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챕터는 과거 50년 연구개발정책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한국 산업과 경제의 성장과정에서 연구개발정책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가를 조명한다. 1960년 초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던 때부터 1970년 대 말까지 연구기반 구축기, 1981년부터 2000년까지 연구역량 축적기, 2001년부터 2020년 현재까지 연구개발 도약기 등 3단계로 나눠서 살펴본다. 연구기반 구축기간 중에는 연구개발 투자의 증가와 함께 본격적인 연구와 우수 연구 인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여러 국책연구기관을 설립하였으며 연구 단지를 조성하는 등 연구기반을 구축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 연구기관의 설립 필요성이 제기되자 주요 분야 연구조직을 KIST 부설 형태로 발족한 후 독립 연구기관으로 분리하는 것이 주요 정책이었다. 연구역량 축적기에는 정부가 연구개발 사업을 기획하여 추진하였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대학의 연구 잠재력을 조직화함으로써 연구역량을 축적하였다. 수출 고도화와 수출시장에서의 경쟁력을 향상해야 하는 기업들의 절박한 기술혁신의 필요성에 기인하여 기업의 연구개발 투자가 급속도로 증가했다. 2000년대에 이르러서는 우리나라 연구개발투자가 절대규모에서도 세계 5위국으로 부상했고, GDP대비 연구개발투자 비중에서는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이렇듯 연구기반 구축기, 연구역량 축적기, 연구개발 도약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는 매 20여년의 주기로 연구개발 시스템을 시대 상황에 맞도록 정책을 혁신하여 추진함으로써 오늘에 이르렀다. 과학기술의 혁신은 산업과 기업의 성장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정부의 도전적인 연구개발 투자는 정밀한 정책 기획과 추진이 병행되면서 그 효과가 발휘되었고 산업과 기업의 성장을 견인할 수 있었다.
중국 동북지방의 조선족 전통민가는 함경도와 평안도, 그리고 만주 지방형을 토대로 다양한 평면구성형태를 구성하고 있 다. 특히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 내륙지역과 중-러 국경지역에 산재된 조선족 민가는 두만강, 압록강 등 집중거주지역에 분포된 조선족 전통 민가와는 달리 이문화의 갈등과 동화 속에서 지역특성에 알맞은 공간형태의 변형을 돋보이고 있다. 그 중 띠캉 공간의 출현이 가장 대표적이다. 바닥을 원형으로 조성된 한족, 만주족 전통민가의 단순공간변형과는 대조적으로 조선족 전통민가의 띠캉은 마루방을 원형으로 주생활 행위의 계절성 변용에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띠캉(地炕) 공간을 중심으로 조선족전통민가의 공간변형과 주생활 양식의 변천에 대한 고찰을 통해 주문화의 전통지속과 농촌주거의 진흥에 도모하고자 한다.
조선시대 어보는 종묘의 사직을 이어간다는 상징적인 인장으로 왕 실의 끊임없는 영속성과 번영 발전을 기원하고, 조선왕실의 신성한 비장품의 가치를 지닌 존숭의 대상이다. 이러한 어보 보문의 서사인 (書寫人)은 전문서사관(篆文書寫官)이나 당시의 종친이나 문화인이 맡았다. 인문의 새김과 주조장인(鑄造匠人)은 관영 수공업에 종사하던 인장(印匠)·옥장(玉匠)·숙피장(熟皮匠)·주장(鑄匠)·조각장(雕刻匠) 등의 장인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상당히 완비되어 있는 인문(印文)은 연구자의 시야로 볼 때, 그 제 작과정에 아래와 같은 문화적 추형(雛形)이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첫째, 인문의 자형(字形)은 기본적으로 네모꼴이다. 둘째, 인면(印面) 이 대칭(對稱)이다. 셋째, 인문은 일종의 혼성(混成)된 미감을 갖고 있다. 보문(寶文) 자형의 변천과 특징을 살펴보면, 세종비소헌왕후금보 (110)에서 순조5년(1805) 영조비정순왕후금보(200)까지의 ‘소(昭)’자는 대체로 인면 장법에 따른 구첩전이거나 무전(繆篆)으로 새겨졌다. 그 러나 철종13년(1862) 순조금보(67)부터는 구첩전에서 벗어나 인전(印 篆)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헌(憲)’자는 세종비소헌왕후금보 (110)을 제외한 대부분이 구첩전(九疊篆)에서 벗어났다. 또한 ‘지(之)’ 자의 경우 숙종비인경왕후옥보(154)에서 선조비의인왕후금보(132)까 지는 구첩전 형태가 농후하다. 그러나 이후에는 서서히 구첩전에서 인전으로 바뀌었다. 또한 같은 년도에 제작된 동일한 글자인 ‘왕(王)’, ‘후(后)’, ‘지(之)’, ‘보(寶)’, ‘성(聖)’, ‘효(孝)’, ‘현(顯)’자를 보면, 동일한 글자라도 인면 장법상의 균형과 통일을 기하기 위하여 인면에 가득 차게 하는 구첩전이 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어보의 인문은 이체자가 대다수이다. 숙종9년(1683)과 고종9년 (1872)에 제작된 태조금보(5와 6)의 ‘강(康)’자, ‘헌(獻)’자, ‘성(聖)’자의 위 오른쪽 ‘입구(口)’ 등이다. 또한 숙종 7년(1681) 같은 해에 제작된 정종금보(7)와 정종비정안왕후금보(109)의 ‘의(懿)’, ‘온(溫)’, ‘왕(王)’, ‘지(之)’, ‘보(寶)’ 등도 이체자의 본보기이다. 더욱 이체자를 넘어 정종 비정안왕후금보의 ‘의(懿, )’자와 예종금조(10)의 <예종흠문성무의 인소효대왕지보> 의 지(之, )자는 오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결론적으로 어보는 전서에서도 도식적인 구첩전을 쓰고 있다. 그러 나 고종(高宗), 순종(純宗) 이후부터 인문 자체가 서서히 구첩전에서 탈피하고 있음도 알 수 있었다.
본 연구는 공손 관점에서 호칭어의 사용 양상을 고찰하였다. 공손의 의미와 표현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호칭어 역시 시대와 함께 변화한다. 이에 본 연구는 통시적인 관점에서 호칭어의 변천 양상을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1930년대부터 현재까지 시대별로 호칭어의 사용 양상을 조사하고, 변화 과정과 그 특징을 분석하였다. 호칭어는 사회적 통용 호칭, 사회적 친족 호칭, 직업·직함 호칭, ‘老+성’ 호칭 등이 있다. 시대와 맞지 않는 호칭어는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호칭이 생겨나기도 하고, 또 어떤 호칭은 시대에 따라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나 내용이 달라지기도 한다.
This paper provides a comprehensive description of previous studies of making and developing kimchi in terms of the origins of kimchi and the changes in the history of kimchi, along with newly discovered data, including the collection of works in Joseon Dynasty as well as old cookbooks discovered after the year 2000, and latest research in related disciplines, e.g., ancient history studies, archeology, and linguistics. Because new ruins and relics, such as the Liao-ho Civilization in the Northeast Asia continent, which was closely related to Dongyi tribes, have been discovered and studied, it is important to determine how to reflect the outcome of archeological studies on the origin of preserved vegetables. In addition, to describe the background and changes in the independent formation of making Korean kimchi chronologically, they were divided into the following: development from jjanji to singunji; formation of the basis for seokbakji dressed with fermented fish sauce; settlement of seokbakji culture for dressing seokbakji with fermented fish sauce and spices, including chili varieties when they were introduced; and establishment of the method for making whole cabbage kimchi, which is currently typical kimchi made by adding the seokbakji as the stuffing of the cabbage kimchi, to examine the time and specific details of the change.
본 연구는 통시적인 관점에서 현대중국어 공손표현의 변천 양상을 개괄하여 그 특징을 명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3, 40년대부터 현재까지 시대별로 공손표현의 사용 양상을 조사하고 그 변화 과정을 분석한다. 인칭대명사 존칭, 친족에 대한 존칭(尊称)과 겸칭 (谦称), 노인에 대한 존칭, 서술성 경어와 겸양어가 작품 속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으며, 또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그 특징과 차이점을 논의하였다. 공손한 표현은 시대적 변화에 민감하다. 그 시대에 맞지 않는 공손 언어는 사라지고, 새로운 시대에 맞는 공손한 표현이 사용된다. 경어와 겸양어의 사용은 약화되고, ‘사교성 인사말, 사양하는 표현’인 ‘客套语’ 가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현대인의 공손표현이 되었다.
This research focuses on the cadastre and cartographic tradition regarding the representation of Rome that had lasted until the middle of 18th Century. Since the early period of Roman Republic until the early 18th Century, map was considered as a effective medium to record the status of urban facts and also a manifestation of changing perception of reality. These facts allow to diagnose social and conventional changes that had occurred in the field of representation techniques and methodologies derived from diverse intention and objective in elaboration of each map. Cartography also has affinity to architectural drawing as many categories of individuals are involved, clients, researchers, craftsmen, publisher and collectors. Fundamental task of documenting the contemporary physical reality was given to the map, however, as architects had practiced through the drawings, cartographers also reconstruct in subjective way specific buildings and urban aspects according to various needs and demands. As such, philology and imagination play important role as two constitute extreme poles in the evolution of the cadastre. Through analysis of paradigmatic examples in the genealogy of cartography of Rome, it was possible to understand the changing episteme that testify the mentality and custom in the field of visual representation.
전각은 인류 문명의 시작과 그 궤를 같이 하면서 많은 변화와 발전이 있어 왔다. 그 표현대상에 있어서도 초기 신석기 시대 도기에 찍었던 문 양에서부터 도상·도안·문자로 변천하였으며, 그 용도 또한 실용과 신 표의 표시에서 완상용·주술용으로 변모하여 당시 사람들의 토템이즘과 샤머니즘을 표현하는 대상으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용도의 변화는 당시 사람들의 시대의식 및 민속의식과도 밀접 한 관련이 있어서 부귀·장수·벽사·압승용으로 차고 다니는 애장용으 로 까지 발전하였다. 특히 圖像印을 통해서는 祈福의 의미가 강화되어 위진남북조시대의 도교인들은 산속에 기도하러 갈때도 맹수나 귀신을 쫓기 위해 <황신월 장>이라고 새긴 인장을 차고 갔으며, 이러한 풍습은 도상인의 예술성을 더욱 드높게 하여 원대의 押印으로 발전하였으며, 명청대 이후 독자적인 예술로 체계를 갖추게 하였다. 즉 단순한 실용에서 독자적인 예술체계를 확립하기까지의 과정에서 많은 용도 변천이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출현한 전각작품들의 형식과 내용을 통해 전각이 갖는 의미와 상징성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전각이 단순한 실용적, 예술적 예술분야의 산물만 이 아니라 인류의 문명과 더불어 생성되고 변천되면서 발전한 역사적 유 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음을 조명하여 그 가치를 드높이고자 하였다.
This paper examines the transition of the Hungarian men’s costume. Transition of the Hungarian men’s costume can be divided into pre-eighteenth century, eighteenth century, and since the nineteenth century. Hungarian costume was derived from the Magyar who settled in Hungary in the ninth century. Hungry had begun to accept Western culture in the tenth century, so when the prototype of Hungarian costume was completed, it consisted of Dolman, Mente, pants, and boots combining traditional Magyar style with Western European style. In particular, Dolman shows the uniqueness of the Hungarian men’s costume; it has a high, stand-up collar in the back center, closes on the left, has a right front plate with a diagonal cut at the waist, and a wide front closure. In the eighteenth century, Hungarian men’s costumes played an important role in displaying national pride while living under the oppression of the Habsburg Empire. In particular, Dolman was worn as a uniform at the battle of independence (1703~1710). This dress of male courtiers became the distinctive style of the eighteenth century and then became the basic style of men’s costumes. Since the nineteenth century, Hungarian men’s costumes have acted as an means to promote the national consciousness of Hungary through the Citizen Revolution (1848), the War of Independence (1849), and the formation of the Dual Empire (1867). Looking at evolution of the Hungarian men’s dress style, it reveals that resistance and struggles against other nations, a history of aggression, and living under oppressed are factors that impact on important clothing transitions.
근대 유럽 지도에 나타난 한국 관련 지리정보는 중국이 「황여전람도(皇輿全覽圖)」를 발간하고 이 지도가 당빌에 의해유럽에 번역‧소개되면서 질적·양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이후 18세기말부터 프랑스, 영국 및 러시아 등에 의한 해안 및 수로조사결과가 반영되면서 한반도 모양을 비롯한 지리정보의 양과 질이 풍부해지는 계기가 된다. 특히 서양 탐사선에 의한 해안선 및도서지역 탐사는 선박의 국적에 따라 그 나라 언어로 지명을 부여하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초기에 중국어 발음으로 표기되던 우리나라와 관련된 지명은 김대건 신부에 의해 한국어 발음의 프랑스어로 제작된 「조선전도」가 유럽으로 전파된 시점을 기해각국의 지도에 반영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1872년의 스틸러의 지도에서 대부분 우리나라 발음으로 지명이 표기된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어식 표현의 확산은 일본주재 외교관이었던 어네스트 사토우와 「한반도 산맥도」를 저술한 고토분지로의역할이 컸던 것으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