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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2010.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미국교정에 있어서 수용자인권의 신장과정과 제한적 조치의 내용 을 대표성있는 대법원판례를 중심으로 1960년대 이후부터 시대순으로 정리하고 그 사회적 배경을 기술한다. 또한 수용자소송과 관련된 수정헌법 조문을 기준으 로 각 권리영역에 속하는 소송결과를 나열함으로써 수용자의 권리가 신장되는 과정에서도 수용자권리보호와 시설의 안전과 질서유지 사이에 일정한 균형이 시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끝으로,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정치사회적 분위기에 크게 영향을 받는 수용자인권정책이 그 한계를 벗어나 보 다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함을 제시한다.
        6,100원
        22.
        2009.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article attempts to excavate Korean literary works influenced by modern Chinese literature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based on which it also analyzes the ways in which Korean writers and intellectuals received, perceived and transformed modern Chinese literature. Research findings in this article are to be summarized as follow. Firstly, writers such as Guangsoo Yi and Nanson Choi, who lived during the nascent period of modern Korean literature, approached China in the image of a looser and Japan in the image of an empire. Thus, they completely excluded Chinese literature from the world literature since the Japanese occupation of Korea. This was a dark side of modern Korean literature as a result of Korea’s marginality in the colonial age. Secondly, Baekhwa Yang is generally regarded a first writer that received modern Chinese literature; but most of his works and translations related to China were from Japan since he introduced them to Korea by translating Japanese. Consequently, the perspective that Yang applied in approaching Chinese literature was not his own but Japanese during the colonial age. Although Yang’s contribution to the translation of modern Chinese literature needs to be fairly appreciated, one may not arguably say that he was the first writer who received Chinese literature based on a proper understanding of the trajectory of China’s intellectual history. Thirdly, Dong-gog Yi and Myung Yang are the critics who for the first time accepted Chinese modern literature into Korea on their own perspective. This study has a considerable significance in excavating, introducing and analyzing the large amount of their works. Dong-gog Yi had deep interest in the value and spirit of the Chinese New Cultural Movement, and was the first critic in Korea who accepted the value and spirit of modern Chinese literature in its full measure. Myung Yang was pursued ceaselessly in what direction Korean should lead their lives under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and for the first time accepted and blended Chinese modern theory with Korean reality. This was consequential of their struggles to overcome the dual problem of particularity and universality that Korea confronted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us they approached Chinese culture and literature in terms of the world historical conjuncture of decolonization and yearnings for modernity. They did not follow the trajectory of the reception of modernity via Japan as many Korean intellectuals did but groped for a way to receive it via China.
        9,000원
        23.
        2009.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松江이 활동하던 시대는 倭의 침입으로 임진왜란의 난리가 있었고, 조정에서는 黨爭으로 인한 정치적 다툼으로 인해 정치 ․ 사회적으로 혼란이 극심한 시기였다. 이러한 시기에 西人의 우두머리로서 정치에 몸담았던 송강은 黨派로 인한 답답한 심정과 謫所生活에서 겪는 고민을 해소하고자 도연명이 자연을 벗 삼아 참신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던 田園閑居 생활을 흠모하고, 그의 영향을 받아 自然憧憬의 시를 읊었다. 송강은 도연명처럼 자의적으로 歸去來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타의에 의한 謫所生活에서 出仕에 대한 의욕을 잃지 않고 있다가 마침내 임금의 은혜로 謫所에서 풀려나 정계에 복귀되어 좌의정이라는 높은 벼슬에까지 오른 것은 도연명이 자의적으로 전원에 歸去來한 후 다시는 조정에서 불러도 정치에 뜻을 두지 않은 出處觀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임금에 충성하고 經世濟民에 뜻을 두었던 16세기 조선 士林들의 出處觀과 송강도 같이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편 도연명은 政治道義가 상실되어 不義한 방법으로 신하에 의해 왕위가 찬탈되어 晉에서 宋으로 나라가 바뀌자󰡒천하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도가 없으면 물러나 숨는다.(天下有道則見, 無道則隱.)󰡓와 󰡒달통하면 나서서 천하를 구제하고,막히면 할 수 없이 물러나 자신을 착하게 한다.(達則兼善天下,窮則獨善其身.)라는 儒家의 관념에 出處觀을 두었고, 송강은 맹자가 말한 󰡒삶도 내가 원하는 바요, 義도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을 진댄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生, 亦我所欲也. 義,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에 出處觀을 두어 經世濟民하고자 끝까지 벼슬에 대한 집착을 하였다. 이를 보면 兩人의 出處는 儒家의 가치관에 의해 정했다는 것이 相似點으로 나타났다. 松江은 당시 黨爭으로 인한 정치 현실에서 고뇌를 해소하고, 謫所생활에서의 위안을 얻는 데는 술만큼 좋은 媒介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도연명이 憂愁를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는 점과 일치한다. 도연명은 비록 다섯 편의 시에서 짧은 시구로 국화사랑의 시를 표현하였으나, 周濂溪가 그의〈愛蓮說〉에서 󰡒국화는 꽃의 은일자다.(菊, 花之隱逸者也.)󰡓라 말하고, 󰡒晉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하였다. (晉陶淵明獨愛菊)󰡓라고 말하여 도연명의 국화사랑을 특별히 부각시킨 이후 송강도 󰡐菊花󰡑하면 도연명이 동쪽 울타리 밑에 심었던󰡐黃菊󰡑을 연상하였고, 국화를 통해 名利로부터 탈속하여 선비로서의 고결한 자태를 보여준 도연명을 국화사랑의 대표자로 생각하며 존경과 흠모하는 시를 읊었다. 田園은 생명의 근원이 샘솟고, 자연의 숨결과 생동감이 넘치는 곳이며, 순박하고 다정다감한 정서가 깃들어 있는 곳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에게 勤勉과 休息을 주는 최후의 安息處이기도 하다. 도연명은 일반 전원시인들과는 달리 그의 시에서 田園에 대한 讚美와 함께 몸소 전원에서 躬耕한 체험을 바탕으로 田園의 생명력이 솟구치는 활기찬 정경을 읊어 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에 松江도 도연명이 읊은 시구와 典故를 援用하여 도연명의 田園閑居에 대한 동경의 시를 지었다. 陶淵明이 만년에 쓴 〈桃花源詩幷記〉는 晋 ․ 宋年間에 민중들이 정치의 災禍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이상사회를 추구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잘 나타난 작품으로 人口에 膾炙되어 왔다. 이 작품은 간결한 언어와 뛰어난 造語力으로 순박하고 화목한 농촌사회를 이상세계로 삼아 老子의 ‘小國寡民’ 이나 儒家의 ‘大同世界’ 이념을 잘 형상화하여 혼란시대에 처한 인간들의 간절한 희망을 반영시켰다. 도연명의 이상향인 桃源世界는 신선이 사는 세계가 아니라 포악한 秦의 난리를 피해 漢나라가 있었다는 것은 물론 그 뒤로 魏나라 晉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면서 조상에 제사지내고, 손님에게 닭을 잡아 술을 대접하는 다정다감한 情感과 불 때서 밥해 먹는 인간사회의 정황을 묘사하였기에 松江도 도연명이 묘사한 儒家的 관념의 桃源世界를 갈망하였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이라는 운명으로부터 피할 수 없는 존재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도연명은 죽음으로부터 해탈하고자 不老長生을 추구하는 道家나 靈魂不滅의 佛家에도 관심을 가져 보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宿命的인 죽음을 해결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은 그는 儒家的인 自然歸依觀에 최후의 몸을 맡겼듯이 송강도 도연명처럼 儒家的 삶의 방식을 추구하다가 그의 생을 마쳤다. 결국 兩人은 1200년 가까운 시대적 차이와 각기 다른 국가에서 다른 정치 ․ 사회의 풍파를 겪으면서 각자의 삶을 살아갔지만, 兩人의 자연사랑과 은일관념은 儒家的 관념으로 불후의 전원시가 문학을 창작한 것이 일치하며, 兩人의 문학세계는 후대 시가 문학발전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8,100원
        24.
        2005.06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900원
        25.
        1998.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Main theme of this study is the acceptance phase of western architectural culture in modern east-north asia through a series of actual survey and typological analysis of existing church buildings in modern Korea. China. Japan. For this study, 126 modern church buildings of Korea, China, Japan are selected. Also, main subject of this study has deal with the side of culture - thought which background of christianity acceptance and acceptance mind of acceptance main-body, culture adaptation and transformation based on characteristic culturalization of Korea, China, Japan. Especially, I would consistently tried to see the acceptance phase of western architectural culture according to differential acceptance mind of acceptance main-body based on characteristic culturalization of three countries. Conclusively, in the point of view of western architectural culture acceptance phase, it could be said that Korean church architecture had characterized as a blending phase of the two eclectic architectural culture. And in the case of china, as a coexistance phase of the two architectural culture with more western style-oriented. On the other hand, Japanese church architecture had characterized as a syncretism phase of the both traditional and western architectural culture, though it is eclectic style-oriented. Therefore, it is thought that different acceptance mind of western culture had main factors caused of differential acceptance phase, when the two architectural culture, the traditional and the western, encounters.
        5,500원
        27.
        2017.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한국 스마트폰 게임의 빠른 성장과 함께 새로운 수익화 모델에 대한 검토가 요구된다. 특히 스 마트폰으로 공급되는 다양한 콘텐츠들이 사업화 관점에서 적절한 수익모델을 찾지 못한 것에 비 해, 스마트폰 게임은 기존 아케이드 게임 산업과 콘솔ㆍPC 기반 패키지 게임 산업의 시장 경험을 적극 수용하여, 유료 다운로드 모델, 부분 유료화 모델, 게임 내 광고 모델 등 과금을 유도하는 다 양한 수익화 모델을 개발하고 적용했으며, 이를 통해 단시간에 두터운 과금 사용자 그룹을 형성하 였다. 이러한 수익화 모델의 개발과 적용은 스마트폰 게임 시장의 고속 성장과 발전에 중요한 기 폭제가 된다. 이에 한국 스마트폰 게임에서 부분 유료화 모델의 문화적 특징과 게임 산업 전체의 수익화 모델 변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부분 유료화 모델을 도입ㆍ발전시킨 일본과 세계 시장을 주도하는 중국의 부분 유료화 모델을 비교하고자 한다.
        28.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동강 김우옹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서 조선중기 남명학파의 저명한 학자이 다. 김우옹의 학문은 스승인 조식의 영향 아래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그 근원 을 찾아보면, 보다 더 직접적으로 주자의 영향권 아래 있다. 주자와 김우옹의 정치론과 학문론을 비교해 본 결과, 이 두 학자의 영향 관계 는 매우 직접적임을 알 수 있었다. 이들의 정치론을 살펴보면, 군주론에서는 군 주의 정치적 역량보다 군주의 마음을 가장 중시하였고, 신권론에서는 나라를 경영하는 주체로서 신하의 권한을 옹호하고 있으며, 붕당론에서는 군자와 소인 을 엄격하게 구분할 것을 요구하고, 외세론에서는 시종일관 외세배격의 논리를 지녔다. 그리고 학문론에서는 주자학의 공통된 이념인 ‘性卽理’를 공유하였고, 敬과 실천을 매우 중시하였다. 또한 이들은 인격적 면에서도 매우 유사한 면모 를 보여주고 있었다. 남명학을 두고 주자학이 아니라는 의견이 있기도 하지만, 적어도 김우옹의 삶 과 사상을 살펴본 결과 김우옹을 위시한 남명학파는 철저히 주자학의 기반위에 서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29.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鄭琢은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이자 관료였다. 그는 이황에게서 心學의 요체를 배워 스승을 중심으로 심화되고 있던 조선 유학의 心學化 현상 의 한 가운데에서 활동하였다. 조식으로부터는 壁立千仞의 기상을 배워 불굴의 절의를 실천하였다. 그의 정신 세계의 원천은 유학의 경전이었고, 그 중에서도 󰡔소학󰡕, 󰡔대학󰡕, 󰡔중용󰡕을 가장 중시하였다. 내용적으로는 경-중용-절의의 세 요소가 서로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하나의 체계를 구성한다. 중용과 절의를 최 선의 가치로 본 유가의 철학에 세계와 인간의 신성함에 대한 성찰을 더하면서, 수양에 의한 인격화 및 사회적 확산을 도모하는 도정에 나타난 것이 정탁의 학 문이다. 그의 시대의 사림파들은 도덕으로부터 독립된 利害의 세계를 허용하는 대신 의리론에 입각하여 이해의 세계를 재해석하고, 이해 타산이 아닌 순수한 도덕 감정에 의해, 私心없는 도덕성에 의해 영위되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 그것 은 일상의 세계를 이상적 도덕 관념과 실천으로 엄밀하게 통제하여 감을 뜻한 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心性論과 理氣論을 검토하고 그로부터 추출된 진리 를 修養論에 의하여 體化하고자 한 것이 이 시대 학자들의 학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의 영향 하에서 도덕적 관념을 일상화하고, 세계와 인간의 본질을 신 성화하는 정탁의 생각은 도덕적 근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아주 좁은 시각이다. 정주학적 세계관과 윤리관의 착근과 순수성에의 몰입은 이념의 경색화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전기 관학파가 의리와 함께 실리 를 함께 중시하다가 이해의 함정에 빠졌다면, 사림파는 도의의 순정성을 중시 함으로써 일상에 대한 탄력적 대응 능력을 상실하였다. 정탁은 정주학이 이 두 모습을 모두 드러내던 시기에 활동한 학자였다.
        30.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寒岡 鄭逑(1543~1620)의 학문경향과 정주학의 수용양상을 조명해 본 것이다. 한강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기에 활동했던 영남사림의 대 표적 인물이다. 그는 타고난 자질과 家學으로 내려오는 학문적 전통을 계승한 바탕위에 당대의 큰 스승을 찾아뵙고 그들의 학문적 장처를 두루 섭렵하였다. 이를테면, 한훤당 김굉필의 正學과 남명 조식의 正論과 퇴계 이황의 진실한 도 [的旨]를 받아들여 이후 당대의 독특한 학문경향을 형성하였다. 그의 학문경향은 下學重視의 경향과 博學의 추구이다. 하학중시의 경향은 일 상생활의 기본예절을 실천하는 하학공부를 통해 天理인 上達로 나아가는 학문 차서를 강조하는 학문관점이고, 박학의 추구는 학문의 규모와 범위가 宏博하다 는 것인데, 그만큼 현실의 쓰임에 대비하는 실용적인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 다. 나아가 이 같은 학문경향은 당대의 학문풍조에 대한 경종과 반성적 의미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한편, 한강은 20세 전반에 자신의 학문의 방향성을 분명하게 제시하였다. 그 것은 과거의 길을 단념하고 求道의 자세로 정주가 남긴 성리학에 종사하는 것 이었다. 그가 남긴 정주학과 관련한 편찬저술의 특징을 살펴보면, 성리이론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고 심성함양이나 내면의 수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다른 하나는 편찬저술이 자기 학설을 내세우는 저서의 형태라기보다는 경전 중 에 학문의 요점을 발췌, 요약하고 간간히 자신의 설을 붙이는 ‘編N’이나 ‘集N’ 의 저술방식을 택하고 있다. 이는 정자와 주자, 퇴계의 편찬저술 방식을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한강의 수양론은 퇴계와 남명의 수양론의 장점을 취하여 ‘敬’과 ‘義’를 다 같이 중시하는 ‘敬義夾持’의 수양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정이천과 주자, 그리고 퇴계로 내려오는 수양론의 학문적 전통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이 점이 한강 수양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31.
        2007.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논문은 남명 조식이 정주학을 수용한 양상이 어떠했는가를 밝히고자 하였다. 관련 자료의 제시를 통해 ‘고증’에 초점을 두었으며, 󰡔학기유편󰡕을 중요 자료로 이용하였다. 조식의 저술에서 朱子보다 二程이 중시되었던 점에 착안하였고, 남명학에서 ‘실천’이란 두 글자가 학문적 특성을 논하는 데 중요한 단어임에 주 목하였다. 실천을 중시하였던 남명학의 특성상 주자보다 이정이 중시되었을 것 이고, 특히 明道가 중시되었음은 조식의 학문연원과 관련하여 중요한 사실이라 하겠다. 이것은 조식이 공자와 周濂溪・程明道・주자 이 네 사람의 초상화를 그 리고 때때로 존경하고 사모하였다는 사실로도 증명된다. 결국 退溪 李滉이 伊 川과 주자를 잘 배운 학자라면 조식은 이정, 특히 명도의 사상을 잘 체득한 학 자라고 할 수 있다. 남명학에 내포된 莊子的 요소, 陽明學的 요소 등 정주학 이 외의 여러 요소는 명도의 사상을 매개로 할 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고 본다.
        32.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주지하다시피 南冥 曺植(1501-1572)의 학문은 그의 사후 문인들에 의해 계 승 ․ 발전되어 來庵 鄭仁弘(1536-1623)과 寒岡 鄭逑(1543-1620) 등의 문인 집단에 의해 크게 현창됨으로써 학파를 형성하였으나, 인조반정 이후 내암의 敗退와 더불어 급격한 침체를 맞이하다가 1728년의 戊申事態 이후 존립 자체 가 거의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다가 18세기 말엽에 正祖가 南冥에 대한 賜祭文을 친히 지어서 내려준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어,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부 경남 지역에 서서히 학문 이 흥기하여 중엽 이후에는 성황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이미 退溪學派 化 또는 畿湖學派化한 상황에서의 興隆이었던 것이다. 勿川 金鎭祜 또한 이런 시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인물이다. 물천은 학 문적 사승관계에 의해 주로 퇴계학파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지니면서도, 자신이 처한 지리적 배경에 의해 자연스럽게 남명학을 접할 수밖에 없었다. 물천의 남 명학파로서의 면모를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남명의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드러난 남명 정신을 숭앙하는 태도이다. 秋霜烈日 같은 粹然한 정신 경계와, 直內方外를 내용으로 하는 敬義之學을 남 명 학문의 핵심으로 파악하고, 이를 후학들이 마땅히 추구하여야 할 準的으로 인식하였다. 그리고 남명의 학문이 廉頑立懦의 효과가 있다고 하여 남명을 ‘百 世師’로 인식하였다. 둘째, 남명의 구체적 저술에 대한 물천의 생각이 얼마나 깊은지에 대한 자료 는 흔하지 않다. 신명사도에 대한 한두 가지 견해만 보일 뿐이고, 이 또한 남명 의 학문을 자기화한 것으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셋째, 󰡔남명집󰡕 ․ 󰡔학기󰡕 ․ 󰡔연보󰡕 등의 중간에 매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 면서, 기회가 되기만 하면 적극적으로 이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尊衛라는 이름 으로 남명의 진면목을 사라지게 하는 것에 대하여는 반대하였다. 이들의 중간 을 주관하던 復菴 曺垣淳에게 기회가 닿는 대로 자신의 견해를 주었으나, 물천 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일이 완성되지 않은 채 복암이 별세하였고 그 얼마 뒤에 물천 자신도 별세하였다. 요컨대 물천은 조선이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기기 직전까지 살았던 인물로, 조 선 말기 이후 일제 강점 시기를 살았던 서부 경남 지역의 학자들에게 퇴계학과 함께 남명학에 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 던 인물이라 이를 수 있다.
        33.
        2000.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에서는 조기 난소 부전증 환자를 대상으로 난포 자극 호르몬 수용체 유전자의 돌연변이와 발현 양상을 분석하였다. 돌연변이 분석을 위해 환자의 말초혈액에서 genomic DNA를 분리하고 nucleotide 566을 포함하고 있는 exon 7에 특이적인 primer쌍을 이용하여 중합효소 연쇄 반응을 시행하였다. 전기 영동으로 반응산물을 확인한 다음, 돌연변이 여부를 조사하기 위하여 제한효소 절단분석 (Restriction Fragment Leng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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