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불교경전의 현대적 해석과 활용이라는 관점에서 『법화경』 「묘음보살품」을 음악치료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이다. 종교 혁신의 필요성이 회자되는 사회적 변화에 호응하여 경전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접근이 필요하다. 따라서 본 연구는 불교 경전 중에 『법화경』의 「묘음보 살품」에 대해 고찰하고, 현대적 심리상담기법 중 음악치료 기법과의 연관성을 검토하고, 이를 현대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을 제시해 보았다. 『법화경』은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는 경전임에도 「묘음보살품」 에 관한 선행연구는 드물다. 대체로 다른 연구에 일부로 언급되었을 뿐 그 자체로는 연구되지 않았다. 그래서 묘음보살에 대한 접근은 명호 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접근해 보았다. 묘음보살을 원전의 해석에 국한하기보다는 그 의미를 확장하여 미묘 한 음악을 통해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로 보고, 그 치유적 성격을 현대 음악치료적 시각에서 접근하였다. 과거에는 기도와 집중을 통해 만날 수 있었던 묘음보살을 이제는 기술의 발전으로 음악 혹은 소리를 통해 만날 수 있다. 현대적 방편을 통해 보살도를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곧 불국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백제 사비시대 부여와 익산의 왕실사찰인 정림사지, 제석사지, 그리고 미륵사 지에서 출토된 3점의 塑像에 대한 분석을 통해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백제 미술의 對中交 流 양상을 고찰했다. 구체적으로는 3인이 하나의 세트를 이루는 세속 인물상의 자세 및 의복, 그리고 두 보살상의 두발 표현 등을 중국 남북조시대 및 隋唐代 자료와 비교분석하였다. 3인상의 경우, 남북조의 출행도 및 예불도와 유사성이 지적된 바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기존 연구가 남북조시대 출행도에서 나타나는 지역적 차이를 간과했음에 주목했다. 3 인의 자세, 인물 구성, 侍者의 성별과 역할, 그리고 폐슬과 소매가 넓은 포복의 형태 등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실마리로 백제 3인상이 북조가 아닌 남조 문화와 더욱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무왕이 건립했다고 전하는 제석사지와 미륵사지에서 발견된 두 점의 보살상 頭部에는 連 弧形 髮際線이 출현한다. 연호형 발제선은 중국에서는 이미 4~5세기부터 출현했지만, 중국 전역으로 보급된 것은 대략 6세기 말부터이며, 그 연원은 장안양식과 관련이 있다. 연호형 발 제선은 삼국에서는 7세기에 비로소 등장하며, 이후 통일기 신라에서 유행한다. 그러므로 백제의 두 사찰 출토 소상에서 출현하는 연호형 발제선은 6세기 말부터 백제가 행한 적극적인 수 당 교류의 결과이자, 백제 미술에 미친 수당대 장안양식의 한 사례로서 주목할 만하다.
오대산(五臺山)은 신라시대 자장스님에 의해 중국 오대산으로터 문수신앙 이 도입되어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수신앙의 성지가 되어 왔다. 그 중심에 상원사가 있다. 상원사에는 1466년 조선왕실이 발원한 동자 문수 보살상과 1661년에 의천스님이 발원, 조성한 문수보살상이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1661년 조성된 문수보살상은 진여원의 세 번째 중창된 만들어진 상원 사의 본존불이다. 이 불상이 조성되기 전 이미 상원사에는 동자 문수보살상 과 노(老) 문수보살이 전하고 있었다. 동자 문수보살은 왕실에서 조성한 것이 기 때문에 지금과 달리 특별히 마련된 원당에 봉안되어 있었을 것이고 노 문수보살상은 상원사의 원래 본존으로 봉안되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문수보살상이 1599년에서 1661년 사이 인근 보현사로 이안되면서, 새로운 문수보살상이 의천스님에 의해 계획된 것으로 보이며, 지금의 문수보살상이 바로 그 문수보살로 추정된다. 보살상의 제작에는 임진왜란 이후 팔도도총섭 체제로 개편되는 불교의 시스템과 관련이 깊다. 팔도도총섭은 전란으로 피해 를 입은 사찰을 복구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승려장인들을 육성하였고, 이 보 살상을 제작한 승려 역시 도총섭 체제하에서 육성된 승려장인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1661년에 제작된 문수보살상은 如意를 지물로 취하고 있다. 조선시대 이 전 如意는 주로 보현보살의 지물로 등장하지만, 차츰 문수보살상의 지물로도 사용되다 17세기 이후에는 완전히 문수보살의 지물로 채택되고 있다. 따라 서 상원사 문수보살상의 여의는 조선 후기 조각승들이 인식했던 문수보살의 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보살상을 제작한 사람은 신겸과 회감인데, 신겸은 이 시기 대표적인 불화승이고 회감은 조각승이다. 불화승과 조각승의 공조로 불사가 진행되고 있어 당시 불사의 특징을 이해하 는 데 유익한 정보를 담고 있다.
본 논문은 『묘법연화경』의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드러난 보살 사상 및 그 전개가 칼 융의 분석 심리학에 나타난 ‘자기’(the Self) 의 부분이자 상징이라 고 할 수 있는 개성화를 이룬 인간 및 개성화의 과정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가 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분석 심리학에서 인간은 자아에서 시작하 여 자기로의 여정을 거치는데, 이 자기(Self) 및 개성화를 이룬 인간의 특성을 살펴보면 이 특성은 대승 불교 경전의 여러 곳에서 등장하는 보살의 특징 및 행법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 고는 그 중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나타난 관세음보살은 ‘자기(Self)’의 외현적 상징으로, 사바 세계를 노닐며 중 생을 돕는 과정은 자아의 개성화 과정과 유사하다는 관점에서 둘을 비교 고찰 하려 한다. 분석 심리학에서 개성화를 이룬 인물은 몇 가지 특징을 갖는데, 그 림자를 이해하고, 정신적 영역의 여성성과 남성성인 아니마 아니무스가 잘 분 화되어 통합을 이루고 있으며 집단 무의식에 열려있어 사람의 행동을 잘 이해 하고 깊은 연민을 느끼며 성격의 어느 한 측면이나 태도, 원형 등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상황에 따라 페르조나를 잘 사용하지만 이는 사회적 편의 때문이 지 자신의 본성(Self)과 헷갈리지 않는다. 「관세음보살보문품」의 관음은 그 경 전의 이름과 같이 모든 중생의 소리를 듣고(觀音) 지혜로서 그곳에 나투며 (普 門) 그들을 도우나 도운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근기 마다 그 근기에 맞게 나투 지만 그것은 방편일 뿐 본성에는 물듦이 없다. 열반 해탈과 중생의 경계선에 있어 중생을 향하여 돌아보나 돌아가지는 않는다. 이렇듯 관세음보살의 행법 은 분석심리학의 개성화된 인간이 가지는 특징과 깊은 유사성을 보이며, 분석 심리학자들은 관세음보살을 불성(佛聖)이라고 하는 ‘자기(Self)’ 의 외현 이며 높은 수준의 아니마로 바라보기도 한다. 더하여 본 논문은 「관세음보살보문품」에 나타난 개성화의 상징들을 고찰 하고자 한다. 보문품의 큰 흐름이 원형과 그림자의 만남, 페르조나의 상실, 아 니마 아니무스의 만남, 페르조나의 사용 및 자기(Self)로의 회귀와 다르지 않다 는 관점에서 둘을 비교하려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하여 관세음보살을 신앙 적 가치를 넘어선 심리학적 가치를 가진 정신적 도착지로서 그 개념을 확장하 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중심으로 관세음보살의 자비 심과 그 심리치유적 요인에 관하여 고찰한 것이다. ‘관세음(觀世音)’은 세상 의 소리, 곧 중생의 소리를 관(觀)한다는 의미로서 ‘관한다’는 것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살핌’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관세음보살은 중생이 호소하 는 고통을 보고 듣고 보살피는 구원자로서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자는 중생의 다양한 재난을 상징하는 ‘칠난(七難)’을 실제적인 재 난이 아닌 심리적인 괴로움으로 이해하였다. 이러한 심리적인 재난 상황에 처한 중생들이 관세음보살을 칭념하고 의지하면 관세음보살과 감응하게 되 고, 보살의 자비로운 원력의 작용으로 심리적인 안정을 얻게 된다고 보았다. 천태지의는 관세음의 관(觀)을 ‘관조(觀照)’의 의미로 이해하여, 관세음보 살이 단순히 중생들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따라 감응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인 내가, 대상인 무엇을 관조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천태지의의 해석에 따라 관세음보살은 외재적 초월자가 아니라 내면을 관조 하는 수행자 자신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끝으로 자비의 개념을 심리치유에 적용하여 심리치료 프로그램으로 활용 되는 ‘자비명상’의 방법과 효과를 살펴봄으로써 관세음보살의 자비가 심리치 료에 실천적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였다.
본고는 「상불경보살품」에 나타난 인간존중사상의 논리적 특징을 불성론의 입장에서 분석하고자 한다. 그렇지만 이 품에는 현대사회의 핵심 용어 중의 하나인 평등, 인격존중, 사랑 등에 관한 용어는 사용되고 있지 않다. 다만 상불경이란 용어는 ‘언제나 모든 사람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모든 인간은 존귀하고 존엄하다는 의미에서 항상 존경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스토리의 주인공이란 점이다. 인간존중, 평등 등에 관한 전문적인 용어는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평범한 이야기와 메타포를 통해 독자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충분히 밝히고 있다. 인간은 누구나, 어떠한 형태의 모습이나 삶을 영위하고 있더라도, 그 내면에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존경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 품에서는 그런 내용을 ‘인간은 누구나 깨달아 부처가 될 존재’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경전의 내용에 대해 중국을 대표하는 법화사상가들은 불성론에 입각해 이해하고자 했다. 천태는 삼인불성론에 입각해 상불경보살의 보살행을 이해하고 있다. 정인, 연인, 요인불성에 의거한 설명이다. 길장은 수기를 주는 행태는 불성이 있다는 전제 속에서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 역시 불성론에 입각해 이 품을 이해하고 있다. 규기 역시 불성론에 의거해 이 품을 이해하고 있지만, 요인불성에 의거해 개개인의 수행과 노력을 중시한다. 이 품에서 나타난 상불경보살의 활동은 인간의 존엄성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의의가 크다고 본다. 특히 세계인권선언문의 내용과 대비해 보면, 양자에 상통하는 사상이 대략 2천여 년 이전에 이미 선언되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이러한 사상을 현실 속에서 구체화시키지 못한 것은 불교사의 왜곡 현상이며, 중국불교사의 한계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러한 사상을 어떻게 현실 속에 구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불교계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 논문은 1877경 편찬된 『觀世音菩薩妙應示現濟衆甘露』에 나타난 생명존중사상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책은 동대문 밖에서 일군의 재가자들이 모여 만든 妙蓮社라는 불교적 신앙결사체의 산물이라 평가할 수 있다. 유교적 가치가 지배한 조선시대 말기에, 불교적 가치에 입각한 수행과 사회적 실천을 강조하는 내용의 책이 편집되었다는 것은 매우 유의미한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조선말기의 불교계는 암흑기였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이 책은 동북아 불교사상의 핵심인 화엄사상과 선사상의 바탕 위에서, 법화사상과 관음신앙을 독자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그 밑바탕에 윤회론과 연기론이 내재되어 있지만, 불성론에 의거해 만물의 존귀함과 일체 존재의 평등을 강조하는 것은 매우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살생이나 육식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으며, 편견과 무지를 버릴 때 만물을 사랑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생명에 대한 존귀함과 평등을 강조하는 내용은 『능가경』이나 『사분율』, 『범망경』등과 상통한다. 이러한 경전들은 전통적으로 동북아불교권에서 중요시했던 경전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화엄과 선사상의 논리적 토대 위에서 법화사상이나 관음신앙을 융합해 이해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그리고 불살생의 사상적 연원은 『숫타니파타』의 아힘사나 박애사상에까지 소급될 수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 이 책에서는, 법화사상에 의거해 일체 존재를 보살의 화신이라 간주 하고 대소사를 여래의 일로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데, 그 논리적 바탕은 불성론에 의거한다. 그리고 불성론에 의거해 많은 사람들에게 수기를 주고 있다. 수기를 준다는 것은 구원의 보편성을 의미하는 것이며, 법화사상의 특징을 독자적으로 이해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수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불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보는 것이다.
여말선초 관음보살상 중에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취하는 좌법으로 알려진 윤왕좌(輪 王坐, Maharaja-lila 또는 Rājalilāsana)를 취하고 있는 조각이 다수 확인된다. 기존의 불교조각사에서 제작된 바 없는 작례로서 활발한 대외교섭을 통해 유입된 것으로 보이며, 고려 시대 관음신앙을 통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윤왕좌를 취하고 있는 관음보살상의 도 상을 살펴보면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에 상주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는데, 중국 송대 제작된 수월관음보살의 모습에서 그 원류를 확인할 수 있다. 윤왕좌를 취하고 있는 관음보살상의 양식적 특징은 여말선초 불교조각의 양식사적 흐름위에서 크게 벗어 나지 않는다. 통일신라 양식을 기반으로 외래양식을 적절히 수용한 전통양식과 원․명대의 독특한 티베트계 양식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제작경향을 살펴보면 소형의 호지불상(護持 佛象)이나 경상(鏡像)과 같은 휴대용 불교용구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어 독특하다. 이들은 제난구제(諸難救濟)나 안산(安産) 등 현세이익적인 원(願)이나 정토로 향하고 싶은 내세에 관 한 염원을 담을 수 있는 대상으로서 이를 성취하고자 하는 강한 마음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본 논문은 양주 청련사의 조선후기 불교조각 가운데 1670년에 조성된 대웅전의 아미타삼존상과, 1651년에 조성된 원통보전의 관세음보살상을 다룬 것이다. 이 두 조각상은 2017년 2월과 3월 두 차례에 걸친 복장 조사를 통해 제작 연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대웅전의 아미타삼존상은 1670년(강희 9, 庚戌)에 수조각승 녹원(鹿苑)을 비롯한 인종(印宗)ㆍ도운(道云)ㆍ유경(唯敬)ㆍ사운(思運)ㆍ성심(性諶) 등 6명이 참여해 조성한 17세기 후반의 불교조각으로, 확실한 조성 연도와 조각승을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청련사 아미타삼존상은 1670년에 조성된 이후 1913년과 2000년에 개금불사가 이루어졌으며, 1940년에 복장품 일부는 도난되었다.
청련사 관세음보살상은 1651년(효종 2, 辛卯)에 전라도 흥양현 팔영산(八影山) 지장암(地藏庵)의 좌협시보살로 조성된 사실이 조성발원문에 기록되어 있다. 조성발원문의 내용을 통해 아미타삼존상 가운데 좌협시보살로 조성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1940년에 개금ㆍ중수하였던 원문(願文)이 발견되었다.
청련사 원통보전의 관세음보살상이 어떠한 이유로 청련사로 이안(移安)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조선 말기에 왕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왕실 관련 사찰에 여러 지역의 불상들이 이동된 경우가 많았던 사실을 비추어 볼 때, 양주 청련사의 관음보살상도 화계사와 흥천사처럼 왕실과의 인연으로 고흥능가사의 지장암에서 청련사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본고는 먼저 관세음보살 명칭에 내포된 의미와 그의 신격(神格)을 살펴본 뒤, 『서유기』에 나타난 관세음보살의 이미지를 고찰함으로써 그 특징을 도출하고, 작품 속에 나타난 그의 역할과 의미를 고찰한 논문이다. 관세음보살의 이미지를 분석한 결과, 그녀는 엄숙하고 원융한 莊嚴像을 한 불교의 신이 아니라 예술적 가공을 통하여 인간화, 세속화, 통속화된 형상으로 재창조되어 소설 작품에 활기와 생기를 불어넣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관세음보살의 역할과 그 의미를 보면, 그녀는 취경단을 구성하고, 취경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취경단원을 시험하며, 그들이 위기에 빠졌을 때 고난을 해결해 주는 역할을 맡는다. 이를 통하여 관세음보살이 의도하는 바는 취경단원들을 단련시키고 각성시켜 그들 모두를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함으로써 그들의 정신적 경지를 높이는데 있다. 즉 취경단원들 전원이 불교의 핵심교의 ‘空性’을 깨달아 그들 모두가 圓融無碍(원만한)한 覺者가 되어 영원한 자유를 얻게 하는 것이 바로 그의 역할이다. 이처럼 취경단원들을 각성시켜 대해방, 대자유의 길로 인도하는 관세음보살은『서유기』의 스토리를 이끌어 갈 뿐 아니라 주제 구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주요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론에서는 손오공 일행의 心路歷程이 우리 정신세계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관세음보살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칼 융(C.G. JUNG)의 분석심리학 이론을 시험적으로 적용하여 조명해 보고자 했다.
法華寺十一面觀音菩薩像은 높이 100cm의 입상으로 한그루 의 비자나무(榧)로 된 9세기 檀像풍의 일목조상으로 알려져 있다. 본 상에서 특징적인 것은 얇은 동판을 잘라서 鬢髮과 垂髮이 바람에 나부끼는 것같이 표현된 점인데, 마치 이와 대 응하는 것처럼 바람에 펄럭이며 뒤집힌 천의의 끝단 표현도 훌륭한 조각 기법으로 완성되어 주목된다. 이와 같은 이른바 風動表現에 관해서는 중국 당대 화가 吳道玄의 화풍을 답습 한 결과라고 한 井上正의 견해가 정착되었다. 그런데 본 상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光明皇后연고인 東大 寺아미타당에 안치된 檀像十一面觀音像(현존하지 않음), 혹 은 紫微中臺十一面悔過所의 畵像本尊(현존하지 않음)의 模刻 이라고 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원래 光明皇后의 십일면관음 신앙은 아미타신앙과 결합한 신앙으로, 8세기에 제작된 東大 寺아미타당상이나 紫微中臺畵像本尊도 황후의 아미타신앙 과 밀접하게 관련하고 있으며 陀羅尼集經에서 말하는 阿彌 陀佛輪印法과 같은 수행법인 同經에 게재된 掐數珠印제11을 수행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한다면 法華寺 像에서 보이는 吳道玄풍의 풍동표현이나 未開敷蓮華등을 조 형화 한 광배는, 아마타불의 극락정토에 서있는 십일면관음을 표현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생각되는데, 光明皇后에 얽힌 설 화에 물든 法華寺像도 황후의 십일면관음신앙의 계보를 잇는 상으로 원래는 法華寺아미타정토원 금당에 모셨다고 하는 선행연구는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法華寺像의 풍동표현 이나 광배 장식은 光明皇后의 십일면관음신앙의 성격을 전해 주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특수한 표현은 紫微中 臺畵像本尊등에서 이미 채용된 표현을 法華寺像이 답습한 결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예전부터 추정된 것처럼 法華寺像 은 여전히 光明皇后연고의 십일면관음상의 모각이었을 개연 성이 높다.
이 논문은 관음신앙에 대한 천태의 선적 이해를 분석해 정리한 것이다. 동북아 불교신앙의 중요한 형태 중의 하나인 관음신앙은 중국인들에 의해 다양하게 수용되었다. 외재적이며 초월적 존재로 대중적 지지를 받았으며, 중국에 토착화하여 낭랑신앙이나 해신신앙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그러나 천 태지의는 이러한 종교적 관념에 동의하지 않았다. 관음을 수행적으로 이해 하고자 했다.
관음을 천태신앙의 독특한 수행방식인 관법으로 이해하고자 한 것은 법 화경에 대한 그의 주석인 법화문구이며, 이 책의 「석관세음보살보문품」 에서 십쌍과 오척으로 관음보살을 해석하면서 특유의 관법에 의거한 관음보 살의 해석이 등장한다. 이들 중에서 본 논문은 오척을 중심으로 관법에 의 거한 관음보살의 해석을 분석해 정리하고자 한다.
「석관세음보살보문품」의 오척에선 관세음이란 단어를 축자적으로 한 글자 씩 해석하고 있으며, 이 경우 관이란 글자를 관법에 의거해 이해하고자 한 다. 즉, 석관(析觀), 체관(體觀), 차제관(次第觀), 원관(圓觀)이란 의미로 해 석하고 있으며, 이러한 관법은 결국 천태의 일심삼관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본고는 일심삼관의 구체적인 고찰을 통해 관세음의 관을 관법으로 해석하고 자 한 천태의 의도를 살펴보고자 했다.
그리고 관세음의 관이란 글자를 일심삼관이란 관법의 수행으로 이해하고 자 한 근본적인 이유는, 일심삼관이란 수행이 마음의 번뇌 망상을 제거하는 것에서 출발해서 중생을 제도하는 일로 확장된다는 점이다. 또한 일심삼관 의 수행을 통해 현실에 매몰되지 않고, 현실과 본질의 세계가 실상의 세계 임을 인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내용은 바로 ‘다양한 세상의 근기를 관찰하고 적절하게 응병여약(應病與藥)’하는 관세음의 속성과 형식적으로 상통하는 점이 있다. 결국 관음은 종교적 수행의 완성이며, 자기의지의 절대 적 실현을 의미한다. 따라서 천태는 관음을 객관화하지 않고, 주체적이며 자 기실현의 완결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본 역자들은 현장(602~664)의『보살계본』(T.24.1501.1110b2~ 1115c22)을 최초로 영역하였다. 현장의『보살계본』은 담무참(385~443)의『보살계본』(T.24.1500. 1107a2~1110a24)과 더불어 유식계 보살계본들을 대표한다. 현장의『보살계본』과 다르게 담무참의『보살계본』은 몇 차례 온라 인의 형태로, 그리고 한 차례 출판본 형태로 영역되었다.1) 담무참은 본인이 한역한『보살지지경』10권을 저본으로 하여 본인의 보살계본 을, 그리고 현장은 본인이 한역한『유가사지론』100권을 토대로 하여 본인의 보살계본을 직접 만들었다. 비록 그 두 보살계본의 내용은 대동소이할지라도, 담무참의『보살 계본』은 4중계와 41경계로, 그리고 현장의『보살계본』은 4중계와 45 경계로 구성되어 있다. 그 두 종류의 보살계본은 출가의 포살과 수계 의식에 사용된 구족계 바라제목차를 모방하여 만들어졌고 출가와 재 가의 포살과 수계의식에 사용되었다. 비록 현장의『보살계』본문은 목차와 계목을 포함하고 있지 않지만 본 역자들은 독자들의 편의를 위해 목차와 계목을 본 영역에서 괄호 속에 삽입하였다.
우리나라 불교수용에 따른 토속신앙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에 의 해 연구되어 왔지만, 山寺의 확산으로 인한 보살주처신앙의 성립 및 그 연관성 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삼국시대 산지 사찰이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토속적 산신신앙과의 갈등 및 극복, 그 리고 통일 이후 화엄 신앙의 정착과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보살주처신앙이 우리 나라에 미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았다.
삼국시대 불교 전래 이후 불교신앙이 대중화됨에 따라 왕경 근처의 평지에 사 찰이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山地에도 사찰이 건립되었고, 이 현상은 지방으로 까지 번져갔다. 그 과정에서 山寺의 승려와 토속의 산신 숭배자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갈등의 양상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겠지만 대체로 불교신앙이 산신신앙을 압도하였고, 산은 불교신앙 공간으로 탈바꿈해갔다.
통일 이후에도 왕실에 의한 山神祭는 계속되었고, 전국의 名山을 三山‧五岳‧二十四山으로 나누어 大祀‧中祀‧小祀를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제사가 불 교신앙을 약화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그 名山에 사찰을 세움으로써 불교의 기도처를 전국에 확대하였다. 이는 왕경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던 신라불국토 의 염원이 전국으로 확대되는 것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중국으로부터 전래 된 화엄신앙의 한 형태인 보살주처신앙을 수용하여 우리나라의 오대산, 천관산, 낙산 등에 보살이 상주한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이는 불국토를 실현하고자 했던 신라인의 염원이 발현된 것이기도 했다. 그리 고 그러한 염원이 더욱 확대되면서 산에는 磨崖佛이 새겨지고 새로운 불교설화 가 만들어졌으며, 더 많은 산에 사찰들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세월 이 흐르면서 산 이름이 사찰명으로 변화되기도 하고 사찰명이 산 이름으로 바 뀌기도 하면서 산에 불교적 신비성이 가미되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