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계 마을은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가 급격히 쇠퇴하던 시기에 오히려 남명 사상을 심화, 발전시킨 마을이다. 안계의 남명학은 그 후로 진양 하씨 문중의 가학 형태로 전승되면서 근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하홍도는 안계 마을 남명학의 시작이자 중심이었다. 남명 조식의 학문은 하항과 하수일을 거쳐 하홍도에 전수되었고, 하홍도는 소멸될 지경에 빠진 남명학파의 사상을 심도 있게 발전시켜 후학들에게 이어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홍도가 남긴 『겸재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홍도를 기리는 만사와 제문에서 많은 후학들이 이러한 측면을 인정하는 내용을 볼 수 있고, 그가 직접 쓴 글에서도 이러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내용이 많다. 특히 그는 인조반정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저항의식을 가졌던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그의 문집에서 간혹 은미하게 이러한 사상이 드러난 대목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바로 『겸재집』이 불태워지는 수난을 겪는 직접적인 원인이 아닐까 한다. 안계 마을의 남명학을 주도했던 최초의 인물인 하홍도는, 자신의학문과 사상에 대한 이처럼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안계 마을이 근대에 이르기까지 남명학이라는 학문과 사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하홍도의 역할에 크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본다.
이 글은 南冥學의 본질과 특색에 대해 재조명한 것이다. 南冥은 16세기 사화 기에 현실정치의 참여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한 인물인데, 25세 때부터 孔子 를 배우고자 하여 顔回의 克己復5를 통해 근본을 확립하는 구도의 길로 들어 섰다. 남명학의 淵源은 남명이 학문을 전환한 뒤 孔子·周敦頤·程Ⅱ·朱熹의 초상 을 그려 봉안해 놓고 참배한 데서 단서를 찾을 수 있는데, 주자의 博文約5의 학문과 程明道의 揚休山立의 氣節과 周濂溪의 光風霽月의 흉금을 추구하고, 나 아가 안회의 克己復5를 통해 공자의 경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남명학의 요체를 敬·義라 하는데, 이는 주역 「坤卦-文言」의 ‘敬以直內 義以 方外’에서 나온 것으로, 주자도 학문의 요체로 삼은 것이다. 따라서 경의학의 연 원은 주자를 통해 주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의학은 마음을 眞實無妄하게 하는 공부로, 敬은 마음을 고요하고 또렷하게 하여 긴장감과 경건함을 유지하 는 것이고, 義는 마음이 발한 뒤 판단이나 조처를 올바르고 합리적으로 하는 것 이다. 남명학의 본질은 남명이 남긴 3편의 賦와 學記類編의 「誠圖」·「易書學庸語 孟一道圖」·「心爲嚴師圖」·「幾圖」 및 「神明舍圖」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原泉 賦」에는 근본을 중시하는 사유가 근저에 깔려 있으며, 「民巖賦」는 나라의 근본 을 백성으로 보고 정치의 근본이 임금에게 달려있음을 말한 것이며, 「軍法行酒 賦」는 나라의 근본은 禮義라는 점을 역설한 글이다. 또한 「誠圖」와 「易書學庸 語孟一道圖」는 남명학의 본체에 해당하는데, 「誠圖」는 眞實無妄의 誠을 목표로 그 공부방법과 실천요령을 적시한 도표이며, 「易書學庸語孟一道圖」는 惟精·惟 一의 공부를 통해 誠을 추구하는 것을 형상한 것이다. 「心爲嚴師圖」·「幾圖」 및 「神明舍圖」는 남명학의 작용에 해당하는데, 「心爲嚴師圖」는 心을 嚴師로 삼아 存養·省察을 나타낸 것이고, 「幾圖」는 省察과 克己에 초점을 맞추어 그린 것이 며, 「神明舍圖」는 극기복례하여 至善의 경지에 이르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남명학의 특색은 「神明舍圖」의 ‘天德’과 ‘王道’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천 덕은 하늘이 부여한 본성을 얻어 나의 인격을 완성하는 것으로 內聖에 해당하 고, 王道는 그 덕을 현실사회에 펴는 것으로 外王에 해당한다. 천덕을 추구하는 것은 人道를 닦아 天道에 배합하는 誠을 추구하는 것으로, 남명학의 특색은 居 敬行義의 공부를 통해 中庸의 大旨인 誠을 추구한 데 있다. 이는 퇴계가 소 학·대학을 근본으로 한 것과는 다른 시각으로, 중용을 所依經傳으로 삼은 것이다.
16-17세기 초반은 南冥 曺植(1501-1572)이 학파를 형성하고 그의 제자 및 재전제자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시기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남명학파가 심각한 타격을 입고 학문적ㆍ정치적 활동에서 전면에 나서기 어 려웠던 점을 생각할 때, 이 시기는 남명학파의 전성기라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16-17세기 초반에 창작된 남명학파 학자들의 箴 작 품을 대상으로 그 속에 담긴 수양론을 파악해보고자 시도했다.
箴의 효용성에 주목해 작품의 주제와 내용을 분석하여 수양의 실천 양상 을 분류한 결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첫째는 수양론의 핵심 사상을 제기하여 그것에 따른 실천 의지를 촉구한 작품군이다. 이것은 보다 근원적ㆍ본질적 측면에서 자신이나 타인을 규계하는 것이므로, 치료 방법중에서 原因治療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특정한 병폐나 구체적인 실천 덕목을 적시하여 그것에 따른 수양 방법을 모색한 것으로, 어떤 증상에 대해 직접적인 처방을 하는 對症治療의 명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셋째는 어 느 시기나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새롭게 전환하려는 시도를 할 때 지어진 작품으로, 이것은 주위 환경이나 생활 습관을 개선하여 병을 호전시키는 改善治療와 같다고 말할 수 있다.
3가지 유형 가운데 편수가 가장 많은 것은 對症治療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총 10편이 여기에 속한다. 原因治療는 5편이 있으며, 改善治療는 4편이다. 곽재우의 「調息箴」은 호흡법에 관한 내용으로 다른 箴 작품의 일반적인 성 향과 구별되어 기타로 분류했다.
16-17세기 초반 남명학파 학자들이 창작한 箴 작품은총 20편인데, 비슷 한 시기에 지리산권의 서부인 호남지역에서는 箴 작품의 수량이 6편 정도에 불과하며, 그 내용도 2편이 임금을 위해 지은 官箴이고 나머지 4편은 경전 을 해석하거나 전대의 작품에 차운한 것이다. 이처럼 호남지역의 箴 창작 양 상과 대비해 보자면, 남명학파 학자들의 箴 작품은 수양의 내용 및 방법을 서술한 것이 매우 구체적이며 실질적이다. 따라서 16-17세기 초반 남명학 파의 箴 작품은 수양 방법을 제시하고 실천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나타난다 고 그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경남 하동 지역 유학자의 세기별 분포는 15세기 1명, 16세기 2명, 17세기 7명, 18세기 2명, 19세기 16명, 20세기 초 1명이다. 가장 비율이 높은 시기가 19세기이며, 그 다음이 17세기이다. 경남 지역은 南冥 曺植의 학문을 계승한 南冥學派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남명학파의 성쇠에 따라 하동 지역의 유학자도 비례하여 산출되고 있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구역별 분포는 총 29명의 유학자 가운데 옥종면이 21명으로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북천면이 6명, 금남면과 양보면이 각각 1명이다. 이 가운데 옥종면 안계리 출신의 유학자가 11명으로, 옥종면 유학자의 절반이 넘는 비율을 차지하며, 전체 하동군 유학자의 3분의 1에 해당한다. 이러한 통계를 근거해 볼 때, 하동 유학의 중심지는 옥종면이며, 그 중에서도 안계리가 핵심 지역이라고 규명해 볼 수 있다.학맥 형성 양상을 살펴본다면, 남명학파 11명, 寒洲系列 4명, 蘆沙系列 5명, 星湖系列 3명, 尤庵系列 1명, 華西系列 1명, 기타 6명이 된다. 그러므로 하동 지역의 학파별 분포는 남명학파 및 南人 계열이 대다수 를 차지하며, 그 다음으로 노사계열의 문인이 많은 비중을 가진다. 하동 지역의 남명학 전승과 관련해서는 안계마을 출신의 晉陽河氏 학자들이 家學을 통해 계승한 사실을 거론할 수 있다. 그리고 河達弘, 鄭瑀贇, 趙性家, 崔琡民, 姜柄周, 鄭敦均 등의 학자들이 서로 다른 학맥과 당파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명을 존숭하고 본받아 실천하려 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글은 남명학 관련 문헌의 번역 현황을 정리하고, 번역서의 체제와 내용을 검토하고서 향후의 과제에 대해 몇 가지 제언을 한 것이다.
남명의 저술 『남명집』 번역은 어느 정도 완성되었다. 그러나 문제점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두 명의 전문가가 오역을 바로잡고 윤문을 하여 수정판을 다시 간행해야 할 것이다. 『학기류편』 번역도 성리학에 이해가 깊은 전문가가 다시 검토하여 번역문의 미비점을 바로잡고, 최근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수정판을 내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아직까지 논쟁이 계속되고 있는 『남명집』 판본 문제에 대해서도 정리하는 작업이 요구되며, 『남명집』 정본화사업 추진도 절실히 요구된다.
남명의 전기 자료 및 연원록 번역은 남명학연구소에서 상당한 성과물을 냈지만, 아직도 번역해야 할 자료가 여전히 남아 있다. 예컨대 후인들의 문집에 산견되는 남명에 대한 기록을 모두 모아 번역하는 일, 각 종 序·跋 및 남명 유적지 건축물의 기문·상량문 등을 모아 번역하는 일 등은 서둘러 추진할 필요가 있다.
남명 문인의 저술 번역은 약 10분의 1정도만 번역되었거나 번역 중에 있고, 그 나머지 문집은 번역이 불투명하다. 이런 문집은 분량이 매우 적어 국가기관에서 번역하기 어렵기 때문에 문중이나 기념사업회에서 번역 사업이 활발히 일어나길 기대한다. 또한 남명학파의 범주에 넣을 수 있는 남명 사숙인들의 문집도 모두 번역해야 남명학파의 실체를 구명하는 데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이런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지방자치단체와 대학교와 문중이 모두 적극적인 의지를 가져야 한다. 특히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가 남명학의 메카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학교 당국은 물론 지방자치단체 및 문중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구축하여 번역 사업을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가야 할 것이다.
또한 지금까지 연구기관에서 번역한 성과물은 교열과 윤문 등의 과정을 거쳐서 오역이나 비문이 비교적 적다. 그러나 문중에서 단독으로 번역한 경우는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난다. 따라서 번역의 질을 제고하기 위해서라도 재야 학자가 혼자 번역하는 일은 가급적 삼가야 하며, 연구기관에서 번역을 한 뒤 교열과 윤문을 거쳐 출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본 논문은 우리나라 남명학 관련 연구기관의 설립 과정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연구기관들이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우리나라 남명학 연구의 발전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목적이다.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설립 22주년을 기점으로 하는 글이니만큼 경상대학교 남명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관련 연구기관을 살펴보고 또한 우리나라 유학 인물관련 연구소들의 설립과 활동 상황도 살펴보았다. 2001년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을 계기로 남명학 연구는 外延的으로 많은 확대를 꾀했다고 할 수 있다. 국제학술회의 등 다양한 학술 활동을 통해 연구자들도 많이 늘어났다. 앞으로 남명학연구소는 그동안의 연구 성과물을 기반으로 남명학의 대중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지역 거점대학인 경상대학교의 대표적인 연구기관으로 자리를 잡아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한국선비문화연구원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줄 수 있는 남명학 연구기관으로서의 자리매김을 할 수 있도록 많은 인력 양성과 다양한 학문 분야와의 융합을 통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할 필요성이 대두된다고 하겠다.
경상대학교 도서관은 1989년부터 고서실을 설치하여 운영해오다가 2001년 10월 지역민의 도움으로 대학 내에 南冥學館이 건립되자, 고서실을 남명학관으로 이관하고 ‘文泉閣’으로 명명하여 재개관하였다.
문천각에서는 남명학 연구의 기초자료가 되는 경남지역 민간소장 고문헌을 다년간에 걸쳐 체계적으로 수집하였다. 문천각에서는 이렇게 수집된 고문헌의 원본은 영구보존하고 활용성은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하여 고문헌 디지털화 계획을 수립하였다.
경상대학교 도서관은 2004년부터 행정안전부 <국가DB 구축사업>을 유치, 2011년 남명학 관련 고문헌을 디지털화한 <남명학고문헌시스템> 개발을 완료하였다.
<남명학고문헌시스템>은 남명학 관련 문헌, 유학자 문집, 기록류, 고서 해제, 고문서, 책판 등을 디지털화여 인터넷을 통하여 대국민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남명학고문헌시스템>을 개발함으로써 남명학 연구의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남명학 연구가 전국화세계화 될 수 있는 될 수 있는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경상대학교 도서관은 이 사업을 통하여 2010년 교육과학기술부 대학 도서관 특성화 평가에서 우수상을 수상하였고, 2011년 교수신문·국가브랜드위원회·교육과학기술부가 공동 주관한 <대학의 유산, 한국의 미래다>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본고는 지난 20여 년간 진행되어온 남명학파에 관한 연구를 종합, 검토하는 논문이다. 지금까지 남명학파에 관한 연구는 아주 다양한 측면에서 진행되어 왔는데 본고는 그 중에서도 특히 남명학파의 거시적 동향에 관한 내용이 포함된 논문을 모아서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분석대상 논문은 우선 통시적 연구와 시대별 연구로 나누었으며, 시대별 연구는 다시 남명학파의 형성 및 전성기에 관한 연구, 남명학파의 몰락 및 쇠퇴기에 관한 연구, 남명학파의 부흥기에 관한 연구 등 세 시기로 나누어 검토하였다.
사실 지금까지 진행되어 온 통시적 관점의 연구는 주로 남명학파의 동향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는데, 인조반정의 가해자와 피해자 가운데 피해자에 해당하는 북인만 연구해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결과 남명학파의 공(共)보다는 과(過)가 부각되었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가해자인 서인에 대한 연구가 병행되어야 입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질 것이다.
시대별 연구도 자료의 한계성 때문에 더 이상 크게 진보할 가능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자료 발굴은 물론 자료 해석에 있어서도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글의 주제는 “南冥 曺植(1501–1572)의 학문에 대한 연구저술의 성과에 관한 분석”이다. 이를 위하여 이 논문에서는 다섯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연구하였다. 첫째, 『남명집』과 譯註本의 종류와 그 특징. 둘째, 초기 남명학연구의 문제형성과 관련된 저술. 셋째, 남명학연구의 다양화와 심화정도. 넷째, 퇴계학과의 비교연구의 내용과 의미. 다섯째, 南冥學의 傳承에 관한 두 유형에 관한 분석이다.
이상의 문제에 대한 연구결과 첫째, 『남명집』에 대한 판본정리와 定本化가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남명학의 학문적 사상적 특성을 정리할 때 틀에 박힌 類型化를 지양해야 한다. 셋째, 단순한 비교보다는 남명학의 독창적 성격이 무엇인가를 밝혀야 한다. 넷째, 南冥評傳의 저술이 꼭 필요하다. 다섯째, 남명학파와 門 人등 남명학 전반에 관한 체계적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그동안 남명학 연구저술은 대부분 개인이 이미 발표하였던 연구논문을 주제별로 엮어서 출판하였거나, 기획된 목적에 따라 전문연구자들의 개별적 연구논문을 모아서 편집한 책들이다. 이러한 상황은 남명학의 정확한 정체성을 밝히거나, 남명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미흡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 논문의 목적은 1980년대 이후 최근까지 이루어진 남명 및 남명학에 대한 외국 연구자의 업적과 성과들을 회고하고 정리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선 연구사의 검토와 정리에 앞서 외국 연구자의 연구는 방법론적으로 자국의 연구 동향을 일정 정도 반영하기 마련이라는 전제에 입각해 외국인 연구자의 대다수를 점하는 중국과 일본에 있어서의 유교 내지 유학에 대한 인식과 연구 동향에 대해 개략적으로 검토해보았다. 다음으로 본론에서는 다섯 분야로 나눈 주제별 분류를 통해 외국 연구자의 연구 동향을 비교ㆍ검토하는 방법을 취하였는데, 실천 유학자로서의 남명과 남명학의 실천성 문제, 실천 철학으로서의 남명학이 지니는 실학사상과의 연관성 문제, 성리학자로서의 남명의 정체성과 주자학과의 거리, 남명 사상과 도가 사상과의 상관성, 남명학의 연관 분야 및 남명학파와 남명학의 계승 양상 등이 그것이다. 이들 주제 가운데 남명학의 실천성 문제는 외국 연구자가 일찍이 주목하던 바로서 지속적인 관심을 끌면서 논의의 대상이 되어 왔다. 아울러 외국 연구자에게 있어서도 이러한 실천 철학으로서의 남명학에 대한 관심은 이후 실학사상과의 연관성에 있어서 더욱 강화된 형태로 나타났다. 남명학과 주자학의 관계에 대해서는 영향 관계를 강조하는 입장과 양자 사이의 거리를 강조하는 입장으로 나누어지는데, 후자의 입장은 남명학이 원시유학의 정신을 수용하였다는 절충적 관점에서 도가 사상과의 관계를 주목하는 견해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기존에 외국인 연구자에 의해 이루어진 남명학 관련 연구는 자국의 연구 동향을 반영하는 한편으로 국내의 연구 동향과도 영향 관계를 맺으면서 그 질량에 있어서 일정 정도 성과를 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향후 연구의 심화를 위해서는 연구자의 국제화를 위한 체계적 대책의 수립 및 연구 활성화를 위한 시급한 대책, 예를 들어 관련 자료의 정리 및 번역 출판 등의 과제가 중요함을 제안하였다. 아울러 국내의 남명학 연구가 기존의 남명 사상의 언설을 반복 진술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현실 사회에 공헌하는 길을 찾기 위해 현대 중국에서의 유학 연구 사례를 모색해 볼 것을 제안하였다.
이 글은 지금까지 교육부분에 있어서 남명학 연구성과를 정리하여 그 동향을 밝혀 앞으로의 남명학 연구의 방향을 정하기 위하여 작성하였다. 여기서 남명학은 남명조식(1501-1572)과 그의 문인 집단인 남명학파에 대한 연구를 포함한다.
교육부분에 있어서 남명학 연구는 1947년부터 시작되었지만, 본격적인 연구는 1990년 이후부터 시작된다. 2000년까지의 연구는 거의 대부분 교육사상 일반에 집중되어 있다. 그것도 남명에 편중되어 연구되었다. 2000년 이후는 남명학의 교육부분에 관한 연구가 다양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2000년 이후에는 기존의 연구자가 새로운 방법으로 연구의 영역을 확대하였고 다양한 전공의 연구자가 남명학의 교육부분 연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남명의 문인에 대한 개개인에 대한 연구가 남명학파라는 문인집단을 중심으로 연구의 방향이 변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인접 학문의 연구방법이나 결과를 적극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의 연구는 첫째로, 남명과 남명학파의 교육에 관한 다각도의 연구와 남명학의 계승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역사 속에서 남명학파의 정체성을 찾는 연구가 필요하며, 둘째로 남명과 남명학파의 향촌사회에서의 교육실천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그들의 영향이 향촌사회에 어떠한 형태로 적용되어 향촌사회 변화와 발전에 기여해 왔는가를 밝히는 연구가 필요하며, 세 번째로 남명과 비교될 수 있는 사람과의 비교연구를 통하여 교육사에 있어서 남명과 남명학파의 위상을 정립하는 연구가 필요하며, 넷째로 남명과 남명학에 대한 연구에 현대 서양교육학의 이론과 연구방법을 지속적으로 도입함으로써 지금까지의 남명학 연구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과 한계점을 찾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교육영역에 있어서의 남명과 남명학파에 관한 연구는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현재 교육문제 해결의 단서를 제공하고 나가가 미래 교육 발전의 방향을 제공할 때 의미가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개소 20주년을 맞아 남명학연구소를 중심으로 지금까지의 남명학 연구에 대해 시기별로 발전 양상을 살펴본 것이다. 1990년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설립을 기준으로 1990년 이전과 남명학연구소 설립 후인 1990년부터 2011년까지를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이 되는 2001년을 기점으로 삼아 전후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에서 남명 조식 선생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점은 1980년대 후반이다. 1980년대 후반 김충렬 교수에 의해 학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남명학은 1990년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설립을 기점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해왔다. 남명 중심의 연구에서 범위를 확대해 남명 제자들을 통해 남명사상의 계승 양상을 구명해 남명 정신이 우리나라 선비 정신의 본보기로 인식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1년 남명탄신 500주년을 맞아 남명학과 다른 학파와의 비교를 통해 16세기 유학사에서 남명학의 특징을 학계에 널리 알렸으며, 외국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남명학의 국제화에도 많은 기여를 했다.
지금껏 경상대학교 남명학 연구소를 중심으로 남명과 남명학파에 대한 연구는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남명학 연구의 발전 과제도 적지 않다.
20여년 동안 ‘남명’이란 주제로 수많은 연구 성과물들을 세상에 내놓았지만, 아직 남명 선생에 대한 일반 대중들의 인지도는 적어도 경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굳이 퇴계선생과 비교하지 않더라고 남명의 정신과 학문이 우리나라 대표적인 선비정신의 표상으로 전 국민들이 인식할 때 까지 관계자들의 꾸준한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趙性家와 崔琡民은 경상우도 蘆沙學派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南冥學派의 본거지인 경상우도에서 태어나 蘆沙 奇正鎭의 문인이 되었고, 기정 진의 학문을 전파하고 확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들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그들에게서 남명학적 사상과 언행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들의 이러한 언행을 순 수하게 보지 않고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이러한 행위 가 진정으로 남명학을 존숭해서가 아니라, 남명학적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 잡 은 경상우도에서 자신들의 학파세력을 확산하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기록에 남아있는 여러 가지 증거와 정황으로 볼 때, 경상우도 노사 학파를 대표한다 할 수 있는 조성가와 최숙민은 실제로 남명 조식을 존숭하였 고 그의 사상을 자신의 내면에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을 더욱 더 발전․확산시키기 위해 다방면에 걸쳐 노력했던 인물들이었다는 것도 분 명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서 남명학 존숭과 관련된 그들의 언행은 진정성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
老柏軒 鄭載圭(1843-1911)는 1885년 后山 許愈와 함께 南冥의 講學處인 雷 龍亭을 중건하여 南冥의 유적이 복원되고 南冥學이 천양되도록 노력하였다. 1887년에는 8월 18일부터 28일까지 10박 11일의 기간 동안 智異山을 등람하 면서 남명에 대한 추념과 경모를 가졌으며, 자신의 학문과 삶이 새롭게 진작되 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1889년 后山 許愈가 남명학의 핵심을 분명하게 드러 내기 위해 「神明舍圖銘或問」을 지은 것에 동감하고, 그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 를 자세히 개진하였다. 노백헌이 이러한 일련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유를 두 가지 정도로 정 리해 볼 수 있다. 하나는 同鄕의 先賢을 後學으로서 마땅히 선양해야 한다는 책 임감이다. 다른 하나는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당시의 위기적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절실히 필요한 것으로 인식하였고, 유학사적 道統論 속에서 그 의미를 확 신하였기 때문이다. 전자는 노백헌 자신이 생장하고 활동한 三嘉縣이라는 지역 과 그것에 연유한 지역적 정서에 바탕한 것으로, 개인적·지역적 책임감이다. 후 자는 유학사의 맥락 속에서 남명의 위상을 파악하여 남명의 선양이 가지는 의 미를 확신한 것으로, 시대적 상황의 인식과 유학사적 도통의 계승 의지이다. 19세기 강우 지역 학자들은 남명의 학문과 사상을 중심축으로 삼아 분열된 각 학파들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유학의 근본 정신을 회복하고 실천 의지를 고양하여 국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전망을 바라보려 노력하였다. 노백 헌의 남명학 계승은 이처럼 19세기라는 시대적 상황과 강우 지역이라는 공간적 배경을 이해한 가운데 그 의미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남명학파는 그 성립 초기, 즉 남명이 생존하던 시기와 그 문인집단이 왕성하 게 활동하던 시기인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초반에는 우리나라 학계와 정계를 주도했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때 남명의 문인 내암 정인홍이 ‘賊臣’으로 몰려 처 형을 당하고부터 상황은 急轉直下하였다. 반정 이후 남명학파적 성격을 유지한 채 정권에 참여할 수 없었던 정치적 상황으로 인해 남명학파는 명목과 실상을 동시에 유지하기 어려웠고, 이러한 연유로 해서 17세기 중후반부터 차츰 退溪 學派化 내지는 栗谷學派化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도 내심 북인 세력으로 존재하던 남명학파의 일부가 1728년에 ‘戊申亂’을 일으키다 궤멸됨으로써 설상가상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 다. 이즈음에 이르게 되면 남명학파의 목숨은 거의 끊어진 듯이 보인다. 그러나 비록 미미하다 할지라도 진주 인근에서는 河世應·河必淸·李甲龍·李志容·李佑贇 등의 인물이 꾸준히 학맥을 이어왔던 것이 분명히 포착된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엽에 이르러 정조가 남명에 대한 제문을 직접 지어 사제케 한 뒤로 경상우도 지역의 사기가 올랐음인지 19세기에 들어서면 李源祚·張福樞·李震相·朴致馥 등 을 이어 金麟燮·許愈·崔琡民·鄭載圭·金鎭祜·郭鍾錫 등의 저명한 학자가 대거 굴 기하게 되었다. 특히 俛宇 郭鍾錫(1846-1919)은 한주 이진상의 문인으로서 우도 지역은 물 론 좌도 지역을 포함하여 전국적 명망을 한 몸에 받는 대유가 되어, 고종의 지 우를 입었으나 망국의 현실을 되돌릴 수는 없었고, 경술국치 이후 1919년 파리 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조선 유림의 대표로서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를 보내 는 일을 주도한 뒤 일생을 마친 인물로, 그의 저술이 너무 호한하여 근래에 이 르도록 깊은 연구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면우 곽종석의 여러 면모 가운데 남명학을 계승하고 있는 측면을 부각하여 그 양상과 의미를 더듬어 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면우는 태어나고 자란 곳이 남명학파적 요소가 뿌리 깊은 곳이고, 혈연 을 중심으로 살펴본 그의 가계에서도 남명학파적 요소가 두드러진다. 그러나 학연의 측면에서 보면 한주 이진상의 학문을 계승하였으므로 퇴계학파적 요소 가 두드러진다. 둘째, 면우는 남명 정신의 핵심을 그의 ‘敬義’ 사상에서 찾고, 이 사상이 우도 지역 곳곳에서 면면히 전승되어 왔던 것이므로, 앞으로도 계속 전승해가야 한 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셋째, 면우는 「신명사부」를 크게 네 단락으로 구성하여 신명사의 유래, 靜的 居敬의 상태, 處事接物時에 私欲과 邪念이 일어나는 과정, 이를 廝殺하여 이른 바 ‘復其初’하는 과정 등을 신명사가 겪는 治亂의 역사로 상정하여 매우 역동적 으로 묘사하였는데, 이를 남명이 내세웠던 경의와 관련하여 생각해 보면, 앞의 두 단락은 敬을 드러낸 것이고, 뒤의 두 단락은 義를 드러낸 것이다. 敬義를 직 접적으로 내세우지 않으면서 敬義의 의미를 매우 심도 있게 드러내었다. 넷째, 면우는 南冥을 매우 尊慕하였지만 退溪와 함께 崇尙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남명학파의 학문적 전통이 희미해지면서 남인의 경 우 퇴계학파의 학문이 서서히 그 자리를 대체해 온 결과라 할 것이다. 남명의 사상 가운데 그 핵심이라 이를 ‘敬義’에 대한 계승 의지는 면우 또한 매우 투철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맞물려 있는 엄정한 출처와 실 천 지향의 측면은 다소 약화되고 성리학적 이론에 대한 면밀한 탐구가 있었으 니, 이는 대체로 퇴계학파적 면모의 확대로 인한 자연스런 현상으로 보인다. 학 자로서 사우의 연원은 결정적이므로 면우의 문집에 퇴계학파적 면모가 두드러 지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남명학파로서의 자부심과 그에 대한 지향성이 뚜렷하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滄洲 河憕(1563-1624)은 晉州 丹牧 사람으로 南冥 曺植의 문인 河魏寶의 다 섯째 아들로 태어나 삼촌인 河國寶의 아들로 입계한 인물이다. 하위보의 아우 河晉寶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을 역임했으며 역시 南冥 曺植의 문인이 다. 하위보의 아들 河恒도 曺植의 문인이었고, 그 아들 河仁尙은 광해군 때 南 冥 曺植을 문묘에 종사해 달라는 상소를 주도한 인물이다. 게다가 河晉寶의 딸 이 鄭仁弘의 아들과 혼인하였으니 집안 전체가 남명학파라 이를 만하다. 河憕이 태어나 활동한 시기는 曺植의 영향을 직접 받은 그의 문인들이 왕성하 게 활동하던 시기와 겹친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曺植 문인들의 뜻을 받들 어 曺植의 정신을 확산시키는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가정에서 받은 영향 을 제외하면 그에게 가장 영향을 많이 준 이는 來庵 鄭仁弘과 寒岡 鄭逑 및 崔 永慶·河沆·成汝信 등이며, 가깝게 지냈던 벗 李屹·吳長·鄭蘊·趙㻩 등과의 교제 를 통해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입었을 것이다. 河憕은 1602년 이후 1611년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덕천서원의 여 러 건물을 중건하는 일을 주도하였고, 또한 1614년부터 1623년까지 덕천서원 원장을 하는 동안 1617년에 曺植의 학기유편을 덕천서원에서 간행하였고, 1622년에는 남명집 임술본을 간행하였으며, 1615년에는 고령에서 曺植을 문묘에 종사해 주기를 요청하는 소회를 주도하는 등의 일들을 하였다. 이는 그 가 1600년대 초기부터 1624년까지 진주 지역 남명학파를 사실상 주도하였음 을 알게 하는 일들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여러 가지 일들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정인 홍을 만났다거나 의논했다거나 그의 의견을 들었다는 등의 일은 그의 문집에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정인홍이 인조반정 때 적신으로 처형당한 뒤 약 300년 동안 신원되지 못하였던 데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다. 쌍계창수의 출현도 정인홍 문인의 후예들이 정인홍의 흔적을 부정하려는 의 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고, 그래서 결국 비슷한 처지에 있는 집안의 후예들이 모여서 세강계를 조직하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쌍계창수」와 「신안어록」 등은 曺植에 대한 추숭 사업을 가장 충실히 해낸 河憕의 일생을 잘 드러내려 한 것임 에도, 河憕의 스승으로서 끝까지 같은 시대를 살면서 曺植을 추숭하려다 죽음 에까지 이른 정인홍을 철저히 숨기려 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라 할 것이 다. 이것이 남명학파의 비극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떳떳이 이를 드러내어 사실 을 바로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결국 河憕은 내암 정인홍의 문인으로서 그를 대신하여 진주 지역에서 曺植을 추숭하는 일을 주도했으며, 이 가계의 노론화 도 기실 여기서 비롯하였던 것이다.
이 글은 19세기 江右地域의 대학자 晩醒 朴致馥의 남명학 계승양상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본 것이다. 본고는 만성의 학문이 定齋 柳致明을 통한 퇴계학파의 학설을 수용한 점과 性齋 許傳를 통해 근기 남인계 星湖學의 實用主義를 수용 한 점에 주목하여, 만성이 이 두 학문을 겸함으로써 전통의 학설을 바탕으로 하 면서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致用의 학문을 한 것으로 평가하였 다. 이런 점에서 그의 학문성향은 寒洲 李震相의 心卽理說이나 蘆沙 奇正鎭의 主理論이 전통의 성리설을 바탕으로 새로운 설을 전개한 것과 다르다. 또한 양 자를 兼取하였다는 점에서 퇴계학파나 성호학파의 학문성향과도 변별된다. 그 리고 학문이 침체되었던 강우지역에서 새로운 학문을 선도하였다는 점에서 학 술사적 의의가 크다. 본고에서 논한 만성의 남명학 계승양상은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된다. 첫째, 만성의 南冥遺蹟 探訪과 追崇事業으로는, 山天齋・白雲洞 등 남명유적을 찾아 추모한 것과 산해정 중건 기문을 지은 것을 들 수 있다. 둘째, 南冥의 文廟從祀 를 위한 노력으로는, 만성이 1888년 疏頭가 되어 상소문을 올린 것을 들 수 있 다. 셋째, 만성은 許眉叟의 문집 記言에 남명을 사실과 다르게 폄하한 「答學 者書」를 삭제해 줄 것과 「德山碑」의 개정을 요청하였고, 南冥集 重刊을 위해 교감을 보는 등의 노력을 하였다. 넷째, 만성의 現實認識의 측면에서 본 南冥精 神 繼承으로는, 「上時弊疏」에 나타난 현실인식과 민생구제정신이 남명의 상소 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섯째, 만성의 南冥에 대한 認識 및 論評으로 는, 남명을 소미성으로 상징되는 처사로만 보지 않고 傅說・富弼처럼 賢相名丞 의 자질을 가진 인물로 평가했고, 남명의 학문을 程子・朱子를 계승한 正學으로 보았으며, ‘秋霜烈日 千仞壁立’으로 일컬어지는 남명의 기상에 대해 敬義學을 전제함으로써 伯夷와 다른 성향으로 재평가하였고, 山海亭의 山海에 대한 해석 을 통해 남명의 정신지향을 泰山보다 높고 瀛海보다 크다고 평했다.
주지하다시피 남명 몰후 인조반정 이전까지 약 50년 동안은 남명학파가 역사 의 전면에서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시기라 할 수 있거니와, 인조반정으로 인 해 남명학파를 이끌던 내암 정인홍이 적신으로 몰려 처형된 뒤로부터 남명학파 는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정치적으로 북인이었던 남명학파가 인조반정 이후 남명집에 실린 정인홍의 흔적을 없애는 과정에서 적극적인 부류와 소극적인 부류가 대립하면서 남인과 서인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이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남인은 퇴계학파화하고 서인은 율곡학파화하였다. 그러나 진주를 중심으로 하는 江右 지역의 인물 가운데 남인화 또는 서인화한 두드러진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면, 그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체로 남명 학파의 학문정신을 나름대로 계승해 왔던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리고 이러한 지역적 분위기는 남인화 또는 서인화한 인물의 경우도 남명학파의 학문정신을 근본적으로 배제한 채 퇴계학파 또는 율곡학파의 학문을 수용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았던 것이다. 영조 4년(서기 1728년)에 일어난 무신사태 때 강우 지역에서 동계 정온의 현 손 정희량과 도촌 조응인의 5대손 조성좌가 세력을 규합하여 안의․거창․합천․삼 가를 한 때 점령했던 일이 일어났다. 이 일로 인해 강우 지역은 반역향이라는 인식이 심화되었으며, 이 지역의 선비들도 그 기상이 저하되고 남명학파로서의 학문정신에 대한 자긍심에 상처를 입었다. 그러다가 19세기에 이르면 학자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16-17세기의 학 문적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하였다. 당시 강우지역의 학자들의 남명학 계승양상 은 대체로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우선, 조선말기에 이르기까지 경상우도 지역에서는 그들이 비록 영남 남인 정 재 유치명의 문인이거나 기호남인 성재 허전의 문인이거나 호남 노론 노사 기 정진의 문인이거나 간에 남명의 경의 사상에 대한 계승의 의지가 확고함을 알 수 있다. 특히 퇴계를 경모하면서 한주의 주리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후산 허유가, 남명의 신명사도와 신명사명에 대한 정밀한 주해를 하면서 경상우도의 당대 선후배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하여 완성시켰던 점은 남명 사상의 근저를 확고히 하려는 의식의 소산이었다. 출처관 또한 남명의 영향이 당시까지 깊이 남아 있었다. 만성・단계・후산・노 백헌・물천・면우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이었음에도 과거로 발신한 사람은 단계 김인섭 뿐이다. 그런데 그 단계가 조정에서 물러난 뒤 수령들의 횡포가 극에 달 한 것을 보고 그 아버지와 함께 민란을 주도한 것은, 남명의 출처관과 현실비판 의 정신이 변모된 양상으로 후대에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남명이 남긴 시황계의 영향은 조선말기에 이르면 상당히 퇴색해지고, 성리학 이론에 관한 탐구를 배격하였던 남명의 정신도 많이 허물어졌다. 그러나 남명의 경의 사상과 출처관 등은 조선말기까지도 확고하고, 실천을 중 시하는 학풍 또한 깊이 젖어 있어서 성리설에 대한 학설 전개를 못마땅해 하는 분위기가 1900년 무렵에도 광범위하게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겉으 로 드러난 학맥상으로 보면 남명학파가 와해되어 사라진 듯하여도 실상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는 분명한 증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