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이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17세기 후반 독일 바로크의 오페라 문화와 관련된 복잡하고 다 층적인 서사이다. 이 서사에는 국내 음악학 담론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독일 바로크의 오페라 문화와 그것의 태동, 그리고 성장 등을 다루는 일련의 과정이 담겨 있다. 특별히 이 글은 이 과정 을 17세기 후반,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공공 오페라 극장을 중심으로 기술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역설하고자 하는 것은 라이프치히의 오페라 문화가 17세기 중반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의 주 요 음악도시, 예컨대 함부르크, 드레스덴, 하노버, 그리고 베니스 등이 제공했던 문화적, 음악적 연 결망 안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라이프치히의 오페라 문화를 이러한 방식으로 읽는 것은 이 도 시의 음악적 지형이 멀리는 베니스와 가까이는 하노버 등의 도시와 얼마나 유사했었는지도 가늠 하게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This study examined the structural characteristics of the royal tomb equipped with only rail stone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Bongneung(封陵: the burial mound of royal tomb) equipped with only rail stones was constructed from 1468 to 1632. During this period, Hyeongung(玄宮: the underground chamber for the coffin of the king or queen) was constructed with lime. When the Hyeongung is completed, the soil is covered with a thickness of 1 foot parallel to the ground surface. On top of that, as the base of the Bongneung, the rail ground stone is constructed with a height of about 1.5 to 2 feet. The inside of the rail ground stone is also firmly filled with soil. On top of this, semicircular lime is installed with a convex center. Lastly the soil is divided and compacted several times to form a hill, and then covered with grass to complete the Bongneung. The notable feature is that between the Hyeongung made of lime and the Bongneung made of soil, the rail ground stone serves as a stylobate with the inside compacted by the soil.
중화회관은 각 국가에 있는 화교들이 만든 상공회의소 혹은 교민협회 같은 역할을 수행한 조직이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17세기 중반 명향사라는 조직이 먼저 등장했는데, 이는 단순한 화교 커뮤니티로 출발해서 명향회관이라는 조 직화를 거쳐 중화회관을 조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두 기관은 지연(地緣)이라는 공통 점을 통해 자연스럽게 시기별로 연결되었다. 베트남 정권은 명향사를 화교를 관리하 는데 활용하였고, 이는 중화회관 시기에서도 이어졌다. 명향사의 특성은 베트남 중화 회관이 다른 국가와 다른 점은 갖게 하였다. 천후사당과 관우사당을 두고 복과 안녕 을 빌었으며, 중요한 화교 조상을 기리는 사당을 두었다. 또한 혈통별로 각기 달리 화교를 관리하여 중화회관의 효율적 관리와 회원들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본고는 17세기 牛疫의 창궐이 개인과 사회에 환기한 것들에 대해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등 학교 한문교육에서 災難 관련 자료를 어떤 방향에서 다룰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적은 것이다. 우역이라는 충격 앞에서 개인과 사회는 이전의 삶의 방식과 인습적 가치를 되돌아보게 된다. 소의 노동력이 결여된 농경의 삶에서, 사람들은 소가 생활의 중심에 있던 日常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우역의 창궐은 전원적 삶의 안정성을 흔들고 기층민의 연대에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의 連鎖로서 외교 등 의외의 영역에까지도 파장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 조정에서는 몇 가지 정책을 서둘러 시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유교가치와 충돌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우역 창궐은 소의 도살 문제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계속해서 촉발시키는 역할을 한다. 한편 우역은 기상 이변과 함께 발생함으로써 백성의 삶을 더욱 극단으로 내몰았다. 이러한 분위기는 하나의 압력으로서 사회 내에서 해결 구조를 모색하게 했다. 미래 사회에는 기후, 환경 문제가 사회적인 이슈로 부상하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역 자료가 함의하는 문제의식을 한문교육의 범위 안으로 편입할 필요가 있다.
In the early First Millennium AD, Vietnam imported Chinese language and culture, which had a lasting influence ever since. Chinese influence on Vietnamese written and spoken language is notable in particular. Despite this, due to the fact the two languages belong to two distinct families and differences in the number and structure of syllables available in each language, the borrowed Chinese language cannot transcribe all of Vietnamese personal and local names properly. This is the reason for the formation of the Nom script. From the 17th century onwards, Western missionaries used the Nom script for religious purposes, which led to the formation of the Latin-based Vietnamese alphabet. It would not be an overstatement to say that, 17th century Catholic documents written in Nom are of indispensable value to researchers who wish to study the history of the Vietnamese language and the Latin-based Vietnamese alphabet. Based on the materials from Kinh nhung le mua phuc sinh (Scriptures on Easter Rituals), this paper will focus on the Nom transcription of foreign Saints' names, which will show the differences in syllabic structure between Western languages (Portuguese and France) and Vietnamese, as well as give an overall idea of Nom transcribing rules.
A Ming Dynasty Book, YuTang LiZheng ZiYi YunLv HaiPianXinJing (玉堂釐正字義韻律海篇心鏡, Vol. 20s), is collected in National Library of Korea. The author Zhu ZhiFan (朱之蕃, 1548-1624) is a minister of the Ming Dynasty, also a famous calligraphist. In 1606, he has been to Korea, left lots of influent poetry and calligraphy works. According to the preliminary investigation, this book is re-adjusted and re-edited, basing on HanLin ChongKao ZiYi YunLv DaBan HaiPianXinJing (翰林重考字義韻律大板海篇心鏡, Vol. 20s) which was rescheduled by Liu KongDang (劉孔當) in 1596.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as follows: Firstly, we introduced content and collection situation of YuTang LiZheng ZiYi YunLv HaiPianXinJing (Korean version), which has not been formally introduced to the academic community; Secondly, we described the structure, the preparation of the whole story and author of this book; Thirdly, we compared this book with various HaiPian, expecially to find the origin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m. Finally, we concluded its influence on Korean academic and literary circles in the later 17th century.
영국의 의회혁명 기간 중에 분리주의자의 한 갈래로 나온 퀘이커리즘은 사제나 종교적 의식을 거부하고 여성의 발언을 허용했던 급진적 종파였다. 퀘이커들이 신봉한 내면의 빛은 그리스도로부터 나온 것으로 여겼기에, 교회에서 여성의 발언 역시 내면의 빛에 기초한 예언으로 간주되었다. 이 논문은 퀘이커리즘의 초창기에 쓰여진 여성들의 소책자를 중심으로 여성의 발언권에 대한 옹호를 살펴보고자 한다. 소책자들은 퀘이커리즘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자신들의 교리의 정당함을 알리는 동시에 여성들의 발언권에 대한 옹호를 펴고 있다. 소책자는 공통적으로 여성의 발언을 옹호하기 위해 자신을 예언자의 위치에 놓으며, 성경의 구절을 들어 교회의 관습으로 내려온 여성에 대한 침묵의 강요를 반박한다. 발언권에서 남녀의 차별을 없애는 데 주력한 나머지 개인으로서의 여성의 고유한 목소리를 부각시키지 못했다는 문제점은 지적할 수 있으나, 퀘이커 여성들의 소책자는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문학에서 여성 작가의 활동이 시작되던 17세기의 상황과 궤를 같이 하여 다루어볼 가치가 있다.
Gimlyong-sa temple has played an important role of Buddhist culture in Gyeongsangdo Provinces(嶺南地域) in the late Joseon Dynasty as the 31st head temple(本山) in the Japanese occupation. There are lots of architectural documentary records remained nevertheless, most of cultural heritages are destroyed by fire in 1997. There were 85 articles in five kinds of books which contained historical achievements of Gimlyong-sa temple and hermitages(Daeseongam(大成庵), Hwajangam(華藏庵), Yangjinam(養眞庵), Geum seondae(金仙臺), Dosoram(兜率 庵), Myeongjeogam(明寂庵)). It is possible to understand the five situational peculiarities in the 17∼19th century. At the first, they were compiled in 1914 to around 1930 by Kwon Sangro(權相老) to clarify the historical facts. Second, confirmed the formation process of the foundation narrative. Third, the meaning of Seolseondang(設禪堂), Manseru(萬歲樓) and Hyangnojeon(香爐殿) were recorded, it is possible to look at the concept of people at that time. Fourth, the great masters portraits were enshrined in hermitages, not in Gimlyong-sa temple. It means that a hermitage is not for only self-discipline or living but assembly of religious orders(門派). Fifth, Chimgye(枕溪), the great Buddhist clergy and carpenter of Gimlyong-sa, was nationwide active worker in 19th century because he was also in a charge of investment manager for construction.
본 논문의 목적은 17세기 후반에 발생했던 안용복의 피랍․도일사건이 갖는 의미를 규명하기 위한 데 있다. 안용복의 피랍․도일 과정과 그것을 둘러싼 논쟁점을 살펴보고, 그 사건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정리해보고자 하였다. 첫째, 안용복이 1693년 요나고의 오야가 소속 어부들에게 피랍되었다가 표류민 송환의 절차에 따라 귀국할 때 비변사에서 안용복이 진술한대로 서계를 수령한 것은 아니었지만, 1695년 막부의 질의에 대한 돗토리번의 답변이나 1696년 2차 도일 당시 작성된 일본측 조사기록 등을 통해서 미루어 안용복은 돗토리번의 家 老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증명하는 모종의 문서를 받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1693년과 1696년 두 차례의 도일은 울릉도와 독도의 영유권 재확인의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 진행된 울릉도수토정책으로 계승되었다. 안용복의 도일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현재까지 한국이 동해의 해양주권을 유지하는 바탕이 되었으며,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정부는 적극적인 교섭 을 통해 막부의 일본인에 대한 ‘竹島渡海禁止令’을 끌어냈고, 울릉도 해역을 포함한 조선정부의 도서정책의 변화를 끌어냈다. 조선정부는 ‘울릉도쟁계’교섭 과정 중이던 1694년 9월 張漢相을 삼척첨사로 임명하여 울릉도를 조사하게 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일시 중단되었던 울릉도 搜討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1699년부터는 邊將의 정기적인 수토를 제도화하였다. 세째, 안용복이 쓰시마번을 통하지 않고 직접 일본에 간 것은 대조선통교권을 독점하고 있던 쓰시마로 하여금 조선이 일본 幕府 등과 직접 통교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쓰시마번의 儒者로 대조선교섭 전문가인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가 언급한대로, 안용복의 도일로 시작된 ‘울릉도쟁계’는 조일간의 외교교섭에 있어서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따라서 안용복의 도일로 촉발된 울릉도쟁계 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후기 조일관계가 비정상적인 외교적 관행이 고착되어 있던 상황을 타파하고 외교적 원칙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면서 처리된 사건으로 조일외교의 전환점이 된 사건이었다.
This study is basically about four-guardian-statutes-building-gate in 17th Century. In the field of art-history, there are four-guardian-statutes made of clay in order that the statutes are so gigantic and grotesque enough to threaten all the devils. This purpose of this study is to make sure that the similar variation occurred at the four-guardian-statutes-building-gate in 17th century. The result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only Da-Po style four-guardian-statutes-building-gates were built in famous four temples separately from 1612 until the Manchu war of 1636. And there are gigantic four-guardian-statutes made of clay in the building. Second, there are Chul-mok Ik-gong style buildings were built in 1660s at Bo-Rim-Sa and Neung-Ga-Sa. The buildings including four-guardian-statutes-building-gate of Song-gwang-sa built in 1636 probably are all similar to earlier Da-Po style four-guardian-statutes-building-gates in the viewpoint of structural type and size of building. Third, it began to build Ik-gong style four-guardian-statutes-building-gates in 1676 at Su-ta-sa.
Choseon Dynasty, from many aspects, saw the institutional establishment of its royal palaces in the 17th and 18th century, with 'donggwol (east palace)' as the most representative form in the era. In that period, palaces were managed in the best way that fits the royal etiquette and order to maintain the Confucian framework of the times. While the royal palace was the place for the king to conduct state affairs, it was also a compound for the royal family to lead a life in. Since the royal family was also based on the Confucian system, women in the royal palace seldom revealed their existence to outside world. Yet daebi,(a Queen Mother) who was often called 'dongjo,' enjoyed the highest level of honor not only as a member of the royal family but in the hierarchical order of the dynasty. As they often engaged themselves in political affairs, daebi raised their reputation through rites and rituals. So, in the 16th century, they largely used Changgyeong-gung palace in the eastern part of the royal compound since they sometimes had to go out of the royal residence. While it was called 'dongjo' because it was seated in the eastern part, it was also used as a word symbolizing daebi. And, therefore, it has become a general principle of royal palaces to build the palace for daebi in the eastern wing of the compound. However, the residence for daebi was not always built in the eastern part in the 17th and 18th century and, instead, edifices for daebi were sometimes erected in several points within the royal compound. Beside, daebi’s residence in this period had additional spaces for ceremonies since they had a number of official events there. Construction of daebi’s residences in this era was not confined to the symbolic institutions and they became the peculiar palaces with specific characteristics for official ceremonies of the queen mothers. Consequently, it could be said that the architectural style of dongjo, which was the place of the supreme female in the hierarchical order, stemmed from donggwol where daebi spent the longest time of the royal life.
The main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agricultural technologies through plowing and hoeing. One of the purposes on which this study is to analysis process of development and divergence of plough and hoe. The following facts are significant findings ; 1. In early Yi - dynasty, tilling implements used by ard plough and mould board plough did use in three south province, most region mainly used ard plough. Therefore, farming in early Yi - dynasty is extensive. 2. The mould board plough diffused in many fann house, spring farming and autumnfarming formed complet system in early 17th Century. But works of hoeing was continuing to save labor by long hand hoe. 3. Finally in 17th century, Small - scale independent farming ceaselessly tried to make his basis with transtortation intensive farming method. But Small - scale independent farming had not stafely base because extensive farming method continued in this peorid.
본고는 16-17세기에 찬술된 유학자의 금강산 유람록 27편을 통해 금강산 불교를 고찰한 글이다. 그 유람록을 통해 금강산 소재의 118개 사찰과 암자가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高僧이 있는 寺庵에는 많은 제자들이 함께 수행하고 있었지만, 임진왜란 이후 남한산성 축조에 동원되면서 금강산 사찰이 텅 비다시피 했던 때도 있었다.
금강산 유람객들은 대부분 사찰을 숙식처로 사용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유학자와 승려 사이에 교류가 있었고, 유학자들이 승려 비 문을 써주거나 글씨를 써주기도 했다. 대화가 통하는 경우에는 밤늦도 록 定慧나 理氣 등의 철학적 문제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유학자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거나 불교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줄일 수 있었던 것 같다.
한편 유람객들은 승려들이 메는 가마를 타고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가마를 메는 藍輿僧은 1565년부터 1572년 사이 금강산을 유람했던 楊士彦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鄭曄과 李世龜의 유람록에서 기록하고 있다. 실제 1572년 이전 금강산이나 지리산의 유람록에서는 남여승에 대한 언급을 발견할 수 없으므로 남여승의 관습이 확산된 시기는 16세 기 후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明宗代 文定王后 승하 후 불교 계의 위상이 하락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