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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1.
        2016.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어계 조려가 살았던 1420년(세종 2년)부터 1489년(성종 20)까지의 기간은 조선이 유교이념에 따라 각종 정치,제도, 문물이 갖추어져 가던 시기였다. 동시 에 세조가 정권을 찬탈한 이후에는 막강해진 훈구세력에 맞서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고 지방에서 유교 교육에 힘쓴 사림세력이 성장한 기간이었다. 함안 조씨의 조려 가문도 이러한 시기를 맞이하여 절의를 중시하고 유교 교육 에 힘썼던 조려에 의해 그 성장의 기틀이 형성되었다. 조려는 함안의 원북동에 터를 잡은 이후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여러 차례 상경하여 유교경전과 문장을 익혔다. 진사시에 합격한 이후에는 성균관에서 수학하면서 요순 시대의 이상적 인 정치를 희구하였으며,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는 많은 유교적 지식인들과 사 귀었다. 그러나 그는 세조에 의해 단종이 강제로 쫓겨나자 자신의 유교 정치에 대한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고향에 내려와 끝내 출사하지 않았으 며, 어계처사(漁溪處士)를 자처하며 단종에 대한 절의를 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함안 일대에서 도덕과 절의를 중시하는 사림파 지식인들 과 교제하였으며, 향촌사회에서 유교적 예속의 보급과 가문의 중흥을 위해 노력하였다. 유교적 예속의 보급을 위해 주자가례에 규정된 상제례의 실천에 솔선수범하였고, 지방 교화를 위해서 향교에 나아갔으며, 지방 수령들에 게 어진 정사를 펼칠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자녀 교육에도 힘써 자신의 아들들이 매사에 뜻을 크게 갖고 조심 하여 호랑이처럼 이름을 떨칠 것을 기대하고, 자신의 종제(從弟) 조욱(趙昱)과 함께 훈도하였다. 이에 조려의 큰 아들 조동호와 그 소생에서 문과 합격자 3명 을 비롯한 여러 명의 과거합격자를 배출하였다. 조동호가 안동의 이증과 같은 사림가문의 인물과 혼인한 것이 큰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둘째아들 금호와 그 소생 역시 주로 무관으로 진출하였는데, 금호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훈척가문 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로도 조려의 후손들은 조려의 절의와 훈도로 인해 더욱 번창하였으며, 왜 란 때에 다수의 인물들이 의병운동에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려의 후손들 은 조려의 절의를 추숭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조려의 5대손 조임도는 조려의 「구일등고시(九日登高詩)」의 내용에서 조려의 절의를 표상할 수 있음을 알았으며, 조려의 절의를 표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조려의 현손 조감의 사위인 성문준의 「어계선생전(漁溪先生傳)」과 성문준 의 생질인 윤선거의 『노릉지(魯陵志)』이후로도 조려의 후손들은에 다시 조려의 절의사실이 기록되어지 고, 사림 사이에서 널리 공론화되었다. 특히 숙종 대에 이르러서는 사육신과 단 종이 복권된 것을 계기로 조려의 절의가 조야에서 재조명되고, 생육신으로 받 들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102.
        201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케네스 스콧 라투레트(Kenneth Scott Latourette, 1884-1968)와 그 의 박사과정 제자인 찰스 데이비스 스톡스(Charles Davis Stokes, 1915-1998) 의 간추린 생애와 역사서술 방법론에 대한 연구를 목적으로 한다. 가장 먼 저 필자는 역사적 인물들인 이 두 사람들의 생애를 간략히 다루었다. 학생 해외선교 자원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for Foreign Missions)의 영향을 받은 라투레트는 중국선교사, 선교역사가, 그리고 세계교회연합주 의자(ecumenist)의 삶을 살았다. 스톡스는 한국선교사였던 아버지의 아들로 어린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후 다시 한국에 선교사로 와서 농촌계몽운동과 대전감리교신학교(현, 목원대학교) 의 설립자와 교육가로 활동했다. 라투레트의 역사서술 방법론은 크게 “한계인정, 초월성, 상호작용” 이렇 게 세 가지 특징으로 요약될 수 있다. 객관적 역사서술을 지향하는 라투레 트는 객관적인 역사연구를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계를 인정하는 것 으로부터 연구를 시작했다. 또한 그는 지역, 교파, 그리고 교회를 초월하고 자 시도했다. 즉 유럽중심적, 특정 교파중심적, 교리중심적 교회사의 한계 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만 아니라, 천주교회, 동방정교회, 개신교회 를 포함하고 북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지역들을 포괄하는 기독교역사 서술을 의도했다. 다시 말해 기독교역사는 그리스도 복음의 확 장과 영향을 다룸으로써 교회중심적 역사를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고 라투 레트는 생각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스톡스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라투레트의 이러한 세 가지 역사서술 방법론들 중에서 적어도 한계인정과 상호작용이라는 두 가지 특징은 받아드린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지도교수가 그랬던 것처럼, 스톡스도 자신의 연구를 시작하면서 역사적 객관성을 위해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연구를 시작한다. 게다가 스톡스는 기독교 선 교에 있어서 복음 전파자와 수용자의 상호작용의 영향을 강조한 라투레트 의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톡스의 유일한 역사 연구서인 자 신의 박사학위 논문이 1885년부터 1930년까지 진행된 미국감리교회의 한 국지역 선교에 한정되기 때문에, 스톡스가 라투레트의 초월성에 관해 영향 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103.
        2015.08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倻溪 宋希奎(1494-1558)는 佔畢齋 金宗直, 寒暄堂 金宏弼, 新堂 鄭鵬, 松堂 朴英, 杏亭 都衡 등의 인물이 영향을 끼친 星州에서 태어나 고 자라서 출사하고 만년을 보냈던 인물이다. 야계와 사마시 동년이었 던 晦齋 李彦迪 및 7년 연하인 南冥 曺植과 退溪 李滉 등이, 학문적 역량을 크게 드러내었던 시대에 이들과 같이 살면서, 어떠한 삶을 살면 서 어떠한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은, 성주의 학술사 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거니와, 영남의 유학사 및 나아가 우리나라 조선초기의 유학사 내지 정신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1816년에 초간 목활자본이 나오고 1924년 중간 목판본이 나올 때까 지 남아 전하는 작품이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냥 묻어두기에 는 우리 유학사 내지 정신사의 한 부분을 빠뜨려 두는 일인지라, 이에 대한 연구는 꼭 이루어져야 할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 논문에서의 논의를 요약하여 정리해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야계의 가계는 시조로부터 9세에 이르기까지는 합천 야로 지역 에 世居하다가 야계의 6대조인 관찰사 宋構가 성주로 이거함에 따라 성주 사람이 되었다. 야계는 대대로 중앙 관직을 역임한 유력한 가문의 후예로서 어릴 적에 杏亭 都衡으로부터 학업을 익혀 20세에 진사가 되고,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의 청현직을 두루 거치고 지방직으 로는 상주목사, 김해부사, 대구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상주목사에 재임 때 문과 동년인 金光準이 사욕을 부리려는 일에 동조해주지 않음으로 해서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명종 즉위 초에 司憲府 執義로 있으면서 文定王后의 밀지에 따라 尹任·柳寬·柳仁 淑 등의 세 대신을 처형토록 하는데 합의하자는 大司憲 閔齊仁과 大司 諫 金光準의 견해에 목숨을 걸고 반대한 것으로 인해, 54세 때 대구부 사로 재직하던 중에 良才驛 壁書事件이 일어나자 乙巳名人들이 다시 대거 화를 당하였는데, 이 때 야계도 전라도 高山으로 유배되었다. 58 세 때 放還되어 高山亭을 지어두고 65세까지 유유자적하게 살았다. 둘째, 야계의 문학은 그의 삶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孝敬忠信을 체득 하여 실천하는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공자의 제 자 曾晳에게서 보이는 유유자적함과 물아일체를 만끽하는 浴沂風雩의 삶을 추구하였음도 확인하였다. 이 두 가지 면모는 조선 초기 유자로서 의 전형적인 삶의 양식이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요컨대 야계는 관직 생활에서 사림으로서의 확고한 자세를 일관되게 유지함으로써 이른바 을사명인으로서 후세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퇴처한 뒤 향리의 생활에서는 효제충신과 욕기풍우의 자세를 지니고 유유자적함으로써, 15세기 전반기 사림의 한 전형을 보여주었다고 할 만하다.
        104.
        201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眞庵 李炳憲은 조선말기의 개혁적 유학자다. 본래 俛宇 郭鍾錫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유학의 개혁을 통한 구국에 뜻을 두고 중국 강유위의 제자가 되어 今文經學을 공부하고 孔子敎운동을 전개했다. 西歐文物이 밀려들어오고 日本의 침략 마수를 뻗기 시작하던 19세기 후반기에 태어나 儒敎가 급속도로 망해가고 우리 傳統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도하며 성장하였다. 그래서 유교를 復原할 수 있는 방안으로 유교를 종교화 하여 孔敎라 이름하고, 孔子를 敎祖로 삼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공교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기 위하여 今文經學을 공부하였다. 그는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교라고 확신하였는데, 그 유교는 우리 나라에 두루 퍼져 있는 宋學이 아니고 孔子의 가르침을 원래 모습인 孔敎였던 것이다. 유교가 개혁을 통해서만 민족을 이끌 수 있고 전통문화를 지켜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孔敎運動은, 培山書堂에 文廟를 지어 孔子를 享祀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말아 실제로는 크게 확산되지 못 했다. 시대변화에 무관심한 保守儒林들의 악랄한 반발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 했다. 그런데도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한 평생 孔敎運動에 헌신하였다. 비록 그의 孔敎運動은 성공을 거두지 못 했지만, 그는 韓國儒敎史上 가장 독특한 유학자요 사상가요 종교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저서를 남겨 그의 유학사상을 수록했는데, 이는 韓國思想史에 새로운 경지를 연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康有爲의 大同思想을 바탕으로 華夷觀을 극복하고 四海同胞主義를 제창하였고, 變法自疆에 의한 국가발전을 도모하고, 민족의 自矜心을 고취하였다. 그는 孔敎運動을 통해 우리 민족을 보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韓國學述史上 본격적인 今文經學者이다. 또 今文學에 바탕하여 儒敎經典을 재해석하여 『易經今文考』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는 韓國經學史上 독특한 업적이다. 朱子學 일변도의 한국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적 유림들의 극렬한 반발 아니라 해도, 급속하게 변하는 시대조류에 孔敎를 통한 儒敎의 復原과 民族의 自尊의 추구가 실효를 거두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무튼 眞庵은 많은 儒學者들 가운데서도 가장 독창적인 학자고, 금문학을 도입한 특이한 학자고, 서양의 학문도 선구적으로 상당히 이해하였으며 당시 중국 사정이나 학계의 동향을 가장 잘 아는 학자였다. 일본과도 무조건적인 투쟁이 아닌 설득을 통하여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105.
        2015.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南冥 曺植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盧.의 증조부로 조선 초기 함양을 대표하는 인물 松齋 盧叔仝에 대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그에 대해 정 리한 ..松齋實紀..에 수록된 자료들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와 시세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송재는 세종 때 집현전에 들어 교리, 응교 등을 거치고 세자시강원 필선, 예문관 직제학 등을 지낸 뒤 호조참판 등에 이른 경력으로 보아 학문과 문장 이 뛰어남을 알 수 있으나, 그가 남긴 시문도 그리 많지 않고 학문을 알 수 있는 것은 .八字遺訓.이 유일하다. .팔자유훈.은 아들이 충주의 판관으로 나갈 때 지어준 誠·信·廉·公·勤·簡· 和·惠의 여덟 자의 교훈인데, 이전에는 이에 대한 뜻을 풀이한 내용이 있었 다고 하나 지금은 여덟 글자만 남아 있다. 후손들이 이에 풀이를 더한 것을 통하여 그가 후손들에게 남기고자 했던 뜻과 이를 후손 및 후학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살피를 수 있다. 그의 시세계는 그가 남긴 몇 편의 抒情詩와 酬唱詩를 통하여 살필 수 있는 데, 주로 벼슬살이 하는 중간에 느낀 것을 읊은 서정시 10제 11수와 중국 사 신이 왔을 때 지었다고 하는 13제 21수가 분석의 대상이다. 서정시는 지방 에 관직을 수행하기 위해 오가며 보고 느낀 바를 지은 것이 대부분인데 나라 를 걱정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수창시는 1457년 陳鑑과 高閏이 왔을 때에 지은 7제 10수가 있는데, 이시 들은 모두 당고와 고윤이 성균관을 방문하였을 때, 호조참판으로 그들과 함 께 성균관에 가서 수창한 것이다. 중국 사신을 대접하며 그들의 뜻에 맞추어 시를 지은 것이다. 나머지 祈順에게 화답한 것으로 5수가 있고, 唐皐에게 화답한 것으로 2수 가 있다. 하지만, 이 가운데 기순과 당고는 송재가 별세한 뒤에 사신으로 왔 던 사람들이므로, 이들과 화답한 작품을 송재의 것으로 수록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하겠다. 이밖에 화사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시, 즉 누구와 수창, 화답한 것인지 드러나 있지 않는 작품으로 「臨津舟中酬華使」, 「鳳仙館又次前人」, 「次華使猪灘過橋韻」, 「葱秀嶺又次華使」의 네 수가 있는데, 이 시들은 언제 지은 것 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106.
        2015.0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산업의 발달 및 도시화에 따라 도시에 인구밀도가 높아지고 교통수단이 증가됨에 따라 도로 교통 소음과 관련된 피해가 해마다 급증하고 있는 추세이다. 최근에는 도로와 인접한 인구 밀집 지역인 주거지역, 학교, 병원 등에서 각종 소음에 대한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환경분쟁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2014년까지의 환경분쟁 중 약 80%가 소음관련 문제로 해결책이 시급함을 알 수 있다. 본 연구는 복층 저소음 아스팔트 콘크리트 포장의 소음 저감효과 및 경제성에 관한 포스터이다. 본 연구에서는 콘크리트 포장의 시공 전, 후의 5분 등가소음도 측정을 실시하여 일반 밀입도 아스팔트 콘크리트 포장을 시공하였을 때와 복층 저소음 아스팔트를 시공하였을 때의 도로교통 소음 저감량을 비교하였다. 측정된 5분 등가 소음은 소음 예측 프로그램의 변수로 사용하여 복층 저소음 아스팔트 콘크리트 포장을 실시한 지역의 아파트의 15층 전체에 대한 도로교통 소음을 예측 하여 경제성 분석의 기초자료로 사용하였다. 소음 예측 결과를 바탕으로 소음 편익 비용을 산정하였으며 복층 저소음 아스팔트 콘크리트 포장과 일반 밀입도 아스팔트 콘크리트 포장의 생애주기 비용을 비교 분석하였다.
        107.
        2015.02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현재 토사재해 방재시설은 법적으로「사방사업법」,「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의한 사방시설이 있으나 대부분 산지 대책 중심이고, 실제로 피해를 받는 도심지에는「시설물의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에 의한 일부 2종시설물이 있으나 다양한 대책이 미흡하고 관리기관이 명확하지 않아 현실적으로 그마저도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도심지 토사재해 방재시설에 대한 효율적 관리 및 장기간 사용을 도모하기 위해 도심지 토사재해 방재시설에 대한 생애주기별 업무프로세스를 정의하고 시설물 현황, 관리 이력, 문제점 등을 정량적, 통계적으로 파악하고 관리할 수 있는 항목을 설정하였다. 우선 토사재해 방재시설 현황분석을 통해 본 연구의 토사재해를 정의하였으며, 과거 피해지역의 토지이용 특성 분석을 통해 구분한 토사재해 공간적 범위를 적용하여 본 연구의 도심지 토사재해 방재시설을 정의 및 분류하였다. 또한 일반적인 생애주기단계를 토사재해 방재시설 측면에 적용하여 생애주기별 업무를 분석하고 도심지 토사재해 방재시설을 통합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생애주기별 관리항목 설정 및 관리방향, 업무프로세스를 도출하였다.
        108.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청옹 이명기는 17세기 후반 숙종조 조선왕조의 사대부들 사이의 당쟁이 격화되고 있었던 시기에, 중앙정부의 정치권력에서 점차 더욱 멀리 소외되고 있었던 밀양 사림을 대표하였던 인물의 한 사람이다. 그는 임진란 전후로 밀양의 내진리에 정착한 벽진이씨의 후예로서, 한강 정구 및 여헌 장현광의 학문 연원에 접속하였던 부형들이 전수한 家學을 토대로 학문을 성취하고, 부형들로부터 이어진 世交를 이어받아, 과거를 통하여 중앙정부의 관직에 진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25세의 젊은 나이에 진사가 되었는데, 집안의 喪故와 경신환국과 임술고변,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더욱 격화되어가는 당쟁의 와중에 到記科에서 直赴會試의 은전을 받았지만 실현되지 못하였고, 예순이 넘은 만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지만 그 또한 관직에 임용되지 못한 채로 별세하였다. 나는 이 글에서 청옹의 생애 전 과정이 숙종조의 당쟁이 격화된 시점과 맞물려 있음을 주목하고, 그 생애 이력의 파란이 당쟁과 관련이 있음을 방증하는 한편, 당쟁의 시대에 지방 학교의 건설과 교육에 종사하였던 지방 사림의 역할과 그 시문의 문학적 성취와 특징적 면모를 드러내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청옹문집��에 실린 시문을 개관하는 한편, 문집에 수록되지 않은 시문 십여 건을 찾아내어 그 내용을 소개하였고, 또한 청옹의 시문은 시어가 平順하고 義理가 雅正하다는 기왕의 논평을 기반으로, 이와 관련됨직한 몇몇 시문을 예로 들어 그 의미와 의의를 유추하여 논증하고, 산문으로 「紅紙說」 한 편을 분석하여 당대의 인재등용에 대한 풍자의 의의와 小品文으로서의 의의와 특징을 논하였다.
        109.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회당 이이두는 퇴계 사후 寒岡 鄭逑 계열의 학통을 계승하여 퇴계의 학통이 밀양사림들에게 주류를 이루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리고 퇴계 학통의 또 다른 한 맥인 학봉 계열을 계승한 갈암 이현일과는 교우관계로 아들을 갈암에게 배우도록 인도하기도 하였다.남회당 이이두의 생애는 ‘孝友’로 대표할 수 있는 생애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소학��을 통해 법도를 익히고 조금의 어김도 없이 몸소 실천하였다. 부모님이 살아서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봉양하고, 돌아가신 후에는 팔십이 다된 노구로도 조상을 섬기는 예를 어김없이 실천하여 지역의 유림들에게 존숭의 대상이 되었다. 남회당은 부모에게 뿐만 아니라 형제에 대한 우의 또한 깊어 만년에 친가의 작은 터에 오두막을 짓고 돌아가신 부모님과 형제들을 그리워하여 ‘覽懷堂’이라는 호를 얻게 되었다.남회당은 시에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며, 특히 그가 지은 賦 5편은 다른 작가들의 문학작품과 비교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문학성과 작품성이 있었다. 그의 시에는 부모와 형제에 대한 정과 자연속에서의 은일과 자적, 학문에 대한 열정 등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그의 부 5편은 그의 문학적 지취와 학문적 역량이 집약된 작품으로 조선중기 이 지역 한문학의 수준을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110.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竹坡 李而楨(1619∼1679)은 밀양 사람이다. 그의 학맥은 金宗直으로부터 시작하여 寒岡 鄭逑, 그리고 부친의 가학과 處士 鄭寔을 거쳐 장인이면서 스승인 朴壽春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생전에 미수가 탐방하여 만난 적도 있다.그의 스승인 박수춘은 『소학』의 규범을 따른 사람이다. 임진왜란 때에는 곽재우와 함께 火旺城 전투에 참가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의병을 조직하여 청군에 대항하려 하였다. 이 같은 스승 박수춘의 행적은 죽파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그의 장형은 성균관에 입학했으나 서울에 온 동생이 갑자기 죽자 벼슬할 생각을 끊고 낙향한다. 그리고 죽파가 41세 되던 해인 1659년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48세인 1666년에 모친상을 겪었다. 밀양에 살고 있던 죽파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예림서원 移轉에 관한 것이다. 조선왕조 전기만 하더라도 점필재는 경상좌도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며 정치가로 중앙 정치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무오사화 이후로 급격하게 쇠퇴하게 된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경상우도에서는 남명과 정인홍으로 이어지는 학통이 중앙정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죽파가 활동하던 시기는 인조반정 이후로 당쟁이 점차 격화되기 시작했고, 예림서원의 이전은 죽파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주었다. 다만 예림서원 이건 시기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고 있어 차후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당시 밀양에서 김종직은 탄생하였고 禮林書院에서 제향되었다. 죽파는 예림서원 이전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였다. 1634년(인조12)에는 죽파의 아버지인 泗濱 李繼胤이 여헌 張顯光(1554∼1637)에게 서원이전과 神座配享에 자문하고 죽파는 밀양부사 이유달에게 「예림서원이건정문」을 올려서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로 새터로 옮기고 예림서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점필재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迂拙齋 朴漢柱는 東壁, 松溪 申季誠은 西壁에 배향하면서 간송 조임도가 「이건고유문」을 죽파는 「예림서원이건기��를 짓는다. 1652년(효종3) 예림서원 講堂을 증축할 때 밀양부사 김응조를 대신하여 죽파는 「예림서원강당상량문」을 짓는다. 1669년(현종10)에 예림서원에 賜額이 내려진다. 하지만 1678년(숙종4)에 講堂에 화재가 난다. 그리고 죽파가 운명하고 나서 1680년(숙종6)에 廟宇에 또 다시 화재가 발생하여 位版이 타버린다. 이에 다시 부북면 후사포리로 옮겨 중건하게 된다. 1658년 미수가 죽파를 만난 것은 부친상을 당하고 여막에 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미수가 예림서원에 와서 목격한 것은 墓碣과 石床, 華表, 神道碑, 松溪閭表碑이다. 예림서원에 배향된 분은 점필재 김종직, 송계 장현광, 우졸재 박한주인데, 미수는 밀양에 와서 송계의 여표비를 언급하고 있지만 우졸재 박한주의 여표비는 언급하지 않았다. 『죽파집』의 「迂拙子朴先生閭表碑事呈道伯文」를 보면 여표비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 나타나 있다. 아마 미수가 예림서원을 다녀간 후 우졸재여표비가 세워진 것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다만 여표비는 현종 16년에 건립된 것으로 迂拙齋實記의 年譜에 명시되어 있다고 한다. 죽파가 道伯에게 올린 글의 관련성은 차후의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죽파는 출사하지는 않았지만 향촌사회에서 기여하는 것이 컸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인명 피해가 나고, 풍속이 무너지자 명나라 丘濬(1420-1495)의 『家禮儀節』과 우리나라 선현의 설을 엮어『家禮節要』를 편찬하고 제사를 勸勉한 일이 있다. 「鄕約立議序」를 써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사람들에게 藍田의 呂氏 향약을 실행할 수 있도록 하였다.
        111.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碧珍 李氏 가운데 密陽 來進 門中의 경우 조선 중기 이후 후기에 들어 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여러 대에 걸쳐 문집이 이어져 나오고 벼슬도 이어졌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문중이 번창할 수 있었던 것은 중간에 東巖 李而樟과 松岡 李命徵 부자의 효우 돈목의 정신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다.동암은 아버지 秉節公 李繼胤으로부터 ��小學��의 실천궁행의 정신을 받아 위로는 아버지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는 五友堂을 지어 형제와 우애 있게 지내고 자질의 교육에 힘썼다. 그 결과 중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재자들과 교유를 확대하는 등 도약의 단계에 있는 듯하였다. 그러나 함께 서울에 머물던 셋째 아우 李而相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세상에 나아가는 일을 단념하였지만 그 후유증으로 일년 만에 자신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동암의 시는 그의 생애를 깊이 있게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동암은 그리 많은 시를 남기지는 않았고, 시도 輓詞가 위주이지만 시작품들은 비교적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만시는 여러 작품들이 거의 일관되게 자신만의 독특한 구조로 작품을 구성하고 있어 하나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抒情詩와 交遊詩는 그리 많지 않으나, 시 속에 절제된 감정이 잘 스며들어 있다. 송강은 아버지 동암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많지 않은 나이에 조부모와 어머니, 그리고 여러 명의 삼촌을 모셔야 할 뿐만 아니라, 아래로는 처자와 형제를 돌보아야 하는 막중한 일을 맡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벼슬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으나, 중간에 환로에 대한 환멸을 느끼고 과거를 포기하였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효우와 돈목을 매우 중시하여 一家契를 조직하였으며, 12說을 지어 유자로서의 기본에 충실하고자 하였다.송강의 시도 그의 생애가 적극적으로 반영되어 그의 생애와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의 시는 아버지의 것에 비해 양적으로 많으며, 내용에 있어서도 아버지에 못지않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는 벗과 주고받으며 우의를 다진 交友詩, 자신과 동갑인 숙부와 벗처럼 주고받은 唱酬詩, 고향의 산천에 대한 자부를 드러내거나, 특히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思鄕詩 등등의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이들에 대한 연구는 동암과 송강 부자 각각의 삶과 사상을 살피고 시를 통하여 이를 확인하는 것 이외에 벽진 이씨 내진문중이 흥왕하게 한 원천이 무엇이었던가를 이해하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112.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In this study, the objectives are to provide rural experience tourism village business courses and development direction in between individual farmers and the village in base on rural development business of Hapjeon-village. The developmental process of a farm-stay village can be categorized into the period of six stages: 1) a conception stage 2) an adoption stage 3) a growth stage 4) an expansion stage 5) a stagnation stage 6) a recovery stage. Farm Stay Villages, Individual Farmhouses or Producer Groups can be placed in four different quadrant areas of a graph, depending on the pursuing direction and results of core values by having the X-axis for economic factors (public profits, individual profits) and by having the Y-axis for emotional factors (self-actualization, conflicts). The first quadrant area is designated for ideal individual farmhouses and producer groups for having achieved the status of economic self-reliant and high emotional satisfaction. The second quadrant is for ideal self-actualized communal villages having achieved the independent public interest and public profitable status. The third quadrant is reserved for villages experiencing communal conflicts and no economic self-reliant stagnant status. The fourth guardant area is allocated for individual farmhouses and producer groups having achieved self-reliant economic status, yet having communal conflicts. Using the aforementioned concept, the government shall design village development projects and prepare realistic and achievable goals and place them in as a systematic device in future projects.
        113.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退休 姜獻之는 肅宗 대에 仕宦한 宜寧의 인물이다. 출처의 대절에 돈독하여 당시 권력 장악의 다툼 속에서 결연히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당호를 退休라 짓고 「漁樵問答」을 지어 자신의 뜻을 표출하였다. 본고는 퇴휴가 혼란한 정국에서 居官하면서도 禍를 입지 않고 온전하게 생애를 마칠 수 있었던 점에 착안하여 그의 남다른 지취에 주목하였다. 그 핵심 요인은 바로 퇴휴가 자신의 호로 삼은 退休라는 의미 속에서 찾을 수 있었다. 퇴휴가 忽忽히 퇴처할 수 있었던 이유는 출사하여 유자로서의 포부는 웅대하였으나 功績과 職位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언제든 퇴휴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인생을 관조하면서 삶의 한 지표였던 퇴휴의 의미가 마음에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에 물러날 때를 알고 퇴처할 수 있었다. 퇴휴는 어버이를 天地와 같은 존재로 여기며 부모님께 事親의 예와 자신의 愛敬을 다하고자 하였다. 학문에 뜻을 두었을 때 역사서를 탐독하여 작자의 법도를 터득하고 사리판단을 하는 분별력을 키웠다. 논의가 直截하였고 大義를 우선하여 쉽게 남을 따르지 않았다는 후인의 평가는 史書에서 받은 영향의 일면이다. 퇴휴의 지취를 살펴보면 첫째 일상을 중시한 면모가 드러난다. 訓蒙을 위해 『小學』을 표준으로 내용을 절취하여 실천이 실제에 번거롭지 않도록 「擊蒙家訓」을 지었다. 고원한 이치의 탐구가 아닌 언행을 단속하며 예로써 자신에게 엄격하였던 퇴휴의 일상이 엿보였다. 둘째 지나친 욕심을 경계하면서 閑居하는 삶을 보여주었다. 벼슬살이에서 퇴처하지 않아 재앙을 당한 역사적 인물을 당대 관료들에게 견주며 만족과 知止를 명심하였다. 따라서 만년에 인생을 반추하고 자연과 더불어 한거하며 自足할 수 있었다. 셋째 靜慮를 통해 마음을 수양하며 樂志하는 삶을 추구하였다. 퇴휴는 본디부터 맑고 밝은 본심을 깨닫기 위해 생각을 고요히 하는 것을 우선하였다. 이러한 과정의 수양을 통하여 정신적 지표를 확고히 해 진정으로 즐기는 삶을 추구할 수 있었다. 퇴휴는 어디에 있든 마음의 가짐에 따라 자신이 있는 곳이 桃源이라고 하여 무한한 정신 경계와 은일한 삶을 지향한 자취를 남겼다.
        114.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覺齋 權參鉉은, 평생을 宜寧에서 초야에 묻혀 학자로서 일생을 보냈다. 선조인 霜嵒의 志節을 물려받고, 어린 나이에 淵齋 宋秉璿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栗谷, 尤庵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였다. 그는 격변하는 시대조류 속에서 전통 儒學者의 자세를 견지하며 道學의 연구와 보전에 힘썼고, 제자 교육에 誠力을 다했다. 그리고 평생 많은 漢詩文을 저술하여 자신의 감정과 사상을 표현하여 남겼다. 신학문의 보급과 확대 속에서 유학의 보전과 전승에 힘을 다 쏟았지만, 이미 유학은 시대의 主潮가 아니라 국가나 대중으로부터 관심 밖으로 말려나는 상황이었으므로, 시대와 인심은 그의 뜻과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좌절하기 않고 최후의 일각까지도 자신의 召命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고 바른 길을 추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수준 높은 저술과 많은 제자들을 길러 전통유학자로서 마지막 세대를 의미 있게 보냈다. 새로운 문명을 거부한 고루한 儒學者로 볼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점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115.
        2013.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의령지역을 대표하는 학자 西岡 李中厚의 생애와 시세계를 다룬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張福樞의 문하에서 학문을 하였으나 중년에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공부를 하지 못하고 건강의 회복에 힘을 썼다. 그는 요양에 집중하는 동안에 다른 한편으로는 근검절약하여 가산을 모았고, 부친의 유명에 따라 종족이 돈목하게 지낼 방책으로 別莊을 지어 집안의 大小事를 의논하고 도왔다. 이렇게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집안을 일으키는 데에 평생의 심력을 다한 그에게 자제들이 별장 곁에 西岡精舍를 지어주었다. 그는 만년에 이곳에서 그간 하지 못한 공부를 다시 하면서 집안을 다스렸는데, 무엇보다도 이곳에서 자제들이 열심히 공부하여 가업을 일으켜 주기를 바랐다. 그는 이처럼 질병과 가산을 모으는 일에 힘을 썼지만 선비로서의 도리는 잊지 않아 인근의 지인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지은 輓詩가 100여 편에 이르고, 또 공부하고 요양하는 여가에 벗들과 모여 명승을 찾아 즐기기도 하였는데 이 때 한편으로는 술을 마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시에 전념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는 상당히 수준에 이르러 그와 절친하게 지내던 深齋 曺兢燮이 시에는 情來·氣來·神來의 三來가 있는데 그의 시는 이것을 거의 이루었다고 높이 평가하기도 하였다. 시 가운데 가장 분량이 많은 輓詩는 일반적인 만사와는 달리 자신의 슬픈 감정과 마음을 드러내기 보다는 고인의 생애를 정리한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어떤 시는 만시라기보다는 고인의 일생을 정리한 誄詞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 것이 많다. 반면에 次韻詩는 다른 사람이 지은 시를 따라서 짓는 제약성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서정적인 표현을 통하여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많다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116.
        2012.11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In this study, a bridge maintenance system is developed to generate performance based maintenance strategy by considering the life cycle cost(LCC). And it is proposed that the concept of generally annual maintenance are practically and easily used to perform LCC analysis. Some of generally annual maintenance data are suggested through existing data analysis due to the proposed concept and LCC analysis of by a real bridge structures is preformed by comparison with a current approach. This paper presents the development of bridge maintenance strategy and can be utilized as an efficient tool to provide the best economical bridge maintenance scenario corresponding to the various constraints and requirements of bridge agency.
        117.
        2012.11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In this study, we conducted Life-Cycle Reliability Analysis Classified by Structure Movements in Removal PSC Beam Bridge. in short, we secured experimental values of bridge design factor and perform a detailed behavior analysis of structure system. finally, we could accomplish an Life-Cycle Reliability Analysis with considering of an environmental factor and variability of loading. We defined limit state function by statistical method (Response Surface Method, RSM) and calculated confidence indicator and Probability of Failure using reliability interpretation technique(FORM). eventually, we could compute Performance Profile and compare deterioration form according to time history by structure movements.
        118.
        2012.11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his study mainly focuses on presenting a rational procedure of assessing target reliability level of nuclear containment. The target reliability level can be obtained by considering LCC(Life Cycle Cost) of damage and operation. The LCC evaluation results in the different environmental situations. It is verified that this deviation of LCC can be adjusted by selecting the proper initial target reliability. In addition, slight increase of initial target reliability for the nuclear containment aiming a longer service life, therefore, the total expected loss during the extended service years can be maintained in the same level as the total loss expected in the 20-year service life for the existing containment structures.
        119.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명의 생애와 발자취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오래 되었다. 어찌 보면 남명 당대에도 이에 대한 관심이 있었고, 남명이 돌아간 직후 이에 대한 정리가 본격화되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남명의 생애 가운데 예민한 부분이 있기도 하고, 제자 정인홍의 정치적 부침에 따른 후유증으로 생애에 관한 자료도 여러 차례 여러 사람에 의해 중복하여 지어지기도 하였다. 따라서 남명에 대한 생애자료는 그 누구보다도 많이 남게 되었다. 근대에 들어 남명의 생애를 정리하여 소개하는 일에 그리 적극적이지 못하였다. 근대의 인명사서 등에 남명에 대한 내용은 비슷한 시기의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략한 감이 있다. 1990년대 초에 남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남명의 생애에 대해서도 관심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본격적인 연구와 번역, 교정 등은 이루어지 않았다. 다만 최근 들어 다행스럽게 남명에 관한 생애자료가 다시 전반적으로 검토되고 정리되고 있다. 남명의 생애에 관한 정리와 소개, 교정과 연구는 논문, 저서, 소설, 사전, 교과서 및 개설서 등 여러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소설로 지어지고 교과서 및 개설서에 소개되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 논문, 저서 등의 형태로 점점 깊이 있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며, 인터넷 온라인상에 사전적 설명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남명의 생애에 대한 철저한 실증을 바탕으로 생애가 정확하게 소개되어야 할 것이다. 남명의 발자취에 관한 정리와 소개는 주로 책으로 몇 권 나와 있는데, 개설적으로 간략히 설명한 것에서부터 특정한 분야 예컨대 한시 등과 관련하여 발자취를 탐방하는 형식으로 된 것도 있다. 그리고 그의 생애의 발자취와 학문적 궤적을 관련지어 연구한 것도 있다. 이들 발자취에 대한 정리와 탐구는 이전의 유적지에 대해 소략하게 소개한 책자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였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발굴하거나 정리가 되지 않은 발자취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120.
        2012.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연구의 목적은 한국 다문화가정 아동들의 삶과 교육을 입체적으로 조명하는데 있다. 이러한 연구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 글은 한국 다문화가정의 아동들(N=6)과 외국인 어머니들(N=6), 그리고 학교 교사들(N=6)의 삶과 교육을 둘러싼 여섯 가지 생애사적 목소리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하였다. 첫째, 다문화가정의 아동들은 학교적응을 위해 한국어 구사능력이 중요하였다. 다문화가정의 아동들은 다양한 학업성취 수준을 나타내었지만, 학령이 높아질수록 학력저하 현상을 나타내었다. 둘째, 학교 교사들은 다문화가정 아동들의 학교생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학교 교사들은 다문화가정의 아동이라고 해서 특별한 교육적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셋째, 다문화가정의 외국인 어머니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차별적인 교육열을 나타내었다. 하지만 다문화가정의 한국인 아버지들은 자녀의 학교교육에 직접적인 개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친지들의 관심과 배려 정도는 다문화가정 아동들의 삶과 교육에 직결되었다. 이 글은 생애사적 목소리에 담겨있는 교육학적 교훈들에 기초하여 한국 다문화가정 아동들의 삶과 교육을 개선할 수 있는 실천적인 아이디어들을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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