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의 목적은 지난 20년간 국내에서 개최된 세계한상대회의 특성을 고찰 하고 해외에서 처음 개최된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와의 비교를 통해 한상네트워 크 특징과 구축과정, 시사점과 향후 개선점을 도출하는 데 있다. 연구 방법은 2023년 LA에서 개최된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에 참여하여 총 15명의 한상을 인 터뷰했다.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세계한상대회에서 한상네트워크 구 축 활동은 ‘개인적 네트워크 구축 활동’과 ‘소개자를 통한 네트워크 구축 활동’ 등으로 나타났다. 둘째, 이번 미국 LA에서 열린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 특징은 주로 재외동포 기업인, 외국인 기업인, 한국광역단체장과 상공인단체 등이 대거 참여한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에서 신뢰 관계와 비즈니 스 관계 구축과정은 한민족의 공통된 언어와 문화 기반 신뢰 형성, 한상의 가교 역할 기능, 상호신뢰의 확인 장소, 파트너기업과 비즈니스 거래관계로의 전환 등으로 나타났다. 넷째, 세계한인비즈니스대회는 한상과의 약한 개인 관계에서 상호 비즈니스가 가능한 강한 연대의 거래관계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실제 대회 현장에서는 개최목적과 비즈니스 성과 사이의 괴리 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향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나가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 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이번 계기를 통해 세계한인비즈니스대 회가 한상네트워크 구축과정이라는 취지를 명확히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향 후 실질적으로 한상 간 네트워크 구축과 실천에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으로 보 완해 나갈 필요가 있을 것이다.
본 논문에서는 1973년 프랑스 파리에 최초로 한식당을 창업하여 30여 년간 운영한 한인 이민사업가를 대상으로 유럽에서의 요식업 종사 경험 을 구술생애사적 관점에서 고찰한다. 프랑스 한인사회의 역사적 변천 과 정의 맥락에서 구술자의 한식당 창업 동기와 사업에 도움이 되었던 요 인, 한식당 경영의 의미에 대해서 조사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구술자 는 유럽에서의 연속적 이주 과정을 통해서 축적한 다양한 사회적 네트워 크를 주요한 민족자원의 하나로 활용하였다. 또한 창업 당시 프랑스 한 인은 200명 남짓의 소규모였고 현지인들 사이에 한국, 한국 음식에 대한 인지도가 매우 낮았기 때문에, 입지 선정에 있어서 주프랑스 한국대사관 과의 근접성이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한식당 경영을 통해서 프랑스 한인 과 한국으로부터의 방문객들이 모국의 음식을 향유하고 한국적 정서를 접할 수 있게 하였고, 또한 프랑스 현지인들에게는 한국 음식문화와 한 인 예술을 알리는데 기여하였다. 본 연구를 통해 프랑스 한인 이주사, 한 인 디아스포라의 자영업 창업, 해외 한식문화의 전파와 의의에 대한 이 해 제고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연구는 오사카의 재일한인 축제 가운데 통일문화운동 사례인 원코 리아페스티벌과 한반도와 일본의 문화 교류를 재현하는 사천왕사왔소의 역동성을 비교하였다. 재일한인 축제는 민족정체성의 강화, 한민족 문화 의 계승과 보존, 모국과 재일한인의 연결 기제, 한류 전파의 촉매 역할을 수행 등 여러 부문에서 유용성을 갖고 있었다. 사천왕사왔소는 원코리아 페스티벌 보다 축제 규모, 동원 및 관람객, 재정과 후원, 프로그램의 구 성에서 비교 우위를 갖고 있었다. 특히 축제 패러다임의 변화 또는 위기 에 대한 대처는 동력의 약화나 강화로 나타났다. 이들 축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모국정부의 관심과 지원, 그리고 성공을 위해 재일한인 들의 노력과 의지가 하나로 결집되어야 한다.
재외(在外) 한인(韓人) 즉,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는 한민족(韓民族) 의 혈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모국을 떠나 세계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아가는 한민족 ‘이산(離散)’을 의미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미술의 가장 핵심적 개념은 ‘타의(他意)에 의 한 이주’라고 할 수 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작품을 그들이 지닌 민족적 정체성 측면에서 분류하고 분석해보면 ‘①기억(記憶), 이산의 역사 ②근원(根源), 뿌리와 정체성 ③ 정착(定着), 또 하나의 고향 ④연결(連結), 이산과 분단을 넘어’라는 네 개의 키워드로 나누 어 살펴볼 수 있다. 첫 번째, ‘기억(記憶), 이산(離散)의 역사’는 아시아의 재외 한인 이산의 역사에 대한 집단적이고도 개인적인 기억과 서사를 다룬 작품들로 나타난다. 자발적이 아닌 타의(他意)에 의한 이주, 원치 않고 준비되지 않은 이산(離散)의 아프고 고통스러운 기억(記憶)이 코리안 디아스포라 미술의 첫 번째 정수(精髓)이다. 두 번째, ‘근원(根源), 뿌리와 정체성’은 해외 한인 동포들이 겪고 있는 정체성에 관한 것 이다. 대부분의 재외한인 동포는 민족적으로는 한민족에 속하지만 국가적으로는 다른 나라의 국적을 갖고 있다. 재일동포의 경우에는 일본으로의 귀화를 종용 당하거나 한국 국적을 취득 하기도 하지만, 이도저도 아닌 ‘조선적’이라는 무국적 상태를 지속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혈 통에 따른 국적과 거주지에 따른 국적의 불일치라는 이중적 상황과 현지에서 소수자로서 살 면서 당하는 차별과 부조리함은 슬프고 서러운 상황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를 떠나 이주를 시작한 증조부모나 조부모의 모습에서부터 부모와 가족을 그린 그림들, 자신의 자화상, 그리 고 백두산과 제주도 같은 혈통적 조국 산하의 풍경, 탈춤이나 돌잡이, 제사와 같은 풍물과 전통적 관습 등을 그린 여러 동포 작가의 작품에서는 한민족으로서의 혈통적․문화적 정체 성을 느끼게 된다. 세 번째, ‘정착(定着), 또 하나의 고향’은 아시아의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들이 조국을 떠나 언어와 문화가 다른 세상에 정착하고 적응하면서 만나게 되는 시각적 대상을 그린 작품 들을 보여준다. 또 다른 고향인 현지의 자연 풍경과 도시의 모습, 인물과 풍속, 역사와 종교 등은 그들 작품의 주제가 된다. 혈통적 조국이 아닌 거주국의 국민으로서 갖게 되는 국가․ 국토․현재에 대한 애정이 여러 작가의 작품에서 간취된다. 모든 예술은 풍토성을 띠는 것이 당연하므로 거주국의 관습과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또한 거주국 미술계의 역사와 현대미술의 상황을 직접적 혹은 간접적으로 반영한다. 네 번째, ‘연결(連結), 이산과 분단을 넘어’는 동포 작가들이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의식과 한반도의 문화적․정치적 현상에 대한 관심을 투영하여 그려낸 작품들이다. 세계에서 몇 안 되는 민족 분단 국가인 한반도에 사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재외 한인 작가들에게도 남과 북의 대치 상황은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남한과 북한이 마주하는 대화의 자리가 자주 열 려, 분단을 극복하고 항구적인 평화체제가 확립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그림들이 꽤 많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의 미술이 이산과 분단을 뛰어넘고 한민족을 위한 축복과 번영의 매개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이 연구는 귀환동포에 해당하는 CIS 고려인과 사할린한인에 대한 지방자 치단체의 조례제정과 지원 실태를 분석하고 있다. 243곳의 지방자치단체 중 17곳을 제외한 226개는 귀환동포를 지원하려는 법적·제도적 장치를 갖추고 있지 않았다. 단지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할린한인은 10개 지방자치단체가 조례를 제정하여 개인 또는 단체 지원으로 안정적인 생활을 유도하고 있었 다. 반면 외국적을 갖고 있는 CIS 고려인은 외국인으로 간주되어 지역에서 다문화법을 적용받고 있으며, 7개 지방자치단체가 조례를 제정하여 단체 중심의 지원을 실행하고 있다. 정책 시사점으로는 첫째, 지방자치단체는 귀환 동포 업무를 국가사무가 아닌 지방사무로 인식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둘 째, 지방자치단체의 귀환동포 정책은 교류와 협력을 지양하고 실생활의 고 충을 해결하려는 태도가 요구되고 있다. 셋째, 지방자치단체는 외국적 귀환 동포를 다문화 대상 및 외국인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포에 대한 정책적 배려는 낮았다. 귀환동포를 주민이라는 관점에서 정책대상으로 인식하 고, 정착지원과 역량 강화에 주안점을 두어야 한다. 넷째, 귀환동포의 국적 취득 여부에 따른 제도적 차별은 시정되어야 한다. 다섯째, 귀환동포의 복 지증진에 대한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성의 강화가 필요하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dentify the types and characteristics of Hanbok worn in lunar new year parade and Korean parade in New York over the past three years. As for the research method, I first collected domestic news articles, overseas Korean news articles, and literature reviews about the history of the Korean parade in New York and the events of each year. Second, I conducted a case study on Hanbok worn in the six parades from 2017 to 2019 using photo data collected through direct surveys, ‘YouTube’ video footage and news article photos. Third, I interviewed people related to the New York parade about the route of buying and renting the Hanbok in the New York area. The types of Hanbok shown in the Korean parade in New York can be largely classified as ceremonial, performance, and daily costume. There were 65 ceremonial costumes in all, with men wearing Dallyeong (official’s robe) and Gorlyongpo (dragon robe) and women wearing Dangui (woman’s semi-formal jacket), Wonsam (woman’s ceremonial robe), and Hwarot (princess’s ceremonial robe). A number of performance costumes were also worn by the Chwitasu bands, Nongak ensembles and fan dancers. Finally, of the 210 daily Hanbok, most men wore Baji (pants) and Jeogori (jacket), and women wore Chima (skirts) and Jeogori. The parade attempts to showcase the beauty of Hanbok, but the costumes repeat year after year, which can feel monotonous to onlookers. This research can be used as a reference to effectively utilize Hanbok in future Korean cultural events.
본 논문은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운동과 성결교회의 신학적 정체성 인, “사중복음”과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먼저,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운 동은 이 시대를 위한 가장 효과적이며 적합한 선교방법론임을 밝힌다. 이미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 특별히 2세대들을 세계선교를 위한 자원으로 세워가자는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운동은 이 시대의 가장 탁월한 선교방법론임에 틀림없다. 선교운동은 그 운동을 가능케 하는 신학적 토대와 근거가 필요하다. 필자는 사중복음이 한인 디아스 포라 선교운동을 위한 신학적 동력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주장한다. 사중복음의 각각의 주제인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은 성결교회의 신학을 넘어, 복음이 증거되는 곳에서는 반드시 선포되어야 할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에 흩어진 한인 디아스 포라들이 만일 사중복음의 신학으로 훈련되어 있다면, 그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곳에서 그 누구보다 훌륭한 선교사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최초의 한인 선교사가 누구인가?’라는 주제를 다루는 연구이다. 흔히 감리교의 홍승하와 장로교의 이기풍을 최초의 한인 선교사라고 언급한다. 하지만 그들이 왜 최초의 선교사인가에 관한 연구는 아직 심도 있게 다루어지지 않았다. 우선 감리교에서는 1997년 이전까지 국외에 있는 교포들만을 대상으로 사역을 해도 선교사로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1903년 하와이에 파송된 감리교의 홍승하는 최초의 한인 선교사가 맞다. 반면 장로교에서는 1907년에 파송을 받아 1908년에 제주도에 도착한 이기풍을 한동안 해외 선교사로 간주 하다가 1915년 이후부터는 그를 더는 선교사로 보지 않았다. 왜냐하면 장로교는 외국인을 위해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만 선교사로 간주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제주도는 국외지역이 아니므로 이기풍을 해외 선교사로 간주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미국 뉴욕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중남미 출신 한인 재이민자 102명을 대상으 로 실시한 풍부한 심층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재미한인들의 타민족 대상 종교 활동에 관해서 고찰하고 있다. 다문화적 배경을 가진 중남미 출신 한인 재이민 자들이 특히 남미계 대상 종교활동에 있어서 기여하는 바가 커지고 있다. 연구 조사결과에 따르면 뉴욕 지역에서의 한인과 남미계 이민자들의 종교교류가 네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남미계 이민자들이 한인교회에서 공간을 대 여하여 예배를 독립적으로 드리기도 하고, 한인 목사가 남미계 이민자들 대상으 로 한국어-스페인어 이중언어 설교를 하거나 혹은 스페인어 설교를 하기도 하 였으며, 남미계 이민자들이 한인 교회의 영어-한국어 이중언어 예배나 혹은 영 어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또한, 재미한인 일반 신도들이 거리에서 남미계 이 민자들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뉴욕의 특수한 다문화적 환경하에서 재이민자들이 이전 중남미에서의 타민족 대상 종교활동 뿐만 아니라 중남미 문화와 언어에 대한 지식과 친숙함을 활용하여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This paper deals with architectural activities related to Korean society in Jichang district in North East China, focused on the articles of Manseon-ilbo published there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Construction-related contents in the area closely connected with topical interest, publicity, and enlightenment as a local media source provide positive grounds about pending issues in colonial situations.
This paper handles with articles issued in the 1940's newspapers just before the Pacific War. At that time Japanese enter in the Chinese continent, and construct a stable basis in the intimate association with Germany and Italy, countering against the United State.
Among articles regarding architecture, most of contents are based on healthcare and public facilities, and urban planning. Overwhelmingly the most popular articles are about new constructions of educational facilities and residential matters. The shortage of goods and the excessive concentration of population resulted in urban and house problems, which were particularly much more serious in Korea society. Such social atmosphere made all activities regarding building constructions, in particular educational facilities, in civil level rather than the helps of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Thus, through education and house matters we can read a slice of Korean society to survive in the colonial environment of Jichang district.
The diaspora mission is one of the major issues in global mission work, which has arisen as one of the tasks to be carried out by cross-cultural diaspora groups that have global networks
traditionally such as Chinese speaking people, Indian and Filipinos diaspora, and also Koreans who now have finances and skills. Taking this historical opportunity, this author will try to define
the concepts of the diaspora and the diaspora mission based on the sense of calling, outline the current status of Korean diaspora mission network, and present the direction of Korean diaspora
mission. The missional meaning of the history of the Korean diaspora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Firstly, it is commonly held that the Korean emigration started from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which is late compared to other nations. Secondly, the history of Korean emigrants is the
history of Korean diaspora mission. Thirdly, the Korean diaspora mission spread very rapidly and widely. Fourthly, the history of Korean diaspora is the history of the overseas Korean churches. Fifthly, the history of Korean diaspora becomes more meaningful when it is reviewed in relation to the current global mission of the Korean Church. The Korean Church Mission implies two concepts, mission of the Korean Church, and mission for the Korean Church. Likewise, diaspora mission has dual meanings, mission for diaspora and mission by diaspora. Moreover, as the word ‘diaspora’ is used as a complex concept, diaspora mission could be expanded in three ways for Korean situation today: first, the mission of the Korean Church through Korean diaspora (or ‘toward’); second, the mission of the Korean Church for (or ‘through’) the immigrants in Korea; third, the mission of the Korean Church for (or ‘through’) cross-cultural diaspora in other regions other than Korea. The history of Korean diaspora is the history of the Korean diaspora mission. The Expansion of Korean diaspora expanded the overseas mission of the Korean Church. The mission movement for Korean diaspora started from North America and extended to the world. This has been a driving force of calling out Korean diaspora to mission field, and presented a new direction for global mission of the Korean Church. In the process, Korean diaspora produced various mission networks. This is a good model for the world mission, which should be promoted through union and agreement with one another. The future global mission of the Korean Church should be carried out through cooperative networks with global churches. Also, the Korean diaspora mission will be a foundation that will expand to the global mission of the Korean Church through cooperation with cross-cultural diaspora and the Global Church.
한·미 FTA가 발효되면서 미국산 사과가 중장기적으로 국내시장을 잠식할 것이 예측되지만, 역발상으로 한국산 사과의대미 수출을 증대시키면 수출시장의 다변화 측면에서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질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미국 사과수출 전략 수립을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미국 거주 한인들을 대상으로 소비자조사를 통한 한국산 사과 속성에 대한 선호도를 분석하였으며, 분석방법은 중요도-만족도 분석과 로짓 모형을 이용하였다.
분석결과 및 함의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먼저 미국 사과 수출을 위해 집중적으로 관리가 필요한 요인은 가격이다. 재미 한인들은 가격에 대해 중요도는 매우 높은데 비해 한국산의 만족도는 매우 낮게 평가하고 있다. 또한 가격의 중요도와 민족도의 차이는 한국산 사과 소비의향에 영향을 미치며, 중요도와 만족도의 차이가 클수록 한국산 사과를 구입할 확률은 감소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산 수출사과의 가격인하는 수출신장을 위해 매우 중요한 조건이다. 그렇다면 국내 사과시장의 가격이 상대적으로 높게 형성되는데 어떻게 수출가격을 인하할 수 있는가의 문제에 직면한다. 이 문제는 적합한 수출시기 선택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추석에 사과소비가 많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추석직후는 사과가격이 하락한다. 이 시기에 수출사과를 매입할 경우 수출가격은 인하하며, 국내 시장가격의 지지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당도, 씹는 느낌, 안전성 등의 내적 요인과, 빛깔은 지속적으로 잘 유지할 필요가 있다. 또한 당도, 씹는 느낌, 안전성 등의 내적 요인에 대한 중요도와 만족도의 차이는 한국산 사과 소비의향에 영향을 미치며, 중요도와 만족도의 차이가 클수록 한국산 사과의 구입할 확률은 감소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러므로 미국산 사과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고품질 사과를 엄선하여 수출해야 한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엄격한 품질관리를 위한 수출조직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수출조직의 육성을 위해서는 중앙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수출보조금을 이 조직을 통해서 지불하는 방안을 들 수 있다. 또는 수출사과의 자조금제를 신설하여 이 조직이 운영하는 방안 등을 들 수 있다.
셋째, 표면, 브랜드, 포장은 중요도와 만족도가 모두 낮기 때문에 우선순위를 낮추어도 좋으며, 크기와 모양은 중요도는 낮은데 비해 만족도가 높아 불필요한 과잉 관리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또한 표면, 브랜드, 포장, 크기, 모양은 중요도와 만족도의 차이가 한국산 사과 구입의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마지막으로 소비자의 사회경제적 특성변수 중에서 연령과 가구소득에 대한 추정계수가 양(+)으로 통계적 유의성을 가지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한국산 배가 미국의 동양식품점에서 거래되는 점을 감안할 때 소매단계의 유통기관으로는 동양식품점이 적합하다. 또한 소비대상은 한국산 사과에 대해 거부감이 적고 신뢰도와 충성도가 높은 한인들이 적합하며, 목표 소비자는 재미 한인 중에서 장년층과 고소득층으로 설정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세계화 및 아시아의 경제발전으로 인해 과거부터 북미와 유럽국가에 서 나타난 인구의 다양화 및 다문화사회는 오늘 아시아의 한국 및 대만 신흥국가로도 확장되어가고 있다. 유럽국가와 달리 캐나다는 UN에서 권장한 다문화 사회통합정책에 있어 성공한 모범사례이다. 1971년 캐 나다 트루도(Trudea) 정부는 다문화주의 법안(Multiculturism Act)을 통과시켜 캐나다를 세계에서 유일하게 다문화주의를 헌법에 명기한 국 가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다문화주의는 캐나다정부로부터 사회 전반까 지 관철 되었다. 이는 여러 소수민족 문화를 미국주류문화에 융합시키 는 미국의 멜팅팟 (Melting pot)방식과 달리 캐나다 다문화주의의 특색 은 각 소수민족의 문화를 보존하고 다양성을 인정 및 존중하여 각 민족 들이 자기만의 색깔을 낼 수 있도록 하여 같이 모여 한 폭의 모자이크 (Mosaic)그림을 형성하는 제도이다.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는 토론토의 화인 및 한인 커뮤니티 서비스도 이런 캐나다식의 다문화 통합정책이 실현되고 있다. 그 중 새 이민자 사회정착서비스(Social Settlement Services) 부문에서 자민족(自民族), 자언어(自言語), 자운영(自運營) 시 스템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중국어,한국어를 포함한 160개국 언 어로 자민족이 운영하는 커뮤니티 비영리 단체로부터 세계 각 국에서 온 이민자가 캐나다 사회통합(Integration) 정착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게 하여 사회에 잘 적응하는 시스템이다. 본 연구는 이런 옥토(沃土) 을 제공하는 캐나다 다문화 사회통합시스템을 한국에 적용가능한지를 연구하고자 한다.
Korean missionaries and Korean diaspora churches are all around the world now. In fact, Korea is widely known as the second-largest missionary sending country in the world, and the country where the biggest church in the world is located. However, although Korean diaspora churches are located in strategic places for world mission, many are reaching out to only Koreans. Of course, they are engaging in various forms of mission. But mission is not their main pursuit. They tend to focus more on internal programs, and differentiate those programs from mission. Missional churches, on the other hand, have a different understanding. They think of the church as having one vocation: participation in the missio Dei—that is, the Triune God’s own mission. In other words, traditional churches have programs, some of which focus on mission; in contrast, missional churches focus mainly on mission and seek to bring all their programs to bear on that task. This study, in which the author commends the latter ecclesiological stance, explores how Korean diaspora churches in North America might be able to move from a traditional stance to a missional one. Utilizing three transformation theories as a framework for analysis, and working from data from interviews with leaders from ten Korean churches in North America and North American-based Korean missional leaders, plus library research and the records and histories of the churches studied, this study concluded that the authoritarian model of pastoral leadership in first generation Korean diaspora churches in North America militates against the employment of any change process that does not focus first and foremost on senior pastors. Given the support of the senior pastor, the study further recommends a strategy for change that is tailored to the culture of first generation North America Korean churches.
이혜련여사(이후 존칭 생략)는 도산 안창호의 부인으로 미국식으로 안 혜련, 혹은 헬렌 안(Helen Ahn)이라 불리운다. 도산의 유품과 관련 자료들이 유족들에 의해 독립기념관 추진위원회에 기증된 때는 1985년 3월 11일이다. 독립기념관이 개관을 준비하면서 유족들과 미주 한인사회의 도움을 받아 유족 소장의 자료들을 기증받게 된 것이다. 한국에 오게 된 도산 자료는 도산 연구는 물론 한국근현대사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남편인 도산 안창호의 유품과 자료를 오랜 세월 동안 소중히 보존해 서 후세에 유산으로 전달한 이혜련, 그녀는 역사학자 이상의 역사의식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남편을 존경하며 이들 자료가 후대에 그 어떤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인가를 자식들에게도 가르친 이혜련은 한 가족의 어머니요, 재미 한인사회의 대모로서 큰 삶을 살았다. 이혜련의 삶은 정치 결사에 참여해 투사적으로 살지는 않았으나 민족 수난기에 남편인 도산 안창호가 大義에 헌신할 수 있도록 희생적인 뒷바라지를 하며 자신이 가장이 되어 가족의 생계와 자식 교육을 책임진 위대한 어머니이며 강철과 같은 여성이었다. 당시 한국의, 아니 재미 한인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한인사회를 안정시키는 절대적 존재들이다. 생활을 책임지고 자식의 교육을 책임지며 많은 여성들이 남성을 대신하여 가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이혜련의 삶이 범상치 않음은 가장이었지만 가족주의에만 매몰되지 않았던 점에 있다. 이혜련은 독립운동계의 지도자 안창호의 아내에서 머물지 않고 한인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큰 삶을 살았다. 또한 모든 면에서 솔선수범 하며 행동 자체가 교훈이 됨으로써 아버지의 부재에도 자녀들을 훌륭하게 성장시킨 그녀에게 재미 한인사회는 큰 존경을 표하였다. 도산 안창호와 결혼식을 올린 이튿날 유학길에 동반한 이혜련은 다른 미주 이민자들과 다름없이 문화적 차이와 인종차별, 그리고 언어장벽으로 고통받고 경제적 여력이 없는 불안한 생활 속에서 고통받았다. 한인 여성들은 전세계에서 가장 민주주의가 발달하고 여권이 신장된 곳이라 할 수 있는 미국에서 살고 있었지만 여권 신장 문제로 고민하거나 갈등하지 않았다. 아니 관심 밖의 일이었다. 자신들이 성장한 고향을 떠나 낯선 이국의 땅에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이혜련의 내면에도 이질적 갈등 요소들이 자리잡을 여력이 없었다. 재미 한인여성들의 제일의 관심은 내 나라를 다시 찾아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일이었으나 자신의 이름보다 누구의 어머니, 누구의 부인으로서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이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그녀들의 자아는 자신들의 문제보다는 내 자식을 독립된 국가의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일이었다. 이혜련이 미주에 이주한 때는 1902년으로, 재미한인사회로 보면 이주 초창기에 해당한다. 초창기 이혜련의 사회적 활동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공립협회를 결성하고 국권회복운동에 뛰어들어 바빠진 남편을 뒷바라지 하면서 동시에 자식의 성장과 교육을 도맡아하고 무엇보다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가장으로서의 삶을 살기에 여력이 없었다. 어머니로서 생활인으로서의 고단한 삶 가운데에서 혜련의 꿈과 목표 역시 남편인 안창호와 마찬가지로 조국 독립이었으며 이민 1세대로서 혜련은 동포사회에 그 꿈을 공유하고 전파하였다. 이혜련 삶의 궤적은 독립기념관 소장의 안창호자료 중에 남편과 가족, 그리고 주변의 인물들과 주고받은 편지들과 대한여자애국단 관련 기록,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에서 간행한 『안창호전집』,『미주 국민회 자료 집』과 《新韓民報》, 그리고 딸 안수산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었다. 본 논문은 안창호의 부인으로서가 아닌 인간 이혜련의 삶에 주목하고 재미 한인사회 여성운동사측면에서 한국근대사를 살펴볼 생각이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dentify and compare the dimensions and patterns of the perception of traditional food for Koreans living in Yanbian, Mongolia and Uzbekistan. Items representing the perception of traditional food were combined into a dimension and a pattern based on underlying perception of the Koreans living in the area. Any difference in the perception of the Koreans living in these areas likely reflects their different dimensions and patterns. Thus, it is important to determine if Koreans living in Yanbian, Mongolia and Uzbekistan should be treated as a homogeneous group when defining their perceptional structure of traditional food. Factor and cluster analysis of the data generated in this study revealed two different dimensions and patterns for each group of Koreans living in Yanbian, Mongolia and Uzbekistan. However, the structure of the dimensions and patterns of the perception of traditional food differed, indicating that Koreans within and between the countries are not a homogeneous group.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in perceptional dimensions and patterns among Yanbian, Mongolian and Uzbekistan-Koreans are also discussed. Moreover, future implications for food and nutrition specialists, especially for those who have an interest in Korean traditional food in Asia and those who have an interest in globalization of Korean traditional food are provided.
In science and engineering programs in the U.S. in 2000 China, South Korea and India were top countries of origin sending students. More than half of the students intend to stay in the U.S. Immigration, education and occupational choices all have human 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