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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5.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paper is about the characteristics of the supply of wood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of Sannung construction. The construction period of the Sannung construction cannot be planned and determined, and the construction must be completed within 3 months. Due to these characteristics, the supply of wood is also different from that of general construction. First, the method of directly logging and obtaining was minimized. Instead, they received timber from a private timber dealer. In the case of logging, considering transportation, it did not leave Hwanghae-do, Gangwon-do, and Chungcheong-do, where the distance was as close as possible. In addition, wood stored by individuals or the government was used as much as possible rather than logging, and in the 18th century, there were many cases of logging around royal tom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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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5.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Hyeonpung Gwakssi Eongan」 (A collection of Korean letters)is of 176 letters. Of 176 letters, 83 letters are about dietary which are 47.16% of the total letters. In 83 letters of dietary, there are records of rice, glutinous rice, barley and buckwheat, and also yeast, malt, flour, wheat bran. For poultry and meats, there are beef, raw & dried pheasant, chicken, quail and other birds. For fish and shellfish, there are sea fish such as cod, herring, croaker, flatfish, and freshwater fish such as crucian carp. For main dish, there are cooked rice, porridge, noodles and dumplings. For side dish, there are soup, grilled dish, nureumi, stir-fried dish, steamed dish, fermented fish, raw fish, jaban and chimchae. For rice cake, there are ancestral rites cake, sanseung, gyeongdan, ssookddeok. In「Hyeonpung Gwakssi Eongan」, Ju Gwak instructed food preparation, grocery shopping, recipe, guest-welcoming, housekeeping, making bed, transportation, curfew for his kids and clothing for his wife one by one. Furthermore, there are records of dietary lifestyle of spring season and the month of November in lunar calendar. Lastly, there are birthday ceremony, coming of age ceremony, wedding ceremony, funeral ceremony and ancestral rites ceremony according to Confucianism ideal and their food reci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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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4.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하멜보고서』의 ‘1660년, 1661년, 그리고 1662년’에 실려 있는 ‘종교’ 부분에 대해석 작업이다. 이는 “데 스뻬르베르 호”의 생존 선원들이 1653년 8월 16일 난파당하여 불시착한 후 1666년 9월 5일까지 조선에서 경함한 것의 기록을 활용하고 있다. ‘종교’부분 기록 내용은 17 세기 조선의 불교와 의례, 조선 승려와 계율, 불교와 사찰 교육 그리고 불교 건축과 사원 관리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히 불교와 불교의 식에 대한 유자들의 인식과 불교가 백성들의 죽음의례에 여전히 깊이 간 여하고 있고, 평소 그들이 절에 가서 기도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한편 당시 상주권공이나 수륙재가 설행되는 풍경도 읽을 수 있는데, 여기에는 생태적 음식에 대한 기록은 소략하나 자신들의 조상을 위한 의례가 행해 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이 교육기능은 물론 사회복지기능도 하며 사찰의 고아들에 의해 사자상승관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도 살펴보았 다. 또 불사의 권선이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알게 한 귀중 한 민족지 증언이 아닐 수 없다. 본 연구에서는 『하멜보고서』가 전하는 17세기 중엽 조선의 종교생활이 매우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그런 의미에서 서양사람이 쓴 최초의 조선에 대한 민족지(ethnography)라는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이는 17세기 중엽 이후 일어나고 있었을 법한 조선의 유교문화의 전개양상과 견주어 함께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고 할 것이다. 이는 제도적으로 불교와 불교 의식을 폐지하려는 유자들의 권력이 더 강해지는 환경에서 민중들이 어 떻게 불교와 불교적 세계의 신앙을 영위했을까의 문제로 나아간다고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하멜보고서』가 전하는 실상은 청허당 서 산대사 휴정의 염불문과 의문(儀文)이 해남 대흥사를 중심으로 소비되는 맥락을 깊이 있게 천착할 수 있는 실증자료라고 생각된다. 특히 17세기 후반 이후 전개될 조선 후기 유교의 종법질서에 입각한 『주자가례』와 문 중(門中)의 문화와 대비하여 개인과 가족, 각 마을의 민중들이 당면한 문 제를 해결하려는 종교적 실천행위에서 불교의례의 역할을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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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2024.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이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17세기 후반 독일 바로크의 오페라 문화와 관련된 복잡하고 다 층적인 서사이다. 이 서사에는 국내 음악학 담론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독일 바로크의 오페라 문화와 그것의 태동, 그리고 성장 등을 다루는 일련의 과정이 담겨 있다. 특별히 이 글은 이 과정 을 17세기 후반,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공공 오페라 극장을 중심으로 기술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역설하고자 하는 것은 라이프치히의 오페라 문화가 17세기 중반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의 주 요 음악도시, 예컨대 함부르크, 드레스덴, 하노버, 그리고 베니스 등이 제공했던 문화적, 음악적 연 결망 안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라이프치히의 오페라 문화를 이러한 방식으로 읽는 것은 이 도 시의 음악적 지형이 멀리는 베니스와 가까이는 하노버 등의 도시와 얼마나 유사했었는지도 가늠 하게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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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23.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examined the structural characteristics of the royal tomb equipped with only rail stone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Bongneung(封陵: the burial mound of royal tomb) equipped with only rail stones was constructed from 1468 to 1632. During this period, Hyeongung(玄宮: the underground chamber for the coffin of the king or queen) was constructed with lime. When the Hyeongung is completed, the soil is covered with a thickness of 1 foot parallel to the ground surface. On top of that, as the base of the Bongneung, the rail ground stone is constructed with a height of about 1.5 to 2 feet. The inside of the rail ground stone is also firmly filled with soil. On top of this, semicircular lime is installed with a convex center. Lastly the soil is divided and compacted several times to form a hill, and then covered with grass to complete the Bongneung. The notable feature is that between the Hyeongung made of lime and the Bongneung made of soil, the rail ground stone serves as a stylobate with the inside compacted by the so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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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23.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망문백자는 기면 위에 도안화된 그물문을 장식한 것으로 중국과 일본, 한국에서 제작됐 다. 본 연구는 그동안 종합적으로 조망되지 못했던 망문백자의 양식을 규명하고, 동아시아 망문백자의 제작양상과 특징을 고찰했다. 망문백자는 명 말기 수출자기 양식으로 확산됐다. 따라서 명 말기 망문백자가 유통되었던 국가들의 자료를 종합하여 살펴봄으로써 중국 망문백 자 제작 경향을 파악했다. 한편, 중국 망문백자는 주요 소비국이었던 일본에서 모방 및 변용 되었다. 일본은 경질백 자를 생산한 이래로 망문백자를 꾸준히 생산한 것으로 이해된다. 일본에서 망문 그 자체는 길상상징으로 도자기를 비롯한 공예품의 의장으로 애호됐다. 특히 도안집을 통해 널리 유포 되었는데, 이러한 도안집이 조선 19세기 이후 등장하는 망문백자 제작에 자극이 되었을 가 능성을 추정했다. 조선 후기는 백자 제작에 있어서 일본의 영향이 고조되는 시기로 대일교류 를 통한 망문백자 제작을 밝혔다. 이처럼 중국과 일본, 조선에 이르기까지 각국에서 망문백 자 제작과 수용이 각기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 점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공통으로 출현하는 망 문백자의 상호 영향관계를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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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22.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중화회관은 각 국가에 있는 화교들이 만든 상공회의소 혹은 교민협회 같은 역할을 수행한 조직이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17세기 중반 명향사라는 조직이 먼저 등장했는데, 이는 단순한 화교 커뮤니티로 출발해서 명향회관이라는 조 직화를 거쳐 중화회관을 조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두 기관은 지연(地緣)이라는 공통 점을 통해 자연스럽게 시기별로 연결되었다. 베트남 정권은 명향사를 화교를 관리하 는데 활용하였고, 이는 중화회관 시기에서도 이어졌다. 명향사의 특성은 베트남 중화 회관이 다른 국가와 다른 점은 갖게 하였다. 천후사당과 관우사당을 두고 복과 안녕 을 빌었으며, 중요한 화교 조상을 기리는 사당을 두었다. 또한 혈통별로 각기 달리 화교를 관리하여 중화회관의 효율적 관리와 회원들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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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22.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17~19세기 명․청대 박고문자기의 제작배경, 유형과 시기별 특징, 그리고 조 선과 일본도자에 미친 영향관계에 대한 전반적인 고찰을 목적으로 삼았다. 박고문자기는 고동기에 대한 완상 및 애호가 일종의 문인취미로서 확산되었던 명․청대 사회상을 반영한 대표적인 시각작품이다. 그 제작배경과 관련하여 당대 문헌사료들을 통해 박고취미가 성행했던 시대적 배경을 확인하였다. 이어서 17~19세기 자기 박고문에서 보이 는 고기물 도상, 문방청완, 팔보 등 기타 길상소재 등의 구성요소로 유형 분류를 시도하고, 유형별 자기 박고문의 편년자료와 양식을 통해 17~19세기 박고문자기의 시기별 특징을 살펴 보았다. 그 결과, 17~19세기 자기 박고문은 크게 4가지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했으며, 이는 곧 시기별 박고문자기의 변천과 특징으로 이어졌다. 17세기 중후반, 경덕진 민요에서 문인취 향이 적극 반영되어 나타난 박고문자기는 18세기 이후에는 官樣의 내수뿐 아니라 다양한 품종으로 유럽 수출자기로도 크게 성행하였다. 19세기에는 전반적으로 자기의 질이 쇠퇴되며, 민간 잡보를 비롯한 여러 길상적 문양요소로 이전보다 더욱 번잡해지는 구성으로 변모되었다. 한편 박고문자기는 같은 한자 문화권이었던 조선과 일본도자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현전 하는 작품들의 비교 분석을 통해 그 영향관계를 확인하였다. 조선의 경우, 조선 후기 골동애 완풍조 등 중국의 복고적 취향을 잇는 주요 매개체로 작용하였으며, 이와 동일한 맥락에서 19세기 민화적 요소와 결합되어 자기의 문양으로 변용되었다. 일본은 조선과는 달리 17~18세기 유럽시장을 배경으로 한 수출자기에서의 수용과 변용이 이뤄졌으며, 일본식 미 감이 가미된 일본 수출자기의 특색으로 자리하였다. 이처럼 조선과 일본 각국에서 중국 박고 문자기를 수용하는 시기와 경로, 모방과 변용양상이 다르게 나타난 점을 통해 동아시아 도자 문화에서 갖는 박고문자기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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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21.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Uiwon-gun (1661-1722) and Sim Ikchang (1652-1725) were people of the upper classes of the Joseon Dynasty, who’s belts woven with thread were found in their graves.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a term suitable for the belts of these two people and to reveal the characteristics of the two belts and decipher the 8-character text marked on Shim Ikchang’s belt to understand its meaning. The terms used during the Joseon Dynasty related to woven belts include “Gwangdaho”, “Daeja”, “Bunhapdae”, “Sagagda”, “Bangseungah”, and “Samunjikdae”. Among these terms, “Gwangdahoe” is the most suitable to indicate the belts of for both belts. The belts are made of a silk fabric of narrow width. The size of Uiwon-gun’s belt is 2.8× 199cm, and because it is folded in half lengthwise and sewn, the original width is 8cm. It was woven in the imitation gauze technique. Sim Ik-chang’s belt measures 10.5×258cm and is decorated with a woven net at the end. There are water and mountain patterns on both ends of the belt, with 11 lines of flower patterns equally spaced between. The belt is damask, the inscription part is made of brocade with letters expressed in golden thread. The meaning of the inscription is “Made in Hanbu. May you live a long and healthy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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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21.09 KCI 등재후보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문은 속성이 다른 관요와 민요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영롱자기(玲瓏瓷器)의 예를 통해 먼저 17세기 전반 동서무역항로에 이런 작품들이 유통된 것을 검토하고, 이어 관련 양식에 대한 기원과 변화를 논하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8세기 건륭(乾隆)년간 관요에서 영 롱투각쌍층기[玲瓏鏤空雙層器]를 생산하게 된 경위와 독도관(督陶官)이 황제를 위해 새롭 게 해석한 신양식에 대하여 재고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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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21.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is a study on the structural changes of the tumulus and causes setting up a Sabangseok at the front of the tumulus at the royal tomb in the JoSeon dynasty, during the 17th~18th centuries. The Sabangseok was first used in the tumulus of Mongnueng(穆陵) in 1630. It is a multipurpose stone for boundary, foundation of the tumulus and blocking the sliding down of the tumulus. It was set up, when constructing a Yeongneung(寧陵) in 1673. But the vast spill of tumulus soil made it improve structure of the Sabangseok. Consequently, when the Yeongneung was re-constructed, the structure of the tumulus was fundamentally improved. The soil layer on the lime of the subterranean chamber became eliminated. Also the lime of the tumulus and the lime of the subterranean chamber became a united structure. The Sabangseok was still used until 1757 on account of precedents, although it would become unnecessary after structural improvement of the tumulus in 1673. In 1757, Yeongjo(The 21th monarch of the Joseon Dynasty) commanded repeal on the use of the Sabangseok, when constructing the Hongneung(tomb of Queen Jeongseong) . The decision and discussions about abolition on the use of the Sabangseok was recorded in Gukjosangryebop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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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2021.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17세기 牛疫의 창궐이 개인과 사회에 환기한 것들에 대해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등 학교 한문교육에서 災難 관련 자료를 어떤 방향에서 다룰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적은 것이다. 우역이라는 충격 앞에서 개인과 사회는 이전의 삶의 방식과 인습적 가치를 되돌아보게 된다. 소의 노동력이 결여된 농경의 삶에서, 사람들은 소가 생활의 중심에 있던 日常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역의 창궐은 전원적 삶의 안정성을 흔들고 기층민의 연대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의 連鎖로서 외교 등 의외의 영역에까지도 파장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조정에서는 몇 가지 정책을 서둘러 시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유교가치와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우역 창궐은 소의 도살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계속해서 촉발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편 우역은 기상 이변과 함께 발생함으로써 백성의 삶을 더욱 극단으로 내몰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하나의 압력으로서 사회 내에서 해결 구조를 모색하게 했다. 미래 사회에는 기후, 환경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역 자료가 함의하는 문제의식을 한문교육의 범위 안으로 편입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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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2019.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연구는 우산 명칭의 소멸과 석도 명칭의 등장 사이에서 실체(독섬1))와 명칭(우산, 석도)간 불일치 상황에 의문을 제기하고, 조선 후기에 제작된 지도와 사료에 등장하는 독섬의 이미지, 그리고 우산, 석도 명칭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독섬의 실체, 그리고 우산과 석도 명칭에 얽힌 의문을 규명하고자 하였다. 17세기 무렵, 조선왕실은 독도의 실체를 분명하게 인식하였으며, 그 당시 사람들이 알고 있던 독도는 지도에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그렇지만, 오랜 기간에 걸친 공도정책으로 독도에 관한 지리정보는 현저하게 퇴보되었고, 이러한 문제는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오류는 김정호의 「청구도」와 「대동여지도」 초기 버전에도 그대로 이어졌으나, 김정호의 치밀한 고증으로 그때까지 반복되었던 표현상의 오류는 1861년 무렵에 이르러 완벽하게 시정되었다. 요컨대, 김정호가 제작한 조선 후기 전국지도인 「동여도」와 「대동여지도」에 독도는 명확하게 표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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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2015.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우리 도자의 역사에서 고려시대 청자의 대표를 梅甁이라 한다면 조 선시대 백자는 龍樽이라 할 수 있다. 청화로 그린 용준은 조선의 개국 이후 체제가 정비되고 儀禮와 관련 器皿制式이 정립되는 첫 단계부터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기본 골격을 준수하면서 시종일관 하였다. 따라서 청화용준을 조선백자의 상징이며 중심적 존재라고 하는 데 이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간에 연구 경향은 17세기에 청화재료 수급이 어려워지면서假畵와 鐵畵재료인 石間硃를 썼고 또 그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 되었 다는 전제 아래 ‘철화백자의 시대’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결국 이러한 입장을 취함으로서 조선백자의 근간으로 조형의 중심을 이끌며 일정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온 청화용준이 일백년 가까이 단절되었고 다시 18세기에 새롭게 구성한 조형체계로 재등장 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러한 인식은 조선 중, 후기 백자의 전개에서 조형정신의 계승은 물론 조선사회 를 구성하는 지적 엘리트들의 일정한 美意識을 규명하는데 심각한 장 애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임진란 이후 광해군11년(1619)에 와서 어렵게 청화를 구하여 용준 제작이 가능해졌고 이후 왕실의 雙龍樽제작은 19세기까지 지속 되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존하는 조선중기, 후기 청화백자 쌍용준의 조형적 특징을 기준으로 여섯 유형으로 나누고 각각 의 성격을 분석했으며, 여기서 分院窯址出土철화용준의 절대편년 자 료를 대입하여 분류 기준의 당위성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철화백자는 사용주체도 달랐고 명분도 분명히 달랐다. 철화는 청화와 함께 상하관계를 유지하며 동일한 시공간에서 각각 다른 조 형의장을 계승하면서 일정기간 동안 공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적 인 계급사회의 정착을 추구했던 조선의 司饔院分院에서 정통성을 갖 는 청화백자와는 전혀 다른 위치와 기능으로 17세기 동안 독자적 철화 백자의 조형체계를 확립했고 곧 이어 간소화 쇠퇴하면서 지방 民窯로 이전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조선시대 백자의 대표격인 용준의 조형체계를 밝히는 일은 조선백자 의 근간을 밝히는 근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다. 조선 전 기에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던 樽은 17세기 전기를 지나면서 한 가지로 통합 되는데 그 과정에서 청화백자 쌍용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 다. 제작 주체였던 사대부들의 관심이 제왕의 쌍용준에 있었을 가능성 이 높기 때문이다. 士大夫들은 이 용준에 용 그림 대신 四君子와 花鳥, 山水, 人物, 魚 蟹, 十長生등 새로운 그림들을 敎化와 祈福의 기능을 존중하면서 그려 넣었다. 따라서 용 그림 주변에서 莊嚴을 상징했던 당초, 여의두, 劍形 蓮瓣같은 종속문양대를 생략하거나 단순화하는 것이 신하로서 사대부 가 지켜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조선후기 上品畵樽가운데 검형연판문대를 갖춘 예가 박병래선생 기증품 <白磁靑畵山水文樽>(높 이 38.1) 한 점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러한 제작 분위기를 설명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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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2014.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영국의 의회혁명 기간 중에 분리주의자의 한 갈래로 나온 퀘이커리즘은 사제나 종교적 의식을 거부하고 여성의 발언을 허용했던 급진적 종파였다. 퀘이커들이 신봉한 내면의 빛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겼기에, 교회에서 여성의 발언 역시 내면의 빛에 기초한 예언으로 간주되었다. 이 논문은 퀘이커리즘의 초창기에 쓰여진 여성들의 소책자를 중심으로 여성의 발언권에 대한 옹호를 살펴보고자 한다. 소책자들은 퀘이커리즘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교리의 정당함을 알리는 동시에 여성들의 발언권에 대한 옹호를 펴고 있다. 소책자는 공통적으로 여성의 발언을 옹호하기 위해 자신을 예언자의 위치에 놓으며, 성경의 구절을 들어 교회의 관습으로 내려온 여성에 대한 침묵의 강요를 반박한다. 발언권에서 남녀의 차별을 없애는 데 주력한 나머지 개인으로서의 여성의 고유한 목소리를 부각시키지 못했다는 문제점은 지적할 수 있으나, 퀘이커 여성들의 소책자는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문학에서 여성 작가의 활동이 시작되던 17세기의 상황과 궤를 같이 하여 다루어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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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2013.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Gimlyong-sa temple has played an important role of Buddhist culture in Gyeongsangdo Provinces(嶺南地域) in the late Joseon Dynasty as the 31st head temple(本山) in the Japanese occupation. There are lots of architectural documentary records remained nevertheless, most of cultural heritages are destroyed by fire in 1997. There were 85 articles in five kinds of books which contained historical achievements of Gimlyong-sa temple and hermitages(Daeseongam(大成庵), Hwajangam(華藏庵), Yangjinam(養眞庵), Geum seondae(金仙臺), Dosoram(兜率 庵), Myeongjeogam(明寂庵)). It is possible to understand the five situational peculiarities in the 17∼19th century. At the first, they were compiled in 1914 to around 1930 by Kwon Sangro(權相老) to clarify the historical facts. Second, confirmed the formation process of the foundation narrative. Third, the meaning of Seolseondang(設禪堂), Manseru(萬歲樓) and Hyangnojeon(香爐殿) were recorded, it is possible to look at the concept of people at that time. Fourth, the great masters portraits were enshrined in hermitages, not in Gimlyong-sa temple. It means that a hermitage is not for only self-discipline or living but assembly of religious orders(門派). Fifth, Chimgye(枕溪), the great Buddhist clergy and carpenter of Gimlyong-sa, was nationwide active worker in 19th century because he was also in a charge of investment manager for constru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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