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결과

검색조건
좁혀보기
검색필터
결과 내 재검색

간행물

    분야

      발행연도

      -

        검색결과 64

        41.
        2019.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南冥 曺植은 詩 창작이 교만심을 일으키므로 수양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詩荒戒’의 입장을 견지했다. 그리하여 남명학파는 詩 창작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경향을 가졌다. 하지만 남명의 제자인 覺 齋 河沆은 이와 달리 詩 창작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詩 작품이 뛰어나다 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다면 하항이 추구한 道學과 그가 지은 詩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이 글의 문제의식은 이 점에서 출발했으며, 이 문제 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하항이 지은 道學詩에 주목했다. 그 결과, 하항의 道學詩는 문학을 통해 그가 추구한 道學을 밝히고자 했으며, 그 효용은 자신의 修己뿐만 아니라 世敎와도 관련이 깊었다. 남명을 비롯한 남명학파의 학자들이 ‘詩荒戒’를 견지하여 作詩를 부정 적으로 인식한 것에 비해, 하항은 시를 통해 도학의 효용을 이루고자 노력한 것이었다. 이러한 결론에 의거할 때, 남명학파의 학맥에서 河沆 - 河受一 - 河弘度 등으로 이어진 유파가 구축한 문학에 대해 구명하는 작업이 후속 과제로 이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더 나아가서 는 남명학이라는 큰 흐름 가운데 다양한 유파의 특성을 구분하고, 그것이 어떻게 전승되어 나갔는지를 확인하는 연구들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문제의식을 가지게 된다.
        42.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台窩 河必淸(1701~1758)의 삶과 시세계를 조명한 것이다. 18세기 강우지역은 무신란 이후 정치적 탄압을 받아 출사할 수 없는 정치·사회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하필청은 家學을 이어받아 문장과 行義로 출사하여 정치적 소신을 현실정치에 실현하고자 하였다. 지역적 한계와 당쟁의 폐단으로 정치적 꿈이 좌절되자, 그가 택한 길은 권력자에게 아부하기보다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벗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후진을 가르쳐, 실제 문하에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남명정신을 계승해 나갔다. 그런 가운데 지역 인사들은 물론, 霽山 金聖鐸과 忠窩 許錘처럼 이곳으로 유배 온 인사들과 긴밀한 교유를 통해 다양한 학문을 접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한편, 그가 추구한 107제 146수에 이르는 시문학은 출사하여 태평성세를 이루어보려는 정치적 꿈을 노래하였고, 그 꿈이 좌절되자 자신의 지조를 지키면서 속세의 부귀영화에 초연한 삶을 살고자 하였으며, 이처럼 出과 處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평소 자기수양에 따른 실천학문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드러내었다. 요컨대, 자신의 포부와 이상을 펼치지 못하는 상황에서 태와 하필청이 추구한 삶의 지향은 18세기 강우지역의 지성사적 측면에서 볼 때 보편성과 특수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43.
        201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에서는 『寒溪遺稿』를 바탕으로 하면서, 한편 여러 문헌에 남아 있는 한계 관련 자료를 통하여 한계의 삶과 문학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계는 南冥學을 가학으로 하는 집안에서 태어나 삼종제인 河大觀과 더불어 晉陽의 巨擘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그의 학문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金聖鐸과 내왕한 편지, 그리고 친한 벗 朴挺新의 아들 朴受紋에게 준 시와 서문 등을 통하여 그의 학문을 窺見할 수 있었다. 그의 시는 거의 절반이 내외의 인물들의 죽음에 대해 쓴 것인데, 이들 만시는 한계의 한시 전체의 절반을 넘어서는 것으로 한계의 한시세계를 대표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의 만시는 다만 고인을 애도할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하여 한계의 교유 범위와 깊이 등을 이해하는 데로 확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문장으로도 문중에서 인정을 받아 族譜의 序文을 쓰기도 하였으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遊頭流錄」이다, 일찍이 김성탁에게도 알려져 김성탁이 빌려달라고 할 정도였는데, 그 내용은 대략 세가지 방면으로 나누어서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는 하대명이 한시를 酬唱한 흔적을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남아 전하는 것이 많지는 않으나 한계가 한시를 지었던 자취는 「유두류록」 곳곳에서 발견된다. 한계는 지리산을 가는동안 다섯 여섯 군데에서 13수 정도의 시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는 「유두류록」이 선현과 선조에 대한 마음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한계는 지리산에 들어가 고려 때 지리산에 숨어들어가 은거하였던 韓維漢의 자취가 있는 鈒巖과 禮記巖을 둘러보았을 뿐만 아니라, 水精社에 기문을 쓴 것이 지금도 『동문선』에 전하는 權適의 기문과 수정사에 남아 있는 자신의 할아버지의 글씨 등을 보며, 옛날의 선현들과 자신의 조상에 대한 회념을 하고 있음을 보았다. 셋째는 두류산 유람을 통하여 지리산 등산의 철학적 묘미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일찍이 南冥 曺植도 산을 오를 때와 내릴 때의 차이를 통하여 善을 하는 일을 이야기하였는데, 한계는 남명이 한 말이라고 인용하였다. 이 말은 본래 유래가 매우 오랜 것으로 『國語』에서 나온 말이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말을 鄭汝昌, 李滉 등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밖에도 여러 가지 등산을 하면서 얻은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을 「유두류록」에서 보여주고 있다.
        44.
        2018.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姜龍夏(1840-1908)는 지금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 유림면 엄천강 일원에 華山十二曲을 설정하고 「華山十二曲」을 지었다. 강용하는 鄭汝昌·金馹孫·曺植 등 先賢을 宣揚하는 장소로 여겼던 기존의 名所인 龍游潭 등 7개와 臥龍臺·師良浦 등 자신의 의지를 담은 5개를 합쳐 12개 曲으로 삼았다. 그는 스승 任憲晦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朱子·李 珥·鄭汝昌·金馹孫·宋時烈 등 선현을 숭상하였다. 강용하는 국가의 위급을 애통했으며, 傷時憫俗의 언어로 자주 辭章에 발휘하고 慕華臺와 臥龍臺를 축조했다. 慕華臺는 匪風下泉, 즉 明나라가 망한 사실을 슬퍼하고 나아가 再造藩邦의 은혜와 의리를 잊지 않는다는 의지를 담았다. 臥龍臺는 시대적 상황을 아파하며 이를 극복 하고 타개할 賢人이 나타나기를 열망하는 뜻을 담았다. 永言臺·拱北臺 등을 만들었다. 그는 자연 경물에 자신의 의식을 담았고, 이런 의식이 화산십이곡을 설정하는데 일정한 영향을 주었다. 일제의 조선 병탄의 조짐이 짙어갈 시기에 姜龍夏는 尊道·尊師·尊華意識[尊周意識]을 강화하고, 나아가 사람들에게 그런 의식을 확산하기 위해 화산십이곡을 설정하고 「화산십이곡」을 지었던 것이다. 강용하의 존화의식 표출은 그가 생존했던 당시 흥기했던 지리산권 江右學者의 尊周意識의 영향도 컸다고 본다. 진주에 세거하던 南平文氏 집안의 大明花 선양과 朴震英 (1569-1641)의 우국충정과 존주의식에 대한 선양사업이 활발했다. 강용하는 화산십이곡을 정하는 데 있어,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에 있는 先賢들과 관련된 유적지를 기본으로 하고, 자신의 존화의식 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전에 없던 새로운 명칭을 붙였다. 아울러 선현을 선양 하고 존화의식을 확산하기 위해 화산십이곡 12개 명칭에 관련 故事 등을 원용하여 시를 지었다. 강용하는 주자의 「武夷棹歌」의 칠언절구 대신에 주자의 「山北紀行」 오언율시 8구의 형식을 사용했다. 이로써 자기의 생각을 칠언절구보다 더 많이 서술하였고, 율시의 특성인 고사를 적절히 활용하여 표현미도 높일 수 있었다. 따라서 강용하의 존화의식과 「화산십이곡」은 그 시 대적 의의와 문학적 의의면에서 동시에 유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45.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澹軒 河禹善(1894~1975)의 생애와 시세계를 고찰할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담헌은 19세기 말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와 근대화의 시대를 거쳐 20세기 후반에 세상을 마쳤다. 한문학이 막을 내린 이후의 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樂窩 河弘達 이후 남명학을 계승해온 하동군 옥종면 안계마을이 그의 고향이다. 담헌은 젊은 시절 일제의 단발령에 저항하며 경남의 각지를 떠돌아다녔으며, 이후로도 혼란한 시대에 ‘敬義’로 표상되는 남명정신을 근간으로 선비의 본분을 잃지 않으려 평생 노력하였다. 때문에 그의 시에는 심성 수양, 남명에 대한 존숭과 유교지식으로서의 처세, 강점기 시대의 세태에 대한 개탄 등이 들어있으며, 근대화 시기의 서울 풍경도 담겨있다. 요컨대 담헌의 삶과 문학에서 혼란한 시대를 살아간 마지막 남명학 계승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46.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영조대의 하동 안계 마을의 학자 하대관의 가문계승의식과 향촌사회활동을 알아 본 것이다. 시기는 1748년부터 1758년까지 10년에 걸친 기간이다. 하대관의 글이 오로지 이 시기에 걸쳐 남아 있기도 하지만, 이 시기의 그의 활동이 1759년 가을부터 전개되는 종천서원 시비의 배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문집의 분석을 통해 볼 때, 하대관은 부친으로부터의 가학을 통해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업적을 알게 되어, 그의 학문은 선조들의 전통과 남명학을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이에 그의 학문은 향당에서 충절과 효행, 경의를 중시하는 성격을 갖는다. 그는 영남남인 외에도 기호 남인과의 교류를 강화하여 자신의 가문과 진주 사족들의 위상을 높이려고 했다. 『겸재집』 간행, 족보편찬, 교육과 교화활동, 부당한 조세징수 반대, 『진양지』 간행 등은 모두 이러한 그의 사상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47.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안계 마을은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가 급격히 쇠퇴하던 시기에 오히려 남명 사상을 심화, 발전시킨 마을이다. 안계의 남명학은 그 후로 진양 하씨 문중의 가학 형태로 전승되면서 근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홍도는 안계 마을 남명학의 시작이자 중심이었다. 남명 조식의 학문은 하항과 하수일을 거쳐 하홍도에 전수되었고, 하홍도는 소멸될 지경에 빠진 남명학파의 사상을 심도 있게 발전시켜 후학들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홍도가 남긴 『겸재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홍도를 기리는 만사와 제문에서 많은 후학들이 이러한 측면을 인정하는 내용을 볼 수 있고, 그가 직접 쓴 글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내용이 많다. 특히 그는 인조반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의식을 가졌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의 문집에서 간혹 은미하게 이러한 사상이 드러난 대목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바로 『겸재집』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는 직접적인 원인이 아닐까 한다. 안계 마을의 남명학을 주도했던 최초의 인물인 하홍도는, 자신의학문과 사상에 대한 이처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안계 마을이 근대에 이르기까지 남명학이라는 학문과 사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홍도의 역할에 크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본다.
        48.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조선시대 현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 마을에 거주했던 진양 하씨(안계 하씨)가 혼인을 맺은 집안[婚班]의 성격을 구명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이를 통해 안계 하씨 집안이 지닌 정치사회적 성격이 드러날 것이다. 안계 하씨는 15세기 중후반부터 안계 마을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는데, 이후로 1900년에 태어난 인물들까지 이 집안에서 맺은 혼인의 건수는 568건에 달한다. 혼반의 수는 50개의 성씨, 108개의 본관이며, 대체로 경상우도 지역에 세거하던 집안이다. 안계 하씨 혼반의 성격은 초기의 혼반에서 대체적으로 결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入鄕 초기부터 河弘度·河弘達·河澈·河泳의 주도 하에서 결정된 혼반까지의 숫자는 20개 성씨 28개 본관인데, 이들 혼반의 특징은 ‘德川書院 운영 주도 및 참여’, ‘曺植 문인 및 사숙인’, ‘鄭仁弘 관련’, ‘北人 관련’, ‘壬亂 참전’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초기 혼반과 혼인을 한 건수는 전체의 약 25%에 달하며, 이러한 특징을 지닌 여타 혼반과도 지속적으로 혼인을 맺었다. 또한 인조반정 이후에는 대체로 남인 계열의 집안과 혼인하였는데, 그중에서 남인의 색채가 짙은 혼반도 있었다.
        49.
        201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晉陽河氏 가운데서 河珍을 시조로 하는 司直公派는 고려 후기와 조선 초기에 名公巨卿이 배출되어 대단히 번성하였다. 그러나 領議政 河演, 大司諫 河潔 등이 현달하여 서울로 옮겨가는 바람에 진주에서는 명성이 줄어들었다. 다시 그 후손 중에 咸吉道 觀察使를 지낸 河襟이 朝鮮前期에 진주로 還故함에 따라서 다시 문호를 이루게 되었다. 이후 ‘南冥 이후 제일인자’라는 명성을 얻은 謙齋 河弘度와 그 아우인 樂窩 河弘達, 그리고 낙와의 아들이자 겸재의 조카인 雪牕 河澈 등이 나와 南冥學을 계승하여 큰 학문을 성취하여 이 家門의 격을 높였다. 科擧나 仕宦을 통한 번성은 아니었으나 학문과 儒論을 주도하여 지역 유림사회에서 큰 역할을 해냄으로써 집안을 현저하게 만들었다. 河東[조선말기까지는 晋州] 安溪마을에 거주했던 晉陽河氏 司直公派 가문의 역사와 특성을 자세히 고찰해 보고, 그 가운데 가문을 번성하게 한 대표적인 인물들을 선별하여 그들의 유림사회에서의 행적을 고찰하여 밝혔다.
        51.
        2014.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月村 河達弘은 19세기 강우지역에서 활동했던 학자이다. 그는 실용 을 중시하는 학문경향을 가지고 南冥 曺植과 謙齋 河弘度를 존숭하며 慕寒齋에서 강학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인근의 학자들을 운집시키 고 그들에게 남명학파로서의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때 月皐 趙性家ᆞ 溪南 崔琡民ᆞ東寮 河載文ᆞ克齋 河憲鎭ᆞ斗山 姜柄周ᆞ尼谷 河應魯 등이 그의 문하에서 종유하였다. 이후 조성가와 최숙민은 하달홍의 인도 아래 보다 체계적인 학문을 위해 노사학단에 나아가 奇正鎭에게 수학하였다. 한편 하재문과 하헌 진은 본거지로 돌아가 寒州 李震相과 교유하였고, 강병주와 하응로는 性齋 許傳에게 나아가 집지하였다. 조성가와 최숙민이 노사학단의 핵심인물로 자리매김한 것에 비해 하재문이 한주학단에서나 강병주가 성재학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 리 크지 않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남명을 존숭하고 학문의 실천성을 중시하는 남명학파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하달홍의 모한재 강학이 남명학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하달홍이 노사학파와 친밀성이 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하달홍은 19세기 하동과 인근 강우지역의 문인들에게 남 명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고 보다 큰 학문을 접할 수 있도록 발판의 역할을 해 주었으며, 이를 통해 그 문인들은 남명학파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각자의 학문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이다.
        52.
        2014.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19세기 전반 경상우도 지역에서 활동한 河範運이 三山九曲詩를 창작한 것에 주목하여 그 내용과 의미를 분석한 것이다.하범운은 河溍의 6대손으로 19세기 전반 진주에서 활동한 남인계 학자이다. 그는 남명학과 퇴계학을 겸취하여 극도로 침체된 지역의 학풍과 기강을 부지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이다. 그의 학문성향은 讀書明理와 閑邪謹獨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의리를 종자로 삼고 그 의리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삶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점은 「自省箴」과 「山中懷古」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경상우도 지역은 경상좌도 지역에 비해 구곡문화가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지형적으로 화강암 지대가 적어 구곡이 형성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 지역 학자들이 구곡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남명을 제향한 덕천서원 인근은 지형적으로 구곡을 설정한 만한데도 덕산구곡을 설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19세기 전반 하범운이 처음으로 덕산구곡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덕산구곡시를 창작하였다.하범운은 1823년 안동으로 李野淳을 방문하였을 때, 이야순이 陶山九曲 詩와 玉山九曲詩를 보여주며 차운을 청하여, 집으로 돌아와 차운시를 지어 보내면서 덕산구곡시를 추가하였다. 그리하여 晦齋·退溪·南冥을 제향하는 서원이 있는 곳을 ‘三山’으로 칭하고, 이 삼산에 구곡이 있는 것은 도학의 원류가 영남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여 ‘三山九曲詩’라고 명명하였다. 이는 安德文이 세 선생을 추숭하여 三山書院의 명칭과 위상을 정립한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이 점이 그가 삼산구곡시를 지어 덕산구곡을 도산구곡·옥산구곡과 나란히 드러내려 한 창작 배경이다.하범운이 지은 삼산구곡시의 덕산구곡시는 앞 시대 鄭栻이 덕천서원 뒤 산골짜기에 경영한 武夷九曲에 나아가 제목을 德山九曲으로 개정하고 曲名을 일부 바꾸어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하범운의 덕산구곡시와 정식의 무이구곡시를 비교해 보면 내용이 판이하게 다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정식은 주자의 「무이도가」의 정신을 그대로 본받으려 한 반면, 하범운은 남명의 精神과 氣節을 드러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하범운의 덕산구곡시는 남명의 학문과 정신을 회고하고 추앙하며 자기 시대의 쇠미해진 도를 탄식하는 내용이다.하범운이 삼산구곡시의 하나로 덕산구곡시를 추가한 것은, 安德文이 三山書院의 명칭과 위상을 정립한 정신을 계승하여 남명의 덕산을 옥산·도산과 하나로 합해 도학의 연원과 학문의 본질이 같다는 점을 드러내려 한 것이다. 여기에 그가 지은 삼산구곡시의 의미가 있다. 하범운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덕천서원이 있는 덕산에는 남명의 유적을 중심으로 덕산구곡이 설정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조선 후기 이 지역 인사들의 구곡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퇴계 후손들이 도산구곡을 적극적으로 설정한 것처럼 남명 후손들은 덕산구곡을 설정하는 데 적극적이지 못하였던 것이 덕산구곡이 설정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라 하겠다.
        53.
        2013.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회봉과 동파는 몇 백년의 간극을 뛰어넘어 ‘和陶詩’라는 하나의 시형식으로 遭遇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도연명이라는 인물의 도덕적 청렴함과 인품의 고결함, 은자로서의 삶에 같은 공감대를 느끼며 ‘화도시’를 짓게 되었고, 특히 회봉은 소동파에게도 상당히 경도되어 있었는데 이도 화도시를 짓는 하나의 動因이 되었다. 시대의 간극을 뛰어넘고 ‘화도시’로 만난 이들은 각자 처한 시대와 현실에 고민하고 갈등하며 그 내면적 고뇌들을 시에 加減 없이 담아내었다. 그러므로 ‘화도시’는 그들의 정신적 고뇌의 산물이면서 한편으로는 현실의 고민과 갈등을 해소해가는 일종의 정신적 해방구이기도 하였다. 회봉은 화도시에서 유학자로의 자세를 견지하고 도덕적 선을 추구하는 시를 지었으며, 亡國의 좌절과 아픔을 화도시에 담아 내었다. 유학자로서 이상적인 모습을 시에 나타내려한 회봉의 화도시에는 溫柔敦厚함이 담겨있다. 그리고 동파는 현실을 추구하는 유자로의 모습과 은일의 삶을 추구하는 은자로서 모습 사이에서 갈등하며 시대의 불우에 대한 좌절을 화도시에 담아내면서도 아주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지식인의 모습을 보였다. 회봉은 동파와 유사하거나 또는 상이한 견해를 보이며 시공을 초월하여 ‘화도시’를 통해 동파와 交感하였다. 동파와 비교가 가능한 회봉의 화도시는 우리 한문학의 범위를 해방후까지 연장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며, 근대한문학의 범주를 공고히 하게 한다.
        54.
        2013.08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해양에 유출된 중금속은 빠르게 퇴적물과 결합하며, 해수보다 퇴적물에 수천 배 이상 높은 농도로 분포한다(Martin & Whitifield, 1983; Lee & Kim, 2000). 이매패류는 주로 해양저질에 서식하며, 여과 섭식을 한다. 따라서, 오염된 퇴적물에 서식하는 생물은 중금속에 직,간접적으로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Luoma & Fisher, 1997; Yoo et al., 2002). 본 연구에서는 베트남 Ha Long Bay의 저질중금속 농도와 이 지역에 서식하는 이매패류 두 종의 intersexuality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저질중금속 분석은 ICP-MS(Perkin Elmer, NexION®300X)를 이용하여 측정하였다. 이매패류는 백합목(Veneroida), 재첩과(Corbiculidae)에 속하는 Polymesoda erosa와 개량조개과(Mactridae)에 속하는 Lutraria lutraria를 이용하였다. 시료는 Bouin 용액에 24시간 동안 고정하여 파라핀 절편법으로 4~6 ㎛ 두께로 연속 절편하였다. 그 후 Mayer's hematoxylin과 0.5% eosin(H-E) 비교염색을 실시하여 광학현미경으로 관찰하였다. Ha Long Bay 5개 지점의 저질중금속 농도는 Table 1과 같으며, 모든 지점에서 Al 농도가 가장 높았고, Cd 농도가 가장 낮았다. Intersex는 난소에서 수컷의 생식세포 또는 정소에서 암컷의 생식세포가 관찰되는 것을 기준으로 하였다. 성비는 P. erosa에서 1:0.4로 암컷의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고, L. lutraria에서는 1:4.5로 수컷의 비율이 더 높았다. Intersexuality는 P. erosa에서 14.3%, L. lutraria에서 9.1%로 두 종 모두 암컷에서만 관찰되었다(Table 2).
        55.
        2009.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河崙의 정치적 존재양태의 변화를 통해서 그의 삶을 구명하려고 한 것이다. 하륜은 經世와 가례에 밝았다. 太宗은 집권 전기에 하륜으로 하여금 庶 政을 관장하게 하면서 그를 ‘賓師’로서 대우하였다. 반면에 李居易와 朴誾 및 沈 溫 등은 하륜이 인사를 전횡한다고 크게 비난하였다. 심지어 閔霽는 하륜이 鄭 道傳처럼 患亂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태종대 전기 하륜의 정치적 존 재양태는 극히 상반된 평가를 받았다. 하륜은 朴子安 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될 위기를 겪었다. 정도전 일파는 박자안 의 입을 빌려서 하륜을 숙청하고자 했다. 이는 태종과 하륜이 생사의 동맹을 맺 게 되는 가장 극적인 미시적 사건이었다. 박자안 사건은 태종과 하륜이 ‘相與之 際’를 맺게 한 단서였다. 하륜은 태종에게 盡心全力하여 충직하기가 비견할 사 람이 없는 빈사였고, 태종은 하륜에게 유가적 지식인으로서 삶을 후원·보호해 준 주군이었다. 이로써 둘은 ‘君臣相與之際’였다. 하륜은 閔無咎 형제의 옥사에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다. 그러나 李之誠의 供辭 내용, 柳沂의 의심스러운 행동 등에서 보면 의문이 든다. 특히 하륜은 민무구 형제가 自願安置되자 ‘세자 제거가 아니라 宗支 제거이니 적합한 벌’이라고 하 여 태종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태종은 그것조차 하륜의 해명을 통해서 충직한 행동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태종은 黃喜에게 하륜과 오고간 내용을 비밀로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후 하륜의 정치적 존재양태에 변화가 보인다. 하 륜은 태종의 자문에 응하여 武科 試員을 혁파할 것을 말하고, 나아가 임금이 직 접 考閱할 것과 이를 비밀리에 추진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처럼 하륜은 태종과 같이 朋黨을 크게 경계하였다. 이는 李叔蕃과 심온이 黨與를 개의치 않다가 죄 를 받았던 것과 비교된다. 이로써 태종대 중기 이후 하륜이 태종의 庶政 자문에 응하는 정치적 존재양태였음을 알 수 있다.
        57.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발표에서 이해를 시도하는 澹山 河祐植(1875~1943)은 지금까지 본격적 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아니한 새로운 연구 대상이다. 이에 본 연구는 그의 文集 인 󰡔澹山集󰡕을 통한 텍스트 분석에 치중하였다. 󰡔澹山集󰡕은 그가 사망하고 십 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간행되었지만, 그 編次는 그가 생전에 손수 확정해 놓은 면모 그대로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澹山集󰡕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담산의 인생에는 다음의 세 가지 특기할 만 한 사항이 눈에 띈다. 첫째, 南冥學을 수용함과 아울러 艮齋 田愚에까지 이어지 던 栗谷學을 함께 계승한 學問淵源을 지니고 있다. 둘째, 일제의 침략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대신 비협조로 일관하며 조선왕조에 대한 충성을 변치 않 는 ‘靖獻’의 삶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셋째, 學問淵源이 닿은 선현들의 문집 간행을 돕고 집안에 전해지던 遺文을 수습하여 간행하는 등 문헌의 정리와 간 행 사업에 전념하여 업적을 남기고 있다. 조선왕조가 망국의 길을 걷는 과정과 일제의 식민통치시기를 몸소 겪어야 했 던 담산은 ‘時義’를 중시하는 出處觀을 지니고 있었으며, 우주의 원리와 心性의 원리 및 양자의 관계성을 통일된 원리로 일관되게 설명하는 心性論에 대한 심 후한 소양을 지니고 있었다. 담산이 일제의 식민통치 하에서 변절하지 않고 끝 까지 절조를 지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마음공부가 작용하고 있었다고 하 겠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잘 살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에 물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채 인물의 도덕성을 부차적 문제로 간주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담산의 인생이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해주고 있는가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할 것이다.
        58.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글은 단파 하계룡의 학행과 그의 시세계를 살펴본 것이다. 단파 하계룡은 세상에 크게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겉으로 보아서는 이렇다 할 벼슬을 한 것도 아니고, 남긴 약간의 저술이 󰡔단파유고󰡕라는 이름으로 후손에 의해 정리되어 출간된 것 이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다. 하지만, 그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삼불후 가운데 벼슬을 뺀 치와 덕을 누린 사람으로 평가를 받았으며, 특히 당대의 대표 적 학자인 정재규와 권재규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가 당시에 이러한 평가를 받았던 까닭은 그의 선조 창주와 습정재로부터 물 려받은 가학, 그 가운데에서도 효성을 깊이 본받았고, 또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에서부터 이어져온 학문, 그 가운데에서도 실천적 행실을 배운 때문이었 다. 그래서 그는 집안에서는 위로 선조와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 아래로 친족 과 자손들에게 돈목과 우애를 강조하였다. 따라서 향촌의 인사들에게 존모를 받았던 것이다. 그의 이러한 일생과 삶의 지향은 그의 많지 않은 시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첫 째는 과거가 자신이 갈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공령을 버리고 학문을 좇았 던 일을 노래한 것이고, 둘째는 자신의 부모형제와 선조가 있는 고향에 대한 그 리움을 노래한 것이다. 셋째는 효를 실천하는 차원에서 일생 심력을 기울여 추 진했던 선조에 대한 추념을 노래한 것이고, 넷째는 같은 선조 아래에서 우애 있 게 지내기 위해 노력하던 마음이 담긴 친족 간의 화목을 중시하던 뜻을 읊은 것 이다.
        59.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士農窩 河益範(1767-1813)은 滄洲 河憕 및 그의 손자 河洺으로 이어진 가학 을 계승한 바탕 위에 尤庵學派의 性潭 宋煥箕에게 경학과 성리학을 배우고, 鏡 湖 李宜朝에게 예학을 배워 韓元震-宋能相-宋煥箕․李宜朝로 내려오는 학맥에 속하게 되었다. 그는 성담에게 집지함으로써 학문적 외연을 넓히는 동시에 尤 庵家와 世交를 돈독히 하는 두 가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사농와의 삶의 지취는 자연에 동화되는 삶을 산 曾點의 방식을 추종하면서 仁 智之樂을 추구한 데 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實心․實學으로 爲己之學을 하는 用實心務實學의 務實精神으로 나타난다. 그의 문집에는 紀行詩와 紀行文이 대 부분을 차지하여 문학적 특징으로 부각된다. 그의 기행시는 크게 山水遊覽과 求道觀光으로 대별할 수 있는데, 전자는 지리산 등의 산수를 유람하면서 지은 것이고, 후자는 스승의 문하에 나아가고 한양을 관광하면서 지은 것들이다. 그의 기행문학작품에 나타난 작가의식으로는 크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 째, 산수유람을 좋아하는 성품으로 자연에 몰입하는데, 그것은 현실에서의 불 화를 달래기 위한 측면보다는 曾點의 경우처럼 天人合一의 경지를 추구하는 仁 智之樂에 心醉하는 정신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둘째, 산수유람이건 구도관광 이건 그의 기행문에는 源頭處를 향하는 求道意識이 깊게 스며 있다. 셋째, 그의 기행시문에는 선인의 유적을 만나 역사를 회고하는 작가의식이 잘 드러나 있는 데, 선현의 道德과 志節을 흠모하기도 하고 선현의 불행을 탄식하기도 하며 불 교의 황당한 설을 비판하기도 한다. 넷째, 그의 기행시문에는 南冥精神을 환기 시키며 그것을 본받고자 하는 작가의식이 강렬하게 드러나 있다.
        60.
        2008.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연구는 습정재 하응운(1676-1736)이 지니고 있었던 주정적 세계관을 중 심으로 그의 문학적 형상을 탐구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그의 가학적 전통 과 시대인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문학작품이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에 직․간접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응운은 선대로부터 남명학통을 이어받았으나 노론으로 정립한 학자다. 그의 시대에 와서 명실상부 한 진주지역 노론 명문가로 발전하게 된다. 이 같은 처지에서 노론과 소론 사이 에 있었던 辛壬獄事를 거치면서 退處를 단행한다. 철저한 유가적 출처의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하응운은 당대를 위기의 시대로 판단하고 산림 속으로 물러나 주정적 세계관 을 정비한다. 이는 周惇頤 이래 성리학자들이 聖學을 터득하기 위하여 치열하 게 구축해갔던 세계관이다. 그 역시 이 주정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자신의 호를 ‘습정’이라 하였고, 이를 통해 안으로는 通明을, 밖으로 公溥를 획득하고자 했 다. 이 같은 세계관에 기반하여 문학창작을 하였으며, 당대인으로부터 ‘文苑의 詞宗’이라 칭송을 받기도 했다. 그의 문학은 時文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淸 越奇健’하고 ‘往往逼古’했다는 평가 받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문학적 경향 을 대체로 파악하게 된다. 주정적 세계관에 기반하여 작품을 창작했던 하응운은 자연을 ‘습정’의 공간으 로 인식하기도 하고, 창작의 공간으로 인식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생활공간으 로 인식하기도 했다. 습정공간으로서의 자연은 그의 문학이 유가적 수양론과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창작공간으로서의 자연은 起興의 대상이 되어 하응운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시화를 나누고 주흥을 이끌어내어 작품을 창 작케 하는 구실을 하였다. 그리고 생활공간으로서의 자연은 책읽기나 글쓰기 등 선비의 일상사를 추구할 수 있게 하는 존재였으며, 특히 여행은 자연을 작품 화 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 2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