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기독교는 스페인의 식민지배와 함께 시작되었다. 교황청이 하사한 ‘선교보호권’ 아래 남미를 정복한 스페인은 1565년에 필리핀의 일부 지역에서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하였고 어거스틴 수도회를 비롯한 수도회 소속의 선교사들은 일찍이 17세기가 시작될 때까지는 산간 및 남부 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 대부분의 필리핀인들을 개종시키기에 이른다. 스페인이 필리핀을 지배한 300년이 훨씬 넘는 기간 동안에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양편이 가지고 있는 목표 즉 기독교선교와 식민통치의 확장을 위하여 서로 유착관계를 추구한 것으로 드러난다. 식민지배 초기에 스페인은 식민통치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토착민의 자발적 동의’를 추구하였으나, 통치의 현장에서 수행된 수도회 선교사들의 관찰은 스페인 식민세력에 의한 강제적인 통치를 입증할 뿐이었다. 마닐라 종교회의 (1582)는 스페인이 필리핀에서 정치적 권리를 본질적으로 소유하지 않은 한편, 기독교 선교의 환경을 확보하기 위하여 수단적으로 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보아, 식민통치를 용인하고 ‘교회의 도구로서의 국가’ 개념을 표방하였다. 한편 스페인 식민당국은 수도회 선교사들을 중앙과 지방에서의 식민통치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는데 특별히 지방에서 그들의 공무대행은 식민통치에 필수불가결한 것이었으며, ‘국가의 도구로서의 교회’의 모습을 여실히 드러내주는 현상이었다. 나아가, 식민당국과 교회는 큰 맥락의 인종-정치적 차별주의로부터 필리핀 토착 사제들에 대하여 차별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식민통치를 영구화하려는 수단이었다. 결국, 스페인 통치시기 가톨릭 교회, 특히 수도회 선교사들은 부동산 축적, 소작농의 억압, 인종차별 등의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며 사회로부터 신망을 크게 잃게 되었으며, 19세기 후반에 봇물처럼 터진 필리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성직자의 식민통치에의 참여를 비판하는 ‘반교권주의’ (Anti-clericalism)는 가장 강력한 투쟁의 목표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게 된다.
이 연구에서는 오랫동안 다문화정책을 추진해 온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의 사례를 통해 오늘날 다문화주의를 둘러싼 갈등과 제 담론을 분석하였고, 그것과의 연계지점으로서 우리나라의 다문화 갈등 상황과 다문화교육의 방향을 성찰하였다. 이를 통해서 밝혀진 바는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첫째, 영국, 독일, 프랑스 등 유럽의 주요 국가 지도자들의 다문화 실패론 선언은 다문화주의에 대한 논쟁이 국제적으로 고조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둘째, 유럽에서 다문화주의 담론의 주요 대상과 이슈는 이민자, 무슬림 논의의 사회 통합과 갈등으로 수렴되고 있다. 셋째, 유럽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다문화 실패론과 다문화정책에 대한 회의론은 반이민주의 정책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다. 넷째, 다문화담론의 이면은 단순히 사회문화적 다양성 제고의 문제가 아니라, 통치 담론으로서 다문화주의가 활용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다섯째, 국민국가 체제에서 다문화적 ‘공존’은 여전히 요원한 문제이며, ‘동화’와 ‘통합’의 가치가 강조되고 있다. 여섯째, 다문화주의 관련 갈등 이슈는 다문화주의 담론이 단순히 인종과 문화에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계층과 관련을 가지며 정치, 경제, 사회 등 복잡다기한 이해관계에 따라 이념이 되기도 하고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다문화주의를 둘러싼 갈등은 ‘타자화’라는 측면에서 촉발되고 있으며 다문화교육의 실제는 아직 취약한 것을 알 수 있었다. 궁극적으로 이 연구는 다문화교육을 통한 지속적인 인식의 변화와 상호작용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이 연구는 여성결혼이민자가 한국사회에서 차별받고 배제되는 타자의 존재가 아닌 다문화시민으로서 어떠한 의식과 권리를 향유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목적이다. 이를 통해 초국가시대에 사회적·경제적 동기로 모국을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 이주한 여성결혼이민자들이 거주국에 가정을 꾸리며 생활하면서도 그들의 민족적·문화적 정체성을 통해 다문화사회의 시민으로서 살아가고 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이 연구는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관점에서 Kymlicka가 주장한 다문화주의 시민권을 토대로 한국에서 다문화시민으로 살아가는 여성결혼이민자들의 네트워크(가족네트워크, 사회네트워크, 민족문화네트워크)와 그들의 다문화시민권리(정치적 공간 필요성, 문화적 권리, 특별대표 권리)의 관계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광주광역시·전라남도지역의 다수의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2012년 9월 19일부터 2012년 11월 28일까지 설문조사를 실시하였으며, 총 268부의 표본을 활용하여 여성결혼이민자의 네트워크와 다문화시민권리에 대한 영향관계를 분석하였다. 연구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여성결혼이민자의 사회네트워크와 민족문화네트워크가 다문화시민권리에 영향을 주었다. 둘째, 여성결혼이민자의 결혼과정, 출신국, 현재거주지도 다문화시민권리에 영향을 주었다. 셋째, 여성결혼이민자의 연령, 학력, 배우자 연령, 배우자 학력, 결혼기간은 다문화시민권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사회네트워크, 민족문화네트워크와 관계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이 연구의 결과는 여성결혼이민자의 네트워크가 다문화시민권리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타나 여성결혼이민자들의 네트워크 활성화를 위한 실천적 전략이 수립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이 글은 孤臺 鄭慶雲의 시문학에 대한 연구이다. 고대는 孤臺日錄이라 는 비교적 많은 양의 일기를 남기고 있으나, 정작 그의 시문을 수록한 문집 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그가 남긴 시문으로 전하는 것이 거의 없다. 그에 대한 연구가 그리 많지는 않지만, 시문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까닭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남긴 고대일록과 그의 주변의 인물들, 특히 사우관계에 있 던 사람들의 문집을 살펴보면, 그의 시문학에 대한 정보를 제법 얻을 수 있 다. 우선 고대일록을 보면 그가 생활 속에서 시문을 일상화하였던 자취를 엿볼 수 있으며, 일부 시를 볼 수 있고, 특히 많은 문장을 접할 수 있다. 그리 고 시는 그의 스승인 鄭仁弘의 문집에 여러 작품이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대의 시는 스승의 학덕과 행실을 읊은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 가운데에 는 벗과 주고 받은 시, 벗을 만나 그 감회를 읊은 시 등이 있다. 이 가운데 특 히 스승을 읊은 시는 현실(소인), 스승, 국왕이라는 구조를 지니고 있는데, 이러한 시의 구조에는 그의 시의 지향이 담겨 있다. 고대는 이러한 시들을 통하여 그가 추구하는 정치적 이상을 표출하였다. 산문은 알려진 것으로 感樹齋 朴汝樑에 대한 제문 1편에 지나지 않았으나, 고대일록에는 완전한 산문으로 전하는 것만도 11편이 있고, 산문으로 볼 수 있는 글들이 여러 편 남아 있다. 그는 산문을 지음에 후대에 남기려고 하 는 저술의식을 뚜렷이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산문 가운데에서는 시에서 보다도 더 강력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특히 절개를 지키는 일에 중점을 두어 의도적으로 글을 지었는데, 바 로 「牡丹側柏說」과 「硯子說」이 그것이다. 모란 측백은 모란과 측백을 의인 화하여 대화체를 통하여 모란의 화려함보다는 측백의 절조가 중시되어야 함 을 이야기하였고, 「연자설」은 벼루에 새겨진 소무의 일을 통하여 절조를 강 조하고 조정에 이런 사람이 등용되어야 한다는 소망을 피력하였다.
이 논문은 慶尙右道 義兵 봉기의 배경, 金誠一이 작성한 招諭文의 역사적 특징, 招諭 활동의 정치적 함의와 기여를 중앙과 지방의 갈등이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재고찰한 연구이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임진왜란 初戰의 무력한 패배를 초래하는 데 일조한 경상도 지역 민 심 이반의 근본적 원인은 수령들의 무능과 비겁 때문이라기보다는 전쟁 이 전 적극적 군비 확충을 시도한 중앙 朝廷에 대한 지역민의 반발 때문이었다. 초반 전황이 극도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 조정은 탄탄한 지역 기반을 가진 재 지 사족층(在地士族層)에게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역설적이었던 것 은, 조정이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한 경상도 재지 사족층의 잠재력에는 그 들이 불법으로 탈점한 토지, 노비로 위장하여 거느린 농민, 마땅히 수행해야 할 軍役을 회피하는 데 성공한 사족 일부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 한 것들은 임진왜란 敗因의 하나로 흔히 언급되는 軍政 문란을 포함한 失政 의 결과물이었다. 둘째, 김성일의 초유문은 지역민을 결집하고 의병 활동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초유의 대상인 경상도 지역의 士와 民을 가장 적절하게 설득하기 위한 논리와 내용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는 階序的 신분 구조와 華夷觀과 같은 당대인들의 특징적인 心性이 반영되어 있었다. 초유문은 크게 보아 義理와 利害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지역민을 설득하고 자 하였다. 셋째, 중앙 조정은 안동 출신의 명망 있는 前職 高官이자 南冥學派와 긴밀 한 유대가 있는 김성일에게 招諭使의 職名을 제수하여 경상우도에 파견하였 다. 김성일은 의병의 봉기를 장려·보장함으로써 武裝 起義할 경우 반란 세력 으로 오인 받을 수 있다는 재지 사족의 우려를 拂拭시켰고, 도주·관망 상태 에 있던 지방관과 지역민을 결집하여 저항의 장으로 이끌어 내는 데 성공하 였다. 나아가, 그는 전쟁 발발 이전부터 누적된 갈등의 연장선상에 있던 관 군과 의병의 충돌을 적절히 타협·조정하였다. 경상우도 의병의 봉기는 지역 의 방어뿐만 아니라, 이반된 민심을 돌이키는 데 성공함으로써 일본군의 宣撫 공작과 원활한 현지 조달을 저지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 를 갖는다
인구의 고령화, 기후변화의 심화 및 적응실패, 자원·에너지의 고갈, 정치·경제적 전략에 따른 국제 정세 변화 등의 재난을 둘러싼 거시환경 즉, 정치, 경제, 사회, 기술, 환경 분야의 다양한 메가트렌드들은 재난에 직·간접적 영향을 주면서 변화를 초래한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미래재난의 다양한 모습을 예측하기 위하여, 글로벌 리스크에 대한 최근 국내 사회의 주요 이슈를 도출하고 이에 대한 함의를 도출하였다.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WEF)은 시대에 따라 전 세계가 직면하는 리스크의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경제·환경·지정학·사회·기술 분야의 리스크 조사 결과를 고찰 및 분석하여 매년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를 발표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2012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에서 제시된 50개의 리스크 중 발생가능성과 파급효과가 높은 핵심 리스크를 선별하였고, 전문가 면담을 통하여 국내 영향력이 가장 큰 ‘기후변화 적응실패’와 ‘수자원 공급위기’를 분석 대상 리스크로 선정하였다. 이슈 도출을 위한 분석에 사용된 자료는 2012년 5월 1일~2013년 10월 20일의 연합뉴스 기사로, 두 리스크에 대한 국내 사회의 이슈를 파악하기 위하여 리스크와 관련된 문서들을 추출하고 주요 토픽을 분석하였다. 기후변화 적응실패’를 주제로 추출된 3,093건의 문서들은 ‘곡물가격 급등’, ‘홍수·태풍 거대화’, ‘이상기후와 폭염’, ‘전력수급 계획’, ‘기후변화로 인한 작물 피해’, ‘생태계 환경변화’ 등 총 6개의 토픽으로 분류되었고, ‘수자원 공급위기’를 주제로 추출된 6,160건의 문서에서는 ‘폭염으로 인한 수자원 위기’와 ‘4대강과 녹조현상’, ‘농산물 공급위기’, ‘수온 상승과 적조현상’, ‘전력수급 위기’, ‘상하수도 공급’, ‘가축폐사 피해’, ‘수질오염과 식중독’과 같은 총 8가지 유의미한 토픽이 추출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각 토픽을 구성하고 있는 주요 키워드에 대한 빈도, 문서 수, 토픽 가중치 등의 정보와 기사 원문 검토를 통하여 토픽이 의미하고 있는 사회적 이슈를 파악하였으며, 재난과 연계될 가능성에 대해 검토하였다. 또한 본 연구에서는 환경부에서 2010년에 발표한 저탄소 녹색성장 기본법 시행에 따른 국가 기후변화 적응대책과 본 연구를 통해 추출된 토픽을 비교하여, 수립된 대책이 현재 국내 상황을 적절하게 고려하였는지에 대하여 검토하였고 그에 대한 시사점을 도출하였다. 이와 같이 주요 위험 주제에 대한 실제 국내 사회 이슈를 검토하여 정책 수립에 반영하는 과정은 더욱 현실적이고 체계적인 정책 수립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된다.
18세기 유럽은 프랑스, 영국 그리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치패러 다임이 등장했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는 프로이센 왕국을 건설하고 프리드리히 1세 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을 유럽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베를린 궁정의 음악은 각 왕들의 정치관과 국가의 경제, 그리고 성장기에 경험한 심리적 영향으로 다양하게 변화 발전했다. 그중 음악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 한 사람은 프리드리히 2세였다. 그의 통치아래 프로이센은 최강국으로 성장했고 문화가 크 게 발달하였다. 음악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국제정치가 안정되고, 국가 경제가 부흥해야 함을 프로이센의 음악후원의 변화가 잘 보여주고 있다.
본 논문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군의 맥베스 부인≫을 둘러싼 형 식주의 논쟁에서 벗어나 음악사회학적 해석을 바탕으로 이 작품에 녹아있는 당시의 사회상 과 사회성, 그리고 쇼스타코비치의 작곡의도를 연구한다. 오페라 ≪맥베스 부인≫은 스탈린 정권 당시의 정치사회에 던지고 싶었던 쇼스타코비치의 비판과 메시지를 오페라에 담고 있 다. 무엇보다 레스코프의 서민적, 이야기적 성격의 글에서 그 당시 민중의 삶을 파악할 수 있 었으며, 쇼스타코비치의 시대 또한 그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아 많은 요소들에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한다. 이러한 민중들의 삶을 바탕으로 작곡가는 카테리나의 인물을 통 해 당시 여성에 대한 가치관과 정치적, 사회적 배경의 내막들을 조소, 풍자하면서 작곡가 특 유의 음악적 기법을 가미해 그로테스크한 오페라를 완성시켰다. 그의 음악과 오페라의 내용 이 당시 러시아 대중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오페라가 지닌 사회성이 청중 들에게 수용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본 연구의 주제는 우리나라 제1의 항만이자, 해양수도인 부산시를 대상으로 해항도시(sea port city)의 경제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해양산업(ocean industries)의 장기적인 효과 및 그 주요 요인을 분석하는 것이다. 즉 수산업, 해운항만산업, 해양관광산업, 조선업 등 해항도 시의 다양한 해양산업이 그 도시의 경제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를 부산시를 대상으로 심층 연구한다. 이를 위해 해항도시의 경제성 장과 각 영향변인들에 관한 논거를 살펴보고, 다시 이를 토대로 수산, 해운항만, 조선, 해양관광, 도시재정, 인구, 정치 등에 관한 변수를 설정 하여 연구를 수행하였다. 주요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해항도시 부산의 사례에서 해양산업이 도시의 경제성장에 미치는 효과는 상당 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둘째, 수산업, 해운항만산업, 조선산업, 해양관광산업 등 연구대상으로 삼은 모든 분야의 해양산업이 해항도시의 경제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단, 도시경제성장에 대해 해운항만산업과 해양관광산업 및 조선산업의 활성화는 긍정적인 영향을 미 치는데 반해, 수산업의 활성화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점들은 우리에게 해항도시에 대한 해양산업의 경제적 기여 를 새롭게 인식하도록 만드는 동시에, 향후 정부가 해양산업에 관한 주요 성장동인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여러 정책적 시사점을 제공하였 다.
본 연구에서는 초등학생의 외국인 혐오증에 가정요인이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였다. 이를 위해 경기도 지역에 거주하는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총 1,878명의 응답을 분석에 포함시켰으며, 외국인 혐오증 척도를 개발하고 다중회귀분석을 적용하여 초등학생의 가정요인이 외국인 혐오증과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분석하였다. 초등학생의 외국인 혐오도에는 부모 학력, 부 종교, 부모 정치성향, 부모와의 친밀도, 가족구조, 거주지, 성별이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인 혐오도는 부모와의 관계가 친밀할수록, 편부·편모·기타 가정의 학생이 양부모 가정 학생에 비해, 농어촌에 거주하는 학생이 도시에 거주하는 학생에 비해, 여학생이 남학생에 비해 더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의 학력과 부모의 정치성향은 아버지 요인과 어머니 요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반면, 부직업, 모종교는 유의미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는 외국인 혐오도를 약화시키는 데 부모와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것을 밝혀주고 있으며, 아울러 외국인 혐오증 개념이 우리나라에서 주된 연구 주제가 되고 있는 다문화 수용성과는 차별화된 학술적, 정책적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부각시켰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본 연구는 2012년 9월 일본 정부가 댜오위다오 국유화 조치를 취한 때로부터 현재까지 중국의 반응과 대책을 검토한 것이다. 댜오위다오에 대한 중국의 기본적인 영토 해결 방안은 ‘쟁의유보 공동개발(搁置争议、共同开发)’이다. 이 ‘쟁의유보 공동개발’은 첫째, 주권은 중국에게 있다. 둘째, 영토분쟁에 대해 확실한 해결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으면 주권의 귀속은 논의하지 않고 쟁의를 유보한다. 셋째, 일부 분쟁이 있는 영토에 대해 공동으로 자원개발을 한다는 것으로 잠깐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분쟁을 유보하는 전략이다. 그런데 2012년 4월 일본의 도쿄 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는 공개적으로 도쿄도가 댜오위다오를 매수할 것이라고 표명하고 일본정부가 댜오위다오의 국유화를 실현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은 원래의 입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반격 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댜오위댜오 국유화에 당면한 중국의 반응은 적극적인 외교, 감찰관리 기구의 재편성, 해상순시 강화, 댜오위댜오 영유권 분쟁 연구를 강화하였다. 향후 중국은 댜오위다오 분쟁으로 인한 일본정부의 군사적, 비군사적 행동에 직면하여 다음과 같은 조치를 할 것이다. 첫째, 전 세계 화교들에게 댜오위다오 지키기 운동을 펼치도록 지원하고, 대만 당국에 댜오위다오를 지키는 책임을 지도록 요구한다. 둘째, 중국정부는 직접적으로든 혹은 제3자를 통해서든 일본이 간절히 바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가입’ 문제에 있어서 효과적으로 압박을 가할 것이다. 셋째, 대일 경제무역을 적절히 축소할 것이다. 넷째, 러시아, 한국 등의 일본과의 도서 분쟁에 호응하여 일본에게 효율적인 압력을 가한다. 다섯째, 지속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일본 각계 우호인사들의 적극적인 역할 발휘를 지원한다는 것을 포함하여 중국은 일본의 댜오위댜오 국유화에 당면하여 일본이 댜오위댜오 분쟁의 존재를 인정하고 최대한 빨리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도록 외교 정치적 방법으로 댜오위댜오 분쟁을 해결하려고 압박과 반격을 가할 것이다.
제2차 아베내각이 들어선지 1년이 되었다. 그간 한일관계는 독도와 과거사문제가 양국의 현안이 되면서 지난 1965년 국교정상화 이래로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또한 일본의 헌법 개정움직임과 집단적자위권행사를 위한 법적조치는 한일관계 뿐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에도 긴장관계를 고조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아베정부는 왜 주변국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우경화정책을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두 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첫째, 1990년 이래로 계속되는 경제 불황과 실업자증가로 인한 국내정치의 불안요인을 잠재우기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일본국내정치의 우경화정책을 통한 정권의 안정과 부상하는 중국에 대응하기위한 군비증강이다. 하지만 일본의 이러한 국내외적 요인이 한일관계에 악영향을 주고 있다. 그래서 이 논문은 아베내각의 우경화정책이 한일관계에 미치는 문제점 분석과 한미일의 입장을 이해하는 데 목적을 둔다.
한국정부는 한·일간 독도영유권 논쟁에 대해 종지부를 찍었지만, 일본은 매년 방위백서를 발간하면서 독도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종래 한국정부는 ‘조용한 외교’를 기조로 하여 강경책과 유화책을 병행하면서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면서 독도의 배타적 영유권에 대한 특별한 가시적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광복절을 5일 앞둔 2012년 8월 10일 전격적으로 독도를 방문해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독도에서 ‘독도는 우리땅’임을 천명하여 독도의 실효적 지배 강화를 위한 강한 의지를 보였고,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행위가 국익을 위해, 독도의 배타적 지배를 위해 절실한 것이었는가 하는 점을 중심으로 대통령의 독도방문을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본고는 영남지방의 대표 신문인 ≪매일신문≫과 ≪영남일보≫를 대상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방문에 대한 기사의 보도 유형을 분석했다. 이 과정에서 독도방문의 배경과 저의를 알아보고자 했다. 일왕사관 발언 등 쟁점별 보도 경향을 분석한 것은 언론의 취재와 기사 작성, 그리고 저널리즘의 사명감 등을 동시에 파악하려는 목적이었다. 양 신문은 지방신문이라는 동질성이 있는 반면에 각기 고유성과 정체성이 있었다. 독도 관련 기사를 정치적 성격으로 배열하고 보도하는 경향과 기사의 수에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또한 대통령의 독도방문에 대해 환영일색의 보도를 유지하면서도 그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매일신문≫보다 ≪영남일보≫가 상대적으로 중립과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매일신문≫이 ≪영남일보≫에 비해 연합뉴스 기사가 적은 것은 기사의 재생산 문제와 관련이 있었다. 일왕사과발언과 위안부 등 역사인식의 기사 보도에서도 일방적인 긍정과 중립적 입장의 상대적 차별성이 있었으며, 영남지역민들의 반응을 보도하는 면에서도 이러한 점은 드러났다. 양 신문은 지방신문으로서 가지는 공통된 입장과 신문사 고유의 정체성을 드러내면서도 대구경북지역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면서 언론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최근 일본내 여론조사에 의하면, 이명박 정권 시기 높은 수치를 유지하던 한국에 대한 친근감 정도가 정권말기에 이르면서 갑자기 급락, 거의 전후 최저치라 할 수 있는 수치를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급격한 한일관계 악화의 배경에는 작년 8월 10일 이명박 대통령(당시)의 독도방문이 있었고,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방문에 대한 일본 여론의 추이 및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아사히신문(朝日新聞)≫과 ≪산케이신문(産経新聞)≫을 분석대상으로 해 보도의 양적분석과 질적분석을 시도했다.
한일 양국 신문 중에서도 일본의 우익성향이 짙은 ≪산케이신문≫기사 수는 8일간 95건을 나타내고 있으며 ≪아사히신문≫이 61건의 기사를 싣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산케이신문≫이 한국 신문보다 가장 많은 기사를 게재하고 있으며 거의 매일 10건 이상의 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이것은 MB의 독도방문 직후 일본 외교상의 유감표명과 주한 한일대사의 소환 등이 이어지고 8월 11일에는 런던 올림픽 한일 축구전에서 박종우 선수의 ‘독도는 우리 땅’ 세리모니 논란까지 연달아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8월 14일에는 다시 MB의 일왕 사과 발언 요구까지 더해지면서 일본 여론은 뜨겁게 달구어지며 일본 우익단체의 반한시위로까지 번지게 된다. 이러한 언론의 보도에 가세하여 일본 텔레비전 방송국도 배우 송일국 씨가 출연하는 드라마 방영을 연기하는 등 일반 대중들의 눈치를 살피는 형국으로 번지게 된다. 이처럼 정치보도가 단기간에 거대한 전파력을 가지고 일본의 일반 대중에게 확산되는 양상은 보기 드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보수우익성향이 강한 ≪산케이신문≫에서 한국 신문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기사를 싣고 여론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현재 우경화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일본의 사회현상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다.
‘MB의 독도방문’에 대한 일본 신문의 제목 성향에 대해 분석한 결과, ≪아사히신문≫과 ≪산케이신문≫ 모두 부정적인 성향의 제목 성향을 나타냈다. 가장 진보적 성향이 짙은 ≪아사히신문≫조차도 독도방문에 관해 ‘극히 유감’, ‘기습적’, ‘분별없는’, ‘전대미문의 폭거’, ‘대국답지 않은’, ‘분별없는’ 등의 공격적이고 비호의적인 보도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산케이신문≫은 더욱 강도를 높여 부정적이고 적대적인 용어로 보도하고 있었다.
베르나르의 사상은 오늘날 이중적인 형태, 즉 사변적 혹은 경험적, 정치적 혹은 신비적, 그리고 내적 혹은 외적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본 연구는 이런 이중적인 이해를 통합해보려 했다. 이중적인 이해에 있어 그의 생애-교회정치가 혹은 수도사-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지만 사상적인 측면에서도 그러한 이해가 지배적이다. 특히 관상과 활동의 관계를 이해하는데도 관상의 우위에 두려는 경향으로 인해 앞선 연구자들은 마치 베르나르의 사상을 내적인 것에 편중되어 있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베르나르의 사상 관상의 우위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의 연구에 대한 비판적인 고찰에서 시작된 것이다.
연구자는 본론의 첫 부분(Ⅱ장)에서 관상의 내적인 성향과 활동의 외적인 성향을 살피보고 관상적인 삶이 활동적인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밝혀보려 했다. 그 결과, 베르나르에게서 대체로 내적인 변화가 외적인 변화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내적인 것에서 외적인 것으로의 전환은 베르나르의 사상에서 수도원적인 사고의 표현이지만, 또한 그것은 자기애의 상실을 통한 이웃 사랑으로의 확장이며 종교적인 실천으로 표출되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상호 공존한다는 것이다.
연구자는 본론의 두 번째 부분(Ⅲ장)에서 사도직 안에서 관상과 활동과의 관계를 살폈다. 여기선 베르나르의 사도직에 대한 이해는 관상하는 삶을 전제로 한 활동하는 삶의 구현이다. 그것은 관상과 활동이 조화를 이룰 뿐만 아니라 수도원생활의 은둔적인 삶보다 세상 속에서 관상하는 삶을 통해 신적인 충만한 사랑을 다른 영혼들에게 전달하는 사역이다. 사도적인 삶의 형식은 중세 초기의 관상하는 삶을 넘어서 중세 후기로 이어지는 교량적 이해인 “관상하는 삶과 활동하는 삶의 혼합된 삶”이다.
연구자는 본론의 세 번째(Ⅳ)에서 중세의 관상과 활동의 성서적인 모델로 적용된 마리아와 마르다와의 상호관계를 베르나르가 어떻게 이해했는가를 다루었다. 일반적으로 중세 신학자들은 두 인물을 관상과 활동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성서의 또 다른 인물인 욥을 등장 시켜 활동과 관상의 혼합적인 형태를 제시하면서 관상과 활동의 조화를 피력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정화-관상-활동을 순서적으로 이해하지만 그것은 단지 순서적인 차이일 뿐 서열적인 차이가 아님을 밝힌다.
이 논문은 南冥 曺植(1501-1572)의 4종 神道碑文 중 尤庵 宋時烈(1607-1689)의 「南冥曺先生神道碑銘」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한 명의 인물을 대상으로 당대 최고 문사들이 각각 신도비문을 남기고 그 작품들이 모두 현전하는 경우는 남명신도비문이 유일하다.
송시열이 찬술한 남명신도비문은 남명 조식 사후 100여 년 만에 찬술된 것으로 이전 정인홍ᆞ조경ᆞ허목 보다 학문적 연원이나 사승 관계가 멀다 할 수 있고, 오히려 사후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둔다면 조식과 송시열은 가장 대치적 관계에서 지어진 작품이다. 그러나 송시열은 정치적ᆞ학문적 입장을 뒤로하고 조식의 不朽한 功業과 序其爲人의 독특한 찬술자세로 남명신도비문을 찬술하였다.
송시열의 남명신도비문은 가장 비지문 창작이 왕성했던 60세 전후에 찬술된 작품이며 영남유림과 조식의 자손들 부탁으로 찬술되었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10년 전에 지어진 초고본을 다시 찾아 주변 지인들의 조언을 바탕으로 퇴고를 거듭 하며 남명신도비문에 많은 공력을 기울였다.
송시열은 조식의 공로에 대해 세 가지(①貴義賤利, ②可尙恬退’, ③可羞貪冒)로 요약했고 그의 성품에 대해서는 일화를 통해 간략하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도록 기술하였다. 조식의 출처관에 대해서는 이황의 말을 인용하며 미화로 여겨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다. 나아가 조식을 성리학자로 최고의 위상이라 할 수 있는 육군자의 반열과 병렬시킨 것은 송시열 이외에 어떤 사람도 하지 못한 일이며 당시 노론 영수로 후대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송시열에게 이루어졌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였다. 송시열은 이황을 포함한 육군자는 조식의 위상과 차이가 없다 생각하였고 바로 이점으로 자신이 조식을 백세의 스승, 영원한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까지 조식을 당파적 영수로 여겨왔다면, 송시열은 당파적, 정치적 외형에서 탈피하여 한 시대의 영원한 師表로 승화시켰다. 바로 이점이 기존 3종의 남명신도비문과의 변별점이며 송시열의 남명신도비문이 지닌 위상이라 할 수 있다.
南冥 曺植의 神道碑로서 가정 먼저 세워진 것은 1617년 무렵, 그 문인 鄭仁弘이 찬술하고 정인홍의 문인 裵大維가 글씨를 쓴 것이다. 이 비석은 1623년 仁祖反正에 의해 정인홍이 賊臣으로 몰려 처형되고 난 뒤 사람들의 눈앞에서 없어지고 말았다. 겉으로는 적신으로 처형된 정인홍이 찬술한 글이기에 넘어진 것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퇴계를 은근히 비판한 글이기에 더욱 세워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이 글이 찬술된 것은 1615년에 남명이 영의정에 증직되어 신도비를 세울 수 있었던 조건이 충족되었고, 정인홍이 남명의 문인 가운데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정인홍은, 퇴계가 그 문인들에게 편지나 대화를 통해 여러 차례 남명을 비판하였으므로 그것이 알려져 남명이 문묘에 종사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고, 이 글을 쓰기 이전까지 적어도 7편 정도의 글이 남아 전할 정도로 여러 차례 퇴계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였으며, 이 글은 그 결정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명의 일생에 대해서는 대곡이 찬술한 묘갈명이 가장 극진하다고 생각하고, 이 신도비명에서는 오로지 남명의 학문 내용이 유가의 정통에 해당되며, 퇴계의 남명 비판은 잘못된 것이라는 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정인홍이 이러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점은 「跋文解」에 보이는 바, 문인으로서 스승의 학문이 誣陷당한 데 대하여 坐視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師生間의 義를 생각한 데서 나온 정당한 행동으로 스스로 인식하였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인물이라 알려져 있던 퇴계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였지만, 이는 정인홍이 광해군 때 實職에서 行公해 본적이 없으면서도 遙執朝權하던 山林政丞이었다는 점과 인조반정이라는 당시의 정치적인 문제에 묘하게 맞물려 있었던 것이 첫째 원인이었고, 다음으로는 당대부터 퇴계가 가지고 있었던 막강한 영향력을 내암이 결국 당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둘째 원인이라 할 것이다.
정인홍이 정치적으로 패퇴한 인조반정 이후 대부분의 남명 문인이나 정인홍의 문인 후손들이 차츰차츰 남인화하거나 서인화했지만,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일대에 현재에 이르기까지 400여 년에 걸쳐 남명 정신을 추존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남명의 학문적 영향력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며, 그런 측면에서 보면 정인홍의 남명 신도비명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한 ‘冥道日月’이라 표현한 기대가 앞날을 내다 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점필재 김종직은 조선초기 사림의 종사이다. 그가 조선조 도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것은 그 자신이 문학과 학문에 있어서 탁월한 성취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방 행정을 통하여 인륜 도덕을 숭상하는 사회 기풍을 일으키는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었고, 그 문하에 도학의 이념을 실천하는데 앞장선 훌륭한 후학들을 양성해내었기 때문이다. 점필재의 도학 이념에 입각한 정치 교화와 교육의 실천 모범은 그가 지방관으로 근무하였던 10년 동안에 가장 잘 나타난다. 이런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점필재가 함양군수로 봉직하였던 5년 동안의 시문 가운데 정사를 임하는 태도와, 풍교의 대책과 강학 및 유상의 정서를 추적하여, 점필재의 평소 학문 사상과 정치 교육의 성과가 조선전기 도학의 선구임을 밝히고자 하였다. 점필재는 함양군수로 부임하면서부터 수시로 관내를 순시하면서 지역의 역사와 물산, 홍수의 재해, 조세와 부역 등, 民生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었고, 함양읍성 나각을 보수하고 다원을 경영하는 등 조선초기 지방관원으로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고을 주민의 편익을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강구하여 시행하였다. 그는 또한 향교를 보수하고 향교를 중심으로 향음 향사 양로의 의식을 거행하여 인륜 도덕으로 풍속을 순화한다는 風敎의 실현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한편으로 많은 문생들을 받아들이고, 그 문생들과 고을 주변의 산천을 다니면서 수시로 학문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도학과 심학의 단서를 열어주었다. 점필재는 함양군에서 시행한 시정과 풍교 강학의 규범은 이 시대 학자들에게 도학 정치 실현의 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재들은 조정의 관료나 재야의 문인 학자로서 그의 모범과 신념을 널리 확산함으로써 한 시대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였다. 그런 점에서 함양은 점필재 김종직의 학문 사상과 경륜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나 조선조 도학의 본류를 형성하는 전환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원동지역은 스카른형 다중금속 광상으로서, 최근에는 회중석을 포함하는 텅스텐 광체의 유망광구로 주목받고 있다. 본 연구는 관입암체와 스카른 광물에 대한 연대측정을 통하여 스카른 형성 시기에 대한 지질연대학적 정보를 제공하고자 한다. 원동 지역의 층서는 석탄기와 트라이아스기, 캠브리아기와 오르도비스기의 층으로 이루어져있다. SHRIMP U-Pb 연대측정으로 원동지역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관입암류인 석영반암(79.37±0.94 Ma)과 장석반암암맥(50.64±0.44 Ma)의 정치고결시기를 결정하였다. K-Ar 연대측정으로 거정질의 금운모(49.1±1.1 Ma), 괴상의 금운모(49.2±1.2 Ma), 스카른광물과 공생하는 금운모(49.9±3.6 Ma), 그리고 열수변질작용의 산물인 일라이트(48.3±1.1 Ma)의 생성시기를 밝혀내었다. 열수 변질된 석영반암에서의 SHRIMP U-Pb 연대는 59.7~38.7 Ma까지 다양한 연대분포를 보이는데, 저어콘의 조직과 관련하여 메타믹티제이션(metamictization) 받은 저어콘 조직에서는 Pb 손실이 발생하여 연대 신뢰도가 떨어지는 반면, 용해-침전작용을 받은 부분의 연대 값은 동위원소 재평형 작용의 가능성이 있어 또다른 열수변질시기 혹은 화성활동시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 연대측정 결과와 광물 공생관계, 그리고 야외조사에서 확인된 석영반암 내 혹은 균열대에 발달해 있는 스카른용액 침투흔적으로 볼 때, 연구지역에서의 중석 스카른 광화시기는 약 50 Ma일 가능성이 높지만, 스카른 광체 선후관계 및 장석반암과 스카른 광체의 지질학적 연관관계에 대한 연구가 추가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