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study analyzes the characteristics of the Angbu-ilgu, a Korean sundial resembling a concave hemisphere, which was crafted in 1434 during the sixteenth reign of King Sejong (r. 1418–1450) of the Joseon Dynasty, although no remains of it exist today. We draw upon historical documents, such as the Sejong-Sillok (Veritable Records of King Sejong), Donggyeong-Jiji (Chorography of the Joseon Dynasty), and Yuanshi (History of the Yuan Dynasty), as well as related extant relics. The primary features of King Sejong’s Angbu-ilgu were as follows. First, celestial-circumference degrees were intricately engraved along the meridian line. Second, 12 double-hours were represented by images corresponding to their respective animal divinities. Third, a plate was affixed to the end of the gnomon, which stood perpendicular to the alidade, serving as a handle, rotated along two axes, and included a pinhole. Fourth, the diameter of the hemisphere measured 414 mm, approximately 1.5–2.1 times larger than extant Angbu-ilgu relics. Finally, four pillars supporting the Angbu-ilgu were positioned at four cardinal points. In conclusion, this study holds significance for restoring the Angbu-ilgu from the era of King Sejong.
In-beop-dang (因法堂) is a building type that can confirm the complex space composition of the hermitage in the late Joseon Period, which is designed to accommodate various functions such as Buddhist priesthood, living spaces, and auditoriums. These facts have been confirmed mainly through plan analysis in many previous researches. However, such a plan composition has the potential to lead to more in-depth research when dealt with consideration of the Korean traditional wooden structure. In particular, the composition of upper structure in In-beop-dang with Toi-maru in front of the On-dol room can be considered from the perspective of structural response to wooden architecture in the Joseon period after the introduction of Toi-maru. Based on the achievements of these prior studies, this paper was conducted to examine the compositional characteristics, including the upper structure of the Wha-jang-am (華藏庵) In-beop-dang. In order to examine the universal aspects of structural type changes to cope with the complex spatial composition of the In-beop-dang, the cases of an in-mountain hermitage of Kim Nyong-sa(金龍寺) Temple, Geum-seon-dae (金仙臺), Yang-jin-am (養眞庵), and Dae-sung-am (大成庵).
This study aims to examine how the Gyeongseong Hokuk Shrine established the natural environment in Yongsan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focusing on the relationship between Japan and Chosen Hokuk Shrines. In the colonies, the establishment of shrines strongly tended to symbolize Imperial Japan and visually represent its ruling logic. The Gyeongseong Hokuk Shrine holds historical significance as a place to commemorate soldiers who died for the Emperor and as a tool of colonial rule, but further discussion is needed on how it was organized within the Yongsan. This study focuses on Hokuk Shrine planning under which the Shrine Bureau of Home Ministry constructed similar shrines across Japan by the Ministry of Home Affairs Ordinance No. 12 of 1939. As a result, this study examines the environment and architectural styles of Hokuk Shrines through examples from Japan and uses this analysis to explore the characteristics of Gyeongseong Hokuk Shrine and its relationship with the Yongsan. The significance of this research lies in highlighting the historical urban significance of Yongsan during the modern period.
19세기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조선은 외세의 침입이라는 새로운 시대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외압(外壓)에 대응하는 데 가장 근본이 되었 던 것이 당시는 수군(水軍)이라 불렸던 조선 해군(海軍)의 군사력이었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본 연구는 19세기 조선 해군 전력 의 일단(一端)을 살펴볼 수 있는 실증적 사례 연구를 진행하였다. 구체적 으로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속해 있던 광양현(光陽縣)과 경상우수영 (慶尙右水營)에 속해 있던 하동부(河東府)의 수군 전력의 실태를 파악하 고자 하였다. 이들 두 군현은 19세기 ‘중기(重記)’ 자료가 남아 있다. 중 기 자료는 작성 당시 지방 군현의 군비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좋 은 자료이다. 따라서 이 중기 자료를 중심으로 19세기 조선 해군 전력의 일단을 살펴보았다. 이와 더불어 각종 관찬 자료와 읍지(邑誌), 사례(事 例) 등을 비교 검토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19세기 조선 해군 전력의 일 단을 확인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해양 방위[海防]에 상당한 관심을 가 지고 있었지만 이에 대응한 해군 전력의 향상은 적절히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본 연구를 통해 일부 확인되는 것처럼 특히 지방 군현의 수군 전력은 형식적 전력을 유지하는 데 그쳤고, 그 실제는 전력 이 약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본 연구의 연구목적은 20세기 초 조선인 여자 일본유학생들의 도일실 천을 피에르 부르디외의 '장' 이론에 입각하여 재해석 해보고자 함에 있 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사회를 다양한 사회적 '장'들로 이루어진 유기체 로 해석하였는데, 각각의 장들에서는 행위자들의 행위적 실천이 발생하 고 있고, 행위적 주체들은 여러 사회적 '장'에 동시에 소속되어 있다. 이 러한 시각에서 바라볼 때, 근대 조선의 지식인 사회 역시 여러 '장'들로 분화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장'들은 본 연구의 연구대상인 15명의 조선인 여자 일본유학생들의 '도일유학' 행위의 실천 영역으로서, 각 '장'들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상호작용하며 연결되어 있었고, 이들 여자 유학생들은 동시에 이러한 '장'들에 몸담고 있었다. 20세기 초 조선 인 여자 일본유학생들은 도일 실천에 있어서 어떠한 '장'들을 공유하고 있었으며, 이들의 '도일'이라는 행위적 실천 양상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었는가.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교육사회학적·교육인류학 적인 시각에서 부르디외의 '장' 이론을 적용하여 재해석을 시도하였다.
This research interprets the unique hybridity of the pavilion architecture in the Joseon Dynasty, in which the name and form do not match and the rooms and floors are combined in various ways, through the confucian architectural prototype Muijeongsa(武夷精舍) built by Zhu Xi(朱熹). The architectural representation of Muijeongsa, developed against the background of the mid-Joseon period of active pavilion management by Sarim(士林) groups, the spread of ondols due to the Little Ice Age, and an architectural culture following the footsteps of the Zhu Xi is likely to have influenced the perception and practice of pavilion architecture. In this research, by examining and analyzing the contents of the Muijeongsa Japyeongbyeongseo(武夷精舍雜詠幷序) containing the architectural composition of Muijeongsa, it was confirmed that different types of spaces such as Dang(堂), Jeong(亭), Jae(齋), and Gwan(館) are integrated into Muijeongsa. Based on this, the main examples of the architecture of Jeongsa in the mid-Joseon Dynasty were reinterpreted into four types from the perspective of the combination of Dang and Jeong, and the junction of Jeong and Jeongsa. Dang and Jeong were either juxtaposed as separate buildings or implemented with a relationship of inclusion within one building. And the concept of Jeong, which was considered secondary to Dang, was used as a category that was replaced with the Jeongsa itself. Lastly, the name ‘Jeongsa’ was used, but the location had a strong character of ‘Jeong’, and the architectural form adhered to the form of ‘Dang’, thereby exquisitely reconstructing the composition of Muijeongsa as a single building.
The composition of the upper structure, which can be found in the 3-Dori type buildings in Yang-dong Village, varies significantly from time to time. The upper structure of the Gwan-ga-jeong, known as a house in the mid-Joseon Dynasty, consists of a basic 3-Dori type structure in which a beam is placed under 3-Dori and supported with two flat columns. On the other hand, the upper structure of I-hyang-jeong historic house, built in the 17th century, is different in that it has a stud between the two flat columns. The upper structure of Sa-ho-dang historic house, a 19th-century building is different from the upper structure of the buildings of the previous period in that three flat columns were used. As such, the difference in the composition method of the upper structure according to the construction period is closely related to the introduction of the Toi-maru, which is mainly explained by the boundary space. In addition, it can be expected that the introduction of the Toi-maru originated from the influence of the change in the plan. This study was conducted to examine the correlation between the plan and the composition of the boundary space through various typology of the 3-Dori upper structure distributed intensively in Yang-dong Village.
본 연구는 한나라의 『후한서(後漢書)』를 시작으로 중국에서 발전이 된 후기설과 조선시대에 중국에서 수용된 후기설과 그 문화적 양상을 비교 하여 조선시대에 받아들여진 후기설의 실행과 그와 관련되어 나타난 이 론과 비평을 확인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이와 관련된 연구는 문헌학과 비교학의 연구 방법을 토대로 하였다. 조선 초기의 후기설은 『율려신서 (律呂新書)』를 통해 조선의 궁중에 전해지고 그와 관련된 후기법도 실행 을 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에는 후기설에 대한 논의가 궁중이 아닌 문 인을 중심으로 변한 것을 알 수가 있다. 후기설에 대하여 조선의 후기설 을 살펴본 결과, 17세기 말에 중국에서 폐지 된 후기설은 조선의 궁중에 서도 역시 부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18세기까지도 조선의 문인 들을 후기설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이러한 원인은 조선시대에 후기 설이 정치적인 관점과 음악적인 관점에서 비교적 중요하게 작용을 하였 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따라서 중국에서 수용되어진 후기설은 조선시 대의 유가 음악사상 문화가 어떻게 발전이 되었는지를 탐색하는 것과 음 악과 관련된 중국의 이론이 조선의 후기에는 점차적으로 조선의 음악이 론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볼 수가 있다고 사료가 된다.
중국은 예로부터 우리나라와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였으며, 이 에 따라 중국어는 가장 중요한 외국어로 인식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는 통문관(通文館), 조선시대 사역원(司譯院)을 통해 중국어가 교육되었고 四書나 直 解小學과 같은 중국의 경전이나 老乞大, 朴通事와 같은 회화서를 사용했다. 조 선 중기,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실질적인 의사소통에 필요한 교재가 필요함을 깨 달으며 여러 회화서의 개수본(改修本) 뿐만 아니라, 譯語類解와 같은 유해류(類解 類), 즉 분류어휘집도 편찬되었는데 이는 다양하고 풍부한 어휘 학습을 도와 정확한 의사소통에 기여하였다. 이후 19세기에 들어서는 민간에서 중국어 학습 수요가 증가 하여 민간인 저자에 의해 華語類抄, 漢語抄, 華語, 漢談官話와 같은 유해류 서적이 편찬되었다. 이들은 19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근현대시기 한국과 중국 두나라의 언어사를 조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漢談官話는 1902년 필사,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며, 저자는 미상이다. 18개의 부 류(部類)로 나누어 총 613개의 어휘를 실었다. 譯語類解나 華語類抄처럼 천문(天 文)으로 시작하지 않고 인사‧관직 관련 어휘로 시작하고 있으며, ‘一字部’, ‘不字部’, ‘長語類’와 같이 일상생활에서 주로 쓰이는 구어체의 어휘, 어구, 문장 표현을 실어 실용성을 높였다. 어휘 부류 및 뜻풀이의 형식과 내용에서는 기존 유해서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혁신을 꾀하였다. 각 부에 수록된 어휘는 의미의 상관관계에 따라 연 관성이 있는 표제어끼리 가깝게 배열되었다. 또한, 사용자가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언문(諺文) 대역어(즉 당시의 한국어)와 한자 및 한문을 이용하여 뜻풀이했다. 譯語類解나 華語類抄와 공통적으로 수록된 어휘 비율이 매우 낮아 漢談官話의 저자가 매우 독자적인 시각에서 어휘를 수집, 분류했음을 알 수 있다. 漢談官話의 주음(注音) 측면에서 살펴보면, 見組 성모가 일부 구개음화 되기 전 의 형태인 ‘ㄱ’, ‘ㅋ’으로 기록된 것과 日母가 영성모로 기록된 것은 동북 방언의 영 향을 받은 부분이다. 그러나 來母를 ‘ㄴ’으로 주음 한 것과 같이 당시 한국 한자음을 학습하는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에 따라 주음하고, 端組를 ‘ㅈ’혹은 ‘ㅊ’과 같이 한국 한자음에서의 구개음화 현상에 따라 주음하며, ‘兒’을 ‘라’로 기록한 것은 저자의 중 국어 음운학적 지식의 한계에 기인한 것이자, 이 책의 한계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 러나 漢談官話는 체제, 형식, 어휘, 뜻풀이 면에서 볼 때 기존 유해류 서적과는 뚜 렷한 차별성을 보이는 혁신적인 성격의 유해류 서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근현대 한 중 양국의 언어사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사수도(四獸圖)는 각각 동ㆍ서ㆍ남ㆍ북을 상징하는 청룡(靑龍)ㆍ백호(白虎)ㆍ주작(朱雀) ㆍ현무(玄武) 네 신수(神獸)를 그린 그림이다. 사수도는 4~5세기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나 타나기 시작하여 조선시대까지 장의 미술을 대표하는 화재(畫材)로 소용되었다. 삼국시대 고분과 고려시대 석관을 장식하던 사수도는 유교적 상장례가 정착되고 묘제가 변화한 조선시 대까지 전례되어 왕과 왕비의 재궁(梓宮)이 머무는 망자의 공간을 수호하였다. 재궁을 안치하는 공간에 배설하는 사수도는 망자의 공간을 수호하는 전통적인 의미에 더 해 상장례의 위격을 가르는 대표적인 시각물로, 전례(典例)의 의궤를 철저하게 상고하여 그 려야 하는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도상이었다. 그러나 현전하는 흉례도감의궤(凶禮都監儀軌) 에서는 다양한 도상의 사수도가 확인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중기까지 찬궁(攢宮)은 현실 세계와 망자의 공간을 완벽하게 분리하던 밀폐된 공간 이었다. 그러나 현종대 이후 재궁가칠(梓宮加漆)이 의례화되면서 찬궁은 언제나 개폐 가능 한 열린 공간으로 변화한다. 이러한 변화는 주술적 의미가 강하게 남아있던 사수도를 외부에 지속적으로 노출시켜, 비공개성이라는 사수도의 성격이 크게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효종의 국장을 계기로 재궁 자체의 기능은 더욱 강화되고, 동시에 찬궁의 기능은 약화되어 갔다. 이후 숙종 연간 5번의 국상을 치르며 빈전(殯殿)이 설치된 기간 동안 재궁에 가칠을 하는 의례 가 정례화되어갔고, 재궁가칠로 인하여 찬궁의 기능과 형태 또한 변화하게 된다. 이렇듯 사 수도가 배설되던 공간의 변화는 사수도 도상뿐만 아니라 전통적 상징 의미와 위상의 변화를 야기했다. 영조 연간 국가의례 정비와 의례서 편찬 사업으로 사수도는 왕과 왕비의 상장례에서만 사 용되는 의물(儀物)로 상장례의 위격을 가르는 대표적인 시각물로서 기능하였다. 그러나 의 례가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형식적으로 변해감에 따라 망자를 수호하는 사신(四神)에서 의례 의 일부이자 찬궁 내부의 방위를 표시하는 서수(瑞獸)로 그 지위가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영조대 백호, 주작, 현무의 도상이 실존하는 호랑이, 새, 거북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 한 현상과 더불어 정조대까지 목차와 관계없이 의궤의 맨 앞면에 그려졌던 사수도가 순조 즉 위 이후부터는 조성소의궤(造成所儀軌)에 그려진 것을 통해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사수도는 상장례의 위격을 가르는 대표적인 시각물로 의례 과정에서 지속적으 로 소용되었다. 정조의 사친(私親)인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경궁(惠慶宮), 순조의 사친 인 가순궁(嘉順宮)의 원소도감의궤(園所都監儀軌)와 빈궁혼궁도감의궤(殯宮魂宮都監儀 軌)에서는 예장(禮葬)의 위격에 맞지 않는 찬궁과 사수도 도설이 확인된다. 의궤 속 화려한 채색 도설로 남아있는 사수도는 어떤 기록보다도 왕의 사친의 상장례가 일반적인 예장과 달 랐음을 보여주는 뚜렷한 시각적 전거(典據)가 되었을 것이다.
조선 후기 붉은 안료 ‘왜주홍’은 위계성을 갖는 특수한 물질이었다. 왜주홍이 사용된 곳은 왕실 최고위 신분층과 관련한 것으로 한정되었는데, 국가 의례에서조차 쉽게 사용되지는 못 했다. 왜주홍은 위계성을 갖는 물질이었던 만큼, 임금은 왕실 행사에서 자신의 권위와 위계성을 강조하는 목적으로 직접 왜주홍을 내하(內下) 하기도 하였다. 왕은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정당 성을 표방하고 정치적 입지를 굳히고자, 스스로 주최하는 국가 행사에서 ‘왜주홍’의 사용량 을 특별히 늘리고자 하였고, 이것은 간혹 위계에 따른 물질 사용의 규율 범위를 넘어서기도 하였다. 이를 밝히기 위해, 논문에서는 먼저 문헌을 통해 왜주홍이 ‘위계성을 갖는 물질’임을 설명 한다. 문헌을 통해 주묵정칠(朱墨正漆) 사용의 신분층과 실제 왕실로 들어온 왜주홍의 양이 많지 않았던 사실을 근거로 제시한다. 이어서 ‘위계성을 갖는 왜주홍의 활용’에 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1725년~대한제 국선포 이전(1894년, 고종 31) 기간의 349건 의궤에서 왜주홍 사용량을 추출하여 데이 터화하고 이를 기초자료로 삼았다. 그리고 자료에서 왜주홍이 특별하게 많이 사용된 국가 행 사를 선별하여, 그 행사의 시대적 배경과 행사 주최자인 왕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그 시대적 배경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임금의 생부와 생모가 왕이나 왕후에 오르지 못했을 때 그 위계를 높이고자 하는 경우, 2) 수렴청정했거나 임금 자신의 즉위를 도왔던 왕후의 위계를 높여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경우, 3) 임금이 수렴청정에서 벗어나 친정하게 된 것을 표방하거나 즉위 30년을 자축하는 경우, 4) 왕실 고위 신분층들의 연향, 5) 임금의 임어(臨御) 건물 영건 등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왜주홍’은 왕실에서 위계와 권위를 표방하는 ‘특수 물질로써 활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는 남북한 공영방송국의 날씨방송 영상을 비교·분석하기 위한 연구이다. 이를 위하여 먼저 날씨방송을 이론적으로 고찰하고, 지난 1년 간 우리나라 공영방송인 KBS 뉴스의 날씨방송과 북한 공영방송인 조선중앙TV 뉴스의 날씨방송을 연구 대상으로 삼아, 영상구성과 의미연결망분석을 실시하 였다.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첫째, 우리나라 날씨방송은 북한 날씨방송에 비 하여 약 3배 정도 짧게 구성되었다. 둘째, 우리나라 날씨방송은 ‘기온’, ‘서울’ 등이 의미연결망의 중심부에 있었고, 북한 날씨방송은 ‘지역’, ‘기온’이 의미 연결망 중심부에 있었다. 셋째, 우리나라 날씨방송이 전달하는 날씨 건강주의 정보는 ‘대기질’이었고, 북한은 ‘지자기’로 분석되었다. 이를 통하여 우리나라 날씨방송은 그 길이가 짧고 주요도시를 중심으로 한 빠른 전개가 특징이었던 반면, 북한 날씨방송은 그 길이가 길고 지역을 중심으로 한 느린 전개가 특징 이었다. 또한 건강주의 정보로 우리나라는 미세먼지 등 대기질 정보를 건강주 의 정보로 전달하는 반면, 북한은 협심증, 고혈압 등 순환기질병 지자기 정보 를 건강주의 정보로 전달하고 있었다. 끝으로 본 연구는 기후변화 및 기후위 기의 시대에 들어, 한반도를 공유하고 있는 남북한 공영방송국의 날씨방송이, 향후 어떤 지점을 어떻게 교류·개선할 수 있는지 추가적인 논의체계가 필요할 수 있다는 점을 밝히며 본 연구를 마쳤다.
경복궁은 조선 건국과 함께 창건된 궁궐로 태종, 세 종, 세조를 거치면서 법궁(法宮)으로 위상을 갖췄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이후 선조를 시작으로 여러 국왕은 경복궁을 중건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결국 270 년간 중건하지 못하였다. 경복궁의 공지(空地)에는 내농포(內農圃)가 들어섰으 며, 때에 따라 군사훈련을 하거나 왕실의 말을 키우는 목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소실 이후 경복궁에는 전각터를 비롯하여 궁성(宮城) 과 궁성문(宮城門), 수계(水系)와 천문 관련 시설 등이 남아 있었는데, 그중 궁성은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시설로 유지 관리되었다. 궁성문에는 돌을 쌓아 출입을 막았으나, 광화문 동협문에는 경복궁의 관리를 위해 별 도의 문을 두어 출입하도록 했다. 경복궁의 수계시설은 가뭄이 들었을 때 기우(祈雨)를 위해 정비되었으며, 영조 대에 들어 물이 잘 흐를 수 있 도록 준천(濬川)되었다. 이외에도 간의대(簡儀臺), 소간 의대(小簡儀臺) 등의 천문 관련 시설이 남아 있었으며,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이 발견 되어 관상감(觀象監)으로 옮겨 보관하였다. 광화문 밖에 남아 있던 세조 대 제작된 동종(銅鐘)은 종각을 세워 보 호하였다. 경복궁의 수비와 관리를 위하여 공궐위장(空闕衛將) 과 수궁내관(守宮內官)이 경복궁 내에 위치한 위장소와 수궁에 상주하였으며, 매일 포도청과 삼군문이 경복궁 외부를 순라(巡邏)하였다. 이러한 인력을 통한 관리와 함께 난입과 벌목, 내맥(來脈)의 굴토(掘土)를 금지하는 금령(禁令)이 마련되었으며, 이를 어기는 경우 처벌하였 다. 이러한 경복궁의 관리와 함께 근정전, 사정전, 강녕 전, 경회루 등의 전각터에서는 선대왕의 고사를 바탕으 로 왕실행사가 계속되었다. 현종 대 강녕전 터에서는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종묘 부묘(祔廟)를 위한 제주(題柱)가 행해졌으며, 숙종은 경 복궁 신무문 밖에서 행해지는 회맹제(會盟祭)를 위해 경복궁에 친림하였는데, 이러한 회맹제 때 국왕이 경복 궁을 찾는 것은 이후 경종과 영조 대까지 이어졌다. 숙 종은 회맹제 외에도 세조 대 경회루에서 행해진 양로연 (養老宴)의 고사를 따라 노인연(老人宴)을 열었다. 영조는 회맹제를 시작으로 숙빈 최씨 사당의 전배(展 拜)와 관련하여 경복궁에 친림하였다. 이와 함께 경복궁 에서 과거시험을 열었으며, 친잠례(親蠶禮), 진작(進爵), 조참(朝參) 등을 행하였다. 영조 대 친잠단과 문소전 터에 세워진 어필비는 영조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관리되었으며, 문소전구기비의 경 우 이후 국왕들이 지속적으로 전배하였다. 또 경복궁은 춘당대(春塘臺)와 함께 정시(庭試) 과장(科場)으로 정해 졌기 때문에 철종 때까지 정시가 계속 열렸다. 경복궁 신무문 밖 공지에서도 회맹제(會盟祭)와 군사 의례가 행해졌다. 영조 대 육상궁(毓祥宮)과 연호궁(延祜宮) 등의 사묘(祠廟)가 건립되고, 인원황후의 탄생지 인 양정재(養正齋)가 어필 봉안처가 됨에 따라 소란스 럽게 행해진 신조기휘제(新造旗麾祭), 호궤(胡跪) 등의 군사의례는 한양 내 다른 곳으로 옮겨져 행해졌다. 경복궁 중건을 위한 기초자료로써 문헌에 기록된 소 실 이전의 경복궁 전각배치와 중건 초기 경복궁 내의 수계와 내맥 등이 반영된 다양한 <경복궁도>가 제작되 었다. 고종 대 경복궁 중건은 경복궁 내부 청소를 시작으로 수계와 내맥이 정비되었다. 우선 경회루지와 후원지를 준척(濬滌)하였으며, 준척에서 나온 흙으로 내맥을 보토 하였다. 이와 함께 경회루지의 제방(堤防)과 첨계(檐階), 섬 등은 개축(改築)되었다. 수로 역시 정비되었는데 기 존에 관리되던 수문은 시설의 변화 없이 단순히 준천만 하였지만 관리되지 못한 수로와 수문은 새롭게 고쳐 쌓 았다. 경복궁 공지를 차지하고 있던 내농포와 궁성 밑 민가 들은 한양 곳곳으로 옮겨졌으며, 어필비각과 위장소와 수궁 역시 훼철되었다. 간의대와 소간의대를 훼철한 후 나온 석재는 경회루 첨계, 건춘문 지대석, 근정전 품계 석 등에 재사용되었으며, 광화문 밖 동종 역시 녹여 향 로와 토수(吐首) 등을 제작하였다. 신무문 북쪽 지역은 중건과 함께 경복궁 후원으로 포 함된다. 이에 따라 육상궁 동쪽에 담장을 쌓으면서 후원 안에 위치하게 된 연호궁은 창의궁(彰義宮)으로 이봉 (移奉)되었으며, 양정재는 영조와 정조의 어필 봉안처로 서 경복궁 후원에 남게 되었다. 경복궁 중건과 함께 궁성과 궁성문, 주요 전각터 등 은 훼철 후 다시 지어졌지만, 그 규모와 배치는 크게 바 뀌지 않았다. 다만 강녕전과 사정전 사이에 행각이 건설 되어 강녕전 전면 좌우 건물의 위치와 명칭에 변화가 있었다. 광화문과 강녕전에는 다른 궁궐과 같이 월대를 새롭게 쌓았으며, 경회루와 근정전, 광화문 월대에는 난 간이 새롭게 세워졌다. 이와 같이 경복궁은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270년간 중건되지 못하였지만, 경복궁의 관리를 위해 조직과 법 령이 마련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경복궁은 유지관리 되 었다. 이러한 관리를 바탕으로 유지된 경복궁에서는 왕 실행사가 행해졌으며, 이로써 법궁으로서의 상징성이 유지되었다. 문헌과 중건 초기상황이 반영된 <경복궁도>는 고종 대 경복궁 중건의 기초자료로 쓰였다. 경복궁 중건에서 내부를 점유하고 있던 시설들은 훼철되거나 자재로 재 사용되었다. 경복궁 내 남아 있던 전각터를 바탕으로 전 각이 중건되었으며, 경복궁 궁역이 신무문 밖까지 확대 되었다. 중건 경복궁에는 270년간 궁궐 건축 변화가 적 용되었으며, 월대의 난간과 같은 새로운 형식이 나타나 기도 하였다.
본 논문의 목적은 한국 조선산업의 경쟁력에 영향을 주는 정부의 산업 정책이 어떻게 변화해 왔으며, 그 변화의 원인을 담론제도주의 시각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 각 시기별 주요 조 선산업정책과 관련된 이슈들을 살펴봄으로써 한국에서 조선산업이 위기 에 직면했을 때 주요 정책 행위자들 간에 산업정책의 방향을 두고 산업 논리 담론과 시장논리 담론이 첨예하게 대립하였으며, 이러한 담론경쟁 의 결과가 한국 조선산업정책의 변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음을 강조한 다. 즉, 이 논문은 담론정치를 통해 1970년대 이후 한국의 조선산업정책 이 크게 “발전주의적 육성정책→발전주의적 조정정책→자유주의적 육성 정책→자유주의적 조정정책”의 4단계로 변화하였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본 논문은 중국 사찰 채화의 시대별 전개 양상, 독자성과 보편성 등을 파악 하며 한국과 중국의 단청과 채화를 비교・분석한 것이다. 중국 채화는 송대에 편찬된 『영조법식(營造法式)』에 의해 정형화되었고, 명・청대는 채화의 전성기 를 이루었다. 고려시대 단청은 중국과 차별화된 이른바 한국적인 특색을 나타 내었고, 조선시대에는 명・청과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방면으로 교류하면서 사찰 단청의 형식과 문양 등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띠게 되었다. 명・청 사찰 채화와 조선시대 사찰 단청의 머리초[조두], 금문(錦紋), 별지화[잡화], 단독문 등을 통해 공통점과 독자적인 특징을 살펴보았다. 머리초・금문・단독문은 한 부재에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도안화된 장식문이고, 별지화는 부재별로 다양한 도상이 사용된 회화적 장식화이다. 한국 단청과 중국 채화의 유사한 문양 가운 데 네 종류를 선별해 조선시대 단청과 명・청대 채화를 비교하였다. 이를 통해 양국 단청[채화]의 차이점과 공통점 그리고 국가별 독자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법화경』의 사상적 내용은 일불승(一佛乘)한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정신을 바탕으로 청문(聽聞)과 수지(受持)가 기본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 서는 일찍이 신라와 고려의 통일 과정에서 사상적 밑받침이 되었다고 할 수 있 다. 또 통일신라시대 비록 정토불교가 성행하였고, 고려시대에 선불교가 유행하 였지만, 대중들로부터 꾸준히 사랑을 받고 지속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진 경전은 『법화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한국인들의 내면에 문화적 DNA로 새겨져 있는 법화사상에 대해 굳이 언급할 필요는 적겠지만, 조선 유교사회에 들어서 는 『법화경』과 법화사상에 대해 주목하는 일은 아직은 필요해 보인다. 그것은 조선사회가 20세기와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화사상 나아가 한국불교가 걸어 나가야 하는 방향과도 직결되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조선초기 불교의례의 존립에 대해 『법화경』과 법화사상의 맥락 에서 소화하려고 하였다. 우리는 『법화경』이 지니고 있는 대승불교의 논리, 즉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혁신적인 사유에 매료되어 있다. 또한 『법화경』은 인간은 누구나 내면적인 가치를 존중받아야 하며 인격적인 차원에서 평등하다 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불교의례의 차원에서 조선초기에도 여전히 불교경전 은 그러한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와 태종대는 물론이고 세종과 문 종대에도 여전히 불교의 힘에 의지하여 자신들의 선왕과 선후의 극락왕생을 빌 고 있는 모습은 이 땅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의 모습을 닮아있다고 할 것이다. 조선초기 『법화경』과 법화사상이 이전 시대에서부터 전승되었다는 점과 새 로운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만났을 때 보여주었던 법화사상의 면모를 살펴보았 다. 이때 조선 초기 불교의례라는 문화요소에 법화경이 어떻게 사용되고, 왕실 과 사대부 및 일반 대중들에게 무엇을 의미하게 되었는지를 효용과 가치의 측 면에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Based on the experience of building ‘Waegwan(倭館)’ in Busan, Japanese paper wallpapering, the use of square rafters, and the installation of sliding windows were used in the construction of Joseon palaces from the 17th century onwards. Elements that could be applied through observation alone were applied first, and sliding windows that required precise skill acquisition were installed later. ‘Yeongchang(影窓)’, which refers to a sliding window that brightens an interior, has spread rapidly, and its types and structures have also become more diverse. Gradually, ‘Yeongchang’ came to refer only to additional windows installed by attaching grooves to the lintel of existing casement windows. The sliding window that is installed independently and acts as an interior partition was renamed ‘Chujangja(推障子)’. Japanese architectural elements such as ‘Yeongchang’ and ‘Chujangja’ have become an element of traditional Korean architecture.
This research aims to understand the specific aspects of the utilization of the pavilion by a group of governors in the mobile office system of the early Joseon Dynasty through two diaries written in the 16th century. Miam Diary by Yu Hee-chun, a governor of Jeolla Province, and Jaeyeongnam Diary by Hwang Sa-woo, a chief aide of Gyeongsang Province, are important historical materials that reveal the utilization patterns of the pavilion by the governor, who was the decision maker and main user of governmental pavilions. As a result of analyzing the two diaries, the utilization of governmental pavilions was concentrated in the hot summer season, May to July, which is closely related to the perception of temperature and humidity. While pavilions are mostly used as office and banquet places, some notable usage patterns have been identified. When there were several governmental pavilions in a town, the order of appreciation was determined by considering the location and scenery, and the pavilions were also used as a place to encourage learning as governors taught Confucian scholars well. Governmental pavilions functioned as a device to visualize hierarchy through seating and accommodation arrangements. The authors of the diaries left comments on the famous pavilions and sometimes went to see the pavilions after asking for permission from the superior. This research is meaningful in that it reconstructed the relationship network and phases of the times of governmental pavilions scattered across the country through institutions and daily life.
한자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전래된 후 한자의 학습과 사용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한자교육 방면의 동몽 독서물이 대량으로 정리되고 편찬되었다. 한국유학교육자료집해 제1권 동몽교 육편은 조선시대에 간행된 19종의 동몽 독본을 수록하여 조선시대 민중의 한자에 대한 인식과 문자 사용 실태를 전반적으로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19종의 한자 동몽 자료는 많은 이체 속자를 사용하여 중국의 한자 사용과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총체적으로 볼 때 조선시 대 동몽 문헌에 보이는 속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필획의 증감, 필획의 형태 변화, 간접 부건과 기타 부건의 혼재, 부건 배치의 차이, 초서의 해서화 등의 요인으로 형성된 異寫俗字이고, 다른 하나는 조자 방법의 차이, 조자 방법은 같지만 부건이 다른 경우, 구조적 속성은 같지만 부건 수량이 다르거나 필사의 변이로 인한 구조의 차이 등의 요인으로 형성된 異構俗字이다. 조선시대 동몽 문헌의 속자 사용에서도 주목할 만한 특징이 나타난다. 예컨대 고문과 예서의 정서법을 많이 보존하고 있고, 중국 고대 속자의 변형된 정서법을 전승 및 사용하 고 있으며, 문자의 속자가 체계성을 갖추고 있는 등을 들 수 있다.
본 연구는 현재 북촌에 남아 있는 서울 觀象監觀天臺로 알려진 小簡儀臺 를 통해 觀象監에 대한 기록 및 현장 조사를 실시하여, 풍수적 입지의 특성 을 고찰하고 해석하여 시사점을 찾는 것에 있다. 관상감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天文⋅地理⋅曆數⋅測候⋅刻漏등의 업무를 맡아, 고려 말부 터 한양 천도에 큰 영향을 끼쳤던 관청이다. 한양은 풍수적 입지에 의해서 선택된 곳으로서 관상감은 지리를 보던 相地官들의 업무를 위한 장소였다. 그러므로 풍수지리에 밝았던 상지관들의 평생의 업무지였던 관상감 입지는 어떤 특성과 풍수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지에 관하여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 다. 관상감은 총 네 곳으로 조선전기의 광화방 관상감은 龍脈과 穴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었으며, 경복궁 내의 관상감은 용맥이나 혈과는 무관하나, 궐 내에 자리해 궁궐이 가진 이점을 가졌다. 조선 후기 경희궁 개양문 밖 관상 감은 불완전한 용맥과 혈자리로 판단되었다. 마지막으로 영추문 밖 관상감 은 내관상감과 매우 가까운 곳이므로 일부의 풍수적 입지를 만족하고 있다. 이는 네 곳 모두 풍수적으로는 명당의 일부 조건만을 만족하는 것으로 풍수적 요건을 최우선시 한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모든 관상감이 만족 하는 공통점은 궁궐과 종각과의 일정 거리였다. 이는 관상감에서 업무보고 가 편리한 위치를 가장 중요시하였음을 알 수 있는 점이다. 이것은 관청터 의 입지 선택에 있어 풍수요소보다 업무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 위치의 중 요성을 시사하고 있다. 주제어: 관상감, 서운관, 간의대, 관천대, 풍수, 북촌, 입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