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논문의 목적은 요안네스 카시아누스의 『제도집』과 『담화집』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철저하고 자발적인 부의 포기와 가난의 지속’이라는 주제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반복되는 이유를 밝히는 것이 다. 카시아누스는 5세기 초 남부 갈리아 지역에서 수도사로 활동했고 『제 도집』과 『담화집』을 수도문헌으로 남겼다. 두 권의 수도문헌은 전통적으로 이집트와 동방의 수도생활을 서방, 특별히 갈리아 지역의 수도사들에게 전 할 목적으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카시아누스의 수도문헌에는 철저한 가난이라는 주제가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그런데 카시아누스 연구가들은 그동안 가난의 주제 뿐 아니라 그것이 강조 되는 이유와 배경에 관해서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연구논문은 카시아누스의 가난에 대한 강조가 의미하는 바를 밝히기 위해서 먼저 『제도집』과 『담화집』에서 가난에 대한 강조가 어떻게 나타나
밀리터리 위장 패턴은 적으로부터 아군을 보호하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 군복과 장비에 쓰인 일종의 보호색과 같은 특유의 패턴을 말한다. 세계대전 이후 밀리터리 룩은 때로는 저항적인 의지의 표현으로 때로는 개성을 추구하는 젊은이들의 감성표현으로 스트리트 패션과 캐주얼웨어에 적용되었으며, 창조적인 패션을 선도하는 유명디자이너의 작품에서 새로운 스타일로 창조되었다. 최근 밀리터리 스타일이 새로운 패션 트렌드로서 소비자들에게 주목을 받으면서 밀리터리 위장 패턴에 대한 관심도 동반 상승하며, 다양한 패션제품에 밀리터리 위장 패턴이 활용되어지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흐름에 부응하여 다양한 패턴디자인의 정보원으로서 패션에 영감을 제공하고 있는 밀리터리 위장 패턴디자인에 관한 유형파악에 목적을 둔다. 그러므로 연구는 밀리터리 위장 패턴에 관한 개념과 발생, 밀리터리 위장 패턴을 활용한 밀리터리 패션에 관하여 고찰하였으며, 군에서 사용된 위장 패턴과 밀리터리 위장패턴 디자인의 유형과 특징을 파악해 보았다. 아울러 본 연구를 통해 밀리터리 위장 패턴 활용 시, 패턴디자인에 대한 정보지식을 개괄적으로 쉽게 획득할 수 있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자 한다.
본 논문의 연구목적은 루터의 죽음관을 살펴보는 것이다. 기존의 로마 가톨릭 교회의 입장과는 달리 루터의 죽음관이 드러내는 가장 큰 특징은 루터가 죽음의 문제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그의 핵심적 개혁 사상을 가지고 풀이한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서 루터는 이 개혁 사상에 의거하여 중세 구원론과 종교적 관행에 불가결한 요소였던 연옥 사상을 결국 거부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관점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과 관련하여 두 종류 의 죽음―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인생 중에 경험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죽음과 인생의 끝을 의미하는 죽음―을 이야기한 다. 전자의 죽음은 후자의 죽음의 형태와 그 이후 누리게 될 부활과 영생 의 불가피한 조건이 되는 만큼 루터의 죽음관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 지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경험하는 이 두 형태의 죽음은 두 형태의 부활 과 연결된다. 루터는 죽음 이후 불멸하는 영혼이 즉각적으로 심판을 받고 천국이나 지옥이나 연옥으로 옮겨진다는 중세 후기 교리 대신 부활 때까지 죽음은 잠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잠으로서의 이 죽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첫 번째 창조 때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만들어질 두 번째 창조를 위한 중간과정이라는 점에서 두렵고 끔찍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과 의 영원한 삶을 위해 거쳐야 할 꼭 필요한 통과의례가 되며 이 세상에서 겪은 모든 죄와 죽음과 악과의 싸움에 대한 최후 승리를 의미한다.
Aerosols play the important role as scatter or absorb solar radiation, which consequently modies the radiative balance of the atmosphere. Aerosol and its eects, especially its indirect eects, on climate have drawn increasing attention in recent years. Understanding of interactions of aerosols and climate is important to better prediction of future climate change. In this study, the direct and indirect effect of fossil fuel organic carbon aerosol (OC) and its impacts on the climate during the period of the early of 20th century (1901~1920) and the end of 20th century (1986~2005) were investigated. we examine changes in aerosol emission during 20th century. Using HadGEM2-AO (Hadley Centre Global Environmental Model version 2, Atmosphere and Ocean), historical experiments are carried out with and without anthropogenic aerosol emissions (HIST, FIXA) from 1860 to 2005. Fossil fuel organic carbon aerosol (OCFF) emission xed at 1860 is added. Due to the large emission of OC, thick optical depth of the OC appears over Asia, western Europe and eastern north America. e direct eect due to increasing OC influences negative radiative effect at the surface, which leads to a cooling effect on the surface. The OC shows direct eect and indirect eect as well. e variation of total amount of clouds are aected by the OC aerosols emission.
본고는 16-17세기에 찬술된 유학자의 금강산 유람록 27편을 통해 금강산 불교를 고찰한 글이다. 그 유람록을 통해 금강산 소재의 118개 사찰과 암자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高僧이 있는 寺庵에는 많은 제자들이 함께 수행하고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남한산성 축조에 동원되면서 금강산 사찰이 텅 비다시피 했던 때도 있었다.
금강산 유람객들은 대부분 사찰을 숙식처로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유학자와 승려 사이에 교류가 있었고, 유학자들이 승려 비 문을 써주거나 글씨를 써주기도 했다. 대화가 통하는 경우에는 밤늦도 록 定慧나 理氣 등의 철학적 문제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유학자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거나 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줄일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유람객들은 승려들이 메는 가마를 타고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가마를 메는 藍輿僧은 1565년부터 1572년 사이 금강산을 유람했던 楊士彦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鄭曄과 李世龜의 유람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실제 1572년 이전 금강산이나 지리산의 유람록에서는 남여승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남여승의 관습이 확산된 시기는 16세 기 후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明宗代 文定王后 승하 후 불교 계의 위상이 하락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본 논문은 공감각적 청취의 의미를 살펴보고 노노의 《프로메테우스》를 중심으로 20세 기 후반 음악의 공감각 요소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공감각적 청취는 총체적인 감각기관을 자 극하는 소리의 청각적 수용을 의미한다. ‘청취의 비극’이라는 부제를 단 《프로메테우스》에 서 노노는 움직이는 소리인 ‘공간음향’을 실현시키고자 노력했으며, 이것을 귀를 통한 공감각 적 지각으로 이루고자 했다. 《프로메테우스》에서 공감각적 청취는 성부의 폴리포니 기법, 라이브 전자음악으로 변형된 소리, 음향의 지속, 극단적인 여린 다이내믹 그리고 스피커와 연주자들의 배치 같은 요소들로 인해 야기된다. 20세기 음악청취를 위한 작품인 《프로메테 우스》를 통해 노노는 소리의 움직임을 이루어 냈고 새로운 청취의 가능성, 즉 공감각적 청 취를 보여주었다.
본 연구에서는 경상북도 청도군 성곡리 고분군 일대에서 발견된 4-6세기 토기를 대상으로 암석 광물학적인 특성과 소성온도 및 환경을 추정하고 그 결과를 인접지역인 창녕 토기와 대조하였다. 편 광현미경 하에서 석영과 유리질 기질부가 주를 이루었으며 장석, 화산암편, 불투명광물 등이 관찰되었 다. 또한, 석영은 대부분 융식된 형태로 나타났고 기공의 일부는 비정질석영으로 채워져 있었다. XRD 분석결과 멀라이트, 적철석, 크리스토발라이트 함량이 추가로 인지되었고, SEM을 통해 관찰한 토기의 내부조직에서 고온을 지시하는 멀라이트가 토기 내 전체적으로 고른 분포를 보였다. 이러한 결과들을 바탕으로 청도 토기는 멀라이트의 결정화가 활발해지면서 스피넬이 없어지는 약 1,100 내지 1,200℃ 에서 소성되었음을 추론할 수 있는데, 이는 인접한 지역인 창녕 토기의 약 1,000℃에 비해 높은 수치 다. 또한, 멀라이트의 분포특성에서 드러난 두 지역 토기의 차이는 청도 토기가 창녕 토기에 비해 소 성시간이 더 길었거나, 가마 내에서 더 균질한 열적 환경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 논문은 19세기 말 서양 선교사들이 성서 번역과 지식 전달의 도구로 한글을 사용함으로써 한글을 재인식시키고 더 나아가 한글 공동체를 형성 하는 데에 끼친 공헌을 다루었다. 한글은 창제 이래 “양층 언어”라는 독특 한 언어 상황 속에서 한문의 하위 언어로서의 지위를 한번도 벗어 보지 못 했다. 그러나 19세기 말 중화사상이 흔들림에 따라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 졌던 한문의 지위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그 자리를 대신하여 한글은 국문 이라는 이름을 부여 받게 된다. 하지만 한글은 현실적으로 국문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지 못했고 국한문 혼용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던 것이 19세기 말 조선의 언어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조선에 입국한 서양 선교사들은 성 서번역과 문서 출판의 도구로 한글을 과감하게 선택함으로써 한글이 하나 님의 말씀을 전하고 지식을 전달하는 상층 언어로서 인식되는 데에 큰 공 헌을 했다. 한글이 처음으로 유교 경전의 내용을 담던 한자와 대등한 지위 를 부여 받게 된 것이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공헌은 단순히 한글을 재인식 시키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같은 문자 로 같은 정보를 공유하고 공론에 함께 참여하는 한글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볼 때 선교사들은 19세기 말 한글이 국문으 로 탄생되는 시기에 한글의 가치를 재인식 시키는 데에 매우 영향력 있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고 평가될 수 있다.
본 논문은 20세기 후반에 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의 결합인 전통적인 협주곡 양식을 기초로 새로움을 추구한 작품들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에서 출발하여 당대의 대표적인 작곡가인 헨체의 클라리넷 협주곡 《장미의 기적》를 극화의 관점에서 연구한 것이다.
《장미의 기적》은 독주 클라리넷과 13명의 악기주자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으로, 헨체는 이 작품을 프랑스의 작가 주네의 자전적인 동명 소설에서 내용의 일부를 차용하고 소설의 제목을 곡의 표제로 써서 이야기가 있는 가상의 무대를 핵심으로 하는 극화된 협주곡으로 창작하였다. 그는 음악 외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나 기악곡인 이 작품을 음악적으로도 동등하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독주 악기 및 몇몇의 개별 악기에게 이야기 속 등장인물의 역할을 부여하였다. 아울러 오케스트라에게는 음향적인 뒷받침과 이야기 진행 중의 극적인 상황에서 때때로 악기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게 하였다. 이렇게 구성된 악곡의 연주를 들으며 청중은 가상의 무대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를 연상하는 것이다.
헨체는 《장미의 기적》의 작곡을 통하여 극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 기악곡의 창작에 있어서독주 악기와 오케스트라의 결합인 독주협주곡 양식이 활용될 수 있는 훌륭한 예를 제공하였고, 동시에 전통적인 독주협주곡 양식이 20세기 후반에도 지속적으로 새로운 창작의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중요한 소재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논문은 19세기 말엽, 동해라는 바다 명칭이 일본해 또는 다른 명칭으로 분지되는 과정과 관련된 한ㆍ일 양국 간의 인식을 통해 식민주의적 권력과 지식체계가 어떻게 상호구성적으로 이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파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실상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연구자는 외교문서ㆍ신문기사ㆍ고지도ㆍ어업협정문서ㆍ연설문 등에 나타나는 식민주의적 담론의 구성과 그 전략의 실천, 영토 및 해양경계에 관한 지역지식 및 가치체계의 전도양상, 명칭의 역사적 근원에 대한 해석방식 등에 대해 포괄적 접근을 하였다.
19세기 말엽은 한ㆍ일 양국에 있어서 해양공간과 관련된 영토성과 역사성이 변화하는 변곡점에 위치한다. 이 시기에 유럽의 식민지 세력이 아프리카에 확대되기도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도 서구의 문명개념이 식민정책에 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전 아시아 사회가 식민지상품경제체계로 들어가면서 국가경계를 넘은 식민주의적 상업공간의 확대가 이루어졌다. 서구의 문명개념은 식민주의적 영토성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의 경우, 서구의 진화론적 지식을 수용하면서 이에 기반을 둔 문명관념을 통해 기존의 아시아적 가치체계의 전도와 ‘군국’(軍國)의 새로운 영토적 범주의 창출, 영토화된 공간에 대한 개념화 등을 정립하였다. 이 시기 일본식 식민주의를 창출한 사상가들은 식민지배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면서 기존의 동아시아 사상에 내재하던 ‘동문(同文)’, ‘일의대수(一衣帶水)’의 개념을 일본중심으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동해보다 과거 서구의 탐험가들이나 외교관들이 제작한 고지도 속에 기록된 일본해라는 바다 명칭을 새롭게 정립하는 과정,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이익선과 주권선의 설정을 통한 영토성 구축, 후쿠자와 유기치의 문명과 반개(半開)라는 일본식 진화론적 사상의 정립, 참모본부ㆍ흑룡회ㆍ수산업자 등이 일본해 명칭을 사용한 사례들은 바다 이름이 문화 정치적ㆍ군사적 차원에서 상호영향을 주면서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19세기 한국인들의 바다 개념은 연해ㆍ내양ㆍ외양ㆍ원양 등의 범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개념들은 오늘날 국제해양법에서 정한 영해와 인접수역을 포괄하는 해역과 어느 정도 유사한 범위를 나타내주었다. 그리고 당시에 동해라는 바다 명칭은 동아시아인들이 하늘과 땅, 해, 달, 별자리, 산악, 바다, 강 등을 분류하고 위계질서를 정하며 그 방위를 주재하는 신을 위치시키는 공간인식방식에서 형성된 개념이었다. 동해란 동ㆍ서ㆍ남ㆍ북의 바다 명칭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에서는 각 바다마다 신이 있다고 믿어 양양에 동해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기 위해 동해신묘를 두었다. 이 점은 동해에 대해 조선왕조의 왕권이 행해졌음을 시사한다.
당시에 한국에서는 동해ㆍ조선해ㆍ한국해로, 일부 일본인들 중에는 일본 서해로, 중국의 왕지춘(王之春)은 고려해협 등으로 불렀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말엽 일본의 명치 정부에서는 동해 대신에 일본해로 표기하거나 불렀다. 영토확장을 지향하는 식민주의자들은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확산하는 과정에서 동해를 일본해로 공칭화하고자 하였다. 19세기 말엽, 식민주의적 영토지식과 담론은 일본이 동아시아의 바다공간을 군사적 지배영역으로 전환하면서 동해를 일본화된 해양공간으로 범주화하는 과정과 관련됨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 해양공간에 대해 영토성을 부여하는 데에는 명치 정부의 관료ㆍ군부ㆍ지식인ㆍ사상가ㆍ소기업가 등의 식민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한 영토적 장소만들기와 그 지배권의 제도적 실천 등이 원동력이 되었다.
19세기 말엽, 일본해가 동해 대신에 바다 이름으로 부각되는 과정에는 일본과 한국의 지배와 피지배의 정치구조 속에서 동아시아의 전통적 바다 분류체계의 해체, 일본의 식민주의 확대를 통한 동해 지배권 확대, 일본해 명칭사용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략 등이 상호영향을 주었다. 특히 동해를 일본해로 명명함으로써 일본의 영토가 영해로 둘러싸여 있다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문화 정치적 전략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본 논문은 20세기 후반에 독주악기와 오케스트라의 결합인 전통적인 협주곡 양식의 구 조를 유지하면서 새로움을 추구한 작품들에 대한 학문적인 관심에서 출발하여 대표적인 아 방가르드 작곡가인 불레즈의 클라리넷 협주곡 ⟪소유지⟫를 극화의 관점에서 연구한 것이 다.
이 작품은 독주 클라리넷과 6개의 악기그룹이 모인 하나의 오케스트라로 편성된 독주협 주곡 양식을 바탕으로, 악곡의 구조 및 공간에서 움직여 퍼지는 입체적인 음향을 하나의 형 태로 묘사하는 오케스트라의 무대배치를 필요로 한다. 또한 무대에 고정적으로 자리하지 않 는 독주 클라리넷 주자가 고정 배치된 오케스트라 사이를 걸어서 움직이며 연주하면서 악곡 의 구조와 입체적인 음향의 근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오케스트라의 무대배치와 독주 클라리넷 주자의 움직임이 이 작품을 극화하는데 중요한 요소인데, 이들은 모두 드라마가 기초가 된 음악이 아니라 음악 자체에서부터 장면이 나오는 극화의 성격을 가 지고 있다.
불레즈는 음의 생성을 가시화(可視化)하는 연주자의 행위를 두드러지게 하고 입체적인 음향을 위해 공간을 작곡의 재료로 사용한 1950년대 이후의 새로운 창작기법의 영향을 받고, 우연성음악이 바탕이 된 열린 형식의 협주곡으로 이 작품을 작곡하여 독주악기와 오케스트 라의 결합이 음악적인 표현의 도구로서 시대에 국한되지 않는 지속성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는 것을 인식하게 하였다.
19세기 피아노음악은 소나타와 함께 성격소곡에 속하는 다양한 작품들이 있다. 처음에 성악음악 의 일부로 나타난 인터메초는 19세기 이후 피아노를 위한 성격소곡의 일부로 분류되고 있으나, 그 구체적인 성격에 관한 연구는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베토벤 이후 멘델스존과 슈만 그리고 브 람스를 거치며 인터메초는 실제 많은 작품 속에서 음악적인 역할과 의미를 가진다. 본 논문에서는 인터메초의 발생과 변천과정을 고찰하며, 두섹이나 베토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초기의 유형부터 멘 델스존과 슈만의 작품에서 양식으로서의 형성과정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브람스의 피아노음악 작품 에서 인터메초가 하나의 독립적인 양식으로 완성된 사실을 여러 작품예를 통해 확인하였다. 본 논 문에서의 결과는 19세기 피아노음악의 다양한 양식들을 연구하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을 뿐만 아 니라, 실제 연주자들에게 인터메초를 정확한 해석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외무성 홈페이지를 살펴보면 독도의 옛 이름 송도(松島)가 왜 울릉도의 옛 이름 죽도(竹島)로 부르게 되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 논리에는 무주지 선점 법리가 이용되고 있다. 1876년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관을 통해 제출된 ‘송도개척건의(松島開拓之 議)’의 송도(松島)는 ‘일본 땅’ 송도(松島)라는 이름을 차용한 것으로 이를 적용해 해군성은 울릉도를 송도(松島)로 명기하였다. 당시 해군성은 울릉도에 소속 불명확한 1도 2명의 이름을 붙여 조선의 범위에서 제외시키고 군함으로 민간인들을 실어 날랐다. 그리고 1881년 조선정부에 발각되자 일본 외무성은 1880년까지 명칭 혼란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이 침입했다고 변명하였다. 이러한 수법은 일본의 영토 침탈 수법으로 독도의 편입과정도 이와 동일하다. 1900년 러시아가 울릉도를 점거하자 일본은 일본어민이 어로 활동 중 ‘발견’했다고 유포하면서 관 주도하에 계획적으로 ‘발견’한 독도를 선점하였고 민간인을 동원한 영토 편입은 ‘영유 의사의 재확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자료 조작과 왜곡을 일삼는 일본은 국제법상의 무주지 선점 법리로 자신들의 침탈을 정당화하고 있지만 1875년 블라디보스토크 영사 세와키 히사토 「블리디보스토크 견문록」에는 이러한 일본의 영토 침략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본 연구는 미국의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을 초절주의 운동의 영향 아래서 분석한 것이다. 19세기 미국사회에서는 이상사회 실현을 위한 사회개혁운동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이 개혁 운동에 가장 앞장선 것은 기독교 지도자들이었다. 특별히 기독교 사회개혁가들은 초절주의 사상가들로부터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개혁운동을 이끌었다. 초절주의자들은 계몽주의적 자연주의와 유럽의 낭만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아 진보적 이상사회 건설에 대한 꿈을 가지고 사회개혁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들은 직접적인 사회구조 개혁보다는 개인의 도덕개혁에 초점을 맞춘 사회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비해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은 사회지향적 성격이 강했다.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은 남북전쟁 이전에는 건강한 생활습관 정착을 위한 생활개혁운동, 노예제도 폐지와 인종평등과 같은 구조개혁 운동, 도덕적 자기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남북전쟁 이후에는 노예제도가 폐지됨에 따라서 금주운동과 여권신장운동으로 방향이 전환되었다. 남북전쟁 이후에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에 영향을 끼친 사상으로는 사회진화론, 사회복음주의, 전천년주의 등이 있었다. 특별히 초절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도덕적 자기개혁을 강조한 것 또한 19세기 후반의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의 방향으로 볼 수 있다. 이 연구를 통해 19세기 미국에서의 기독교 사회개혁운동의 성격과 방향을 초절주의와 연계하여 분석 평가할 수 있었다.
본 연구에서는 X-선 회절(XRD) 분석과 주사전자현미(SEM) 분석을 통해 이온세기, 온도, 그리고 결정성장시간과 같은 이화학적 조건들이 합성된 스트론티아나이트(SrCO3)의 물리적 특성에 미치는 영향을 밝혔다. XRD 분석결과, 모든 합성 시료들은 스트론티아나이트의 단일 광물인 것으로 나타났다. 배경전해질이온 NaNO3를 사용한 반응용액의 이온세기와 합성온도가 증가할 때, 합성된 스트론티아나이트의 결정도는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SEM을 이용하여 합성된 스트론티아나이트 결정의 크기와 형상을 규명한 결과, 결정크기는 이온세기와 온도가 증가할 때 증가하며, 결정형상은 막대 또는 수지상에서 점차 주상으로 변화되는 것이 관찰되었다. 결정성장시간에 대한 영향은 성장시간이 길어질수록 결정크기가 증가하고 막대 또는 주상 단일결정들의 집합체인 구형 결정형상이 관찰되었다. 이러한 결과들은 합성 시 스트론티아나이트의 결정도 및 결정형상이 결정 생성당시의 이화학적 조건에 크게 영향 받고 있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본 연구 결과는 다양한 조건에서 생성되는 스트론티아나이트 결정들의 물리적 특성들을 예측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된다.
이 논문은 조선후기 산수 유람의 실태와 그 문화적 양태 가운데 지리산 유람이 보이는 특성을 살피는 데 목적이 있다. 특히 유람환경에서 변화가 보이던 18세기 후반 지리산 유람의 양상에 주목하였다.
18세기는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라 유람의 성격과 환경에 있어서도 그 전과 다른 현상들이 발견되는 시기이다. 유람문화가 크게 유행하면서 유람가라고 지칭될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였으며 관련 문예도 풍부하게 창작되었다. 또한 유람주체들의 계층과 성격도 다양화되고 원거리, 장기간 여행이 늘어났다. 이와 더불어 화폐를 소지하고 주점을 이용하는 여행환경의 변화도 일어났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영남지역의 사족들은 자신들의 역사와 전통을 보유한 지역내 명승 유람에 더욱 몰두하는 현상을 보였고 지리산은 그 대표적 유람지였다. 이는 영남지역의 사족이 처했던 정치적 상황과 지역의 전통적 문화특성이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선후기 지리산 유람기의 작성자는 대부분 근방의 처사들이었다. 이들 유람에서 보이는 특성 중 하나는 집단적이며 장기적 여행이 이루어진 점이다. 지리산 유람이 이 지방사족들의 집단적 遊樂로서 기능하면서 그들의 사회적 연망을 재확인하고 확대하며 결속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이 유람을 하면서 酒店을 이용하는 장면이 전보다 자주 등장하는 점도 흥미롭다. 18세기 후반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보여주는 일면이다. 이 밖에 지리산 유람자들은 지리산이 남방의 祖宗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천왕봉에 오른 소회를 토로했다. 지리산의 위상에 자부심을 갖고 지방 사족으로서의 자의식을 투영하였음을 엿볼 수 있었다. 이 논문은 이제까지 지리산 유람기의 분석에서 간과되었던 시대적 맥락과 지역적 특수성을 살피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러한 시도가 지리산 유람문화의 역사적 전개를 탐구하는 데 일조하길 기대한다.
조선후기 유학자의 산수 유람기 속에는 사찰이나 승려에 관한 기록이 다수 등장한다. 이 기록들은 제삼자의 눈에 비친 사찰과 승려의 실상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에 대한 연구가 미흡했을 뿐만 아니라, 유람자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指路僧이나 가마를 메는 藍輿僧에게 지나친 관심을 둠으로써 抑佛의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유람기가 이해되어온 측면이 있다. 하지만 유람기에는 여러 修行僧의 모습도 함께 등장하기 때문에 그 수행승에게 시선을 돌리면 당시의 불교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조선후기 지리산에는 많은 名僧들이 주석하며 제자들을 지도하였다. 본고에서 다룬 16-18세기 유람기에서도 그들의 법명이 등장한다. 가령, 浮休善修, 逍遙太能, 靑梅印悟, 碧巖覺性 등은 당대 최고의 禪師로서 불교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다. 유람기에서는 이들을 따라 공부하는 승려들이 수십에서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깊은 암자에는 長坐不臥하며 수행하는 수행승의 모습도 그려지고 있다.
유학자들은 유람 도중에 만난 高僧들과 대화를 나누며 밤을 새우기도 했다. 그들의 대화 가운데 心性論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1790년에 李東沆은 유람 도중에 만난 승려 道原과 理氣心性에 관해 대화하였고 그 대략적인 내용이 그가 쓴 유람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보건대, 당시 불교계에서 벌어지고 있던 심성에 관한 논쟁이 유학자와 승려의 교류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This study investigates the direct and indirect effects of anthropogenic aerosols emission on East Asian climate during the winter (December-February) for the period of 1961-1990. Using a globally coupled climate model, HadGEM2-AO, we compare ensemble means between historical runs with and without aerosol emissions. During the 20th century the major contributions to the total Aerosol Optical Depth (AOD) over the East Asian region came more from anthropogenic aerosols than from natural aerosols. The increasing total AOD induces the negative radiative in a clear-sky condition, leading to cooling the surface. Indirect effect contributes to the increase in the total cloud fraction, resulting from the increased low-level stratus and stratocumulus clouds. Consequently, the net surface radiative flux becomes negative due to the direct and indirect effects of aerosols. Land surface cooling seems to enhance the landsea pressure gradient in the East Asian wintertime climate, and the associated wind anomalies induce the regional wintertime precipitation amount changes over South China.
16-17세기 초반은 南冥 曺植(1501-1572)이 학파를 형성하고 그의 제자 및 재전제자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시기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남명학파가 심각한 타격을 입고 학문적ㆍ정치적 활동에서 전면에 나서기 어 려웠던 점을 생각할 때, 이 시기는 남명학파의 전성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16-17세기 초반에 창작된 남명학파 학자들의 箴 작 품을 대상으로 그 속에 담긴 수양론을 파악해보고자 시도했다.
箴의 효용성에 주목해 작품의 주제와 내용을 분석하여 수양의 실천 양상 을 분류한 결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첫째는 수양론의 핵심 사상을 제기하여 그것에 따른 실천 의지를 촉구한 작품군이다. 이것은 보다 근원적ㆍ본질적 측면에서 자신이나 타인을 규계하는 것이므로, 치료 방법중에서 原因治療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특정한 병폐나 구체적인 실천 덕목을 적시하여 그것에 따른 수양 방법을 모색한 것으로, 어떤 증상에 대해 직접적인 처방을 하는 對症治療의 명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셋째는 어 느 시기나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새롭게 전환하려는 시도를 할 때 지어진 작품으로, 이것은 주위 환경이나 생활 습관을 개선하여 병을 호전시키는 改善治療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3가지 유형 가운데 편수가 가장 많은 것은 對症治療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총 10편이 여기에 속한다. 原因治療는 5편이 있으며, 改善治療는 4편이다. 곽재우의 「調息箴」은 호흡법에 관한 내용으로 다른 箴 작품의 일반적인 성 향과 구별되어 기타로 분류했다.
16-17세기 초반 남명학파 학자들이 창작한 箴 작품은총 20편인데, 비슷 한 시기에 지리산권의 서부인 호남지역에서는 箴 작품의 수량이 6편 정도에 불과하며, 그 내용도 2편이 임금을 위해 지은 官箴이고 나머지 4편은 경전 을 해석하거나 전대의 작품에 차운한 것이다. 이처럼 호남지역의 箴 창작 양 상과 대비해 보자면, 남명학파 학자들의 箴 작품은 수양의 내용 및 방법을 서술한 것이 매우 구체적이며 실질적이다. 따라서 16-17세기 초반 남명학 파의 箴 작품은 수양 방법을 제시하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나타난다 고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