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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몽골의 음주문화를 살피고 원대 새롭게 조합된 금속제 음주기의 기형, 문양, 기법 등을 분석하여 원대 음주기의 특징을 고찰한 것이다. 원을 포함한 몽골제국에서 발견된 음주기도 함께 비교하여 기물 간의 유사점과 차이점, 그리고 이들 지역 간의 교류 양상도 탐 색하였다. 몽골이 세운 원대에 사용된 음주기는 이전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그들이 음용한 주류의 특성과 음주 취향, 그리고 몽골제국의 확장에 따른 다양한 민족ㆍ문물ㆍ문화적 요소가 융합 되면서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원대 신유형의 음주기는 몽골제국에 속한 러시아 남부의 주치 울루스와 중동의 훌레구 울루스에서도 등장하였다. 이는 지역별로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거 리를 초월한 ‘대몽골 울루스’ 라는 하나의 연합체 안에서 음주문화가 공유되었다는 것을 의 미한다. 원대 음주기는 금속기와 도자기로도 두루 제작되어 재질 간의 기형을 공유했을 뿐만 아니라 고려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7,800원
        2.
        2022.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thesis is a study to Haengnang(行廊, a series of buildings) of Sijeon(市廛, licensed markets), which was built along with palaces, Jongmyo(宗廟) and roads in order to establish Hanyang(漢陽) as the capital of Joseon (朝鮮). Sijeon, built on Jongno and Namdaemun-ro, the main roads in Hanyang, created two-row lands on both sides of the road, and formed Pimat-gil as an inner road between the Jeonbang and Doga. The formation of the city proceeded along with the maintenance of the water path, and the situation of the water path parallel to the flow of Sijeon was achieved. The Sijeon building was a spatial structure managed by independent rooms as a result of reflecting the unique operation method of Sijeon. The Sijeon of Hanyang had an impact on the formation of land, architecture, roads, and waterways, and acted as a major factor in determining the urban spatial structure of Hanyang City.
        4,900원
        3.
        2021.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의 목적은 가정 이곡(1298-1351)의 이중적 정체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몽골이 수립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하에서 세계인과 고려인의 이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방황한 이곡의 정신적 여정을 검토하려 는 것이다. 이곡은 한산의 호장 출신이다. 그는 1320년 고려의 과거에 합격했으나, 가문이 한미하여 현달하지 못했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그는 1333년 원(元) 의 과거시험인 제과에 응시해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 결과 고려인 합 격자로서는 처음으로 원 중앙 정부의 관리로 임명되었다. 이곡은 1348년 영구 귀국할 때까지, 15년간 원과 고려를 오가며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이곡은 몽골제국의 개방성과 보편주의를 신뢰했다. 그에 따라 국가를 초월한 평천하의 정치적 이상을 꿈꾸었다. 다른 한편 그는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원 관리로 있으면서도, 고려 정부의 불공정한 인사 정책을 비판했다. 또한 고려 정부를 대변해, 원의 공녀정책의 부당성을 역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 조정에서 고관에 오르지 못한 이곡은 평천하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었다. 몽골과 고려의 정치세계에 어디에도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그는 경계인에 머물렀다. ‘원유자(遠遊子)’ 또는 ‘동서남북인(東西南北人)’이란 이곡 스스로의 자칭은 경계인의 또 다른 이름일 것이다. 어머니와 황제는 그의 삶의 두 축이었다. 그는 황제의 도시 연경에 머물렀지만, 다른 한편 언제나 어머니를 그리워했다. 이곡은 몽골제국의 코스모폴리타니즘이 만들어낸 세계인 이자 동시에 고려인이었다. 그의 좌절은 어떤 의미에서 몽골제국의 보편성의 한계였다. 또한 몽골제국 아래 고려가 경험한 세계화의 외연적 경계였다.
        7,800원
        4.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attempted to clarify the modern transition process of the urban space through the construction and change of the Imperial Palace as a central facility in Seoul. The road renovation of Seoul, which started in 1895, has established a modern, circular transportation system centered on Gyeongun-gung Palace, the Imperial Palace along with the tram line. In this urban structure, the imperial palace as a central facility of the former monarchy, unlike the previous palaces, could not be located at the top of a road with a longitudinal axis, and it expanded its territory around foreign legionaries and placed a new government office around the perimeter. However, the royal palace was moved to Changdeokgung Palace in 1907 with the throne of Sunjong. With the creation of Changdeokgung, which is the periphery of Seoul, as new royal palace, the status of the imperial palace in the city was remarkably weakened, and Gyeongun-gung, located in the center of Seoul, was also reduced to the current Deoksugung area, turning into an urban facility facing a modern street.
        4,900원
        5.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근대 신성로마제국, 특히 그 독일어권 지역 귀족 궁정들의 여성 음악후원, 그 후원을 통한 음악 및 음악문화 전파를 탐구한다. 탐구대상은 엘리자베트 폰 헤센-카셀, 소피 엘리자베트 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소피 샬로테 폰 하노버의 경우이다. 이들은 당대에 통상적으로 여성에게 허용된 범위를 넘어선 인문주의적, 음악적 교육 및 체험을 누렸으며, 이미 본가의 궁정 에서 자신의 연주력, 연주 기획력을 펼쳤다. 훗날에는 시가 궁정의 음악을 (재)구성하고 재건하며 관리해냈다. 본가의 음악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이어가며 그 과업들을 수행해냈다. 그리하여 근대 이탈리아, 프랑스의 음악 양식과 극적 음악장르들, 실내악이 이동하며 정착했다. 독일 바로크 음악의 전파, 근대 독일 오페라의 발전도 구현되었다. 영국 음악이 독일 지역들로 스며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17, 18세기 독일의 음악 중심지들에 음악적, 음악문화적 정체성의 토대가 놓여졌다. 음악교육, 음악애호의 대물림을 통해 실현된 모녀 2대에 의한 2중 전파 역시 흥미롭다. 당대 궁정 음악후원의 주목적이었던 군주의 권세 과시를 벗어난, 음악에 대한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후원 행위도 특징적이다.
        6,700원
        6.
        2020.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general contractor business in South Korea settled in the railway construction during the Daehan Empire, but depending on the construction intention and circumstances of the railroad, relationship among employer-contractor-subcontractor and their roles under the system of the construction process had changed. At the time of laying the Gyeongin and Gyeongbu-rail, the Empire, which had no capital and technology, passed all the power and responsibility of the rail laying to the contractor, who was involved in most of the process. After this, the empire tried to lay Gyeongui-railroad without the help of other countries. Japan prepared for the Russo-Japanese War and decided to construct the railway rapidly, and completed the railway in parallel with direct management work and contract work. From that time on, the general contractor would only do the work. During the construction of railroad in Daehan empire, the general contract business system was established. The ambiguous process was sorted out and divided. At this time, subjects in charge of design and construction has been divided. The internal organization of the project owner and the contractor were organaized and specialized.
        4,300원
        7.
        2018.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대한제국기에는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재판소가 등장하여 사법과 행정이 분리되었다. 이때 범죄자를 수사하고 기소하는 역할을 하던 검사제도가 도입되었다. 처음의 검사는 행정관을 겸하기도 하였으나, 1905년 이후에는 일본에서 공부하여 서양의 법과 제도를 공부한 검사가 점차 많아졌다. 당시 검사는 범죄를 수사하고 기소하며, 사법경 찰관리에 대한 지휘권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의 검사의 오늘날과 다른 점은 체포 구금 된 수용자에 대한 석방권(保放權)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들 수 있으며, 또한 일부 민 사사건(산송) 등에서는 검사가 재판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대한제국기의 검사들의 활약을 살펴보면, 오늘날 바람직한 검찰상을 제고하는 모범이 되는 사람이 몇 명 있다. 안병찬 검사는 사건 처리가 너무 공명정대하여 해당 지역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기도 하였으며,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였을 때 안중군의 변호를 맡으려 하였다. 이후 안병찬은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조국 해방을 위한 삶을 살았다. 헤이그 밀사로 유명한 이준 검사는 상관의 부당한 압력에 굴복하지 않는 기개를 보여 주었다. 대한제국기 검사제도는 공익의 대변자로서의 검사가 처음으로 도입되었다는 의미, 현행법상 검사의 권한과 의무의 대부분이 규정되었다는 의미가 있다. 당시 위정자들이 일제에게 속절없이 나라를 빼앗기고 있을 때, 검사들의 공정한 업무처리와 독립정신은 재조명할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5,500원
        8.
        2018.0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개항 이후 조선은 일본 및 미국, 유럽을 통해 전기, 철도 등의 기반 산업뿐만 아니라 복식, 음식, 서양식 건물 등 실생활과 밀접한 문화체계 들을 받아들였으며, 조선의 전통 건축 및 기물들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 던 새로운 양식의 수입기물들로 대체되었다. 대한제국기 궁궐의 전통 생활가구들은 서양가구들로 대체되었으며, 온돌식 주거문화에 따라 유지되었던 좌식 생활은 입식 생활로 변화하였다. 창덕궁과 덕수궁 석조전의 서양가구들은 18세기 유럽의 로코코 양 식(Rococo Style)을 따른 것에서부터 대한제국기 황실문장인 이화문(李花文)을 넣어 제작한 것 그리고 영국의 메이플사(Messrs Maple & Co) 에서 제작된 가구들이었다. 창덕궁에서는 장식성이 돋보이는 로코코 양식의 가구를 사용했으며, 석조전의 가구들은 신고전주의 건물 외관에 어울리는 소박하고 간결한 퀸앤 양식(Queen Ann style)의 가구가 주를 이루었다. 전통적인 좌식 가구에서 탈피한 서양식 입식 가구의 등장은 개항 이후 궁궐에서 이루어진 연회 문화와 관련이 있었으며, 서양식 연회에 어울리는 도자기와 공예품들도 각국에서 수입되었다. 연회에 사용 되었던 양식기들은 프랑스의 삘리뷔(Pillivuyt), 영국의 존슨 브라더스 (Johnson Brothers), 일본의 노리다케(Noritake) 등에서 제작했던 산업 자기였다. 서양식 만찬에 어울렸던 양식기 외에도 궁궐의 실내 장식을 위해 일본산 도자기와 공예품들이 유행하였다. 대한제국기의 수입기물들은 이후 일제의 간섭과 급변하는 나라 정세로 인하여 우리만의 독자적인 특징을 발현하여 양식적인 발전을 이루지 는 못하였다. 그러나 수입기물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새로운 생활방 식으로의 변화를 이끌었고, 합리성을 추구한 점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대한제국기의 사회⋅문화적인 면모를 다각적으로 조명 하는데 기여하였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6,300원
        9.
        2017.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undamentally examine the vests of the robes “Daeraebok” and “Soraebok” of the Korean Empire from the 1876 Port Opening to the 1910 annexation of Korea to Japan. Among the collections of different robes of the Korean Empire which belong to various universities and institutions, only the vests were surveyed. The shape of the vests in the Korean Empire were single-breasted and doublebreasted. Most V-necklines and vests with a shawl collar look like a tailored collar, where the collar outline was shaped like a notched and picked collar, which is a mix of the step collar and roll collar of the 19th century. The rear center line was not flat, but inclined to a triangle. All vests of the robe Daeraebok were equipped with gold buttons, and those of the robe Soraebok had black satin buttons. The tailoring characteristic is that the front has a different material (dark black wool) from the back (black silk). This characteristic is expected to be an important basic piece of information in the restoration and reproduction of the vest, which was worn during the imperial period, especially to reveal its shape, characteristics and composition. This characteristic can also be used as data of cultural contents based on Korean modern history.
        5,400원
        10.
        2016.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thesis mainly deals with how ‘count of Ryang’ was used in the Daehan Empire. Count of Ryang means how many purlins were used in the building with longitudinal section. As a result, the notion of Ryang in the Daehan Empire does not differ from now one. But the usages of that are different from the Joseon Dynasty, and from the present. In the Daehan Empire, count of Ryang mainly was appeared with another word, count of Kan. In the Joseon Dynasty, they used the count of Ryang combined with Kan. Count of Kan had the meaning of purlin-directional length. By doing that, count of Ryang indicates the size of flank, count of Kan indicates the length of front. But in the Daehan Empire, count of Kan, especially the beam-directional length was considered at first, and then count of Ryang. Separately they used another count of Kan meaning the area of building. By using the combined words, count of Kan and Ryang in the beam direction, they got focused on the frame of wooden structure than before.
        4,000원
        11.
        2016.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re were two books on astronomy published in 1908. One is 『Astronomy (天文學)』 written by Jeong, Yeong-Taek (鄭永澤, 1874 ∼ 1948), an educator. The other is 『Introduction to Astronomy (텬문략히)』 written by William Martyn Baird (裵偉良, 1862 ∼ 1931), an American missionary. It was known that these two books were translated into Korean as astronomical textbooks of the Korean Empire. We investigated the life of translators, the motivation of writing textbook, and the translators’ specialty in astronomy. We also compared the two books in terms of content, orthography of terminology, scale of units, and so forth. We suggest that these books were really utilized as textbooks of astronomy in the modern school in the early 20th century in Korea. We also conclude that in astronomy education these two textbooks bridged the gap between the traditional Chinese astronomy of the middle age and modern astronomy from the West.
        4,600원
        13.
        2016.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Until the late nineteenth century, the history of international law was remarkably Eurocentric. In the early twentieth century, however, a number of Chinese intellectuals examined and demonstrated existence of international law through the Spring and Autumn and Warring States Period in China. They used international law as a symbol of civilisation to express a gesture of resistance toward the Western imperial oppression and cultural invasion. In this way, Chinese intellectuals hoped to maintain, publicise, or even resurrect China’s rich cultural tradition in a global order governed by the West. Their endeavour represented an important variable in the European imperialist expansion process and constituted political interaction with western ideas to create a truly universal discourse. Unfortunately, most of their efforts have almost been forgotten. What the readers could perceive from these faded writings are not only academic assertions, but also the final splendour of an aged empire.
        6,000원
        14.
        2015.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research is regarding Park Ki-Jong’s Western-style court costume and emphasizes the shape and style peculiarities of Western-style court costumes in the Korean Empire from the 1876 Port Opening to the 1910 annexation of Korean to Japan. Park Ki-Jong’s frock coat was made during the period of the established law from 1900 to 1910. 1) The brand was ASADA TAILOR from Kyung-Sung. 2) The shape was long at the front and back, and it featured a picked lapel and double breast with six buttons to fasten and two buttons for decoration on the upper part. 3) The frock coat's materials were black wool fabric and black ridged silk. The lining's material was black plain silk and the sleeve's lining was white with blue striped silk. 4) The front separated the upper and bottom parts. The bottom was composed of a one-piece A-line skirt that continued from the front to back. The top of the back was separated by the princess line and the center-back seam was also separated with a vent. However, the center-back of the waistline was not separated, and it continued to one piece. The sleeve shape was a two-piece sleeve style with a phony vent and two wrapping buttons.
        4,800원
        15.
        2013.10 구독 인증기관·개인회원 무료
        조선왕릉은 조선왕조(1392∼1910년) 500여년을 통하여 동일한 조형원리로 조성된 신의 정원으로 인간과 자연과의 소통, 생산, 사상, 의식이 내재 표현되는 토지의 집합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으며, 일정한 형식으로 공간을 계획하고 수목을 식재하여 세심하게 조영된 정원문화유산이다. 남양 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홍유릉은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자주 독립국을 주장하던 고종의 의지로 만들어진 능으로 명나라 태조의 명효릉의 형식을 빌려 조선왕릉과 형태를 달리하고 있으며, 동시에 조선을 계승한 정통성을 보여주는 사상과 의궤 등은 대한제국 황제릉의 고유형식으로 자리 잡고 있 다. 식생경관으로 볼 때 홍유릉의 능침주변은 일반적인 왕릉 식생경관인 소나무림이 출현하고 있으나 제향공간의 향나 무와 전이공간의 연지, 스트로브잣나무, 독일가문비 등의 등장은 기존왕릉과는 확연히 다른 경관을 제공하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황제릉의 식생구조가 가진 정통성과 근대성 을 파악하여 의의를 고찰하고 기존 조선왕릉과 황제릉인 홍유릉의 식생구조의 차이점 등을 파악하여 합리적인 관리 방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연구대상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고종황 제와 명성황후의 홍릉과 순종황제와 순명효황후, 순정효황 후의 유릉이 있는 홍유릉을 대상으로 하였다. 홍유릉은 사 적 제207호로 공간적 범위는 문화재 보호구역 1,211,273㎡ 중 담장으로 경계되어진 128,342㎡를 대상으로 하였다. 홍유릉의 식생구조 및 현황 파악을 위해 문화재 보호구역 내 담장이 둘러진 경내 주변으로 공간을 구분하여 현존식생 현황을 조사 분석하였다. 현존식생은 1/1,000 축척의 수치 지형도를 이용하여 교목층 수종의 식생상관(Vegetational physiognomy)을 기준으로 조사하였으며 식생이 분포하지 않은 지역은 토지이용유형으로 구분하였다. 또한 자생종 및 외래종 대경목의 현황파악을 위하여 수목의 식재위치와 수 고, 흉고직경을 측정하였으며 공간별로 독특한 경관을 형성 하는 경관우세수종에 대하여는 별도로 측정하고 위치를 파 악하였다. 역사경관림의 후계림 검토를 위하여 소나무 묘목 식재지의 위치와 정아유무를 조사하였으며, 식생구조의 현 상황 및 잠재식재 예측을 위하여 정량적인 방법인 상대우점 치를 이용하여 조사 분석하였으며, 수령 및 생장상태 조사 를 위하여 벌근목의 근원직경을 측정하였다. 홍유릉 위치는 서울 경복궁을 중심으로 20km 범위에 위 치하고 있어 조선왕릉 능원묘제를 따르고 있었다. 백두대간 에서 한북정맥으로 이어지는 대성산을 태조산(太祖山)으로 두고 한북정맥과 연결되어 있는 천마지맥을 통해 천마산을 중조산(中祖山), 백봉산(묘적산)을 근조산(近祖山)으로 하 여, 홍릉은 서쪽에서 뻗은 능선 허리 해발 70m 부근 북서방 향으로, 유릉은 홍릉 능침에서 좌측으로 뻗어나간 능선 300m 전방의 좌측 60m 부근 정서쪽 방향에 능침이 위치하 고 있다. 풍수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홍릉, 유릉은 맥이 동쪽 인 묘(卯)에서 입수하여 매화낙지형(梅花落地)을 이루는 그 상부에 봉분이 을좌신향(乙坐辛向, 동에서 서방향)으로 위치하고 있었다. 홍유릉 식재기록 및 연혁을 살펴보면 1970년에서 1980 년대에는 잣나무 식재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1990년에 조 경식재 기록이 있었고, 2000년대에는 역사경관림을 위한 소나무 식재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1970년대 이전의 자료 는 사료를 통해 검토하였는데 1919년 조영 당시에는 우량 한 소나무림과 제향공간의 향나무 식재지가 나타나고 있으 며, 연륜 등의 검토를 통하여 스트로브잣나무 등 외래수종 도 1920년경에 식재되어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였다. 홍유릉의 식생구조를 분석하기 위하여 침전을 중심으로 봉분과 그 주변을 능침공간, 침전에서 홍살문을 지나 금천 교까지의 공간을 제향공간, 연지주변의 공간을 전이공간, 진입부분의 광장부분을 진입공간으로 구분하였다. 대부분 의 능침공간에는 소나무림이 40.9%로 우점하고 있으나 참 나무류와 낙엽활엽수, 잣나무 식재지 등으로 인해 역사경관 림을 훼손하고 있었으며, 제향공간에는 소나무와 향나무 식 재지가 주를 이루고 있으나 향나무의 수세가 열악하였고, 소나무림은 낙엽활엽수와 조경수 등으로 인해 역사경관림 에 지장을 받고 있었다. 전이공간에는 연지를 중심으로 오 리나무림이 4.5%를 차지하고 있으며 스트로브잣나무와 독 일가문비 등이 우점하고 있었다. 식재종 분포를 보면 스트 로브잣나무, 향나무 등의 대경목이 70주였으며, 자생종 대 경목인 전나무 등의 흉고직경이 최대 67cm, 외래종 대경목 스트로브잣나무 등의 흉고직경이 최대 83cm로 분석되었으 며, 식재된 소나무 묘목은 능침공간에서 정아발아율 44.2%, 전이공간에서 82.8%로 소나무림의 후계림 양성을 위한 묘 목식재 관리방안 마련이 시급하였다. 식물군집구조는 모두 54개의 조사구를 조사하였고 홍유 릉 전체를 4개의 공간으로 구분하여 대표조사구를 선정하 였으며 그에 따른 상대우점치를 분석하였다. 능침공간의 경 우 소나무 우점공간이지만 낙엽활엽수와 참나무류의 세력 이 확대되어 가고 있었고 잣나무 식재지와 느티나무순림 등이 분포하고 있어 관리방안 마련이 필요하였다. 제향공간 은 소나무 우점공간과 낙엽활엽수 우점공간이 함께 나타나 며 역사경관 관리가 요구되었으며, 전이공간은 오리나무림 이 우점한 가운데 스트로브잣나무, 독일가문비, 백송, 주엽 나무 등 흔하지 않은 식재 수목 등이 출현하였다. 진입공간 은 소나무 우점공간이나 조경수에 대한 이식 등이 검토 되 어야 할 것으로 판단되었다. 조선왕릉과 황제릉의 식생구조를 파악하여 비교 분석한 결과 둘 다 능침지역에는 소나무림, 저지대에는 오리나무림 이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황제릉의 근본적인 입지가 조선 왕릉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황제릉의 특징으로는 전이공 간에 나타나는 스트로브잣나무, 독일가문비 등의 대경목 외 래수종과 재실 등의 건물마다 나타나는 대경목 향나무가 분포하고 있었다. 이는 조선왕릉에는 나타나지 않는 식생경 관으로 1920년대 시대적인 특징으로 인해 나타나는 황제릉 의 특성으로 검토 되었으며 전이공간의 외래수종에 대하여 는 우리나라 최초의 임업시험장으로 의의가 있었다 과거 사료를 통한 황제릉의 식생구조를 파악하고 비교분 석을 통해 관리방안을 도출하였다. 조선왕릉의 대부분 식생 관리는 소나무를 중심으로 역사경관림 복원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외래수종은 적극적인 제거를 통해 역사경관림 을 관리하고 있다. 하지만 황제릉은 그 시대가 가진 역사적 배경으로 인해 외래 도입수종이 왕릉에 식재되어 지금은 홍유릉의 전이공간에 중점적인 경관을 제공하고 있어 비록 외래수종이긴 하나 원형식생 경관으로 파악하여 유지관리 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관리의 기본방향은 원식생에서 이 질화된 수목제거 및 이식을 통해 원식생 경관으로 복원관리 하고 홍유릉의 특성에 맞는 소나무림과 외래수종이 공간별 로 잘 어우러지는 경관관리방안을 제시하였다. 홍유릉 내 적극적인 관리지역은 22,373㎡(17.5%)를 차 지하며 그 중 능침공간의 적극적 관리지역은 10,794㎡ (8.4%)로 인근 산림부분과 연계된 부분에 집중되어 있었다. 또한 능침공간 전체 20.0%의 공간이 적극적인 관리지역으 로 나타나고 있어 소나무림의 유지관리를 위한 적극적인 복원이 필요하였다. 제향공간의 적극적 관리지역은 10,073 ㎡(7.9%)로 유릉 뒤편 산림 연접지에 집중되어 있었고 유릉 소나무림의 복원이 시급하였다. 선택적 관리지역은 11,622 ㎡(9.1%)를 차지하며 그 중 능침공간의 선택적 관리지역은 3,836㎡(3.0%)로 제향공간에서 연결되는 산림부분에 위치 하고 있으며 소나무림으로 단계별 복원 필요성을 제안하였 다.
        16.
        2011.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following research of the road network of Jeju-Eupseong during Daehan Empire period has a twofold purpose: to study some characteristics of the road network at that time; and, to restore it to the original form of that period before a newly constructed road, called Shinjakro, has been established. As an attempt to trace the old shape of Jeju-Eupseong, this study analyzed some historical factors based on the first land cadastral map which was made in 1914, including outskirts of Jeju-Eupseong; such as castle itself, castle gate, road, bridge, lots of land, etc. Then this study also tried to restore the old road network of Jeju-Eupseong, through finding the original land-lot shape in the land cadastral map. There was five Shinjakro made between 1914 and 1917. The road network before then was composed of the double east-west axes and the single north-south axis. These axes was connected to some important place of the inside of Jeju-Eupseong; such as castle gates, fountains, Gaek-sa, etc. There were many branch lines between these main axes at about 80-120m intervals. Also there was an outer road along the outer wall of castle, connected with each castle gates. Especially, the north-west axis was the baseline which divided into two large parts, a government office area and non-government area (housing and commercial street for the people). Finally, this paper examines that the road network of Jeju-Eupseong was the true result for the efficient function of the city, especially considering natural geographical conditions and environment of living of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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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2008.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paper analyses the railroad trunk line constructed in the Korea since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he analysis consists of the following problematics. 1) The process of the decision of the railroad route 2) The relationship of the location of Eupchi and the stations By clarifying the above,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larify how the morphology of the city in Korea has been affected by the change in the relationship with Korea and Japan. The Empire of Japan has been reconnoitering the Korea since way before the formal contract for the railroad construction was signed. Therefore, the Empire of Japan had a very good understanding of the actual transportation system when it started the construction of the railroad. The railroad construction was used by the Empire of Japan to empower the control over the Korea. For this reason, the new railroad system was constructed as a different system from the former transportation system and the urban system was also affected. Also the relationship of the western powers and Japan around the turn of the 20th century defined the characteristic of the railway system as a pathway through the Korean peninsular to link Japan to the continent. Moreover, being apprehensive about the friction with the western, Japan located the railway stations to avoid the missionary land properties. This made it clear that the restraint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the western affected the urban special stru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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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2006.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월리엄 E. 그 루버는 이 논문에서 베케트가 그의 극작품들 속의 공간을 통제하기 위해 빛과 어둠을 활용한 방법에 대해서 분명히 밝혀 보려하고 있으며, 나는 이 논문의 핵심이라 고 생각되는 부분을 발췌했다. 그루버는 베케르가 플롯, 등장인물. 언어 또는 지시적인 내용이 없어도 극을 쓸 수 있음을 입증했다고 설명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는 베케트의 희곡들이 점점 더 빛과 공간 에 대한 도표가 되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셰익스피어로부터 입센과 브레히트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극작가들은 빛과 조명효과를 가끔씩 연극적 표현을 위한 장식 정도로 여기고 있으나, 베케트는 빛을 보다 야심차고도 애 매한 대상으로 받아들인다. 베케트가 희곡을 써온 30년 이상의 세월동안, 그의 극본은 그가 조명과 더불어 지각의 수단에 점점 더 열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빛과 어둠, 흰색과 검정 색과 회색에 대한 언급은 그의 모든 작품(저작물) 속에서 너무 지나친게 아닌가 여겨질 정 도로 특징을 이루고 있다. 많은 베케트 작품이 회색 단색 화법으로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베케트는 자주 우리들에게 빛이란 우리가 보는 대상인 동시에 대상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요인임을 일깨워 준다. 다시 말해서, 베케트의 극은 보고 아는 현상학에 대한 일관 된 심사숙고로 변해 가고 있는 것이다. 빛이라는 수단에 대한 베케트의 통제가 극단에 이르 고 있는 텔레비전 극에서는 특히, 빛과 어둠이라는 짝지워진 리듬이 인식론과 구조적 등가 물을 창조해낸다. 베케트의 초기 극들과 후기 극들 사이의 주된 차이 가운데 하나는 후기극 들은 장면의 공간적 묘사에 대한 최소한의 시도마저도 포기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공통 적인 것으로는 초기극의 강렬한 조명효과는 중간 범위의 밝기 쪽으로 접어드는 경향을 보이 고 있어, 가너의 말에 의하면 “장면 속에 살고 있는 대상들을 불완전하게 비춰줄 뿐인, 부 드러운 빛으로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억지로 만든 듯한 무대의 깊이는 베케트 작품에 또 다른 특징을 낳고 있으며, 배우를 등장시키고 배우가 사용할 공간에 시각적 조화를 제공 하려는 베케트의 노력 속에서 조명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빛과 공간이 낯익은 협동작용 이 이루어질 수 없는 곳에서는, 정상적인 지각의 기초는 마련될 수가 없을 것이다. 무대는 변조 과정을 거쳐 점차적으로 회화적인 영역으로 들어가 3차원 세계 속의 2차원의 이미지 로 변한다. 베케트는 텔레비전용 작품을 쓸 때, 텔레비전 본래의 2차원성을 활용하는 면에 특히 관심이 갔던듯하다. 베케트는 텔레비전이 지니고 있는 평면성으로 인한 영상에 특히나 매혹 당했음에 틀림없다. 텔레비전의 영상은 후면에서 빛이 비치고 형광물질로 되어 있으며 텔레비전 영상의 가장 놀라운 특질은 원래부터 깊이감이 없다는 점이다. 텔레비전화면 고유 의 발광성이 베케트로 하여금 드라마를 한층 더 영상에 의지하도록 만들었다. 베케트의 텔 레비전 극에서 가장 놀라운 측면은 공간을 다양한 평면 단위들로 나누는 것인 바, 이로 인 해 그 공간들은 새로운 관계 속에서 반복되고 결합된다. 이런 극에서는 플롯과 공간은 더 이상 근본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베케트는 물 흐르듯이 계속되는 공간 속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며 살고 있는 캐릭터를 묘사하는 대신에 고립된 성자 같은 등장인물을 보여준 다. 베케트가 텔레비전 용으로 쓴 다섯 작품을 보면, 조나단 칼브의 묘사처럼 “놀라우리만 치 정교한 보석이 되고 있다.” 그루버는 베케트가 이 매체(텔레비전)에서 거둔 성공의 많은 부분은 그가 무대(연극)와 영 화와 텔레비전 사이의 형식적인 차이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비비앵 메르시 에는 “베케트의 루가 작품들이 짧아지는 것은 침묵에 대한 어떤 철학적 열망 때문이 아니 라...완벽주의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을 완벽하게 만드는 길은 축소화시키는 길 뿐 이다.”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루버는 베케트의 후기극이 짧아진 또 다른 이유는 드라마라 는 표현수단에 대한 그 자신의 불만이 커갔던 탓이라고 주장했다. 요컨대, 무대를 위한 글 쓰기가 베케트에게 한 때, 서술적인 글쓰기(소설)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그를 해방시켜주었 듯이, 텔레비전 용 글쓰기는 어느 면에서 무대를 위한 글쓰기로부터의 단절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루버는 말한다,, 베케트가 그의 말년에 드라마에서 텔레비전으로 돌아선 것은 한 사람 의 예술가로서 이야기(소설)를 쓸 때와 마찬가지로, 연극이라는 표현수단도 그에게 언제까 지고 만족할 수 있는 형식상의 토대를 마련해주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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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2006.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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