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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復菴 曺垣淳(1850-1903)이 南冥 曺植(1501-1572)의 핵심 사상을 담지하고 있는 「神明舍圖」와 「神明舍銘」에 대해 어떤 관점에서 해석했으며, 그것이 가지는 의의가 무엇인지를 고찰한 것이다. 조원순은 남명의 10세손으로서 남명학의 계승과 선양을 평생의 사명 으로 삼은 학자이다. 그는 이 사명을 위해 「神明舍圖銘」에 대해 註解하 고 그림을 개정했으며, 1897년에는『南冥先生全集』을 간행했다. 조원순은 「神明舍圖銘解」ㆍ「論神明舍圖」ㆍ「辨神明舍圖」ㆍ「客辨」 등 네 편의 저술을 지어 「신명사도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의 해석에서 나타나는 특징은 「신명사도」의 구조를 上面의 持敬과 下面의 立誠으로 파악한 점이다. 「신명사도」에 대한 조원순의 설명을 토대로 남명의 학문에서 敬ㆍ義는 방법에 해당하며, 誠은 도달해야 할 목표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조원순은 남명의 「신명사도명」을 周敦頤의 「太極圖說」과 동일한 내 용으로 해석했으며, 이전의 「신명사도」를 고쳐 새롭게 개정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것을 통해 남명의 학문이 老莊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 성리학에 근본한 순정한 학문이었다는 점을 밝히려 했다.
        2.
        2017.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德山洞府를 문화지리학적 측면에서 접근한 것인 바, 남명이 산천재에 게시했던 「신명사도」와 덕산동부가 일정한 함수관계에 놓인 다는 가설에 기반한 것이다. 구조적 측면에서 입덕문은 口關 역할을 하며, 확 트인 덕산동부는 태일진군이 다스리는 나라일 수 있다. 사상적 측면에서는 堯舜日月의 유가적 이상과 武陵桃源의 도가적 이상이 상호 맞물린다. 덕산 공간 역시 「신명사도」에 근거하여 그 경계지점에 입덕 문이 놓이고, 덕천벼리라는 좁은 공간을 통과하면 안쪽에는 넓은 공간 이 나타난다. 廣-狹-廣의 구조 속에서 독특한 문화가 생성되었던 것 이다. 덕산에는 남명 관련 이야기가 언중에 의해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남명이 덕산에서 사치를 즐겼다, 자신을 사모하다가 구렁이가 된 처녀 와 함께 살았다, 幽宅을 친구에게 주었다가 사후에 돌려받았다, 퇴계와 도술 시합을 벌여 이겼다는 등의 이야기가 대체로 그러한 것이다. 이러 한 이야기는 주로 덕산 일대에 민중 사이에서 광범하게 전해지는 것으 로, 「신명사도」와 덕산동부의 상관성과는 또 다른 측면의 구술문화를 형성하였다. 민중들은 남명 이야기를 흥미 본위의 대항 담론으로 이끌 어 간 것이라 하겠다.
        3.
        2015.03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연구는 남명의 신명사도에 나타난 인간 마음의 특징과 그 작용에 대한 관점을 인간정보처리론적 학습심리 관점에서 학습심리적 함의를 고찰하는 것이 목적이다. 우선, 신명사도의 의미와 인간정보처리론과 정보처리모형을 살펴본 다음, 신명사도의 학습심리적 요소와 정보처리모형을 상호 비교해 볼 것이다. 그럼으로써 신명사도가 지니는 학습심리적 함의를 인간정보처리 론에 기초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신명사도는 외부의 자극에 대한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실천적으로 나타나 는 행동을 표현하는 그림이다. 구조적으로는 원곽, 원곽내, 그리고 하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신체적으로 눈·귀·입, 두뇌 및 마음, 몸으로 구성되어 있고, 기능적으로는 정보수집, 인지과정, 몸의 행동으로 작용한다. 또한 신명사도는 인간정보처리론적 학습심리의 관점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러한 관 점을 밝혀냄으로써 본 연구는 서구의 학습심리 이론보다도 무려 400여년이 나 앞서 교육에 활용되었다는 점을 구명했다는 측면에서 연구의 의의를 찾 아볼 수 있다. 신명사도를 인간정보처리론적 관점에서 고찰해 볼 때, 드러낼 수 있는 학 습심리적 함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학습자의 내적 인지과정을 이해할 수 있 는 학습심리모델을 제시하였다는 점, 둘째 인간의 학습과정에 있어서 효과 적인 학습방략을 제시해 주었다는 점, 그리고 셋째 학습자를 능동적인 정보 처리자로 간주하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4.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의 목적은 우리나라 대표적 사상가이며 대학자인 남명의 신명사도에 근거하여 오늘날 유아기 인성교육에 적합한 수업모형을 탐색하는 데 있다. 신명사도에 근거한 본 수업모형은 남명의 실천사상을 통해 개인의 감정 존중과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올바른 마음가짐으로 자기실천화를 고양시켜 조화로운 인성발달로 연결하는 전인교육의 함의를 제시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역사적 인물을 통한 정체성있는 인성교육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유아기 전인발달을 도우는 인성교육의 현장연구로 연결될 것이라 기대한다.
        5.
        2012.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고품질 신농흑찰, 신명흑찰 생산을 위한 중산간지와 평야지의 이앙시기와 평야지의 수확시기 설정을 위한 시험을 수행 후 얻어진 결과는 다음과 같다. 1. 이앙시기가 늦어질수록 재배지역, 시험품종에 관계없이 출수기는 늦었다. 동일한 이앙시기인 6월 5일 중산간지 진안, 평야지 익산의 신농흑찰, 신명흑찰 출수기는 큰 차이가 없었다. 재배지역별 출수기는 이앙시기가 상대적으로 빨랐던 진안의 평균 출수기가 빨랐다. 또한 이앙시기별 신농흑찰의 출수기는 신명흑찰의 출수기보다 늦어 진안은 2~3일, 익산은 1~2일정도 늦었다. 2. 이앙시기에 따른 현미수량은 진안지역에서 신농흑찰은 5월 25일 신명흑찰은 5월 30일 이앙에서 수량이 많았으며. 익산에서는 신농흑찰, 신명흑찰 현미수량은 이앙시기가 늦어질수록 감소하는 경향이었다. 3. 이앙시기가 늦어질수록 평야지인 익산보다는 중산지 진안에서 신농흑찰의 안토시안함량이 높아 6월 5일 진안지역 신농흑찰의 안토시안함량이 100 g당 337.3 mg으로 가장 높았다. 4. 이앙시기별 완전 착색미 비율은 신농흑찰, 신명흑찰 모두 진안, 익산에서 이앙시기가 늦어질수록 높아지는 경향이었으나 완전 착색미 수량은 진안 5월 30일 이앙에 익산 6월 10일 이앙에서 가장 높았다. 5. 수확시기에 따른 익산지역의 완전착색미 비율은 수확시기가 늦어질수록 감소하는 경향이었으나 완전착색미수량은 신농흑찰 출수 후 50일 수확에서 가장 높았다.
        6.
        2010.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神明舍圖」와 「神明舍銘」은 南冥 曺植의 학문적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南冥學의 핵심 사상이 담겨 있는 圖說이다. 그런데 后山 許愈가 「神明 舍圖銘或問」을 지어 이것에 관한 해석 작업을 시도하기 이전까지 300년 동안 은 어느 누구도 그 내용과 의미를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后山은 「神明舍圖銘或問」을 지어 南冥의 「神明舍圖銘」을 상세히 해석하고 그 것이 가지는 유학사적 의미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神明舍圖銘」에 南冥의 心學이 오롯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南冥의 「神明舍圖銘」에 대한 주해 작업을 경상우도 학자들의 공적 안건으로 발의함으로써, 南冥의 학문과 수양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南冥學의 요체를 분명하게 파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므로 「神明舍圖銘或問」은 后山의 개인적 저술이라는 의미를 넘어, 당시 慶 尙右道의 학자들이 학문적인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남명학을 조명하는 촉발점 이 되었으며, 그 작업에 그들의 학문적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 였다.
        7.
        200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1501-1572)의 「神明舍圖銘」은 한 인물이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수양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이겨내는 과정을 다룬 것 으로, 그의 엄격한 수양론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본고에서는 남명의 「신명 사도명」을 계승한 남명학파 학자들의 문학 작품 5편을 통시적으로 살펴봄으로 써, 지리산권 가운데 하나인 진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남명학파의 마음 공 부를 이해하는 일단의 실마리로 삼았다. 대상으로는 삼은 작품은 龜巖 李楨의 「神明舍賦」, 東岡 金宇顒의 「天君傳」, 寒沙 姜大遂의 「神明舍記」, 台溪 河溍의 「神明舍記」, 俛宇 郭鍾錫의 「神明舍賦」 등이다. 이 5편의 문학 작품이 가지는 재해석의 면모와 시대적 의미를 고찰해 볼 때, 크게 두 가지 정도로 그 결론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남명의 「신명도사명」을 각기 계승하되 그것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와 중 요성을 저마다의 입지와 관점에서 조명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5편의 작품 들은 자신의 관점과 시대적 필요에 의거해 「신명사도명」의 핵심을 파악하는 해 석의 각도가 차이를 빚게 되었다. 따라서 부각시키려 한 중심 내용이 달라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둘째, 남명학파의 계보상에서 저자들을 구분해 볼 때, 그들의 작품이 가지는 의의를 남명학파의 시대적 상황과 연관시켜 가늠해 보게 된다. 구암과 동강의 작품은 ‘남명학의 계승과 전파’라는 측면에서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한사와 태계의 작품은 인조 반정 직후 남명학파의 명맥이 끊어질 위기에 봉착하여 ‘학 맥의 수호’라는 관점에서 해석해 볼 수 있다. 면우의 작품은 외세의 침략과 국 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시기에 유학적 마음 수양의 指南으로서 ‘남명의 심학을 천양’한 것이라고 규정해 볼 수 있다.
        8.
        2007.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구암 이정(1512-1571)은 1544년 그의 나이 33세 이후 퇴계를 사사하여 그 학문을 표적으로 삼아 자신의 학문을 이루려 하였음은 물론, 인근 고을에 거처 하던 남명과도 끊임없이 친분 관계를 유지하며 그 고상한 정신 경계를 추앙하 여 자기화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구암의 「신명사부」는 남명의 「신 명사도명」과 명칭만 유사한 것이 아니라, 남명 사상의 핵심이라 할 경의 사상을 자기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구암은 퇴계와 함께 남 명을 자신의 학문 표적으로 삼아, 평생을 성의와 집념으로 위기지학에 종사했 던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는 주자학적 방법만으로도 성현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래서 주자학만을 고집하는 崇正學의 기치를 내걸어 이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가 는 사람을 指斥하기에 이르렀다. 남명은 성현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중요하다 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주자학적인 요소가 아닌 것이 학문 방법으로 원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퇴계는 목적을 위해서는 방법이 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 는 것이고, 남명은 자신에게 맞는 여러 방법을 사용하여 목표를 이루는 것이 중 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구암이 학문의 표적을 퇴계에게도 두고 남명에게도 두었으나, 세상에서는 대 체로 구암의 학문이 퇴계를 이은 것으로만 언급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는 앞으로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구암의 학문 표적을 퇴계에 게만 두고 남명과는 친분 관계 이상의 학문적 영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는 구암의 학문에 대한 진실한 접근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이로 인해 남명학파 내에서도 구암의 위치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 위치를 찾을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제 우리는 구암을 한강이나 동강처럼 퇴계학파와 남명학파를 아우르는 노 력을 한 초기 인물로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덕계가 퇴계・남명 양현 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한강과 동강을 이끌어 양현의 학문을 겸하도록 하는 데 발판을 마련해 주었다고 볼 수 있듯이, 구암은 덕계나 한강・동강보다 먼저 양현 의 학문을 표적으로 하여 하나의 통합된 학문을 추구하였다고 함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9.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에서는 한말의 위기 상황에서 경상우도의 사림집단이 어떻게 그들의 사상을 定位를 확보해 나아갔는가를 후산 허유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后山을 포함한 寒洲學派에 대한 연구는 그렇게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한주학파 는 한말의 위기상황에서 퇴계와 남명의 사상적인 융합을 통하여, 새로운 시대정신 을 이끌어 내고자 치열하게 고민한 지식인 집단이다. 후산은 그 대표적인 인물의 하나이다. 그는 남명사상과 퇴계사상을 그의 고유한 심즉리설을 통하여 통합해 보 고자 하였다. 그의 신명사도혹문 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는 남명의 신명사도를 주리론적 형식 속에서 해석함으로써 아 세계에 대한 심의 主宰的권능을 확인하 고자 하였다. 아울러 그는 퇴계의 理發說을 더욱 밀고 나가 分殊속에서 작동하 는 기의 의미를 축소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그의 논의는 이미 상당 부분 양명학 적 요소를 잉태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사회정치적 함의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할 것이다.
        10.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后山許愈(1833-1904)가 살았던 조선말기는 李震相․朴致馥․趙性家․金麟 燮․崔琡民․鄭載圭․金鎭祜․郭鍾錫등이 진주 인근에 포진하여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학문적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후산은 李滉․金誠一․李玄逸․李 象靖․柳致明의 학맥을 이은 李震相의 문인이므로 외견상 퇴계학맥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의 10대조는 南冥曺植(1501-1572)의 門人이고 9대조와 8 대조는 모두 남명 私淑人이어서, 후산은 태어나면서부터 남명학파의 학문적 전통 을 이미 이어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남명학파는 사라지고 퇴계학파와 율곡학파의 학문이 강우 지역에 깊이 젖어든 이때, 후산이 남긴 神明舍圖銘或問이란 글을 중심으로, 남명학파의 후 예로서 그가 추구하였던 남명학 계승 정신과 그 의의에 대해 살펴보았다. 후산이 1889년에 신명사도명혹문 이란 글을 지은 것은 남명 학문의 핵심을 闡 發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비록 이진상의 문인으로 서 퇴계학맥에 해당하면서도, 자신의 선조가 대대로 남명학파였기 때문에 자신이 당대의 남명학파 중진 학자들의 견해를 집대성하여 이 글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후산은 이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광범위하게 수집하 려 노력하였고, 이를 수용하거나 수정하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 간에 이를 오직 논리에 따라 해결하려 하였다. 특히 쟁점이 되었던 부분은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 될 수 있다. 첫째는 神明舍銘註說의 刪削문제이다. 둘째는 神明舍圖교정 문제이다. 셋째는 신명사명 ‘動微勇克' 아래에 있는 自註‘閑邪'의 해석 문제이다. 넷째는 신명사도 의 ‘國君死社稷'의 의미 해석 문제이다. 다섯째는 신명사도 하단 止圈좌우의 ‘必至․不遷'의 위치 문제이다. 이러한 작업들은 학자들 사이에 첨예하게 대립되는 견해가 있기도 하여 매우 번 다하고 수용하기 어려운 일이었음에도 후산은 발표한 지 1년이 지난 1890년 무렵 에 이를 거의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후산은 남명의 노장적 면모보다 는 성리학적 면모를 드러내려 하였고, 이는 자신이 퇴계학맥을 이은 학자이면서 남명학파이기도 하다는 데서 학문적 절충을 시도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 후산의 이러한 노력이 가져다 준 부수적 효과는 남인 학자들과 노론 학자들 사이에 남명 학파적 유대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1930년대 단성 지역에서 진행 되었던 남인과 노론 학자들 사이의 年例討論모임이 이루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 기 때문이다.
        11.
        2004.0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프로 한구무용수들의 개인적, 긍정적 체험인 신명의 본질적 요인을 심층면접을 토대로 탐색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본 연구의 참여자는 2003년 현재 프로 한국무용수로 활동 중이며 각종 콩쿨에서 금상 및 대상수상자와 국내·외 공연에서 주역을 맡은 경험이 있는 무용수 10명(남자: 5명, 여자: 5명)을 참여자로 하였다. 이들을 통한 심층면접을 토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프로 한국무용수들이 경험하는 신명의 요인은 212개 원자료 14개 범주 6차원의 귀납적으로 분석되었으며, 다양한 신명요인을 나타내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일체감, 몰입, 쾌락, 용해, 초월, 기타 등의 차원이며, 이에 대한 범주에는 동료와의 호흡, 관객과의 일치, 인물과의 일치, 집단과의 일치, 완전한 집중, 점층적 집중, 즐거움, 좋은 기분, 성취감, 편안함, 자연스러움, 영적인 체험, 특별한 인식, 기타 등으로 나타났다. 신명은 극히 개인적이고, 비자발적이며, 우리춤에서만이 나타나는 독특한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일련의 결론들은 한국무용을 전공하고 전수하는 무용수들에게 교육적, 실행적 입장에서 의미있는 연구일 것이다. 아울러, 질적 연구에 대한 귀납적 내용 분석과 결과를 양화시키는 것과 한국인의 심리적 특성과 관련된 연관성이나 발레나, 현대무용에서의 신명과 유사한 체험의 비교 등을 제언하였다.
        12.
        2002.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Development of the Neo-Confucianism during the Chosen dynasty begun to get attention among international scholars since about three decade ago. Cho Sik (Nammyung, 1501-72) was one of the two most distinguished Neo-Confucian scholars at the sixteenth century with Yi Hwang (T'oegye, 1501-70). However, Cho Sik' scholarly achievements in the Neo-Confucianism had been neglected due to political reason during late Chosen dynasty. It was continued up to late 20th century. Recently his contributions to development of Korean Neo-Confucian studies were rediscovered by new generation. His academic works written in classical Chinese had been newly translated into modern Korean and several research institutes for Nammyung studies had initiated international academic conferences on his works and their contributions to Korean intellectual community. 『 Diagram and Inscription of Shin-myung-sa』 is one of his most important works for understanding of his scholarly world-views. I have examined this work in terms of Dae-dae cultural grammar, my model of analysis on traditional Korean culture. The diagram and Inscription could be seen as the most representative summary of his life long search to understanding Sung and Ming Neo-Confucian traditions and their realization in the Chosun (Yi) dynasty. Two fundamental concepts he focused in the search are kyung and ui . In the diagram and inscription they are neatly explained how to practice in state rule and scholar's daily living. This paper shows that Dae-dae cultural grammar underlie 『 Diagram and Inscription of Shin-myung-sa』consistent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