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16세기는 유교화의 진전이 상당히 발전된 양상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지난 1세기 동안 조선에서 유교의 정착을 위해 양반 관료와 사대 부 그리고 유생들이 국왕과 왕실과의 논쟁으로 얻어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 의식의 유지와 관련하여 유교 성리학을 정치철학으로 표방하 는 사대부로 대표되는 조선의 지식인들은 국왕과 왕실에서 여전히 고려 의 불교적 관습과 관행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것이다. 15세기의 유교와 불교의식의 대립은 국왕과 왕실로 대표되는 힘과 유교적 소양을 갖춘 힘 들 간의 간접적 대립양상으로 펼쳐졌으며, 결국 국왕과 왕실이 양보를 하 는 선에서 일단락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중종대의 기신재 혁파와 수륙재의 폐지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졌 으며, 명종대와 선조대에도 계속해서 존속해 가고 있었다. 이것은 성리학 을 공부하는 유생들의 상소에도 불구하고 왕실의 입장에서는 유교적 예 (禮)의 논리를 펼치면서 계속 지속시켜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16세 기 유・불 의식의 갈등 상황에서 불교계의 입장이 분명하게 기록된 문헌 을 찾을 수는 없다. 그보다는 실제의 의식집 혹은 불교 의례문으로 알려 진 청문(請文)의 존재를 통해 간접적으로 불교계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 게 된다. 청문이란 오늘날 불교 의식집으로 알려져 있으며, 불(佛)·보살 (菩薩)을 청하는 글이다. 여기에는 청문의 방법과 내용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법식(法式), 의식(儀式)의 절차, 진언(眞言) 등을 수록하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선조7년(1574) 안변 석왕사에서 개판한 목판본을 중심 으로 청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자료를 통해 16세기 유・불 의례 의 갈등에서 불교계는 종국적으로 불보살에 대한 공양(供養)과 조사와 영 가들을 위해서는 영반(靈飯)과 시식(施食)을 반영했다는 것을 살필 수 있 다.
본 연구는 201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성장한 한국 창작 뮤지컬의 음악적 특징과 장르적 실험을 고찰하는 데 목적을 둔다. 특히 뮤지컬 『스웨그 에이지: 외쳐, 조선!』을 중심으로 하여, 한국 전통 음악과 현대 대중음악의 결합 양상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드러나는 문화적, 미학적 함의를 탐색하였다. 『스웨그 에이지』는 조선시대라는 역사적 배경 속에 상상적 요소를 가미하고, 시조 라는 고유한 시형식과 국악의 리듬 및 음색을 현대적 장르인 힙합과 결합함으로써 뮤지컬 음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작품은 시조를 '랩'으로 재해석하고, 국악기의 활용과 한글 운율을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장르 융합을 통한 독창적인 사운드 디자인을 실현하였다. 또한 사회적 억압 속에서 민중이 목소리를 되찾아가는 서사를 통해, 동시대 관객과의 정서적 공감과 사회적 메시지 전달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의 효과를 거두었다. 본 논문은 『스웨그 에이지』를 사례로 하여, 한국 창작 뮤지컬이 단순한 오락적 장르를 넘어 한국적 정체성과 예술적 창의성을 구현하는 장르 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in the Joseon Dynasty (1433-1438), the Daegyupyo (large gnomon) was produced. The Daegyupyo, with a crossbar (horizontal bar), was used to observe the length of the gnomon’s shadow cast by the sun passing at the meridian. The shadow of this crossbar can be obtained using a measurable device called the Yeongbu (shadow definer). These Daegyupyo and Yeongbu are described in detail in the “Treatise on Astronomy” of Yuan History or “Celestial Spheres and Globes” of Jega-Yeoksang-Jjp (Collected Discourses on the Astronomy and Calendrical Science of the Chinese Masters). According to Jega-Yeoksang-Jjp, the Yeongbu had a structure similar to a door attached to its frame. A pinhole is located in the center of a copper leaf corresponding to the door of the Yeongbu. The image of the sun’s meridian transit and the shadow of the crossbar through the pinhole are projected onto the surface of the Daegyupyo’s ruler stone. Unlike the width and length of the Yeongbu, the height of the Yeongbu is not recorded. This research analyzed the height of the Yeongbu required to maintain the constant distance from the pinhole to the ruler stone surface. Based on these assumptions, it was estimated that 8 to 13 Yeongbu of different heights would be needed for observations using the Daegyupyo in Seoul. To accommodate the need for Yeongbu of various heights, this study proposed a model for a stackable Yeongbu with an adjustable height.
Dynasty and Japanese colonial period using historical texts and dictionaries. For Mat-bae roofs, component-related terms include Bak-gong, Bak-poong, Poong-pan, and Poong-cha, while Bae-jip refers to the roof as a whole. Bak-gong was more commonly used than its synonym Bak-poong, and its Chinese character representation varied. Poong-pan, derived from Pung-cha, replaced it in the 19th century, while Bae-jip’s use in Joseon-era texts is unclear. For Pal-jak roofs, component terms include Chu-nyeo and Hap-gak, while Paljak refers to the entire roof. Chu-nyeo has both linear and planar meanings and appeared with diverse Chinese character forms and Korean spellings, evolving over time. Hap-gak, synonymous with Heo-ga, became recognized as a native term until the 1940s. Pal-jak, often written as 八雀 in Joseon texts, likely originated from the Korean mimetic word Pal-jjak, reflecting its meaning and sound.
이 연구는 조선 후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관방도 성격의 함경도엽에 대한 지리・서지학적 고찰을 통해, 지도의 특징과 가치를 규명하는데 목적이 있다. 이 지도는 함경도 지역의 지형, 지세, 군사 시설 등을 상세히 표현하고 있어, 조선 후기 국방 정책 및 군사 전략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지도의 기호와 주석을 해제한 결과, 청나라가 언급되었다는 점, 백두산정계비가 표기된 점, 지도의 제작기법과 형태가 정상기의 동국지도와 매우 유사하다는 점, 홍충도의 지명이 사용되지 않은 점 등을 근거로 1740년에서 1778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도는 동국지도의 초기 수정본 계열에 속하며, 군사・방어에 치중한 특성이 두드러진다. 이 연구는 기존 연구에서 간과되었던 개인 소장 고지도를 분석하고, 지도에 나타난 기호와 주석을 심층적으로 해제하여 그 의미를 구체화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함경도엽의 정확한 제작 연도를 밝히지 못하고, 모든 지리 정보를 분석하지 못하였다는 한계도 가진다.
기장읍성 체성은 동,서, 북벽은 사직선기단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남벽 체성은 수평기단 으로 축조되어 있다. 이 중 남벽 체성은 기저부 조성시 바닥에 판석을 깔아서 그 위에 지대 석과 성석을 축조하는 반면에 동, 서, 북벽 체성은 기반암을 정지하고 그 위에 자갈과 할석 으로 다진 후 할석으로 기저부를 축조하는 차이가 있다. 기장읍성 체성 내벽은 기본적으로 계단식으로 축조하였으며 이후 내탁식으로 개축되었으며, 체성 너비는 초축은 6-7m 사이, 이후 내탁부까지 포함하면 10m 전후에 이른다. 초축 당시부터 외벽기단보축을 설치하였으 며 서벽 체성 일부에서 여장 기단부가 잔존하는 것이 확인된다. 기장읍성에서 확인되는 부대시설은 옹성문지, 치성, 해자, 수로 등이 있다. 이 중 옹성문 지는 기록에는 3개소로 이 중 동문, 남문 2개소가 확인되었다. 반원형 편문식 옹성이 덧대어 져 축조되어 있으며 옹성 규모는 조선 전기 연해읍성에서 확인되는 것과 대동소이 하다. 개구 부 및 성문 너비 역시 3.5m 전후로 성문 평면은 초축에는 체성 육축부 좌우가 돌출한 “┍ ┑” 형 개석식으로 축조되었다가 수축 시 “∥∥”으로 축조되었으며 동, 남문이 동일한 양상이 다. 다만 남문은 기장읍성 정문인 관계로 평지에 설치된 반면 동문은 구릉 정상부에 위치하 고 있어 전체적으로 경사지게 축조되어 있다. 따라서 세종조 연해읍성 축조 시기에는 옹성 체성과 읍성 체성이 같은 너비로 축조되다가 문종조 이후로 갈수록 옹성 체성 너비가 읍성 체성 너비보다 넓어지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기장읍성 옹성은 세종조 년간에 축조가 이루 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기록과도 부합되는 것이다. 기장읍성 치성은 기록에는 6개소로 알려져 있다. 이 중 동벽에서 2개, 동남성우 1개 등 총 3개소가 확인되었다. 세종조 규식으로 정한 150척(70m) 마다 1개소를 설치하는 것에는 부 합하지 않는다. 또한 규모는 당대 규식인 17척×20척 방대형에 부합하는 치성과 적대가 동 벽에서 확인되고 있다. 특히 동벽 적대는 규모에 있어, 동남 치성은 축조수법에 있어 여타 연 해읍성에서 확인되는 치성과 대동소이하여 세종조 년간에 축조된 것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기장읍성 해자는 동, 서, 남벽 바깥에서 모두 확인되고 있다. 이 중 남벽 해자는 체성으로 부터 약 9~12.6m 떨어져 축조되었고, 남문지 옹성 지대석을 기준으로 6.4m정도의 이격 되어 있다. 서벽체성과 해자 이격거리는 약 8~10m 이다. 동벽 체성과 해자 이격거리는 11m로 체성과 문지 주변 해자 이격거리는 1:0.5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기장읍성 해자 역 시 남벽과 서벽, 동벽에서 확인된 이격거리가 9~12.6m, 8~10m, 11m로 여타 경상도 연 해읍성 및 영진보성과 대동소이함을 알 수 있다. 다만 남벽과 서벽 사이 간격차가 1~2m 가 량 확인되고 있다. 기장읍성 서벽 해자 너비는 3~4.6m, 깊이 42~100cm 내외이다. 남벽 해자 너비는 5.5~6m 내외이다. 이 중 남벽 해자는 거제 고현읍성과 웅천읍성 동남벽 해자, 전기 동래읍 성 해자 너비와 유사하거나 일치한다. 이것은 세종 16년(1434)에 축조된 웅천읍성 동북벽 해자는 너비가 7m에 이르는 반면 문종 이후 축조된 것으로 파악되는 동남벽, 남벽 해자 너 비는 5m 전후로 축조되고 있다. 따라서 기장읍성 해자는 문헌기록을 참고하면 문종 1년 이 후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남벽 체성 축조수법과 동, 서, 북벽 등 의 축조수법에 차이가 있음에도 참고점이 될 수 있다. 기장읍성 해자 내부에서 확인되는 목 익(木杙)은 극소수가 확인되었다. 남해안 연해읍성 해자에서 확인된 잔존 목익 크기가 50cm에서 1m 전후로 확인되고 있으며 기장읍성에서 확인된 목익 역시 대동소이 하다. 끝으로 기장읍성 내 수로가 확인되었다. 이 수로는 서부천으로 명명된 하천이 통과하는 곳으로 기장읍성 고지도에도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최근 조사결과 추정 입수구와 덮개돌, 수로 호안석축이 중복되어 확인된다. 이 호안석축은 석축방향에 따라 기존 알려진 서부천 복개구역보다 더 남쪽에서 확인되거나 연접하고 있다. 아울러 이 호안석축과 대칭되 는 석축이 확인되고 있어 이것이 기장읍성 초축 성벽과 해자일 가능성과 증개축으로 인한 것인지는 기장읍성 남벽 체성, 해자 초축 및 증개축과 수로 축조 등에 대한 보다 명확한 양 상을 확인 한 후에 가능할 것이다.
본 논문은 식민지 말기 간행된 잡지 《관광조선》에 실린 특집 기사와 독자 투고문을 분석한다. 1939년에 창간된 이 잡지는 각 호마다 특집기 사를 구성하여 식민지 조선의 관광지와 산업·자원을 홍보하며 발전된 근 대 공간 조선을 부각했다. 그러나 이는 전시 체제가 강화됨에 따라 병참 기지화와 전쟁 동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양상을 보였다. 또한 독자 투고를 바탕으로 하는 「도시의 풍모」 글들을 통해 일본인을 포함한 대중들이 조선의 도시를 어떻게 체험하고 인식하는지에 대해 살펴보았 다. 근대적인 생활 인프라와 산업화·교통 발전·새로운 도시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홍보는 조선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그려내었다. 이 글을 통해 일본인들의 조선에 대한 장소애적 감정을 엿볼 수 있으며 이는 토포필리 아(Topophilia)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된다. 이를 통해 일본인들이 조선 에서 경험한 문화적 변화와 상호작용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은 식민지 후기 기행 담론과 매체가 제국주의 이념 및 전 시 동원 체제와 어떻게 맞물려 작동했는지를 살펴보고 그 속에서 나타나 는 조선의 변화상을 조망하고자 했다.
본 연구는 김일성·김정일 시대와 비교하여 김정은 시대 조선로동당 핵심권력기 구의 위상과 역할 변화,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주는 정치적 함의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였다. 김정은은 김정일의 선군정치로 약화된 당의 기능을 정상화하고, 제 7·8차 당대회에서 당규약 개정을 통해 당 중심의 국정운영체계를 확립하였다. 이 는 당이 군과 정을 실질적으로 지도⸱통제하며 국정 전반을 주도하는 구조를 완성 한 것이다. 김정은 시대의 당 중심 국정체계 확립을 보여주는 주요 사례로 당에 의한 시스템 정치의 부활과 함께 당정치국회의, 당중앙군사위원회, 군정지도부의 위상과 역할 변화를 들 수 있다. 북한의 최고 정책 결정 기구인 당정치국은 수령 제 강화로 김정일 시대에 유명무실해졌으나, 김정은 시대에 들어 수령제를 보좌 하는 기구로 권한이 강화되었다. 당중앙군사위원회는 김정일 시대에 실질적 역할 을 하지 못했으나, 국방위원회 폐지와 핵무력 강화정책을 통해 다시금 그 역할과 권한을 확보하였다. 또한 새로 신설된 군정지도부는 당 조직지도부와 군사부는 물론, 기존에 군 총정치국이 담당하던 군 지도·검열 기능까지 직접 수행하며, 군 통제체계를 다층적으로 심화하는 역할을 한다. 본 논문은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 로 김정은 시대 당군 관계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당 권력 기구의 위상 강화를 통한 권력 구조 안정화의 영향을 규명하였다. 이로써 김정은 체제에서의 당 중심 통치의 정치적 함의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이 글은 미륵사지 석탑 등의 문화유산 보수 재료로서 콘크리트의 물성에 주목하여 당시 문화유산 복원이 지니는 근대적 성격을 조명한 것이다. 전근대 시기에는 쓰이지 않았던 시멘 트라는 새로운 재료의 도입과 이를 이용한 문화유산 보수와 복원을 물질문화 연구의 관점에 서 이해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조선 고적 조사를 하던 일제 관학자들은 화강암을 주재료로 한 석조유물과 유적에 주목했지만 당시 일제는 석조유물 보수와 복원의 경험이 없었다. 조선 보다 앞선 문명을 자랑하던 일본은 근대의 물질 시멘트로 석조 문화유산을 보수했다. 시멘트 를 통한 일제의 미륵사지 석탑과 석굴암 등의 보수는 일제에 의한 근대의 이식이자 복원의 근대화라고 평가할 수 있다. 지속 가능한 문화유산의 현상 유지, 대량생산을 통한 균일한 품 질의 신재료 사용, 상대적으로 빠른 기간에 가능한 효율적인 공정이었다는 점에 일제강점기 시멘트를 통한 문화유산 보수의 근대성을 지적하고자 한다.
책가도는 조선 후기 상당히 유행하였던 새로운 장르의 그림이다. 소재와 형식 면에서 중 국과 관련성을 보이고 당시 빈번했던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조선에 전해지게 된 것으로 그 기원을 중국에 두고 발전된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지금까지 연구에서 책가도의 기원에 대 해 책가도와 부분적으로 개연성을 보이는 중국의 다양한 예들이 제시되어 왔지만 직접적인 관련성을 보여주는 사례는 거의 없었다. 때문에 책가도의 제작에 참고가 된 중국의 사례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심도 있는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유럽으로 수출된 중국 기물을 도해한 중국 책장 그림은 유럽 건축의 벽지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현재까지 전 해져 오고 있다. 이 그림들은 연대가 추정이 가능한 18세기 작품들로 조선시대 책가도가 유 행하기 시작하는 18세기 후반과 시간적으로 가까우며 투시도법과 명암법, 눈속임 기법 등 회화적인 기법이나 양식과 소재에서 책가도와 아주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유럽에 전해지는 중국 책장 그림들은 책가도의 원류와 관련이 있다 할 수 있다.
In the Joseon Dynasty, ‘Bocheom’ had the function of a shade, but in that it was a building that applied the construction method, it had a different structure and character from the shade as a simple facility. If Bocheom was placed on all four sides of the main building, the roof would be structured as a double-layer, making the entire building grand and splendid, so it was mainly adopted in authoritative architecture. The materials of Bocheom was significantly smaller than that of the main building, and it had square rafters on the roof, and no beams were installed between the Bocheom and the main building. Bocheom is an additional architectural element that is clearly distinct from the main building, and it is different from architecture where the roof is formed in layers and the floor plan is composed of the inner and outer floor. The outer and inner floor constitute a single building, but Bocheom is distinct from the main building. If the outer floor are removed, the building cannot be established, but even if Bocheom is removed, the proportions and function of the main building are maintained. Bocheom is an additional architectural element that makes the building grand and splendid and helps with the conduct of ceremonies, and for this reason, it was adopted in authoritative architecture of the Joseon Dynasty.
In March 2022, Wongu-ilyeong, a globe-like sundial made during the 19th century in the Joseon Dynasty, was repatriated from the United States through the efforts of the Korea Heritage Service and the Overseas Korean Cultural Heritage Foundation. This sundial has a total height of about 228 mm, and has time lines and a T-shaped gnomon on its spherical surface with a diameter of approximately 112.2 mm. This sundial is known to have been made by Sang Jik-Hyeon (尙稷鉉, 1849–?), as he carved his seal and the manufacturing date onto its spherical surface. This study investigated Sang, Jik-Hyeon's records from royal governmental literature, and also analyzed the structure of Wongu-ilyeong to understand its usage. We restored the Wongu-ilyeong’s design drawing and manufactured a prototype, with which we measured daytime hours in Jeju, Daejeon, and Seoul. The experimental measurements from three cities showed that the time accuracy of the Wongu-ilyeong, whose minimum time scale is 15 minutes, could be measured within ±7.5 minutes. Wongu-ilyeong is a very rare type of sundial-relic in Korea and overseas, and it is considered to have significant value in the history of science and technolo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