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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3.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oegye is a moralist representing Joseon Dynasty. He has written around two thousand poems. He has written around two thousand poems. His poetry was largely influenced by Tao Yan Ming and Du Fu, and also took advantage of various masters including Li Bai, Bai Ju-I and Su Shi. In his later years, he liked the poetry of Zhu Xi very much. In this paper, it was tried to study the poetry of Teogye and Li Bai. Toegye and Li Bai have tendencies contrary to each other. Looking at the ≪Memoirs of Toegye≫ recorded by the literary students, the appearance of Toegye is a group of ideal images of a moralist including "serenity, purity, upright, solemn, organised and meditating". In this study, as a result of analysing the poetry of Toegye in the image of "spirits, Zhuang-Zhi and Taoist hermit", it was found that: he presented spirits and friends when he felt the wall of reality; admired the world of Taoist hermits when the country was agitated and put in the image of Zhuang-Zhi when he wanted to live in seclusion. By analysing such poetry writing pattern of Toegye, Toegye did not simply borrow or copy lines of Li Bai, but rather left some great works that are not second to Li Bai with some of this works. Additionally, it was possible to peek into another humanity of his that was not found in the moralist Teogye.
        7,000원
        2.
        2010.05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논문은 퇴계의 한시에 나타난 대나무의 형상사유와 미의식을 연구한 것이다. 퇴계는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인 동시에 약 2000여수의 한시를 남긴 조선중기 사림의 대 문호였다. 이 시기 조선 사림들의 예술 경향 속에는 사군자로 지칭되는 절개와 지조의 상징물들이 독특하게 나타나 조선 사림의 예술을 선도하였다. 시․ 서 화를 통한 사군자의 예술지향은 성리정신과 조화를 이루며 한 시대를 풍미하 게 되었다. 이 중심에 퇴계의 대나무에 대한 한시가 있었다. 퇴계는 동아시아의 문학사에서 대나무를 형상화한 다양한 장르의 문예들을 접하고 이들을 바탕으로 대나무를 문학적으로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퇴계는 대나무를 직접 가꾸기도 하고 완상하기도 하면서 대나무를 비유와 상징의 수법으로 형상화 했으며, 당시에 유행하던 대나무 그림위에 제화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대나무 한시에는 다양한 미의식이 함의되어 있다. 그가 주창한 대나무 이미저리는 주로 선비의 굳은 지조 와 곧은 절개를 상징한다. 퇴계의 대나무 한시에는 꿋꿋하고, 맑고, 깨끗하고, 강 인하고, 의젓한 이미지를 그려낸다. 그의 대나무를 소재로 형상화한 시 속에는 枯淡, 拙樸, 苦拙, 淸眞등의 楚楚한 풍격의 미의식이 함의되어 있다.
        8,700원
        4.
        2004.09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rough 16-17th century, Neo-Confucianism was accepted and extended to Chosun Dynasty. The architecture of the Taegae school made buildings of Yongnam area rich by adding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based on Taegae's thought of architecture. The following is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the academic clique around Sangju. Transformation such as separation and combination of the Jeongsa space by function, lifted floor type reflecting local feature or high platform was appeared, and the architectural characteristics of the Taegae school, that is, a small scale, a moderate figure, a type of side-attached floor, landscape, were still maintained at the same time. The characteristics of the Taegae school and regional figure of Sangju were well joined. The upper class houses, Seodang, Jeongsa and Seowon, built by Confucianist had shared common Confucian characteristics in spite of their different purposes. The world view of the Confucianism such as sacrifice for sages, cultivation, devoting for study, teaching disciples, and education for villagers was revealed through the Confucian architecture including dwelling houses during the 16-17th century. Buildings of Confucianist were focused on the space for men. Seoae and Kyumam built two different Jeongsa's inside and outside of the boundary of the nakdong river. While Seodang and Jeongsa located outside of the boundary of the river were built excluding spaces for living, the function of the Jeongsa located inside of the boundary of the river was assimilated by Sarangcahe. However, both buildings kept the function for cultivation, devoting for study and teaching.
        4,200원
        5.
        1996.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Dosan Sedans was built in 1560, when Toege I Whang(1500-1571) was 60, as a place in which to study and teach disciples. The building was built to a humble 3-kan system which was a popular form of sodang in the 16th century, There found an enlargement of space by attaching outer walls around three sides which was designed by Toege himself. Minimum in space, moderation in form, conrol of embellishment, hermit scholar's aethetics became basic concept of the architecture of Dosan Sodang. After completion of sodang, Toege wrote many poems about pond, walls, flower bed and natural surroundings like sheer cliff, winding river and even rural daily life of villagers around the building. It could be sud that ,for Toege, architecture was cogniged as a whole complex of building and its surrounding natural, artificial and human circumstances.
        5,700원
        7.
        2019.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履齋 宋鎬彦은 한말 경남 삼가군의 학자인데, 그는 南冥 曺植과 退溪 李滉에 대한 인식에 있어 매우 흥미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역적으로는 남명의 고향과 같은 지역에 살았고, 학문적으로는 尹冑夏, 李震相, 郭鍾錫 등에게 배워 퇴계의 학맥에 닿아 있었다. 그의 문집에 보이는 남명과 퇴계의 인식에 있어 이러한 특성이 잘 반영되어 있는 작품들이 있는데, 특히 남명에 대해서는 남명 사상의 핵심이라 할 경의를 상징하는 敬義劍을 읊은 「南冥先生古劍歌」와 퇴계에 대해서는 한주 이진상이 부르짖은 祖雲憲陶가 새겨진 옥사자인을 읊은 「玉獅子印歌」를 들 수 있다. 두 작품 가운데 「남명선생고검가」는 경의검을 통해 남명의 사상을 읊은 것이고, 「옥사자인가」는 옥사자인을 통해 한주 이진상이 퇴계의 학맥을 계승한 것을 읊은 것으로, 바로 남명과 퇴계를 대비시켜 논한 것이 아니라서 두 작품이 긴밀한 연관성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옥사자인가」에서 송호언의 퇴계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는 있다. 이재의 남명에 대한 생각은 남명의 제자들에 대한 시, 특히 삼가군수로 부임한 申斗善이 雷龍亭을 중수하면서 이재에게 명하여 지었던 「雷龍亭詩」에 잘 드러나 있다. 「뇌룡정시」에서 그는 인을 회복하여 乾道를 성실하게 하는 것은 군자가 바라는 것인데, 이를 실행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하며, 남명이 바로 千仞壁 立의 기상을 가지고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 의연함이 있다고 칭송하였다. 「남명선생고검가」는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 장편 고시인데, 그는 첫 번째 단락에서는 역사가 깊은 칼을 남명이 지리산에서 갖고 있는데, 이는 하늘의 뜻 으로 없애고자 해도 없앨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남명이 그의 敬義劍을 가지고 세상의 일들을 처리하였다면, 온 세상이 밝고 정의로운 경과 의가 넘치는 세상이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남명은 결국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지니고 있던 칼이 남아 있으니, 후대 사람들은 경의 뜻을 담은 여덟 자의 내용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재의 퇴계에 대한 인식은 이재가 퇴계의 시에 차운한 3제 4수의 시에 잘 드러나 있다. 雙明軒의 차운시는 퇴계가 한 때 거처하던 장소에서 퇴계를 생각하고 그 서글픈 심회를 노래한 것이고, 四樂亭 차운시는 사락정의 모습과 그곳에 깃들어 있는 퇴계의 자취를 읊었는데, 퇴계를 사모하여 도의 眞諦를 그에게 묻고자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을 노래한 것이다. 특히 「옥사자인가」는 「남명선생고검가」와 마찬가지로 세 단락으로 이루어져 있는 장편 고시인데, 그는 첫 번째 단락에서는 주자의 학문이 퇴계로 이어진 것을 寒洲 李震相이 계승하였음을 여러 고사와 비유적인 내용을 통하여 드러내어 주었다. 두 번째 단락에서는 사자를 그려 자신의 학문을 전하였기에 사자가 있는 곳이 스승이 있는 곳이 되었지만, 꼭 그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밝혔다. 세 번째 단락에서는 후학들에게 해야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경계하는 내용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퇴계에 대해서는 남명에 대한 것만큼 현실적 실천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고 다만 후대의 학자가 부르짖는 ‘祖雲憲陶’의 주체로서 주자로부터 조선후기 이진상에게 이르기까지 그 학문의 정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말하였다.
        8.
        2018.09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필자는 退溪 李滉(1501-1570)의 한시를 연구하던 중에 그의 逸詩를 발견하게 되었고, 그 시 내용에 규명할 만한 것이 있다고 여겨 논문으로 작성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첫째 수에 해당하는 작품은 문집에 실려 있지 않은 일시임을 확인했고, 그 작품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해 아래와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첫째, 퇴계의 친필로 남은 한 수의 逸詩는 風流의 現場에 대한 實證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필자는 이를 조선 중기 영남의 江湖에서 차를 즐겨 마셨다는 사실과 함께 막 완성된 「漁父歌」를 初演한 풍류의 현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보았다. ‘烹茶仙風’ 즉 ‘차를 마시는 신선의 모습’이라는 사자성어 는 퇴계의 일시에 들어 있는 시구를 통해 만들어본 것이다. 이는 당시 퇴계가 추구했던 하나의 江湖의 眞樂과 연관 지을 수 있는 한 경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둘째, 새로 발견된 퇴계의 일시는 元韻의 형태로 聾巖 李賢輔 (1467-1555)와 溫溪 李瀣(1496-1550)의 次韻으로 이어졌는데, 정작 퇴계 자신의 문집에는 누락된 채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는 道學 淵源이라는 學統의 계승문제와 연관 지워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래서 문집과 초고로 남은 작품들에 대한 詩題를 함께 살폈는데, 거기 에서 드러난 ‘先生’이 ‘相公’ 등으로 달리 표현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미묘한 시각차 때문에 중심 작품이 일시로 남아 문집에 오르지 못한 것으로 추론해 보았다. 필자는 자료 고찰을 통해, 퇴계 역시 도학 계통상으로 농암을 師承關 係로 인식하기보다는 그를 鄕先輩로서 인품과 문학 방면에 국한해 무한한 존경을 표했다고 보았다. 끝으로 그동안 年譜나 口碑傳承의 형태로 그 일부 시구절만 알려졌던 河西 金麟厚(1510-1560)가 퇴계를 기린 한시 또한 발견되어 이를 번역해 퇴계의 시인과 도학자로서의 면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게 했다.
        9.
        2016.05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퇴계 이황과 엘리엇에게는 시간과 공간적 배경에서 매우 커다란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이상학적 혹은 초월적 사변과 가치에 경도되었 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둘은 모두 현상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 제를 갖고 있는 열등하고 타락한 상태로 인식하며 그 상태로부터 초월적 구원의 방법을 모색한다. 퇴계는 성(性), 즉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우주의 근본원리로서의 리(理)의 존재를 확립하고 리가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 노력이 극적으로 표출된 것이 고봉 기대승과의 사단칠정(四端七情)논쟁이 다. 20세기 초의 엘리엇은 자유주의자 그리고 인본주의자들의 인간 중심 혹은 이성 중심의 경향에 맞서 교회와 그 가치를 굳건히 지킬 것을 주창한다. 엘리엇이 말하는 초자연성(the supernatural) 혹은 신성(the divine)은 퇴계가 우주원리로서 받아들인 리처럼 초월적 혹은 형이상학적 도덕론을 통한 문제해결 모색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엘리엇이 현실계 에 대한 품은 부정적 인식과 형이상학적 해결을 모색해가는 과정은 황 무지 에서 출발하여 재의 수요일 을 거쳐 네 사중주 에 이르기까지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성리학과 엘리엇의 초월적 사유가 가진 자위성 과 위계적 세계관이 어떻게 실체적 근거와 타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 인가는 특별히 현대적 상황에서 유용한 질문으로 보인다.
        10.
        2008.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본고는 조선중기의 유학자 퇴계 이황과 청량산의 관계를 검토한 것이다. 산과 인간의 관련성을 사상적 측면에서 고찰하려는 목표 하에, 한국 유학을 대표할 수 있는 퇴계와 그가 평생토록 그리워하고 동경한 청량산에 주목하여 탐색하였 다. 본론에서 논의한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養氣는 ‘養生的 養氣’, ‘道德的 養氣’, ‘審美的 養氣’ 등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儒家가 산수자연에 대해 가지는 입장은 道德的 養氣와 밀접한 관 계가 있다. 유가의 도덕적 양기론은 자연의 질서를 통찰함으로써 자신의 내면 에 존재하는 도덕성을 자각하며, 이 자각적 깨달음을 지속적으로 올바르게 유 지하여 내면의 기운을 자연과 같이 생명력이 넘치면서도 질서로운 상태로 만들 어 가는 것이다. 공자의 ‘樂山樂水’와 맹자의 ‘浩然之氣’에 보이는 이와 같은 도 덕적 양기론의 면모는 송대 성리학자들에 의해 더욱 심화되고 체계화되는 단계 로 나아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楊恒叔의 󰡔무이지󰡕는 퇴계를 비롯한 조선 중기의 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 쳤는데, 현재 중국에서는 일실되었으며, 寒岡 鄭逑가 이를 대본으로 삼아 개편 한 󰡔무이지󰡕(1~2권, 1책)가 우리나라에 남아 전한다. 󰡔무이지󰡕는 우리나라 山 志의 전범이 되었으며, 특히 󰡔淸凉志󰡕는 이 책을 전범으로 삼아 저술되었다. 󰡔청량지󰡕는 무이산이 주자로 인해 주자학파의 학자들에 의해 聖山으로 존숭 되는 것처럼, 퇴계학파의 학자들이 청량산을 退溪와 관련된 聖山으로 확립하여 聖域化하려고 노력한 결과물이라 볼 수 있다. 자연과 인간이 어울려 그 자연환 경에 조응하는 새로운 인문경관을 창조하게 되는데, 󰡔청량지󰡕는 청량산과 퇴계 학파가 빚어낸 인문경관을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는 저술이다. 퇴계의 시문에 형상화된 청량산의 이미지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정신적 고향으로서 늘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산이다. 둘째, 세상의 번잡함과 구별된 곳으로서 심신을 맑게 정화해 주는 산이다. 셋째, 조용히 학문 에 힘을 쏟을 수 있는 강학처로서 성현을 배우려는 마음을 분발시켜 주는 산이 다. 그리고 이와 같은 청량산의 이미지는 퇴계가 표현한 단어 또는 내용적 의미 로써 요약하여 吾家山・仙山・聖山이라는 말로 구분지어 볼 수 있다.
        11.
        2006.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이 논문은 南冥과 退溪 先生의 用韻 系統을 歸納했는데, 이 系統으로 平水韻 과 比較하고, 中國의 詩人인 蘇軾과 高啟의 用韻 系統을 比較하여 退溪와 南冥 의 用韻 系統의 특징을 지적해내고, 朝鮮 16세기 文學語音에 대한 초보적인 탐 구를 했다. 南冥이 入聲 韻尾를 쓰는데 혼란한 것이 대략 100분의 8을 점하고, 退溪는 入 聲 韻尾를 쓰는데 혼란한 것이 대략 100분의 13을 점한다. 응당 入聲 韻尾인- p・-l・-k가 셋으로 나누어진 상황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실제 用韻 에 통용한 상황이 있는데, 南冥은 用韻의 혼란이 많지 않은데, 退溪는 用韻의 혼란이 비교적 많다. 平水韻은 13세기에 출현한 뒤로 줄곧 清나라에 이르기까지 影響이 매우 컸 다. 中國의 지식인이 格律詩를 쓰면서, 韻字를 고르고 平仄을 배치할 때 모두 平水韻의 규정을 준수했다. 우리들은 응당 南冥・退溪의 押韻 체계가 平水韻과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를 보아야 한다. 쉽게 말을 하기 위해서 또한 󰡔廣韻󰡕 의 韻目으로 기초를 삼는다. 눈에 뜨이게 하기 위해서 또한 표를 열거하는 방법을 쓰는데, 첫 번째 줄은 󰡔廣韻󰡕 208韻 韻目이고, 두 번째 줄은 平水韻 106韻의 韻目이고, 세 번째 줄은 退溪先生이 用 韻한 韻部이고, 네 번째 줄은 南冥先生이 用韻한 韻部이다. 韻目은 平聲이 上聲 과 去聲을 포괄한다. 󰡔廣韻󰡕으로부터 平水韻에 이르고, 다시 朝鮮詩人의 用韻 에 이르러 韻部는 간단해지고 통합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부호로 표기한다.
        13.
        2005.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后山許愈의 저작 가운데 聖學十圖附錄이 있다. 이 책은 心經附註의 예 에 따라 성학십도를 부록한 것이다. 선배 주자학자들의 글 가운데 보완 해설이 될 만한 글을 싣고, 논란이 될 만한 부분에는 특히 스승인 한주 이진상의 학설을 끌어다 썼다. 다행스럽게도 자신의 입장을 총론격으로 제시한 統論이 남아 있어 그의 독자적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퇴계와 성학십도를 따라 분명 한 주리적 입장에 선다. 그는 氣가 간여하는 차이와 갈등 등을 고려해야하지만, 중 요한 것은 우주의 근본이고 마음의 본체인 理라고 말한다. 이 源頭에 대한 이해 없이, 현실에 매몰되거나 의론부터 앞세워서는 아니된다고 말한다. 여기까지는 퇴계의 주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것같다. 그렇지만 그는 한 걸음을 더 나가는데, 氣의 현실적 제약을 퇴계보다 더 가볍게, 낙관적으로 본다는데 있다. 가령, 그는 사단뿐만 아니라 칠정조차 理發이라고 말한다. 일찍이 성호 이익이 이 주장을 편 바 있다. 퇴계는 理氣의 대치를 주목하고, 둘을 균형있데 다루고 있는 데, 후산은 理쪽으로 무게 중심을 이동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는 互發이 理氣의 대치와 갈등이라기보다 조화와 협력을 뜻한다고 말하는 점에서 낙관적이다. 그리하 여 그는 스승을 따라 과감하게 心卽理를 주창한다. 이 주장은 당대의 특히 방산 허훈으로부터 양명학과 선의 주장과 다를 바 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 지경은 참 곤혹스럽다. 왜냐하면 후산 자신, 가장 극력하게 비난하는 대상이 양명학과 선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자신을, 다른 누구도 아닌, 가장 비난하는 대상과 같다고 손가락 질하는 것을 그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이들 사이를 어떻게 갈라볼 것인가. 퇴계와 후산, 그리고 양명과 禪사이의 차이 를 어떻게 갈라볼 수 있겠는가. 나는 퇴계의 자리를 주리의 전형으로 보고, 후산에 게 ‘과격한 주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논평을 맡은 최석기교수께서 이의를 제기했다. 또 나중 최재목교수는 후산의 심즉리와 양명의 심즉리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조언해주었다. 그들 사이의 차이를 확인하고 갈래를 정돈하는 일은 좀 더 뜸들기를 기다리고자 한다.
        14.
        2003.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주자학은 天人合一이라는 우주인간론적 비전을 골격으로 한다. 이 테제는 근대적 심성에는 매우 비의적이고 난해하다. 이 사고는 인간의 본성을 우주적 전체속에서 읽으며, 이는 인간을 우리가 욕망하는 것과는 다른 지평에서 읽을 것을 요구한다. 주자학은 우리가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본성을 잘 모르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본성’은 유전적 편향과 후천적 습관때문에 자각되지 않고,덮여있다" 주자학은 이 덮여지고 때묻은 본성을 지속적 자각을 통하여 벗기고 씻기는 것을 공부와 훈련의 과제로 삼는다. 그 과정에서 사적 자아는 공적 자아로 변환되며,자아와 타자를 분리하고 있던 장벽이 사라지면서 언간은 타물과의 우주적 소통을 확보한다. 그것을 전통적으로 철학적으로는 物我-如라는 통일로, 또는 문학적으로는 J홈 飛魚뿔이라는 자연 생명의 약동으로 묘사했다. 그것은 동시에 유가적 가치의 중심인 仁훌禮智가 발현되는 體用의 기제이기도 하다. 퇴계는 이런 본체와 공부의 전 과정을 그림 열 폭에 정돈했다. 이 논문은 퇴계가 정리한 주자학적 본체론을 제 1『太極圖』와 제 2『西銘圖』률 중심으로 해설하고, 이어 그것의 회복을 위한 공부의 규모와 방법을 제 3『小學圖』와 제 4『大學圖』를 통해 살펴보았다. 그 중심 에 지속적 자각의 파지로 번역될 수 있는 敬이었다.
        15.
        2002.06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To speak most broadly about the two representative Neo-Confucians of the mid-sixteenth century Choson, Toegye(Yi Hwang, 1501-1570) focused on the theories of nature and principle and self-cultivation, whereas Nammyung(Cho Shik, 1501-1572) focused on those of self-cultivation and righteousness. One may explain such difference by their opposite personalities: the one had a mild temper with sympathy and tolerance, while the other a strong temper with strictness and critical power. Basically, however, these two had a common ground in the system of Neo-Confucianism(Tohak), and their difference occurred in the course of searching for a more rational and efficient way of achieving the same goal. Therefore, the difference is significant in that it presented the complementary models of Neo-Confucian learning as could be realized in that period, and that it diversified, thereby, the mode of understanding and responding to the times as well as the method of learning. So in comparing Toegye and Nammyung's traditions of learning, I aim at drawing attention to the diversifying and complementary meaning of the difference rather than to the contradictory and rivalrous meaning of it. The difference between Toegye and Nammyung in their traditions of learning can be summarized in three points. Firstly, by carrying the question fo attentiveness(jing) through his methodology of learning, Toegye established a tradition centering around the self-cultivation theory. Nammyung, in his part, emphasized the coherence of attentiveness and righteousness(yi) and thereby established a tradition which, though based on the self-cultivation theory, took the righteousness theory seriously to confirm the standard of value necessary for the social practices of self-cultivation. Secondly, Toegye's program proceeds from intellectual activities of deliberation and distinction to self-cultivation, whereas Nammyung's starts from self-cultivation and ends at the social practice of the rule of right(wang-dao). Thirdly, it was a progressive way of reformation aiming at preparing the foundation for the peaceful future that Toegye endeavored to educate the young intellectuals with an intense focus on the self-cultivation theory. On the other hand, it was a radical way toleration no injustice that Nammyung demanded the government a drastic reformation criticizing its contradictory operations directly. Such points of difference provide us the background for understanding the facts that Toegye, having resigned from his official position, exerted himself on learning and self-cultivation and that Nammyung, though never acception an official position, kept raising social issues in a vigorous and strong voice. Different academic traditions of Toegye and Nammyung were closely connected with different attitudes toward the social realities of the times: endeavoring at self-cultivation vs. trying to save the world; providing education for the future vs. trying to realize the ideals in the present. Although the mild and moderate attitude and the strong and radical one are contrary, neither of them are subject to judgement of right and wrong. Rather, both are necessary, for well-balanced solutions can derived only from the harmony and compromise between the two most typical ways of response. By providing the universal truths to their times, the traditions of Toegye and Nammyung could establish themselves as the two main axes of the Neo-Confucian tradition of Choson and exercise extensive influence throughout the late Choson Choson dynasty. Their wisdom needs be re-appreciated as one of the most fundamental insights in our times: the wisdom of understanding the essence of the human hature, devising methods of cultivating human virtues, and seeing that the social order is possible only when founded on the human morality and managing a society only when those in ruling position are moral.
        16.
        2001.12 KCI 등재 서비스 종료(열람 제한)
        Gansong is a great scholar in Choson dynasty middleages. He was born in Haman county Kyungsang province depend in Nammyung school. However, He was educaded by three scholars belong to Tygae school from young age. Because his learning and personality was influenced from them strongly. especially from Yuheon. But he cannot help belonging to Nammyung school, for many Nammyung's disciple have resided in his hometown Haman and his wife's hometown moreover Nammyung's hometown Samga. Besides his father-in-law Nopa was the disciple of Nammyung's disciple Junginhong and he had be the chairman of Yongyam memorial hause. Though Gansong became a member of Nammyung school, he never has seceded from Tygae school. He has always play active part as both a member of Nammyung school and a member of Tygae school. Consequently his association span was very wide, and he made the best use of these circumstances. He has strained every nerve to mediate two schools. He was well-balanced scholar, so he has supported neither Nammyung school nor Tygac school. He adopted the good points of two schools and developed himself, became new own personality. Therefore he never have abtained a post in the government keeping his integrity. Though he has lived at seclusion, he has never forgotten nation and people. This point was influenced by Nammyung school. He has wirtten many prosees and poets, this point was influenced by Tygae school. His successors have regarded him as a member of Tygae school in order to uplit him. But this is not true. It is clear that he is both a member of Nammyung school and a member of Tygae school. His poet is very excellent, so deserves minutely study. If so, we can grasp him more crose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