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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중국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고구려 역사 귀속문제는 한중 양국 간의 역사문화 갈등 중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그동안 중국에서는 통일다민족국가론에 입각하여 영토주 권론을 내세움으로써 고구려 역사를 민족, 강역 등 측면에서 자국의 ‘국사’로 규정해 왔다. 그러나 2010년 이후부터 학계에서 중국 국사 이론의 구축 및 민족, 강역 등과 관련된 개념에 대한 인식은 이전과 크게 달라지면서 과거 연구 이론 위에 구축된 고구려사 인식은 점차 이론적 근거를 잃게 되었다. 이 같은 현실적 배경을 바탕으로 본 논문은 현재 중국 국사 연구의 새로운 동향을 결합하여, 과거 중국 국사 서술에서의 이론적 구축 문제를 다시 돌아봄으로써 한중 고구려 역사 귀속 문제에 대한 중국학자들이 가진 몇 가지 인식 오류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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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0.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삼국시대는 한국 서예의 시작점이다. 그 중에 고구려는 중국과의 교섭에서 비교적 일찍 한자문화를 받아들이고, 민족의 심미관을 융합해 자신만의 풍격을 갖춘 서예를 형성하였다. 고구려는 동북아의 강국으로서, ‘지역 문화 거점’ 역할을 하여서 신 라ㆍ백제ㆍ일본의 서예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멸망한 후에도 고구려 서풍이 여전히 통일신라시대와 일본에 부분적으로 지속되었 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귀족과 그 자손들은 여전히 ‘구양순체(歐陽詢 體)’를 숭상하였는데, 유민 묘지명에 대부분 구양순체의 풍격으로 이루어졌다. 고구려 서예의 대외교섭을 연구하는 것은 한국서예 대외교섭의 시 발점이며, 한국서예 연구의 기초 작업이기도 하다.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삼아 한국서예의 대외교섭에 관한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진다면 보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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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9.09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고구려 벽화고분은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속적인 발굴 조사와 학술 연구를 통해 현재까지 역사, 고고, 복식, 문화사, 미술사 등의 방면에서 적지 않은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고구려 고분벽화가 처음 발견된 1907년부터 1980년대까지 벽화고분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일제강점기 발굴을 처음 시작한 일본과 벽화고분이 위치한 북한과 중국에 의해 주도됐다. 한국 학계는 정치 이념과 지리적 문제로 인해 원천자료에 대한 접근이 불가능했고, 척박 한 연구 환경으로 인해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가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일본을 통해 북한과 중국의 벽화관련 출판물들이 다량 유입되면서 연구를 위한 기초자료들이 서서히 갖춰지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 초반 중국이 문호를 개방하고 2000 년대 초에 남북 간의 화해무드로 인해 학술교류가 활성화되면서 벽화에 대한 실견과 원천자료에 대한 접근이 한 층 수월해졌으며 미술사 연구를 위한 토대도 전보다 탄탄해져 갔다. 1990년대 이전까지 미술사 분야의 연구는 벽화고분이 갖는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학계의 주목을 받기 어려웠으나, 이후 전문 연구자들이 배출되고 미술사의 양식론에 입각한 거시적, 미시적 관점의 다양한 논문들이 생산되었다. 게다가 회화이외에 공예나 불교조각를 전공하는 미술사학자들도 고구려 벽화 연구에 동참하여 전공 연구자가 아니면 다룰 수 없는 세부적인 주제들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는데 기여했다. 100여년에 걸친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는 그동안 다양한 주제에서 적지 않은 성과물들을 생산해냈지만 전공인력의 부족과 벽화 원천자료의 불완전한 공개 같은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 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아직까지 많은 고분의 벽화 자료가 제대로 정리, 발표되지 않아 벽화연구의 발전에 걸림돌로 작용한다. 남북교류를 통한 원천자료의 정리와 출판이 시급하며 벽화를 전공하는 미술사 방면 연구자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배출되어 다양한 방면에 걸친 활발한 연구가 필요하다. 또한 양식론에 입각한 연구결과물들이 보다 많이 쌓여 고구려 벽화고분의 편년을 해결하는 데 유용한 기준안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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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8.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길림성 집안시의 장천1호분 예불도는 5세기 후반 고구려의 예불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자료이다. 단순히 불상 앞에서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에 그치지 않고, 불교에서의 절하는 방법은 이마를 땅에 닿게 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묘사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 논문에서는 인도에서조차 잘 표현되지 않았던 이러한 예불방식이 고구려 벽화에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결론적으로 이 절하는 모티프는 간다라미술에 자주 표현된 연등불수기본생도에서 수메다가 헌신적으로 진흙바닥에 머리카락을 펼치며 몸을 눕혔던 것을 묘사한 장면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해 보았다. 동아시아에서는 이러한 행위를 특정한 설화 속의 장면을 넘어 보편적인 예불의 행위로 간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절하는 방법에 익숙했던 동아시아인들은 자연스럽게 미술 속의 수메다의 행위를 부처에 대한 배례라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아가 장천1호분 예불도의 불상 좌우측에 배치된 예불자들의 움직임을 통해서는 우요의 방식으로 예불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자 의도했던 것으로 해석해 보았다. 이 시기 예불방식에서 우요가 중요했을 것임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증할만한 자료는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이 예불도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지 100여 년 안에 이러한 예불방식이 정착했음을 보여준다. 끝으로 장천1호분 예불도는 정황상 실내가 아닌 실외에서 일어나는 장면으로 추정된다. 이는 단순히 실내ㆍ외의 문제가 아니라 화면상에 등장하는 부처가 단순한 불상인지, 아니면 석가모니의 현현한 모습의 묘사인지의 차이이기도 하다. 실내, 즉 법당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러한 구별을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야외에서 벌어지고 있는 설법 장면이라면 조각상이 아니라 실제 석가모니를 묘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배경에 등장하는 하얀 연꽃 봉오리는 󰡔법화경󰡕에 등장하는 백련의 꽃비를 연상시킨다. 물론 예불도가 그려진 공간이 무덤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미타불, 그리고 극락세계에서의 연화화생 등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거나, 혹은 내세에 미륵삼회설법에 참여하게 된 것을 상상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법화경󰡕에서 석가모니의 ‘무량삼매’에 의해 부처가 타방세계에 출현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처럼 석가모니가 고구려에 현현한 것을 묘사한 것으로도 해석해 볼 수 있음을 제시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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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7.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인의 생활상과 그 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자료이다. 특히 5세기 평양지역 고분벽화는 4세기 이래로 지속된 漢系와 낙랑 고분의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면서 평양천도 이후에는 고구려 고유의 문화가 반영된 벽화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본 논문에서 옥도리 벽화고분에 주목한 이유는 바로 5세기 전 반~중반 평양지역에서 이루어진 집안지역 문화의 수용과 융합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옥도리 벽화고분이 조성된 5세기 고구려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고 427년에 단행된 평양천도에 주목하였다. 수도 천도로 인해 평양은 이제 고구려의 새로운 정치적․문화 적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 기존 국내성의 집안 문화가 새로운 수도 평양으로 유입되며 평양에서 汎고구려적인 새로운 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5세기의 고분 문화에서도 평양천도를 전후로 하여 두 지역의 고분문화가 교류․융합되는 과정을 거쳐 汎고구려의 문화가 성립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옥도리 벽화고분은 구조상 감실이 달린 二室墓의 구조로 평양지역 벽화고분 고유의 특징을 보여준다. 고분의 구조나 생활풍속·사신의 벽화 주제와 구성은 평양과 집안 지역의 고분들과 친연성을 보여 그 제작시기를 5세기 전반∼중반까지 내려다 볼 수 있다. 옥도리 벽화고분은 감이 달린 이실묘의 독특한 구조와 생활풍속·사신·장식문 등 다채로운 벽화 내용과 구성으로 주목받아 왔다. 또한 옥도리 벽화고분에 나타나는 집안과 평양지역 고분문화의 특징들은 고구려의 평양지역 지배 및 평양천도를 전후로 하여 두 지역에서 이루어졌을 문화적 교류를 보여준다. 그러나 옥도리 벽화고분은 두 지역의 고분문화가 공존할 뿐 아직 서로 융합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지는 못한 양상으로 두 지역 의 문화교류 초기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옥도리 벽화고분을 통해 5세기 전반~중 반에 이루어졌을 두 지역 간의 교류를 통한 고분문화의 교류를 확인할 수 있으며, 옥도리 벽화고분은 5세기 후반 고구려 고분벽화와 汎고구려 문화의 탄생을 이해하는데 중요 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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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6.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aim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food culture represented by the grain yard, water well, kitchen, and meat storage space which were depicted in the mural painting of An-Ak tomb No. 3. The mural paintings of An-Ak tomb No. 3 were compared with those of ancient Chinese tombs before the 4th century in order to understand their characteristics. Above all, the tomb murals describe the form and function of the stove (buttumak) as well as the cuisine using the cauldron (sot) and steamer (siru) in a very interesting manner. The meat storage space of An-Ak tomb No. 3 shows whole carcasses of animals such as roe deer, dog, and pig. However, Chinese murals show that while small animals such as soft-shelled turtle, fish, chicken, duck, pheasant, rabbit, etc. were stored as whole carcasses without being cut into pieces, large animals such as cows and pigs were slaughtered and each piece of their carcasses such as the head, thigh, meat loaf, and cardiopulmonary part was separately depicted. These tomb murals vividly describe the food culture of Koguryo and China before the 4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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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1.10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經典 工夫가 시작된 것은 三國時代때 세운 學校의 儒敎經典 敎育이 그 歷史的 始初를 이룬다. 以後統一新羅 高麗 朝鮮을 거치면서 韓國 漢字文化의 形成에 儒敎經典 工夫는 絶對的 影響을 미쳤다. 高句麗는 三國時代 第一 먼저 中國으로부터 漢字를 받아들여 百濟와 新羅로 傳播하였다. 高句麗는 當代 中國 周邊 國家 가운데 가장 發達된 最高의 漢字文化 水準을 보여주었다. 高句麗의 敎育機關인 太學은 高句麗가 中國으로부터 漢字와 儒敎文化를 받아들여 高句麗에 맞는 敎育制度로 定着시킨 歷史的 産物이다. 太學은 이 땅에 自主的인 精神的 文化的 敎育機關의 門을 열어 韓國歷史에 있어 儒敎理念에 의한 悠久한 國立學校 傳統을 樹立하였다. 淵蓋蘇文이 主張한 ‘三敎鼎足說’은 高句麗가 漢字 文化와 함께 받아들인 儒敎 佛敎 道敎 文化를 高句麗의 精神文化로 體化한 重要한 徵表이다. 廣開土大王碑는 高句麗만의 文化遺産이 아니다. 廣開土大王碑는 韓國人의 文化遺産으로 最高의 歷史的, 文化史的, 思想史的, 藝術史的, 漢文學史的 價値를 모두 지닌 最高의 寶物이다. 儒敎經典 工夫라는 問題와의 聯關성에 局限해서 본다면 廣開土大王碑의 內容에 보이는 高句麗의 政治哲學은 儒敎 經典인 『書經』의 가르침인 敬天愛人과 一脈相通한다. 廣開土大王碑는 傳統的인 韓國人의 固有思想과 儒敎와의 만남이 이룩해낸 高句麗 統治哲學의 完成을 보여준 傑作이다.
        12.
        2007.04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13.
        2002.1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600원
        14.
        2000.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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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1997.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erspective representation and its effect that appeared in the tombs and mural paintings of koguryo are summarized as follows: First, The inside structure of the tombs is likely to show the deepness effect, placing each function in the front and both sides centering around the mane pillars and creating the boundaries and the spaces that have various visibility between the inside and outside spaces of the structure just like a traditional Korean house shows. In addition, The deepness effect is emphasized by suggesting that the spaces are countinued with a storage attached behind the main house or by forming the level and deployment in a narrow space like the scene that a large array is looked out from the main house. Second, The deepness effect is expressed by making the form of ceiling turn to a vertical space of an ascending image, constructing it just as the lotus lamp ceiling of a wooden architecture or drawing it just like the imaginary heavenly world with the sun the moon and mythical fairies and animals spread in it. Thried, The perspective effect is disclosed by drawing the mural pictures in an equally set bird's-eye view without regard to the disfance proportion according to the conceptual visualization which is not a visual penetration, adopting the multiple view points and moving view points that are moving around as an important manner of seeing. Fourth, The deepness effect is emphasized through the scene of changing spaces when they are looked out far or looked into depending on a viewpoint of the daily life by forming the fromes of paintings that we made up with actual pillars, Du Gong, crossbeams or that are painted in most tombs. Fifth, The rich spatial senses are reflected by originating the characters of the three directions, level, deployment and ascending. An example which can support the conclusion of this study can be given here. that is, the construction ground plan of a dwelling house of a nobleman at the end of Koguryo as a remain which was excavated at Dongdae Ja in Jip 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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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1996.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A few archeological excavation of Buddhist temple sites of Koguryo were reported with information of site arrangement. The interpretation of such information is very important not only for the explanation of Korea early Buddhist architecture but also for the development of East Asian cases in general since no archeological evidences of the same period were found in other countries such as China. Though the investigation of the four temple sites this paper attempt to identify their date of construction and the process of change. The study depended much on comparative studies of the change of site elements such as pagoda, image hall., corridor, and other buildings. The study could conclude that the site of SangO-Ri must be the earliest case which was followed by ChungRung-Sa, which was built in around 427AD. The site of ToSung-Ri was the case which was the work of the rate 5th century. Such process of the development of Buddhist architecture in Koguryo unveils the fact that the process of change was a continuous flow toward a consistent goal of change that had much to do with the contemporary religious situ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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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1986.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re is the picture of four gods(四神圖) painted on the wall of old tomb of Koguryo dynasty in 4~5 century. Four gods in this picture were Symbolized by four animals, tortoise, tiger, ryong which is imaginative large Snake, and bong hwang which is also imaginative birds. Those animals wese believed at that time as protecting geities against all of the haman disaster and evils. The peoples of Kojosun dynasty carried those animal charms, and painted or graved on some where of living environment such as furniture, utensils, tools, wall, ceiling, etc. They ate those animals as food or medicine to treatment of all disieses and to get rid of evils and to gain well-being. A lot of examples in historical records were cited and interrelated to above super sti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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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201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공연에서는 오랜 역사와 전통문화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는 한국의 모습을 그려내었다. 그 가운데 ‘평화의 땅’은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과 강서대묘에서 나타나는 무용도, 사신도, 인면조를 재해석하여 공연한 부분은 많은 관심을 받았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고구려 시대 ‘옛 무덤의 벽에 그린 그림’을 말하는데 약 3세기말에서 7세기 전반까지 만들어졌으며 벽화의 내용, 구성 방식, 표현 기법에서 고구려인의 기질과 그들의 기상 그리고 많은 문화적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므로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 고구려 고분벽화를 내용으로 하여 재해석한 공연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나타내었다. 본 연구는 고구려 고분의 무용총과 강서대묘 벽화인 무용도, 사신도, 인면조와 ‘2018 평창동계올림픽’ 공연에서 현대적으로 재현된 무용도, 사신도, 인면조를 비교하여 논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고구려 고분벽화의 변화와 표현을 알아보고 무용총과 강서대묘 벽화의 주된 표현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리고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공연 가운데 ‘평화의 땅’에서 무용도, 사신도, 인면조가 현대적으로 어떻게 재해석되고 있는지 그 표현들을 논하였다.
        20.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혼속은 아시아・유럽・북부아프리카・아메리카 등 세계의 원주민 사이에 이루어졌던 혼속을 말한다. 인도나 일본의 소수민족 사이에는 최근까지도 위와 같은 혼속이 있었다고 보고되었다. 대완에서는 서조모와 혼인을 하였으며 흉노에서도 서모・형수・계수・며느리와 혼인할 수 있었다. 서역의 당항족은 백모・서모・형수・며느리와 혼인할 수 있고 돌궐에서는 후모・백숙모・형수와도 혼인할 수 있었다. 오・여진・몽골・부여 등에 서는 형수와 혼인하는 혼속이 있었다. 󰡔양서󰡕・󰡔남사󰡕・󰡔태평어람󰡕 등의 사서에 서는 고구려에서도 형수와 혼인하였다고 전한다.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혼속이 최초로 나타난 사서는 󰡔삼국사기󰡕이다. 고국천 왕이 뒤를 이을 아들 없이 죽자 우씨왕후는 시동생 연우와 통정하고 그를 왕위 에 앉히니 이가 산상왕이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고국천왕 부분에 ‘立妃于 氏爲王后’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는 우씨가 고국천왕의 왕비가 되기 전에 이 미 ‘妃’였을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연나부의 명림씨 가문의 권세를 등에 업고 왕 후 우씨는 신대왕・고국천왕・산상왕・동천왕 등 4대에 걸쳐 왕후로 또는 왕태후 로 권세를 누렸다. 뿐만 아니라, 명림씨 가문의 대모 노릇까지 한다. 산상왕은 우씨로 말미암아 왕위에 올라 우씨를 왕후로 삼은 각시바치의 전형이다. 그러 나, 정치적 재능을 지녔던 산상왕은 연나부와 정략적 거리를 유지하며 진대법 을 실시하고 국상 을파소를 기용하는 등으로 연나부를 제어하였다. 산상왕과 우씨왕후 사이에 이루어진 형수와의 혼인 문제를 둘러싸고 당사자 인 산상왕과 우씨왕후는 물론 산상왕의 형제들인 발기・계수・고국천왕은 각기 다른 의식변화를 보여준다. 발기는 산상왕과 우씨왕후의 혼인을 역수와 천륜을 어긴 비례라고 하여 군사를 일으켜 싸웠으나 실패하고 만다. 산상왕의 명에 따 라 발기를 정벌하러 나섰던 계수도 산상왕이 국양하지 않은 것을 불의라고 하 면서도 남의 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종국을 멸망시키려 한 발기의 행위 역시 죽 어서 선인을 볼 때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발기를 왕의 예로 장사 지낸 뒤 산상왕은 우씨왕후와의 사이에 뒤를 이을 아 들이 없으므로 소후를 얻겠다는 뜻을 비친다. 산상왕이 주통촌녀와 상관한 것 을 안 우씨왕후는 질투하여 병사를 보내 주통촌녀를 죽이려고 한다. 이 과정에 서 주통촌녀의 유체가 자신의 후사임을 확인한 산상왕은 이를 우씨왕후에게 말 하여 주통촌녀에 대한 우씨왕후의 횡포를 제어하고 주통촌녀를 소후로 삼은 다 음 아들 교체를 태자로 봉하니 이가 동천왕이다. 산상왕의 의식은 다분히 정치 적이고 정략적이다. 왕의 아이를 임신한 주통촌녀를 병사를 보내 죽이려 한 투 기 죄를 짓고도 우씨왕후가 무사했던 것으로 보아 왕후와 연나부의 권력이 산 상왕을 능가했던 것 같다. 우씨왕후는 죽을 때 스스로의 행위를 첩실행이라고 부끄러워하면서 신하들에 게 자신을 구렁에 버리지 못하겠거든 산상왕릉 곁에 묻어 달라고 유언한다. 이 미 죽은 고국천왕은 무당의 입을 빌어 우씨왕후의 행위를 낯이 뜨거워 백성을 볼 수 없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산상왕과 우씨왕후의 혼인문제를 놓고 권근・서거정・안정복・최 보 등이 천륜을 어긴 수혼이라고 비판하였다. 󰡔경국대전󰡕과 󰡔증보문헌비고󰡕에 서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첩이나, 백모나 숙모, 형수나 계수와 혼인한 자를 극 형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까지 형수와의 혼인이라는 유습 이 남아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