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에서는 국내 아스팔트 도로 현장에서 발생한 동절기 도로융기 현상의 발생 원인을 현장 규명하고 동결융해 피해를 보수하고 자 현장조사, 현장 LFWD실험 및 포장 코어채취, 지하수위 측정, 기상데이터 및 설계자료 분석 등을 실시하였다. 본 연구의 동상 원인 분석은 추후 동결융해 피해 재발방지를 위한 적정한 보수보강공법을 선정하기 위해 수행하였다. 분석과정은 지하수위 상승에 의한 동 상피해 가능성, 동결깊이 과소설계에 의한 동결융해 가능성, 포장면 표면수 유입에 의한 동결융해 가능성, 도로 외측 비포장면을 통한 수분유입과 이에 의한 동결융해 가능성으로 조사하여 동상 원인을 파악하였다. 또한 현장에서 소형충격 재하시험 LFWD(Falling Weight Deflctometer)시험을 하여 포장의 구조적 지지력을 측정하여 얻은 처짐값을 통해 포장체 구조적 능력을 분석함과 동시에 도로융기와의 연관성을 파악하여 균열분석 결과를 함께 분석하고 보수방법을 제안하였다.
이 논문은 일제강점기 조선에 세워진 젠코지(善光寺)와 그 불상의 특징을 살핀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일본의 젠코지 아미타삼존상은 백제 성왕이 전해준 일본 최초의 불상이다. 젠 코지 상에 대한 연구는 전근대기 일본의 상황을 중심으로 구미와 일본에서 여러 차례 진행되 었으나, 그 모각상이 일제강점기 조선에도 봉안됐음은 주목되지 않았다. 이는 조선 젠코지와 그 상이 현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일제강점기 조선에 유입된 일본 불교 미술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또한 백제와 일본의 미술사적 교류 사실이 근대기에 어떻게 정치적으로 해석되었는가를 살필 수 있는 사례이기도 하다. 논문에서는 조선에 들어온 젠코 지의 사례로 1916년에 창건된 진해 젠코지와 1942년에 승인된 공주 젠코지를 제시한 후 각각의 특징을 고찰했다. 이를 통해 첫째로 젠코지 상은 조선 내에서 그 내력이 재발견 되었 으며 이에 따라 동일한 상이 모각됨에도 모각 시기와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성격을 갖게 되었음을 확인했다. 둘째로 조선에서 젠코지식 상은 나가노 젠코지의 분신으로 여겨졌으며 상의 모각이 나가노 젠코지의 엄격한 통제 하에서 이루어졌음을 확인했다. 본 논문은 이를 살핌으로써 일제강점기 조선 내 일본 불상의 연구 범위를 확장하고자 했다.
이 글은 현재 군산 동국사 대웅전에 소재한 석가삼존상을 원래의 봉안처인 금산사의 역사 속에서 다루는 한편 그 제작을 맡은 조각승들의 관계를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석가삼존상은 내부에서 발견된 원문에 따르면 1650년에 제작하여 김제 금산사에 봉안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불사에 호연태호와 벽암각성이 재차 함께하였고, 당시 금산사에 머무르 며 경내 불사에 적극적이었던 승려들 및 차조각승 관해와 작업한 이력이 있는 조각승들이 여 러 소임으로 참여하였다. 이는 금산사가 17세기 중반까지도 그 위상을 유지하면서 인적교류 의 장으로 활용되었음을 드러낸다. 수조각승 응매의 조형 의도를 가장 많이 반영했을 석가삼존상은 차조각승 관해 및 관해 관련 조각승의 불상과 닮은 조형 요소를 보여준다. 기록에 따르면 응매와 관해는 각기 다른 조각승을 보조하며 수련기를 보냈고, 차조각승 관해는 본 상을 조성하기 전부터 수조각승을 맡아 회감, 초안 등의 승려들과 작업하였다. 즉 석가삼존상은 조각승 응매의 17세기 중반 교류 및 활동을 추정하는 실마리로 중요하다. 한편 불상은 동국사로 이운 전까지 금산사 대장전에 놓여있었다. 석가삼존상은 원 봉안 전각을 알 수 없지만, 금산사 봉안을 위해 제작된 후 언젠가 대장전에 놓였고, 1922년 대장전과 함께 이건 및 1955년경 동국사로의 이운이라는 복잡한 궤적이 확인된다. 석가삼존상을 금산사와 결부하여 살펴보고 불상을 제작한 상위 조각승들의 관계를 밝히 려는 시도는 금산사 석가삼존상과 그 조각승 응매, 관해를 보다 입체적으로 해석하는 데 도 움이 될 것이다.
본 논문은 백제 사비시대 부여와 익산의 왕실사찰인 정림사지, 제석사지, 그리고 미륵사 지에서 출토된 3점의 塑像에 대한 분석을 통해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백제 미술의 對中交 流 양상을 고찰했다. 구체적으로는 3인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세속 인물상의 자세 및 의복, 그리고 두 보살상의 두발 표현 등을 중국 남북조시대 및 隋唐代 자료와 비교분석하였다. 3인상의 경우, 남북조의 출행도 및 예불도와 유사성이 지적된 바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기존 연구가 남북조시대 출행도에서 나타나는 지역적 차이를 간과했음에 주목했다. 3 인의 자세, 인물 구성, 侍者의 성별과 역할, 그리고 폐슬과 소매가 넓은 포복의 형태 등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실마리로 백제 3인상이 북조가 아닌 남조 문화와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무왕이 건립했다고 전하는 제석사지와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두 점의 보살상 頭部에는 連 弧形 髮際線이 출현한다. 연호형 발제선은 중국에서는 이미 4~5세기부터 출현했지만, 중국 전역으로 보급된 것은 대략 6세기 말부터이며, 그 연원은 장안양식과 관련이 있다. 연호형 발 제선은 삼국에서는 7세기에 비로소 등장하며, 이후 통일기 신라에서 유행한다. 그러므로 백제의 두 사찰 출토 소상에서 출현하는 연호형 발제선은 6세기 말부터 백제가 행한 적극적인 수 당 교류의 결과이자, 백제 미술에 미친 수당대 장안양식의 한 사례로서 주목할 만하다.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의 문수전에는 문수동자상과 문수보살상이 모셔 져 있다. 문수동자상은 1466년에 조성된 불상이며 1984년에 복장유물이 발 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조선 초기의 저고리인 명주 적삼과 무문사 적삼이 포 함되어 있다. 복장유물들은 일괄 보물 제793호로 지정되었는데 저고리의 문 화재명칭은 ‘명주 적삼’과 ‘생명주 적삼’이었다. 그러나 생명주 적삼의 소재 는 무문사이므로 명칭 변경이 필요하다. 1973년 문수보살상을 개금하는 과정에서 회장저고리 한 점이 발견되었 으며, 이 저고리는 1987년에 ‘세조대의 회장저고리’라는 문화재 명칭으로 중 요민속자료 제219호로 지정되었다. 문수보살상은 1661년에 조성되었는데 불상안에서 발견된 회장저고리는 조선 초기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어 저고리 의 원복장 불상은 문수보살상이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문수동자상의 의숙공 주 발원문에 의하면 1466년에 8구의 불보살상(佛菩薩像)과 나한상 등을 조 성하여 문수사에 봉안했다는 내용이 있어 당시 조성되었던 다른 불상의 복장 물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회장저고리가 조선 초기의 저고 리이기는 하나 세조와의 관계가 확실한 것은 아니므로 ‘세조대의 회장저고 리’보다는 ‘회장저고리’로 변경하는 것이 합당하며 출처에 대한 보충 설명 또한 필요하다고 본다.
오대산(五臺山)은 신라시대 자장스님에 의해 중국 오대산으로터 문수신앙 이 도입되어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수신앙의 성지가 되어 왔다. 그 중심에 상원사가 있다. 상원사에는 1466년 조선왕실이 발원한 동자 문수 보살상과 1661년에 의천스님이 발원, 조성한 문수보살상이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1661년 조성된 문수보살상은 진여원의 세 번째 중창된 만들어진 상원 사의 본존불이다. 이 불상이 조성되기 전 이미 상원사에는 동자 문수보살상 과 노(老) 문수보살이 전하고 있었다. 동자 문수보살은 왕실에서 조성한 것이 기 때문에 지금과 달리 특별히 마련된 원당에 봉안되어 있었을 것이고 노 문수보살상은 상원사의 원래 본존으로 봉안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문수보살상이 1599년에서 1661년 사이 인근 보현사로 이안되면서, 새로운 문수보살상이 의천스님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문수보살상이 바로 그 문수보살로 추정된다. 보살상의 제작에는 임진왜란 이후 팔도도총섭 체제로 개편되는 불교의 시스템과 관련이 깊다. 팔도도총섭은 전란으로 피해 를 입은 사찰을 복구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승려장인들을 육성하였고, 이 보 살상을 제작한 승려 역시 도총섭 체제하에서 육성된 승려장인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1661년에 제작된 문수보살상은 如意를 지물로 취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 전 如意는 주로 보현보살의 지물로 등장하지만, 차츰 문수보살상의 지물로도 사용되다 17세기 이후에는 완전히 문수보살의 지물로 채택되고 있다. 따라 서 상원사 문수보살상의 여의는 조선 후기 조각승들이 인식했던 문수보살의 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보살상을 제작한 사람은 신겸과 회감인데, 신겸은 이 시기 대표적인 불화승이고 회감은 조각승이다. 불화승과 조각승의 공조로 불사가 진행되고 있어 당시 불사의 특징을 이해하 는 데 유익한 정보를 담고 있다.
현 상원사 영산전에 봉안되어 있는 석가삼존과 16나한상은 재질이 소조와 목조로 나뉜다. 소조상은 1711년 이전에 제작된 상으로, 조선전기로 올라가 는 양식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소조상들은 조성시에는 흙으로 성형한 후에 그 위에 채색하여 제작하였으 며, 보존처리를 통해 본래의 모습이 회복되면 조성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 을 것이다. 소조상은 상체가 길고 무릎이 낮은 신체비례로 영주 흑석사 아미타불상 (1452년)이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주사 아미타불상(1482년) 등 조선전기 불상과 유사하며, 갸름한 얼굴과 긴 코, 작은 입의 표현에서 조선전기 불상 양식을 공유하고 있다. 소조상의 착의법은 여래상과 비슷한 착의법을 하였다. 가슴이 크게 벌어 지게 표현된 점, 오른쪽 어깨에 반달형으로 걸치면서 왼쪽 어깨로 넘긴 자락 이 유려하게 흐르는 듯한 옷주름을 만든 것과, 무릎 아래에서 발목으로 모아 지는 옷주름, 특히 제석천상에서 보이는 영락 장식 등이 조선전기 불상 양식 과 상통하므로, 착의법을 통해서도 이 소조상이 조선전기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국보 동자문수보살상과 보물 문수보살상 사이 에 3존의 목조 동자입상 3존 배치되어 있다. 중앙에 배치된 동자상이 상원사 목선재동자입상(이하 상원사상)이다. 상원사상은 선재동자이며, 동자문수보 살상의 협시로 추정된다. 상원사상은 고려・조선 초의 수월관음도 및 관음보살상과 결합된 선재동 자상의 도상을 따르고 있고, 1466년에 제작된 동자문수보살좌상과 동일한 양식이다. 선재동자상은 『화엄경』 「입법계품」의 배경으로, 8-9세기 당대 오 대산 기사문수・기상보현보살상의 협시로 등장한다. 선재동자상은 선재동자 구법도의 유행과 더불어 요와 북송대에 수월관음상의 협시로 등장하고, 오대 산 문수신앙의 발전으로 문수보살의 협시로 정착하였다. 중국과 일본에은 문 수보살상의 협시상으로 여러 사례가 전해지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알려진 바 가 없다. 상원사상은 동자문수보살좌상의 우협시에 배치되고, 2존의 동자상 은 목문수보살좌상의 좌우협시일 가능성이 높다. 2존의 동자상는 문수보살 상의 발원문에 등장하는 남순동자와 선재동자로 추정된다. 상원사상은 문수보살상의 협시로 조합을 이룬 첫사례이자 최고의 작품이 며, 왕실에서 발원하여 당대 최고의 작가에 의해 제작된 예술성이 뛰어난 작 품으로 조성 연대가 추론되는 기년작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선재동자상 은 오대산 신앙에서 등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환상록』은 신화에 바탕을 둔 예이츠의 상상적 사상 체계를 집대성한 책으로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사상적 골격을 제공해 준다. 본 논문의 목적은 『환상록』에 나타나는 역사적 상상력을 예이츠가 말년에 발표한 조각상과 불벤산 기슭 에서 어떻게 투영되어 나타나고 있는가를 고찰하는 데 있다. 조각상 에서는 예이츠가 세 개의 조각상을 통해 궁극적으로 아일랜드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해 켈트 신화에서 시작한 그의 신화적 상상력이 신화의 순환구조처럼 아일랜드로 회귀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불벤산 기슭에서는 아일랜드 민족의 재건이 과거의 이상적 모형을 현실에 재현하는 것으로서, 예이츠는 문화와 예술의 우월성이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예술가의 역사적 사명을 중시하고 있다.
法華寺十一面觀音菩薩像은 높이 100cm의 입상으로 한그루 의 비자나무(榧)로 된 9세기 檀像풍의 일목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본 상에서 특징적인 것은 얇은 동판을 잘라서 鬢髮과 垂髮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같이 표현된 점인데, 마치 이와 대 응하는 것처럼 바람에 펄럭이며 뒤집힌 천의의 끝단 표현도 훌륭한 조각 기법으로 완성되어 주목된다. 이와 같은 이른바 風動表現에 관해서는 중국 당대 화가 吳道玄의 화풍을 답습 한 결과라고 한 井上正의 견해가 정착되었다. 그런데 본 상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光明皇后연고인 東大 寺아미타당에 안치된 檀像十一面觀音像(현존하지 않음), 혹 은 紫微中臺十一面悔過所의 畵像本尊(현존하지 않음)의 模刻 이라고 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원래 光明皇后의 십일면관음 신앙은 아미타신앙과 결합한 신앙으로, 8세기에 제작된 東大 寺아미타당상이나 紫微中臺畵像本尊도 황후의 아미타신앙 과 밀접하게 관련하고 있으며 陀羅尼集經에서 말하는 阿彌 陀佛輪印法과 같은 수행법인 同經에 게재된 掐數珠印제11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法華寺 像에서 보이는 吳道玄풍의 풍동표현이나 未開敷蓮華등을 조 형화 한 광배는, 아마타불의 극락정토에 서있는 십일면관음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생각되는데, 光明皇后에 얽힌 설 화에 물든 法華寺像도 황후의 십일면관음신앙의 계보를 잇는 상으로 원래는 法華寺아미타정토원 금당에 모셨다고 하는 선행연구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法華寺像의 풍동표현 이나 광배 장식은 光明皇后의 십일면관음신앙의 성격을 전해 주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특수한 표현은 紫微中 臺畵像本尊등에서 이미 채용된 표현을 法華寺像이 답습한 결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예전부터 추정된 것처럼 法華寺像 은 여전히 光明皇后연고의 십일면관음상의 모각이었을 개연 성이 높다.
본 논문은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조각 작품 <14살의 어린 무희 Little Dancer Aged Fourteen>(1881)에 대한 연구이다. <14살의 어린 무희>는 그녀의 정체성을 매춘부로 드러냈으며, 이에 제6회 인상파전에서 발표되었을 당시 엄청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드가가 <14살의 어린 무희>의 정체성을 매춘부로 드러내기 위해 적용했던 이론은 당시 유행했던 발레-팬터마임과 관상학이었으며, 이 두 이론을 적 용했던 이유는 둘 다 인간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14살의 어린 무희>의 발레-팬터마임에서 차용된 오만함의 자세는 오페라를 찾은 부르주아 남성들과 은밀한 관계를 맺었던 어린 무용수의 부정적 이미지를 함축하여 암시했고, 관상학에서 범죄자나 매춘부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으로 정의한 악덕 관상을 어린 무희의 얼굴에 새김으로써 무용수라는 직업 이면의 매춘을 상상하도록 했다. 예술작품 안에서 다양한 형태의 무용수 묘사는 고대에서부터 지속되어 왔지만, 근대 하층 노동자 계급의 표상인 파리 무용수의 조각적 형태의 매우 사실적인 재현은 드가의 <14살의 어린 무희>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14살의 어린 무희>는 매춘부라는 주제를 당시의 사회 문화적 담론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전통적 미술의 기준에 도전했다. 결국 드가의 <14살의 어린 무희>는 근대 생활의 양상과 그 시대의 이슈를 드러냈던 것 이었다.
본 연구는 농수산물의 원산지 표시법에 관한 법률에 따른 음식점의 원산지 표시관리 실태를 조사하기 위해 수행되었다. 이를 위해 개인 음식점 및 프랜차이즈 업체들을 선발하여 원산지 표시관리 실태를 조 사하였으며, 원산지 관리미흡 사례를 도출하였다. 조사된 전체 표시관리 미흡 사례는 농수산물의 원산 지 표시에 관한 법률 및 농림축산식품부 고시 원산지 표시요령에 정의된 관리미흡 유형에 따라 각각 국 가명 표시오류 38.4%, 함량순서에 따른 표시오류 28.0%, 원산지 일부 미표시 11.2%, 원산지 표시판 미 게시 15.2%, 증빙서류 미보관 7.2%으로 구분되었다. 이들을 다시 프랜차이즈와 개인 음식점으로 구분 할 경우 프랜차이즈에서 개인 음식점과 구분되는 특징적인 유형별 발생비율을 보였다. 이에 따라 프랜 차이즈의 표시관리 미흡 유형별로 그 발생 원인을 탐색한 결과 프랜차이즈 운영시스템에서 기인된 몇 가지 특이적인 원인들을 도출할 수 있었다. 이를 근거로 프랜차이즈 업체의 효율적 원산지 표시관리를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Five years Diaosheng statue has a sentence called because Diaosheng gave shao Jiang five silk scarfs and a pair of pots. It has always been a variety of interpretations. This paper thinks, Yi(以) word is a preposition. Shuai(帥) word can be interpreted a Silk scarf. The sentence can be explained because Diaosheng gave shao Jiang five silk scarfs and a pair of pots.
It is a true fact that the ancient Buddhist temples of Korea were great, important historical influence revealing the transition and developing stages of all the BUddhist temples in Eastern Asia including China and Japan. Before Mahayana arose within India, the monastery and pagoda were united during the conflict and development of the original Buddhism and pagoda faith. With the arising of Mahayana and the introduction of Buddhist statues, the Buddhist temple and pagoda were in conflict and resulted in separation. With the creation and development of the Mahayana Bodhisattva concept, Hinayana and Mahayana started to show doctrine differences and expressed each others' characteristics relevant to the structure of the temple. As a result, the Buddhist Temple having 1 pagoda spread in China together with Hinayana and Mahayana. The Buddhist temple of Hinayana had its temple and pagoda separated and the Buddhist temple that has a pagoda in front was divided into a form of 1 pagoda and 1 main temple. The temple and pagoda for Mahayana in the form of 1 pagoda and 2 temple, where the main statue of the Buddha may be worshipped from both the left and right hand sides, were separated in the form of 1 pagoda and 3 temples to have its original form again. Mahayana was first introduced into Goguryeo through the routes in the northern region and developed from having 1 pagoda and 2 temples, to having 1 pagoda and 3 temples. China was influenced by the southern regions, which is why Abhidharma was introduced into Baekje. Later on, the importance of Bodhisattva increased and the transition speed of the Buddhist temple having 1 pagoda and 3 temples accelerated, as Buddhism became more popular and as Mahayana flourished. The statue of the Buddha on both sides of the pagoda shall gradually move next to the central temple , and the temple shall form large crowds to not only form a tacit boundary with the pagoda but the expansion of Bodhisattva shall also have a wall or a corridor constructed in between the central, left and right hand side temples to form separate areas, and shall have a pagoda built in front of the temples that worship from both sides. In conclusion, independence shall exist among each Bodhisattva within the Buddhist temple, and the status of the pagoda shall fall and appear as the pagoda on both sides in front of the main Buddha statue.
There are more than 9,300 bridges on the highway, of which about 34%(3,150) are PSCI bridges. The safety of these bridges is directly influenced by the tensile strength of the internal tendons(strand) and the strength of the concrete compared to the reinforcing bars from the design viewpoint. Therefore, in this paper, for the maintenance plan considering the damage of the internal tendons, the internal tendon cutting and truck loading test was conducted and deflection and appearance status change was analyzed. As a result of the test, deflection increased and flexural cracks occurred on center of the girder. And longitudinal direction cracks followed tendon placement occurred on a bottom flange.
진양하씨 滄洲 河憕家門은 진주의 전형적인 토반 사족가문으로서 17세기 초 반까지는 남명학파의 핵심으로 활동했고, 그 후 양송을 통해 畿湖學을 수용하면 서부터는 강우 서인[노론]세력으로 구심점으로 기능해 왔으며, 그런 흐름은 한 말까지 지속되었다. 북인 남명학파에서 서인 기호학파로의 전향은 인조반정 이 후 江右 지역을 덮친 정치사회적 격랑을 헤쳐나가는 과정에서 모색된 것이었다. 따라서 17세기 중엽 이후 滄洲家의 사회적 활동은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라는 정치적 판도 위에서 설정될 수 밖에 없었고, 이에 따른 제약도 작지 않았지만 이들은 현조 滄洲 河憕(1563-1624)에 대한 각종 추양사업을 추진하며 문호의 기반을 확충함은 물론 지역 노론세력 및 중앙의 노론계 관료들과 연대하여 강 우지역 노론계 공론을 결집시키는 데에도 부심하였다. 하증의 6세손 河鎭兌에 대한 孝子旌閭運動이 강우 지역 노론계의 대대적인 지원 속에 추진되고, 또 갖 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무려 100에 걸쳐 공론이 유지되어 마침내 정려를 하사받 을 수 있었던 것도 강우지역 노론사회에서 지니는 창주가의 위상에서 기인하는 면이 컸다. 사환권에서 철저히 벗어나 있었던 창주가가 재지사족으로서의 기반을 확고하 게 유지할 수 있었던 또 다른 배경은 풍부한 경제력에 있었다. 18세기 초반에 기준할 때, 창주가는 1,000斗落에 육박하는 전답과 100구에 달하는 노비를 소 유하고 있었음이 분재기를 통해 확인되고 있으며, 시기가 지날수록 경제 규모 는 확대되어 가는 추세에 있었다. 이러한 경제력은 단순히 문호의 유지 차원을 넘어 창주가의 인사들이 학문에 힘쓰며 지역의 사론을 주도해나가가는 바탕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글은 시론적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지만 강우지역 사족가문의 존재양태를 고문서를 통해 규명하려 했다는 점에서 전혀 무의미한 작업은 아닐 것이며, 남 명학파 연구로 대표되는 사상사적 분석의 사각지대를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도 일정한 의의가 있을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