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이성선(1941~2001)의 시적 세계를 우주적 교감과 불교적 상상력의 관점에서 살펴보는 데 있다. 자연은 인간의 삶과 분리될 수 없 는 유기체다. 이성선의 시는 자연과 인간관계에 대한 통찰이었다. 자연계 의 모든 존재에 귀를 기울이고 우주적 교감을 시화한 그의 시는 불교적 색채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집 산시(山詩)를 비롯한 다른 여러 시집들 에서도 보이듯이 ‘산의 시학’의 원천이 되었다. 이는 곧 해탈을 지향하는 불교적 사유와 맞닿아 있다. 이 글에서는 그의 시적 세계를 해탈 지향, 우주적 교감과 화응(和應), 불교적 사유의 상상력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이성선은 잃어버린 자아를 찾기 위해 고통스런 창작활동에 전념한다. 철저한 자아 파괴를 통해 해탈을 꿈꾸고, 현실적 구속과 미망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향유하려는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의식의 구체적 진 술은 「출가」와 같은 비움과 해탈에서 무소유의 신성한 세계관을 구축하 고 있다. 무엇보다 이성선에게 자연은 구도(求道)와 합일의 대상이었다. 그가 만 난 사물들은 우주와 내밀하게 연결되어 교감과 화응하고 있다. 따라서 형 이상학적인 것과 천체 이미지가 우주적 상상력으로 매개되고. 초월적 공 간의 한계를 뛰어 넘는 상상력으로 일체의 집착까지 버리고 우주와 교감 하게 된다. 나아가 이성선은 자연을 화엄적 상상력으로 인식하였다. 설악을 화엄 의 바다로 인식하며, 진정한 구도자의 모습을 찾고, 인간은 우주의 일부 라는 불교적 이미지와 초현실의 선적인 경지로 인간과 자연의 영속적인 합일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진속불이(眞俗不二)’ 화엄적 세 계관을 배태시키면서 불교적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산시(山詩)는 소재주의에서 벗어나 화엄적 내면세계로 우주적 교감과 불교적 상상력을 화응하는 경향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
본 연구는 아일랜드 문예부흥을 이끈 W.B. 예이츠와 올리비아 셰익스피어의 관계 고찰을 통해, 그것이 서로에게 끼친 영향을 규명하고자 한다. 두 사람은 1894년 처음 친구로 사귄 이래로 서로의 작품을 최초로 읽어주는 독자가 된 후 40여 년간 친구에서 연인, 다시 친구로서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먼저 예이츠 시에 언급된 올리비아 셰익스피어를 통해서 그들의 관계를 추적할 것이다. 아울러 작가로서의 교유는 예이츠가 추구했던 신비학이 올리비아 셰익스피어의 아름다움이 머문 순간에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본 논문은 두 사람 간의 절친한 친구, 연인, 작가로서의 그들의 관계를 상호 중첩된 관계의 시학이라 명명한다.
시몽동의 기술철학의 “개체화”(individualization)의 기초모델은 “결정화”(crystalization)라는 물리화학적 현상에서 시작된다. 결정화 과정은 결정종(결정씨앗: germe/seed)과 모액(母液: mother liquid)이라는 주위환경(milieu) 사이에서 일어난다. 결정씨앗은 주위환경(milieu) 안에서 자신의 현실적 구조를 형성하며 확장해나간다. 한편 결정씨앗이 자라기 이전에는 잠재력(potential)으로만 남아 있던 주위환경은 결정씨앗이 자라기 시작하면서부터 발동하여, 그 잠재력이 에너지로 전환되고 역동성으로 가득 찬 주위환경이 되어 씨앗의 숙성과 구조화를 가능하게 하여 씨앗의 잠재성을 현실화한다. 시몽동의 결정화와 변환의 시각에서 세이머스 히니(Seamus Heaney)의 전 시집과 시론의 핵심적인 내용을 파악한 조감도를 그려보는 작업은 성장과정에 있는 젊은 시인의 “개체이전의 존재”와 “앞선 미래”를 내다보는 비전을 선험적(apriori)으로 제시해준다. 시몽동의 변환과정은 이질적인 힘을 임시적으로 집결하여 통합을 생성할 뿐 아니라, 존재나 실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을 구조화하는 것을 설명하여, 개체이전의 존재의 과거와 현재로부터 미지의 미래로 창의적인 도약을 생성한다. 또한 주위환경 내에서 그리고 주위환경으로서 존재를 에워싸고 또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영역을 생성한다. 시몽동의 변환의 시학의 문맥에서 보면 히니의 시론과 시를 새로이 자리매김할 수 있다.
예술적 상황은 그것이 가져오는 이해가능성에 그 힘을 의존하며, 그런 이해가능성은 그 자체가 변형의 도구인 ‘정확하고’ 구체적인 양식을 통해 설명된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마힘바타(7세기 인도 이론가)와 아누마나와 관련된 그의 이론화 (추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첫째, 자연 속에서 계속되는 모순되지 않 는 보편적 관계(vyapti)에 의해 객체와 주체가 함께 결합될 때, 이 둘은 변모한다. 둘 째, 마힘바타는 연역법칙에 의해 필요에 따라 일상적인 것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 발전 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만 예술성이 보편화된다고 주장한다. 일상적인 것에서 의미 있는 것으로의 예술적 경험의 이 두 가지 탁월하게 빛나는 전제를 바탕으로 예술성의 동시성과 전시를 낳는 것이 가능해진다. 마힘바타의 추론 이론에서 발전된 개념적 구 조를 바탕으로 W. B. 예이츠와 T. S. 엘리엇의 시를 읽을 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 다. 예이츠의 시에서 육체와 영혼은 각각 작은 것과 큰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는 두 용어로 나타나며, 둘 다 퇴폐와 해방에 의해 결합되어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병존 (vyapti)을 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엘리엇의 시에서 고통, 불임, 죽음은 육체와 관련되 는 용어이고 진리와 지식라는 용어는 영혼과 관련된다. 낮은 수준에 몸이 있고 높은 수준에 영혼의 내재가 있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병존(모순되지 않은 보편적 경험)이 있는 반면 몸은 영혼으로 발전한다. 모든 사실은 필연적으로 마힘바타의 아누마나 (Anumana)에서 확립된 추론에 귀속된다.
토마스 트러헌, 윌리엄 블레이크, W. B. 예이츠는 영문학사에서 신비주 의 시인으로, 때로는 예언자로도 인정받는다. 세 작가는 모두 체제 비순웅적이고 비관 습적이었고 문학계의 시적 평가에서 모호성과 불신에 직면했다. 트러헌의 일부 저작물은 유실되었고 일부는 거의 사고로 불탔으며 그의 생애에서 단 한 작품만 살아남았다. 예이츠의 보다 사적인 시 중의 많은 것이 출판되지 않았고 블레이크는 그의 신학적 견해를 고려할 때 여전히 수수께끼와 혼돈스러움으로 남아있다. 비평가들은 트러헌의 기독교가 켈트 신비주의에 기대어 있다고 논평한다. 반면 블레이크의 시는 유아의 순 결한 순수성에 대한 트러헌의 믿음을 유지하기 때문에 일부 비평가는 트러헌이 블레 이크를 예비했다고 논평한다. 예이츠의 신비주의에 미친 블레이크의 영향은 잘 알려져 있고 문학 비평에서 입증되어 있다. 이 글은 트러헌, 블레이크, 예이츠의 시에 반영된 어린 시절의 영성에 초점을 맞추어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신비주의 시인들 의 글에 철학 및/또는 시의 연결점이 입증할 수 있는지를 탐구한다. 결론으로 이 글은 이들 시인들의 신비시를 재맥락화하기 위해 탈자아적 심리학적 접근과 같은 최근의 학제간 프레임워크에 주의를 기울인다. 주제어: 유년시절의 영성, 신비주의, 영시
몰개성은 경험의 진실을 가져오기 위해 예술가의 입장에서 행하는 실천 이다. 그러한 진실한 경험은 현실과 아름다움을 모두 포함한다. ‘실재적’인 능력 안에 서 우리는 몰개성의 경험이 충만함과 전체성을 가져온다면 몰개성의 미적 상태가 더 큰 이해를 암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 S. 엘리엇, W. B. 예이츠와 존 키츠는 인 간 삶의 모든 의미를 ‘결집’하여 예술로 만듦으로써 ‘감수성의 메커니즘’을 고안하여 예술을 창조했다. 이 위대한 시인들에게 몰개성화의 과정은 궁극적으로 현상과 현실이 구별되는 방식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엘리엇은 일상의 경험을 단편, 무정부 상태 및 불규칙성과 동일시하지만 예이츠는 일상의 수준에서 나타나는 동일한 경험을 대립적 으로 본다. 한편 키츠는 탐닉이 최대 상태의 일상의 사건들과 상황들로 일상을 위치시 킨다. 전체성의 출현이 연기되는 분명한 현상에 대한 해결책으로 엘리엇, 예이츠, 키츠 는 경험의 진리를 실현하기 위한 확실한 조치인 ‘몰개성,’ ‘존재의 통일,’ ‘부정적 능 력’을 제시한다.
예이츠는 정신자동현상과 자동기술을 사용하여 새로운 시 창작 모형의 시 세계를 연다. 정신자동현상은 시인이 의식이 아닌 무의식의 상태, 다시 말해서 대 립자아에서 전달자와 의사소통할 수 있는 의식의 상태이다. 자동기술은 대립자아 상태에서 뮤즈 신과 의사소통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상태를 「모든 영혼들의 밤」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불러내어 그들과 대화하는 기법으로 새로운 시 창작의 기법을 제시한다. 요컨대 그는 시 창작에서 시인의 심리적 상태의 변화를 구체화하여 시 창작에 대한 그의 시학의 원리를 체계적으로 주장함으로써 현대시의 새로운 시 창작 원리를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본 논문은 블레이크와 예이츠 간의, 예이츠와 히니와의 관계를 시학의 관점으로 연구하며, 각 작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작가간의 시의 변화를 살핀다. 그러나 사실 이 관계는 후기시인들을 변화시키는 전통을 연구하는 것이다. 예이츠의 존 돈과 블레이크와의 관계, 예이츠의 히니와의 관계를 보는 것이다. 즉, 과거와 현재의 작자들 사이의 교류가 바로 관계의 시학이 되는 것이다. 본 논문의 핵심은 과거와 현재 를 자신의 시학으로 만들고 이것을 근거로,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된 예이츠의 핵심적 초국가적, 초개인적 현상을 시의 분석을 통해서 찾으려 한다.
본 논문은 현대문학의 중심에 예이츠를 두고 현대문학의 초민족주의시 학을 구획하고 정의하려고 한다. 20세기의 주된 작가 예이츠, 파운드, 엘리엇과 레이디 그레고리와의 문학적 교류를 다루고자 한다. 이들 중 레이디 그레고리와 파운드와의 관계는 면밀했었다. 예이츠가 극작품을 집필하기 시작할 때 레이디 그레고리의 예이츠에 대한 영향력을 컸었다. 파운드의 경우, 파운드의 초기에 예이츠의 영향력을 강력하였고, 스톤 오두막에서의 협업 이후에는 파운드의 영향은 예이츠가 낭만주의의 시삭을 극복하는 촉매가 된다. 먼저 서두에서 본 논문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려고 하는데, 예이츠는 가족적 사회적 배경을 근거로 예이츠를 바라보며 아울러 아일랜드 안에 서뿐만 아니라 영국, 프랑스 내외에서 발생하는 아트 운동과 문학운동의 맥락으로 예 이츠를 보려고 한다. 작가 예이츠의 변화를 추적할 때 본 논문은 미시적 및 거시적 관점을 견지하여, 그의 시 세계의 보다 크고 명학한 면을 드러내고자 한다.
블레이크는 『천국과 지옥의 결혼』에서 선인과 악인의 구별, 인간의 본 질의 대립, 지옥, 선지자들과 시인들의 예언, 지옥과 천국에 대한 환상, 천사와 악마의 논쟁, 역사의 순환 등과 같은 대립의 조화를 다양한 주제들로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 그의 대립개념은 선인과 악인, 천국과 지옥, 그리스도 시대와 에돔 시대, 이성과 에너지, 영혼과 육체, 지배자와 피지배자 등이다. 이 대립개념은 이원론의 개념을 떠올리듯 각 개체가 별개로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예이츠의 가이어처럼 한 개체가 다른 개체에 포함되어 상호작용한다. 그때에 어떤 개체가 그 공간에서 힘을 지배하느냐에 따라서 그 개체가 공간을 지배한다. 그래서 이러한 시의 구성방법은 그의 시 세계가 의도한 방향을 암시하면서 낭만주의의 새로운 파장을 예시하고 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예이츠를 아일랜드에서의 제국적 지배의 몰락에 즈음하여 탈식민화의 작가로 보는데, 예이츠는 애국심과 민족주의로 아일랜드의 유산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비슷한 탈식민적 접근을 하는 케냐의 작가 응과에와 도잉고는 식민이전의 현실에서 후기식민기에서 현대성으로의 전환에 대한 글을 쓰는 작가이다. 본 논문은 그들의 극작품화에 나타난 탈식민화 시학을 점검한다. 예이츠의 극『캐스린 니 홀리한』(1902년) 은 아일랜드 정신의 민족화와 탈식민화에 직접 반응하는 아일랜드의 농민의 억압된 상황을 묘사한다. 『정신의 탈식민화 하기』(1986년)와 다른 긱큐유언어로 된 극에서, 도잉고는 문화적 제국주의가 어떻게 아프리카와 범아프리카에서 심리적 정복의 일환으로서 식민주의를 활용하는 지 검토한다. 극을 저항의 장소로 개념화하여, 그는 식민이전의 케냐의 극의 근원과 토착적 빈 공간을 파괴하는 영국의 극적 제국을 대비한다. 두 작가는 정치를 극화하고 영제국주의에 대한 극을 정치화하여 자신들의 유산과 언어를 되살린다. 두 작사는 청중의 정신에게 귀한 유산을 강조하면서도 극공연에서 토착어를 조명하려 한다.
古代 印度 因明學에서 기원한 中國 唯識佛敎의 認識論은 인간의 인식상태를 설명하는 現量, 比量, 非量 ‘三量’과 ‘三境’, ‘三自性’으로 구성되어진다. 明淸시대 王夫之는 이러한 유식불교의 인식론 중 ‘現量’이 ‘現在’, ‘現成’, ‘顯現眞實’의 함의가 있다고 해석하며 ‘인식의 時空性’, ‘인식의 直觀性’, ‘인식의 眞實性’을 논증함으로써,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며 분석적인 유식불교의 교리체계를 총체적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해석의 기초 위에 왕부지는 유식불교의 인식론 체계를 중국고전시학 영역에 응용하여, 현량 범주가 창작영감의 찰나적 심미포착, 형상사유 결과의 진실한 투영등을 포괄적으로 설명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그는 ‘卽景會心’, ‘情景交融’의 함의를 담고있는 ‘마음과 눈(心目)’의 개념을 통해 현량적 시학이상을 힘주어 주장 하였다. 본 논문은 유식불교의 인식론 범주로서의 ‘현량’과 시학명제들을 실증적으로 해석하는 시학범주로서의 ‘현량’에 대한 개념과 양자간의 내재적 관계를 체계적으로 고찰하였다.
이 논문은 워즈워드의 『서정담시집』과 예이츠의 중기 시 읽어서 두 시인을 비교한다. 이 시인들은 전통시의 관습에서 영시를 자유롭게 해방시킨다. 워즈워드는 상위계급을 다루는 주제나 인위적인 시의 규칙과 관습을 비난하며 보통 사람의 생활에서 소재를 취하여 자연스런 언어로 풍요롭고 자연적인 감정을 표현한다. 예이츠의 경우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전환기에 도달한다. 1901년과 1902년에는 시와 희곡 속의 수정된 여성의 원형을 이상화하기 시작한다. 구어를 강조하는 그의 중기시에 초점을 맞추는데, 『일곱 숲에서』, 『초록 투구 시편』, 『책임』의 시들을 다루게 된다.
이 논문은 근대시 형성과정에 대한 두 가지의 의문으로 시작 했다. 첫째, 근대시의 형성과정은 개화가사→ 창가→ 신체시→ 자유시로 단계적인 이행을 거쳤을까? 둘째, 19세기말 찬송가의 유입은 창가처럼 노래를 전제한 시가(詩歌) 뿐만 아니라, 신체시와 자유시의 형성에도 상당하게 영향을 주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사실 창가와 신체시는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찬송가가 활발하게 번역되면서 개화기의 시가(詩歌)에 영향을 주게 되고, 이후 자유시의 태동에도 일정부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의 논점은 찬송가는 서양악곡을 기반으로 한 종교음악이었지만 번역과정을 통해 시적(詩的)인 형식과 새로운 문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가져와서 근대시의 형성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 았다. 최남선의 신체시는 그 가운데에 등장하게 된 것이며, 본고는 이를 갈등과 변화 속에서 탄생한 ‘메타모포시스 시학’으로 불러보고자 했다.
숭고는 미학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 개념으로서, 대상에 대해 명상할 때 에 우리의 정신과 육체의 정서적 감각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롱자이너스는 숭고 를 고양된 스타일을 재현하는 문학작품에서의 “숭고한 열정의 존재”로 정의하고, 에드 먼드 버크는 거리감을 두고 자연의 파괴적 위력에 연관된 숭고의 경험에서의 고통과 즐거움에 초점을 맞추어 공포와 환희의 균형을 맞춘다. 칸트는 버크의 공포와 환희의 기이한 형태를 결합하고, 라깡은 프로이트와 칸트의 문맥에서 극단과 무한을 추구하여, 칸트의 숭고를 넘어서는 승화의 개념을 구성했다. 본 논문은 라깡의 숭고와 승화의 문맥에서 예이츠의 “비극적 환희”에 재현된 숭고를 예이츠의 시에서 찾아, 예이츠의 숭고의 시학을 살펴본다.
이 논문은 포스트-트루스 시대의 진리와 비진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 시사점을 김수영의 「반시론」 을 통해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포스트-트루스는 사실보다 감정이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게 된 현상을 의미하는 단어로, 2016년 옥스포드 사전 올해의 단어로 선정된 신조어이다. 진리와 비진리의 문제는 역사의 혼란기마다 반복되어 왔다. 그러한 점에서 김수영이 어두운 시대의 비진리를 폭로하고자 했던 「반시론」 은 현재에도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이 논문에서 진리와 비진리의 문제는 「반시론」 에 등장하는 철학자인 하이데거의 『존재의 시간』에서 비은폐로서의 진리를 가리키는 알레테이아라는 개념을 통해 접근하였다. 이를 통해 김수영의 「반시론」 에 대하여 밝혀낸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인은 죽음을 향한 존재이고, 둘째, 시인을 예언자적인 반신적 존재이며, 셋째, 반시는 비진리의 폭로를 통해 진리의 효과를 내는 실험시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을 통해 우리는 김수영의 「반시론」 으로부터 포스트-트루스 시대에 어떻게 진리를 지킬 것인가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평론 「무드」에서 예이츠는 무드를 초자연적인 존재의 노동자이며 전언 자로서 정의를 내리면서 과학적 지식으로 고정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비가시적인 삶 의 관념을 전달한다고 설명한다. 시인에 따르면 우리가 신성한 힘과 마주할 수 있는 영역인 영원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무드이다. 무드에 대한 예이츠의 시학 은 상징주의에 대한 믿음으로 점차 바뀐다. 상징을 통해 그는 무드 속에서 감각을 넘어서 운동하는 관념과 속성을 환기하거나 암시한다. 그렇지 않다면 알려지지 않을 초 자연적인 존재가 상징을 통해 무드 속에서 환기될 수 있다.
인간과 기계의 융합을 의미하는 포스트휴머니즘 시대에 이르러 인간은 점점 기계와 일체화 되어 가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과 기계의 흥미진진한 세기의 대결 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 와중에 최근에 벌어진 한국의 한 바둑 명인과 영 국 인공지능 알파고의 게임은 인간과 기계의 공존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렇다 면 알파고와 예이츠가 무슨 상관이냐? 그것은 알파고가 인간의 지식을 축적한 인간의 아바타이기 때문이고, 인간의 기억과 기계의 기억은 코드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를 게 없고, 인간과 기계는 모두 저장된 기억을 활용하여 행동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그 러니까 칼 융의 ‘집단무의식’에 상존하는 원형이나, 라캉이 말하는 ‘타자의 언술’이 인 간을 작동시키므로 기계를 작동시키는 인공지능인 알파고에 해당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