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다양한 역사문화 자원이 공존하고 있는 서울 호암산성의 역사적 가치를 살리 고 더욱 많은 시민이 찾을 수 있는 문화유산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향후 정비 방향과 활용 방 안을 모색해 본 것이다. 우선, 정비 방향으로는 우선 성곽에 대한 정밀지표조사를 통한 현황 자료 확보와 성벽과 문지에 대한 학술발굴조사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리고 호암산성 역사문화길 조성 및 정비에 관한 의견과 함께 QR코드를 넣은 안내판 설치를 통해 현장에서도 유적에 대한 정 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또한 호암산성 아래로 지나가는 현재의 서울 둘레길 외에 호암산성을 지나갈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둘레길 코스 개발이 필요함을 언급 하였다. 그리고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제2우물지 및 주변 건물지에 대한 정비 복 원이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또한 녹조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한우물에 대해서도 재정비가 필요하며, 호암산성에 상징적인 사인물을 설치함으로써 포토 스팟을 조성하는 방안을 제안 하였다. 그리고 활용 방안으로는 산성의 접근성 강화를 위한 주차장 마련, 산성의 역사적 가치와 발굴조사 성과 등을 알리고 탐방객의 편의를 위한 방문자센터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또한 청사초롱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외부 연결통로의 환경 개선과 함께 호암산성을 알릴 수 있는 공간으로 꾸밀 것을 제안하였다. 이 밖에도 금천구 교육나눔협동조합에서 시행하였거 나 시행하고 있는 우리고장 국가유산 활용사업 활성화 및 지역문화유산교육 활성화 사업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호암산성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 에 호암산성과 관련된 여러 스토리텔링 개발이 필요하며, 홍보 및 탐방객 만족도 향상을 위 한 문화유산 전문해설사 제도를 적극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하였다.
고구려 초기 왕도(王都)인 졸본의 오녀산성은 평지에 있는 중국의 도성(방어성이자 도읍 성)과는 달리 산 정상부에 위치해 있다. 고구려는 산성을 방어성이자 치소성으로 삼아서 중 국의 침략에 대항하며 그 효율성을 증명하며 국세를 펼쳐 나갔다. 고구려 왕도 연구는 일본 인 학자들이 20세기 초에 주로 많이 하였는데 그들의 연구는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1914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는 그의 논문에서 고구려 도성은 평상시 거주하는 평지성과 비상시 들어가 농성하는 산성의 세트로 이루어졌다는 이론을 제시하였는데 이 설은 한국과 일본과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 100여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통설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다. 근 래에 여러 한국의 신진 학자들에 의하여 세키노 다다시의 고구려 왕성의 평지성-산성 세트 론에 대한 의문과 비판이 여러 번 나왔다. 양시은(2021)은 이러한 도식화된 이론의 시작과 정착과정 및 어떻게 일본, 중국, 한국의 학자들이 이 이론을 수용하게 되었는지를 체계적으 로 토의한 뒤, 산성과 평지성의 세트이론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일반 시민을 위한 한국사 서술이나 다른 학술 논문에서는 이 산성과 평지성의 세트 이론이 보편화 되어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이 논문은 고구려의 왕도는 산성과 평지성의 세트가 아니고, 산 성에서부터 시작하였고, 산성을 위주로 하여 외부 침략을 방어하고 나라를 경영하였다는 것 을 다음 다섯가지 고구려 왕도의 특징을 들어 검토하고자 하였다.(1)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마지막까지 산성이 주로 제1차적인 왕도이었다.(2) 고구려에서 왕도로서의 산성은 토속신앙 적 성지聖地이자 성전聖殿이었다.(3) 뉴질랜드 마오리 문화의 목책성(木柵城)과 비교해 보 면 한 부족이 대체로 목책으로 요새화된 성 하나를 방어성이자 거주성으로 하고 나머지 인구 는 목책성 주위에 방어벽이 없는 마을에 흩어져 살다가 위험시(외부 침략이 있을 때) 목책 요 새지에 들어가 함께 농성하였다.(4) 고구려의 외국침략자에 대한 방어 전술이 청야입보淸野 入保-게릴라전술이었는데 이러한 전술에는 산성이 평지성보다 더 큰 이점이 있었다.(5) 근 래 많은 고고학적 산성의 발굴 결과는 고구려의 산성-평지성 세트 방위체제를 뒷받침하지 않는다. 졸본에는 아예 평지 왕성이 없었고, 그 다음 고구려의 수도 두 곳(집안, 평양) 모두 왕 도가 산성에 위치해 있다가 힘이 축적되고 필요를 느꼈을 때 평지성을 쌓아 왕도의 역할을 분담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산성이 곧 방어성이자 치소성(도성)의 역할을 하였다.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의 평상시 거주하는 평지성과 비상시 들어가 농성하는 산성이란 세트이론은 받아 드릴 수 없 다. 여기에 뉴질랜드 마오리 문화의 목책방어성과 고구려 산성의 비교연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천 설봉산성은 백제 한성기 석축산성의 존재에 대한 논쟁의 중심에 있는 산성 중 하나 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논의에 앞서 산성의 축조 주체 및 구조를 밝히기 위한 기본적인 근 거자료가 되는 설봉산성의 성벽 및 토층 양상에 대해 재검토하였다. 분석 결과 설봉산성은 초축 이후 최소한 4단계에 걸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개축되며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확인되는 단계에서는 성벽과 기단보축, 암거식 수구 가 축조되는데, 석축산성의 초축은 신라가 주체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 단계에서는 서문지의 축조 및 성벽의 수·개축이 이루어지며 성 내부 공간의 연약 한 지반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엽층 및 목재를 이용하는 등 대대적으로 산성 안팎이 수·개축된다. 이후 서문지 및 성벽이 한차례 개축되며, 통일신라 시기의 유구·유물은 물론 고려·조 선시대와 관련된 건물지 및 유물 역시 확인되는 등 설봉산성은 오랜 시간 동안 지리적·군 사적·행정적 중요성을 잃지 않고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축산성과의 관련성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백제 유구 및 유물이 확인되는 것 역시 분명 한 사실이다. 이는 최소한 산성이 축조되기 이전 해당 공간을 백제가 점유하고 있었음을 시 사하는 것이며, 고고학적 증명을 위해서는 차후 성 내부 공간 및 치성·북문지 등의 조사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광양 마로산성은 6세기대 백제에 의해 축성된 산성으로 지금까지 총 5차례의 발굴조사 를 통해 산성 내·외부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다종·다양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고, 특히 광양의 백제때 지명인 ‘馬老’와 치소·관청을 상징하는 ‘官’이 결 합된 ‘馬老官’명 기와가 출토되면서 이 지역의 고대 治所城으로 비정되어 왔다. 이 연구는 마로산성의 발굴성과를 검토하여 고대 사회 치소성의 개념을 고고학적으로 접 근한 것이다. 이를 위해 마로산성 내부시설의 입지, 규모, 출토유물 등의 집중 분석하여 상 관관계를 검토하였고,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하였다. 첫째, 관아·군사·저장·제의 관련 시설의 존재이다. 이러한 시설들은 치소성으로서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 시설인데 행정의 핵심시설인 東軒은 Ⅱ-4호건물지, 외부 경계와 조망을 위한 將臺는 Ⅱ-1호건물지, 지배계급의 생활 공간인 內衙는 Ⅰ-2호건물지, 조세와 관련된 창고 시설은 Ⅱ-2호,Ⅱ-3호 건물지로 판단된다. 둘째, 祭場으로서의 기능이다. 마로산성에서는 집수시설과 수혈유구 등을 통해 진단구, 공헌물로 볼 수 있는 특정 종류의 유물들이 반복적으로 출토되고 있어 마로현의 제장으로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상위 계층의 신분표상품의 존재이다. 마로산성에서는 금동과대, 금동투조장식, 중 국제 자기, 동경, 벼루 등 다양한 신분표상품들이 다수 출토되었다. 이러한 신분표상품들이 집중되고 있는 점은 마로산성이 마로현의 치소성으로서 활용되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넷째, ‘馬老官’名 명문와의 존재이다. ‘마로관’명 기와는 광양의 백제때 지명과 행정치소 인 관이 복합된 기와로서 마로산성이 마로현의 치소성이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자료 이다.
산성은 외침을 막고, 백성을 지키는 관방유적이다. 하지만 고대산성의 축성 목적은 일정 지역에 대한 장악(확보)를 우선하였다. 일정지역에 대한 장악은 무력을 기반한 통치, 관리, 방어 등의 개념이 포함된다. 따라서 산성 내에는 전투 가능한 방벽(성벽)이 축성되고, 안에 는 군사의 생존과 해당지역 관리위한 시설(각종 건물지, 용수시설 등)이 조성된다. 그리고, 축성주체(국가)는 이 같은 시설을 구비하고, 운영할 수 있는 일정 수준의 기술력과 제도를 갖추고 산성을 중심 무대로 다양한 행적(역사)을 남기었다. 따라서 산성의 실체와 그 역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오랜 조사와 고찰, 다양한 연구방법 의 적용과 검증이 필요하다. 국내 고고학에서 고분, 생활유적 등 다른 유구보다 연구 성장이 느린점은 城에 내포된 종합적이고 거대한 역사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관념에서 “산성 내 공 간활용”연구는 성벽과 성벽시설(문지, 치 등)에만 집중되던 기존연구 성향에서 벗어난 다양 한 방식의 연구 접근을 위해 시도한 것이다. 본 연구는 백제 치성(縣급)으로 밝혀진 예산산성을 대상으로 하였다. 하나의 산성이지만 조사된 내부시설이 양호하고, 유구별 구조와 배치 등 공간 활용상태 파악이 가능하였다. 그리 고, 이를 토대로 유사등급(郡縣) 산성사례를 비교하여 백제 산성 내 공간 양상을 살펴보았다. 연구결과 산성 내부는 A.(정상부), B.(경사 중~상단부), C.(경사 하단부)로 구분되어 필요 시설이 배치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A.정상부 공간에는 다각형건물(종교/제의), 석벽건물(대 형창고), 저장수혈, 저수조(물탱크) 등 저장시설이 밀집된다. 특히, 잔여대지(넓은 공간)를 필 수적으로 확보하여 사열(지휘)/제의(종교)/창고(물품)관리 등 공식적인 대규모 군사 활동이 가능케 하였다. B.경사 중~상단부 공간은 비탈진 경사에 협소한 평탄면을 조성하여 중소규모(6m이내) 시설을 배치하였다. 유구는 고래, 아궁이 등 난방 건물이 중심을 이룬다. 소규모로 분리된 병사 숙소/취사 및 기타 물품 제작소 등이 기능한 것으로 추정된다. C.경사 하단부 공간은 저지대로 유수처리의 집수지가 배치된다. 그리고 곡부 주변은 축 대를 시설하여 곳곳에 평탄지를 조성하고, 규모 있는 건물지를 조성한다. 정리하면, 산성 정상부 일원은 공식적인 대규모 군사활동(지휘/사열/제의/창고관리)을, 경사면 중~상부에는 병사 숙소/취사/생산 및 기타 소규모 활동을, 경사면 하부(곡부)에는 집 수지와 축대 등 배수 및 관련시설을 구비하는 등 계획적인 공간 구획과 활용이 이루어진 것 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강원도 영동지역의 신라~통일신라시대의 산성과 그 역사적 의미를 찾아본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강원도 영동지역의 수많은 산성들 가운데 문헌 자료들에 대한 비판적 논증과 함께 고고자료들을 분석하여 신라~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8곳의 산성을 추출하였다. 그 결과 여러 가지 고고학적 특징을 찾아낼 수 있었고, 역사적인 실상에도 접근 할 수 있었다. 우선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도 신라와 통일신라시대의 행정단위인 주-군-현마다 산성들이 있었고, 산성의 규모도 행정 구역 단위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주(州) 단위는 1,000m 이상이며, 현(縣) 단위는 200~600m 정도로 구분된다. 또한 일찍이 설치된 실직주와 하슬라주의 산성(州城)들은 테뫼식 가운데 산복식(山腹式)의 토성이고, 이후에 만들어지는 현 단위의 산성(縣城)들은 테뫼식 가운데 산정식(山頂式)의 토성이 많았다. 그리고 신라의 진흥왕 북진기 이 전에 축조한 산성의 성벽은 토루에 돌을 피복하는 공통점도 보였다. 특히 강릉 경포호 강문동토성과 삼척 오화리산성은 바닷가의 곶[산]에 석호나 강을 끼고 입지 하고 있는데, 이들 산성이 신라의 동해안 연안항해와 관련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이후의 시기에는 이들 산성이 다소 내륙으로 들어가 산의 정상부에 입지 하는 경향성을 보여주는데, 특히 진흥왕 북진기부터 통일전쟁기에는 그 입지의 변화가 잘 나타난다. 나아가 강릉 경포호 강문동토성과 삼척 오화리산성의 존재는『삼국사기』에서 실직(城)과 하슬라(城主) 등과 함께 나오는 사료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해준다. 아울러 삼척 오화리산성은 북해(北海)의 제장(祭場)인 비례산(非禮山)으로 추정된다. 이 글은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 비교적 확실한 신라~통일신라시대의 산성들을 최초로 다루었다는 의의가 있는데, 앞으로 강원도 영동지역의 신라사와 신라고 고학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 글은 삼척을 가로지르는 오십천 하구의 남쪽 곶(산)에 입지한 오화리산성의 신라사적 의미를 찾아본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고고자료와 문헌자료를 분석하여 오화리산성이 신라성임을 밝히는 작업을 하였다. 고고자료로는 산성에서 수습된 신라토기를 분석하고, 할석 이 피복된 토루 성벽 축조 방식을 찾아 오화리산성을 5~6세기의 신라성으로 추 정하였다. 문헌자료로는 오화리산성 주변에 신라계 지명과 채록 자료를 찾아 분석하여 오화리산성이 신라성임을 논증하였다. 이와 같이 오화리산성이 신라성으로 추정되므로, 이 성이 『삼국사기』에 나오는 실직(주)성[悉直(州)城]으로 볼 수 있으며, 「울진봉평신라비」의 실지도사(悉支道使), 실지군주(悉支軍主)가 주둔하였던 성일 수도 있다고 판단하였다. 나아가 이 성의 신라사적 의미는 강 하구의 바닷가 곶(산)에 입지한 점에서 최 근 발견조사된 강릉 경포호 옆 강문동 신라토성과 통하고 있어 신라의 동해안 연 안항해(沿岸航海)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결국 오화리산성 일대는 신라가 동해안을 따라 고구려와 신라 간의 교섭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연안항해를 위한 중간 기항지(중간거점)로 기능하다가, 이후 신라와 고구려가 대립하면서 신라의 방어 거점 기능을 하였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역사적 기능이 중시되어 통일신라시대 때 오화리산성 일대를 북해(北海) 중사(中 祀) 비례산(非禮山)의 무대로 정하였다고 판단된다.
This paper looked into the structure of and changes in the building process of Gijang mountain fortress and its receiving reservoir by analyzing data from an excavation investigation. The structure of the receiving reservoir may be classified into a flat form, stone sheath, floor facility, wall facility, and entry and exit facility. The flat form of the Gijang mountain fortress and receiving reservoir is round. Concerning the sectional form, the wall was obliquely excavated in the trapezoid. As a stone sheath building method, it was built by undertaking a range work of oblong stone materials in a clockwise direction on a stamped soil floor. Then, it was treated with stamping using double layers of gray clay and yellowish brown clay on the floor and the wall. Also, in a space between the stamped layers on the floor, herbal plants and a straw mat were laid for waterproofing as well as to prevent sinking. As an entry and exit facility, two facilities were confirmed symmetrically in the southeast and in the northwest. It is believed that they were built additionally during rebuilding after the initial construction. The building process was revealed to have been carried out in 8 stages. Given the structure and excavated remains, the building period is estimated to be the early to mid 7th century for the initial building, the later 9th to 11th centuries for the primary rebuilding, and the later 16th to early 17th centuries for the secondary rebuilding.
한계산성에 대해서는 그간 정확한 규모나 상성, 하성의 구조와 접근로, 기타 내부 건물지나 부대시설물지에 대한 현황이 분명하게 파악되지 못하였는데, 지난 2010년부터 필자가 조사하여 새롭게 확인된 사항은 대략 다섯가지이다. 첫째는 상성과 하성의 구분이 명확하게 확정되었다는 점이다. 종래 세종실록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바, 상성(上城)과 하성(下城)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구분이 분명하지 않아 막연하게 천제단 근처가 상성이라고만 여겨져 왔으나 이번 조사에서 상성의 구조와 위치가 명확해 지게 되었다. 둘째는 하성의 새로운 건물지가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기존에 하성내에서는 계곡부 동측에서만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나 이번 조사에서 그 계곡 반대편에도 여러 건물지와 바위그늘 주거지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셋째는 상성내에서 새로운 유물 출토지를 찾았다는 점이다. 기존에 상성내에서의 유물은 대부분 대궐터에서 수습되었으나 이번 조사에서 여러 곳에서 새로운 유물이 채집되었다. 넷째는 산성 원성(元城)과 별개로 축조된 돈후(墩堠) 시설물이 2개 지점에서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교통로에 대한 근접 감시는 물론 일시적인 차단을 통한 지연전을 전개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다섯째는 산성으로의 다섯가지 출입로가 정확하게 파악되었다는 점이다. 산성의 운용과 관련하여 출입로 파악은 매우 중요한 사항인 바, 이번 연구를 통하여 산성으로의 접근로가 명확하게 파악되게 되었다. 한계산성은 초축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되어 중세시기 활용에 대한 명확한 역사기록을 가지고 있다. 특히 대몽항전(對蒙抗戰)의 마지막 단계에서 승전한 역사적인 장소이다. 1259년(고종 46) 몽고에 투항한 조휘 일당이 몽고 군사를 끌고 와서 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점령하지 못하였고 오히려 산성을 지키고 있던 방호별감(防護別監) 안홍민(安洪敏)이 야별초군(夜別抄軍)를 거느리고 나아가 습격해 모두 섬멸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중부내륙 지역이 몽고의 약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이 전투에서 승전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려 공민왕 당시 반원정책을 추진하면서 군사적 긴장이 높아지자 한계산성을 확장하면서 크게 개축한 것은 바로 대몽고전에서 승전하였다고 하는 사실과 직접 관련이 있다. 그러한 역사적 의미 뿐만 아니라 한계산성은 중세시기 험지위주 산성의 전형적인 사례로, 성곽의 확장, 별설의 돈후(墩堠) 시설물 축조 등 중세 산성의 특징적인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본 연구는 2010년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록된 국가사적 제57호 남한산성을 대상으로 과거 문헌자료와 현장조사를 통해 식생구조 변화를 밝히고 역사 문화적 가치가 높은 남한산성의 식생복원을 위한 관리방안을 수립하고자 실시하였다. 남한산성 식생의 비오톱 분석 결과 대상지 면적 2,611,823m2 중 참나무류림이 40.8%이었고, 천이 가능성이 높은 소나무림이 16.5%로 청량산 일원과 서문에서 북문 일원, 남문에서 청량산 사이의 산 능선에 분포하고 있었다. 천이 가능성이 낮은 소나무림은 4.7%로 남한산초등학교 뒤 산림에 주로 분포하고 있었고, 천이가 진행중인 소나무림은 2.9%, 도태중인 소나무림은 2.1%였다. 19년간 식생구조 변화 분석 결과 소나무림→소나무 및 참나무류 혼효림→참나무류림→서어나무림으로 천이가 예측되었고,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참나무류의 세력이 확대되었다. 남한산성 소나무림의 식생 관리방안은 식생구조 특성을 고려하여 관리권역을 구분하였고, 관리권역은 소나무림 경관유지지역 553,508m2, 소나무림 경관복원지역 114,293m2, 적극적 관리지역 205,306m2, 자연천이 유도지역 1,169,973m2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