed.
삼성퇴 문화는 중국 남서쪽 사천 분지에 분포하고 있으며 연대 범위는 대략 기원전 1600~1200년 사이 청동기문화에 속한다. 이 문화는 쓰촨(四川)성 광한(廣漢)시 난싱(南興)진 三星堆유적을 대표 유적으로 하고 있으며, 유적의 범위가 넓다. 왜냐하면 이 유적의 가 장 주요한 발굴작업과 가장 중요한 고고발견 모두 “三星堆”라는 언덕 주위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삼성퇴유적”으로 명명되었다. 삼성퇴유적은 청두成都 평야에서 가장 오래 지속 된 선진先秦 취락과 성읍으로, 장강 상류지역에서도 이미 알려진 최대 규모의 청동기시대 유적이다. 삼성퇴유적으로 대표되는 삼성퇴문화는 쓰촨 분지 최초의 청동기문화로서, 중국 청동기시대 고고 중에서 중요한 지위와 작용을 하고 있다. 삼성퇴유적과 삼성퇴문화는 전설적인 고촉국古蜀国의 초기 역사를 탐구하고 연구하는데 풍부한 실물자료를 제공한다. 유적은 1929년에 발견되었다. 1934년, 화서대학華西大學박물관이 삼성퇴유적의 북쪽에 있는 月亮湾을 조사하고 발굴하였다. 1980년부터 1986년까지 쓰촨성 고고학자들은 연속적으로 삼성퇴유적에서 여러 차례의 고고학적 발굴을 실시했으며, 기본적으로 이 유적의 종적 변천 과정을 파악하였으며 동시에 삼성퇴문화의 명명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1986년에는 삼성퇴유적의 남쪽에 '삼성퇴'라는 언덕 서남쪽에서 두 개의 기물 구덩이가 차례로 발견 되어 대량의 금, 구리, 옥, 석, 뼈, 상아牙, 도질의 기물들이 출토되었으며, 이 때부터 삼성 퇴유적이 학술계의 광범위한 주의를 끌게 되었다. 1987년부터 1996년까지 고고학자들은 삼성퇴유적 동 서, 남 삼면의 외성벽을 확인하였고, 유적 서북부의 종횡의 두 개의 내성벽 유적을 모두 해부하여 하상시기夏商時期의 삼성퇴유적이 넓고 큰 토성담에 둘러싸여 있었으며, 서북쪽에도 내부에 작은 성(月亮湾小城)을 가지고 있는 규모가 매우 큰 성읍城邑이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2018년 이후에는 쓰촨성 문물고고연구소 四川省文物考古研究所가 삼성퇴유적의 주요 지점 몇 곳을 체계적으로 발굴하였고, 삼성퇴의 기존 두 기물갱器物坑 사이에서 이전에 발 견되지 않았던 기물갱을 발견하였다. 고고의 재료가 많아지면서 연구자의 관심은 삼성퇴 두 기물갱에서 삼성퇴성터로, 삼성퇴성터에서 삼성퇴문화와 관련 고고유적지로 확대되었으며, 그에 따라 삼성퇴유적, 고촉역사와 문명, 삼성퇴유적의 보호에 관한 연구로 심화되었다. 삼성퇴유적은 1988년 중국의 '전국중점문화재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로 지정되 었으며, 전국중점문물보호관리요구에 따라 유적의 보호범위와 건설통제지대를 설정하였으며, 보호표지와 경계표지를 세우고, 삼성퇴유적의 전시와 보호를 하나로 묶은 관리기구 - 삼성퇴유적박물관三星堆遺址博物館을 건립하였으며, 아울러 삼성퇴유적의 기록물건설작업도 완성하였다. 삼성퇴유적의 중요'고촉국유적古蜀國遺蹟'이라는 이름으로 '중국 세계문화 유산 예비목록'을 등재 신청하였다. 삼성퇴유적과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중국 허난성 안양시 은허유적殷墟遺蹟은 모두 20세기 20~30년대 이미 고고작업을 시작한 청동기시대 고대국가의 도성유적이다. 삼성퇴유적의 많은 아름다운 유물들이 세계 고고학계와 문화유산 보호학계를 놀라게 하였으며, 몇몇 대표적인 유물들이 오랫동안 세계 곳곳을 돌며 전시되어 온 것은 삼성퇴유적의 세계적인 영향을 단적으로 반영한 것이다. 이에 따라 삼성퇴유적이 위치하고 있는 정부와 현지 사회공동체, 고촉국이 소재하고 있는 쓰촨 지방정부와 대중은 국내외 고고학과 문화 유산학 전문가들로서 삼성퇴유적의 <<세계유산목록>> 등재신청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현재 쓰촨성이 직접 관할하는 고고, 보호(保護)와 전시를 하나로 묶은 삼성퇴문명연구원(三星 堆文明研究院)이 이미 조성을 시작했으며, 삼성퇴유적의 대규모 발굴작업이 현재 진행 중으로, 유적 중 중요 유적이 소재하고 있는 구역은 토지 국유화 징수작업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고, 삼성퇴유적박물관도 증축과 전면적인 전시를 진행 중에 있으며, 유적박물관과 유적공원의 연결과 최적화 설계도 신속하게 추진되고 있다. 삼성퇴유적이 빠른 시일안에 더 좋은 모습으로 세계 각지에서 오는 관람객들을 맞이할 것이라고 믿는다.
This paper makes a comprehensive investigation of the New Edition of Copying and Interpretation of Yin Ruins Characters, and finds that there are still some problems in it, such as the unreliability of the character interpretation, the lack of interpretation, the errors in sentence breaks and inaccuracy of annotation. The publication of this book is of great value in the field of oracle bones, and although it has some minor flaws, it does not prevent it from becoming an authoritative work.
Through the description, and inscriptions tool books, the Yin Ruins Oracle was edited by Wang Shaodong and Wang Yuxin, there are at least four aspects of the following problems: First, the interpretations is not new. secondly, the notes are uncertainty. and thirdly, The translation is out of order. Finally, some punctuations are wrong. As an exact textbook for the introduction of ancient Chinese characters in the cultural relics press, we can not fully trust and should use it carefully when using it.
The main objective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preservation and management for the city wall ruins of China, and to find out the implications. Firstly, Chinese walls have experienced a process from demolition to protection. The walls of the historical value of the site are gradually being certified, and many walls ruins were designated as a conservation unit. Secondly, China’s institutional system is based on the central government issued Cultural Relics Protection Law and combined with the actual situation of local governments to establish a special law. Management System is Cultural Relics Bureau, the planning department, the garden department and the tourism sector joint implementation. Thirdly, through the study of Nanjing, Xian, Pingyao, Suzhou city wall ruins finding that perfect legislation and unified management system to help protect city wall ruins.
삼척의 불교문화는 선덕여왕 11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오대산에 들어가 관음보살의 聖蹟을 찾던 중 두타산에 이르러 흑련대를 처음으로 창건하여 현재 삼화사의 시초가 되었다는 삼화사사적, 이 후 선종이 전국적으로 퍼진 통 일기에 범일국사가 강릉의 굴산사를 세운 이래 삼척지역에도 불적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보아 신라 하대에는 유입, 전파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불교문화의 전래 이후 고려시대 말까지 호국불교로 크게 발전하였고, 강원도의 사찰의 불교는 더욱 신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강원도에 분포하는 불교유적, 유물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 지 않아 전반적으로 불교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본 글은 강원도 삼척시·동해시·태백시를 중심으로 문헌조사를 통해 폐사지의 현황을 살펴보고, 현지조사를 통해 사지가 유존하거나 출토된 석조물, 와편 등을 함께 검토하였다. 문헌기록과 현지조사를 통해 삼척·동해·태백 내에서 폐사지는 현재 총 61개가 확인되었다. 삼척 34개소, 동해 11개소, 태백 16개소이며, 연구소에서 확인한 폐사지는 삼척 4개소, 동해 3개소, 태백 5개소이다. 현재 삼척지역의 폐사지는 완전히 조사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사지로 추 정되거나 구전되는 곳을 확인한 결과 유구나 유물이 확인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자연재해 및 현상변경으로 등으로 인하여 명확히 소재지를 파악할 수 없는 곳들이 요소에서 확인되었다. 1990년대 이후에 폐사지 조사를 통하여 시·발굴된 유적은 흥전리사지, 지상사지, 본적사지 등이 있다. 그 중 최근 흥전리사지가 시·발 굴조를 통하여 건물지, 석축, 탑지 등을 확인하였고, ‘국통’명 비편, 청동제 장식, 철제 초두 등 통일신라시대의 불교문화를 확인하였다. 따라서 종합정비계획을 수반한 정밀발굴조사가 이루진다면 인근의 폐사지와 비교연구는 물론 강원도의 불 교문화를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우산국의 고고학적 실체규명은 한국고고학의 중요한 미해결 과제의 하나이다. 1950년대부터 지금까지 진행중인 울릉도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를 통하여 우산국의 실체에 대한 외연을 좁혀가고 있으나 향후 조사연구를 통하여 해결해야할 핵심과제가 많이 남아있다. 지금까지 울릉도에서 고고학적으로 확실하게 밝혀진 모든 유적과 유물은 이사부의 우산국 정복이후에 해당하는 신라고분과 신라토기 등이며, 당연히 존재했던 요지와 취락주거지 등의 흔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는데, 이것은 목표지향적이고 체계적인 학술 조사가 시행되지 않은 데서 비롯한 것이다. 현재까지 이사부정복이전의 시기에 해당하는 유적과 유물로 거론된 바 있는 추정고인돌과 타제어망추와 지석 및 무믄토기편 들만으로는 신라복속 이전시기의 고고학적 해석이 어려우며, 따라서 신라복속이전시기에 해당하는 선사시대와 5세기대까지의 고고학적 증거를 찾아내는 조사는 우산국연구의 필수불가결한 과제로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고분들도 울타리로 구획한 극소수외에는 대부분 방치되어 있으며, 일주도로와 활주로건설에 따른 위락지개발과 경작지 확대과정에서 급속도로 파괴인멸될 처지에 놓여있다. 따라서 이러한 신라고분들의 보호대책은 우산국의 고고학적 규명을 위한 조사와 병행해서 추진해야 하며, 이를 위하여 유관행정기관과 조사연구자와 긴밀하고 항시적인 협조가 이루어 져야한다. 울릉도의 유적보존과 고고학적 연구는 우산국의 실체를 규명하는 학술적 의의뿐만 아니라 독도에 대한 일본의 영토시비를 종식시키는 총체적인 작업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시기적으로 시급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파악된 토기산포지를 중심으로 주거지나 요지 등의 지하유구를 찾기위한 체계적이고 연차적인 시발굴을 실시하여 신라복속이전의 독자적인 유적과 유물을 찾아내고 이를 근거로 우산국의 성격과 형성과정 및 주민 등 총체적인 고고학적 사실을 규명해야 할 것이다.
전근대 시대의 군사활동이나 방어에 있어서 성곽이라고 하는 존재는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대부분의 전투가 攻城이나 守城戰이라는 것에서도 그러한 상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전쟁이 상시화된 삼국시대의 경우 수많은 성곽이 건설되고 또 폐기되었다.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성곽유적에 대한 조사나 연구가 있었으나 아직 명확하게 성격이 밝혀지지 않은 유적도 있고 또 문헌기록에는 나타나지만 그 위치조차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본 연구에서는 여러 史書에 기록되어 있거나 유적으로 남아있는 삼척지역의 성곽과 수군 유적에 대한 역사고고학적 연구를 통하여 삼국 시대 신라의 여러 군사적 활동과 관련하여 그러한 유적들이 어떠한 의미를 갖는가를 연구하였다. 아직 고고학적 조사자료가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삼척지역에 소재하는 10개의 城址 가운데 오화리산성을 비롯하여 갈야산성, 옥원성, 호산리성지, 광태리고성, 맹방고성 정도는 삼국시대에 이미 성터로 자리잡 았던 곳이라 여겨지며 결과적으로 신라의 북방 진출이나 지방통치체제 정비와 관련된 유적이라고 여겨진다. 특히 오화리산성은 신라의 삼척 점거 초기에 조성된 산성이며 신라의 동해안 지역 군사거점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고 여겨지며, 古代 삼척군의 領縣과 관련되는 것으로 판단되는 호산리성지(혹은 옥원성지), 광태리고성(혹은 맹방고성) 은 小據點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갈야산성 성벽하부에서 신라고분이 발견된 점에서 볼 때 갈야산성도 신라가 사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나 그 시기는 오화리산성 보다는 후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싶다. 신라는 일찍이 국가적인 차원에서 선박 운영 제도를 확립하였고, ‘船府’라는 관 청을 두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상당한 규모의 수군과 병선제조 능력, 운용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아마 신라의 북상과 함께 동해안 곳곳의 주요 요충지가 신라 선박의 기항지로 활용되었을 것이며, 그 가운데 삼척의 오십천 하구 와 오분항은 신라의 군사거점과 연계하여 가장 중요한 기항지였다고 여겨진다. 異斯夫가 우산국 정벌을 앞두고 하슬라군주로 임명된 사실을 중시하여 이사부 가 통제하던 신라군이 모두 하슬라(강릉) 지역으로 거점을 옮겨가서 우산국 정벌에 임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나 이 문제에 대한 어떠한 명확한 史料도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본래 하슬라(강릉)지역을 포함한 신라의 북부 동해안 지역이 ‘실직주’라는 명칭하에 관리되고 있었던 것을 州의 명칭과 그 중심지를 하슬라 지역으로 바꾸어 정한 것에 불과하다. 이미 여러 해 동안 실직군주를 지내면서 건설해 놓은 군사거점을 옮긴다는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하슬라주를 설치하였으면서도 지방 주둔 신라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군단인 停(悉直停)을 곧바로 하슬라로 옮기지 않고 하서정을 무열왕 때에 와서야 비로소 강릉으로 옮겨 설치한 것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삼척에 상당기간 주둔하며 육성한 수군을 우산국에 대한 군사작전을 목전에 두고 군주의 이동과 함께 완전히 이전하여 간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더구나 우산국으로 향하기 훨씬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는 삼척지역을 완전히 배제하고 단지 군주 명칭이 바뀌었다고 옮겨간다는 것은 여러 가지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볼 때 합리적인 해석이 아니라고 판단된다.
In this study, I investigated the function and the setting characteristics of 日type plan building ruins in the Hoe-amsa monastery site, that’s renovated by Zen priest Na-ong(1320-76) in the later Goryeo Dynasty(918-1392), through the comparative research between China, Japan, and Goryeo in that time. The ruins of 日type plan building, located in the east side of Buddha hall ruins, is the ruins of Jungryo(衆寮). It was called as Jeondanrim(旃檀林), and the name can be seen from the record(天寶山檜巖寺修造記) of Yi-saek(李穡, 1328-96). It’s name and the composition of plan is very similar to the Jungryo of Chinese and Japanese Zen monastery in 13th-14thcentury. And from it, we can see that, the priest Na-ong tried to introduce institution of Chinese Zen monastery, which he experienced during the time of study in China. But, the location of Jungryo in Hoe-amsa monastery is deferent from the Zen monastery of China and Japan, and it can be said as the setting characteristics of Hoe-amsa monastery in Goryeo Dynas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