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study aims to examine how the Gyeongseong Hokuk Shrine established the natural environment in Yongs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focus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Chosen Hokuk Shrines. In the colonies, the establishment of shrines strongly tended to symbolize Imperial Japan and visually represent its ruling logic. The Gyeongseong Hokuk Shrine holds historical significance as a place to commemorate soldiers who died for the Emperor and as a tool of colonial rule, but further discussion is needed on how it was organized within the Yongsan. This study focuses on Hokuk Shrine planning under which the Shrine Bureau of Home Ministry constructed similar shrines across Japan by the Ministry of Home Affairs Ordinance No. 12 of 1939. As a result, this study examines the environment and architectural styles of Hokuk Shrines through examples from Japan and uses this analysis to explore the characteristics of Gyeongseong Hokuk Shrine and its relationship with the Yongsan. The significance of this research lies in highlighting the historical urban significance of Yongsan during the modern period.
본고는 설탕을 필수 재료로 하는 오늘날의 ‘과자’가 일제 강점의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한국과 타이완에서 어떻게 전파·대중화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한국의 경우, 근대 이전 설탕을 식재료로 사용하지 않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강렬한 단맛에 즉각 반응하기보다 조선인에게 익숙했던 얼음과 결합한 아이스케키가 출시된 이후에야 설 탕맛에 익숙해졌다. 와카시의 일종인 연양갱의 대중화 역시 재래부터 먹어온 우무묵 이 있었기에 향유될 수 있었다. 반면, 청말부터 설탕을 생산·향유해온 타이완의 경우, 현대식 과자 자체보다 신제품을 홍보하고 더 많이 팔기 위해 과자 상인들이 운영을 겸했던 ‘킷사텐’이 거꾸로 식민 모국인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덕분에 일본 은 여급을 두는 퇴폐적인 ‘카페에(カフェ―)’에서 벗어나 일본 지식인들이 꿈꾸던 프 랑스식 문화살롱을 실천할 수 있었고, 음료값을 지불할 수 있다면 누구든지 바쁜 일 상 중 가벼운 마음으로 잠깐 들러 휴식을 취하는 현재의 ‘카페(café)’ 형태로 발전하 게 되었다.
본 논문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시멘트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이래, 건축적으로 주요한 변화의 기점 및 그 배경을 도출하는 사적(史的) 연구에 큰 목적이 있 다. 이를 위해 시멘트 산업과 관련한 일본 국내의 상황 과 일제 치하 조선에 적용된 정책을 고찰하는 한편, 구 체적인 건축자재의 유형과 특징을 살펴보고 시멘트가 건축·토목사업의 주요 자재로 사용되는 양상을 규명하 고자 했다. 소재와 기술 면에서 진일보한 근대적 건축자재는 근 대와 전근대 건축을 구분하는 비교적 명확한 기준이라 고 할 수 있다. 산업혁명으로 추동된 공업화, 산업화 과 정을 거쳐 일정한 규격으로 양산된 자재들은 열강의 식 민지 확보 경쟁에 따라 일원화되기 시작한 전 세계 시 장에 판매되었다. 건축자재가 열강의 점유지역을 중심으로 범용성을 획 득함에 따라 건축문화의 지역 특성은 이전보다 미약해 지고 보편화되었다.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대량생산과 신소재의 등장이 건축문화에도 영향을 미친 것인데 가 장 대표적인 자재로 철, 유리 그리고 시멘트를 꼽을 수 있다. 특히 시멘트와 그 파생 자재들은 근대 이후 공장을 통해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가장 대표적인 건축자 재이다. 거푸집 형태와 시공 방법에 따라 자유로운 형 태 연출이 가능하고, 일정한 품질로 양산과 유통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댐 건설과 철도부설 등 대 규모 토목공사에서 필수적으로 대량 수요가 발생할 뿐 아니라 구조, 마감, 방수 등 건축공정의 거의 모든 부문 에 걸친 범용성을 지녔기 때문에 근대적 건축자재로서 대표성을 띤다. 한국에서 근대적 의미의 건축용 철강과 판유리, 시멘 트는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도입되었다. 철의 경우는 미쓰비시제철(三菱製鐵)이 1917년 황해도에 건 설한 겸이포제철소를 통해 1918년부터 생산을 시작했 는데, 당시 생산된 철은 대부분 선철(銑鐵)로, 군수용 납품이 주목적이었다. 시멘트는 일본의 오노다(小野田)시멘트 주식회사가 1917년, 평양 인근인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리에 공장을 건설하고 1919년부터 생산을 시작했다. 1936년부터 우 베(宇部)시멘트, 아사노(淺野)시멘트 등 일본의 시멘트 자본이 추가로 진출하면서 조선 북부지역의 석회석 매 장지대를 따라 공장을 건설했다. 조선에서 생산되는 시 멘트는 점차 생산량과 수출을 늘려가면서 조선 국내뿐 아니라 일본과 만주의 수요에 대응했다. 유리의 경우 의료와 식기용 병의 제조소는 확인할 수 있지만, 건축 용 판유리의 본격적인 공장생산이 이루어진 것은 해방 이후로 생각된다. 일본의 대표적 시멘트 제조사인 ‘오노다시멘트 제조 주식회사(小野田セメント製造株式会社)’는 일본, 대만, 조선, 만주의 시멘트 수요 증가 예측에 기반하여 1913 년부터 준비 단계를 거쳐 1919년 평안남도 강동군 승 호리에 평양지사 공장을 설립하고 시멘트 생산을 시작 한다. 시멘트 생산 초기의 수요는 철도, 도로, 교량 등 대형 토목공사에 집중되었다. 시멘트는 잔골재와 물, 기타 혼화재료를 섞은 콘크리트로 가공하여 교량의 기초와 교 각, 댐과 항만의 거대한 제방을 이루었고 콘크리트관과 블록은 배수시설과 축대의 주요 자재로 사용되었다. 시 멘트는 토목공사에서 널리 쓰이며 자연 지형을 극복하 는 수단이 되어 도시기반시설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벽돌 조적조가 다수를 이루던 건축의 구조에도 1920 년대부터 점차 콘크리트 도입이 늘어났다. 1923년 일본 에 발생한 관동대지진을 계기로 건축자재의 내화·불연 성능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다양한 건축자재와 시 공수법의 개발이 진행되어 시멘트, 콘크리트의 실효성 이 높아졌으며 이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시멘트는 인조석과 슬레이트, 시멘트기와 등 건축의 다양한 마감 재로 가공되었으며 전통적 건축자재인 석재와 흙을 대 체하면서 건축의 경량화를 이끌었고 불연·내화재료로써 각광받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조선 북부 압록강 일대의 수력 개발 사업으로 인해 댐과 발전소 건설로 대량의 시멘트 수요가 발생하는 가운데 오노다시멘트의 평양지사 증설 과 공장 추가 건설, 일본의 우베시멘트(宇部セメント㈱) 와 아사노시멘트(浅野セメント㈱)의 진출로 조선의 시 멘트 생산은 계속 증가했다. 수요가 집중되는 도시 인 근에는 시멘트기와, 관(管), 슬레이트 등 시멘트 관련 건축자재를 생산하는 공장이 집중적으로 설립되었다. 일본이 대륙침략을 본격화하면서 1937년 중일전쟁을 기점으로 조선도 전시체제에 돌입한다. 모든 자원의 사 용이 법으로 제한되면서 군수를 제외한 전 산업은 타격 을 받게 되었다. 철 및 비철금속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령으로, 기존에 철근 및 철강을 사용하기로 계획되어 있던 건물은 공사 가 연기되거나 설계 변경을 통해 그 자재를 교체하기에 이른다. 이런 상황 속에서 관 주도로 소위 ‘대용품 공 업’을 진흥시키게 되는데 건축자재도 본래에 사용했던 금속 성분을 최대한 배제하고 시멘트 등을 혼합하여 화 학적 처리를 통해 대체품을 찾고자 했다. 이러한 일련의 건축자재 대용품은 구조용 재료로써 철을 대체하기에는 강도가 약했기 때문에 주로 소형 철 물과 설비, 상하수도관, 마감재 종류 개발에 집중되었 다. 그러나 범용성, 성형 용이성, 색채연출, 내수‧내화‧ 내산 성능 면에서는 기존 자재에 비교하여 우수한 측면 이 있었기 때문에 전쟁 종료 이후에도 신흥산업으로 계 속 진행되었다. 한편 자원 수급 통제를 위해 여러 제도를 마련하면 서, 자원을 분배하기 위한 배급제를 시행하게 된다. 전 쟁이라는 비상 상황의 대처를 위한 이와 같은 일련의 조치들은 종전 후의 건축 자재 유통구조 형성에도 영향 을 미치게 되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를 통해 1920년대 이후 한국 근대 건축사 전개에 있어 시멘트라는 근대건축 주요 자재가 보편화되는 양상과 건축 및 토목에 있어서 구별되는 건 축자재로서의 지향, 전쟁과 같은 비상시에 건축의 경제 적 효율을 추구하기 위해 단행된 변혁의 특징을 제시할 수 있다.
이 연구의 목적은 2·8 독립선언 전후의 사정과 의의를 체계화하여 3·1 독립운동의 도화선의 한계를 넘어 학생운동의 한국적 의미와 독립운동 전반에 미친 영향, 이후 학생활동에 미친 영향 등을 규명하는 데 있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윌슨의 민족자결론과 고종황제의 서거는 조선 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기대와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둘째, 동경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과 해외 독립운동가와의 네트워크가 3·1독립운 동을 촉진한 요인으로 나타났다. 셋째, 동경 유학생 단체는 조선 독립의 방향과 이론을 정립하는 조직적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며 민족 독립의 지 혜와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넷째, 2·8 독립선언은 일단 실패로 돌아갔으 나 이후 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은 국내 독립운 동가 지도층에게 적극적인 지원을 끌어냄으로써 3・1 독립운동에도 지대 한 영향을 미쳤다. 다섯째, 2・8 독립선언은 이후 오사카에서 독립선언이 나 국내 독립운동 등 다양하고 분화된 형태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큰 역 할을 담당했다. 또한, 많은 유학생이 귀국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거나 나 중에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결론적으로 2·8 독립선언은 이후 실천적 행동적 의지를 갖추고 향후 독립운동을 전 개하는 데 발판을 제공하였다.
The study confirmed the "house search report(家宅搜索調書)" containing criminal records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as well as the production process and the way of expressing the illustrations contained in them. It also explored architectural values through analysis of the location and use of the building. This records the discovery of evidence by searching the residences of those involved in the crime from 1919 to 1922. The illustrations contained in this record were not standardized, so the contents of the article differed depending on the author's background and cultural experience. Nevertheless, this painting reflects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of traditional houses located throughout the Korean Peninsula. It is also evidence that the house was used for cultural, commercial, and industrial purposes, beyond the general assumption that it was used only for residential purposes. The "House Search Report(家宅搜索調書)" provides information on ordinary buildings that existed as the background of everyday life, rather than buildings with a specific purpose or exceptional design. It is evaluated as an important resource for understanding the diverse life and spatial structures of buildings during that time.
This study examines the process to demolish official buildings of Joseon Dynasty in Suwon Hwaseong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 King Jeongjo built the new Suwon city and constructed the city fortress. Hwaseong Hawnggung and other official buildings were also built in Suwon Hwaseong. However Those buildings were demolished gradually and lost their identity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 The official buildings of Hwaseong Haenggung were classified into nine parts. 1) Central area of Hwaseong Haenggung 2)Nangnamheon(落南軒) 3)Uhwaguan(于華館) 4)Namgunyeong(南軍營) 5)Bukgunyeong(北軍營) 6)Gangmudang(講武堂) 7)Yiah(貳衙) 8)Jungyeong(中營) 9) Hoeryungjun(會寧殿). Bukgunyeong was the first demolished building in Suwon Hwaseong. Nangnamheon and Hwaryungjun were not destroyed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 from 1910s to 1930s most official buildings were demolished and new buildings were rebuilt.
This study examined the status of food specialties in Korea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rough『Specialities of Joseon (朝鮮の特産)』. The book recorded a total of 164 areas and 317 specialties, focusing on five railway lines and branch lines on the Gyeongbu, Honam, Gyeongui, Gyeongwon, and Hamgyeong. Among the specialities, 211 species were included, excluding overlapping ones. The food specialties accounted for 100 kinds in 159 regions or 47.4 percent of the specialties. There were 47 food specialties in 47 areas of the Gyeongbu Line, 21 food specialties in 20 areas of the Honam Line, 32 food specialties in 40 areas of the Gyeongui Line, 26 food specialties in 15 areas of the Gyeongwon Line, and 33 food specialties in 42 areas of the Hamgyeong Line. Among the specialties, the amount of fish and their workpiece was overwhelmingly the largest. Next came processed goods of fruits, grains, and vegetables. In modern factories, corn, tomatoes, blueberries, and sardines were made of processed goods. Factories have been constructed for glass noodles, sugar, and soju. Specialities and processed goods produced in each region were brought to Jap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Ganggyeong, a city which is located at riverside of Geum River, played a role to connect the inland cities and the coastal cities through the Geum river waterway. In Chosun dynasty, Ganggyeong was one of the three major markets in Korea, and at the same time, it was one of the two river docks in Korea. However, after the railway was installed in Korea, railroad was more important than waterway in transporting logistics and in 1911 Honam railroad and Ganggyeong railway station was installed. Thus it was necessary to reorganize urban structure of Ganggyeong city from the traditional river-dock city to modern railroad city. In addition, urban infrastructure to prevent flood damage was needed because Ganggyeong suffered from floods and water shortages every year. Therefore, between 1910s and 1930s large-scale social infrastructures including road, water and sewage system, river bank, floodgate was constructed not only to revitalize the declining city but also to prevent flood damage and water shortages that hinder urban development. The installation of urban infrastructure has enabled the urban expansion and development of Ganggyeong city, and it is still served as a basic urban structure.
After opening Suwon railway station in 1905, a new road was constructed between Suwon station and Paldalmun(the South gate). It was the starting point to change urban structures of Suwon and shape the new city scape. In 1914, administrative districts of Suwon were reorganized. Suwon-myeon (township, a subdivision of Suwon-gun) was promoted to Suwon-eup(town) in 1931. Suwon-eup expanded its territory and changed the address system from ‘li(里)’ system to Japanese address system, ‘Jeong(町)’ in 1936. From 1920s, road system was changed and transformed Suwon’s urban structures. A straight road was built from Jongro intersection to Janganmun(the north gate) in 1928. Another straight road was constructed between Suwon station to Padamun in the early 1930s. Public office buildings used the Hwa Seong HaengGung(華城行宮) and some of building moved to new location with new buildings. Main buildings of most schools in Suwon were reconstructed since 1930s. Commercial buildings and stores were sprung up and had their own characteristics by region. Around Suwon station, there are more hotels and restaurants than other areas. Rearranging administrative areas, developing road system and new buildings transformed Suwon’s spatial structures. Constructing new roads formed a straight road passing through Suwon. After reorganizing administrative areas, this road turned to be the central axis of Suwon. Buildings in new style on the axis made the modern cityscape in Suwon.
‘歷史는 勝者의 論理’라고 흔히들 말한다.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에 의해 660년 7월 18일 멸망하면서, 百濟의 마지막 수도였던 ‘扶餘’는 불타고 한반도 역사의 전면에서 완전히 사라져 統一新羅時代와 高麗·朝鮮時 代에 걸쳐 ‘작은고을’로 겨우 命脈을 유지해 왔다. 1300여년이 지나 또 다른 침략세력인 ‘日本’에 의해 한반도가 植民支 配를 받는 기간에 아이러니하게도 ‘부여’가 일본 아스카 문화의 뿌리라는 것과 식민지배의 정당성을 구축하려는 숨은 의도에 의하여 역사의 전면으로 재부상하게 된다. 1914년 전국 郡·面統合을 주도한 오하라신조(小原新三,1873.-1953.)는 조선에 오기 전 일본 나라현(奈良県)의 사무관으로 재직하면서 아스카·나라시대의 문화와 백제문화가 깊은 관계가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던 사람 으로, 작은마을이었던 부여군(10개면)을 주변의 3개군(석성군·임천군·홍산 군)을 흡수하여 부여군(16개면)으로 통폐합하여 부여군의 위상을 제고(提 高)하였다. 이어 1915년 충남도장관으로 재직하면서 경복궁에서 열린 공진회에서 ‘부여팔경 디오라마’를 제작하여 116만 여명의 관람객에게 부여를 홍보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한편, 1915년 ‘공주’와‘논산’에서‘부여’간, 정기 교통편이 개통되는 등 타 도시와 교류 할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1927년에 조선팔경 선정시 작은고을이었던 ‘부여’를 선정하는 등 다방면에서 ‘부여’의 位相提高노력이 이어졌다. 이 와중에 예부터 이름이 있던 곳들을 대상으로 부여의 23곳 관련 그림엽서들이 발행되었고, 그 중에서 발행 주체가 명기된 4곳은 부여고적 보존회(1915-1929), 재단법인 부여고적보존회 (1929.2.20.-1939.5.30.), 산구팔경당(山口八景堂), 다까바다게상점(高畠商店) 등이고, 발행 주체 표기가 되어 있지 않은 것들도 다수 살펴보았다.
Since the late 19 century, the Choseon dynasty forcibly opened the door to western countries, including Japan. In addition, cultural propagation called ‘modernity’ caused subtle changes in dietary life. Based on the theory of colonial dual society, this study examined the dietary modernity in Kyungsung (mid 1930s~early 1940s) when 50 years had passed since the Open-Door policy. Three films, <Turning point of the youngsters>(1934), <Sweet Dream>(1936) and <Spring of Korean Peninsula>(1941) (those made in 1930s~1940s) were analyzed. Twenty six scenes [14 scenes from <Turning point of the youngsters>, five scenes from <Sweet Dream>, and seven scenes from <Spring of Korean Peninsula>] related to the dietary life from films were chosen and classified according three criteria (degree of modernization, main influential countries, and benefit groups from modernization). The degree of modernization of all films was more than 80%. The average proportion of the countries that affected modernization were western (35%), western-Japan (28%) and Japan (20%). Approximately 33, 53 and 14% of the upper, middle, lower classes, respectively, benefited from diet modernization. The main places where modernized dietary culture could be enjoyed were cafes, western restaurants, tea rooms, and hotels. The main food or beverages that were considered as modernized dietary culture were liquor (especially beer), coffee, and western meals. People in Kyungsung in the mid 1930s~early 1940s experienced modernity in dietary life differently according to the social classes and these culture changes were generally accepted as a symbol of modernity.
Although milk, which is a representative western food, has a more than 100-year history in Korea, the preference is controversial. This study examined the milk history of Choseon in 1884~1938. This period was divided into 4 periods regarding the westerner’s records and advertisements. Westerners who visited Choseon in 1884~1895 (1st period) recorded the eating habits of Choseon,i.e., no milk consumed, even in insufficient food situation. Among the westerners, medical missionaries began to show or/and recommend condensed milk for sick children. In 1896~1909 (2nd period) newspapers, general shops in Hanseong for westerners showed advertisements of dairy products. In the 1900s, condensed and raw milk were advertised through newspapers. Domestic ranching systems to produce raw milk were established at that time mainly by Japanese. In the 1910s (3rd period), raw milk and condensed milk were advertised in newspapers. Since the mid-1920s (4th period), dairy products were bisected into condensed and powdered (dried) milk. Moreover, many Japanese manufacturers appeared in the advertisement in the 1920s. These results suggest that milk has been recognized as a symbol of an enlightenment food in Korea since the late 1900s, but the old negative wisdom, unfamiliar taste, and high price of milk at that time limited its app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