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칼 융의 분석심리학이 전통적 그리스도교 문맥 안에서 어떻게 타 당한 종교적 언어를 제공해 줄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연구하고자 한다. 프 로이트와 융은 모두 분석심리학의 발전에 매우 중요한 공헌을 하였다. 인간 심 리 현상에서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개의 층이 존재한다는 이론을 처음 주장 한 학자는 프로이트였다. 그러나 융은 좀 더 발전시켜서, 그 두 개의 층을 자신 의 핵심 개념인 원형과 개성화와 더불어서 연구하였다. 융의 분석심리학은 근본 적으로 종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왜냐하면 개성화의 과정은 바로 종교적 체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융은 프로이트와는 달리 종교적 체험을 인간의 심리 현상의 발달 과정에서 핵심적인 한 부분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또한 그림자 원 형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신에 대한 논쟁적인 개념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논쟁적인 측면은 융의 종교적 체험에 대한 이해와 종교에 대한 긍정적 인 태도 안에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먼저 융의 핵심 개념인 원형과 개성화에 대해서 설명과 자기와 신의 관계성을 논의한다. 그리고 융의 종교에 대한 이해가 어떻게 그리스도교 안에서 타당한 언어로 이 해될 수 있는지 논의한다.
본 논문은 칼 라너가 주장한 근본적 인간 경험의 개념이 인간 주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초월적 경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고 있음을 연구하고자 한다. 계몽주의 시대 이후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시각이 대두되기 시작했으며, 특별히 인간이 주체적으로 의미를 형성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신적 계시 보다는 사고하는 주체로서 인간의 내면적 자아가 어떤 측면에서 의미의 원천이 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라너의 사고의 중요성은 근본적 인간 경험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심화 시켰다는 것과 초월의 개념을 초월의 유신론적 이해를 넘어서, 더 확장 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첫번째로 근본적 인간 경험이 모든 사람들에게 존재한다는 것과 동시에 신에 대한 경험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한다. 두번째로 인간은 질문이라는 역동성과 존재에 대한 선험적 인식을 통해서 초월 할 수 있다는 것을 도출할 것이다. 세번째로 에르네스트 블로흐와 발터 벤야민에서 드러나는 무신론적 초월의 개념이 초월의 유신론적 이해와 매우 연관이 깊다는 것을 연구 할 것이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악에 대한 문제는 매우 민감한 주제이다. 악이 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정의 내리기 위해서 역사적으로 수많은 노력이 이루어 져 왔다. 그리스도교도 또한 각 시대별로 악의 개념에 대하여 이치에 맞는 이해 와 설명을 찾기 위해 노력해 왔다. 특별히 어거스틴 성인과 안셀모 성인은 악의 개념에 대한 학문적 영역에서 매우 뛰어난 신학자들로 여겨진다. 어거스틴은 악 의 개념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하느님의 전능함과 절대적 선함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따라서 그는 악이라는 것이 어떤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결핍으로 이해하였다. 안셀모는 하느님의 인간의 관계를 중세 봉건시대 의 영주와 봉신의 관계로 이해하였다. 그래서 죄라는 개념을 의무와 빚의 개념 으로 설명하였다. 흥미롭게도 셰익스피어가 보여주고 있는 악의 개념은 어거스 틴과 안셀모가 설명하는 개념들과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본 논문은 셰익스피어 의 비극들이 악에 대한 신학적 개념들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한 다. 어거스틴의 존재의 결핍과 안셀모의 의무와 빚과 관련된 배은망덕함의 개념 을 중심으로 연구한다.
본 논문은 종교적 언어가 신을 나타낼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종교적 체험과 종교적 언어의 관계성에서, 중요한 주제들 중의 하나는 신적 체험을 전달 하는데 사용되는 언어가 인간의 조건과 존재론적으로 명확히 구별되는 신을 나타낼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신과 세계의 사이에는 차이 혹은 간격이 있다. 왜냐하면 초월적 존재로서 신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의 측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이해불가능성은 아마도 인간 언어가 지니고 있는 한계점들을 암시하고 있을 것이다. 즉 인간 언어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할 수 없는 한계점이 있다. 그러나 세계가 신을 나타낼 수 있는 중요 한 영역들 중의 하나는 바로 경험의 세계이다. 한 개인은 바로 경험의 역동성을 통해서 신을 만나게 된다. 신에 대한 인간의 체험을 전달하는 것은 바로 인간의 언어이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언어는 현존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재하는 것도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어떻게 종교적 언어가 신을 나타낼 수 있는 가에 대해서 보여주고자 한다. 전통과 공동체의 중요성, 종교적 언어의 본질, 그리고 종교적 언어의 변화적 힘 등이 논의될 것이다.
본 논문은 신성한 텍스트로서의 성경이 해석학적 관점에서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라는 가능성에 대해서 논의를 진행하려고 한다. 성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과연 문학적 이론을 적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할 수 있다. 19세기 에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가 성서와 문학적 관점의 상호 연관성의 가능성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한 이후로, 성서 해석학은 다양한 형태로 꾸준히 발전되어 오고 있다. 신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은 신성의 권위를 내제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 해석학의 근본적인 전제들 중의 하나는 성경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 안에서 어느 특정한 저자에 의해서 그리고 인간의 언어로 기록 되었다라는 것이다. 폴리쾨르는 포괄적인 해석학의 구조를 형성함으로써 성경이 하나의 텍스트로서 문학 이론의 관점에서 이해되고 해석되어질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특히 리쾨르는 성서에 드러나는 신의 계시와 다양한 형태의 담론과의 관계를 연구하였다. 그리고 그는 각 담론 안에서 신의 계시의 다양성을 지적하였다. 또한 텍스트와 공동체의 관계 안에서 성경의 정전이 어떻게 확립되는지에 대한 과정이 연구되어야 한다. 텍스트는 공동체를 규정하고, 공동체는 동시에 텍스트를 규정하기 때문에 둘은 서로 상호작용을 하는 관계에 있다.
본 논문은 십자가의 성요한의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한 개념을 연구한다. 그리스도교 신비사상 역사에서 아빌라의 대데레사 성녀와 함께 십자가의 성요한은 가장 중요한 신비가들 중의 한명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이 그가 제시하는 하느님과의 일치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려고 할 때, 종 종 좌절되거나 당혹스러워 하게 된다. 특히 일치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어두운 밤을 거쳐야 한다. 이 어두운 밤은 성요한의 매우 잘 알려진 개념인데, 심지어 하느님과의 일치가 이 어두운 밤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한 이 어두운 밤은 고통과도 연관이 된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가 일종의 고통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성요한에게 있어서 일치에 이르는 길은 이와 같이 다양한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일치의 개념은 어두운 밤 혹은 고통으로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성요한이 주장하는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르는 방법의 중요한 특징들을 연구한다. 동시에 일치의 개념이 무엇인지 밝히고자 한다. 성요한이 제시하는 하느님과의 일치는 물질의 변화가 아니라, 관점 혹은 시각의 변화이다. 이러한 시각의 변화는 세상의 지식과 하느님의 지식과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즉 일치는 지식과 시각의 문제인 것이다.
본 논문은 성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드러난 개인적 경험과 규범적 경험의 관계성에 대해서 연구한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사를 돌아보면 이 두 경험들 사이 에 보여 지는 갈등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본 논문은 성이냐시오의 저 서가 종교적 경험에 있어서, 개인적 경험과 규범적 경험의 합일이 필요함의 가 능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논의할 것이다. 성이냐시오의 저서는 규범적 경험이라 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피정자들이 따라야할 객관적인 안내서이기 때 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영신수련>은 이러한 규범적 경험이 모든 사람들에게 획일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각 개인은 자기 자신 고유의 특성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피정자들은 피정을 지도하는 안내 자의 지도를 따라야 하지만, 성이냐시오는 하느님 자신이 직접 피정자들 각 개 인의 고유한 상황들과 관련하여 통교한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성이냐시오는 이 러한 전제하에 개인적 경험과 규범적 경험은 서로 보충적 상호 작용을 하고 있 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논지를 전개하기 위해, 본 논문은 <영신수련>에 드러난 구조와 내용들을 분석할 것이다.
본 논문은 에크하르트의 버림의 개념과 신과의 일치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 다. 에크하르트는 잘 알려진 중세 후기의 중요한 신학자이며 철학자이고 동시에 신비가이다. 또한 그의 급진적인 사상들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심지어 이 단으로까지 비판 받았다. 특히 버림의 개념은 인간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러 한 자아를 신의 본질과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즉 에크하르트는 버림의 개념을 통하여 신과의 일치를 추구한다. 따라서 버림의 개념은 인간을 부정하거나 신에 대한 지식의 거부가 아니다. 버림의 개념은 신과의 일치를 위한 새로운 삶으로 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자아를 버림으로써, 영혼은 신의 본질과 동일시되는 것 이다. 버림은 부정적 개념의 사라짐 혹은 무가 아니다. 오히려 버림은 적극적 의미의 삶의 완성이다. 역설적으로 버림으로써 얻는 것이다. 즉 피상적이고 가 짜의 존재를 버리고, 참된 진짜의 존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러한 버림의 다양한 측면들을 고찰 한다: 자의지로부터 벗어나는 것, 가난의 개념과 버림의 관계, 신의 이미지를 부정하는 것의 의미, 창조와 비창조의 일치의 개념, 버림의 개념을 통한 진정한 자아의 개념.
계몽주의 이후 영국에서 종교적 영성은 흥미로운 변화를 맞게 되었다. 사람 들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인격신을 비판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대 신할 수 있는 다른 것을 찾기 시작하였다. 아이리스 머독은 그러한 변화에 기여를 한 사상가들 중의 한 명이다. 머독은 전통적인 신개념대신에 플라톤의 선함 의 개념을 강조하였다. 즉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영성은 절대적인 신의 타자성을 중심으로 이해되었지만, 머독은 영성에서 중요한 면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이 라고 『종』이라는 소설에서 보여주고 있다. 본 논문은 아리리스 머독의 『종』이 영성에서 중심축을 신의 타자성에서 자아에 대한 지식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을 보여준다. 첫째, 공동체와, 성, 그리고 사랑과 관련하여 이 소설이 환상에 대항 하여 현실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어떤 영성적인 가치와 통찰들을 보여주는지 논 의한다. 둘째, 계몽주의 이후 다양한 형태로 변화를 겪어오고 있는 자아와 신의 관계에서 현대인들에게 인식의 중요성이 무엇인지 고찰한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은 변화와 역설의 시기였다. 왜냐하면 과학과 기술과 관련하여 발전과 업적을 이루었지만, 동시에 서로 상반되는 생각들이 공존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당시엔 물질주의와 반물질주의, 세속화와 영성, 과거와 현재 등이 복잡하고 미묘하게 서로 얽여 있는 시대였다. 한편으로 문명과 삶이 계속해서 발전해나갈 것이라는 낙관론이 있었지만, 동시에 퇴보라는 생각도 공존하였다. 특별히 챨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라는 책은 아마도 새로운 세상, 그리고 발전과 진보라는 희망을 상징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희망 안에서 퇴보라는 느낌도 겪어야 했다. 토마스 하디의 비천한 주드라는 작품을 보면, 주드와 슈라는 두 등장인물 안에서 그러한 측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특별히 이 두 등장인물을 통해서 다뤄지는 종교와 여성의 문제에 관하여 빅토리아 시대의 문맥 안에서 이 작품을 고찰하고자 한다. 두 인물은 교육과 여성성과 관련하여 나름대로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엔 실패로 돌아간다. 그들의 실패는 하디의 비관론적 차원에서 퇴보를 암시한다.
계몽주의는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적 그리고 지성적 움직임이었다. 그 것은 삶과 현실을 이해하고 설명하는데, 전통적인 권위였던 종교성에 대항하여 이성의 힘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항상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면만을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성과 과학 그리고 기술에 대한 지나친 강조로 인하여 때 론 인간성의 파괴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다니엘 데포의 로빈슨 크루소 는 이 러한 계몽주의가 한창이던 시대에 쓰여졌다.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인간의 이성 과 신앙이 대립되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내적으로 연관되어질 수 있는 가능성 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계몽주의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 이성의 힘이 크 루소가 일상의 필요한 것들을 창조해 내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점은 분 명하다. 일상의 필요한 것들은 일종의 미시적 의미의 문명이나 문화를 암시한 다. 둘째, 제국주의와 노예문제와 관련하여 크루소는 계몽주의의 부정적인 면을 보여준다. 셋째, 이성과 신앙은 크루소의 회심의 과정과 두려움을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노발리스의 미완성작인 『하인리히 폰 오프테르딩겐』의 신 화적 상상력과 파편성의 개념이 창출해 내는 불확정성의 의미에 대해서 논의하고자 한다. 이 소설은 낭만주의의 중요한 특징인 신화와 상상력 의 역동성이 유럽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 가 지 흥미로운 사실은 신화적 상상력이 해석의 과정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노발리스는 이 소설에서 하나의 완결됨을 보여 주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작가가 일부러 끝내지 않았는지, 혹은 끝낼 수 가 없었는지 알 수 없지만, 미완성의 소설로써 파편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본 논문은 소설에서 드러나는 그러한 미완성의 개념이 실패가 아니라, 전체를 드러내는 낭만주의적 방법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 T. S. 엘리엇과 낭만주의 사이에 연속성이 있는지 언급 될 것이다. 『하인리히 폰 오프테르딩겐』에 드러나는 신화는 창조적 상 상력의 근원이며 불확정성은 전체성이라는 측면을 논의함으로써, 우리 는 노발리스의 소설이 엘리엇의 작품들에 드러나는 파편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