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민간회화로서 무화(巫畵)의 예술적 기치-이미지의 미적특질을 중심으로’를 회화사적 입장에서 실증자료를 토대로 성찰하고자 한다. 그 동안 무화에 관한 도상이 지닌 상징적 의미를 민속학적 관점에서 문화사적 의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측면이 다수를 이루었다. 신의 형상을 그림으로 나타난 것이기에 불화와 마찬가지로 우리 회화사에 서 충분히 논의가 이루어져야 되는 측면에 있으나, 무(巫)에 대한 부정적 시선 과 특정한 사조 또는 대표적인 작가를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는 미술사에서 적극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장르이다. 무명(無名)의 작가에 의 해 그려졌으며 무당이 죽음이 다가오면 자신이 봉안하던 무화를 땅에 묻거나 불태워서 정리하는 관습 때문에 100년 이상 된 무신도를 찾는 것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에 관한 연구를 꺼린다면 한국 인의 고유한 신에 대한 관념과 미적인 사유체계에 관한 이해를 외면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라 판단한다. 이러한 연유로 본 논문에서는 무화만이 지닌 미 적 특수성을 찾고자 하며, 이는 기층의 미감을 이해하는 하나의 통로가 될 것 이라 본다. 본인은 무화의 예술적 가치를 미적인 측면에서 논하기 위해서는 방향성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속학자인 김태곤은 무화는 민간신앙 속에서 전 승된 일종의 원시회화이므로 민화적 측면에서 고찰되어야 하며, 무화를 전형 적인 순수한 민화이고 말하고 있다. 민(民)에 의해 소통된 민간회화라는 점이 민화의 핵심이라면, 무화(巫畵)는 무당의 집인 신당에서 사용되었지만, 그 당 시 대중들의 욕구에 의해 제작되고 소통되어진 측면이 크기에 민화의 하나로 분류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본다. 이러한 이유로 본 논문에서는 무화의 예술적 가치를 민간의 회화라는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하며 통시적 입장에서 사료의 분석과 실제 남아있는 무화의 실견을 통한 검토를 통해 무화라는 이미지가 지닌 본질을 파악하고 그간의 논의를 확장시키고자 한다.
본 연구는 산업화 유망 식물인 회화나무의 이차대사산물 대량생산용 캘러스 확보에 필요한 기초조건을 확인하고자 수행하였다. 기내 배양한 회화나무 하배축을 2.0 mg·L-1 NAA + 0.1 mg·L-1 TDZ 배지에서 배양하였을 때 유백색의 부드러운 캘러스가 형성되었고, 캘러스 형성률 100±0.0%, 캘러스 형성에 걸리는 기간 7.1±0.03일, 캘러스 무게 249.8±12.73 mg으로 가장 효과적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하배축에서 유도한 캘러스는 백색광 조건의 1.0 mg·L-1 IBA + 0.1 mg·L-1 TDZ 처리 배지에서 배양하였을 때 연노란색의 단단한 캘러스가 다량으로 형성되었고, 캘러스 생체중 186±5.4 mg, 면적 40.6±1.6 mm2으로 가장 무겁고, 크기가 우수한 것을 확인하였다. 기내 배양한 캘러스 소재 추출물의 추출수율은 50% 에탄올 추출 시 59%, 물 추출 시 54%로 확인하였고, 추출물 내 유효성분으로 마키아인 함량은 1.68 mg·g-1으로 검출되었다. 본 연구의 결과는 산업화 식물로써 유망있는 수종인 회화나무의 기내 대량증식과 이차대사산물 생산성을 향상할 수 있는 위한 기초자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이종구의 1980년대 농촌 회화에 나타난 리얼리즘에 대한 연구이다. 이종구는 처음부터 서사와 메시지를 내포한 리얼리즘 작품을 하고자 했다. 단순한 서 술이 아닌 작가 고유의 메시지를 내포한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극사실 기법으로 초 현실주의적인 작품으로 화업을 시작했다. 1980년대 초 그의 관심은 경제발전으로 호황인 도시의 그늘 속에 가려진 노동자의 열악한 환경이었다. 이후 고향에서 가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자각했고, 『창작과 비평』에 연재되 고 있었던 이문구의 농촌소설에서 농촌 표현의 영감을 받았다. 1984년부터 고향 서 산시 오지리를 주제로 농촌사회의 암울함을 회화로 계속해서 표현했다. 1984년 <연 혁-아버지>를 시작으로 농촌회화에 적극적으로 매진했다. 작품에 표현한 아버지의 생애는 개인의 서사를 넘어 보편적인 농민의 일생이다. 이종구의 농민 초상화는 농업을 천직으로 여기는 농민들의 애환을 보여주고 소를 의인화하여 농민의 삶과 감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오지리 사람들은 역경 속에서 도 당당한 모습을 보였으나 농촌의 실상은 점차 황폐해져갔다. 이것은 오지리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농촌의 보편적인 상황이었다. 이종구는 생명을 길러내던 땅이 자본의 논리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농촌 상황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농촌을 지키는 농민을 민족의 주체로 규정했다.
금(金, 1115~1234)이 적극적으로 시행했던 관영수공업 체제와 정책에 주목해 금대 동 경(銅鏡)의 새로운 경향과 특징을 고찰하였다. 금에서는 요, 송계로 구분할 수 있는 전통적 인 양식뿐 아니라 이를 바탕으로 폭포, 나무, 암석, 누각 등을 이용해 회화적인 화면구도로 재구성한 금계 동경들이 제작되었다. 원근법과 상하 구도를 적용한 화면 구성이 거울의 한정 된 공간 속에 적용되었고,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선경의 세계를 표현하거나 관폭도와 같이 떨어지는 폭포를 바라보는 장면들이 동경에 표현되었다. 이러한 특징은 12세기 초부터 금의 수도가 세워졌던 상경성 내지(지금의 黑龍江省 阿城 부근)의 관영 공방을 중심으로 제작되 었다. 금 초기부터 관영수공업 체제에서 동경의 주원료인 구리의 원활한 수급을 위해 동경을 제작하였고 동원(銅院), 경자국(鏡子局), 주경소(鑄鏡所)와 같은 관서를 별도로 조직해 체 계적으로 동경을 제작 및 관리하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한편 중앙관청 중에도 공예품의 제작 과 장인의 운영을 담당했던 소부감과 관련이 있고, 그중에서도 금속공예품의 도안을 담당했 던 도화서 소속의 장인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파악되었다. 금 정부는 실력 있는 외부 장인 들을 정책적으로 상경성에 집중시켰다. 여진의 토착문화와 기타 여러 민족의 외래문화가 상 경성 내지를 중심으로 흡수 및 통합되면서 금만의 새로운 동경들이 제작될 수 있었다.
1796년 봄에 김홍도(金弘道, 1745-1806년 이후)가 그린 ≪병진년화첩(丙辰年 畵帖)≫(1796년, 리움미술관(구(舊)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은 그가 이전에 추구했던 정묘(精妙)한 화풍 및 호방(豪放)한 화풍과는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이 화첩 속 그림들은 단순한 화면 구성, 시정(詩情)적이고 평화로운 분위기, 간략한 산수, 인 물, 동물 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화풍으로 그려졌다. 김홍도가 ≪병진년화첩≫ 에서 사용한 화풍은 간이(簡易), 간솔(簡率)함을 특징으로 하는 전형적인 문인화풍(文 人畵風)이다. 즉 김홍도는 평담(平淡)한 문인화풍을 사용해 산수, 인물, 풍속, 화조를 그렸다고 할 수 있다. ≪병진년화첩≫은 총 20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홍도는 충청 북도 단양(丹陽) 지역의 명승지들인 옥순봉(玉筍峯), 사인암(舍人巖)과 도담삼봉(島潭 三峯), 뱃놀이하는 사람들, 낚시꾼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노인, 숲속에 뜬 둥근달, 소를 타고 강물을 건너는 사람들, 쟁기질하는 농부, 오리, 백로, 까치, 꿩 등을 담담 (淡淡)한 필치로 그렸다. 이 그림들에는 풍속, 동물, 새, 꽃들이 산수 배경과 잘 어우 러진 풍경들이 나타나 있다. 김홍도는 이 화첩에서 단순한 구도, 정적(靜的)이며 서정 적인 분위기, 간략하고 부드러운 필묵법(筆墨法), 맑은 담채(淡彩)의 사용 등 그의 이 전 그림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화풍(畵風)을 구사하였다. ≪병진년화첩≫은 직업화가에서 사대부적 취향을 지닌 문인적 화가로 변신하려 고 했던 김홍도의 의식 변화를 보여주는 동시에 간솔, 평담천진(平淡天眞)한 화풍이 라는 그의 새로운 화풍을 선보인 작품이다. 결국 ≪병진년화첩≫은 김홍도의 화가로 서의 생애에 일대 ‘전환점’을 제공한 작품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 화첩에서 주목 되는 것은 김홍도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과 사물이 지닌 가치를 발견하고 담담하게 기록했다는 점이다. 즉 이 화첩은 ‘일상의 발견과 기록’이라는 김홍도의 혁 신적인 작화(作畵) 태도를 보여준다. ‘일상의 발견과 기록’이라는 측면에서 김홍도의 새로운 회화적 실험은 명나라의 저명한 문인화가인 심주(沈周, 1427-1509)의 작화 태도와 매우 유사하다. 심주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동물, 식물, 사람들을 담박(淡泊)한 필치로 묘사하였다. 기존의 문인화와는 달리 심주는 일상이 지닌 가치를 발견하고 소 경(小景), 즉 주변의 작은 경치와 풍경 및 그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과 생물들을 관조적인 자세로 충실히 기록하였다. 이러한 일상의 발견과 기록이라는 화가의 태도와 작화 방식에서 김홍도와 심주는 매우 닮았다. 김홍도와 심주가 그린 문인화 작품들은 문인 화론(文人畵論)의 미학적 핵심인 ‘평담천진’의 회화적으로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미술이 형성되고 발전하는 과정은 다양한 작용하는데, 특히 ‘사상’은 미술 전개에 중요한 이에 본 연구에서는 선종사상이 반영된 동아시아 하였다. 선종은 언어와 문자를 초월해 좌선과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직관과 기존의 불교는 경전과 의례의 형식 등을 다양한 분야에서 불교미술이 발전하였다. 하지만 과 의례의 형식을 거부하고 특정 승려나 깨달음의 는 정도에 머무는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이나 한산(寒山), 습득(拾得) 등 선승들을 그린 동자와 소를 통해 깨달음의 과정을 그린 심우도( 있다. 동아시아에서 전개된 미술이 여러 사상으로부터 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본 연구를 상이 반영된 동아시아 회화를 확인할 수 있을
이 글은 2023년 5월 서울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최된 '디지털 복제 시대의 회화' 세미나 에서 발표했던 글을 발전시킨 것으로, 회화를 스크린과 모바일 기기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복 제하는 것과 마주할 때의 충격과 윤리적 측면을 조명해 보고자 하였다. 이 연구에서 나는 영 국의 영화 제작자 사이먼 이브즈가 그의 영화 <회화의 초상>(2022)에서 나의 그림들 가운데 하나를 클로즈업하여 묘사한 것을 토대로, 클로즈업의 개념에 대해 고찰해 보고, 회화에 대 한 디지털 복제가 예술작품에 대한 번역이 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검토해 보았다.
본 연구에서는 프랭크 볼링의 분실된 그림 <렌트Lent >(1963) 사례를 통해 한 그림의 실물 복제품과 디지털 복제품 사이의 관계를 조명하였다. 원본은 볼링의 초기 경력에서 가장 중요한 그림 중 하나였으나, 1980년대 초에 그의 작업실에서 사라져 버렸다. 따라서 <렌트> 의 복제는 볼링의 기억과 프로세스에 대한 설명에 기초해서 원본에 대한 (낮은 해상도의) 디지털 복제물을 이용해 실행되었다. 필자는 이 연구에서 복제물과 함께 텍스처, 제스처, 색 상의 복제에 대한 도전을 중점적으로 다루었으며, 복제물이 쉽게 포착할 수 없는 회화의 고 유한 특징에 대한 문제도 살펴보고자 하였다. 또한 원래 작품의 새로운 측면을 드러내기 위 해서 디지털 복제물을 조작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모색해 보았다. 볼링의 동의하에 필자는 이 연구에서 복제품의 운명과 원작과의 관계를 고찰할 수 있었고, 이를 통해 원작과 관련된 회 화 복제품과 디지털 복제품의 존재론적 상태, 기능, 가치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였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how late Joseon art scene interpreted and reflected the concept of “The four masters of Yuan dynasty (元四大家, from this out I’ll mark it as a Yuan-sadaega)” into landscape paintings during the late 18th to the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This study employs a comparative approach, analyzing paintings created during this period in Korea and China, particularly those featuring Yuan-sadaega, while also investigating written records. The understanding of the Yuan-sadaega and their paintings began through the early 17th century Gosi's painting manuals(顧氏畵譜). Through Heo Guseo (許九敍)'s works and literary records, It can be observed that the perception of Yuan sadaega's artworks and artistic aspects during at least the late 18th century was established within the art community. Notably, a distinct shift in the understanding of painters and the composition of Yuan-sadaega is observed in the trends of the late 18th and first half of the 19th century. In the late 18th century, the use of dwelling in the mountain(山居) image into landscapes in Yuan-sadaega compositions is evident, particularly in works by artists like Won Myeong-ung(元命雄) and Jeong Su-yeong(鄭遂榮). This trend is rooted in the contemporaneous significance of the art scene that produced a variety of paintings with the theme of ‘benevolence and daily life and in the shared understanding of the Yuan-sadaega as recluse(隱士) within the artistic community. This collective perception of the Yuan-sadaega seems to have been influenced by the influx of theories and writings on painting by Dong qi chang(董其昌) and by the circulation of painting manuals. The early 19th century, a new a new type of painting emerged alongside Bangjak(倣作, paintings of creative imitation) about the Yuan-sadaega, known as ‘Bangjak about Yuan dynasty painters(倣元人山水圖). Through the works of Kim Jeong-hee(金正喜) and Heo Ryeon(許鍊), it is noteworthy that various scenes are depicted under the same theme. This reflects the establishment of universal values and standards for literary painting within the art community. This process led to the term ‘Ni-hwang(倪黃, abbreviation of Ni zan and Hwang gong wang)’ emerging and the concept expanding under the term ‘Yuan-in’ (元人, the symbol of Yuan art scean). As a result, the desired artistic style pursued by the contemporary artistic community was encompassed under the universal concept of ‘Yuan-in,’ and ‘Bangjak about Yuan dynasty painters’ came to embody this comprehensive theme
조제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의 <노예선>은 인간 경험의 극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을 포착 하는 사례다. 1840년에 완성된 이 작품은 격렬한 폭풍 속에서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이 배 에서 밖으로 던져지는 비인간적인 장면을 묘사한다. 또한 이 작품은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의 잔인성과 경제적 이익을 위한 인간 착취의 윤리적 의미에 대한 회화적 증언이다. 그러나 노 예무역의 열악한 환경은 종 호 사건은 물론 노예무역을 둘러싼 복잡한 법적 문제를 발생시 켰다. 본 연구는 <노예선>이 ‘노예제 폐지’나 ‘노예무역폐지’와 같은 사안들과 결합하는 과정 에서 파생되는 메시지를 어떻게 시각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는지를 사회사적 관점에서 분석 한다. 이를 통해 노예제도에 함축된 정치경제적 맥락과 작가의 조형 의식 형성 간의 관계성 을 조명하여 터너의 작품 세계에 대한 기존의 인식론적 지형도를 확장시키는데 집중한다.
원대 문인서화가로 유명한 조맹부는 부친 조여은의 취향과 감식안의 영향 하에서 초기 부터 사생과 같은 사실적 기법을 깊이 탐구하였다. 중기에는 희작과 같은 북송수묵화 양식들 을 폭넓게 수용한 뒤, 이를 자신만의 방법으로 변용하고 결합시킴으로써, 사생과 묵희의 개 념을 새롭게 확장시켰다. 장난삼아 사생한다는 뜻의 ‘희위사생’론은 ‘공필사생’과 ‘묵필희작’ 이라는 이질적 기법의 집성을 통해 ‘기운’ 혹은 ‘정성(情性)’을 얻는다는 혁신론이었다. 이는 〈이양도〉를 비롯한 일련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고도로 복합적이고 균형잡힌 조형세계의 또 다른 층위를 해석하는 열쇠를 제공한다. 이렇듯 사실적인 회화세계의 토양 속에서 조맹부는 ‘전신의 묘’를 다하지 못한 당시 사부화가들에 대한 비판의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본고는 문 인화에 사실적 화법을 접목시키려는 조맹부의 탐구와 혁신적 방법론에 포커스를 맞춤으로써 원대 회화 및 그 향방을 좌우한 그에 대한 기존의 이해를 새롭게 확장시켜준다.
This study examines the social and artistic aspects of the Netherlands in the 16th century, focusing on the paintings of Pieter Bruegel the Elder (1525–1569), a representative Dutch painter at that time. Also analyzed were the types and characteristics of each item of the male populace’s and nobles’ costumes at that point in the Renaissance. The results are as follows: most of the populace’s chemises do not have frills on the neckline and sleeves; the doublet has a loose body and sleeves overall; and the sleeves and armholes are fixed with sewing rather than being detachable, making the epaulet invisible. The neckline of the doublet usually does not have a collar, but it sometimes has a hood. In the case of trousers, most males are shown wearing waist-high stockings, and a piece of cord is visible. It seems that the populace’s coats were mainly Spanish-style capes. The 16th-century Dutch populace’s costumes are imitative—reflecting a desire to emulate the codpieces and hairstyles of the aristocrats—while providing individuality through hats and belts. In terms of practicality, it appears that a knife and pouch were used in various living environments. This trend can be seen as a reflection of populace’s perception of the costume at the time.
1990년대 초·중반 많은 중국의 화가들은 전통 중국화(中國畵) 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서양화를 융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 스타일과 예술 언어를 나타내었다. 이들 가운데 이고선은 ‘중국화와 서양화의 융합’의 길을 개척한 선두 주자였다. 특히 그의 어(魚)류 회화는 중국 전통 문인화(文人畵)의 필묵 정신을 계승함과 동시에 서양 회화의 형식적인 요소를 받아들여 독창 적인 표현 기법과 예술 언어를 발휘하였다. 본 연구는 이고선 과 동시대 화가들의 어(魚)류를 소재로 한 회화작품에 표현된 미의식과 예술특징의 차이를 알아보고, 중국 당대 사의화(寫意 畵)에 대한 경험과 영향에 대해 분석하였다.
본 논문은 ‘박생광의 회화: 한국적 이미지의 추구’로 인문학적 관점에서 실 증자료를 토대로 성찰하고자 한다. 그 동안 박생광에 관한 연구는 우리 민족 의 미가 표출된 2)그림이라는 틀 안에서 서술되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작 품의 형식적인 부분에 있어 소재, 색채 등에 집중한 논문과 내용적인 부분에 서 민속, 무속, 민화 등 전통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연구한 논문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들의 연구는 전통의 재해석이란 측면에서 박생광이 우리의 민속 적, 종교적인 요소들을 과감한 색채의 사용을 통해 승화시켰다는 점에 주목하 여 서술되었다. 이는 한국의 미의 재발견, 우리 채색화의 복권이라는 측면을 강조하여 그 의미를 찾고자 했으나, 박생광의 작품이 담고 있는 근원적 바탕 을 해석하기에는 부족하였다고 판단된다. 그가 어떠한 이유로 말년에 무(巫)에 주목했고, 작품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 던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고찰 없이는 그의 작품이 갖는 진정한 의의를 분석 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무(巫)의 본질에 대한 해석이 우선시 되어야 하며, 작품만을 두고 단편적으로 분석하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박생 광 작품의 특색은 기존의 세계관에서 탈피하여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두지 않 았던 무(巫)를 소재로 하여 우리 민족의 기층문화를 복권시켰다는 것에 있다. 조선 시대에는 지배층에 의해 멸시받았고, 일제 강점기에는 민중의 종교로 박 해받았으며 해방 이후에는 서구식 가치관에 의해 비합리적인 미신으로 천대받 았으나, 현재까지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무(巫)이다. 이러한 연 유로 본 논문에서는 우선적으로 무(巫)에 관한 탐구를 통해, 그가 추구했던 한 국적 이미지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간의 논의들을 확장시키고자 한다.
본 연구는 1960-70년대 서부 미니멀리즘의 작업 경향에서 드러난 지역성을 통해 이들의 독자성을 고찰하고자 한다. 서부 미니멀리즘은 로스앤젤레스 화단이 주체적으로 형성한 예술 운 동이라는 의의가 있다. 서부 미니멀리즘은 동시대 뉴욕 미니멀리즘과 유사성을 공유함에도 불구 하고, 이들은 로스앤젤레스의 지역성에 기반한 독자성을 형성하였다. 이들의 독자성이 구축되는 과정은 회화 매체를 주축으로 이루어졌으며, 이는 뉴욕 미니멀리즘과 구별되는 주요한 지점이다. 이에 본 연구는 서부 미니멀리즘의 지역성이 특히 이들의 회화 작업에서 드러났음에 주목한다. 20세기 중반 기존 추상표현주의를 모방하던 로스앤젤레스 화단은 셰이프트 캔버스 및 하드 엣지 형태의 비(非)-전통적 회화 작업을 통해 서부 미니멀리즘을 발단시켰다. 이후 서부 미니멀리즘은 동시대 팝아트와 맞물려 피니쉬 페티쉬(Finish Fetish)로 이어졌다. 이때 피니쉬 페티쉬는 로스 앤젤레스 자동차 문화라는 지역성을 바탕으로 로스앤젤레스 팝아트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였 다. 또한, 서부 미니멀리즘의 회화에 대한 지속적 관심은 1970년대 오브제 및 공간 작업으로 전 환한 일부 작가들의 회화로의 복귀로도 나타난다. 회화의 복귀는 3차원 형태의 작업으로 총체적 으로 전환한 뉴욕 미니멀리즘과 비교되는 서부 미니멀리즘의 특징이다.
서왕모 신화 소재 전통 회화는 배경 서사에 따라 세 유형으로 분류하여 상세하게 분석하였다. ‘서왕모회군’ 유형은 서왕모와 군왕의 만남을 주목왕(周穆王)과 한무제 (漢武帝) 두 인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들은 각각 밀접하게 연관된 상징 팔준마(八駿 馬)와 반도(蟠桃) 복숭아로 변별한다. ‘선경과 여선’ 유형은 낭원(閬苑)과 요지(瑤池) 를 배경으로 여성 인물만 등장하며 도교 선경 신앙과 여선 신앙이 그 바탕이 된다. 반도대회 유형은 서왕모의 반도원(蟠桃園) 고사와 팔선과해(八仙過海) 신화가 반도대 회라는 시공간을 배경으로 결합한 서사를 뿌리로 삼는다. 이들 작품은 단순히 축수 (祝壽) 기능을 넘어 신화라는 서사와 회화의 상관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예 술 형식이며, 또 중국 신화의 발전과 변형을 추적할 수 있는 매개체이기도 하다.
화가들은 현재 활동하면서 창작활동을 할 때 외부세계에 영 향을 받아 각기 다른 감정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화가들은 자신이 느낀 감정을 개성 있는 형식을 통해서 작품으로 표현해 야 한다. 중국 현대화가 오관중은 자신만의 형식미와 의경미를 창조하여 동양과 서양, 일반대중과 미술비평가에게서 모두 인 정을 받은 화가이다. 그는 동양예술의 내재된 사상을 연구한 후 그것을 기초로 전통과 현대, 구상과 추상, 동양과 서양의 예 술 융합의 접점(接點)을 찾아내었다. 1970년대 이전 오관중의 회화는 전반적으로 서양화의 사실적 인 경향을 띄지만, 1978년 개방정책과 수묵화가 성숙함에 따라 수묵화 필묵의 정취를 서양화에 표현하는 새로운 변화를 시도 하여 생동감 넘치는 작품을 창작하였는데, 본고에서는 이러한 오관중 회화의 특성에 대하여 고찰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전 통 동양화를 현대 조형미가 풍부한 현대적 회화로 변화시켰다 는데 의의가 있다.
본고에서는 『홍루몽』 텍스트에 소품으로 등장하는 역대 명화와 서예 작품들이 해 당 공간에서 어떠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그곳에 사는 인물들과 어떠한 상호작용을 하 는지 분석함으로써 『홍루몽』 속 전통 서화 예술의 의의와 가치를 고찰해 보고자 하 였다. 『홍루몽』에서 서화는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 보여주고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하 나의 중요한 서사적 장치로 운용되었다. 처음에는 서화의 자체적인 형상으로 독자에 게 다가가나 어느 순간 공간 속의 인물과 어우러지면서 모종의 의미체계로 독자에게 수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홍루몽』의 서화 예술은 단순히 그림이나 글씨라고 하는 개별적인 소품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인물 감상 및 주제의 차원으로 확장되어 소설의 경계를 더욱 높은 수준으로 고양시켜 주었다고 하겠다.
예이츠는 왜 아직도 많은 독자들과 학자들에게 흥미로울까? 왜 사람들 은 예이츠와 이우환과 사이 톰브리에 매료될까? 예이츠는 모던니스트 시기의 시인인 데도, 이우환과 사이 톰브리는 포스트모더니스 시기의 예술가들인데도? 이 논문은 이 흥미와 매혹의 원천이 무엇인지 알고자한다. 또 이 논문은 데리다를 보면서 그의 디콘 스트럭션-그가 텍스트를 어떻게 생각하고 읽는 지-이 나를 어떻게 작품들(이를테면 이 작품들은, 작가들은 디콘스트럭숀 미학을 알지 못했겠지만, 포스트모던 예술가들 사이 톰블리와 이우환이 만들었고 예이츠의 작품 일부는 디콘스트럭션의 미학으로 만들어 진 작품들이기 때문에)을 잘 읽을 수 있을까를 도울 것으로 생각한다. 또한 이 논문은 젊은 학자들에게 지나치게 나쁜 영향을 미치는 몇몇 저명학자들의 디콘스트럭션의 잘 못된 읽기와 실천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것은 가능하면 빨리 수정되어야 할 방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