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933

        481.
        2016.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아메리칸 르네상스 벽화에 드러나는 와스프 계층의 타자화 전략과 그들의 지배 이 데올로기를 이민의 급증이라는 사회적 문맥 내에서 고찰한 연구이다. 1880년대 이민의 급증으로 사회적 위기의식을 느낀 와스프 계층은 와스프 문화를 지키는 과정에서 그들 문화의 범주를 지형 학적으로, 인종적으로, 종교적으로 제한했다. 이 시기 아메리칸 르네상스 벽화들은 와스프 지배층 의 지배 이념과 이상을 포함하고 있으며, 와스프 계층은 이 벽화들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 하려 했다. 다문화주의로 변화하는 시기 아메리칸 르네상스 벽화들은 와스프 계층의 상반된 두 가 지 전략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는 이주민들을 자신들의 영역에서 분리해서 자신들만의 공적 영 역을 강화시키는 방식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회유와, 설득을 통해 자신들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7,000원
        482.
        2016.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헬레니즘시대의 알렉산드리아는 그리스와 이집트 및 지중해 전역의 다양한 출신의 성원들의 문화가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본 연구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집권기 동안의 알렉산드리아의 문화적 정체성을 그리스화와 현지화 정책을 통해서 고찰하고 흑인과 난쟁이, 꼽추를 재현한 소형 조형물에 투영된 다문화적 성격을 보이고자 한다. 흑인과 난쟁이, 꼽추는 왕족과 상류 그리스인들 의 유흥과 소비문화에서 노예나 광대로 참여했던 사회적 소수자이다. 이들의 조형물은 상류문화 를 동경한 비그리스인 중간계층의 시민들에 의해 소유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소유자는 자 신이 그리스적 상류 문화의 주체가 아니라는 사실과 노예나 광대와 같은 소수자와도 구분되는 존 재라는 사실을 인지함으로써 도시 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규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6,100원
        483.
        2016.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was intended to present new teaching-learning program for fine art class involving the use of smart devices. Particularly, this study aim to improve communication and comprehension of peer relationship based on self-expression and continuous recording by using smart devices. The class continued in 4 sessions with 5 Middle School students. The subjects selected the app-icon expressive of themselves and drew interpretation based on their experience, and shared the results with peers to accept the ideas and opinions of others. The results show that the class involving the use of apps helped alleviate students' fear towards expression in connection with existing fine art expression, promoting students' expressivity, and the class helped develop clear self-expression and communication ability by allowing students to draw on their unique experience for interpretation of app-icon.
        4,000원
        484.
        2016.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시대 신앙활동에 있어서 불교의식의 비중은 매우 증가하여, 건축, 불 상, 공예 등 불교미술 전반에서 의식문화의 영향이 광범위하게 확인된다. 본 고에서는 불교의례의 성행이 가져온 변화를 불교회화의 측면에서 살펴보았 다. 불화와 의례공간의 관련성은 주불전 내부의 의식과 야외 의식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조망할 수 있다. 예배 공간으로 인식되던 주불전(主佛殿)은 다양한 법회(法會)와 의례가 개 최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고, 전각 내부에는 의식 수요에 부응하는 불화가 봉 안되었다. 불보살을 도량[道場]에 청해 공양을 권하는 권공(勸供)과 육도의 중 생을 청하여 음식을 베푸는 시식(施食) 의례는 특정 의식에 한정되지 않고 불 교 문화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수륙재의 성행은 특히 삼단의례(三壇儀禮)라 는 형식을 통해 저변화되었다. 그 결과 주불전 안에 상단(上壇), 중단(中壇), 하단(下壇)의 삼단이 갖추어지고, 각 단을 상징하는 불화가 하나의 기본 조합 을 이루게 된다. 한편 야외 의식용 대형 불화인 괘불(掛佛)이 전국적으로 조성되는 현상은 전각 외부로까지 확장된 의식에서 불화의 쓰임과 기능 확대를 보여준다. 불 화는 의식단의 가설에 따른 수요로 혹은 전각 내부에서 외부로 의식단이 옮 겨짐으로써 이동하였다. 불화를 거는 절차의 핵심은 의식이 진행되는 곳으로 불보살의 강림(降臨)을 청하는 것이다. 불보살의 강림은 도량에 초청하고자 하는 불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거불(擧佛) 절차를 통해 상징되었다. 또한 거불 의 대상이 의식용 불화의 주제로 그려짐으로써 구체적으로 시각화되었다. 의 식을 위해 불화를 꺼내 이동하고, 의식을 마치면 다시 원래의 자리에 가져다 두는 일련의 절차는 불보살의 현존을‘도량으로의 강림’이라는 극적인 방식 으로 전달하였다. 이들의 강림을 찬탄하고 도량에 내려온 불보살에게 공양을 올리는 절차는 의식의 신이력을 높이는 데 기여하였다. 조선시대 불교회화는 전각에 봉안되어 불상의 뒤편에 놓여 불전이 상징하 는 불세계를 상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의식의 성행이라는 신앙의 흐름에서 역동적으로 기능하였다. 전각 외부로 확장되는 의식과 의식을 전담하는 불 화로의 이행을 대표하는 것이 괘불이라면, 감로도(甘露圖)는 의식에 사용되 던 불화가 전각 내부의 불화로 고정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의식의 성행으로 의식 전용 불화가 생겨나는 동시에 특정한 의식에 사용되던 불화가 상설 불 화로 봉안되었다. 조선시대 불교회화는 의식 수요에 부응하는 과정에서 그 주제와 구성에서 다양한 변용을 보이며 전개되었다. 불화가 봉안된 공간과 그 공간에서 이루어졌던 의식 문화를 통해 조선시대 불화의 다각적인 기능 을 이해할 수 있다.
        8,700원
        485.
        2015.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Deoksugung Palace Art Museum was built in 1938 as the first professional art museum in Korea. In 2015,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published a book on architectural drawings of this building. This book, called Architectural Drawings of the Deoksugung Palace Art Museum, consists of 646 sheets, 23 types of documents, as well as other historical letters. This paper focuses on the analysis of the characteristics of classicism in Architectural Drawings. It shows that every dimensions of drawings were controled by 3 partition composition through the analysis of architectural plan drawings, elevation drawings and even section drawings. Thus, Classicism for the museum is not about classical elements but the principle of composition of each elements for the construction. This paper further argues that Deoksugung Palace Art Museum exemplifies beautiful Classicism architecture which follows the principle of classical architectural composition.
        4,000원
        486.
        2015.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6,000원
        488.
        2015.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석정 한익환은 1970년 중반 혜곡 최순우의 감식안에 힘입어 전승도자 계승자로서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다. 그에게는 항상 전승도자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지만 그는 전승을 위해 연구를 거듭한 요업공학자의 이미지가 더 강하다. 그는 일반적으로 도예가들이 행하는 기형의 연구 보다는 흙의 실험을 통한 도자기 색의 연구에 더 집중하였다. 1940년대 부터 도자기 기술의 바탕이 되는 공부를 시작한 석정 한익환은 1950년 강원도 홍천의 전통가마에 파견 근무하면서 처음으로 전통자기의 제작 기법을 배웠고 그 후 현대도자기 공장의 연구실에서 도자기 색을 만들 어내는 조합사의 길을 걸었다. 최고의 색깔 조합사로 이름을 날리면서 전통도자기 제작을 위해 독립적인 가마를 운영하였으나 결혼과 함께 잠 시 중단하였다. 그러나 전통 도자기 제작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결 국 1960년대 후반에 산곡요를 만들었다. 이 시절부터 그는 백토를 찾아 전국을 찾아다니기 시작하였고 1975년 백토 광산이 있는 경기도 용인의 고안리로 가마를 이전하고 ‘익요’시기를 맞이하였다. 이시기에 그는 조 선백자의 백색 연구를 완성하면서 ‘앞으로 기술이 발달하여 나의 백자 를 모방할 수는 있어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고까지 말하면서 최고의 백 색을 가진 백자로 발전시켰다. 특히 1981년부터는 신세계백화점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재현과 답습 에서 벗어나 더 좋은 백자색을 만들어 보라’고 한 최순우 관장의 말에 의해 전통 방식의 도자 기술과 현대식 도자 실험을 통한 색의 개발에 몰두하였다. 전승도자를 현대화, 대중화하는 연구를 시작하면서 한익환 백자는 대부분 순백자의 형태로 제작되었다. 전문가들과 일반인들이 선호하는 한 익환 백자는 오히려 조선 백자의 색을 전승한 백색을 완성한 후 그가 만들어낸 백색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의 백색은 한익환이 만든 태토의 백색에서 나오는 색을 기본으로 유약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면서 나타난다. 한익환의 백자는 수입이나 다른 재료로 만들어진 태토가 아 니라 옛 선조들이 사용하였던 한국의 흙을 기본으로 계승 발전시켜 조 선관요백자 색을 넘어선 백자이다. 그가 전승도자의 현대화를 연구하면서 입버릇처럼 ‘반광택’이라고 주 장하던 것은 그에게 있어서 옛 도자를 전승하는데 필수 조건이었다. 우리 눈앞에 놓여있는 전통 도자색은 광택이 있으면서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바다 속 뻘에서 나온 청자의 경우 새로 만든 청자처럼 광택이 난다. 이는 진공 상태의 도자의 경우 옛 도자라고 하여도 한익환이 말하는 정도의 반광택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한익환이 말하는 반광택은 세월의 흔적을 가지고 있는 전통 자기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있어서 전통 도자의 ‘계승’은 완벽한 색의 ‘재현’이므로 그는 자신의 도자에 세월의 흔적까지 나타내려 했던 전승 장인이라고 생각한다.
        7,800원
        489.
        2015.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카라 워커(Kara Walker, 1969∼)는 1994∼1998년 실루엣 작품을 통해 여러 인종의 캐릭터들을 만들고 인종 간에 발생하는 성적 섹슈얼리티와 폭력성을 드러냈다. 워커는 서사적 구성을 가진 실루엣 작품 속에서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이 ‘허구’라는 것을 표현 하기 위하여 현실과 가상이 혼합된 자신만의 판타지를 만들어 내었다. 워커의 인종 재현 방식에서 중요한 전략은 외적인 윤곽을 드러내는 실루엣 (Silhouette) 기법과 문학 작품의 차용, 키치로서의 로맨스 요소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뿐 만 아니라 워커는 그녀의 작품에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포스트 메모리 (postmemory) 작업과 개인의 트라우마의 작용을 흑인 여성 캐릭터에서 잘 녹여내었다. 이로써 워커는 자신의 경험을 흑인 여성이 가지는 심리학적인 유산과 혼합하였고, 지배 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성적 권력에 대한 문제를 가시화하였다. 그리하여 워커는 흑인 여성의 성적인 면을 드러내는 것에 보수 적일 수밖에 없었던 1970년대 흑인 여성 미술 작가들의 시선에서 한발 나아가 흑인 여성의 신체를 인종적 억압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워커는 그녀의 작품 속의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통해 흑인 여성 캐릭터의 성적 주체성을 표현함으로써 인종적·성적 차별에 따른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려는 시도를 하였다.
        7,000원
        490.
        2015.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이탈리아 전후 아방가르드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의 일원으로 활동 하여 주목을 받았던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Michelangelo Pistoletto, 1933- )의 거울 회 화(Mirror Paintings)에 대한 연구이다. 거울 회화는 피스톨레토에게 명성을 가져다 준 작업이지만 아르테 포베라에 관한 집 단적 연구에 통합되면서 개별적이고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 러나 거울처럼 보이는 스테인리스 스틸에 실크스크린 된 사진 이미지의 단순한 작업처 럼 보이는 거울 회화는 2차원 평면과 3차원의 공간, 실제와 모방 혹은 가상, 회화와 사 진, 과거와 현재, 자아와 타자 등의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고민되어 온 문제들과 복잡하 게 얽혀있다. 본 연구는 피스톨레토의 거울 회화를 ‘공간’과 ‘정체성’의 개념에 중심을 두고 검토하 였다. 거울 회화는 2차원 평면과 3차원의 공간의 문제와 직접 관련된다. 작가의 모국인 이탈리아는 16세기 르네상스 전성기에 발명된 원근법으로 시각예술에서의 공간에 관한 탐구가 이루어졌던 지역이다. 그린버그의 형식주의 모더니즘 담론 이후로 많은 예술가 들이 실재의 모방이나 대상의 재현의 문제를 떠나 감정과 정신성, 매체와 관련된 문제들 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피스톨레토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근법의 공간과 재현의 문 제를 지속적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고민의 결과물로과 같은 거울 회화를 제작하게 된 것이다. 거울 회화는 회화 평면과 실제 공간을 넘어 거울에 반사되는 제 3의 공간 문제까지 도 언급하면서 가상 공간으로까지 확장되는 논의를 이끌어낸다. 이러한 공간의 확장은 개인을 넘어 사회의 공간으로 연결되며, ‘자아와 타자의 관계’ 혹은 ‘소통’과 같은 지금까 지도 계속 논의되는 동시대적 주제를 생각하게 한다.
        5,700원
        491.
        2015.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우리 도자의 역사에서 고려시대 청자의 대표를 梅甁이라 한다면 조 선시대 백자는 龍樽이라 할 수 있다. 청화로 그린 용준은 조선의 개국 이후 체제가 정비되고 儀禮와 관련 器皿制式이 정립되는 첫 단계부터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기본 골격을 준수하면서 시종일관 하였다. 따라서 청화용준을 조선백자의 상징이며 중심적 존재라고 하는 데 이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간에 연구 경향은 17세기에 청화재료 수급이 어려워지면서假畵와 鐵畵재료인 石間硃를 썼고 또 그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 되었 다는 전제 아래 ‘철화백자의 시대’라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결국 이러한 입장을 취함으로서 조선백자의 근간으로 조형의 중심을 이끌며 일정한 방향으로 전개되어 온 청화용준이 일백년 가까이 단절되었고 다시 18세기에 새롭게 구성한 조형체계로 재등장 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러한 인식은 조선 중, 후기 백자의 전개에서 조형정신의 계승은 물론 조선사회 를 구성하는 지적 엘리트들의 일정한 美意識을 규명하는데 심각한 장 애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임진란 이후 광해군11년(1619)에 와서 어렵게 청화를 구하여 용준 제작이 가능해졌고 이후 왕실의 雙龍樽제작은 19세기까지 지속 되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현존하는 조선중기, 후기 청화백자 쌍용준의 조형적 특징을 기준으로 여섯 유형으로 나누고 각각 의 성격을 분석했으며, 여기서 分院窯址出土철화용준의 절대편년 자 료를 대입하여 분류 기준의 당위성도 확인하였다. 조선시대 철화백자는 사용주체도 달랐고 명분도 분명히 달랐다. 철화는 청화와 함께 상하관계를 유지하며 동일한 시공간에서 각각 다른 조 형의장을 계승하면서 일정기간 동안 공존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상적 인 계급사회의 정착을 추구했던 조선의 司饔院分院에서 정통성을 갖 는 청화백자와는 전혀 다른 위치와 기능으로 17세기 동안 독자적 철화 백자의 조형체계를 확립했고 곧 이어 간소화 쇠퇴하면서 지방 民窯로 이전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조선시대 백자의 대표격인 용준의 조형체계를 밝히는 일은 조선백자 의 근간을 밝히는 근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다. 조선 전 기에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었던 樽은 17세기 전기를 지나면서 한 가지로 통합 되는데 그 과정에서 청화백자 쌍용준의 역할이 절대적이었 다. 제작 주체였던 사대부들의 관심이 제왕의 쌍용준에 있었을 가능성 이 높기 때문이다. 士大夫들은 이 용준에 용 그림 대신 四君子와 花鳥, 山水, 人物, 魚 蟹, 十長生등 새로운 그림들을 敎化와 祈福의 기능을 존중하면서 그려 넣었다. 따라서 용 그림 주변에서 莊嚴을 상징했던 당초, 여의두, 劍形 蓮瓣같은 종속문양대를 생략하거나 단순화하는 것이 신하로서 사대부 가 지켜야 할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조선후기 上品畵樽가운데 검형연판문대를 갖춘 예가 박병래선생 기증품 <白磁靑畵山水文樽>(높 이 38.1) 한 점밖에 없다는 사실이 그러한 제작 분위기를 설명해 주고 있다.
        9,500원
        492.
        2015.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유리를 매체로 하여 빛과 색을 종합시킨 스테인드글라스는 그 시작부터 건축적인 예 술이었다. 고딕건축을 통하여 최고조에 이른 스테인드글라스가 르네상스의 자연주의, 사실주의 회화와 벽화의 전개로 차츰 쇠퇴하면서 거의 잊혀 지는듯 하였으나 20세기 초 부터 다시 부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일반건축 중에서도 상업공간에 도입된 건축스테인드글라스로 연구범위를 좁혔으며, 상업공간에 도입된 국내외 현황을 서술하고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알아보았다. 이 논문을 통해 국내외의 건축스테인드글라스의 현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앞으로의 발전방향을 잡고 상업공간 뿐만 아니라 스테인드글라스의 도입이 필요한 여러 일반건 축물들에 대한 연구 또한 끊임없이 해나가야 할 계기가 생겼다. 또한 기존에 있는 제작 기법을 바탕으로 새로운 기법연구와 건축을 포함한 여러 전문가들의 협업으로 좀 더 전문적인 지식으로 스테인드글라스를 연구하고 발전시키는데 본 논문의 의미가 있다 하겠다.
        6,400원
        493.
        2015.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미국의 개념미술가 솔 르윗의 벽 드로잉 작업에서 작가가 강조하고자 했 던 아이디어를 작품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구현했는지를 분석하고자 했다. 또한 르윗의 개인적인 관심사인 시노피아를 통해, 그리고 벽 드로잉의 시발점이 되었던 제록스 북 프 로젝트에서 르윗의 작업을 통해 르윗이 벽 드로잉을 시작하게 된 배경을 함께 살펴볼 수 있었다. 벽 드로잉은 르윗이 개념미술가로 전향한 이듬해부터 그가 작고하기 전까지 꾸준하 고 많은 변화를 보여준 작업형태였다. 그 중 벽 드로잉을 시작한 1968년에서부터 1978 년도까지의 벽 드로잉으로 한정한다. 1978년은 뉴욕 현대미술관(Museum of Modern Art, New York)에서 그의 11년간의 작품 활동을 모아 전시한 대규모 회고전이 있었던 때이며, 이 회고전 이후 그는 이탈리아로의 이주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이후의 벽 드 로잉은 이전의 것과는 확연하게 다른 양식상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1967년 르윗은 「개념미술에 대한 문단들」과 1969년에 「개념미술에 대한 문장들」을 통해 자신이 하고 자하는 개념미술에 대해 발표하였고 벽 드로잉은 이 두 글이 발표된 중간 시점인 1968 년에 시작되었다. 따라서 1968년이라는 시기는 르윗의 개념미술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 니며, 개념미술가로 활동을 시작하는 시기에 제작된 벽 드로잉은 개념미술로의 전환기 를 살필 수 있는 핵심적 활동 결과물이다. 본 고에서는 개념미술가로 활동한 르윗의 초기의 벽 드로잉을 전제로 르윗이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강조한 점을 비 물질성, 이탈 리아 르네상스 미술개념이었던 디세뇨, 그리고 아이디어의 비합리적인 특성을 통해 알 수 있다.
        6,600원
        494.
        2015.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흔히 왜관요(倭館窯)란,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일본 쓰시마번[對 馬藩]이 경영하던 가마를 말한다. 그 당시, 쓰시마번은 왜관(倭館)에서 다기(茶器)를 만들어 권력자들에게 바쳤다. 이 글은 고관(古館)이라고 도 하는 왜관에 1639년부터 1678년까지 설치된 가마에 대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고관은 지금 부산 동구 수정동에 있었다고 하는데, 어디에 가마가 있었는지 오랫동안 의문 속에 있었다. 근대기의 기록 등을 살펴보면, 고관 공원(古館公園) 옆자리에 있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를 근거로 한 현지 답사의 결과, 가마의 위치가 지금 803번지 일대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 었다. 가마터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이 가마는 고관과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고관 가마에서 제작된 유물도 역시 오래된 의문점의 하나이다. 대마도 킨세키죠[金石城] 유적에서는 576점의 다완편이 출토되었다. 하한 연대는 성의 기능이 새로운 성에 옮기게 된 1678년경이 될 것이다. 이 때, 대마도에 가마는 없고 아마도 이 파편들이 고관에서 제작되었을 것 으로 생각된다. 사료에 따르면, 양산, 기장 등이 왜관요에서 일하던 사기장의 파견지 이었다. 킨세키죠에서 출토된 백자는 유태(釉胎)나 굽의 형태, 받침 등 이 양산, 기장과 상통된다. 이를 하여금, 고요에서 지방 사기장의 기술 을 바탕으로 하여 제작 활동이 이루어진 것을 증명해준 것이다. 분청사기를 모방한 파편도 있는데, 당시 일본 다른 가마에서도 분청 사기를 모방하였다. 1610년대 이후에는 고관 가마나 일본 가마나 마찬 가지로 ‘원전(原典)’에 충실하려는 의도가 높았다. 그러나 쓰시마번만 말 그대로 ‘원전’, 즉 가마 자리나 사기장까지 ‘원전’을 지향하는 것이 가 능하였던 셈이다.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쓰시마번이 부산에서 가마를 운영하던 이유는 바로 다른 일본 藩과 달리 권력자에게 ‘원전’을 내세워 이익을 얻으려 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9,000원
        495.
        2015.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의 예이츠와 아오키 읽기는 문학과 예술의 두 주요 운동, 형식 과 반형식/개념주의에 근거한다. 언뜻 보면, 간단히 말해서, 예술작품은 자족적이어서, 이를테면, 소금장이 는 어떻게 쓰여 졌는지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작품 그 자체만으 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개념주의는 좀 더 복잡한데, 마셀 듀상이 원류이며 정의하기가 어렵다. 이 논문에서 예이츠, 아오키, 이우환을 원형적 개념주의 예술가로 취급한다. 개념미술은 듀상으로부터 출발한다. 개념주의예술은 새로운 예술을 창조하려는 시도이 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것은 “반형식주의”의 또 다른 형식으로, 옛 형식을 허물고 새 형식을 만드는 노력이다. 이 노력은 예이츠가 환상록에서 해명한 달의 28상이나 문명의 순환을 상기시킨다.
        4,300원
        496.
        2015.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with focus on my artworks, aims to examine the 'pictorial expression of mind.' What is mind and how should I control it are the core content of my works. This study looked into mind which is expressed throughout my works. And it argued that the painting realized by senses - senses as the moving and flow of mind, - come from mind. It is to consider the relation between painting and mind by examining the senses for expressing the invisible inner side. I, in the art pieces, used a gem to express mind metaphorically and expressed it with senses. And I presented the birth and polishing process of a gem to express the flow and asceticism of my mind in the works. Such mind, in other words, is ‘one mind,’ ‘mind considered as the only true being,’ ‘unconsciousness,’ and ‘innate pure mind’ which all are based on my Buddhist belief. Realizing being unconscious and becoming one's true self is attaining a happy medium that avoids extremes; it means being completely empty. In this way, one can 'become his or her true self' can be possible through mind control. Regaining one's own innate pure mind and coming to have a peace of mind is enlightenment and nirvana- the process is the Zen meditation. I consider the process of artworks as the process of such enlightenment and regard it in the same light as Zen meditation. In addition, the cause of all phenomena is unconsciousness and painting is the manifestation of such unconsciousness. Thus, painting is like 'all things are made from the mind.' Such sense is the very first physical experience through which one can understand the world as it is - I intend to realize this in paintings. This painting, completed by such sense, can be the existence ‘just being as it is.’ This is the same as the true state in Buddhism meaning the true nature of all existence. Therefore, the painting expressed through senses is just as it is and the true being of an existence. For this reason, I intend to realize the actuality through senses in my artworks. The characteristic of my works is the combination of the photographic realism and expressionism. Some of the former's attributes include photographical image use and close-up; the latter includes some characteristics in expression. Having these attributes, my works can be defined as simulacre, a new existence. I also intended to extract rare images by enlarging the details of objects through close-up filming. The effect of such close-up brings an emphasis on the theme and presents new images - such features are expressed through already experienced fact.
        7,000원
        497.
        2015.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Peter Halley (1953~ ) has shown the ‘geometrical abstraction’ through his works since 1980. His works are divided by times depending on the changes in styles and media.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take a look at paintings produced in the 1990s and installation works. Halley has applied various sociological theories of different types to his works while bringing in forms from minimalism, pop art and color field paintings. He expressed ‘a prison’ by drawing ‘bars’ in a ‘square’ in the early 1980s, and conveyed sentiments of loneliness and solitude felt while residing in the metropolitan city of New York. The icon of the ‘prison’ was expanded into the concept of a space of digital technologies, developing into social ‘constraints of space.’ The art circles in the U.S. were in turmoil due to the shock from the AIDS and the Gulf War in the 1990s. Halley thought that making new attempts in producing artworks was a way to overcome depressing social circumstances. In many of his paintings produced in the 1990s, interactions between the communications networks complicated due to technological advancement and independent spaces. He showcased mass-produced images gained from the computer and silk screen along with paintings as installation works in such public spaces as art museums, airports and universities. In particular, a cell connected to a text through a conduit in the printed flow chart represents an information system, controlling the targets for command. New changes occurred in his usage of icons while using new media. He has exponentially used the ‘explosive’ motive from the mid-1990s, modifying and changing the ‘explosive’ image in a series of installation works. While the images connecting a prison, a cell and a conduit produced in the 1980s represented a solid system, the image of ‘explosive’ stood for ‘the explosion of systems’ and ‘atomic bombing.’ Although Halley has used the same motifs since he showcased the geometrical abstraction, he has imposed social implications and messages to the geometrical abstraction endlessly by expressing the sensations of solitude and control, and social phenomena felt by the contemporaries in the modern world through such diverse artistic forms as paintings, lithograph and installation works.
        5,100원
        498.
        2015.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司饔院의 分院官窯는 조선 도자기 역사의 연구에서 가장 핵심적이 고도 근원적인 연구 주제이다. 분원 관요를 준거로 하여 시기구분을 비 롯한 도자 양식 연구 및 官職연구, 관요의 명칭 문제 등 여러 세부 주제를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조선 왕실의 정책의 단면을 파악하고 문화와 생활 등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분원 관요의 연구가 필수적이다. 주지하듯이 분원 관요는 朝鮮前期에 京畿道廣州일대에 설치되어 조선 말 민영화되기까지 조선 왕실과 궁궐 및 관청에 도자기를 납품한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따라서 국가의 정책이 곧 관요의 도자기 제작 과 양식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관요를 중 심으로 왕실 및 궁궐자기가 대량생산되었고, 관요 백자 양식이 탄생했 으며, 도자기 제작 판도에도 변화가 일어 분청사기가 쇠퇴하고 백자가 성행했다. 그러므로 이 글의 목적은 분원의 개념과 명칭 및 설치시기에 대한 학 계의 공통된 견해를 수렴하여 통합된 학설을 세우려는 것이다. 따라서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의 분원 관요에 대한 학술적 성과, 즉 官窯 址의 발굴과 지표조사, 특별전, 학술대회 등의 주요 성과를 연대별로 정 리했다. 아울러 전문 연구자들의 논저를 집중적으로 검토하였다. 검토한 시대는 조선 초부터 분원 관요가 설치되고 조선 말 민영화되기 전까지 다. 학술적 성과는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경기도박물관과 경기도자박물관(구 조선관요박물관),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해강도자 미술관을 주축으로 한 국공사립기관의 참여와 활약으로 축적되었다. 학 술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는 1990년대와 2000년대였고 2010년대는 2015년 현재까지 다소 저조한 편이다. 광주 관요 출토의 중요한 도편은, ‘內用’명 백자편, ‘見樣’명 백자편, 기린문 청화백자편, 운룡문 청화백자편, ‘좌’ 또는 ‘우’명 백자, 각종 干支 및 숫자가 기명된 백자편, 중국 연호명 백자편, 각종 点刻銘백자편 등 이며, 이를 근거로 편년이나 도자 양식의 규명이 가능했다. 분원 관요의 개념과 명칭에 대해 학계의 주요 논저에서는, ‘司饔院이 세운 沙器製造場으로서 조선 전기부터 존재한 조선을 대표하는 최대의 관청수공업장’이라고 정의했다. 즉 분원은 사옹원이라는 관청이 세운 가 마이며, 이를 압축하면, 본원인 사옹원의 분원이다. 아울러 ‘광주 분원’, ‘광주 분원 관요’, ‘광주 沙器所’, ‘광주 燔造所’, ‘광주 磁器所’, ‘분원 번 조소’ 등이 조선시대의 명칭을 계승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관찬기록에 의하면, 번조소와 자기소는 주로 광주 분원 관요에 한하여 지칭한 명칭 이었다. 이에 반해 사기소는 전국적으로 분포한 가마를 지칭할 때 두루 사용된 명칭이었다. 또한 분원의 설치시기에 대해서는 필자가 1467년 4~12월이라는 연대를 발표하였다(본문 각주 16).
        9,500원
        499.
        2015.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베트남전쟁기 게릴라 화가들의 활동을 추적하기 위해 먼저 베트남 근대미술 의 형성과 베트남전쟁기 저항미술이 나타난 경위를 고찰한다. 전쟁에서 경험할 수 있는 폭력적인 참상에도 불구하고 게릴라 화가들은 적에 대한 적개심보다 근거지에서의 평범 한 일상을 표현하는데 주력했다. 게릴라이자 화가였으므로 옻칠회화나 유화보다 연필이 나 펜으로 그린 스케치와 수채화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 드로잉들은 거의 일기와도 같은 것이었다. 전쟁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그려낸 이 드로잉을 통해 게릴라화 가들이 파악하던 베트남전쟁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는 소중한 참고가 될 것이다. 또한 자신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미화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표현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 논문의 의의는 베트남 근대미술과 저항미술의 형성과정을 고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베트남전쟁기 게릴라 화가들의 활동과 작품을 고찰한 것에서 찾 을 수 있을 것이다.
        8,000원
        500.
        2015.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개항기에 등장하여 미술 생산자인 화가, 중개자인 거간 등의 상업적 욕망을 자극하며 근대 미술시장 형성에 영향을 끼친 서양인 미술 수요자를 다 룬다. 수교 이후 한국을 찾았던 서양인은 외교관·의사·간호사·엔지니어·선교사 등 다양했는데, 상당수가 미술시장 신규 수요자로 가세하였다. 서양인들이 구 입하고자 한 미술품은 취향, 목적, 장르에서 기존과 판이하게 달랐다. 그 하나 가 한국의 삶과 풍속에 관한 정보를 담은 ‘민속적 풍속화’이며, 다른 하나가 ‘쉬느와즈리’의 영향으로 동양 도자기 애호 차원에서 수집된 고려자기이다. 서 양인 구미에 맞춰 화가들은 어떻게 새로운 풍속화를 개발하고, 중개상들은 어 떤 방식으로 도자기 도굴품까지 취급했는지를 살펴보면서 개항장과 대도시에 서 서양인 고객을 중심으로 형성된 미술시장을 고찰한다.
        6,9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