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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1.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이미 알려진 󰡔한고관외사󰡕의 일실된 작품들과 그 존재를 재검토한 것 이다. 그 결과는 첫째 이제까지 하버드대학 소장본과 장서각 소장본을 비교해 서 모두 8책 자료가 일실된 것으로 파악되었지만 실제로 일실된 자료는 「이씨 서정록」[제4책], 「병진정사록」・「필원잡기」[제5책], 「필원잡기」・「소문쇄록」 [제6책] 및 「동각잡기」[제16책] 뿐임이 확인되었다는 것이고, 둘째 현재 일실 된 자료 중, 「이씨서정록」은 총2권이므로 󰡔한고관외사󰡕권7,권8(제4책)에 수록 되었고 저자는 李蕆이며, 「병진정사록」은 총1권이므로 󰡔한고관외사󰡕권9(제5 책)에 수록되었고 저자는 李穆이며, 「소성기축록」은 李壽慶의 저작임을 밝혀내 게 되었다는 것이고, 셋째 일실여부와 관계없이󰡔한고관외사󰡕 개별 작품의 필사 연도를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자료 수집면에서 완본을 찾으면 바로 기록하는 김려의 대단한 열정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런 자료들을 초두에서 말미까지 그대로 보충해 넣음으로 써 󰡔한고관외사󰡕의 신뢰도를 높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의 제후문이 당색을 완전히 탈피하여 객관적인 측면에서 작성되었다는 의미는 아 니다. 정치적으로 그는 엄연히 노론학자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를 더 높이 평가하고 싶은 것은 당색이 다르고 정치적 시각이 다름으로 해서 비판 의 대상은 삼았을지언정 결코 자료 폐기를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과적으로 그가 완본을 소개하려 애쓰고 거기에 비평문까지 수록하였음이 단순히 야사 수집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비판은 할지언정 왜곡하지 않는다는 기록자의 자세를 보여주며 실천한 인물임을 알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에 한고관외사의 일실 자료를 바로 잡는 작업이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질 것 이다.
        1982.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遺逸은 16세기 조선조 사대부문학의 작자층 가운데에서 학덕이나 재능을 지 녀 朝官이 될 자질을 갖추고도 벼슬하지 않고 재야에 은거하는 未入仕者를 말 한다. 士禍라는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근거지로 은거한 이들은 현실 을 외면하지 않고 끊임없는 학문연구와 심성수양을 통해 온전한 인격을 추구하 였으며, 향촌을 교화하고 도학을 전파하는 등 경색된 현실에도 굴하지 않고 士 로서의 정체성 확립에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사회적 비중과 신망이 조 정에서 벼슬하는 관료보다 더 높아져, 조정에서는 이들을 예우하여 徵召하였다. 곧 遺逸은 출사하지 않으면서도 지방에서 백성의 신망이 두텁던 당대 碩儒들로 서, 우리 역사상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갖는 시대적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삶의 터전은 산수자연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은거지에 대한 애정이 남 달랐고, 은거지 주변의 명산과 절경을 유람하는 것으로 이를 표출하였다. 유람 에서 만나는 자연경물에 자신의 심정을 붙여 술회하였는데, 그들에게 있어 산 수자연은 ‘본래 그러한 것, 본래 그러한 모습으로 존재했던 것’으로만 인식되지 않았다. 특히 16세기 조선조는 성리학 연구의 심화가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이 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자 성리학자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 산수자연은 당대의 不正한 현실을 인식하는 자신의 의식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특히 은거지 중심의 유람에서 표출되는 산수자연은 현실에서의 좌절을 수양으로 승화시키는 지식인의 의식세계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예컨대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성리학자였던 만큼 자연경물을 통해 현실의 不 正 및 민생고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였고, 역사유적지를 접하면 그 시대를 회고 하고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현실을 반성하는 계기로 삼았다. 무엇보다 물러나 있지만 자아를 각성하고 심성수양에 진력했던 이들에게 산수자연은 士意識을 고취하는 매개로 작용하였다. 곧 당대 관료세계에 피동적으로 편입되기를 거부 하고 물러났던 조선조 士人의 의식을 산수자연으로 표출하였던 것이다.
        1983.
        2007.04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동북아는 최근에 중국의 급격한 경제성장에 따라 세계 경제발전의 성장축으로 물류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아시안하이웨이, 대륙횡단철도 등 동북아 역내 교통 인프라를 증진시키고, 운송수단의 다각화를 모색함으로써 경제의 부흥과 정치적 안정, 국가간의 배타적인 부분을 완화하여 NAFTA, EU에 대항하는 하나의 경제 블럭을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사업의 기종점을 부산이 아닌 일본으로 연장하려는 노력으로 한일간 해저터널이 거론되고 있으나 아직 구체화된 수준은 아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 한일간 해저터널에 대해 그간 논의된 내용을 정리 요약하고, 경로분석을 통해 건설 전후의 철도와 해상수송수단의 소요시간 및 소요비용을 분석 비교해 향후 동북아와 한국에 미치는 영향분석을 시도하였다. 이 결과는 앞으로의 한일 해저터널에 대한 연구에 촉진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분석결과 해저터널 건설 가정 시 소요시간과 비용측면에서는 효용이 있는 것으로 도출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동북아차원, 국가 균형발전차원, 부산 지역경제차원, 부산 해상물류차원에서 그 효과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1984.
        2007.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교육에 직접 참여하는 학생과 교사 그리고 교육을 지원하는 학부모, 교육 연구자, 교육의 결과를 활용하는 직업인, 기업가, 정치가 등 모든 국민들은 보다 나은 현재와 미래를 위해 학교 교육이 지속적으로 개선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학교 교육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는 교육 개선 혹은 개혁(또는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사회적 이슈는 정부의 학교 교육과정 개정 작업에 영향을 준다. 참여 정부는 교육 혁신을 위해 초․중등학교의 교육과정 개정을 결정하고, 2005년 3월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교육과정 개정 시안 개발을 요청하는 것으로 2007 교육과정 개편 작업을 공식적으로 시작하였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은 교육인적자원부의 요청에 따라 2006년 12월에 2007 교육과정시안을 완성하였다. 교육인적자원부는 이 시안을 기초로 교육과정심의회를 거쳐 2007년 2월 23일에 교육인적자원부 최종안을 공표하였다. 교육인적자원부는 2007 교육과정에 따른 교과서를 개발하여 다음과 같이 연차적으로 학교 현장에 새로운 교육과정을 적용한다고 발표하였다(교육인적자원부 보도자료, 2007. 2. 23). 2009년 3월에 초등학교 1, 2학년부터 적용하여, 2010년에 초등학교 3, 4학년과 중학교 1학년, 2011년에 초등학교 5, 6학년과 중학교 2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 2012년에 중학교 3학년과 고등학교 2학년, 2013년에 고등학교 3학년에 적용된다. 앞으로 2007 교육과정에 따라 교과서 개발 계획을 세우고, 교과서 개발자를 선정하여야 하며, 교과서 검정 심사 기준을 결정하고 우수한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 또한 바뀐 내용이 수업에서 충실히 구현될 수 있도록 교사 양성과 연수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하여야 하며, 교사들은 수업 현장에서 새로운 철학과 내용이 충실히 구현될 수 있도록 새로운 교재와 교수 방법 연구를 해야 할 것이다. 교육과정이 새롭게 공표된 이후에는 이 교육과정의 학교 현장 구현에 관심을 두는 것이 마땅하지만 동시에 또 다른 과업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한 번 결정된 교육과정 그 자체는 무엇이 좋은 교육과정인가에 대하여 끊임없이 변모하는 우리들의 생각에 따라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하며(곽병선, 1991, 139), 교육과정 개정 과정에 관련된 연구와 절차에 대해서는 철저한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석문주, 2003, 212). 교육과정은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따라 보완되고 수정될 수밖에 없으며, 그것 자체에 대해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고 검증이 요구되고 있다. 이 연구는 2007 교육과정 개발 방법의 적합성을 탐색하는 데 목적이 있다. 개발 방법의 적합성은 선행 연구에서 나타나는 교육과정 개발 참여자와 절차의 이론에 근거하여 민주적 합의 방식에 따르는지를 분석해 보는 것이다. 이 연구는 2007 고등학교 선택중심 교육과정 중 음악과(이후, 2007 선택 음악과 교육과정)에 한정하여 분석한다. 연구의 내용은 2007 선택 음악과 교육과정에 참여자 그리고 협의회와 세미나 그리고 심의회 개최 과정 등에 대하여 교육과정 개정의 일반 이론에 근거한 적합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개발 방법의 적합성은 교육과정에 대한 일반 이론과 음악과 교육과정 개발 방법을 연구한 석문주(2003), 양종모(2005) 등의 이론에 근거하여 분석한다. 2007 선택 음악과 교육과정 개발 시안에 대한 자료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 보고서 2종을 활용한다.
        1985.
        2007.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일반사회 영역 선택 교육과정은 과목 수는 현행과 마찬가지로 4과목을 유지하였으며, 이수단위는 6단위로 통일 조정되어 법과 사회, 경제는 현행과 동일하게 6단위, 정치, 사회․문화가 현행 8단위에서 6단위로 조정되었다. 또한 교과 내용의 양 및 질의 적정화, 교육과정의 대강화, 국가․사회적 요구 반영, 학생들의 흥미․적성․진로를 고려하여 교육과정 내용 체계를 구성하되 기본적으로 수시·부분 개정의 취지에 맞추며 과목의 특성에 따라 개정의 범위와 수준을 자율적으로 정하였다. 이러한 기본 방향을 중심으로 일반사회 영역은 법과 사회, 정치, 경제, 사회문화를 중심으로 선택 교육과정 개정 연구를 진행하였다. 본 논문의 내용은 한국교육과정 평가원에서 2006년 발행한 『고등학교 사회과 선택중심 교육과정 개선방안 연구』와 『사회과(지리․일반사회) 선택과목 교육과정 개정시안 연구개발』의 내용을 재구성하였다.
        1986.
        2007.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국가 교육과정의 변화는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과 관련되는 모든 영역에서 이전과 달라진 모든 것을 지칭한다. 따라서 교육과정의 개정, 수정 및 보완, 개선, 개혁을 포괄한다. 2007년 2월 교육인적자원부는 2009년부터 학교교육에 적용될 개정 도덕과 교육과정(문서번호 제2007-79호)을 고시하였다. 이번 도덕과 교육과정은 제7차 도덕과 교육과정을 수정․보완한 것으로서 교육과정 개정체제가 부분․상시 개정체제로 전환된 후 처음으로 이루어진 개정이다. 이번 도덕과 교육과정 개정은 부분 개정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변화의 폭과 내용을 고려할 때 실제로는 전면 개정에 가깝다. 따라서 제7차 교육과정과 비교해볼 때 도덕과의 성격, 목표, 내용, 교수․학습방법, 평가 면에서 많은 변화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가치관계 확장에 근거한 내용 구성은 급격한 사회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윤리적 문제들에 대응하여 주제중심의 도덕교육 접근이 가능하도록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도덕교육의 적실성과 사회적 적용력을 제고하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변화로 평가할 수 있다. 이번 도덕과 교육과정 개정은 사회변화에 따른 새로운 윤리적 문제들에 대응하기 위한 국가․사회적 요구, 새로운 윤리학적 지식의 대두, 학습자의 성장과 발달, 학습이론의 변화,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교수․학습의 변화를 수용하고 있다. 이는 교육과정 설계 시 토대가 되는 사회적 영향, 지식의 처리, 학습자의 성장과 발달, 학습이론, 그리고 과학기술에서 일어난 변화들에 대한 시기적절한 대응이다.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도덕과 교육의 정체성 확립, 사회변화에 부응하는 새로운 가치, 규범, 도덕적 쟁점들 강조, 도덕적 탐구의 강화, 학교급별 도덕과 교육의 차별화가 강조되고 있다. 이번 도덕과 교육과정 개정에서 주목할 점은 개정 과정의 절차이다. 먼저,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중심으로 7개 도덕과 교육 관련 학회 및 단체와 한국철학계가 ‘도덕과 교육과정 연구 공동체’를 구성하고, 공동탐구과정을 통해 교육과정 개정 시안을 개발하였다. 그리고 개정 시안에 대한 초․중․고 현장 교사들의 현장 적합성 검토 의견을 수렴하여 개정시안을 수정․보완한 개정 교육과정을 산출하였다. 이러한 개발 방식은 교육과정 개발의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민주주의 정신을 구체화한 참여식 교육과정 개발 사례이다. 다시 말해, 개정 도덕과 교육과정은 가치 및 이념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우리의 사회현실에서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라는 의미가 있다. 개정 도덕과 교육과정의 이러한 변화에는 도덕교육의 질적 향상의 가능성과 함께 도덕 교과서 검정화와 맞물려 있는 정치사회적 갈등의 위험성이 함께 내포되어 있다. 중등의 경우 교과서 발행제도가 검정제로 전환되면, 다양한 교과서의 출현으로 인한 학습자의 욕구 충족도 제고와 함께 교과서와 교육과정의 불일치 문제, 교과서 기술의 편향성 등 가치 및 이념 갈등이 초래될 가능성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합의과정을 거쳐 이념적, 정치사회적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는 내용 기준안을 구성함으로써 교과서 내용이 교육과정의 정신을 올바로 구현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1987.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일본 시마네현(島根縣)은 2005년에 2월 22일을 <다케시마(竹島)의 날>로 제정했다. 이 날은 1905년에 <시마네현 제 40호>의 고시를 통해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고 하여 자국의 영토로 정한 100주년에 해당하는 날이다. 그것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서 <독도의 날> 제정 움직임이 있었고, 경상북도는 10월을 <독도의 달>로 정하였다. 그것은 대한제국은 1900년 10월 25일에 <칙령 제41호>를 통해 울릉도에 석도(石島), 즉 독도(獨島)를 편입한 날을 환기시키고자 하는 의도이다. 한일국교 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 때 우리 측의 협상당사자는 김종필(당시 중앙정부부장)이었다. 그는 1962년 11월13일 회담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면서 기자들에게 “농담으로는 독도에서 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갈매기 똥도 없으니 폭파해 버리자고 말한 일이 있다.”고 스스로 밝혔다고 한다. 다케시마의 날 제정이 있던 작년에 한일회담 관련 문서가 공개되었을 때 우리나라 언론은 독도 폭파 망언의 진원지가 당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일본 측 대표단의 일원인 이세키 유지로 (외무성 아세아국장)가 회담 중에 제기한 것이라고 대서특필하였다. 이세키 국장이 제6차 한일회담 제2차 정치회담 예비절충 4차 회의 (1962년 9월3일)에서 "독도는 무가치한 섬이다. 크기는 히비야 공원(日比谷公園) 정도인데 폭발이라도 해서 없애버리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언론에서 이것을 다투어 보도하였지만, 김종필도 귀국길에 그렇게 말했다고 하니 그게 뭐 대수라고 호들갑을 떠는가 싶었다. 정작 볼 것은 보지 못하면서! 정작 이번 한일회담의 문서 공개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1962년 2월 22일 회담 때 독도에 관한 언급이 일본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날 일본의 고사카(小阪) 외상은“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고 한국 측이 이에 응소할 것을 바란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김종필은 “하찮은 섬 문제를 일본이 심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일본의 희망을 박 의장(朴正熙議長)에게 전달하겠다.”고 했었다. 일본이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자는 제안을, 시마네현 고시 의해 독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시킨 날을 기해 제기했다는 사실을 왜 우리는 주목하지 못할까? 일본은 작심하고 그것을 제기하였는데도 말이다. 당시 김종필이나 회담에 임하는 우리나라 대표들이 이 날이 어떤 날이었는가를 기억한 사람이 있었을까? 기억하지 못했기 때문에 김종필은 <하찮은 섬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가 버렸을 것이다. 한일회담 비밀문서가 공개된 그 시점은 일본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으로 인해 연일 언론에서 독도 문제를 다투어 다루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 나 우리나라 언론은 한일회담 기사를 다루면서 2월 22일이 일본이 독도를 불법적으로 자국의 영토로 확정한 날, 그리고 <다케시마의 날>이 라는 점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냥 독도 폭파를 누가 제기한 것인가에만 관심을 갖고 호들갑을 떨었다. 10월 25일은 <독도>를 우리나라 땅이라고 국내외에 천명한 날이다. 독도를 논할 때 울릉도 개척령을 공포한 1883년은 아주 의미 있는 해 이고, 그보다 더 중요한 시점은 대한제국이 1900년 10월 25일에 <칙령 제41호>를 통해 독도를 울릉도의 관할구역으로 확정한 날이다. 1883년 개척령 공포 이전의 독도와 울릉도는 공도정책(空島政策)에 의해 빈 섬, 버려진 땅이었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독도 자료를 들여다 보면 공도정책이란 잘못된 용어이다. 쇄출(刷出), 혹은 수토정책(搜討政策) 이라고 하여야 한다. 1883년 이전의 쇄출, 혹은 수토정책에 관한 자료 의 검토를 통해 독도 ․ 울릉도에 들어간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내법 위반자인데 반해, 일본인들은 <월경죄인(越境罪人)>으로서 국제법 위반 자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나아가 1883년 개척령 공포로부터 1900년의 칙령 제41호 반포에 이르기까지의 독도 자료의 검토를 통해 울릉도와 독도에서 삶의 터전을 일구어 나간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내적으로도,국제적으로도 합법적 활동을 한 것임에 반해 일본인의 활동은 국제법 을 위반한 것이었음을 천명하고자 한다.
        1988.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일본의 역사인식이 국제사회에서 처음으로 문제된 것은 1982년이었다.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대해 검정을 강화하려는 문부과학성(文部科學省)의 태도로 야기된 편향된 교과서 서술을 한국과 중국 등에서 강력히 반발한 것이다. 그해 일본 정부는 사태를 마무리하는 차원에서 스스로 ‘근린 제국 조항’을 검정기준에 새로 추가하겠다고 발표하였다. 1986년 우익적인 일본사 교과서가 문제된 적이 있지만, 국제사회는 20세기가 끝나는 시점까지 일본의 역사교과서에 대해 크게 문제를 제기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자마자부터 일본 역사교과서의 편향된 서술로 인해 4년 주기로 갈등이 일어나고 있다. 2006년에는 일본 문부과 학성의 검정 지도로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독도를 자신의 영토로 표기한 내용이 문제되어 한·일 간에 외교적 갈등이 고조된 적이 있었다. 21세기 들어 일어나고 있는 일본 역사교과서 문제는 1982년, 1986년 의 교과서 파동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역사인식문제만이 아니라 독도 문제 등 영토문제에 관한 서술이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2006년도 고등학교 교과서의 내용에 대한 한국의 반발은 전적으로 독도를 자신의 영토로 명기하도록 한 일본 정부의 정책 때문 이었다. 본 발표문은 시간의 순서를 따라 일본의 역사, 지리, 공민, 현대사회, 정치경제 등의 교과서에서 독도에 관한 기술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 를 정리하는데 1차적인 목적을 두겠다. 21세기 동아시아 정세를 반영 한 결과이겠지만, 최근에만 이에 관한 논문이 두 편이나 발표되었다. 1) 현대송이 2005년도 중학교 검정 통과본에서의 독도 기술문제를 주로 다루었다면, 손용택은 자신이 볼 수 있는 한도 내에서의 고등학교 지 리, 지리부도, 정치경제, 역사 교과서와 중학교 역사, 지리 교과서 수십 종을 검토하였다. 현대송은 한국인의 독도 인식과 일본 교과서에서 독도기술문제에 대해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2000년과 2001년도 교과서 검정에 관해 언급하지 못하고 있고, 손용택은 그렇게 많은 교과서를 분석대상으로 하면서도 정작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언급한 교과서, 특히 중고교의 역사교과서를 검토하지 않는 잘못을 범하였다. 동시에 두 논문은 자료의 제약 때문이었겠지만, 2006년도 검정내용에 대해서도 검토하지 않았다. 발표문에서는 21세기 들어 뚜렷한 경향을 보이고 있는 교과서에서의 독도 서술이 연도별 교과서 검정에 따라 어떻게 바뀌어 왔는지를 정리하고, 그 정치적 함의도 되새겨 보겠다. 이를 위해서는 선행연구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교사용 지도서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한국 사회의 대응방식에 대해서도 새로운 언급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교과서에서의 독도 서술과 영토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관해 나름대로 의견을 제시해 보겠다.
        1990.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국내에서 산출하는 사문석은 산업원료자원으로 활용되는 있는 주요한 원료광물 중 하나이다. 국내 사문암은 초염기성암의 열수변질산물로 해석되어 왔으며, 울산 철광상지역, 경북 안동지역, 충남홍성-청양지역 및 경기 가평지역에서 산출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울산 철광상 일대에 분포하는 사문암에 대해 주로 야외에서의 산출상태, 광물학적 연구 및 화학성분분석을 통하여 석회암, 철광화작용 및 사문석변질작용의 관련성에 대한 해석이 시도되었다. 울산지역 사문암은 초염기성암인 페리도 타이트를 구성하는 감람석이나 휘석의 수화작용에 의해 사문석을 형성시키고, 이 사문석이 다시 변질되어 활석을 형성시킨다. 이러한 변질을 초래시키는 열수유체는 백악기 화강암 관입에 의해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으며, 천수의 혼화에 의해 보다 많은 양의 유체가 공급된 열수순환계에 의해 열수변질작용을 초래 시킨 것으로 해석된다. 변질암들의 SiO2, Fe2O3, MgO 등 일부 주성분원소의 변화는 사문석화작용, 활석화작용 및 철광화작용의 변질세기에 주로 지배되고 있다. 그러나 Al2O3와 CaO의 함량범위는 변질되지 않고 잔존된 방해석 및 각섬석이나 변질광물인 녹니석 등 광물의 함량비에 더욱 더 지배된다. 탄산염암의 존재는 해성퇴적기원(천해성 석회암)이든 화성기원(카보너타이트)이든 간에 스카른형 철광상을 형성시킬 수 있는 지질학적인 환경을 제공 한 것으로 보인다. 지질 및 구성 광물의 공생관계로 보아 탄산염암의 형성→백악기 화강암 정치→사문석변질작용 → 철광화작용의 순으로 형성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1991.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曹植은 退溪 李滉과 더불어 朝鮮時代 학계의 양대산맥이다. 그는 일생 동안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독서와 講學으로 일생을 보냈다. 그는 실천위주의 선비였고, 이런 학풍을 제자들에게 전수하였다. 이로 인하여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南冥의 제자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義兵을 일으켜 나라 를 위해 싸워 나라를 구출해 내었다. 이런 공훈으로 인하여 宣祖의 신임을 받아 조정에 발탁되게 되었고, 光海朝에는 大北政權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너 무 자신들 위주로 정치를 해 나가고 반대당을 철저하게 배척한 관계로 1623년 仁祖反正을 맞게 되어 몰락하게 되었다. 大北派는 대부분 처형되거나 유배 당 하였고, 南冥學派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仁祖反正 이후 새로 결성된 南人들은, 본래의 南人에다 인조반정으로 인하여 몰락한 北人일부가 새로 편입한 것이다. 이들 남인은, 서울 경기지역에 기반을 두고서 西人들과 연합정권을 형성하여 官職에도 나갔으므로 嶺南南人을 포함 한 전체 南人을 주도하였고, 많은 학자 문인들이 나왔다. 이들을 특별히 近畿南 人學派라 일컫는다. 이들은 退溪學派의 한 갈래로서 寒岡 鄭逑의 제자인 眉叟 許穆을 통해서 近畿 地域에 退溪學脈을 전파시켰다. 이들은 줄곧 嶺南에 근거를 둔 南人들과 활발 하게 교류를 했다. 이 近畿南人學者들의 대표라 할 수 있는 龍洲 趙絅, 眉叟 許穆, 星湖 李瀷, 順 菴 安鼎福, 樊巖 蔡濟恭, 性齋 許傳 등이 近畿南人學派의 學統을 이어왔다. 이들 은 退溪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켜 實學과 접목시켜 독특한 학문을 형성하였다. 이들 近畿南人학자들은, 仁祖反正 이후, 西人들의 의도적인 집요한 南冥 貶下 의 상황에서, 南冥을 옹호하고 南冥의 位相을 높이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해 왔 다. 그들은 비록 南冥을 尊崇하는 정도가 退溪에게는 미치지 못했지만, 南冥學 이 명맥을 유지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英祖朝의 星 湖 李瀷, 正祖朝의 樊巖 蔡濟恭과 朝鮮末期의 性齋 許傳 등은 南冥의 位相을 提 高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오늘날 南冥學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이 세 분의 학자가 노력한 것에 힘입은 바 크다.
        1992.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주지하다시피 남명 몰후 인조반정 이전까지 약 50년 동안은 남명학파가 역사 의 전면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시기라 할 수 있거니와, 인조반정으로 인 해 남명학파를 이끌던 내암 정인홍이 적신으로 몰려 처형된 뒤로부터 남명학파 는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북인이었던 남명학파가 인조반정 이후 󰡔남명집󰡕에 실린 정인홍의 흔적을 없애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부류와 소극적인 부류가 대립하면서 남인과 서인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이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남인은 퇴계학파화하고 서인은 율곡학파화하였다. 그러나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江右 지역의 인물 가운데 남인화 또는 서인화한 두드러진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남명 학파의 학문정신을 나름대로 계승해 왔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리고 이러한 지역적 분위기는 남인화 또는 서인화한 인물의 경우도 남명학파의 학문정신을 근본적으로 배제한 채 퇴계학파 또는 율곡학파의 학문을 수용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영조 4년(서기 1728년)에 일어난 무신사태 때 강우 지역에서 동계 정온의 현 손 정희량과 도촌 조응인의 5대손 조성좌가 세력을 규합하여 안의․거창․합천․삼 가를 한 때 점령했던 일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해 강우 지역은 반역향이라는 인식이 심화되었으며, 이 지역의 선비들도 그 기상이 저하되고 남명학파로서의 학문정신에 대한 자긍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면 학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16-17세기의 학 문적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하였다. 당시 강우지역의 학자들의 남명학 계승양상 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우선, 조선말기에 이르기까지 경상우도 지역에서는 그들이 비록 영남 남인 정 재 유치명의 문인이거나 기호남인 성재 허전의 문인이거나 호남 노론 노사 기 정진의 문인이거나 간에 남명의 경의 사상에 대한 계승의 의지가 확고함을 알 수 있다. 특히 퇴계를 경모하면서 한주의 주리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후산 허유가, 남명의 신명사도와 신명사명에 대한 정밀한 주해를 하면서 경상우도의 당대 선후배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여 완성시켰던 점은 남명 사상의 근저를 확고히 하려는 의식의 소산이었다. 출처관 또한 남명의 영향이 당시까지 깊이 남아 있었다. 만성・단계・후산・노 백헌・물천・면우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었음에도 과거로 발신한 사람은 단계 김인섭 뿐이다. 그런데 그 단계가 조정에서 물러난 뒤 수령들의 횡포가 극에 달 한 것을 보고 그 아버지와 함께 민란을 주도한 것은, 남명의 출처관과 현실비판 의 정신이 변모된 양상으로 후대에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남명이 남긴 시황계의 영향은 조선말기에 이르면 상당히 퇴색해지고, 성리학 이론에 관한 탐구를 배격하였던 남명의 정신도 많이 허물어졌다. 그러나 남명의 경의 사상과 출처관 등은 조선말기까지도 확고하고, 실천을 중 시하는 학풍 또한 깊이 젖어 있어서 성리설에 대한 학설 전개를 못마땅해 하는 분위기가 1900년 무렵에도 광범위하게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겉으 로 드러난 학맥상으로 보면 남명학파가 와해되어 사라진 듯하여도 실상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인 것이다.
        1994.
        2006.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내암집󰡕 간행의 준비 단계에서 이루어진 여러 종류의 필사본과 기타 고문서들에 주목하여, 선조 시기 정인홍의 정치적 동향을 구명하는 것을 목적 으로 한다. 오늘날 정인홍은 주로 광해군 시기의 權臣으로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정 치적 생애의 대부분은 선조의 재위 기간에 해당한다. 정인홍은 문과에 응시하 지 않고 유일로서 발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조시기에 종6품에서 종2품에 이르는 당시까지 문과 출신자가 아닌 경우로는 전례가 없었던 현달한 관직에 두루 임명되었다. 선조 시기에는 그를 뒷받침해 줄 뚜렷한 정치 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카리스마의 원천은 무엇보다도 국왕의 신임에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신임의 배경은 강직하고 학식이 깊은 인물로서의 그의 명성이었 으며, 임란 시기의 의병활동이 보여준 애국심이었다. 그가 한사코 관직을 사퇴하고서 ‘山野의 신하’로 남고자 했던 것은, 무엇보다 도 당쟁 시대인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서 나아가 포부를 실현할 수 없다고 판단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국왕의 신임에 의거하여 사직소나 사은소 등의 형 태로 주어진 정치적 상황에 대한 발언은 계속하고 있었다. 그것이 이른바 산림 정치의 원형을 이루게 된 것이었다. 군주가 인물의 선악을 옳게 판단하여 군자 의 당을 자신의 측근으로 삼고 그들에게 핵심적인 권력을 맡겨서 소인의 당이 조정에 발붙일 수 없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당쟁 시대에 처한 정인홍의 일관된 정치적 주장이었다. 그가 선조시기에 이미 많은 정적들을 만든 것도 이러한 비 타협적인 정치노선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1995.
        2006.02 KCI 등재후보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유치원 교사의 성격유형의 특성이 교사의 직업흥미와 어떤 상호관계성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밝혀보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공·사립유치원에 재직 중인 여교사 324명을 대상으로 MBTI 성격유형검사(김정택, 심혜숙, 1990)와 스트롱 직업흥미검사(김정택, 김명준, 심혜숙, 2001)를 실시하여 상호관계성을 알아보았다. 스트롱 직업흥미검사의 척도별로 성격유형과의 상관관계를 살펴본 결과, GOT 척도에서 MBTI의 외향형(E)은 사회형과 진취형과 관련이 있으며, 직관형(N)은 예술형과 관련이 있고, 사고형(T)은 진취형과 관련이 있었다. BIS 척도에서는 외향형(E)은 군사활동, 운동경기, 기계관련, 의학, 가정/가사, 교육, 의료봉사, 대중연설, 법/정치, 상품유통, 판매, 조직관리와 관련이 있으며, 직관형(N)은 과학, 음악/드라마, 글쓰기와 관련이 있으며, 사고형(T)은 기계관련, 수학, 종교활동, 대중연설, 법/정치, 상품유통, 판매, 조직관리, 자료처리와 관련이 있었다. PSS 척도에서는 외향형(E)은 업무 유형, 리더십 유형과 관련이 있으며, 직관형(N)은 학습 유형과 리더십 유형과 관련이 있으며, 사고형(T)은 리더십 유형과 관련이 있었다.
        1996.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朝鮮 成宗朝 新進士類의 일원으로서 당시 산문의 第一家로 稱譽되던 濯纓 金馹孫(1464-1498)의 생애와 문학, 정치적 역할에 대해 개괄적으로 고찰 해 보는 것에 목적이 있다. 15세기 성종조는 문학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기로 서 詞章과 道學의 상대적인 비중에 대한 다양한 입장이 정치적인 성향과 연계 되어 대립의 양상을 표출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신진사류의 선두를 자임 하였던 탁영의 문학적 견해와 정치적 역할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 가 있다. 탁영은 신진사류의 실질적인 영수였던 佔畢齋 金宗直의 문인으로서, 점필재와 정치적ㆍ문학적으로 유사한 노선을 견지하였다. 훈구세력들의 전횡 에 반대해 유학적 왕도정치에 대한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훈구세력들이 崇文을 조장하여 군주의 修己任人을 방해한다거나 阿諛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한편, 본고가 江右 지역과 연관된 인사들의 학문과 생애 등을 개괄적으로 소 개, 고찰하기 위한 학술대회의 일환으로 작성된 만큼, 기존의 연구에서 비중 있 게 소개되지 않았던 부분까지도 다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문집 의 改刪 경위나, 詩文에 대한 후대의 평가, 節義之士로서의 변화하는 위상 등에 대해 일정한 비중을 두어 소개하였다. 탁영의 문장과 절의는 당대는 물론 후대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과 35세라는 짧은 생으로 인해 학통이 연결될 만한 고 리가 없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의 문장과 절의가 후세에까지 많은 영향을 줄 정도로 뛰어났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하겠다. 특히 宋時烈 같은 道學者들조차도 탁영 문장에 대해 후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데, 이는 탁영 문장의 내용적인 측면 과 실제로 보여준 유가로서의 실천적인 삶과 절의가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도가 바탕이 된 진정한 ‘經文一致’를 추구했던 도학자들에게 탁영 의 문장은 전범이 되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1997.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19세기 말엽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야사총서 󰡔稗林󰡕의 가치와 특징을 분석하였다. 󰡔稗林󰡕은 일찍부터 영인되어 학계에서 널리 이용된 대표적 인 야사총서다. 하지만 사료로서의 가치나 편찬 과정에 대해 깊이 있는 학술적 분석이 가해지지 않았다. 본고는 󰡔패림󰡕이 지닌 가치와 특징을 밝히는 것을 목 표로 하였다. 󰡔패림󰡕의 편찬자는 구체적으로 이름이 밝혀지지 않지만, 󰡔대동패림󰡕을 빌려 서 轉寫할만큼 沈魯崇 집안과 친분이 두터운 서울 경기 지역의 노론 명문가의 일원이며, 역사에 관심이 깊은 학자일 가능성이 높다. 󰡔패림󰡕은 조선후기 야사총서 편찬의 과정 속에서 출현했으며, 10여종의 비 중이 큰 야사총서 가운데 마지막 단계에 위치한다. 󰡔패림󰡕에 수록된 개별야사 의 분석을 통해서, 󰡔패림󰡕은 󰡔大東稗林󰡕의 轉寫를 통하여 형성되었다는 사실 이 입증되었다. 따라서 󰡔패림󰡕은 金鑢가 편찬한 󰡔寒皐觀外史󰡕ㆍ󰡔倉可樓外史󰡕 의 계통을 밟은 野史叢書群인 󰡔대동패림󰡕, 󰡔패림󰡕, 󰡔廣史󰡕 계열에 속한다. 그러 나 󰡔패림󰡕은 내용의 일부를 󰡔鵝洲雜錄󰡕에서 취하였고, 󰡔패림󰡕만의 특색을 보여 주는 󰡔正宗紀事󰡕, 󰡔純祖紀事󰡕, 󰡔憲宗紀事󰡕, 󰡔哲宗紀事󰡕를 총서의 전면에 내세 웠으며, 비교적 방대한 분량을 지닌 야사인 󰡔我我錄󰡕, 󰡔辛壬紀年提要󰡕, 󰡔修書 雜志󰡕와 같은 야사를 포함함으로써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독자성을 확보하였 다. 󰡔패림󰡕은 기존의 야사총서가 지닌 장점을 흡수한 바탕 위에서 주로 정치사 관련 야사를 수록하였다. 따라서 19세기 야사에 대한 학자들의 관심과 야사이 해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료다.
        1998.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木溪 姜渾(1464-1519)은 중종반정에 참여한 靖國功臣으로, 홍문관 대제학 과 이조ㆍ공조ㆍ형조 판사를 두루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특히 그의 시 는 晩唐의 체를 얻어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으며, 그는 뛰어난 문장과 인품으로 뭇 선비들은 물론 성종에게도 촉망받던 인재였다. 그러나 연산조 말 승지로 있으면서 응제시로 아부하여 부귀를 탐한 간사한 인물이라는 오명을 얻 었고, 이로 인해 사림에게 배척 받은 것은 물론 그의 문집도 제대로 간행되지 못하였으니, 그의 저술은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여러 증언과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강혼이 연산군 밑에서 벼슬하고 글 을 지은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그에 대한 비난도 매우 편향적이고 부당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강혼의 생애와 사상 및 그의 문학은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혼은 훈구에 속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김종직을 스승으로 섬기고 그 제자들과 두루 사귀었다. 이러한 점을 반영하듯 그 당시 훈구와 사림이 첨예하 게 대립한 昭陵復位論과 薦擧別試制(賢良科)를 통해 볼 때, 강혼의 정치적 입지 木溪 姜渾(1464-1519)은 중종반정에 참여한 靖國功臣으로, 홍문관 대제학 과 이조ㆍ공조ㆍ형조 판사를 두루 거쳐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특히 그의 시 는 晩唐의 체를 얻어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일컬어졌으며, 그는 뛰어난 문장과 인품으로 뭇 선비들은 물론 성종에게도 촉망받던 인재였다. 그러나 연산조 말 승지로 있으면서 응제시로 아부하여 부귀를 탐한 간사한 인물이라는 오명을 얻 었고, 이로 인해 사림에게 배척 받은 것은 물론 그의 문집도 제대로 간행되지 못하였으니, 그의 저술은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여러 증언과 정황을 고려해 볼 때, 강혼이 연산군 밑에서 벼슬하고 글 을 지은 것은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으며, 그에 대한 비난도 매우 편향적이고 부당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강혼의 생애와 사상 및 그의 문학은 재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강혼은 훈구에 속하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김종직을 스승으로 섬기고 그 제자들과 두루 사귀었다. 이러한 점을 반영하듯 그 당시 훈구와 사림이 첨예하 게 대립한 昭陵復位論과 薦擧別試制(賢良科)를 통해 볼 때, 강혼의 정치적 입지
        1999.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저명한 미래학자인 Alvin Toffler는 그의 저서 『미래의 쇼크』에서 “인간이 격심한 변화 상황에 부딪쳤을 때 도대체 어떠한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미래의 변화에 적응할 수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 적응할 수 없는가?의 문제를 제기하고 그 변화의 정도를 재빨리 이해하고 컨트롤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으면 머지않아 어떻게도 적응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고 말하고 있다(Alvin Toffler, 윤종혁 역, 1984). 이는 미래사회를 예측하고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 21세기의 사회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두 개의 큰 흐름은 ‘세계화’와 ‘지식기반사회’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여러 면에서 사회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변화로 모든 면에서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21세기에는 지식과 정보가 개인 및 국가경쟁력의 핵심요소이자 가치창출의 근원이 되는 지식기반사회로 전환될 전망이며, 인류는 정치, 사회, 경제, 문화, 교육 등 각 분야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준비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21세기 지식기반경제시대에는 불확실한 경제 환경 속에서 지식의 창출, 확산, 활동을 둘러싼 개별 경제주체 간, 국가 간 경쟁이 더욱 격화될 것이다(김수욱, 2002). 이러한 세계화․지식기반사회의 흐름을 과감히 수용하여 대처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흐름에 맞는 교육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세계화․지식기반사회의 핵심은 지식이며 이는 결국 인간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1세기 세계화․지식기반사회에 적합한 경제인상을 탐색하고, 이에 적절한 교육적 처방을 강구하는 일이 경제교육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일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본 연구에서는 먼저 지식기반사회의 형성 배경과 특징에 대하여 알아보고 세계화․지식기반사회에 부응하는 지식 창출 및 활용형의 경제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며, 어떠한 능력을 구비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알아본다. 그리고 이를 위하여 지식기반경제 시대의 경제교육 성격과 목표를 어떻게 규정할 것이며, 경제교육 내용 구성 원칙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 그리고 지식기반경제 시대의 경제교육 방법과 평가는 어떤 논리에 따라 선택해야 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체계 있게 알아본다. 그리고 이를 지원하기 위한 지원체제 등을 포함하여 앞으로 세계화·지식기반사회에서 지향해야 할 학교 경제교육의 모형을 제시하고자 한다.
        2000.
        2005.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남계 표연말(1449-1498)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교체되던 시기에 사림파의 입장에 선 김종직의 문인 중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던 인물로 연산군이라는 폭군을 만나 사림파의 올곧은 정신을 꺾지 않다가 생애를 마친 인물이다. 남계의 생애는 왕조와 벼슬에 따라 효행을 실천하고 과거를 준비하던 초년기, 과거에 출사하여 告身을 빼앗기고 유배를 당하기도 하는 출사와 좌절기, 예문 관,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 삼사를 거치면서 간관활동을 하던 출세기, 그리 고 연산조에 들어 대사간까지 올랐다가 사초로 유배되어 죽은 쇠퇴기 등 4기로 나누어진다. 남계의 교유는 김종직, 서거정, 유호인과의 교유 정도만이 보이는데 김종직과 서거정은 당대 훈구관료와 사림을 대표하는 인물로 대립적인 관계였으나 남계 에게는 각별한 선생들이었다. 김종직은 늘 서릿발 같은 기상을 길러 엄정한 판 단을 할 것을 요구하였고 서거정은 그런 기상도 좋지만 백성을 포용하는 관대 함도 지니라고 하였다. 유호인은 함양을 동향으로 김종직의 문인 동료로, 또한 거의 비슷한 환로를 거친 절친한 사이로 고향, 사림, 조정에서 바라는 인물이 되기 위해 함께 힘썼던 師友이다. 남계의 학문과 문학은 남겨진 글이 시 9제 20수, 산문 4편 밖에 없어 제대로 알기 어려우나 학문관은 주자와 같이 마음을 높이고 보존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세세한 일도 강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마 음만을 강조한 육구연을 이단으로 비판했다. 그러나 성현과 같이 되려면 마음 보존을 잘 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당대 사림파처럼의 주자일변도 학풍을 그대 로 따른 셈이다. 남계의 문학은 당대 신진사류가 지향하던 東國文明의 懷古, 禮俗敎化, 우국애 민, 절의와 강개 등을 아울렀다고 여겨지나 남은 작품이 적어 전모를 알 수 없 다. 그러나 문장 공부보다는 현실참여를 중시했으며, 글로 표현하는 일과 관계 없이 본래의 자질은 불변한다는 생각을 가졌음이 작품에 나타난다. 한편 만년 에 가서는 현실참여를 통한 정치개혁의 한계를 깨닫고 고향 자연 속에서의 깨 달음을 추구하려는 태도변화를 보였다. 남계를 비롯한 성종조 신진사류들은 훈구파에 대적할 만한 문학적 재능을 지 녔으되 이를 발휘하기 보다는 도학적 수양을 바탕으로 한 실천행위를 중시하였 고 이를 정치적으로 실현하려고 하였으며, 도의 실현을 위해 현실의 위기를 두 려워하지 않는 지조 있는 조선 선비의 표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