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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2018.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Among the three elements of the story ― character, plot, and setting, the character matters the most. W. H. Hudson argues that technically the success of a work is due to the depiction of characters. In the recreation of Chunxiang, Jin Renshun deconstructed and reshaped the Korean classical work ― “the story of Chunxiang”, changing the figures of the work greatly by adding new characters, remaking the mother of Chunxiang. In doing so, the classical work is rich in new vitality and the air of new era. The writer has ever said: “There are no new things under the sun. Times and regions may be different, but the humanity is always the same.” Neglecting the historical background and feudal patriarchy, in a conceived Utopian Champs, the writer wrote the stories of one or more women from the perspective of humanity. She narrated the Chinese reflections on life in the tongue of the Korean classic, and brought about the exotic culture to Chinese contemporary literature. In “the story of Chunxiang”, as a custodian, Yuemei who was regarded as a minor character, decided the identity of Chunxiang, while she made an contrast to the noble “Chunxiang”. However, in the novel Chunxiang, the snobbish Yuemei was turned into another major character, an elegant and plump Mrs. Xiang, and saved Chunxiang at the critical moment. The best way of appreciating a work is analyzing the characters. The characters and the theme are closely related, and the characters are the core of the whole story, which have great influence on the work. There no telling of the story without characters. “Chunxiang”, the first Korean work accepted by Chinese, did a lot of contribution to the intercommunication between Chinese and South Korean literature. Facing such valuable work, we should spend time on the study of the characters in order to grasp the main ideas that the writer wants to convey. Regretfully, there is only on article focusing on the study of this work. This paper tries to make a contrastive study of the mother of Chunxiang in “Chunxiang” by Jin Renshun and the classic “the story of Chunxiang”, aiming at digging into the modern ideological connotation through character analysis.
        4,600원
        22.
        2017.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중국 서예사에서 왕희지는 이전의 질박한 서풍을 유미한 서풍으로 변화 시켜 첫 번째 ‘변법’을 실행하여 서성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안진경은 두 번째 ‘변법’을 실행하여 성당시기의 장엄하고 혼후한 서풍을 이루어 아성 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러한 안진경의 ‘변법’을 서예사적 배경과 핵심적 인 요소를 필법ㆍ풍격ㆍ결구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필법은 내엽법을 외탁법으로 변화시킨 것으로 횡획ㆍ종획ㆍ적획ㆍ책 획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내엽법은 굳세고 강건하며 상쾌하여 귀족적인 서풍의 면모가 나타난다고 한다면, 안진경의 외탁법은 둥글고 윤택하며 온후한 특징을 나타내었다. 풍격은 왕희지가 이전의 질박한 서풍을 유미한 서풍으로 변화시켜 첫 번째 ‘변법’을 실행하여 서성이라는 칭호를 얻었다면, 안진경은 모든 것이 변하여 풍성함을 숭상하는 성당시기의 장엄하고 혼후한 서풍을 이루어 두 번째 ‘변법’을 실행하여 아성이라는 칭호를 얻었음을 알 수 있었다. 결구는 글자에 따라 자태를 나타내고 기운 것으로 오히려 바름을 삼으 며, 허실ㆍ주차ㆍ읍양ㆍ소밀 등을 통해 서로 다른 변화를 나타내고, 필세 ㆍ절주를 통하여 영활하며 생동함을 나타내었다. 이러한 필법ㆍ풍격ㆍ결 구 등은 모두 안진경이 실행하였던 ‘변법’의 내용을 이루는 핵심적인 요소 들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기 때문에 서예도 변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한 이 치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변해야 하는 것인데, 이는 한국서단의 화두 이자 서예가 각자의 화두일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안진경의 ‘변법’ 은 한국서단에서 타산지석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특히 새로운 창작에 두 려움을 느끼면서 옛것과 자신의 선생 글씨만 답습하거나 법첩의 임모에만 열중하고 있는 이들에게 더욱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이 글은 비록 안진경 의 ‘변법’에 대해 살펴본 것이지만 이를 초석으로 삼아 새로운 창작을 모 색하거나 자아의 성정을 나타낼 수 있는 서예로 발돋움을 할 수 있다면 분 명 의의가 있을 것이다.
        6,100원
        23.
        2017.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금병매의 여주인공인 반금련의 욕망분석과 그녀의 삶이 비극으로 치닫게 된 원인 연구를 주제로 한다. 금병매는 명 중엽 이후의 심학 사상의 영향으로 인해 욕망을 긍정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나온 소설이다. 그에 걸맞게 금병매 속의 모든 인물들은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원초적이고도 다양한 욕망들을 사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 중에서 도 반금련은 여성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삶에 순응하거나 외부적 제약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삶을 개척하고자 하였고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였다. 본고에서는 반금련이라는 인물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는 여러 욕망의 대상, 욕망 추구의 양상 등을 살펴보고 그녀가 맞이하게 되는 비극의 원인 을 개인적·사회적·사상적 배경 속에서 살펴보았다.
        5,100원
        24.
        2017.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t is basis of building phylogeny of Chinese Characters to study phase and dating of Chinese Characters Font. Therefore, the precondition of ontological researching of Chinese Characters on a certain stage is phase and dating the styles. However, it is difficult to do this kind of researching. The Stone Inscription of Wei, Jin, south and North Dynasties is in the transition stage of the Chinese characters from the clerical script to the regular script. It is more difficult to determine the Font of the stone inscription. This paper try to do some practical researches through selecting some typical stone inscription from The Database of Stone Inscription of Wei-Jin and South and North Dynasties《魏晉南北朝石刻數據庫》and making comparison between them. The database was made by Center for The Study and Application of Chinese Characters in ECNU.
        4,500원
        25.
        2017.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청동기시대 진주 대평리유적 중 옥방 1지구를 10개의 권역으로 구분하여 검토하였다. 충적지에 형성된 유적으로 당시의 생활면이 그대로 잔존하는 곳이다. 옥방 1지구 검토대상구역은 하촌리식주거지 단계, 휴암리식주거지 단계, 송국리식주거지 단계로 구분된다. 휴암리식주거지 단계가 대평리유적의 중심시기이며 세부적으로 세 시기로 구분이 가능하다. 대평리유적의 중심시기는 비파형동검를 패용하고 돌을 이용한 대형묘역지석묘가 축조될 정도의 강력한 지도력이 나타나기 직전이지만 남강 일대 최대의 거점취락이다. 이러한 에너지가 이후 송국리식주거지 단계에 대형 묘역지석묘나 대형굴립주 등이 등장 확산되고 비파형동검을 패용하는 유력개인이 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대상유구(帶狀遺構)는 구와 노지가 결합된 세트로 파악하여야 하며 내부에서 공동 취사가 이루어진 의례 행위의 장소로 파악하였다. 검토대상구역에는 약 28~32세트가 분포한다. 무덤은 25기가 조사되었는데 검토대상구역에는 약 2그룹으로 분리되어 분포한다. 야외노지는 약 30~40기가 분포하는데 개별 주거의 야외 취사시설로 파악하였다. 가마는 대상유구가 폐기된 이후에 전용된 예도 있으며 직경 2m내외의 수혈을 굴착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52기가 분포한다. 굴립주는 8기가 분포한다. 동시기에 10동 내외의 주거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5기의 무덤을 축조하고 5세트의 대상유구에서 의례활동을 하였다. 가마는 개별 주거별로 사용하였고 창고로 이용된 굴립주는 3주거당 1기를 이용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송국리문화분포권은 비분포권에 비해 취락에서 개별 가옥의 범위를 벗어난 공동행위가 더 많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6,000원
        28.
        2016.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introduced 「Dongchundang Eumsikbeop」and examined its value as a reference. 「Dongchundang Eumsikbeop」is a recipe book from the Head House of Eunjin Song Clan. As the author is unknown, the book is named after where it was found.「Dongchundang Eumsikbeop」records the recipes for 32 total foods, including 12 types of fermented foods, eight types of liquor, and six types of side dishes, etc. In「Jusiksiui」, written by the same clan 100 years before, fermented foods account for 15% of its contents. On the other hand, this book assigns 34% of its space to fermented foods. It is assumed that the recipe book must have been compiled according to what households ate the most, as hostesses had to cook for their households due to financial difficulties at the time. In「Dongchundang Eumsikbeop」, baking soda and alum were used as leavening agents for confectionery while sugar-based caramelizing was used for making soy sources, implying that modern food techniques were already applied. In short, this book provides a glimpse into the wisdom of hostesses of the Head House who improved recipes to suit changing times while adhering to tradition.
        5,400원
        29.
        2016.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당대(唐代) 신라인(新羅人) 김일성(金日晟)의 묘지(墓志)는 최근 중국 서안(西安) 응탑구(雁塔區) 삼교촌(三爻村)에서 출토되어 2010년에 대 당서시박물관(大唐西市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묘지 내용을 보면, 김 일성은 신라왕의 종형(從兄)으로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귀의하여 벼슬이 종삼품 광록경(光祿卿)에 이르고 대력(大歷) 9년(774)에 장안(長安)에서 생을 마감했는데, 그의 생애가 전설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신라인의 묘지가 극히 드물기 때문에 이 묘지는 당과 신라의 관 계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본고에서는 김일성 묘지와 관련된 제반 문제를 고찰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첫째, 전래문헌과 출토자료의 기록에서 신라왕실 자제 중에 ‘김일○ (金日○)’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당대 제왕이 하사한 이름이 자주 발견되는데, 여러 변방의 수장으로 당나라에 귀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김일성(金日晟)’은 ‘김일제(金日磾)’와 비슷하기 때문에 김일성은 당나라에 귀의한 후 개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묘지에 기록된 김일성의 생존연대를 추정해 보면, 김일성은 효 성왕(孝成王) 혹은 경덕왕(景德王)의 종형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혜공 왕(惠恭王)의 종형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배제할 수 없다. 신라 왕실의 자 제 중에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宿衛) 학습하는 연령을 근거하면 김일성 은 성덕왕(聖德王)이 당나라로 조공을 보내어 숙위로 머물게 되었다. 개원(開元) 8년(730)에 성덕왕의 조카인 김지만(金志滿)이 당나라에 들어 와 숙위가 되어 오랫동안 당나라 조정에 있었는데, 그 행적이 김일성과 여러 방면에서 중복된다. 셋째, 김일성은 당나라에 들어와 은청광록대부(銀青光祿大夫)와 광록 경(光祿卿)을 제수 받았다. 현재 전래문헌의 기록에 당나라에 들어가 숙 위가 된 신라 왕실 자제에게 하사한 벼슬의 현황을 보면, 김일성이 제수 받은 광록시경(光祿寺卿)의 직책밖에 보이지 않는다. 구시(九寺)의 여러 경(卿)은 예악제향(禮樂祭享)과 민족외교(民族外交) 등의 업무를 담당하 였는데, 신라 왕실 자제들이 숙위관례(宿衛觀禮)에서 배운 것과 일치한다. 넷째, 김일성이 당나라에 들어간 후에 벼슬이 광록시경(光祿寺卿)에 이르렀고 장씨(張氏)와 혼인하였다. 오랫동안 장안(長安)에 거주하는 사 이에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생하였는데, 그가 오랫동안 장안에 체류하 고 높은 관직에까지 승진한 것은 이 난과 깊은 관련이 있다. 김일성의 묘 지는 문장이 간략하고 크기도 비교적 작아 그 직책의 등급과 부합되지 않는데, 이는 장씨의 무덤을 이장하고 부부 합장묘지를 다시 썼기 때문이다. 다섯째, 김일성은 장안 영수(永壽)의 필원(畢原)에 장사 지냈는데, 영 수향(永壽鄉)의 처음 설치는 수대(隋代) 대흥현(大興縣)까지 거슬러 올 라갈 수 있다. 당나라에 들어와 영수향은 장안현에 관할되어 범위가 북 쪽으로 장안성 교외까지 이르고 동쪽은 천문가(天門街)를 경계로 하고 남쪽은 위곡(韋曲)까지 이르고 서쪽으로는 강촌(姜村) 일대까지 관할에 들어갔다.
        5,400원
        31.
        2016.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LÜ Zu-Qian, ZHEN De-Xiu, and JIN Lü-Xiang are all renowned Neo-Confucianists during the Song Dynasty. Their viewpoint on literature was built on Confucianism’s Tao and they considered sentences from Liu Jing canon for their sentence structuring. Yet there are differences in compilations they made regarding selection of literatures and writers based on their selection criteria. LÜ Zu-Qian’s Song Wen Jian contained various works and writing styles, adhering to the emperor’s order to select sentences that would do good for politics. However, his compilation is criticized for lack of coherence. His another compilation Gu Wen Guan Jian mainly consists of sentences of archaic prose writers, holding true to its purpose of guide to sentence structuring. Taken together, overarching characteristics of LÜ’s compilations are purpose of guide to sentence building. ZHEN De-Xiu viewed sentence as part of academic pursuit, and argued that literature should identify sages’ findings and teachings. And it should be practically useful for the country, not merely a talk for talking’s sake. Holding true to such belief, ZHEN compiled Wen Zhang Zheng Zong by dividing the compilation into four sections: CiMing (purpose), YiLun (exchange of opinion), XuShi (launch work) and ShiFu (verse and prose) in a bid to teach readers for what the right kind of literature works is. This book, albeit stronger philosophical thought of Neo-Confucianism of the Song Dynasty compared to LÜ’s compilations, is mainly intended as a guide to creation of literature. JIN Lü-Xiang’s Lian Luo Feng Ya, the first compilation of poems written by Neo-Confucianists of the Song Dynasty contains the Lian Luo School’s poems and proses to identify the school’s origin and scholastic mantles. JIN put his painting Lian Luo Feng Ya Tu on the first page to demonstrate his academic tradition as a successor of Zhu Xi, and arranged literature works in the order of this. It has an implication as the first compilation of the Song's Neo-Confucianists’ poems that abstracted poems created by figures of the Lian Luo School and reestablished line of the Lian Luo School, a big move from traditional framework of compilation for traditional literatures.
        5,100원
        33.
        2015.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paper presents the case of one key figure in the history of Chinese language teaching in Japan: Jin Guopu金國璞. In 1897, Jin Guopu was recruited as a Chinese teacher of Tokyo Kotosyogyo Gakko (Tokyo Commercial School) from Beijing. After he came to Japan, he had been teaching Chinese for 6 years. During his stay, Jin Guopu published a series of Chinese textbooks, which had a deep influence on the Chinese education in Japan, especially his advanced level Chinese textbook Tanlun Xinpian. This textbook filled the blank that there were no advanced level Chinese textbooks in Meiji-era. However, about Jin Guopu little was known, this paper tries to add to our knowledge of Jin Guopu and his Chinese textbook Tanlun Xinpian by analyzing newly found materials.
        5,200원
        34.
        2015.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2005년 10월 17일 중국현대문학 최후의 거장 바진이 사망하였다. 중국의 대중매체들은 그의 죽음을 두 고 “중국의 한 시대 문학의 역사가 진정으로 마쳤음을 상징한다”라고 보도하였다. 하지만 ≪수상록≫과 바진의 사망에 따라 촉발된 바진에 대한 연구 열풍은 곧 식어갔고, 중국현대문학 최후의 거장 바진에 대 한 기억들도 세인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져갔다. 세인들의 바진에 대한 기억은 언론매체들의 상투적 평가, 예컨대 ‘기치’, ‘한 시대의 모범’, ‘하나의 금자탑’ 등으로 고착화되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바진 에 대한 찬양 일변도의 행태가 과연 그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내리는 데 도움이 되냐는 것이다. 어떠한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일관되게 칭송만 하는 것은 바진을 오히려 박제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즉, 바진은 하나의 단순한 문화 기호로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진 사후 10여년이 흐른 지금 바진에 대한 진중한 고찰과 비판적 성찰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5,400원
        37.
        2015.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에서는 동양화에서 반복되는 주제인 ‘전통의 계승과 혁신’이란 측면에서 김농의 인물화 작품을 통해 전대 양식의 수용과 자기화 과정과 후대에 끼친 영향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이다. 김농 인물화의 전대 양식의 수용과정을 이공린(李公麟) 을 연상하게 하는 백묘양식과 양해(梁楷)의 감필법(減筆法)과 묵법(墨法), 마화지(馬和之)의 난엽묘(蘭葉描), 곤잔(髡殘)의 도 상(圖象)의 영향으로 세 가지로 분류하여 고찰하고, 자기화 과 정을 거쳐 예체(隸體)를 연상시키는 서법적인 붓질을 이용하여 중국 불화 역사상 가장 독특한 구조를 가진 불상도인 <설색불 상도(設色佛像圖)>의 새로운 창작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특 히 김농의 <달마도>는 청초 개성파 화가인 곤잔의 영향을 받 아 제자 나빙(羅聘)을 거쳐 해상화파 화가인 오창석(吳昌碩)에 게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밝혔다. 인물화는 동서를 막론하고 대단히 오랜 역사적 전통을 지닌 장르이다. 그러하기에 인물화에 관한 조형적 경험과 이론 역시 대단히 폭 넓고 풍부하다. 개괄적으로 정리하자면 서구의 인물 화가 인물의 형태와 색채 등 외형적인 조건에 관심을 두는 것 이라면, 동양의 인물화는 대상이 되는 인물이 지니고 있는 내 적인 내용의 표출에 가치를 두는 것이라 정리할 수 있을 것이 다. 전통적인 동양화론으로서 전신(傳神)은 예술가의 창작개념 에 직접 관여하는 것보다 인물화 작품에 나타나는 정신적인 문 제를 중요시 한다. 그러나 현대미술로서 인물화는 예술가의 창 작주체가 강화되었기 때문에 전통적 전신의 개념과 뜻을 참고 하여 정신표현의 현대적으로 접근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본 논문 금농의 창작 작품 <설색불상도>가 도움이 되길 바란다.
        5,800원
        38.
        2015.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무위진인(無位眞人)은 임제의현(臨濟義玄)을 대표하는 개념 중 하 나이다. 임제는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작용즉성설(作用卽性說)과 무 사선(無事禪)을 계승하고 있는데, 무위진인은 원래‘지금 현재 육체 를 가지고 있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무위진인은 마조도 일의 무사선을 계승한 용어이지만, 불성(佛性)을‘人’이라는 용어로 써 의인화한 것이 임제의 특징이다. 한편 소소영영(昭昭靈靈)과 견문 각지(見聞覺知)는 무사선을 상징하는 용어로서, 소소영영은‘불성의 신령스러운 작용’을 가리키고 견문각지는‘불성이 견문각지(보고 듣 는 등의 작용)를 일으키는 주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소소영 영과 견문각지는 무위진인과 깊은 관계에 있다. 무위진인은 임제의 입적 이후 당대(唐代)와 송대(宋代)에 걸쳐서 의 미가 변화되기도 하고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우선 당대의 현사사비 (玄沙師備)는 작용즉성설을 비판하였는데, 소소영영과 견문각지를 주된 비판대상으로 하였다. 현사는‘견문각지는 대상이 존재할 때만 발생하는 것으로서, 만약 대상이 없다면 견문각지는 일어나지 않는 다. 따라서 견문각지를 일으키는 것은 불성[昭昭靈靈]이 아니라 육식 (六識)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또 송대에 오면 무사선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는데, 특히 원오극근(圓悟克勤)과 대혜종고(大慧宗) 는 무사선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소소영영과 견문각지를 비판하고 있 다. 간화선은 무사선(無事禪)을 부정하고 깨달음의 체험을 강조한 데 서 일어난 것이다. 나아가 원래‘현실에 존재하는 육체를 지닌 자기 자신’을 가리켰던 무위진인이 후대에는‘내면에 존재하는 초월적 본성’으로서 인식되 는 경향이 발생하였다. 특히 송대에는‘공겁이전(空劫以前)의 자기 (自己)’를 묻는 문답이 많았는데, 공겁이전의 자기란‘우주가 생기기 전부터 존재했던 자기’로서‘내면화된 불성’을 말한다. 공겁이전의 자기는 각범혜홍(覺範慧洪)에 의하여 비판되었는데, 천복승고(薦福承 古)가 자기를‘공겁이전의 자기’와‘현재의 자기’로 양분한 것에 대 해서 각범혜홍은 석가모니의 예를 들면서‘자기는 양분(兩分)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8,100원
        40.
        2014.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t is identified that an initial person who built of ‘Seoul Gyedong Modernized Hanok(former Min Hyeong-gi house)’ used as ‘Bukchon Culture Center’ in present, was not Min Hyeong-gi, but his wife, Yu Jin-gyeong, and she built it when 8 years went on after his death(1879~1973), and the construction year was at the gate of Chuseok in 1921. Yu Jin-gyeong was Head Family’s Eldest Daughter-in-law in family of Yeo Heung-min who was an influential person at the late Joseon Dynasty and was widow who had only son for 3 generations. And she built this house and moved to gain daughter and live futher grandchilds together in law in new nest. It is arranged that an annex surrounds with main building as the central figure. And this house emulates Yeonkeong-dang in backyard of the Changdeok Palace for 'preservation of main building' and Chim-bang-ga-toe applied on a bedroom in a palace is applied around nobleman family's the main room. It is rare case and expresses that a palace factor is borrowed. Yu Jin-gyeong's house is that a tradition Hanok is adjusted closely in city and central and basing mode as 'protective bedding' and building concept as 'a noble and protective architecture' is realized. So it has a character that development of Hangrang architecture is appeared and Head Family’s Eldest Daughter-in-law widow of modern upper class had a special benefit. As well as, a meaning that it is experimental house based on tradition and is build of Hanok with housekeeping as the central figure for appear a form which has minimal Hangrang for housekeeping in yangban family of modern city, can be found.
        4,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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