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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3.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법화경』의 사상적 내용은 일불승(一佛乘)한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정신을 바탕으로 청문(聽聞)과 수지(受持)가 기본을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 서는 일찍이 신라와 고려의 통일 과정에서 사상적 밑받침이 되었다고 할 수 있 다. 또 통일신라시대 비록 정토불교가 성행하였고, 고려시대에 선불교가 유행하 였지만, 대중들로부터 꾸준히 사랑을 받고 지속적으로 연구가 이루어진 경전은 『법화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한국인들의 내면에 문화적 DNA로 새겨져 있는 법화사상에 대해 굳이 언급할 필요는 적겠지만, 조선 유교사회에 들어서 는 『법화경』과 법화사상에 대해 주목하는 일은 아직은 필요해 보인다. 그것은 조선사회가 20세기와 21세기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화사상 나아가 한국불교가 걸어 나가야 하는 방향과도 직결되는 문제를 안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는 조선초기 불교의례의 존립에 대해 『법화경』과 법화사상의 맥락 에서 소화하려고 하였다. 우리는 『법화경』이 지니고 있는 대승불교의 논리, 즉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혁신적인 사유에 매료되어 있다. 또한 『법화경』은 인간은 누구나 내면적인 가치를 존중받아야 하며 인격적인 차원에서 평등하다 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불교의례의 차원에서 조선초기에도 여전히 불교경전 은 그러한 역할을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태조와 태종대는 물론이고 세종과 문 종대에도 여전히 불교의 힘에 의지하여 자신들의 선왕과 선후의 극락왕생을 빌 고 있는 모습은 이 땅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의 모습을 닮아있다고 할 것이다. 조선초기 『법화경』과 법화사상이 이전 시대에서부터 전승되었다는 점과 새 로운 시대적 이데올로기를 만났을 때 보여주었던 법화사상의 면모를 살펴보았 다. 이때 조선 초기 불교의례라는 문화요소에 법화경이 어떻게 사용되고, 왕실 과 사대부 및 일반 대중들에게 무엇을 의미하게 되었는지를 효용과 가치의 측 면에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6,600원
        2.
        2022.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19-20세기 조선 사회는 격변의 사회였다. 개화기 시점에서 서양 과의 무역통상 조약을 맺음으로 강제화 된 개방을 해야 했다. 조선개화 와 더불어 19세기 서구 선교사들은 조선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입국했지만, 폐쇄적이고 서구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자세 로 일관했던 조선에서 선교는 상당한 어려움을 맞았다. 이러한 입장에 서 19-20세기 서구 개신교 의료선교사들은 조선에 입국하여 병원을 세우고 가난하고 병든 조선 사람들을 치료하고 보살핌으로 조선에서 기독교 형성의 발판을 마련했다. 의료선교는 조선 개신교 형성의 출발 점이 되었으며 신앙 공동체의 모체가 되었다. 또한 조선 사회를 새롭게 변혁시키는 변혁의 주체가 되었다. 의료선교사들은 조선에서의 선교적 헌신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으며, 근대 병원 건립을 통해 선진화된 의료기술을 전수했다. 교육의 불모지지였던 조선에 위생교육 을 통해 복음의 접촉점을 마련했다. 나아가 조선간호협의회를 만들어 여성 리더십을 고취시키는 일 등을 마련함으로 조선 개신교 형성과 선교 사역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되었다.
        8,000원
        3.
        2019.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국가혁신체계가 구성되지 않은 1970년대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육성 된 조선산업의 성공요인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저자들이 주장하는 한국 조선산업 초기 발전 과정의 성공요인으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의 연구원들이 역할을 강조한다. 고급인력 유치 정책으로 귀국한 연구원들은 산업 육성 과정에서 산업의 구축자로서 모습을 보여주었 으며, 김훈철 박사는 조선산업 육성을 위해 기술도입을 통한 혁신을 시도하였고, 그 과정에서 게획 및 조사, 그리고 공급자와 교섭 단계에서 산업이 성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위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연구의 결과를 통해 제시되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 연구원들의 기여는 개발도상국이 새로운 사업의 육성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산업 육성 인력이 수행해 야 하는 역할을 미시적인 관점으로 제시하고 있다.
        6,000원
        4.
        2019.1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3,000원
        5.
        2018.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will introduce the foods recorded in Gyemiseo and disclose the substantive characteristics of traditional Korean food in the early stage of the Joseon Dynasty. Gyemiseo is a cook book manuscript written in the Chinese language that was rebound into book format at the end of the Joseon Dynasty in 1911, some 358 years after it was originally written in the 163rd year of the Joseon Dynasty (1554) While the majority of cook books begin with recipes for various types of wines and liquor followed by those for fermented sauces, fermented vegetables (such as kimchi), vinegars and storage methods, etc., Gyemiseo begins with recipes for fermented sauces, followed by recipes for various kimchis, how to make vinegars, main meals, side dishes, rice cakes and confectionaries, with recipes for wines and liquor introduced last. Therefore, it can be assumed that the methods of brewing wines and liquors were additionally recorded for bookbinding. There are a total of 128 recipes recorded in Gyemiseo, including 13 for fermented sauces, 14 for kimchi, 11 for the main meal, 26 for side dishes, three storage methods, four for rice cakes and confectionaries, and 44 for wines and liquors. It is believed that contents of Gyemiseo will provide a foundation on which to pursue researches on the process of transition of cooking methods of traditional cuisines of Korea during the Joseon Dynasty.
        4,800원
        7.
        2015.0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is a study on the construction of the Heungcheon-Temple. The results are follows. 1) The Heungcheon-Temple was anticipated to be the Jeongneung. However, when completed, the Heungcheon-Temple was symbolized Buddhism; moreover, there was a stupa enshrined sarira. The stupa was a land mark in Hanyang. While king Sejong repaired the stupa, it disappeared during the regin of King Jungjong. Before it disappeared the stupa signified a Buddhist event and a rite of good fortune. 2) The stupa was constructed using a double-frame, and there was a stone-stupa in an octagonal multi-layer temple. This single location consisted of a sarira space and a worship space. 3) Buddhist Relic(Sarira) worship was to witness holiness and therefore reics could be moved according to need. It appeared as though Buddhist Relic worship occurred in Southeast Asia. 4) The Heungcheon-Temple stupa was considered a new and superior architectural-symbol to comfort people and recognize the new order of Ming and neo-Confucianism. Therefore, the stupa was a good alternative to politics, religion, and external relations during the early Joseon era.
        4,000원
        8.
        2014.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는 향후 정재춤사위의 실연을 위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하는 방안을 마련하는데 의의를 두고『악학궤범』에 세주(細註)로 기록된 정재춤사위를 살펴보았을 때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악학궤범』에 세주(細註)로 기록된 정재춤사위는 30종이다. 종류로는 광수․광수무․광수환장무․광 염․금전락무․금척무․농구무․도약무․무릎디피무․발바딧무․발바딧작대무․사수무․수보록무․지선무․수양수무․ 수양수무릎디피무․수양수오방무․오양선무․인무․입무․절화무․정읍무․첨염․칠무․퇴수무․파자무․팔수무․협 수무․홍정도돔무․환장무이다. 이들 용어들은 정재 종목의 명칭을 인용한 용어, 신체를 중심으로 한 용어, 비유적인 표현을 강조한 용어, 상징적인 용어, 음악 제목을 인용한 용어, 춤의 진행을 설명 한 용어로 구분되어 있었다. 세주로 기록된 정재춤사위는 당악정재와 향악정재 구분 없이 정재마다 중복 및 반복되어 사용 되었고, 특정 용어가 특정 정재에만 집중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정재춤사위는 대부분 진행부 에 기록되었지만, 특정용어가 도입부와 종결부에만 기록되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주요어 악학궤범,
        4,900원
        9.
        2013.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현행 정재에서는 도입부와 종결부에 죽간자가 구호를 부르고 물러난 다음 전체 무원이 무 진· 무퇴할 때 두 팔을 옆으로 펴 들고 나아갔다가 다시 물러나는 춤으로 공통되게 진행하고 있다. 본 연구는 이를 『악학궤범』에 수록된 당악정재를 중심으로 내용을 확인하였을 때 다음 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당악정재 14종의 도입부와 종결부에 추어진 춤사위는 모두 ‘염수·염수족도·절화무·사수 무·팔수무·퇴수무· 협수무’이다. 도입부와 종결부로 구분하여 무진· 무퇴할 때의 춤사위를 살 폈을 때, 도입부에서 무진할 때에는 절화무· 염수· 염수족도를 추었고, 무퇴할 때에는 염수· 사 수무· 팔수무를 추었다. 그리고 종결부에서 무진할 때에는 염수족도· 협수무를 추었고, 무퇴할 때에는 사수무와 퇴수무를 각각 추었다. 『악학궤범』과 현행 정재의 내용을 비교하였을 때 도입부와 종결부에서 무원들이 무진· 무퇴 할 때의 춤사위가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정재마다 도입부와 종결부의 무진· 무퇴의 춤사위가 구분되어 차이가 있었고, 중요한 것은 정재마다 도입부의 무진과 무퇴, 그리고 종결부의 무진· 무퇴의 춤사위가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다.
        5,200원
        10.
        2012.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안평대군이 주도하고 군신들과 안견이 참여하여 제작된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은 <몽유도원도>와 함께 조선 초기에 높은 수준을 이룩한 시화 제작의 전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1442년에제작된이 시첩에는당대 문사들의 소상팔경시와 함께 소상팔경도가 그려져 있었으나 현재 그림은 산실되고 시문만 첩의 형태로 전한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비해당소상팔경시첩≫에 소상팔경도를 그린 화가는 안견으로추정된다. 안견은 조선초기에활약한 최고의 산수화가로 그가 이룩한 화풍은 당대는 물론 후대의 산수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현존하는 조선초기의 소상팔경도중 상당수가 안견의 전칭을 지닌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비해당소상팔경시첩≫제작의계기가된 남송寧宗의 팔경시 는 여러가지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있다. 남송영종의 팔경시 는팔경의순서에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며, 조선초기에 제작된 소상팔경도의 순서에 많은 영향을준 것으로 생각된다.안견이 그렸을것으로 추정되는≪비해당소상팔경시첩≫의<소상팔경도>역시 영종의 팔경시 의 순서를 따랐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그림 이후대의 소상팔경도에 많은 영항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초기의 소상팔경도중≪비해당소상팔경시첩≫과 가장 연관이 깊은 작품은 구幽玄齋 소장의<소상팔경도>로 생각된다. 그림의 순서와 화제의 표기 방식등이 유일하게 남송영종의 팔경시와 일치한다. 팔경이 개별적으로 독립된 작품이면서 하나로 이어지는 유기적인 구성을 보이는 점 에서도≪비해당소상팔경시첩≫의 시의내용과도 부합한다. <소상팔경도>에 그려진 각 폭의내용도남송영종의 팔경시 를 비교적 충실하게 따라 그린듯이 크게 어긋남이 없다. 유현재본 <소상팔경도>는 북송대에서 명대에 이르는 李郭派 화풍의작품들과 많은 공통점이 있다. 아울러 소재와 표현에서 안견의 <몽유도원도>와도 유사성이 인정된다. 유현재본 <소상팔경도>는 안견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의 소상팔경도를 충실히 임모하거나 방한 작품으로 생각된다. 조선 초기와 중기의 다른 소상팔경도 및 산수도 중에서 많은 작품이 유현재본 <소상팔경도>와 많은 연관을 보이는 것도 ≪비해당소상팔경시첩≫의 안견의 <소상팔경도>가 범본範本으로서 후대 작품에 미친 지대한 영향으로 추정된다. 앞으로≪비해당소상팔경시첩≫과 유현재본<소상팔경도>의 연관이 보다 분명하게 밝혀진다면 산실된 안견의<소상팔경도>에대한 단서를 얻을 수 있으며, 안견의<소상팔경도>가 후대작품에 미친 영향 및 조선초기 소상팔경도의 전개과정에 대해 보다 구체적인 분석과 이해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9,500원
        11.
        2012.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미술사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주로 정치적, 사회경제적, 문화적 맥락 속에서 연구되어 왔다. 그러나 새로운 접근방법에서는 후원자들과 그들의 성별, 사회적인 지위가 작품제작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 또는 미술이 특정집단의 사람이 살아온 환경 속에서 어떻게 소통과 자기표현 수단으로 사용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은 조선시대 예술가들을 단순히 중국 수입품에 의존하는 이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관점에서 당시의 미술을 볼 수 있게 하였고 이를 통해 그들의 지적, 문화적 욕구를 표현하기 위한 영감으로써 중국미술의 경향을 어떻게 수용했는지를 보여준다. 조선 초기 회화 특히 안견의 <몽유도원도, 1447년> 와 신숙주의 「화기」는 조선전기 문인들이 아직 사회적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한 시기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중국의 이론적 담론, 도상 및 양식들을 사용하였는가를 보여준다. <몽유도원도>는중국의시인인 도잠(연명, 365-427)이쓴 「도화원기」 에서 비롯되었으나 도잠의 시와 중국 도상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고 있다. 「도화원기」의 현실도피적 측면은 안평대군이 당시 처해있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해석할 수 있다. 양식적으로는 <몽유도원도>에서중국 북송대의 화파인 이곽파의특징을 찾을 수 있다.「화기」서론 부분의 한유와 백낙천에 대한 언급과, 소식을 상기시키는 「화기」끝부분의 철학적 담론은 안평대군의 골동수집 취향, 안견의 회화 양식과 당대의 지적 문화적 경향과 잘 부합된다. 곽희 양식에 대한 인식, 도화원기의 도상학, 한유의 미술품 수집에 대한 저술과 소식과 동시대인들의 미학적 문학활동은 고려 왕조의 어느 시기엔가 한국의 학자와 화가들에게 전달되었다. 조선초기까지 이러한 인식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지적 정치적 위치를 확고히 하기에 적합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엇이든 선택하고 이용할 수 있었던 학식 있는 문인 집단에게 있어서 실질적이고 이론적인 소재가 되었다.
        9,000원
        12.
        2008.11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5,200원
        13.
        2008.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Gyeongbok Palace was completed during the reign of King Taejo and King Sejong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most remarkable spacious feature of the palace is that it has an inner palace wall without an outer palace wall. The absence of the outer palace wall had its origin in the palace of the late Goryeo Dynasty which did not provide the outer palace wall. Gwanghwamoon was the main gate of the palace, and the office buildings of the Six Ministries were arranged on the right side in front of the main gate. A wide road called Six Ministries Avenue was made between the builidings. The avenue was completed during the reign of the third king of Joseon, Taejong, and it was assumed that this arrangement was influenced by the government office arrangements of Nanjing, the early capital city of the Ming Dynasty. Gwanghwamoon held national rituals as well as the civic and military state examinations nations in front of the gate. The avenue was decorated with flowers and silks when kings and the royal families, or Chinese envoys enter the gate, and the civilians watched the parade, Because there was no outer palace wall, all the events held at Gwanghwamoon and the Six Ministries Avenue ware opened to the public, it was the unique feature of Gyeongbok Palace that the palaces of Goryeo dynasty and China did not have.
        5,200원
        14.
        2005.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600원
        15.
        2002.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4,600원
        16.
        1998.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It could be said that the Kyongbok Palace, the main palace of the Chosun Dynasty which built in the early years of the Dynasty, had two main architectural characters. One ; the entire building complex was arranged under the influence of ancient Chinese building principle based on the Confucian ideas. Two ; building compositions and shape of each buildings were succeeded from the palace of the former Koryo Dynasty, especially on the latter periods of it. The architecture of the Kyongbok Palace had formed its own uniqueness by developing these two characters.
        5,400원
        18.
        2020.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 논문은 1890년부터 1900년 사이에 출판된 서회의 단행본(book, booklet, tract)의 목록을 새롭게 고증하고, 각 도서의 내용을 일별하면서 초기 출판 경향을 분석해 보고자 하였다. 기존에 밝혀진 19권의 도서 외에 본 논문을 통해 9권의 도서가 추가적으로 밝혀졌는데, 첫 10년간 발행된 도서들 28권 가운데 20권은 초보적인 기독교의 이해 수준의 교리서와 전도문서였으며, 그보다 한 걸음 나아가 신학 저서로 이해될 수 있는 도서는 4권, 소설이나 사전 등 교양서도 4권 정도 되었다. 또한 1890년부터 출간된 도서들 가운데 첫 14권은 모두 중국의 선교사들이 발행한 도서를 저본으로 삼고 있었으며, 1900년까지의 총 28권 가운데 2/3를 차지하는 17권이 중국어 도서를 저본으로 삼고 있음도 확인하였다. 이것은 초기 10년 동안 서회 출판의 주요 전략이 중국에서 교인들에게 수년간 인정받고 널리 읽힌 도서들을 한국어로 번역하여 출판하는 것으로서, 이로써 한국 선교사들은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서적의 번역 출판을 통해 중국의 기독교 용어들이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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