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정부조직 콴고(QUANGO: Quasi-Autonomous Non-Governmental Organization)는 자율성과 독립성을 갖춘 비국가적 행위자로 국제관계 속에서 네트워크 촉매 역할을 한다. 본 연구의 목적은 콴고를 공공외교 관점에서 살펴보고, 어떤 요인이 네트워크 참여를 추동하는지 밝히는 것 이다. 개별행위자의 차원에서 조직구성원, 일시적 구성원, 잠재적 구성원 을 대상으로 인터뷰 설문조사를 수행하고 참여관찰자의 관점에서 조직의 특징을 추적 관찰했다. 분석결과 다음의 다섯 가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 었다. 첫째, 조직의 형태와 조직문화는 조직구성원의 관계성에 영향을 미 쳤고, 조직에 따라 네트워크 추동요인(상호통제, 헌신, 만족, 신뢰)의 일 부가 발현되거나 모두 작동할 수 있다. 둘째, 조직구성원-일시적 구성원 에서 중요하게 나타난 신뢰의 관계성은 종류와 정도에 따라 다른 양태를 보일 수 있다. 셋째, 조직구성원-잠재적 구성원에서는 신뢰와 만족이 추 동원인으로 작동했고, 콴고의 보편적 가치 추구가 중요한 네트워크 결정 요인이었다. 넷째, 국가성을 배제한 연대의 정체성이 성공요인으로 작용 했다. 마지막으로 문화 간 커뮤니케이션의 윤리성과 공공성의 충족이 네 트워크 형성과 확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본 연구는 정부 주도의 국제문화교류 축제 관람객의 참여 경험을 상호 문화주의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국제문화교류 축제의 질적 발전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사례로는 20년간 범아시아 축제를 지향해 온 ‘인바운드형 국제문화교류 음악 축제’인 ‘아시아송 페스티벌(Asia Song Festival)’을 선정하였다. 연구방법으로는 최근 3년간 본 축제를 관람한 경험이 있는 관람객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심층인터뷰를 진행하고, 이를 디어도프(Deardorff)의 상호문화역량 모형에 따라 분석하였다. 연구 결 과, 본 축제 관람객의 ‘태도’는 타 문화에 대한 높은 관심도 및 유사 축 제 참여 경험이 있는 등 개방적 태도를 보였지만 사업에 대한 인지는 낮 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지식과 이해’의 측면에서 본 행사는 타문화에 대 한 인지의 기회가 되었지만 문화별 특성에 대한 이해를 위한 도구 보완 이 필요함을 알 수 있었다. ‘내부적 결과(사고의 틀 전환)’에서는 음악을 매개로 한 교류 경험인 동시에 아시아 음악에 대한 관심 향상의 기회가 되었지만, 평소 대상국에 관심이 많은 관람객이 참여할 가능성이 높으므 로 아티스트의 사회적 이미지를 면밀히 검토해야 하는 것으로 분석되었 다. 마지막으로 ‘외부적 결과(행동 변화)’ 의 경우 향후 문화교류 현장에 서의 적절한 의사소통과 해당 국가 방문 및 추가 문화체험 등 구체적인 행동방식이 제시되었다. 본 연구가 한류를 매개로 한 정부 차원의 상호문 화교류 정책사업의 방향성을 고찰하는데 실무적이고 학술적인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본 연구는 사례연구로서 한중 문화교류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는 한 한 국 크리에이터의 내러티브를 통해 크리에이터의 직업 정체성 형성과정, 그리고 내포된 사회적 의미 추구를 구체화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본 연 구에서는 신종직업인 크리에이터의 직업 정체성 형성과정을 크게 출현- 확립-동요-공고화 4단계로 범주화하여 살펴봤다. 크리에이터 종사자들은 주로 자기중심적이고 개성적인 성격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직업 정체성 이 개인의 성격과 적성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구독자들에 대한 책 임감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얻은 인정이 직업 정체성 확립 과정에서 중요 한 역할을 한다. 확립된 직업 정체성은 불안정한 요소로 인해 동요될 수 도 있고,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거나 불안정한 수익을 증가시키는 방식 을 통해 직업 정체성이 다시 공고해진다. 또 크리에이터가 직업 활동을 개인의 가치 추구 실현은 물론 사회적 의미 추구하는 데에 중요한 수단 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의미를 실현하는 과정에서는 불가피하게 사회적 한계가 존재하니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최근 우리나라 문화콘텐츠의 위상은 우리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높아져, 전 세계에서 주류 문화의 하나로 자리매김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전 세계적 한류 열풍의 태동은 중국에서 시작되었고, 중국의 거대한 문화 소비시장이 우리나라 문화 콘텐츠 성장에 밑거름이 된 것은 확실하다 하겠다. 그러나 전 세계적 신(新)한류 열 풍과는 달리 한류의 출발지인 중국에서의 우리나라 문화콘텐츠는 최근 배척되고 심지어 혐한의 분위기마저 강하게 감지되고 있는 상황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한중 간 문화산업 교류의 유형부터 검토하여, 그 과정에서 어떠한 문제점들이 있어 현재의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는지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분석하여 그 개선점과 시사점을 도출하고자 시도하였다.
십이대영자문화는 보통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를 가리킨다. 요서지역에서 형성되어 요동지역까지 확산되었으며, 비파형동검문화권의 여러 물질문화 중에서도 가장 역동적인 전개 양상을 나타낸다. 또한 중국 동북지역에서 한반도에 이르도록 관련 문화요소들이 널리 확인되고 있어 장기간에 걸쳐 광범위한 교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십이대영자문화는 목질 장구를 사용하는 토광묘계 묘제, 비파형동검과 기하학문 선형동부, 이중구연점토대토기를 주로 사용하는 토착 토기군이 그 문화 정체성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유구․유물 복합체로 이해된다. 다만 전개 과정에서 확인되는 중원이나 북방 계통 유물이나 토기류의 조합 관계가 약간 달라 여러 하위유형으로 구분되고 있다. 전기(1․2단계)에는 십이대영자유형과 오금당유형이 확인된다. 최고식의 동검이나 이전 단계 문화요소의 퇴축 양상으로 보아 요서 북부지역에서 남부지역으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십이대영자유형을 중심으로 정체성을 유지하는 한편 하가점상층문화와 경쟁․교류하며 발전하였다고 생각된다. 후기(3단계) 에는 남동구유형과 정가와자유형으로 분화된다. 요동이나 내몽고의 일부 지역까지 확산되는 한편 옥황묘문화와 활발하게 교류하여 청동유물 외에 토기문화까지 일부 전해진다. 두 하위유형은 수장층의 권력 기반이 다르므로 서로 다른 정치체와 관련됐을 가능성이 높다. 말기(4단계)에는 동대장자유형이 부상하여 요서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한다. 연국과는 직접적인 물적 교류 외에 인적 교류까지 있었다고 생각된다. 연국 계통 유물들이 다량 부장되는 것은 연국과의 교류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토착 집단 지배층의 권력 기반이 강화되는 양상으로 추정된다.
중ㆍ한 문화교류는 이미 오랫동안 발전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미래에도 계속 발전할 것이다. 더욱 인터넷 매체의 발전과 폭넓은 응용은 중ㆍ한 문화 교류에 새로운 특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도전을 직면하고 있다. 이번 연구에서는 중ㆍ한 문화교류의 필요성과 함께 현황ㆍ내용ㆍ형식 그리고 인터넷 매체에 의한 중ㆍ한 문화 교류의 새로운 특징과 새로운 도전을 분석하였다. 예를 들면, 인터넷 매체에 의한 중ㆍ한 문화교류의 구체적인 경로를 제시하였다. 이는 중ㆍ한 문화교류의 장기적 발전을 위하며 아울러 이론적 기초를 수립하고자 함이다.
미국 뉴욕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중남미 출신 한인 재이민자 102명을 대상으 로 실시한 풍부한 심층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재미한인들의 타민족 대상 종교 활동에 관해서 고찰하고 있다. 다문화적 배경을 가진 중남미 출신 한인 재이민 자들이 특히 남미계 대상 종교활동에 있어서 기여하는 바가 커지고 있다. 연구 조사결과에 따르면 뉴욕 지역에서의 한인과 남미계 이민자들의 종교교류가 네 가지 유형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남미계 이민자들이 한인교회에서 공간을 대 여하여 예배를 독립적으로 드리기도 하고, 한인 목사가 남미계 이민자들 대상으 로 한국어-스페인어 이중언어 설교를 하거나 혹은 스페인어 설교를 하기도 하 였으며, 남미계 이민자들이 한인 교회의 영어-한국어 이중언어 예배나 혹은 영 어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또한, 재미한인 일반 신도들이 거리에서 남미계 이 민자들을 대상으로 전도활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뉴욕의 특수한 다문화적 환경하에서 재이민자들이 이전 중남미에서의 타민족 대상 종교활동 뿐만 아니라 중남미 문화와 언어에 대한 지식과 친숙함을 활용하여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공녀제도는 고려와 조선전기에 외적의 침략과 전쟁을 막기 위해 생긴 하나의 회유정책(懷 柔政策)이며, 한반도의 많은 여성들이 어쩔 수 없이 중국으로 끌려가게 된 제도이다. 비록 공 녀제도는 고려와 조선에게 수많은 고통을 안겨줬고, 많은 폐단(弊端)도 초래하였지만 중국으 로 간 공녀들에 의해 적지 않는 부분에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정치, 외교, 음식, 복식, 언어, 음악예술 등 많은 분야에서 공녀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당시의 중 국에는 “고려양(高麗樣)”, “고려풍(高麗風)” 등의 신조어까지 생길 정도였다. 공녀제도는 한반 도의 역사에서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는 고통의 상처이고, 조혼(早婚) 등 풍습까지 낳은 원인이었지만 이 제도로 인해 한반도의 의(衣), 식(食), 음악예술 등 다양한 문화가 중국에 전 파되고, 꽃을 피웠다. 이러한 맥락으로 볼 때 공녀는 고대 한반도의 다양한 문화를 중국으로 전파한 육교역할을 하였고, 고대 한류(韓流)의 주역으로 여겨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국내외 문화산업 환경은 동북아의 문화산업교류 및 협력 가능성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제조업과 마찬가지로 비교우위 및 비교열위부분을 상호 보완적으로 교류한다면 경제적 실익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 한국의 경우 중·장기적 전략으로서 강점과 기회의 조합을 통한 문화콘텐츠 교류협력으로 경제적 실익을 극대화해야 할 것이며, 중·단기적 전략으로서는 약점을 강점으로 전환시키거나 극복하기 위한 자체적 노력이 필요하다.
둘째, 중국의 경우 중·장기 전략으로서 강점 및 기회를 최대화하는 전략과 중·단기전략으로서, 약점부분에서는 중국자체의 노력 또는 한국 및 일본과의 교류협력통한 체질개선과 위협부분에서는 한국 및 중국, 일본과의 합작투자 및 공동제작 등을 통해 위협부분을 최소화 또는 기회로 전환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셋째, 일본의 경우 마찬가지로 중·장기 전략으로서 일본의 강점과 기회를 최대화하는 전략이 바람직할 것이다. 중·단기 전략으로서는 약점부분은 일본자체의 노력 또는 중국 등 해외시장 진출교두보 마련 등을 통해서 극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협부분은 한국 및 중국, 일본과의 합작투자 및 공동제작 등을 통해 최소화거나 교류협력의 기회로 전환할 전략마련이 바람직할 것으로 본다.
본 연구는 사회복지적 차원에서 다문화가족을 위하여 교류분석을 적용하여 효과적으로 원조하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탐색적인 연구이다. 문헌연구 및 다문화가족 실천현장의 전문가를 대상으로 다문화가족에 대한 인식을 묻는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인터뷰 결과를 근거로 교류분석적 프로그램을 구성하였으며, 다문화가족지원센터에서 전문가에 의해 실시되는 다문화가족의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한 교류분석적 프로그램의 진행과정을 관찰하였고 참가자들의 프로그램 만족도를 평가하였다. 따라서 다문화가족들이 갖는 의사소통의 어려움, 문화적 차이, 생활양식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문제들을 대처하기 위해 교류분석적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더니 교류분석적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집단프로그램에 대한 만족도가 높게 나왔으며, 다문화가족의 문제점 해결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는 효과가 나타났다. 또한 교류분석적 프로그램은 다문화가족의 의사소통능력 향상과 문화적 차이와 생활양식의 차이 이해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예측할 수 있다.
경상도의 송국리문화는 발생지로 추정되는 충청지역과는 문화요소의 측면에서 相似點과 相異點이 존재한다. 그리고, 경상도내에서 內陸과 南海岸地域간 차이가 존재하며, 그 차이는 南海岸지역을 다시 東部의 洛東江下流域과 西部의 晉州圈域의 두 권역으로 나누어서도 확인된다. 남해안지역의 경우 두 권역의 가장 큰 차이점은 松菊里住居型에서 진주권역은 평면方形의 大坪里型, 낙동강하류역은 圓形의 梧谷里型이 절대 우세하다는 점이다. 또한 많은 勞動力의 동원과 이들에 대한 組織的인 制御力이 필요한 大形의 墓域支石墓가 梧谷里型과 關聯되었을 가능성으로 보아 주거형이 곧 時間性을 말해주는 증거일 가능성도 있다. 경상도 남해안은 송국리문화라는 그 자체만 보았을 때, 최종적으로는 바다를 건너 타 지역으로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은데, 현실적으로 남서쪽에 위치한 제주도보다는 남동쪽의 日本九州地方과의 聯關性이 크다. 실제 많은 연구에서 일본 야요이문화의 開花에 송국리문화의 영향이 컸음이 밝혀지고 있는데, 그 기본적인 바탕에는 송국리문화가 곧 農耕文化라는 점이 중요한 증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또한 무엇보다 송국리문화의 대표적인 요소인 송국리형주거지의 同型이 그곳에서도 그대로 수용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확실한 증거로 볼 수 있다. 즉 일본 야요이문화 초기에 확인되는 송국리형주거지의 형태가 경상도 남해안지역에서 많이 확인되는 일명‘梧谷里型’이라는 점에서 더욱 이 지역과의 관련성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The education of ]apanese in Korea will be heavily influenced by the recent cultural exchanges between Korea and ]apan and the introduction of new educational systems. Therefore, it is imperative that we be prepared to adjust ourselves to the changing international environment. To study the language of a country is to understand her culture or to acquire the means to understand it. ] apan has made steady efforts to expand the education of ] apanese in other countries as a way of helping foreigners better understand ]apan and the ]apanese. There have been civilian programs for that particular objective as well as. the Government-directed projects such as financial supports for a large number of foreign students. Paying attention to the ]apanese efforts, it is time for us to reexamine our educational system of ] apanese. We should not forget the past history in relation with ]apan. But we should not ignore the present reality, either. We are witnessing the ever-increasing inflow of ]apanese culture in Korea. We need to realize that an objective and precise understanding of ]apan and the ]apanese culture is needed for the best interest of our countηT. That is the reason why 1 argue for a search for a new method of ]apanese education.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correspondents of Chosun called on Japan twelve times, as a mission, from 1607 to 1811. The suite of Chosun Communication Facilities (correspondents) was composed of nearly 500 people including a senior envoy, a junior envoy, other envoyes, and cooks. After preparing traveling expenses, Sifts, foods, medicinal stuffs, and ginseng, they shipped people and freight in three passenger ships and three freighters. They departed from Pusan for Edo(Tokyo). There were 28 stop-overs on their way to Edo and the banquet was given for them at every stop. The arrangements of the table for each banquet were made up of 753 Seon(tables), 3Jeup(soups) and 15Che(dishes). 753Seon(tables) is Ganban(the table for decoration) and a substantial food reception was composed of 3Jeup(soups) and 15Che(dishes). 753Seon(tables) was called Dadopoong(the food of refreshment) style and this was the standard arrangement of the banquet table in Japan. It was comprised of 3Jeup(soups) and 15Che(dishes). On their way from Edo to Thusima Island, food was afforded to correspondents for later preparation and dining. The banquet that the master of Thusima Island gave was composed of the first and second style banquets. The first one was Chusun style and the second one was Japanese style.
Food goods traded between Korea and Japan during the middle period of the Cho Sun era included Insam (Jinseng), rice, beans, honey, perilla oil, starch, adlay, walnuts, pine nuts, jujubes, hazelnuts, and dired chestnuts as exports ; and pepper as imports. The number of Japanese envoies that visited regularly was one thousand five hundred people a year. The receptions that were held for them during the middle period equaled those of the first term of the Cho Sun era, but these receptions were only held in Pu-san. The expense of daily meals was broken down into 8 grades ranging from \129,300 to 2133. The daily meals included Jo-ban (breakfast), Jo-seok-ban (breakfast and dinner), and Ju-jeom-shim (lunch) for the Japanese who visited regularly. During the course of a year, the total amount spent on daily meals was put at a billion won. The banquet style meals included Ha-seon-da-rye (a welcome tea party), Ha-seon-yeon (a welcome banquet), No-cha-yeon (a banquet that was held on the street), and Ye-dan-da-rye (a drink banquet that was held when silk was offered as a gift). It also included Byeol-yeon (a banquet out of the dordinary), Sang-seon-yeon (a farewell banquet), and Myong-il-yeon (a banquet that was held on a national holiday). The banquet style meals were composed of Ceon-tack (to set a table for dinner), Sang-hwa (a flower that was put on the food), Kwan-hwa (to offer a flower when a banquet was held), Ju-9-jan (the ninth wine glass), Dae-seon (meat), music, and Jung-bae-rye (a banquet that was held again after a banquet). The Cho Sun government held banquets forty five times for the Japanese, the food expense for the banquets was put at two hundred and thirty million won.
Food goods traded between Korea and Japan during the first term of the Cho Sun era included Omija (fruit of the Maximowiczia chinensis), Jat (pine nuts), Insam (Jinseng), rice, and beans as exports ; and pepper, sugar, and medicinal stuffs as imports. The trade between Korea and Japan was a result of Japanese envoies' visiting. The official number of Japanese envoies who had exchanges with Koreans were two thousand people a year. Once the Japanese entered Korea, they did not need to pay for their living expenses for the length of their visit because the Cho Sun government bore the whole expense. The Cho Sun government gave formal receptions to them, which included daily meals as well as banquet style meals. The daily meals included Jo-ban (breakfast), Jo-seok-ban (breakfast and dinner), and Ju-jeom-sim (lunch). Meals were served four times a day. The banquet style meals included Sam-po-yeon (a banquet that was held in Sam-po), Kyong-joong-young-jeon-yeon (a farewell banquet, and a welcome banquet that was held in Seoul), Jyu-bong-bae (to offer a guest a drink by day), No-yeon (a banquet that was held on the street), Kwol-nae-yeon (a banquet that was held within the Royal Court). It also included Ye-jo-yeon (a banquet that was held in Ye-jo), and Myong-il-yeon (a banquet that was held on a national holiday). The banquet style meals were composed of Ceon-tack (to set a table for dinner), Sang-hwa (a flower that was put on the food), Kwan-hwa (to offer a flower when a banquet was held), Ju-5-jan (the fifth wine glass), Dae-seon (meat), and music.
Before Jin (秦) period, Oriental (Eastern) culture was established in Korea different from China. Bulgogi (babecued beef, 貊炙) and legume fermented soy were transmitted into China. Afterward, alcohol drink, rice cake and cookie, shic-hae (lactic acid fermented fish products), Kimchi (fermented vegetable) were introduced and modified for Korea. Buddhism was transmitted to Korea through China, but selective animal was used as food. Later period of Koryo Dynasty, meat-eating become common due to mongorian influence and distilled spirits was introduced by mongorian. During Chosun Dynasty, table setting of spoon and chopstick was established, due to Confucian influence, dog eating, raw fish and raw meat eating became popular and nutrition for elderly was developed, whereas tea culture declined. In recent period (under the Japanese rule) Chinese introduced chinese noodle, chinese cuisine, chinese pancake and sun-dried salt. many chinese cultivated chinese vegetables.
본 연구의 목적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문화간 의사소통능력을 기반으로 한 온라인 국제교류 순환학습 모형을 개발·적용한 후, 그 효과와 현장 적합성을 검증해보는 데에 있다. 이러한 연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Sercu(1998)와 Moran(2001) 의 문화 수업 모형과 교사 및 학생 요구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초등 온라인 국제교류 순환학습 모형을 개발하고 현장 적합성 평가를 실시하였다. 실험 수업을 5, 6학년 각 1개 반을 대상으로 하여 약 3개월 간 총 10회에 걸쳐 실시하고, 실험 전․후 검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문화간 의사소통 능력의 하위요소인 지식, 기능, 인식, 태도 영역에서 통계적으로 유의한 수준의 향상이 발견되었다. 마지막으로 본 연구 결과를 토대로 온라인 국제교류 순환학습의 차후 실행과 후속 연구를 위한 제언을 논의하였다.
동해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한국의 동해안과 일본의 서해안 일대의 문화가 공통적인 요소를 지니는 것이 많다. 그러한 예로 한국의 남부지방과 일본 규슈(九州)의 북부 지방에 존재 하는 ‘당일우귀(當日于歸)’의 혼속을 예로 들었다. 일본에서는 야마도 시대(大和時代)에 일시적인 처가 거주혼의 형태를 취했다가, 무가 시대(武家時代)에 부가 거주혼이 성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것은 한국의 남부지방과 같은 문화를 가졌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화적 동질성을 가지는 요소들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이런 전제를 세우는 경우, 일본의 호쿠리쿠 지방(北陸地方)에서 문헌에 정착된 <가가국의 뱀과 지네가 싸우는 섬에 간 사람, 뱀을 구하고 섬에 산 이야기>가 신라의 경역에 존재한 것도 같은 문화권에 속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환동해 문화권’의 설정이 가능하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네 개의 이야기, 곧 가야의 왕자 <쯔누가아라시토 설화(都怒我阿羅斯等說話)>와, 신라의 왕자 <아메노히보코 설화(天日槍說話)>, <연오랑 세오녀 설화(延烏郞細烏女說話)>, 고구려의 <날개옷 설화(羽衣說話) 등도 고찰하였다. 이들 설화의 고찰을 통해서, 한국으로부터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해로(海路)는 상당히 여러 개가 있었으며, 또 이주 집단들도 꽤 많았다는 것을 구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