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고의 주제는 통일신라시대 성곽에서 출토되는 기와의 해석 방법에 대한 고찰이다. 기와는 타 유물에 비해 출토량이 대량인 점, 용도가 다양한 점, 사용 기간이 장기간인 점, 여러 단계의 기와가 동시에 폐기되는 점, 재사용과 재활용의 문제 등 고고자료로서의 기와 가 가진 특수성으로 인해 통시적·공시적 해석에 난점이 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출 토 맥락이 명확한 일부 유적의 출토 사례와 기존의 기와 분석 연구 성과 등을 토대로 통일신 라시대 성곽 출토 기와의 해석 방법을 고찰해 보았다. 동래고읍성지의 기와 출토 사례를 통해 토성 초축의 상한 연대는 8세기대, 1차 수축은 9 세기대로 추정되고, 지구별로 축조 시점이 상이할 가능성을 제기할 수 있었으며, 수축 과정 에서의 기와 재활용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기와의 재활용에 대한 해석은 성곽이나 건물지의 여러 출토 사례로 볼 때 유적의 폐기에 이어진 자연 탈락으로 인한 퇴적이나 산포와 구별하기 쉽지 않다는 문제가 있으며, 이에 따 라 ① 시기의 한정성, ② 타 유물 혼입 여부, ③ 기와의 잔존상태, ④ 해당 층위 외의 퇴적층 에 포함된 기와 및 폐기 시점의 기와 노출상태와의 비교 등을 고려해 출토 맥락과 용도(자연 폐기 또는 재활용)를 해석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성곽에서의 평기와 사용을 위계의 반영으로 해석하는 문제는 기와의 사용 유무에 따른 상대성, 장식기와 사용 여부에 따른 상대성이 있으므로 인접한 동 시기 유적과의 상대적인 비교 분석이 필요하며, 사례로 부산 배산성과 낙민동유적의 출토 기와 양상을 비교하여 거 칠산군의 치소로서 가진 배산성의 성격이 사회·경제·문화의 중심이라기보다는 행정·군 사적인 거점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제시하였다. 출토 기와의 특징에 대한 해석 방법은 기존의 평기와 분석법에 더해 삼국~통일신라시대 의 평기와 제작법 전개를 4단계로 제시하였고, 특히 통시적인 해석에 가장 중요한 속성인 타날판 크기의 오독 사례로 아차산성과 배산성을 들고, 타날판 복원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 시하였다.
그동안 통일신라시기의 산성은 성벽이나 문지, 집수시설 등을 중심으로 발굴조사 되었 다. 그 결과 성벽의 축조기법이나 조성 시기, 구조 등에 대해선 비교적 많은 자료가 축적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산성의 주체인 인간의 숙식 등과 관련된 건물지의 조사는 상대적으로 빈약한 편이다. 통일신라시기의 산성 내 건물지는 대체로 기단석을 갖추고 있으나 동 시기 사찰에서 볼 수 있는 가구식기단은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그리고 이 시기의 주요 난방 시설인 쪽구들 의 경우도 초석 건물지에서 발견된 사례가 거의 없다. 단적으로 전면 발굴조사가 진행된 광 양 마로산성의 경우 성주나 하급 관리, 병사들이 머물 수 있는 난방시설이 턱 없이 부족함을 살필 수 있다. 아울러 전술한 기단석의 위계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당시 광양 마로산성은 치소성이나 거점성으로 인식될 정도로 중요한 산성이었다. 그러나 성주나 관리, 병사들이 상주하기 위한 온돌 건물지와 성주가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 물지의 기단석 등은 쉽게 구별할 수 없다. 이는 결과적으로 산성 내 건물지가 일상생활을 영 위하기 어려운 구조였음을 알게 한다. 그런 점에서 향후 산성 외부의 건물지 조사에 좀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통일신라시대의 석성이란 무엇인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석성과는 어떤 다른 점이 있는 것인가. 결국 기준이 되는 것은 석축으로 쌓은 성벽과 출토유물의 조합일 것이다. 유물이 어 떤 층위와 맥락속에서 출토되었는지도 중요한 점이다. 이 논문은 통일신라시대 서울·경기 지역에 분포한 12개 석성을 분석 유적으로 삼았고, 외벽, 기단보축, 보축성벽, 치성, 출토유 물과 층위를 종합적으로 파악해 통일신라시대 석성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보축성벽이며, 서울·경기지역 통일신라시대 석성에서 새 롭게 나타나는 특징 중에 하나라고 알려져 있다. 보축성벽의 출현은 아마도 삼국이 통일된 이후 방어적인 기능과 성곽의 위계를 나타낼 수 있는 기재가 필요했을 것이다. 이는 서울· 경기지역의 중심 지역인 한산주(한주)의 주성인 이성산성에서 가장 치석이 잘 되고, 형태적 으로도 견고하고 미적으로 뛰어난 보축성벽이 이를 말해 주는 것 같다. 보축성벽과 함께 치성 변화가 있다. 계단형 보축성벽의 축조방식을 치성의 하단부(기단) 에 적용하고 상단부터는 수직기둥홈에 나무를 세워 상단부 외벽을 수직으로 쌓은 치성이 등 장한다. 이러한 치성은 아차산성 3차 치성에서 등장하고 이후 계양산성 치성(고려시대)으로 이어진다. 이번 분석 대상에서 빠진 서울·경기지역의 석성과 더 나아가 통일신라 한산주(한주)의 영역까지 차후 분석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석성 특징과 변화의 원인을 밝혀보고자 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구슬 문양 디자인의 상징성과 의미 및 신라문화와의 연관성, 유리구슬 제조의 제반 여건을 조사 하여 예술성과 기술성이 뛰어난 신라 인면 상감 유리구슬의 신라 자체 제작설을 검증하는 것이다. 연구방법으로는 디자인 분석 이외에 고문헌과 신화, 유리 유물, 유리 및 금속의 생산기술, 실크로드 교차로의 특성 등을 조사하였으 며 홍산문화 유물, 다른 상감 유리구슬의 사례들을 수집하였다. 마한, 부여, 신라인은 구슬을 보배로 삼고 장신구에 애용하였는데, 구슬 속의 인면상 상투와 금관장식, 새와 꽃나무의 모든 디자인 요소가 김알지, 김수로, 박혁거세, 주 몽 등 위인들의 난생설화, 북방의 새 및 신수 숭상 등과 밀접하였고, 디자인 요소와 배치가 신라의 다른 유물에서도 동일하게 표현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구슬과 인면상의 기원은 홍산문화였으며 하가점하층문화의 고조선 북표에서 는 구슬용 석범이 발견되었다. 또 경주 식리총의 상감 유리구슬과 일본 토간모리 고분의 인면 상감 유리구슬의 출토 는 신라 자체 제작설을 확증시켜주는 것이다. 백제인이 5세기 일본에 유리구슬 제작소를 둔 사실은 신라인이 인도네 시아 자바에도 제작소를 두었음을 의미한다. 신라와 밀접한 관계였던 인도네시아 자바는 신라의 해상실크로드 교차 로, 원석 및 노동력 제공지이고 유리구슬의 소비 지역이나 기원지는 아니었다. 이에 구슬에 대한 신화와 전통을 보유 하고 머리에 상투와 금관을 착용하였으며, 금속 및 상감 기술 등 난이도 높은 기술을 보유했던 신라가 자체 제작한 것이 틀림없다.
이천 설봉산성은 백제 한성기 석축산성의 존재에 대한 논쟁의 중심에 있는 산성 중 하나 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논의에 앞서 산성의 축조 주체 및 구조를 밝히기 위한 기본적인 근 거자료가 되는 설봉산성의 성벽 및 토층 양상에 대해 재검토하였다. 분석 결과 설봉산성은 초축 이후 최소한 4단계에 걸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수·개축되며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확인되는 단계에서는 성벽과 기단보축, 암거식 수구 가 축조되는데, 석축산성의 초축은 신라가 주체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 단계에서는 서문지의 축조 및 성벽의 수·개축이 이루어지며 성 내부 공간의 연약 한 지반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엽층 및 목재를 이용하는 등 대대적으로 산성 안팎이 수·개축된다. 이후 서문지 및 성벽이 한차례 개축되며, 통일신라 시기의 유구·유물은 물론 고려·조 선시대와 관련된 건물지 및 유물 역시 확인되는 등 설봉산성은 오랜 시간 동안 지리적·군 사적·행정적 중요성을 잃지 않고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석축산성과의 관련성은 확인할 수 없었으나 백제 유구 및 유물이 확인되는 것 역시 분명 한 사실이다. 이는 최소한 산성이 축조되기 이전 해당 공간을 백제가 점유하고 있었음을 시 사하는 것이며, 고고학적 증명을 위해서는 차후 성 내부 공간 및 치성·북문지 등의 조사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신라 금관(특히 경주 출토 5점)은 신라 최고위층이 사용한 최고 품격의 모자이다. 이들은 원형 관테의 위로 세운 장식인 입식(立飾)과 아래로 드리운 장식인 수식(垂飾)이 중심이 되는 형태이고 그 표면에는 다수의 곡옥(曲玉)과 영락(瓔珞)을 매달 고 점선문・점열문・원문・삼각문・덩굴문 등의 문양들을 점으로 표현하였다. 이 중에서 입식은 나무 모양을 도안한 세 산자 모 양<山字形. 또는 출자 모양出字形>과 두 사슴뿔 모양이다. , 필자는 이 논문에서 신라 금관의 형태(나무・사슴뿔・연꽃・곡 옥・영락・수식)과 문양(삼각문・덩굴문・원문) 모두가 기(氣・기운・ 기력)와 생장(生長) 표현이라는 주장을 거듭 주장, 강조하였다. 금관의 기와 생장 표현은 생동감・생명력・힘・성장・발전 나아가 신이와 화생(化生)까지도 아우른다. 신라 금관의 기와 생장 표현을 분석하면 첫째 입식(나무와 사슴뿔) 등의 형태를 기와 생장의 대표 주자인 연꽃 모양으로 변형한 것, 둘째 금관 표면에 우리 겨레 역사문화강역 안 신석 기・청동기시대부터 기와 생장을 대표하는 삼각문・덩굴문・원문 을 표현한 것 셋째 기와 생장 표현 모두를 연꽃으로 인식하고 상호 동격・교호(交互)・호환 관계로 표현한 점이다. 신라 금관의 대표적인 모습은 ‘산(山’)자 모양 입식이다. 이는 위로 자라는 나무의 도안에 기와 생장 표현 등을 결합한 도안 인데 이를 분석하면 첫째 기와 생장이 중앙에서 외곽으로 전개 되는 모습 중 네 방향 표현(줄기와 가지이기에 네 방향이 됨), 둘째 중앙에서 외곽으로 확산되면서 동시에 아래보다 위쪽으로 향하는 생장하는 표현(금관의 좌우 가지가 갑자기 90도(度) 꺾 여 위로 솟구친 이유) 셋째 기와 생장 표현의 초기 모습인 세 갈래 표현(중앙과 그 좌측과 우측을 함께 보여 주는 첫 모양. 좌우 균형과 안정, 간결・함축을 담고, 삼재三才사상과도 관련 된다. 금관의 형태와 문양 특히 기(기운)와 생장을 동반한 표현들 은 금관 외에도 당시 우리 겨레의 역사문화유산에 보편적으로 존재하였다. 이웃한 원(原) 중국 역사문화강역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우리 겨레의 세계적・독보적・독창적 역사문화유산인 신 라 금관・금동관의 형태와 문양 특히 기(기운)와 생장을 동반한 표현은 고대 일본에도 전파되고 영향을 끼쳤다. 주제어: 금관, 기(氣・기운氣運), 생장(生長), 연꽃, 입식(立飾), 수식(垂飾)
This study tries to shed light on character and architectural features of the 2nd construction of Bunhwangsa temple in the mid-8th century. The site of Bunhwangsa Temple is divided into upper and lower areas based on retaining walls running from northwest to southeast, and the main area of the temple centered on Geumdang(the main hall) is located in the upper area. Space composition of the lower area including Wonji(a garden pond) and Gangdang(a lecture hall), is noteworthy in that Bunhwangsa Temple was constructed in a deviating way from rigorous constructional disciplines and used their space efficiently. The Geumdang in the 2nd construction was the largest worship hall with 7×6 bays. The hall was designed to divide its space into two ; the core space was surrounded by outer space. Each gap between columns in the hall was narrowed from center to outer. The main construction of the Geumdang was built as a stable structure with lead-to corridors. This was a much-advanced style than Geumdang at Hwangnyongsa Temple. The Gangdang is presumed to be a large building site as a typical Gangdang style in the Silla era. It was built in the late 9th century and was located in the northern part of the retaining walls. The composition of the middle gate and southern corridors were in double and long corridor style and they were located in front of the 2nd construction. This style coincided in the form of the architectural style of the Hwangnongsa Temple. The 2nd construction of the Bunhwangsa Temple was smaller than the Hwangnongsa Temple. However, it was a prestigious architecture.
The Sacheonwangsa temple was established in 670 under the leadership of Myeongnyang in response to the invasion of the Tang Dynasty. At this time, Geumdang hall stylobate was constructed, which was about 30% smaller than the reconstruction. Due to the wartime situation, the construction of wooden buildings did not seem to have been achieved. The Sacheonwangsa temple was reconstructed in 679 as a symbol of the Hoguk(護國) temple. The size of the Geumdang Hall stylobate was planned as an important module for the entire temple. The stylobate fasad was designed at intervals of Tangju(撑柱), just like the JuKhan(柱間) plan of wooden architecture. There is a possibility that eight Devas may have been decorated in Front fasad. When the Sacheonwangsa Temple was rebuilt, the Geumdang Hall was added by the ChayangKhan(遮陽間) and an Ikrang(翼廊) was installed next to it. These changes affect the material and form of the stylobate. It was changed to a durable stone post-lintel style stylobate and the intervals of Tangju(撑柱) in Front fasad was also adjusted. As the highest-quality stylobate in East Asia at the time, the Geumdang Hall stylobate is considered to have taken Silla's architectural skills to the next level.
Bang walls surround the four sides of Band in ancient capital cities of East Asia where the Bang system was in operation. There are ongoing research efforts for the structure of a capital city and Bang system around the capital of Silla, but there is a huge shortage of research on Bang walls. This study thus set out to examine Bang walls in the capital of Silla around the Hwangnyongsa Temple and its surroundings. The findings show that the Bang walls in the capital of Silla were built with a mix of earth and stone and with tiled roofs on top. The sizes of Bang walls were distinguished from the walls of individual structure groups inside Bang and closely related to the Bang size and the width of adjacent roads.
본 연구의 목적은 샤머니즘을 통해서 종교계급이 통치했던 신라 사람들의 정체성이 현세뿐만 아니라, 죽음의 세계에서도 이어지고 있음을 분석해보는 것이 다. 기본적으로 샤머니즘은 우주적 질서체계를 지상에서 완벽하게 재현시키고 자 하는 통치자의 정치적 의지가 구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가 언급했던 재세이화 사상에서도 알 수 있다. 샤머니즘의 핵심 인 제천의식은 하늘에 제사를 수행하던 행사였고, 이러한 샤머니즘은 풍류도의 중심사상을 이루면서 신라의 화랑도로 이어지고 있다. 원성왕의 능이 물 위에 관을 걸어서 축조했다는 것은 관이 저승으로 향하는 배를 상징하는 것이고, 물 은 은하수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샤머니즘 세계에서 동쪽은 태양 이 뜨는 곳으로 생명 탄생의 의미로 상징화된다면 서쪽은 태양이 지는 곳으로 저승세계를 상징화한다. 이것은 무인석상이 서쪽에 살고 있는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과 연결 지을 수 있다.
이 글은 강원도 영동지역의 신라~통일신라시대의 산성과 그 역사적 의미를 찾아본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강원도 영동지역의 수많은 산성들 가운데 문헌 자료들에 대한 비판적 논증과 함께 고고자료들을 분석하여 신라~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8곳의 산성을 추출하였다. 그 결과 여러 가지 고고학적 특징을 찾아낼 수 있었고, 역사적인 실상에도 접근 할 수 있었다. 우선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도 신라와 통일신라시대의 행정단위인 주-군-현마다 산성들이 있었고, 산성의 규모도 행정 구역 단위에 따라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주(州) 단위는 1,000m 이상이며, 현(縣) 단위는 200~600m 정도로 구분된다. 또한 일찍이 설치된 실직주와 하슬라주의 산성(州城)들은 테뫼식 가운데 산복식(山腹式)의 토성이고, 이후에 만들어지는 현 단위의 산성(縣城)들은 테뫼식 가운데 산정식(山頂式)의 토성이 많았다. 그리고 신라의 진흥왕 북진기 이 전에 축조한 산성의 성벽은 토루에 돌을 피복하는 공통점도 보였다. 특히 강릉 경포호 강문동토성과 삼척 오화리산성은 바닷가의 곶[산]에 석호나 강을 끼고 입지 하고 있는데, 이들 산성이 신라의 동해안 연안항해와 관련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그 이후의 시기에는 이들 산성이 다소 내륙으로 들어가 산의 정상부에 입지 하는 경향성을 보여주는데, 특히 진흥왕 북진기부터 통일전쟁기에는 그 입지의 변화가 잘 나타난다. 나아가 강릉 경포호 강문동토성과 삼척 오화리산성의 존재는『삼국사기』에서 실직(城)과 하슬라(城主) 등과 함께 나오는 사료들이 역사적 사실임을 입증해준다. 아울러 삼척 오화리산성은 북해(北海)의 제장(祭場)인 비례산(非禮山)으로 추정된다. 이 글은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서 비교적 확실한 신라~통일신라시대의 산성들을 최초로 다루었다는 의의가 있는데, 앞으로 강원도 영동지역의 신라사와 신라고 고학 연구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After the study of Fujishima Gaijiro(1930), although it is common to see that the Tang-ruler(唐尺) was used in the construction of the Silla Sacheonwangsa temple(679), the basis of the discrimination of the construction measure and the detection of the unit length is not actually sufficient since conventional research was done before the excavation. The study was based on archaeological results, which was secured through the excavation research(2006∼2012) of the temple site in recent years, to determine the construction measure and try to detect the unit length. In the analysis of the measured value of the ruins, the numerical data were obtained through measurements on drawings of the ruins, the tendency of conversion measure’s number appearing by dividing each unit length of the Goguryeo-ruler(高句麗尺) and Tang-ruler within a certain range was compared from the Wansu-je(完數制) viewpoint. The research results are summarized as follows : 1)As a result of the analysis of the distance between the site’s center, the case that conversion Cheok’s(尺) number is converged to the unit of Jang(丈) within the range of unit length expresses three times more in Tang-ruler, and it is confirmed that a simple multiple relationship based on the unit of Jang is established between conversion Cheok’s number. 2)As a result of analysis of Bokan(梁間) of the each Corridor site and the measured value of the stonework ruins, it could be confirmed that appears overwhelmingly in the Tang-ruler when conversion Cheok’s number becomes an integer within the range of unit length. The results of the analysis are judged to be a clear basis for viewing the Tang-ruler as the construction measure of the Sacheonwangsa temple. 3)The estimated unit lengths of the construction measure that were obtained from the analysis of the distance between the site’scenter, the foundation stone center distance of the building site and the measured value of the stonework ruins are slightly different. There is a limit to the verification of the construction error about this, however it is difficult to specify, it is mentioned 294.37㎜ which is obtained from the analysis of the distance between the site’s center.
This study covered the features and development process of the stylobate of the Sumijwa style, which emerged in Silla around the late 7th century. In the Period of North and South Dynasties, Sumijwa was used as the seat of the Buddha. It was used as a stylobate of tower in the Sui Dynasty and as a stylobate of central buildings in the Tang Dynasty, raising the status of buildings. In the late 7th century, Silla faithfully embodied Buddhist view of the world under its architecture by accepting the latest stylobate of the Sumijwa style. The pagoda of Hwangnyongsa Temple is believed to be the beginning of the stylobate of the Sumijwa style, in Silla. Gradually, in the central buildings within the capital, the stylobate of the Sumijwa style became common. Starting with Bulguksa Temple's Daeungjeon Hall, the materials of stylobate and staircaes will be integrated from the late 8th century. Silla's stylobate of the Sumijwa style can be evaluated as a step-by-step leap in religious, political, technical and aesthetic's terms.
The subjects of this study were limited to Silla buddhist temple remains in the 6~8th century, where the excavation survey report was published and the details of the remains of the corridor are revealed. Since the corridor completes the structure of temple and is involved in formation of the space, the building plan for corridors is thought to have an intention linked to the entire temple. Thus, more closer study is required for this construction plan to identify the role of corridors. The corridor is a building that has a low architectural hierarchy and completes the layout and composition of the temple. In the unit planning of the corridor, unit were designed to be of a certain size in the temple layout. Then, the overall scale was made by adding the fixed size of unit. The combination of corridors are the combined points of paths and were used as visual points. The structure of the corridor was constructed to be adjusted according to the size of the main compartment of the building to which it was connected and inserted under the roof of the building. The adjustment of the unit changed in the range of 0.5 to 2 of Silla’s system of measurement. The usage of embedded pillar in the corridor presents a new perspective on Silla architecture.
동궁과 월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넓은 수면의 원지를 중심으로 한 궁원으로 추정된다. 원지는 입수부, 연못, 출수 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입수부는 독자적인 특징을 보이는 수경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본 연구는 월지 입수부의 수경에 대한 디자인수법을 밝힘으로써 통일신라시대의 궁원을 이해하고 원지조영에 대한 작법의 단초를 제공하고자 한다. 연구방법으로 동궁과 월지에 대한 발굴조사 성과를 바탕으로 발굴조사의 내용과 복원된 수경시설에 대한 조사와 분석 을 통하여 입수부에 대한 수경 디자인수법을 도출한다. 원지의 입수부는 직선형수로, 석조, 소지, 계류형수로, 폭포로 구성되어 다채로운 수경을 연출하고 있는데 각각의 디 자인 수법은 다음과 같다. 기하학적인 인공형태의 직선형수로는 수로의 초입부에서 직각으로 수류방향을 바꾸는 굴절점 을 세 차례 반복하는 선형을 보이는데 이는 건축물의 축선을 따른 것으로 건축물의 세력권에 영향을 받은 형태의 디자인 수법으로 볼 수 있다. 상하로 연결된 2단 석조는 물을 담은 큰 그릇으로써의 이용을 고려한 것으로 상하의 단차에 의한 물의 약동은 시각 및 청각적인 효과를 위한 디자인수법이다. 또한 석조 주위의 판석과 외연벽석으로 형성된 한정된 공간 은 가장 가까이에서 물을 접할 수 있는 친수공간으로 디자인된 수경공간이다. 완만한 곡선의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의 소지는 호안의 축조와 바닥처리 및 경석의 배치에 있어서 독자적인 디자인 수법을 보이며, 기능적으로는 폭포수의 일정 한 수량공급을 위한 저수지의 역할을 한다.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계류형 수로는 직선형 수로와 대비되는 디자 인으로 호안을 축조하는 방식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한 수법을 보여준다. 입수부의 마지막 단계로서 극단적 인 시각적 변화를 보여주는 폭포는 수로와 원지의 단차를 해결하는 디자인수법으로 사용되었으며, 위치설정에 있어서 완전노출을 피하여 흥미를 유발시키는 고차원의 수법이 적용되었다. 다섯 단계로 구성된 다채로운 입수부의 수경시설은 근접한 건축물의 영향을 받는 직선형의 인공적 디자인의 수경수법 에서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그 영향에서 벗어나 자연스러움을 보여주는 디자인의 발전단계를 보여주는 수경시설의 디자 인수법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