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정전의 해석 중 찬미와 풍자의 대응 구도를 통해 시를 해석하고 설명 하려는 美刺說에 대해 논술한다. 시경의 작품을 미자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생각은 원시사회 천인관계에서 巫의 역할인 祝辭와 嘏辭로 길흉을 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 다. 후에 君民關係에서 중개자로서 매개체인 臣이 공덕과 과실을 시를 통해 말하는 것이다. 간언을 통해 정치득실을 반영하여 君에게 국가존망의 문제와 관련한 권선징 악의 필요성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漢代 지식인들은 漢代 이전부터 지배자나 피지 배자가 통치에 대해서 역사적인 사실과 관련지어 시비를 판단하고, 시를 이용하여 찬미와 풍자를 통하여 간언한 것을 알았다. 이런 시경의 미자개념은 꾸준히 계승됨 을 확인할 수 있다. 모시서는 시경의 작품을 찬미와 풍자를 통해 설명하기 시작한 가장 빠른 시기의 해석체계라고 할 수 있다. 미자개념은 모시의 해석체계가 선진시 기부터 유가의 경전해석체계가 성립되기 시작하면서 양한시기에 이르러 모전과 모시서가 완성되고 정현이 箋을 완성하는 과정을 통해 점차 구체화 되는 과정을잘 보여준다. 정현의 미자설은 前人의 詩敎사상을 總結한 기초에서 경학가로서의 학 식과 문인의 정치열정으로 나타난 것이다
It is generally believed that the meaning of “Yi (泗)” in the Book of Songs has been nasal fluids since Mao Heng, and has been explained from the perspective of borrowing, phonetic and ideographic word-formation, etc. However, there are still seven questions about the exact meaning of “Si (泗)”, which arouses different doubts about it. From the perspectives of handed-down documents and unearthed documents, variant relationships, literary meanings, contexts, dialects and so on, the word “Yi (泗)” of “Ti Si Pang Tuo (涕泗滂沱)” should be “Yi (㳑)” meaning that the water is full and flowing out. Furthermore, “Yi (泗)” has heterogeneous relationships with “Yi (益)”, “Yi (㳑)”, “Yi (溢)”, “Yi (洫)” and “Yi (泆)”, and has homologous relationships with “Ti (涕)”, “Yi (洟)” and “Ti (嚏)”, and has an isomorphic relationship with “Si (泗)” of “Si Shui (泗水)”. These relationships can be used to collate unearthed and handed-down documents.
이 연구는 중국 선진 시대 대표적인 경전인 시경에 나타나는 악(樂)과 화(和)사상에 대한 고찰을 목적으로 한다. 이 연구에서는 “예”보다는 “악”에 집중하여 악이 어떤 규칙으로 완성되고 어떤 기능을 하였는지에 초점을 맞추려 한다. 음악의 규칙은 자연의 오행과 연관이 되어있는데 이런 철학적 원리보다는 음악이 어떻게 화를 이루는 수단이 되고 교화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하는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본 연구는 시경에 수록된 시의 구체적인 예를 분석하기 전에 중국인들의 풍류의식과 더불어 제천 의식에서 가무의 사용을 먼저 다루고 군사나 전쟁 중에 음악이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 고찰할 것이다. 고대 중국인은 예(禮)를 중시함 으로써 사회적 화합을 강조하는 화(和) 사상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러한 인식은 시경의 여러 시를 통해 발견할 수 있는데, 본고에서는 시경에 가장 먼저 실린 시 관저(關雎) , 그리고 탕 왕(蕩王)을 기리는 시 나(那) 의 구체적 사례 분석을 통해 악이 어떻게 화를 추구하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본 연구의 주된 목적은 화를 추구하는 중국인의 사상을 시를 통해서 살펴 보고 분석하면서 예악과 화에 관한 사상들을 살펴보는 것이다.
진 나라 이전의 중국 문헌에서 발견되는 특징의 하나는 사람들이 상대방과의 대화중에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는 것이다. 공자의 언행에 대한 기록이 많은 두 종류의 책이 있는데, 하나는 『논어』이고 다른 하나는 『공자가어』이다. 이 두 종류의 책에서 우리는 거의 100 개가 넘는 『시경』 인용 사례를 볼 수 있다. 공자는 왜 이처럼 많은 대화에서 『시경』을 말했을까. 이 모든 사례의 분석을 통해서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첫째, 공자는 자기 말 과 자신의 논리에 권위를 더하기 위해서 『시경』을 인용했다. 둘째, 공자는 자신의 말에 별 의 미 없는 수사적인 효과를 위해서 『시경』을 인용했다. 셋째, 당시 『시경』은 문화적으로 또 문 명적으로 당시 사회의 정신적 결정체였다. 특히 지식인들의 중요한 정신적 공감대이며 문화 적 공통분모였다. 공자는 당시 귀족과 지식인들에게 귀중한 교재였던 『시경』에 깊이 공감했 다. 보수적인 사상을 가졌던 공자는 그렇기 때문에 그런 문명적 권위와 문화적 공통분모인 『시경』에 자신의 논리를 의존했던 것이다.
This paper aims to explore the roles of Shijing in th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the Joseon Dynasty and neighboring countries including China. Section 1 of Chapter 2 examines the good-neighbor policy of the Joseon Dynasty implemented throughout the diplomatic relations with Jurchen and Japan. Section 2 investigates the trends of submissive diplomacy practiced by the Joseon Dynasty and deeply rooted in its relations with the Ming and the Qing Dynasty. Section 1 of Chapter 3 analyzes the roles of Shijing applied to the good-neighbor policy toward Jurchen and Japan from the Confucian perspective. Section 2 of Chapter 3 looks into the roles of Shijing throughout the trends of submissive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Ming and the Qing Dynasty.
The study learned that the good-neighbor policy towards Jurchen and Japan implied confidence of the Joseon Dynasty being a far more superior Confucian civilization to those two nations. The submissive diplomatic relations with the Ming and the Qing mostly confirmed that the Joseon Dynasty was inclined to accept the environment where distinct discrepancy in national power and culture between the Joseon Dynasty and those two nations was evident.
In this dissertation, we try to find out the iconization of Shijing(詩經). In order to have better understanding of Shijing(詩經), different analysis was done in the matter of the confucian classic side.
In ancient China, they had very old tradition of reading books in a specific way, which is called ‘Zuo Tu You Shu(左圖右書)’. This means that people would read books with the picture on the left side of the book, and the Chinese characters on the right side of the book. Because of this, iconography of the Shijing(詩經) varied after Late Eastern Han Dynasty period of time.
The Illustration of the Shijing(詩經) can be divided into two kinds depending on the characteristics of the picture. The first kind is practical paintings of all things, which depicts flowers, tree, fish, or regular things in the daily life, and the second kind is poetry-based-Paintings, which translate poem into drawing. However, in my dissertation, I argue that the illustration of the Shijing(詩經) can be divided into three kinds, and the last one is character paintings. all three of this pictures contributed to the interpretation and dissemination of the Shijing(詩經). However, specifically character paintings mostly highlighted the confucian classic side of the Shijing(詩經).
So far, illustration study of the Shijing(詩經) belittled the character paintings. This was because they had many letters, but few illustration that depicts the feature of the figure. However, if we look at the view of the letter studies, we need to pay more attention to the visual effect of the letter characters. That is because, visual aspects of letter characters can have enormous effect on the readers since they can incorporate more value beyond its own literal meaning of the letter.
동한(東漢) 비각에는 적지 않은 『시경(詩經)』의 내용이 인용되어 있으나, 직금 전해지는『시경(詩經)』과는 다른 이문(異文)을 형성하고 있다. 이문의 유형은 통 자가, 고금자, 이체자, 동의환용(同義換用), 탈문(脫文) 등이다. 동한 시기의 비문 은 주로 “삼가시(三家詩)”를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본고는 조선의 경학사에 일획을 그은 君王인 정조와 신하인 정약용의 학문적 만남을 詩經講義라는 텍스트를 통하여 조망한 논문이다. 이들의 만남에 주목하는 이유는 통상의 經筵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군왕이 자신의 의도로 선택한 인재와 질의응답을 통하여 새로운 경학의 세계를 확장하는 보기 드문 케이스이다. 우선 전통적 帝王敎育의 유형으로 정도전 · 권근 · 이황 · 이율곡 등의 사례를 들어 조선시대 경연이 추구하였던 이상적 교육상을 알아보고, 이것에 대응하는 역대 왕들의 경연 참석 상황을 살펴보았다. 정조의 캐릭터는 한마디로 말하면 好學의 學者적 君王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조의 유교적 이상정치와 현실의 실현이라는 점점에 정약용을 비롯한 초계문신이 위치한다. 초계문신 뿐 만 아니라, 정조의 정치적 학운 활동에는 학파 • 지역 · 신분 의 차를 초월하여 다양한 유자가 참여한다. 이러한 열린 학문 활동은 곧 당시 사회의 개방성에의 지향을 엿보게 함과 동시에 보편 문화의 성숙을 알려준다. 『시경강의』를 통하여 살펴본 두 사람의 기본적 경학관은 상당히 유사하다 양쪽 다 주자의 경학적 업적을 존중하지만, 논리상 부합하지 않는 사항에 대해서는 회의와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물론 정조는 정약용만큼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정조의 개방적 경학관에 힘입어 주자를 극복하는 정약용의 독창적 견해가 빛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이러한 脫朱子의 경학관은 정조시대의 새로운 학 풍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되었다, 정약용의 『시경강의』의 내용분석을 통하여 정치와 사회에 관한 두 사람의 견해 를 알아보았다. 특히 ‘賢人 ’에 있어서 정조가 유교의 전통적 賢人觀을 견지하고 있음에 비하여, 정약용은 어느 분야에서냐 기능이든 학문이든 할 수 있는 데까지 매진하여 어느 경지에 도달하면 그를 현인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고착화된 신분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난 견해로 받아들여진다. 그런데 ‘安民’의 문제에 있어서는 두 사람 모두 유사한 시각을 노정한다. 安民의 기본조건으로 治者계층의 德化를 중요시한다. 堯舜의 至治를 정치의 이상형으로 제시하고 그 실현을 위한 현실적 방법으로 治者는 古學의 가르침을 실천에 옮기는 것으로 想定한다. 이러한 본고의 고찰을 통하여 정조와 정약용과 갇은 군신 간의 학문적 활동은 글자그대로 敎學相長적인 만남이며, 조선경학의 실학시대를 만개 시킨 動力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