댕디(Vincent d’Indy, 1851-1931)의 서곡3부작 《발렌슈타인》(Wallenstein)에 나타난 ‘표 제적 연주회용 서곡’의 장르적 의미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오페라 의 극적 내러티브를 악곡구성에 반영하던 19세기 오페라 서곡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이 작 품은 일종의 ‘음악적 드라마’로 이해될 수 있다. 둘째, ‘표제적 연주회용 서곡’ 작곡가들은 ‘서 곡’이라는 장르 명칭과 함께 베토벤과 바그너 등의 ‘표제적 서곡’의 전통을 따라 리스트가 교 향시에서 점차 소멸시킨 것, 다시 말해 반복의 원리에 입각한 소나타악장 형식 안에서 표제 를 다양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서곡들에 나타난 표제와 악곡구성 간의 관계는 19세기 베토벤에 의해 시작되고 바그너를 비롯한 많은 작곡가들에 의 해 발전했던 전통적인 ‘표제적 서곡’의 역사 안에서 고찰될 필요가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life and works of Sébastien Castellion, a French humanist and reformer of the 16th century. The reason why I am concerned about Castellion is that his idea of tolerance is very suggestive to us who live in religious plural society. In order to fulfill this goal I first introduce a dramatic but tragic life of Castellion briefly, and then examine his central idea through his works. In particular, I will focus my interest on the tolerance issue of the 16th century that broke out between Calvin and Castellion concerning the death of Michael Servetus in 1553.
In this paper, I look into Castellion’s several works dealing with tolerance problem: I select five primary works to reveal Castellion’s tolerance thought: “Preface to the Latin Bible, Dedicated to Edward VI,” “Concerning Heretics,” “Reply to Calvin’s Book,” “Counsel to France,” and “Concerning Doubt and Belief.” Castellion was a prophet of his time, a rationalist before Rationalism, and an advocate of religious tolerance in an age of intolerance. He was certainly ahead of his time. I hope this study will provide a momentum for sincere and academic concern about Castellion and his tolerance thought.
20세기는 조성의 해체와 함께 화성보다는 대위적 사고가 우위를 갖게 된 시대이다. 본 논 문은 20세기 작곡가들이 대위적 짜임새를 형성하기 위해 구사하고 있는 다양한 방식들 가운 데 대표적 한 가지 예인 비조성 푸가를 통해 현대 비조성음악에서의 대위적 텍스처를 고찰한 다. 이를 위해 ‘대위’의 음악사적 개념과 대위적 음악의 특징들을 살펴보고, 20세기 작품에서 의 대위적 양상을 수직적 음정의 처리에 대한 ‘공통관습의 부재’라는 측면에서 논의한다. 이 어서 ‘푸가’의 음악사적 개념과 조적 관계성이 부재하는 현대 비조성푸가의 특징과 한계점들 을 고찰함으로써 단순 모방기법과 구별되는 푸가만의 특징이 비조성푸가에 존재하는가에 대 한 비판적 논의를 전개한다. 아울러 20세기 비조성푸가의 유형들을 세 가지로 분류해, 전통 적 푸가의 외형적 특성을 유지하나 조적 관계성을 실제로 갖지 않는 푸가로부터 현대적으로 새롭게 재해석된 실험적 푸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 예를 통해, 비조성푸가의 한계점과 이에 대한 작곡가들의 대안모색 방식들을 살펴본다.
음악사 서술에서 베토벤에 대한 포괄적 조명은 20세기 초 이후에 일반화 된다. 본 연구는 20세기 초 대표적 음악사 문헌인 리만의 『베토벤 이후의 음악 역사 (1800-1900)』와 해도우 의 『비엔나 시대』에서 베토벤을 어떻게 조명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하였다. 각 문헌에 나 타난 서술 관점 및 방식의 차이점을 정리해 본 결과, 전반적으로 리만의 방식은 세기별 구분 에 따른 대가 중심의 연대기적 서술 형태를 보이며, 해도우의 것은 양식적 공통성에 따른 악 파 중심의 해석 방식을 취한다. 따라서 베토벤은 리만에게서 19세기를 이끈 새 시대의 개척 자로 조명되며, 해도우에게서 비엔나 악파의 마지막 대가로 채색된다. 이 두 문헌은 키제베 터가 선보인 음악 발달 관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세이어 및 그로브의 연구 물을 참조한 해도우의 문헌이 베토벤 음악에 대한 가치 판단에 보다 적극적이다.
18세기음악가들은 19세기 낭만주의 음악가들과 달리 궁정이나 시 의회에 속한 철저한 직 업 음악가들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18세기의 음악후원은 19세기 음악후원의 형태나 개념과 는 달랐다. 19세기 음악후원의 모습도 다양한 형태지만, 기본적으로 예술가를 지원함으로서 ‘예술작품’이 창작되는 것을 후원하는 양상을 띠었다. 하지만 18세기의 음악 후원의 모습은 왕이나 영주가 문화 활동을 즐기기 위해 직업 음악가나 예술가들을 궁정에 고용하는 형태였 다. 그 과정에서 음악 행위가 이루어지고 작품이 창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8세기 남부 독 일 궁정의 음악들은 매우 실용적이면서 기능음악의 성격을 띠고 있다. 궁정의 음악후원도 지 금 사용하는 후원의 개념보다는 고용에 대한 ‘보수’ ‘연봉’ 그리고 ‘보너스’의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만하임 궁정과 같이 정치, 경제적인 안정 속에서 영주가 문화 예술을 사랑하고 그 가치를 인식하면 음악 문화가 크게 번성하고 음악사에 뚜렷이 기록되었다. 반면에 주변 정치적 상황 이 불안정하고 국내 경제가 불안할 때는 문화 예술이 쇠퇴하는 경우를 슈투트가르트와 뮌헨 궁정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18세기의 궁정의 문화와 음악에 대한 후원의 개념은 현대의 기업들이 예술분야와 공익사 업을 지원하는 메세나 개념이 아니라 원래 로마시대 문화예술을 지원하던 로마제국의 정치 가 마에케나스의 정책에 가깝다. 다시 말해서 기업 이윤의 사회적 환원 의미에서 예술분야를 후원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나 영주가 자신의 궁정에서 음악을 즐기고 활용하기 위해 예술가 들을 고용하는 의미이다. 예술가와 음악가들의 고용이 안정되고 지원이 확대될수록 보다 뛰 어나고 가치 있는 예술 창작이 이루어짐을 18세기 남부 독일의 궁정음악을 통해 알 수 있다.
우리 세대는 일제강점기에서 해방된 후, 이어진 혼란기에 6․25전쟁을 치루는 등 어려운 기간을 살아 왔다.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때였다. 그런 때 나는 생물학자를 꿈꾸었다. 다행히 서울대학교 생물학과에 입학하여 생소한 생물학을 배웠다. 세포학, 유전학 혹은 생리학을 배우면서 더욱 더 생물학에 매력을 느꼈다. 그래서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새로 나온 항생제인 스트렙토마이신이 생쥐 백혈구 수 혹은 백혈구의 운동능에 미치는 영향을 관찰한 실험결과를 정리한 논문으로 석사과정을 마쳤다. 1956년이다. 그 때로는 매우 첨단적 과제였다. 그러나 실험실 연구는 더 이상지속하기 어려워, 종이와 연필로 가능한 생물학을 선택했다. 그것이 우리 한국인의 인구문제, 유전형질 그리고 출생성비연구였다. 차차 실험실 사정이 나아짐에 따라 실험실연구로 복귀하였다. 출생성비연구 과정에서 성분화 혹은 성결정기작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64년 미국인구협회 의생물학부 연구장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부설생식생물학연구소에서 2년간 보냈다. 이 연구소는 기관배양연구로 독보적인 Biggers 박사가 연구소장이고, Brinster 박사, Whittingham 박사 등이 배양 중인 생쥐배아의 신진대사에 관한 연구를 집중적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나는 배양 중인 생쥐난소로부터 배란을 유도하는 실험으로 소일하였다. 배양중인 생쥐난소로부터 눈이 부실 정도의 관택을 내며 배란되어 나오는 난자를 보며 큰 감동을 느꼈다. 귀국할 때 록페재단으로 부터 약 1만5천 달러의 연구비를 얻었고, 이것으로 실험실에 기관배양시설을 꾸몄다. 시설 완비까지는 1 년여가 걸렸다. 그 사이 생쥐의 안전방을 이용한 난자의 성숙, 배아의 발생에 관한 연구로 시간을 보냈다. 생쥐 안전방이 배양액과 같은 성분이어서 배아발생연구에 매우 적절함을 알았다. 기관배양시설이 완비된 뒤 이를 이용하여 난자성숙 기작, 배아발생 및 분화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였다. 1971년부터 2년간 WHO의 연구비로 두 번째 유학을 떠났다. 처음 4개월은 죤스 홉킨스 대학에서, 다음 1년 2개월은 하버드 의과대학의 인간생식생물학연구소에서 그리고 나머지 6개월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생리학연구실에서 보냈다. 하버드에 있는 동안 cAMP가 배양중인 난자의 성숙을 가역적으로 억제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케임브리지대학에서는 원거리 수송이 가능한 난자 혹은 배아의 미세관배양법을 창안하였고, 실제로 발생 중인 배아를 장거리 이송하는데 성공하였다. 나의 연구활동은 이 때가 고비가 된다. 서울대학교가 관악으로 옮긴 뒤 자연과학대학 학장을 맡고, 그 뒤 부총장, 끝내는 총장의 직책에 이른다. 대학의 행정직에 있는 동안 연구실은 그대로 유지되며, 대학원생들이 꾸준히 실험실을 지켰다. 그런 사이 실험결과도 다수 발표할 수 있었다. 교실의 연구 주제도 점차 호르몬과 연관된 분야로 옮겨졌다. 학장 재직동안 AID차관사업을 주관하며 기초과학연구 질을 향상시키는 일에 전력을 쏟았다. 1982년에 유전공학학술협의회 회장으로 선임되어 우리나라 유전공학 및 생명공학 육성에 공헌하였으며, 그 뒤 바이오산업협회 회장으로서 우리나라 바이오산업 발전에 힘썼다. 1993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제백신연구소 사업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다. 최초 유치단계 때 위원장으로, 유치 된 후에는 연구소 이사로, 혹은 소장특별고문의 직책으로 연구소 운영에 직접 관여했고, 그 뒤
한국후원회 이사장으로 그리고 최근 후원회 상임고문의 직책을 맡고 있다. 그 밖에 대통령과학기술 자문회 위원장으로, 과총회장으로, 그리고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 등으로 과학기술 발전에 헌신하였다. 돌이켜 보면 나의 반생은 발생생물학 분야의 연구에 바쳤고, 나머지 반생은 우리나라 과학 특히 생물학 분야 발전을 위하여 봉사한 기간이다.
본 논문은 17세기의 음악적 판타지에 관한 논의들과 ‘멜랑콜리’ 개념을 통해 광범위한 문 화적 맥락 안에서 음악 창작의 주제를 고찰하였다. 멜랑콜리란 전통적으로 영감이나 천재성 과 연관되어 왔고 음악에 있어서는 류트 악기나 오르페우스 신화와 함께 언급되곤 하였다. 17세기의 주요 음악 문헌들은 경험주의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하여 감정의 표현과 소통, 이를 위한 규칙으로부터의 일탈이 예술적 가치를 얻게 되는 과정 속에서 예술적 자유와 판타지 장 르에 관해 논하고 있다. 이 시기 멜랑콜리는 이러한 예술적 자유를 조명하는 하나의 구체적 인 메타포로 활용되었다. 이처럼 문헌상 발견되는 판타지의 정의들, 멜랑콜리의 다양한 개념 들과 함께 판타지 장르로 분류되는 작품들인 프렐루드, 토카타, 요한 야콥 프로베르거의 멜 랑콜리를 주제로 한 플랭트를 중심으로 17세기의 멜랑콜리 미학을 살펴보았다. 투고일자:
이 연구에서는 관측 자료에 근거하여 20세기에 일어난 전지구적인 Köppen 기후구 면적의 변화와 사막화의 특징을 조사하였다. 5개 대기후구 면적의 변화를 분석한 결과, 대체로 따뜻한 기후구(특히 A 기후구)의 면적은 증가한 반면에 찬 기후구(특히 E 기후구)의 면적은 지속적으로 감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C/D 기후구 면적의 경우 1960대 이후부터 비교적 뚜렷한 증/감을 나타내었다. 전지구적 기온 상승의 추세 패턴을 감안할 때, 이러한 기후구의 변화는 지구 온난화의 직접적인 결과로 사료된다. 건조 기후구(B 기후구)의 면적은 1970년대 이후부터 급속한 증가를 나타내었는데, 1960년대 대비 1990년대에 그 면적비가 약 2% 정도 늘었다. 이 중에서 사막(BW) 기후구의 경우, 20세기 말기(1991~2000년)의 면적이 1961~1990년 대비 1,320×103㎢정도 확장되었는데, 이것은 대부분 스텝(BS) 기후구가 더욱 메말라 일어난 것으로 밝혀져 사막화의 특징을 보였다. 또한 사막화의 지역적 특징을 살피기 위해 전 세계의 주요 사막 지역 다섯 곳을 선정하여 분석하였다. 그 결과, 북아프리카 지역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1950년대 이후 가장 뚜렷하고 지속적인 사막화가 일어났음을 밝혔다. 사막화의 한 원인으로서 지구 온난화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해들리 순환의 강도 변화를 조사하였다. 북반구 겨울철 해들리 순환의 강도는 지구 온난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6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하였다. 해들리 순환 강도의 증가와 이 기간 동안 급속히 진행된 전지구 아열대 사막의 확장은 서로 일관성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된다.
「神明舍圖」와 「神明舍銘」은 南冥 曺植의 학문적 특징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南冥學의 핵심 사상이 담겨 있는 圖說이다. 그런데 后山 許愈가 「神明 舍圖銘或問」을 지어 이것에 관한 해석 작업을 시도하기 이전까지 300년 동안 은 어느 누구도 그 내용과 의미를 밝히려고 하지 않았다. 后山은 「神明舍圖銘或問」을 지어 南冥의 「神明舍圖銘」을 상세히 해석하고 그 것이 가지는 유학사적 의미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神明舍圖銘」에 南冥의 心學이 오롯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南冥의 「神明舍圖銘」에 대한 주해 작업을 경상우도 학자들의 공적 안건으로 발의함으로써, 南冥의 학문과 수양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南冥學의 요체를 분명하게 파악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므로 「神明舍圖銘或問」은 后山의 개인적 저술이라는 의미를 넘어, 당시 慶 尙右道의 학자들이 학문적인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남명학을 조명하는 촉발점 이 되었으며, 그 작업에 그들의 학문적 역량을 집결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 였다.
The subject of this thesis is the history of the iconoclastic controversy that originated in the 8th century Byzantine church. Christian art flowered in the time of the Emperor Justinian and in the 8th century the iconoclastic controversy arose. The full-dress iconoclastic controversy started at the beginning of the 8th century, was dealt with by successive General Councils until the matter was solved when the 7th Nicene council of 787 approved the veneration of images.
These became idolatry, threw church and society into chaos so that the Pope and the emporer and their supporters over the course of two centuries developed their own Christologies. At that time images were at the heart of the people(Minjung)’s faith. There is always a tendency for religious feelings to be transformed by images.This writer in concentrating on the 8th century controversy has reviewed its historical background, occasion and results and has attempted to deal with the question of images in relation to present day church worship.
Idolatry through worship of symbols finds fulfillment in Eucharistic theology for that visualizes the presence of Christ.
老柏軒 鄭載圭(1843-1911)는 1885년 后山 許愈와 함께 南冥의 講學處인 雷 龍亭을 중건하여 南冥의 유적이 복원되고 南冥學이 천양되도록 노력하였다. 1887년에는 8월 18일부터 28일까지 10박 11일의 기간 동안 智異山을 등람하 면서 남명에 대한 추념과 경모를 가졌으며, 자신의 학문과 삶이 새롭게 진작되 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1889년 后山 許愈가 남명학의 핵심을 분명하게 드러 내기 위해 「神明舍圖銘或問」을 지은 것에 동감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 를 자세히 개진하였다. 노백헌이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정 리해 볼 수 있다. 하나는 同鄕의 先賢을 後學으로서 마땅히 선양해야 한다는 책 임감이다. 다른 하나는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당시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였고, 유학사적 道統論 속에서 그 의미를 확 신하였기 때문이다. 전자는 노백헌 자신이 생장하고 활동한 三嘉縣이라는 지역 과 그것에 연유한 지역적 정서에 바탕한 것으로, 개인적·지역적 책임감이다. 후 자는 유학사의 맥락 속에서 남명의 위상을 파악하여 남명의 선양이 가지는 의 미를 확신한 것으로, 시대적 상황의 인식과 유학사적 도통의 계승 의지이다. 19세기 강우 지역 학자들은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중심축으로 삼아 분열된 각 학파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유학의 근본 정신을 회복하고 실천 의지를 고양하여 국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망을 바라보려 노력하였다. 노백 헌의 남명학 계승은 이처럼 19세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강우 지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이해한 가운데 그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최근 22년간(1986-2007년)의 기상청 자료를 이용하여 태풍의 발생 해역별(A해역: 캐롤라인 마샬군도 부근 해역, B해역 : 북위 20도 이북 해역, C해역 : 필리핀 근해, D해역 : 남중국해)로, 태풍의 발생 수 및 세기에 관하여 분석하였다. 태풍의 연평균 발생 수는 26.3개로, 모든 해역에서 공통적으로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특히, A해역에서 감소 추세가 현저하고, D해역에서는 감소 추세가 미미하다. 태풍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해역은 A해역(연평균 13.8개, 전체의 약 53%)이고, 그 다음은 C해역(5.6개, 약 21%), B해역(3.8개, 약 14%), D해역(3.1개, 약 12%)의 순서이다. 태풍의 세기는 A해역에서 발생하는 것이 가장 강하고(중심최저기압의 평균 951hPa), 그 다음은 C해역(970hPa), B해역(975hPa), D해역(983hPa)의 순서이다. 그리고 전 해역을 대상으로 하여 연평균 중심최저기압의 시계열 분포를 살펴보면, 태풍의 중심최저기압은 미세하게 하강하는 추세를 보인다. 이는 태풍의 세기가 서서히 강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금번의 연구 결과는 지구 온난화에 따른 태풍의 수와 세기의 변화에 대한 여러 수치실험 결과와 일치한다.
19세기 영남 학계에는 李滉 이후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온 ‘心은 理氣가 합해 있다’는 설을 굳게 지키는 학자들이 아주 많았다. 이러한 학계의 경향에 정면으 로 맞서 李震相은 心卽理설을 제창하였다. 이진상의 제자인 郭鍾錫은 당시 영 남학계에서 ‘異端’으로 비판받았던 스승의 心卽理설를 잘 계승하여 변호하고 발전시켰다. 곽종석은 心學의 요체인 知와 敬에 매우 주목하였다. 그는 情(사단칠정)이 發 할 때에 知와 敬이 그 情의 발함을 主宰한다고 보았다. 知와 敬에 대한 그의 깊 은 탐구는 어려운 시대를 구제해나갈 이론을 眞知와 實踐이라는 두 측면에서 확보하려는 학문적 노력으로 이해된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곽종석이 明德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하였다는 점이다. 그는 당시 학계에서 명덕을 心으로만 이해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는 명덕은 心과 身, 性과 行을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는 명덕 을 心이라고만 해버리면, 大學의 八條目 중 ‘正心’에서 ‘明德’을 밝힌다는 일 이 마쳐지게 되어버려 그 뒤에 이어지는 ‘修身’은 혹처럼 붙어 있는 것이 된다 고 하였다. 그는 명덕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통해 세계 각국의 사상과 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런데 19세기 말부터 곽종석은 서구의 公法과 哲學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나타내었다. 서구의 공법과 철학과 과학에 대한 그의 관심의 증대와 더불어, 1919년에 그의 理學은 조선의 독립과 평화를 지향하는 방향으로 변모하였다. 그는 仁義에 근거한 공법질서와 功利의 私心이 없는 서구의 철학과 그것에 토 대를 둔 서구과학을 인정하며, 하루빨리 조선의 독립과 평화가 성취되기를 바 랐다.
This article aims to explore John Wesley’s position upon the slave trade and slavery in England of the 18th century and his influences on the campaign for ending the slave trade and slavery.
John Wesley, as a leader of awakening movement, was concerned with the personal conversion and the revival of faith and church. Regarding his social and political position, he as a Tory was royal to the english monarch and was against American Independence. Accordingly, he has been seen as conservative in terms of social perspective. It has sometimes caused the speculation that John Wesley was not interested in ending the salve trade and slavery, which is one of the greatest atrocities of civilization at his times.
That is the case with the founder of North American Liberation theology and a leading Methodist theologian, James Cone. It is really ironic that he wrote, “The Wesley that has come to us seems very white and quite British, and that ain’t no good for black people who know that the Englishmen are the scoundrels who perfected the slave trade,” and indicated, “one does not get the impression that slavery was one of the burning issues on Wesley’ mind.”
Actually, the early mission to Georgia in America brought John Wesley into direct contact with black slaves there. Since then, his concern about the slave trade and slavery had not disappeared in his mind, even though he more concentrated himself on the revival movement ignited by his own conversion. We can find out his criticism upon the slave trade and slavery in his Journals and Diaries, letters, and his Writings.
Especially, his tract “Thought upon Slavery,” which partly drew on some writings by Anthony Benezet and Granville Sharp, had a great influence upon the methodists and mass. In his small book, he harshly criticized the slave trade and slavery itself as sum of all inhumane evils. His criticism was based not only on the Bible, but also on the general natural law and justice. Besides, he encouraged some leader of antislavery campaign to continue to do his action. Among these was included William Wilberforce, who spent a lifetime passing the bill for abolishing the slave trade and slavery through Parliament. After death of John Wesley, his follower and methodists still supported William Wilberforce to achieve his go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