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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200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For the first Maritime Accident Inquiry System in Korea, Central Marine Accidents Inquiry Committee were founded in Seoul and District Marine Accidents Inquiry Committee in Busan city In 1963 to determine the circumstances of the accidents and causes. At the present day, it was settled as Maritime Safety Tribunal tough several revision of the Law and regulations regarding the Maritime Accident Inquiry System. In Korea, there occurred about m cases of marine accident, and as a result, about 200 people were lost human lives in average per year. In accordance with the change of circumstances such as traffic increasing and being bigger in size, being faster in speed, etc., the causes of the marine accidents become complicated year by year. Accordingly, in this moment, it is meaningful that the introduction of the Research Official who assists the Judges probing the cases fair and square. In this Paper, with the consideration of the several kinds of Research Official System, such as the Research Official of the Korean Supreme Court, the Supreme Public Prosecutors' Office and the Constitutional Court, Japanese Supreme Court, Law Clerk in USA, etc., the selection, numbers, duty of the Research Official were studied. The results of the study are as follows; 1. The Research Official to be appointed among the person having long enough career as a Judge, Investigator engaged in the Maritime Safety Tribunal due to he sho띨d have capability to confirm perfectly logical judgement and to collect enough material for the conclusion of the causes of the case. The one who understands the foreign language is preferred for the study of the foreign cases; 2. It will be logical to post 3 joint Research Officials in Korea Maritime Safety Tribunal in Seoul after due consideration the cases treated a year; 3. It will be logical for the Research Official to perform the collection of material and inspection of the scene for the trial and inquiry of the cases, to attend the cases filed suit to the Supreme Court, to make commentarial papers regarding the judged cases, to collect statistics of marine accidents and to devise a reform measure through in-depth analysis of the accidents frequently occurred, to study for the improvement of the Maritime Accident Inquiry System;
        4,000원
        42.
        1999.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A survey was conducted to investigate the attitudes of public officials related to food hygiene toward food safety. The official groups were divided into four sub-groups based on their area, agency, gender and age. Response of each group to the survey was statistically analysed. The survey's results showed that most of them (87.0%) were satisfied with a domestic level of food hygiene. But, some of them (29.8%) considered unsatisfactoryly on safety of the food they eat. Their response to food safety did not statistically significant between each group of area, agency and age but, in case of gender, female group showed stastically more negative attitude to food safety than male one (P$lt;0.05). All groups chose residues of chemical substances such as pesticides and food additives as the most potential food risk factor followed by foodborne pathogens, heavy metals and animal drug residues. The results are not consistent with the scientific judgement. Therefore, more education and information were needed for these groups. They pointed out food manufacturer as a responsible group for poor food hygiene (48.7%). In addition, food manufacture and processing were selected as main business types with the lowest level in the food hygiene but official, working in the area of the central government and Seoul metropolitan city, pointed out food services establishments as the poorest hygiene one (P$lt;0.01). This result suggested that education and information to let mind of responded groups change, working in this part, and governmental financial support are needed to improve hygiene level of food manufacture and processing (70.3%). They also chose HACCP as the most effective way for improving the level of food hygiene followed by Recall, PL (Product Liability), monitoring, labeling and increasing of number of company with good manufacture and processing (GMP).
        4,200원
        43.
        1997.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n the time of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Japanese style official residence played major role at the implantation of modern dwellings into Korea and its influences on Korean modern dwellings are distinguishable. This study focuses on the Japanese style official residence implanted into Korea before 1910. Before 1910 Japanese civilians in Korea builded just a traditional Japanese dwellings at the Japanese settlement in the ports opened. But Japanese engineers engaged in governmental organization of construction in the Old-Korean Empire builded a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s as official residence. The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 was an urban dwelling compromised between Japanese style and western style and distinguished by an outer-court type plan, Japanese entrance hall, central corridor and western style reception room. It is certified that the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 was implanted into Korea before 1910 and this was the first time an urban dwelling to be implanted and spread through the whole Korea. The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 implanted into Korea took in On-Dol and transformed to Korea-Japanese eclectic style. The central corridor type Japanese dwellings implanted into Korea in the time of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makes function as a precedent of a modern urban dwelling to Korean and makes Korean dwellings transform from the rural inner court type into the urban outer court type.
        5,400원
        44.
        202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에서는 1953년부터 1965년까지 벌어진 양국 정부의 외교문서에 의한 논쟁에 서 역사적인 근거만을 대상으로 무엇이 쟁점인지에 대해 고찰해보고 쟁점의 변용에 대해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한일 양국 정부의 견해는 상세한 자료와 고증을 들어 독도에 대한 자국의 영유권을 주장함과 동시에 상대방의 주장을 부정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양국의 독도 영유권 관련 주장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단편적으로 시사되기는 했지만,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것은 없다. 따라서 양국 주장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1953년부터 1965년까지의 교환공문에 대한 분석을 통해 독도영 유권 관련 주장의 논점과 변용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에서는 일본의 독도 영토 편입조치를 한반도에 대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정의 일환에서 이루어진 일로 보고 있으며, 일본은 한국강점과 독도영토 편입을 전혀 별개 의 사안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독도 문제를 보는 기본적인 역사 인식에서부터 한일 간에 는 메꿀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이와 같이 독도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과 일본은 서로 다른 시점에 서 있으며, 이러한 아포리아를 해결할 수 있을 단초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모순적인 구조를 타파하 기 위해서는 우리의 주장이 제3자에게도 합리적인 주장으로 비칠 수 있도록 노력할 필요 가 있으므로 우리 주장의 문제점에 대한 자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45.
        2021.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나카네 기요시는 陸軍(省)參謀局 등에 근무하면서 『兵要日本地理小誌』 등 일본지리교과서를 출판하였다. 그가 육군참모국 재직 중 집필했던 『병요일본지리소지』는 최초의 官撰 全國地理書로 군인용 교재뿐 아니라 일본지리교과서로도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따라서 당시 최신의 정보를 근거로 편찬된 『병요일본지리소지』에는 육군참모국의 일본 영토 인식이 잘 반영 되어 있다. 『병요일본지리소지』의 본문에는 일본의 극단에 위치한 섬들이 소개되고 「日本國全圖」와 「山陰道之圖」 등에 일본 영토가 표시되었지만, 울릉도와 독도는 거론되지 않았다. 따라서 나카네가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獨學日本地理書』에는 일본 영토의 변동 상황이 정확히 반영되었음에도,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 영토로 인식되지 않았기 때문에 본문과 지도에서 모두 나타나지 않았다. 나카네는 『日本地理小誌』에서 비로소 竹島와 松島를 조선 영토가 되었다고 확실하게 밝혔다. 山陰道總論에서 오키의 서북쪽에 松島⋅竹島가 있음을 소개하고 울릉도쟁계와 竹島 渡海禁止令을 간략하게 설명하면서 막부가 竹島를 포기한다고 명령했다고 서술했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일본지리교과서 가운데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사례이며, 「日本國全圖」와 「山 陰道之圖」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日本地理小學』에는 松島⋅竹島가 조선 영토라는 나카네의 인식이 유지⋅계승되고 있다. 『일본지리소학』의 본문에는 竹島⋅松島가 거론되지 않지만, 「日本總圖」에는 竹島⋅松 島로 여겨지는 두 섬이 그려져 있다. 「山陰道之圖」는 『일본지리소지』의 것과 동일한데, 『訂 正日本地理小學』의 「山陰道之圖」는 경위도의 범주가 줄어들면서 松島가 표시되지 않았다. 『정정일본지리소학』의 「日本總圖」와 「山陰道之圖」에서 松島⋅竹島 모두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점은 더욱 확실해졌던 것이다.
        46.
        201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연구는 제국주의 일본이 불법적으로 독도편입을 시도한 1905년 전후 일본 사료에 나타난 울릉도·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을 검토하고, 이를 통하여 일본의 왜곡된 독도영유 권 주장의 실태를 재확인하고자 한다. 1905년 일본의 불법적 독도편입 조치와 함께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본질은 그 출발점이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 침탈 야욕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이다. 즉 1904년 발발한 제국주의 국가인 러.일 양국 간의 전쟁 수행과정에서 일본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편입하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근 세.근대기 일본 고문서에 나타나는 혼란된 지리적 인식은 1905년을 전후한 시기에 눈에 띄게 줄어든다. 이미 서양의 근대적 과학기술을 앞서 수용한 일본은 근대적 측량법 덕택으로 경위도나 거리를 큰 오차 없이 정확히 측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위도 위치나 거리 측정은 울릉도·독도에 대한 지리적 인식을 보다 정확하게 가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지리적 인식의 정확도보다 울릉도·독도의 명칭을 어떻게 확정할지가 더 큰 관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러일전쟁은 이러한 명칭혼란을 종식시키고 독도를 죽도(다케시마)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하였다. 그것은 일본이 러일전쟁에 승리하기 위해 전략적 필요성에 의해 독도를 불법 편입해야 하는 상황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독도는 제국주의 일본의 영토팽창 정책 속에 ‘죽도(다케시마)’라는 원치 않는 이름으로 불법적으로 편입된 일제강점기의 첫 번째 희생물이 된 것이다.
        47.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연구는 근대 일본의 대표적 관찬사료인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 『죽도고증』, 『태정관 지령』에 나타난 울릉도·독도 인식에 관한 연구이다. 19세기 후반 일본정부에서 발행한 이 사료들은 울릉도⋅독도가 역사적⋅지리적으로 한국의 영토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17세기말 안용복사건에 의해 촉발된 울릉도쟁계(죽도일건)를 통해 확인된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영토’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는 사료들이다. 먼저 『조선국 교제 시말 내탐서』13항 ‘죽도와 송도가 조선의 부속이 된 경위’에 대한 검토를 통해 일본 외무성이 “울릉도(죽도)는 물론이고 독도(송도)에 관해서도 기록된 서류가 없다”고 인정함으로써, 울 릉도와 독도가 하나의 세트로 인식되었으며, 역사적·지리적으로도 조선의 영토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죽도고증』에서 기타자와 마사나리는 울릉도에 대해서는 한국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독도에 대해서는 일본의 영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1860년대 이후로 당시 일본이 울릉도와 독도의 명칭과 지리적 인식에 대해 매우 혼란스러웠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당시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일본의 역사적⋅지리적 인식이 매우 부족했 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태정관 지령』에 대한 검토에서는 “죽도 외일도는 본방 과 관계없음”을 확언한 태정관지령과 첨부지도 ‘기죽도약도’를 통해 독도가 역사적·지리적 으로 한국의 고유한 영토임을 확인할 수 있다. 기죽도약도에서 표기된 조선동해-울릉도-독도-오키섬 간의 지리적 거리도 현재의 거리와 수치적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으므로 ‘외일도 =송도(독도)’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 것이다. 결국 근대 일본의 대표적 관찬사료인 『조선 국 교제 시말 내탐서』, 『죽도고증』, 『태정관 지령』을 검토해 봐도 울릉도⋅독도가 역사적 ⋅지리적으로 한국 영토임을 확인할 수 있으며, 17세기 중반 이래 독도에 대해 실효적 지배를 해왔다는 일본의 ‘고유영토론’은 조작된, 허구적 주장이라는 사실이 한층 더 명백해 졌다.
        48.
        201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독도는 지리적으로 울릉도의 부속섬과 같은 위치에 있다. 역사적으로 일본에서도 독도를 울릉도에 부속된 섬으로 보았다. 1690년대 안용복사건은 일본 에도막부에서 울릉도 도해금지령을 내림으로써 종결되었는데, 그 당시에 돗토리번에서 에도막부에 제출한 지도가 「소곡 이병위 제출 죽도지회도」(小谷伊兵衛差出候竹嶋之絵図)이다. 이 지도는 독도가 일본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판단할 때 사용된 지도이다. 그 후 명치시대에 들어 안용복사건 당시 조선・일본 양국간 외교교섭 결과를 한 번 더 확인하여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임을 확인하고 공시한 자료가 1877년의 『태정관지령』이다. 일본측에서는 『태정관지령』의 마쓰시마(松島)는 독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2006년에 공개된 부속지도 「기죽도약도」에 의해 『태정관지령』의 마쓰시마(松島)는 독도 라는 사실이 명명백백해졌다. 광복 후 일본을 점령통치한 연합국최고사령부는 관할지역과 어선조업구역 양면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영토로부터 분리하였는데, 관할지역에 있어서는 연합국최고사령부훈령 (SCAPIN) 제677호로, 독도를 일본영토에서 제외하고, 「SCAP관할지역도」로써 독도가 남한지역에 포함됨을 분명히 하였다. 1948년 8월, 그 관할지역 그대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민국에 인계됨으로써 독도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런데, 일본을 연합국의 점령통치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한 샌프란시스코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연합국과 일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독도문제는 다시 불거져 나왔다. 우여곡절 끝에 샌프란시스코조약은 독도에 대한 언급이 없이 체결되었으나, 최근에 공개된 「일본영역 참고도」는 당시에 일본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스스로 인정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독도를 한국 땅으로 그린 「일본영역참고도」를 샌프란시스코조약 조인 전에 일본정부에서 제작하여, 샌프란시스코조약 비준과정에서 동 조약의 부속지도로 썼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사료적 가치가 높고, 국제법적으로 증거능력 · 증명력이 큰 공적인 지도를 대상으로 분석하면, 에도시대부터 샌프란시스코조약 때까지, 일본의 독도 영유권 판정과 관련된 4개의 공적 지도는 모두 독도가 한국 땅임을 표기하고 있거나, 독도가 한국 땅임을 보여주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중 연합국점령통치 기간 중의 「SCAP관할지역도」를 제외하고, 3개의 지도는 일본정부 스스로 제작한 지도로서, 일본정부 스스로 3번이나 독도를 한국 땅으로 인정한 근거가 된다.
        49.
        201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조선 중기 문신인 姜澂(1466∼1536)의 관료생활에 대한 연구이 다. 강징은 연산군과 중종을 거치면서 거의 평생을 관각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관료로서 강직하고 올곧은 길을 걸었던 인물이지만 한 번도 역사 속에서 조명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왕조실록에 228번이나 등장하는 중요 한 인물이었으며 특히 연산군의 즉위와 함께 관직에 출사하여 중종반정으로 연 산군이 퇴위될 때까지 최 측근에서 성리학적 도덕정치의 이념으로서 연산군을 보필하며 경연관으로서 연산군을 바로잡으려고 애쓴 관료였다. 그는 언로를 열 며 이단을 막고 경연을 펼친 현저한 공이 있었다.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나약한 왕권을 흔들고 정권을 장악하려든 신진 사림파와 훈구파들의 세력다툼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중종은 강징을 형조참판으로 삼고 이 난국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강징은 이들의 표적이 되어 온갖 모 욕과 박해를 받았다. 그러나 중종은 그때마다 강징을 옹호했고 나라의 중대사 를 강징과 의논했다. 중종은 강징을 예조참판으로 삼고 국정을 펴 나가면서 신 진사림과 훈구파의 끈질긴 정권장악의도를 막았다. 강징은 중종을 측근에서 보 필하며 국가의 중대사를 논하는 동시에 중종을 성군으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가하였다. 그는 특히 ‘敬’을 강조하여 성리학적 도덕정치의 이념을 실천 하며, 왕도를 펼치고 의로운 길을 열어갔다.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으로 기묘 사화가 발생하며 조광조 일파의 급진적 개혁의도가 중지되었다. 강징은 두 번 이나 사신의 임무를 띠고 중국을 다녀왔으며 외교에 있어서도 공이 있었다. 특 히 명나라 세종황제의 등극에 성절사로 파견되어 서예로서 명성을 떨쳤고 황제 가 국자감을 알현하는 것을 참관하는 영예를 안고 돌아왔다. 호음 정사룡은 그의 <신도비명>에서 그의 일대기를 약술하면서 관각 속의 군 자로서 표현했고, 청백리로 묘사했으며, 충신으로 묘사했다.
        50.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e objective of this study is to estimate the economic value of official management and control for invasive insects and diseases in fruits. The direct and indirect effect of this control measure can be the changes in price of fruits and related goods, changes in export volume of domestic fruits, changes in total volume of fruit production, and reduce the risk in food safety. The contingent valuation method with the single-bounded dichotomous choice is employed to estimate each household's willingness-to-pay (WTP) to maintain official management and control measures. The total number of sample consists 2,050 respondents between the ages of 19-60 years, and the survey is conducted using Web-based survey. The estimated results for mean WTP is 5,443won per month per household. Therefore, the total economic value of official management and control on fruit in Korea is estimated to be approximately 94.4 billion won per mon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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