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남송대 불전미술 연구는 석가모니의 극히 일부 이야기들만이 표현된 작품을 중심 으로 이루어져, 이 시대 불전도상의 전반적 양상은 파악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복건성 천주시 개원사의 남송대 동탑 기단부에 석가모니의 전생, 현생뿐만이 아닌 중국 불교의 역사 와 고승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구성된 부조가 무려 39장면이나 남아있어 주목된다. 본고는 각 장면의 제목과 도상을 분석해 다음과 같은 내용상의 특징을 밝혔다. 먼저 개원 사 동탑 불전부조에는 중국의 불전미술 작품 중 가장 다양한 전생담이 담겼다. 동시에 중국 불전미술 최초로 선어록, 비유담, 지괴소설의 내용이 조각되었다. 또한 이 작품은 중국 불전 미술 작품 중 중국 불교의 역사가 표현된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본고는 불전부조의 제작 시기가 동탑의 건립 시기(1248~1250)와 동일함을 증명하기 위 해 불전부조의 석재인 휘록암과 도상의 표현 특징을 살펴보았다. 먼저 문헌을 통해 남송대에 동탑 불전부조의 석재로 청석 즉 오늘날의 휘록암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 으로 불전부조의 복식, 가구, 공수법, 장난감의 표현에서 남송대 문화가 잘 반영되었음을 확 인했다. 개원사 불전도상 중 대단히 주목되는 것은 민머리와 복두의를 착용한 석가모니이다. 이 도상들에서 석가모니는 나한을 연상시킨다. 더욱이 일부 장면들은 선사의 말씀을 기록한 선 어록으로 이와 같은 사실들은 개원사 불전부조가 선종적 성격을 지녔음을 나타낸다. 또한 입태 장면의 마야부인 도상 역시 주목된다. 이 장면에서 마야부인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 그동 안 이런 포즈의 마야부인은 오대 1작품, 청대 2작품 만으로 도상의 연계를 논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개원사 불전부조로 인해 이 문제는 해소되었다. 나아가 이 도상은 조선시대 팔상도 중 입태 장면 속 앉아 있는 마야부인 도상의 연원에 단초를 제공했다.
이 글은 1874년 프랑스에서 간행된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 에서 조선의 불교가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는지 살펴본 연구이다. 달레는 조선을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기 때문에 조선에서 직접 선교활동을 한 선교사들의 서한과 기록들에 의지하여 책을 집필했다. 따라서 이 책에 비 친 조선의 불교는 달레 한 사람만의 인식이 아니라, 19세기 조선을 경험 한 서양 선교사들의 전반적인 인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책에서 불교는 ‘예전 종교’로 서술되었다. 즉 현재의 불교는 국가와 사회로부터 존경을 잃고 쇠퇴한 모습일 뿐이며, 불교가 종교로서 누렸던 위상은 이미 과거의 일이라는 인식이다. 선교사들이 본 사찰은 대부분 폐 허로 변했고, 승려는 부패했다. 종교인이었지만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를 지녔던 서양 선교사들은 조선의 모든 상황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불 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흥미로운 것은 오늘날 한국의 천주교인들이 이 책 에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천진암과 주어사라는 사찰을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서 성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천주교에서 추앙하는 성인 중에 이벽과 권철신 등이 이 두 사찰에서 처음으로 서학 연구를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오늘날 천주교와 불교계는 갈등을 빚고 있다. 한국천주교회사에 담긴 불교에 대한 내용은 선교사들의 부정적 인식 을 다룬 부분과 천진암・주어사와 관련한 논쟁 정도가 전부로서 분량이 매우 적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조선 후기 불교의 모습을 유추해낼 수 있다. 선교사들이 본 부정적인 모습에는 당시 승려들이 국가의 잡역에 시 달렸던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또 그런 현실에서도 왕실에서 불사를 지원했던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사찰을 활용해 서학을 연구하는 모임을 가졌던 점도 조선 후기 사찰의 역할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조선 후기 사찰은 민간신앙을 포섭하면서 지역민에게 친근하고 익숙한 공간으 로 자리매김하였고, 유학자뿐만 아니라 천주교인도 거부감 없이 이용할 수 있었던 지역 사회 종교 문화의 거점이었다.
이 글은 천주교의 민주화 운동을 1960년대부터 2020년까지 정리하고, 천주교 민주화 운동이 천주교 신자 증감에 미친 영향에 관해 연구했다. 우리나라는 군부와 신군부를 거치며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 강한 사회였 고, 천주교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시대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대한민국이 민주화 가 된 이후에도 천주교는 민주화운동을 지속해서 실천했다. 이러한 활동이 천주교 신자 증가에 영향을 미치며, 특별한 사건이 있을 때 상대적으로 높은 천주교 신자는 증가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우고 함평고구 마 사건과 광주민주화운동의 사례와 관련하여 광주대교구의 신자 증가 문제를 분석했다. 그 결과 이들 지역에서는 천주교의 민주화운동 참여가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고 있음을 밝힐 수 있었다. 또한 천주교는 민주화운동을 통해 쌓은 긍정적 이미지를 유지할 수 있었고, 민주화 이후에도 꾸준한 활동을 보여주어, 인구감소, 타종교인감소 등의 어려움 속에서도 지속적인 신자 증가를 이룰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바티칸과의 단절이 오래되었지만 중국의 천주교는 기본적으로 가톨릭 보세(普世) 교회의 원칙을 따르고 있다. 때문에 중국 천주교의 사제양성 교육과정 또한 세계 각 국에서 보편적으로 실시되고 있는 교육과정과 비교했을 때 큰 차별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중국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다음과 같은 특징 을 지니고 있다. 첫째, 종교학교의 설립과정과 운영에 있어 정부기관의 개입이 광범 위하고 영향력 또한 크다. 둘째, 교육과정은 보편적 교육과정을 지키고 있으나, 중국 정부의 종교중국화 정책에 따라 중국 철학사상 방면의 교육이 강화되고 있다. 결론 적으로, 중국 천주교 종교교육이 지닌 특징은 교육기관의 설립에서 교육내용에 이르 기까지 사회주의적 종교정책이 관철되도록 다양한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장치가 어떠한 실질적 효력을 발생할 지에 대해서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한무숙의 『만남』은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문학적으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천 주교의 전래와 그 과정에서의 고난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런데 작품 에서 천주교는 물론 탄압의 주체인 유교, 그리고 불교와 무속까지 ‘모순적 공존’ 을 보여주고 있다.『만남』에는 관조와 초월의 시각이 특징적으로 나타나는데 대 상과 거리를 두고 사심 없이 바라보는 미학적 향유로서의 관조를 통해 현상이 대립이나 갈등보다 ‘아름다움’으로 인식된다. 또 세계를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는 초월의 시선으로 조망함으로써 주술적 신비를 인정하고 인위적 인 혁신보다 현존하는 제도와 윤리를 수용하게 된다. 이러한 두 개의 시각은 한 무숙 문학의 중요한 미학적 특징으로 가부장적 억압을 자학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극복하고자 했던 작가의 체험과 연결된다. 작가는 결혼 후 전통적 인습으로 인해 자아 상실을 경험하지만 정면의 도전보다 억압적 요구를 철저히 수행함으로써 비판적 항의를 실현하는 역설적 저항을 보여준다. 경계를 무너뜨리거나 이탈하 기보다 안에서 억압을 철저히 수행함으로써 모순을 통찰하는 밖의 시선을 확보 하게 된 것으로 경계의 안과 밖을 가로지르는 시각을 통해 인식적 저항을 실천 하고 있다.
본고는 초대 한국 천주교회 설립 단계에서 한국 천주교 문학에 이어진 서간 중 이순이 루갈다 가족의 서간의 특징을 중심으로 한국 천주교 서간 문학의 특 징을 규명한 글이다. 서간은 한국 전통 문학의 양식의 하나일 뿐 아니라 성경을 비롯하여 교회문헌에서 이어진 글쓰기이다. 이순이 루갈다 가족의 서간은 이러 한 두 전통이 만나 형성, 전파, 전승된 한국 천주교 문학의 대표작이다. 본고에 서는 이순이 형제의 서간을 ‘가족 서간’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논의를 전개하였 다. 이들 서간은 가족이 주체가 되어 가족에게 남긴 서간에서 출발하여, 이것이 신앙 담론과 결합하면서 신앙을 중심으로 한 신앙 공동체의 담론으로 변모한다. 또한 순교에 대한 심정과 과정을 진솔하면서도 과장 없이 기술함으로써 사적인 편지에 머물지 않고, 신앙의 모범이자 신앙의 가치를 담은 교회의 서간으로 의 미화 된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조선 사회에서 가서의 형태로 전해진 이순이 가 족의 서간은 수도 공동체나 사도 중심의 서구 가톨릭 신앙 공동체 및 그들의 서 간과 다른 한국 천주교회가 남긴 한국 천주교 문학의 유산이다
『은화』는 윤의병 신부가 쓴 한국최초의 천주교 소설이다. 1939년부터 1950 년 경향잡지에 연재되었으며 병인박해를 배경으로 한 군난소설이다. 본고에 서는 『은화』의 창작배경과 특징을 고찰하였으며 통합적 생태론의 입장에서 생 태 이야기로서 『은화』의 의의를 규명하였다. 『은화』는 성직자에 의해 집필되 고 성직자의 적극적인 기획으로 발표될 수 있었다. 한국 천주교의 경우 성직자 가 천주교 문학의 주역이었으며, 군난소설 『은화』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군난소설 『은화』의 등장은 소설에 대한 교회의 시각 변화를 보여준다. 또한 한 국의 천주교 소설 『은화』는 생태이야기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은화』는 종교와 정치 사이의 긴장 관계 속에서 신앙의 주체인 인간을 ‘꽃’으로 비유하여 환난 중에도 꽃처럼 피어나는 신앙인의 삶을 형상화한 소설이다. 지구생태 위기 시대인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인간과 자연이 공존함으로써 생 존할 수 있는 지혜와 더불어 ‘이주’라는 방식으로 형상화한 서사를 통해 삶의 터 전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일상생활에서의 실천을 종교 이야기를 통해 알려준다.
現代西歐社會와 美國의 境遇社會福社의 目標는 ‘모든 인간의 幸福’에 있으며, 이러한 社會福社의 목표는 社會福社의 4가지 原理에 그 基盤을 두고 있는데, ‘인간의 尊嚴性’, ‘자기 결정권’, ‘기회평등의 구현’ 및 ‘사회적 책임’이 그것이다. 天主敎의 社會福社분야에 대한 중심교리는 성서의 “하느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 " (創世記 27.)는 부분에 근원을 두고 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인간이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은 당연히 보장되어야 하며, 하느님 앞에서는 평등하다는 ‘평등사상’이 내포되어 있다. 또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은 자신의 모든 행동에 대해 스스로 결정하고 하느님 앞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사상이며, 인간의 고통은 죄의 결과로서 자신이 지은 죄로 자신이 고통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남을 고통스럽게 하므로 인간의 고통은 연대성 및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회적 책임’등 천주교의 사회교리에는 現代西歐社會福社의 모든 가치가 다 내포되어 있다. 본 고에서는 천주교의 사회복지활동은 보다 ‘낮은 곳을 향하여’, ‘보다 더 손길이 필요한 곳을 향하여’ 노력하고 있음이 통계적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기독교의 경우, 교회와 국가(Church and State)의 관계는 기독교의 탄생 이후 계속해서 연구되어 온 주제이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는 각 시대, 국가, 현실에 따라 매우 다양한 관계를 형성해왔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연구를 정리하면 대개 4가지 타입으로 요약할 수 있다. 교회와 국가의 일치, 교회 우선 혹은 국가 우선,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그것이다. 이 논문에선 이런 이론적 틀을 토대로 조선 후기에 천주교가 조선에 재 래되면서 국가와 천주교가 부딪히며 일어난 핍박과 박해 가운데 당시 천주교인들의 대응을 통해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했는지 대표적 인물인 황사영과 정하상의 대응(백서(帛書)와 상재상서(上宰相書)) 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이 연구를 통해 이들이 각각 교회우선주의와 국가 우선주의의 유형에 속했음을 알 수 있고 이들의 대응이 향후 천주교의 전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또한 이런 차이가 왜 발생하게 되었는지를 검토하였다. 조선에 재래된 천주교는 하나였지만 교회와 국가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박해 시에 천주교 안에는 하나 이상의 입장이 존재했고, 이런 입장은 시간의 흐름과 폭넓은 경험 그리고 교육에 의해 극단적인 입장에서 이해와 대화를 시도하는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되어갔음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天主歌辭와 反天主歌辭인 闢衛歌辭를 대상으로 가사 작품의 어조와 서술 방식을 분석하여 조선조 후기 가사의 흐름을 살피고자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박해를 당하기 이전의 작품들이기에 신앙을 지키고자 하는 처절한 절규나 교리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깨우치기보다는 천주교 신앙의 가장 근본이 되는 내용을 유교의 이념과 덕목에 견주어서 표현하고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 사회는 성리학이 지닌 모순을 뛰어넘기 위한 대안으로 실학을 등장시켰으며, 청나라를 통해 들어온 서학과 과학 문명은 조선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조선 사회의 기초가 흔들리고 민중들의 불만이 표출되면서 천주교의 평등사상은 보통 사람들에게 환영받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과 맞물리면서 조선조 후기에 모습을 드러낸 종교가사로서의 천주가사는 가사문학의 하위갈래이며, 가사라는 양식을 문학적 토양으로 하여 창작되었다.
18세기말 조선이라는 특수한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낯선 사상이 낯익은 노래 양식과 만나서 내용상으로는 논증의 과정을 거치며 창작된 것이 18세기 말의 天主歌辭와 闢衛歌辭 작품이다. 이들 가사 작품은 작가 자신이 겪은 체험을 불러내어 새로운 공감의 장을 만들기도 하고 나누기도 했다. 문화 융합의 관점에서 볼 때, 천주가사가 지닌 내용들은 노래를 통해서 독자나 청자에게 체험을 나누며 긴장과 일치를 느끼게 하는 역할까지도 해내고 있다.
천주교의 핵심 교리를 짧은 노래로 전하려 했던 「天主恭敬歌」와 구약성서 십계명의 가르침을 토착 언어와 서민들의 일상을 바탕으로 표현했던 「十誡命歌」, 「天主恭敬歌」를 정면으로 반박하며 지었던 「警世歌」를 꼼꼼하게 살피는 것은 조선 후기 가사 작품의 본질을 찾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본다. 또한, 闢邪衛正을 주장하며 五倫歌의 짜임에 따라 조목조목 천주교의 가르침을 비판했던 「尋眞曲」과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철학적 사유의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나갔던 「浪遊司」는 유학자의 입장에서는 금수만도 못한 천주교의 도리를 비판적 시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천주가사는 유학자들의 미의식이 반영되었던 사대부 가사가 지니고 있는 군주에 대한 생각과 이념을 천주로 대체하여 전통 양식에 새로운 종교적 가치와 이념을 담은 문학작품이다. 가사작품의 어조와 서술방식을 분석하면서 얻은 결과는 시가문학의 본질이자 가사의 본질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공유되고 확장되었느냐하는 데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하는 데서 논의를 시작하였다.
최근 동서교류, 특히 그리스도교와 동아시아 문화의 만남에 대한 연구가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연구는 그리스도교 한문 전교서가 동서 문화 교류 연구에 주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저술되었다. 이 연구의 초점은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선교사 쥴리오 알레 니(Giulio Aleni 艾儒略, 1582-1649)가 저술한 천주강생출상경해(天主降 生出像經解, 1637; 이하 출상경해)이다. 출상경해는 예수의 생애를 탄생부터 승천까지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스페인 출신 예수회 사제인 제 로니모 나달(Jerónimo Nadal, 1507-1580)의 복음역사 도해집(Evangelicae historiae imagines)의 한문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알레니는 복음역사 도해집을 3분의 1정도로 간추려 번역했다. 이 연구는 알레니가 나달의 복음역사 도해집을 중국인 독자를 위해 어떻게 번역하고 변용시켰는지, 곧 번역과 문화 전수란 관점에서 출상경해를 연구한다. 이를 위해 이 연구는 네 가지 주제를 다루고자 한다. 첫째는 서문격인 “천주강생출상경해인”(天主降生出像經解引)을 통해 출상경해의 목적과 원리를 규명한다. 둘째, 나달의 복음역사 도해집과 출상경해의 구조를 비교하여, 알레니가 복음역사 도해집에서 어떤 도해를 선택하고 또 어떻 게 배열했는지를 다룬다. 셋째, 알레니가 복음역사 도해집에 없는 도해 를 삽입하거나 여러 도해를 하나로 합성한 사례를 중심으로 라틴어 저본의 한문 번역에 대해 고찰한다. 마지막으로 시각 이미지 측면에서 출상경해의 특징을 고찰한다. 나달의 복음역사 도해집은 출상경해 뿐만 아니라 다 로카 신부(Giovanni da Rocha, 1565-1623)의 송염주규정(誦念珠規程, 1620)에 수록된 그림과 요한 아담 샬 폰 벨(Johann Adam Schall von Bell S.J., 1592-1666)의 진정서상(進呈書像, 1640)의 일부 그림의 저본이 되 었다. 이 연구는 나달의 복음역사 도해집의 중국화라는 점에서 이 세 작 품을 비교하여 출상경해의 특징을 규명한다. 결론적으로 출상경해는 라틴어 도상과 해설의 한문화를 통해 서양 그 리스도교의 핵심적 내용을 중국인과 소통하고 전수하려는 시도였다고 평 가할 수 있다. 출상경해는 라틴 그리스도교 문화를 중국에 전수할 때 예 수회 선교사들이 가졌던 실용적이고 창의적인 자세와 함께, 문화적 적응 내지 중국화보다는 서양의 문화를 충실하게 번역하고 전달하려는 양면적 성격을 보여준다. 이러한 양면적 성격은 17세기 동서 문화 교류를 이해하 고 평가하는 중요한 틀이 될 수 있다. 출상경해 이외에도 이 시대 수많 은 한문 전교서에 대한 폭넓은 연구는 명청 시대의 가톨릭교회의 선교를 통해 이루어진 동서 교류의 성격과 면모를 더욱 분명하게 밝혀줄 것이다.
한글 근대 활자 인쇄사적 관점에서 한글 번역 성경의 역사적 변천을 천주교 , 개신교로 나누어서 , 출판 년대 별로 분류하고 , 타이포그래피의 실증적 분석을 통해 , 천주교의 성경출판의 역사적 변천을 수반한 타이포그래픽의 발전을 명확히 정리하였다 . 천주교 선교사들은 병인박해 후에도 조선 정부의 엄중한 탄압정책에도 굴복하지 않고 , 조선과 중국과 일본에서 활동한 관계로 , 국내와 국외로 나누어서 정리하였다 . 국내 조사에서는 , ① 1860 년 조선교구 인쇄소의 목판본 간행목록을 정리하였다 . ② 1870 년대 블랑 신부에 의해서 설립된 인쇄소에서 간행된 목활자로 인쇄된 활자본을 조사하였다 . 국외 조사에서는 , ③ 1879 년부터 리델 주교의 주도로 요꼬하마의 출판활동과 1881 년부터 1886 년까지 코스트 신부가 나가사키에 설립한 조선교구 인쇄소에서 간행된 연활자본을 조사 정리하였다 . ④ 1886 년 조선교구 인쇄소의 서울이전 , 그리고 1898 년 명동성당 완공 후의 인쇄활동에 관해서는 [ 표 ] 로 정리하였다 .
지금까지 근대 활자 인쇄사에서도 미해명 되어왔던 , 천주교 선교사들의 한글 활자 개발의 계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본문용에는 1880 년 최지혁체 5 호 활자 , 1881 년 2 호 활자 , 1886 년 4호 활자 , 1887 년 3 호 활자 , 1889 년 1 호 활자 , 1894 년 5 호 활자 , 제목용에는 1895 년 초호 활자가 해서체로 개발되었다 . 여기서 동일인 원도로 개발된 활자를 제작 년대 순으로 나열하면 , 1881 년 2 호 활자 , 1886 년 4 호 활자, 1887 년 3 호 활자, 1894 년 5 호 활자가 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