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적으로 보면 사회과는 학생과 교사가 가장 흥미롭게 학습하고, 교수할 수 있는 교과이다. 왜냐하면 다른 어떤 교과보다 학습 내용이 풍부하고, 다양한 교수․학습(학습) 방법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습 내용이 풍부하다는 것은 학습내용이 많다는 측면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역사학, 지리학, 심리학, 철학 등 8개 이상의 다양한 학문으로부터 훌륭한 민주시민이 갖추어야 할 자질을 중심으로 내용을 추출하여 통합한 교과이기 때문에 내용 선정의 범위가 넓다는 뜻이다. 즉 흥미롭고 유익한 학습 내용을 추출할 가능성이 열려있다는 뜻이다. 또한 내용이 다양하고 풍부하다보니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교수․학습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다. 즉 사용하고자 하는 교수․학습 방법에 적합한 내용을 쉽게 찾을 수 있고,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실제 교육현장에서 초등학교의 경우 많은 교사들이 연구수업을 할 때 사회과를 선택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보여줄게 많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와 학생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싫어하는 교과 중의 하나가 사회과이다. 초등학생의 경우 사회과는 수학 다음으로 싫어하는 교과이고, 가장 어려운 교과이며, 가장 중요도가 낮은 교과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경향은 교사도 거의 비슷하다(정문성, 1996, 1997). 중, 고등학교도 거의 비슷할 것으로 생각된다. 학생들이 사회과를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는 추상적이면서 어려운 개념과 원리들이 많이 나오고, 여러 학문의 내용이 포함되기 때문에 암기하여야 할 내용이 많고, 조사하거나 탐구해야 하는 과제가 많은 것도 원인이다. 후자의 경우 시간도 많이 걸리고, 학습 활동의 범위가 애매하고 광범위하여 학생들에게 많은 부담을 주기도 한다. 교사 입장에서도 짧은 시간 안에 어려운 개념과 원리를 쉽게 이해시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그 다양하고 어려운 학문적 개념들을 충분히 이해하고 가르치기도 벅찬 경우가 많다. 다양한 수업 방법을 적용하고 싶지만 입시위주의 교육현실과 수업방법에 대한 정보나 연수기회를 갖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적 이유가 내용의 풍부성과 방법의 다양성 때문에 여러 가지 교수․학습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회과의 특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상당수의 교사들이 사회과에서 다양한 교수․학습 방법을 실천하고 만족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과 교수․학습 방법 연구분야에서는 이러한 사회과의 특성을 고려하여 사회과 교수․학습 방법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과 검토를 시도한 경우가 거의 없다. 주로 개념학습, 탐구 학습, 수준별 학습, 논쟁 학습 등 특정한 수업방법을 중심으로 한 연구가 대부분이다(구정화, 1998, 강운선, 1999; 정문성, 1999; 이진석, 1999; 박건호, 1999; 차조일, 1999; 조영달, 2000, 주은옥, 2001; 설규주, 2001; 은지용, 2001; 김영인, 2002;조국남, 203; 노경주, 2001; 모경환․최유리, 2003; 박윤경, 2003; 마미화, 2004). 그 동안 사회과 교수․학습 방법에 대한 수많은 연구와 실천이 누적된 만큼 이제 사회과 교수․학습 방법 전반에 걸쳐서 그 동안의 연구 및 실천 경향을 반추해보고, 시대적 흐름과 교육적 요구가 어떻게 수용되어 사회과 교수․학습 방법의 변화가 예측되는지를 살펴볼 시점에 와 있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사회과 교수․학습 방법의 연구와 실천 및 발전에 관한 많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이 논문은 이러한 필요성에 따라 역사적으로 사회과의 교수․학습 방법이 다양하면서도 매우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해 왔음을 밝히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지를 논의해보고, 이에 비추어 사회과 교수․학습 방법의 발전 과제를 제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본고에서는 한말의 위기 상황에서 경상우도의 사림집단이 어떻게 그들의 사상을 定位를 확보해 나아갔는가를 후산 허유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后山을 포함한 寒洲學派에 대한 연구는 그렇게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한주학파 는 한말의 위기상황에서 퇴계와 남명의 사상적인 융합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정신 을 이끌어 내고자 치열하게 고민한 지식인 집단이다. 후산은 그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이다. 그는 남명사상과 퇴계사상을 그의 고유한 심즉리설을 통하여 통합해 보 고자 하였다. 그의 신명사도혹문 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는 남명의 신명사도를 주리론적 형식 속에서 해석함으로써 아 세계에 대한 심의 主宰的권능을 확인하 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는 퇴계의 理發說을 더욱 밀고 나가 分殊속에서 작동하 는 기의 의미를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논의는 이미 상당 부분 양명학 적 요소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사회정치적 함의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두만강은 하천규모는 작으나(약 ), 상하류 국가간 많은 갈등 요소를 안고 있음에도 변방이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각국의 중앙정부로부터 정치사회적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1990년대 들어 UNDP등 국제적인 관심이 집중되면서 이 지역의 수자원 문제해결을 위한 대안들이 제시되었으나 국제하천관리의 문제해결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국제협력체계의 확고한 구축이 미흡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제도, 관리체계 및 기술적 대안이 필요한 국제하천관리의 기본원칙이 고
이 논문은 16세기 조선시대의 南冥 曺植(1501-1572)의 정치사상과 17세기 명말 청초의 鏡萬唐甄(1630-1703)의 정치사상을 비교한 논술하였다. 두 사상가는 130 년이란 시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치 한자리에서 같은 주제를 갖고 토론하며 교류한 듯 여러 방면에 걸쳐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특히 부패하고 부조리한 정치현실에 대한 강력한 개혁의식과 실천정신은 그야말로 不謀而合이라 할 수 있다. 보통 성리학자들의 성향은 본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현학적 • 이론적 공소함 에 빠지가 쉽다. 막상 그런 현상은 성리학자들 사이에 빈번하였다. 그런 점에서 남 명과 주만은 철저히 이런 성리학자들의 단점을 실천적 · 개혁적 관점에서 보완해 나아갔다. 이로부터 두 사상가는 정치현실에 그 누구보다 민감하였고, 구체적 개혁 정책으로 당대 사회 정치적 부조리의 문제를 해소하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두 사상가는 당대보다는 후대에더 큰 빛을 발하며 사상사에 큰 족적을 남기었다.
‘사회적 실천’은 ‘개인의 도덕수양’과 다르다. 그것에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총칙, 즉 무엇보다도 중요한 절대가치가 있다. 그리고 이런 총칙에 따라 실천할 수 있는 방법들이 존재한다. 모든 사회실천은 이런 총칙과 방법들에 근거해서 수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분명한 기준을 갖고 올바로 판단, 평가해야 한 다. 이 글은 이상의 내용을, 왕부지의 사장에 근거하여 서술한 것이다. 원론적이고 추상적이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인간다운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것 이 사회실천의 총칙이라는 왕부지의 주장은 만고불변의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총칙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 제시된 방법이나, 실천의 구체적언 내용 및 판단 평가의 기준 또한 우리가 심각하게 고려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보여진다. 혹자 는 왕부지의 이런 주장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에, 하등의 효과를 얻기 어렵다고 평가절하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철학사상이라는 것이 현실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려는 학문이 아니라 그 해결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것인 한, 그와 같은 비판은 아무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분명한 이론적 근거를 갖는 원칙들이 정립된다면, 현재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형편없는 수준의 혼란상은 자연스럽게 소멸되리라고 확신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대학생 연령의 피험자들이 수정된 프로토콜(각 측정)을 이용하여 운동감각 처리과정에서 심리물리학적 감각 반응 정보를 활용하는 능력을 결정하는 것이다. 특히 본 연구는 그 능력을 정량화 하려고 시도하였고 첨가연속체나 대치연속체 이론에 의해 설명된 운동감각에 관한 심리물리학의 지각 연속체에 대하여 가능한 설명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 본 연구는 피험자에게 눈가리개를 한 채 선형 정치 장비에서 거리와 위치(22, 44, 64도)를 구분하도록 요구된 2회의 실험으로 구성되었다. 7개의 표준 비교 조합들이 거리와 위치 움직임 각각에 대한 총 140번의 시도, 20분단에 대해 무선위로 제시되었다. 항상 자극 방법이 주관적 평형점, 최소감지차(JND), 항상오차, 그리고 웨버 비율(WR)을 결정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3개의 표준 거리와 위치 움직임에 대한 JND와 WR에 기초해서 이론적 구성에 관하여 결과들이 논의 되었다. 그 결과 거리와 위치 움직임은 첨가연속체이론에 의해 가장 잘 설명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각 측정은 물리적 자극과 심리학적 반응과의 관계를 검증하기 위해 이용되는 것이 적절한 것임이 증명되었다.
This study analysed the influencing factors involved in deciding the policy through the analysis of procedure in the policy on the natural resources in local governments. To evaluate the political consensus of decision making in policy determination as political rationality in natural resources policy, we analyzed the degree of the satisfaction from the residents.
Among the analysis factors of the satisfaction of natural resources policy, the most significant independent factors were the goal and the method of the policy, the institutional conditions and interested groups, the appropriateness of the content of decision making, supervising and controlling, cooperating relations, the effect of policy, and the consistency. From the analysis of the effect and the goal of policy, we found 70.5% of residents was against the policy and only 27.8% consented. Considering the appropriateness of supervising and controlling in accordance with the process of the policy decision and its execution, the influence of local governments and institutions concerned enjoying comparatively more economic benefits was strong, however, the involvement of the residents and supervising and monitoring institutions were found negligible.
본 논문의 목적은 외항선사들의 정치적 노출정도를 측정하는 정치적 비용과 이와 관련이 있는 재무적 요인들 간의 관련성 유무를 다변량 회귀분석방법에 의하여 실증 분석함으로써 우리나라 해운산업의 정치적 비용 결정요인을 검증하는 데 있다. 회귀모형의 독립변수는 기업규모(매출액, 총자산, 시장점유율) 외에 해운산업의 특성을 보여주는 부채비율, 자본집약도, 영업이익률 및 해운위험으로서 매출액변동이다. 분석 결과 해운기업의 정치적 비용과 모든 규모변수는 유의적으로 정의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부채비율과 영업이익률은 해운산업의 정치적 비용을 결정하는 주요 요인으로 밝혀졌다.
조선중기 덕계의 문언이 생존하였던 당시는 중종 16년에서 선조 7년에 걸친 시대적 상황이었다. 중종초의 정국은 공신중심의 통치체제가 유지되었고, 왕권의 약화라는 훈구세력의 견제를 위한 대응세력의 필요성에서 사림파의 재진출 기회가 열렸다. 중종 9년부터 사림파는 言官에 활발하게 진출하게 되었고, 이러한 인적 기반을 토대로 사림파의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한 개혁정치를 추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에 덕계는 정계에 진출하여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하였다. 덕계는 산음에서 남명으로부터 『중용』, 『대학」, 『심경』, 『근사록』 등을 배웠고, 궁리와 거경에 바탕한 덕계의 학문관에 입각한 교육은 남명으로부터 계승한 학습 자의 개인차를 중시하는 교육과 지득을 강조하는 교육, 그리고 당시 성균관 학유 시절에 행했던 교육으로 구체화되어 냐타났다. 뿐만 아니라, 덕계의 문인들은 다양 한 급문동기에 의해 얼련의 문인집단이 형성된다. 지역적으로는 당시 덕계가 거주 하였던 산청, 한양, 성주지역 등지에서 강학 및 학술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는 산청 및 함양지역에서의 학술회의로 그 절정을 보게 되는데, 이른바 지곡 사, 단속사, 남계서원에서의 학술회의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강학활동은 대체로 학습자의 개인차와 자득을 강조하는 교육, 유생의 평가방법으로서의 4등급 분반 교육, 그리고 평생교육의 장으로서의 강학활동의 의의를 지난다고 할 수 있다.
진주의 해주정씨는 17세기 이후 진주 지역의 대표적 가문 가운데 하나로 일컬어 져 왔다 이 논문에서 말하는 晉州 의 海州鄭民는 農園 鄭文孚(1565-1624)의 후손 및 농포의 아우 鄭文益(1568-1639)의 후손을 말한다. 농포의 두 아들 鄭大榮 (1586-1658)과 鄭大隆(1599-1661) 및 농포의 아우 鄭文益등 三叔姪이 어떻게 해서 진주에 정착하여 진주 지역의 대표적 가문이 되었으며,남명학파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진주 지역에서 이들이 가진 학문의 성향은 어떠한가 하는 점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진주의 해주정씨는 농포의 아우와 두 아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이 처음 진주로 온 것은 避兵이 그 주된 목적이었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전대의 혼인관계로 인 해 상속받았던 田莊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음도 또한 분명하다. 인조반정 이후에는 다시 서울 생활을 하려고 했었던 것 또한 확인되는 바였다. 그러나 농포가 李适의 난 이후 昌原府使시절에 지은 詠史詩로 인해 遊謀로 처형당하고,遺言 에 의해 그 아우와 아들들이 진주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부분은 좀 더 생각하게 하 는 점이 없지 않다. 광해군 시대 창원부사 시절의 詠史詩로 인해 반정 이후 인조 시대에 역모로 처형당할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으로서는 자료가 부족하여 증빙하기 곤란하지만,이는 당시의 집권층이 농포가 광해군 시절 북인으로서 내암 정인흥과의 관 련이 적지 않았다고 보았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물론 농포로서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관련하여 환멸을 느끼고 자손들에게 정치적 은둔을 유언한 것이 아닌가 판단되는 것이다. 해주정씨가 진주에 정착한 초기에는 南冥學派를 영도하는 위치에 있던 謙齋 河弘度의 지우를 업어 남인으로 입지를 굳히는 듯하였으나,1665년을 전후하여 농포의 신원에 앞장섰던 澤堂 李植의 아들畏齋 李端夏에게 집지하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서서히 노론화한 것이다. 그러나 노론으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것은 경종때 남인으로부터 심각한 핍박을 받은 뒤 영조가 즉위한 이후 이에 대한 보복성 핍박을 남인에게 가함으로부터d였다. 이 일이 일어난 지 20여 년 후에 얼어난 宗川書院 禍變의 주동자가 이 가문에서 나옴으로써 남명학파를 주도하던 남인과의 관계가 극히 악화되었고,근가 지역의 노론 학자들로부터 학업을 전수함으로써 이 지역의 남명학파에 대해서는 상대 척으로 관심이 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진주의 해주정씨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인과의 관계도 대체로 나빴다고 할 수 있고,남명학파에 대한 관심의 정도 또한 보잘것없다고 할 수 있지 만,문집이나 유고 등을 남겼다는 이가 58 인이나 있다는 것은 학문에 대한 관심만큼은 여타 가문에 뒤지지 않으려 하였던 결과로 보인다. 남명학파라는 범위를 벗어나서 생각해 보면, 이와 같은 사실로 인해 해주정씨가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서부 경남 지역의 학문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고는 조선의 경학사에 일획을 그은 君王인 정조와 신하인 정약용의 학문적 만남을 詩經講義라는 텍스트를 통하여 조망한 논문이다. 이들의 만남에 주목하는 이유는 통상의 經筵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군왕이 자신의 의도로 선택한 인재와 질의응답을 통하여 새로운 경학의 세계를 확장하는 보기 드문 케이스이다. 우선 전통적 帝王敎育의 유형으로 정도전 · 권근 · 이황 · 이율곡 등의 사례를 들어 조선시대 경연이 추구하였던 이상적 교육상을 알아보고, 이것에 대응하는 역대 왕들의 경연 참석 상황을 살펴보았다. 정조의 캐릭터는 한마디로 말하면 好學의 學者적 君王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조의 유교적 이상정치와 현실의 실현이라는 점점에 정약용을 비롯한 초계문신이 위치한다. 초계문신 뿐 만 아니라, 정조의 정치적 학운 활동에는 학파 • 지역 · 신분 의 차를 초월하여 다양한 유자가 참여한다. 이러한 열린 학문 활동은 곧 당시 사회의 개방성에의 지향을 엿보게 함과 동시에 보편 문화의 성숙을 알려준다. 『시경강의』를 통하여 살펴본 두 사람의 기본적 경학관은 상당히 유사하다 양쪽 다 주자의 경학적 업적을 존중하지만, 논리상 부합하지 않는 사항에 대해서는 회의와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정조는 정약용만큼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조의 개방적 경학관에 힘입어 주자를 극복하는 정약용의 독창적 견해가 빛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이러한 脫朱子의 경학관은 정조시대의 새로운 학 풍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시경강의』의 내용분석을 통하여 정치와 사회에 관한 두 사람의 견해 를 알아보았다. 특히 ‘賢人 ’에 있어서 정조가 유교의 전통적 賢人觀을 견지하고 있음에 비하여, 정약용은 어느 분야에서냐 기능이든 학문이든 할 수 있는 데까지 매진하여 어느 경지에 도달하면 그를 현인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고착화된 신분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견해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安民’의 문제에 있어서는 두 사람 모두 유사한 시각을 노정한다. 安民의 기본조건으로 治者계층의 德化를 중요시한다. 堯舜의 至治를 정치의 이상형으로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현실적 방법으로 治者는 古學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想定한다. 이러한 본고의 고찰을 통하여 정조와 정약용과 갇은 군신 간의 학문적 활동은 글자그대로 敎學相長적인 만남이며, 조선경학의 실학시대를 만개 시킨 動力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가공 과정에서 대량 발생하는 폐기물 중 하나인 귤피를 천연 기능성 소재로 개발하기 위한 기초자료를 마련하고자 추출방법을 달리한 귤피 추출물의 생리활성을 확인하였다. 또한 감마선 조사에 의한 귤피 추출물의 생리활성 변화에 관하여도 관찰하였다. 정치추출의 경우 열수추출에 비해 초기 L 값이 낮은 반면 a 값과 b 값이 높았으나 저장기간 또는 감마선 조사에 의해 차이가 없어졌으며, 감마선 조사선량의 증가에 따라 귤피추출액의 L 값과 a 값은 증가하였으
조선에서 서원제도는 周世朋의 白雲洞書院 설립으로 출현하였지만, 이후 서원을 조선사회에 보급․정착시키고 그 성격을 규정하여 발전의 토대를 마련한 것을 退溪 李滉이다. 그러나 南冥 曺植은 여러 가지 여건에서 강우지역의 서원설립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존하는 자료에는 서원 건립이나 보급․ 정착 등에 관여한 사실이 나타나 있지 않다.
南冥 在世時 강우지역에 최초로 건립된 서원은 咸陽의 灆溪書院이다. 남계서원은 남명의 문인인 介庵 姜翼 등의 함양 인근의 사림과 지방관의 협조에 의하여 설립된다. 그런데, 남명 재세시 남명과 남명학파의 핵심적인 인물들은 남계서원의 건립과 운영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고 있다. 남명 사후 강우지역에 최초로 건립된 서원은 德川書院이다. 덕천서원은 남명의 문인인 守愚堂 崔永慶 등의 진주 인근의 사림과 지방관의 협조에 의해 건립된다. 덕천서원 창건 당시는 전 강우지역의 남명학파에게는 서원건립은 이슈가 되지 못한 것 같다. 남계서원과 덕천서원은 丁酉再亂으로 소실되고 그후 중건된다. 중건도 창건과 마찬가지로 인근의 사림과 지방관의 협조로 이루어진다.
강우지역에 있어서 남계서원과 덕천서원은 광해군 대에서 인조반정 이전까지는 북인계열에 속하는 남명학파의 총본산으로서 그들의 향촌사회 내 거점으로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후 북인세력이 제거되면서 이를 뒷받침하고 있던 서원도 조락하고 만다. 숙종․영조 연간을 거치면서 남계서원은 친노론계 서원으로, 덕천서원은 친남인계 서원으로 변모하게 된다.
본고는 이황과 조식의 문도들에 의하여 그 학문이 계승 발전되면서 한국적 성리 철학의 틀이 잡혀가고 있던 17세기로부터 성리학이 그 역사적 기능을 종료하던 19세기까지에 걸쳐 강우지역에 나타난 유학의 흐름과 쟁점에 대한 간략한 정리이다. 17세기 초반 강우학파는 鄭仁弘을 중심으로 정치적·학문적 극성기를 누렸으나, 정인홍이 조선성리학의 정통으로 간주된 이황을 비판하고 패륜적 정치사건에 휘말린 일을 계기로 하여 급격히 몰락하게 되었다. 그 후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시기 동안 강우 유학은 그 餘震의 치유에 매달려야 했으며, 심각한 학문적 침체기를 맞게 된다.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동안 강우지역은 학계의 소외지역으로 남아 있었으며, 몇몇의 학자들에 의하여 간신히 명맥이 유지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퇴계학과 畿湖의 주기학이 강우를 점령하고, 당파적으로는 남인과 서인이 됨으로써 강우가 본래 가지고 있던 학문적·정치적 정체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긴 어두움이 지나고 19세기에 이르자 강우 유학은 다시 크게 떨치고 일어나는데, 그 주력은 退溪學과 호남의 蘆沙學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그 특징은 理를 중시하는 학풍이 다른 어떤 곳보다 강했다는 것이며, 이는 성리학적 신념을 고수하는 유학자들이 서세동점의 시기에 대응하는 가장 완고하면서도 근본주의적인 방법이었다. 이를 통해 절의론의 신념을 강화한 강우의 유학자들은 비록 시대의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한계는 있지만, 보수적인 유학자들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으로 국권상실의 시대에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수행해 갈 수 있었다. 그것은 유학의 기능이 종언을 고하는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불꽃과 같은 것이었다.
16-17세기 朝鮮은 정치나 학술의 측면만이 아니라 敎育制度 상으로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는 시기이다. 15세기말 전후까지 朝鮮은 官學敎育을 강화하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成宗 대까지 각 府, 牧, 郡, 縣 마다 鄕校가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6세기 중반부터 관학의 보완이자 대안인 書院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이전의 교육제도에 일정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본 고는 교육시스템을 중심으로 한 巨視的인 觀點에서 이 시기의 변화 양상과 그 의미를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이를 위해 조선 전기의 교육체제를 구성하는 한 중요한 요소로서 敎育中心圈域에 주목하였다. 교육중심권역이란 都會라는 제도를 통하여 연결되어 있는 각 지역의 중심향교와 인근 향교의 권역을 말한다. 忠南地域의 변화 양상을 분석한 결과, 이 지역은 15세기부터 16세기 전반까지 公州牧과 洪州牧 등 2개의 중심향교를 중심으로 교육권역이 형성되었으나, 16세기 후반부터 공주목 동부(孔巖 및 儒城地域)와 동남부(連山地域)에 새로운 교육중심지가 부상하기 시작하여, 17세기에는 기존의 교육중심권역이 거의 무력화되고, 동부 및 남동부지역으로 교육중심권역이 재편되어 갔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단지 敎育圈域의 變化만이 아니라, 관학교육체제가 지향하는 敎育機會 擴大의 公的 原理가 後退하는 결과를 의미한다고 보았다.
이 논문은 南冥 曺植의 再傳門人인 凌虛 朴敏(1566-1630)의 학문과 사상을 究明한 것이다. 현재 학계에는 남명과 남명학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남명 직전문도인 정구와 김우옹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남명학 연구가 능허를 비롯한 재전문인으로 확대되지 못하면서 남명학은 마치 한 시대의 사상인양 誤認되고 축소된 경향이 있다. 때문에 필자는 남명에게 직접 執贄한 문인은 아니지만 누구보다도 충실히 남명과 남명학의 정신과 사상을 잘 잇고 있는 능허를 통해 남명 死後, 정인홍의 정치적 실각으로 瓦解의 위기에 처했던 남명학의 실체적 존재를 확인하고자 한다. 아울러 16세기의 남명학을 17세기로 이어주는 가교자로서 능허의 학문과 사상이 무엇인가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본고에서 살피려고 하는 능허 학문과 사상의 구체적인 내용은 세 가지다. ① 그의 학문과 사상은 무엇인가? ② 그의 학문과 사상은 남명 혹은 남명학파의 학문 사상과 어떻게 맥을 잇고 있는가? ③ 그의 학문과 사상이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본 연구의 세 가지 목표는 그가 남긴 시를 통해 고찰 될 것이다. 그 방법은 그의 시가 사물을 어떻게 형상화 했느냐의 형식미학보다는 무엇을 표출하고 형상화했느냐는 점에 초점을 두었다
연구 결과 능허의 학문성향과 사상은 철저한 유가적 바탕 하에 이루어졌다. 小學을 기본으로 하는 下學으로 시작하여 明明德과 親民, 止於至善에 이르는 大學의 上達로 이어졌다. 그는 남명이 추구했던 存養省察의 의미로서 '明'과 '敬'을 지니기 위해 四書三經에 근본한 爲己의 학문을 하였고, 부조리한 현실과 부도덕한 행동에 대해 단호히 끊어버리는 '斷'으로서의 '義'를 실천했다. 이러한 능허의 학문과 사상은 남명 혹은 남명학파의 학문태도와 사상을 그대로 이은 것이다. 다만 남명이 유가적 세계관 속에 도가적 사상을 자유로이 수용했던 것과는 달리 능허는 철저하게 유가만을 고집했다. 이는 스승 정구의 영향도 있었으리라 본다. 남명의 직전 문도들 중에서도 망우당 곽재우 같은 이는 말년에 도가적 세계에 더욱 경도된 경향을 보이지만, 한강은 도가적 세계를 부정하고 오직 유가적 현실만을 인정했던 사람이다. 이런 한강의 사상이 능허에게도 영향을 주었으리라 본다. 냉혹하리 만큼 철저하게 자신을 닦고 성찰하며 그것을 고스란히 실천한 능허의 학문과 사상은 학문이 하나의 독립된 지식과 직업으로 실천에서 떨어져 나간 오늘날 현실에 학문과 학자의 역할과 사명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