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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2018.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19세기 중엽 상하이가 개항된 이후 중국을 대표하는 근대 도시로 성장하는 가운데 동북아해역 지식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어가는 과정에 대해 살펴본다. 상하이가 근대 동아시아에서 서학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중심도시가 된 데에는 서양인 선교사들의 역할이 컸다. 이 서양 선교사들은 여러 단체들을 만들어 중국인들에 대한 선교와 지식 보급을 목적으로 교육 및 출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생산된 한역서학서는 상하이를 비롯하여 중국의 각지로 전파되었고, 심지어 조선과 일본에도 전해졌다. 이렇게 하여 상하이는 근대 동북아해역 지식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막부말부터 메이지 시기에 이르기까지 일찍부터 상하이와의 무역을 통해 상하이에서 생산되는 한역서학서를 많이 수용했지만, 조선의 경우는 쇄국정책으로 인해 단지 베이징과의 육로 교통망을 통해 한역서학서를 수용하였고 그것의 종류 역시 대단히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조선 역시 시기는 일본보다 다소 늦지만 개항이후 관료들이 상하이를 방문하고 또 선교사들에 의해 상하이에서 생산한 서학이 수용되었다. 또 이처럼 상하이에서 생산된 서학이 중국을 비롯해 조선과 일본에 전파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통망이 중요하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동북아해역의 교통망에 대한 연구는 바로 상하이 지식네트워크 형성에 대한 연구의 토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5,200원
        22.
        2018.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18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신고전주의, 그리고 낭만주의로의 진행에 근거하여 당시에 나타났던 사조들 중 하나인 네오르네상스란 개념이 원래는 건축적, 회화적으로 독일에서 먼저 사용되었으며 이후 이탈리아가 동일한 진행을 따르고 있음을 밝힌다. 나아가 19세기 유럽 예술계에서 다소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던 이탈리아의 19세기 대표 화가로 프란체스코 아예즈를 주목하고 이 화가의 작품을 통해 당시 이탈리아의 낭만주의 미술이 고전에 상당히 근거하고 있으나 전유럽 공통의 낭만주의적 경향을 동시에 띄고 있음을 밝히는데 의의를 둔다. 또한 아예즈의 회화가, 니체가 구분한 세 종류의 역사 중에서 가장 건강하고 발전적인 성향인 ‘비판적 역사’의 방향을 따르고 있음에 주목한다
        5,800원
        24.
        2017.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조각 작품 <14살의 어린 무희 Little Dancer Aged Fourteen>(1881)에 대한 연구이다. <14살의 어린 무희>는 그녀의 정체성을 매춘부로 드러냈으며, 이에 제6회 인상파전에서 발표되었을 당시 엄청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드가가 <14살의 어린 무희>의 정체성을 매춘부로 드러내기 위해 적용했던 이론은 당시 유행했던 발레-팬터마임과 관상학이었으며, 이 두 이론을 적 용했던 이유는 둘 다 인간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14살의 어린 무희>의 발레-팬터마임에서 차용된 오만함의 자세는 오페라를 찾은 부르주아 남성들과 은밀한 관계를 맺었던 어린 무용수의 부정적 이미지를 함축하여 암시했고, 관상학에서 범죄자나 매춘부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으로 정의한 악덕 관상을 어린 무희의 얼굴에 새김으로써 무용수라는 직업 이면의 매춘을 상상하도록 했다. 예술작품 안에서 다양한 형태의 무용수 묘사는 고대에서부터 지속되어 왔지만, 근대 하층 노동자 계급의 표상인 파리 무용수의 조각적 형태의 매우 사실적인 재현은 드가의 <14살의 어린 무희>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14살의 어린 무희>는 매춘부라는 주제를 당시의 사회 문화적 담론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전통적 미술의 기준에 도전했다. 결국 드가의 <14살의 어린 무희>는 근대 생활의 양상과 그 시대의 이슈를 드러냈던 것 이었다.
        8,100원
        25.
        2017.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후기 실학자의 일본인식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선행연구가 있지 만 조선통신사의 일본 왕래가 저조해진 19세기에 활약한 실학자에 대한 그것은 비교적 양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그 중에서 최한기 (崔漢綺)와 이규경 (李圭景)의 일본인식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보았다. 최한기의 일본관은 세계 각국의 지리, 제도, 산물, 역사, 종교, 풍토, 문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지구전요 (地毬典要)󰡕에 집중적으로 나 타나 있다. 그 저본은 세계지리서인 『해국도지 (海國圖志)』와 『영환지략 (瀛環志略)』이지만 두 책의 일본 기술이 미비한 부분을 신유한 (申維翰) 의 『해유록 (海游錄)󰡕에 의거해서 보충했기 때문에 그의 일본에 관한 지 식・이해는 신유한에 의거하고 있다. 최한기는 일본의 세습제도에 대해 “어찌 인간의 재능에 한계가 있겠 는가? 실로 정교 (政敎)의 구속에 의한 것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냉정하고 공평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의 일본 정보・지식은 상대적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나 ‘기학 (氣學)’이라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전통적 유교의 화의사상이나 역사적인 적개심, 멸시관도 극복할 수 있었다. 한편 이규경은 규장각검서관 (奎章閣檢書官)이자 『청령국지 (蜻蛉國 志)󰡕라는 일본에 관한 저술도 있는 실학자 이덕무 (李德懋)가 할아버지 였으므로 일본에 대해서는 최한기보다 풍부한 문헌과 지식・정보와 접 할 수 있었다. 그는 실제로 그것을 활용해서 일본의 신화, 역사부터 생활 문화와 속신 (俗信)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식을 그의 저서 󰡔오주연문 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 속에서 기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규경은 일본인을 가리켜 ‘도이 (島夷)’, ‘왜이 (倭夷)’, ‘흑치 녹정 (黑齒綠頂)’ 등의 멸칭을 거리낌 없이 쓰고 그 방대한 지식을 가지 고도 일본이나 일본인에의 멸시관, 차별의식을 고치고 극복하기에 이르 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나 사고전서 (四庫全書)에도 수록된 일본의 유학 자 야먀노이 테이 (山井鼎)의 『칠경맹자고문 (七經孟子考文)』의 고증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듯이 이규경은 그러한 차별의식을 옆에 두고 일본의 문물이나 학술의 좋은 것을 평가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9,900원
        26.
        2017.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풍경식 ‘자연’에 펼쳐진 무대에서 연주되는 모든 음악으로 정의될 수 있는 19세기 독일 정원음악 은 도시의 산업화로 독일 도처에 정원이 들어서면서부터 탄생된다. 이에 시민들은 도심의 좁고 밀 집된 실내공간에서 이루지 못한 ‘감성적 활동’을 자연에서 음악활동으로 시도하여 정원음악이 보급 된다. 당시 가벼운 작품들로 구성된 정원음악으로는 심포니, 접속곡, 춤곡, 합창, 민요 등이 선호되 며 정원악기로는 플롯, 기타, 리라기타, 에올스하프, 하프, 타악기 그리고 관악기그룹 등이 사용되어 진다. 그리고 '즉흥적 표현들', 풍부한 음향 그리고 감상적 선율 등으로 정원음악의 다양한 특징들이 표현되어진다. 이런 정원음악은 19세기 독일 시민들의 생활공간으로 확장되어진 정원문화의 결과물 로 자연의 시각적 그리고 음악의 청각적 소통을 잠재로 한 개인의 ‘생활정서음악’이자 타인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오락음악’으로 사회적 가치를 갖는다. 따라서 19세기 독일 정원은 정원 그 자체의 의 미와 그에 따른 공간이 정원의 기능성을 높이면서 독일 시민들의 음악문화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 하여 자연이라는 공간에서 기대할 수 있는 ‘문화적 소리’를 담아낸 정원음악의 보편성을 성립시킨다.
        6,600원
        28.
        2017.09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19세기 극락세계의 모습을 불화로 가시화한 <極樂九品圖> 에 대해 조성배경과 특징, 그리고 圖像의 연원을 구명한 글이다. 19세기 에는 전체 화면을 가로와 세로로 분할하여 나누고, 극락의 세계과 왕생장면을 그린 독특한 형식의 불화가 출현하여 近畿지역 왕실의 願堂을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이러한 불화를 <극락구품도>라고 하는데 이 글 에서는 서울 興天寺에 봉안된 <극락구품도>를 통해 불화의 도상과 특 징을 살펴보았다. 흥천사는 19세기 후반 고종의 私親이자 실권자였던 興宣大院君李昰 應(1820∼1898)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佛事가 후원되었다. 이하응의 후 원에 힘입어 흥천사에서는 전각을 重修하고, 불화를 새롭게 조성하여 전각에 봉안하였으며 왕실의 祈福을 기원하였다. 이하응 이외에도 흥천 사에서는 상궁들의 후원으로 불화가 조성되었다. 왕실의 안녕을 빌기 위해 흥천사에는 1885년 <극락구품도>를 비롯하여 4점의 불화를 봉안 하였다. 이 때 함께 봉안되었다고 생각되는 <극락구품도>는 독특한 형 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른바 화면 분할식 나한도, 팔상도 등의 불화에도 적용되었으며 19세기에 주로 근기지역에서 유행된 형식이었다. 이 논문에서는 흥천사 <극락구품도>에 보이는 도상을 기본적으로는 극락을 묘사하는 불화나 경전의 變相에서 찾았지만 전각, 기물, 동물의 모티프 등은 당시 현실세계에서 吉祥을 상징하는 郭汾陽行樂圖나 瑤池 宴圖에서 차용하였다고 보았다. 길상의 기능을 하던 이런 그림들은 19 세기 이후 광통교를 중심으로 민간에 유통·확산되었다. 장수와 영원, 多 男과 자손번창, 태평과 복락을 바라는 상징체계가 구현된 회화의 이미 지는 극락에 가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세계에 대한 바람과 이상향의 모델로 차용된 것이다. 또한 이 글에서는 제작연대가 기록되지 않은 흥천사 <극락구품도> 의 연대를 비정하였다. 1885년 조성되었다고 전해지는 흥천사 명부전 <十王圖> 10폭을 비교하여 전각, 인물표현 등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시왕도>는 <극락구품도>를 그린 畫僧大虛軆訓의 화풍과 유사하였 다. 따라서 <시왕도>가 <극락구품도>의 제작자였던 대허체훈이나 그 일파에 의해 그려졌을 가능성을 제기해보았다.흥천사 <극락구품도>는 19세기 왕실 원당에서 조성된 불화로 당대 인들이 꿈꾸었던 극락 세계의 일면을 보여준다.
        8,700원
        29.
        2016.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영국에서 활동한 미국인 인상파 화가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작품과 그가 디자인한 <공작의 방>에 구현된 19세기 중 반 이후 영국사회의 중국 청화백자 수집 열광 현상인 ‘차이나매니아(Chinamania)’에 관해 고찰한 것이다. 17, 18세기 중 국 청화백자에서 자신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발견한 휘슬러에 의해 촉발된 1860년대 영국에서의 차이나매니아 현상 은 <공작의 방>이 완성된 187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부르주아 계층의 주요 소장가 그룹을 중심으로 점차 영국 상류 사회 전반에 확산되어갔다. 1878년 휘슬러에 의해 완성된 <공작의 방>은 19세기 중반 이후 영국사회에서 유행한 중국 청화백 자 소장 문화의 특성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휘슬러의 17, 18세기 중국 청화백자를 소재로 한 회화 작품과 그가 구성 한 <공작의 방>의 제작 과정을 분석하는 연구는 1860년대 이후 영국 상류사회에서 새롭게 등장한 중국 도자기에 대한 미적 취향과 소장 문화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학술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8,700원
        31.
        2016.07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소설이 탄생된 18세기 이후 여러 영국소설에는 성직자 인물들이 등장한다. 제인 오스틴(Jane Austen, 1775-1817)의 대표작『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1813)과『맨스필드 파크』 (Mansfield Park, 1814)에서 깊이 있게 다루어진 성직자 인물들은 19세기 초 영국 국교의 분위기 를 유추해볼 수 있게 한다. 또 샬롯 브론테 (Charlotte Brontё, 1816-1855)는 인도 선교사로 헌신 하게 되는 한 목사의 스토리를 『제인에어』(Jane Eyre, 1847)에 생생하게 담아냄으로써 빅토리아 중기의 종교적 분위기를 잘 전달해준다. 20세기 작품이지만 19세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는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 1915)에서 서머셋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 1874-1965) 역시 영국 시골 교구목사의 생활을 구체적으로 그려내었다. 위대한 소설가들의 이와 같은 작업은 19세기 영국의 종교적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본 발표에서는 이상 언급된 작품들에서 여러 유형의 성직자 인물이 어떻게 형상화되었는지 분석해봄으로써 19세기 영국 성직자들의 목회와 삶의 성격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4,000원
        32.
        2015.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During the Joseon dynasty, the Gwansanggam (觀象監, The Royal Astronomical Observatory) was the royal administration in charge of Astronomy (天文), Geography (地理), Calendars (曆), Astronomical and meteorological observation (測候), and Timekeeping (刻漏). Of those affairs, the Astronomical Almanac compilation was most important. In this paper, we study the education and selection of astronomical officials in the 19th century during the Joseon dynasty, focusing on Astronomical Almanac officials. According to this study, their main area was calendar calculation, and they were involved in Astronomical Almanac compilation for nearly 40 years, until they resigned. In addition, they served as Samryeok-susulgwan (三曆 修述官, Official for calendar calculation by the Shíxiàn calendar), and Ilgwa-gamingwan (日課監印官, Official printing supervisor). To undertake these core duties, an official had to pass several examinations and courses. The Gwansanggam (after Gwansangso) carried out the educational function for the officials. In particular, reserved officials of the astronomy division had to be educated starting with a trainee course.
        4,300원
        33.
        2015.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19세기 피아노음악은 소나타와 함께 성격소곡에 속하는 다양한 작품들이 있다. 처음에 성악음악 의 일부로 나타난 인터메초는 19세기 이후 피아노를 위한 성격소곡의 일부로 분류되고 있으나, 그 구체적인 성격에 관한 연구는 그리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베토벤 이후 멘델스존과 슈만 그리고 브 람스를 거치며 인터메초는 실제 많은 작품 속에서 음악적인 역할과 의미를 가진다. 본 논문에서는 인터메초의 발생과 변천과정을 고찰하며, 두섹이나 베토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초기의 유형부터 멘 델스존과 슈만의 작품에서 양식으로서의 형성과정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브람스의 피아노음악 작품 에서 인터메초가 하나의 독립적인 양식으로 완성된 사실을 여러 작품예를 통해 확인하였다. 본 논 문에서의 결과는 19세기 피아노음악의 다양한 양식들을 연구하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을 뿐만 아 니라, 실제 연주자들에게 인터메초를 정확한 해석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6,100원
        34.
        2014.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German popular music in the 19th century is the music, which is accepted in several citizen groups, on opposite to nobility society. With the emergence of capitalism and change of political situation produced the populace their own music of those life culture and distributed it in music market. But the evidence of independence of the popular music from art music of the aristocratic group is verificated in those antipathy and menace to the music of civil groups and those intention to classification their own music culture to the one of the populace. Eventually the meaning of german popular music in the 19th century is the new musical and cultural approach of the citizen group, who passively accepted and is known of unrefined and simple music, which is expression of emotions of uneducated people. Furthermore, it is important that the german popular music in the 19th century holds the ‘functional sociality’ changing the society than the lack of the artistry which the art music had.
        5,700원
        35.
        2014.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의 목적은 19세기 후반부에 발행된 프랑스 󰡔통계 그래픽 앨범󰡕에 수록된 지도의 지도학적 특성을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이 지도집의 제작 배경을 고찰하였는데, 당시의 사회공학과 통계그래픽의 발달이 지도집의 제작에 영향을 미친 것을 확인하였다. 둘째, 지도의 주제를 살펴본 결과, 국토개발을 위한 교통망 건설 타당성 분석을 위한 교통주제도가 많았다. 셋째, 단계구분도의 데이터 분류를 위해서는 등간분류와 자연분류를 채택하였으며, 동일계열의 색상을 이용한 명도배열과 황색과 적색의 분기배열을 사용하여 배색하였다. 넷째, 유선도는 선의 너비를 교통물량의 데이터와 비례하게 제작하였는데, 데이터의 명목적 차이는 색상과 질감을 사용하여 구분하였다. 다섯째, 도형표현도의 경우는 4개 이상의 변수를 표현하는 다변량지도가 많은데, 이로 인해 지도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여섯째, 시공간축소와 비용공간 축소의 표현을 위하여 카토그램을 사용하였다.
        4,500원
        36.
        2013.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focuses on Portraits of the Wyatt Family of John Everett Millais (1829-1896) who was active in England during Victorian Age. Portraits of the Wyatt Family refers to both James Wyatt and his Granddaughter, Mary Wyatt (1849) and Eliza Wyatt and her Daughter, Sarah Wyatt (1850), and these paintings were done for his patron James Wyatt in the early stage of Pre-Raphaelites Brotherhood (P.R.B.). In the 19th century, the British Academy of painting did not move forward from just imitating the works of the past, paying the best tribute to Raphael and Michelangelo and pursuing Joshua Reynolds’s Discourses on Art of 18th century. In criticizing such a stream, P.R.B. came up to the surface in 1848 initiated by Millais, William Holman Hunt, and Dante Gabriel Rossetti with an emphasis on recovering sincerity in painting. In Portraits of the Wyatt Family, it contains various features. In this paper, these specific features are divided into two parts: detailed expression and expression of distorted perspective. It seems that P.R.B.’s belief that thorough observation on small details opens to a window to find the truth in them played as a source to enable detailed depiction. And Portraits of the Wyatt Family distorted the perspective of the high Renaissance traditional perspective. Distorted perspective makes viewers to look at the painting with the same perspective, which suggests a new approach of seeing the picture, not separating the center and periphery in the painting. This study shows that ‘images-within-images’ of the Portraits of the Wyatt Family function reversely from those in traditional art and they are directly reflecting the ideology attached to women in the mid-nineteenth century of Britain. In this paper, it analyzes that ‘images-within-images’ have two different characters at the same time. Thus, this study is significant in that this approach provides a chance to explore the implications in wider extent, instead of just seeing Portraits of the Wyatt Family as family pictures. This study interprets the Portraits of the Wyatt Family in line with the characteristics of P.R.B.. Therefore capturing various hidden meanings from the Portraits of the Wyatt Family and allowing better understanding of the work.
        5,800원
        37.
        2013.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Gimlyong-sa temple has played an important role of Buddhist culture in Gyeongsangdo Provinces(嶺南地域) in the late Joseon Dynasty as the 31st head temple(本山) in the Japanese occupation. There are lots of architectural documentary records remained nevertheless, most of cultural heritages are destroyed by fire in 1997. There were 85 articles in five kinds of books which contained historical achievements of Gimlyong-sa temple and hermitages(Daeseongam(大成庵), Hwajangam(華藏庵), Yangjinam(養眞庵), Geum seondae(金仙臺), Dosoram(兜率 庵), Myeongjeogam(明寂庵)). It is possible to understand the five situational peculiarities in the 17∼19th century. At the first, they were compiled in 1914 to around 1930 by Kwon Sangro(權相老) to clarify the historical facts. Second, confirmed the formation process of the foundation narrative. Third, the meaning of Seolseondang(設禪堂), Manseru(萬歲樓) and Hyangnojeon(香爐殿) were recorded, it is possible to look at the concept of people at that time. Fourth, the great masters portraits were enshrined in hermitages, not in Gimlyong-sa temple. It means that a hermitage is not for only self-discipline or living but assembly of religious orders(門派). Fifth, Chimgye(枕溪), the great Buddhist clergy and carpenter of Gimlyong-sa, was nationwide active worker in 19th century because he was also in a charge of investment manager for construction.
        4,900원
        38.
        201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was aimed at analyzing the location and topology of the 'Gungmyo(宮廟)' and in Hanyang Doseong(漢 陽都城) during 18th and 19th century. Based on the changes of royal processions(行幸) which had been done between the Gungmyo and the Palace, the Gungmyo can be a barometer of cognition where the city center was. Hanyang Doseong was the the capital of Joseon(朝鮮) which had established by king Taejo(太祖). The city had been organized with Gyeongbok-gung(景福宮) as the center. However, after the Imjin War(1592), Gyeongbok-gung was destroyed and urban space was reorganized with Changduk-gung(昌德宮) which reconstructed first. As most kings in late Joseon dynasty had mainly stayed in Changduk-gung, lots of Gungmyos where a memorial service for king’s relatives had been held were established in and around the palace and the frequency of visiting the Gungmyo varied by political purpose. Therefore, the location of the Gungmyo and the rounte of parade were important to impress on the center of urban space. In 18th century, lots of King’s procession had been done with Changduk-gung as departure point. The king used to start from Donwha-mun(敦化門), and the routes included main street around Changduk-gung. It shows that the urban center focused on the east of the city. On the other hand, when the king lived in Kyeonghee-gung(慶熙宮), a secondary palace in late Joseon dynasty, the parade started from Hungwha-mun(興化門) and the urban center was expended to the west. Since Gyeongbok-gung had reconstructed in 1865, recognition scheme of urban space had changed from Changduk-gung to Gyeongbok-gung as the center. When the Gungmyo relocated western side of Gyeongbok-gung, spatial proximity of the palace and relation with facilities around downtown fed into changing the route of king's parade.
        4,300원
        39.
        2011.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9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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