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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4.07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19세기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조선은 외세의 침입이라는 새로운 시대 상황을 맞게 되었다. 이러한 외압(外壓)에 대응하는 데 가장 근본이 되었 던 것이 당시는 수군(水軍)이라 불렸던 조선 해군(海軍)의 군사력이었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본 연구는 19세기 조선 해군 전력 의 일단(一端)을 살펴볼 수 있는 실증적 사례 연구를 진행하였다. 구체적 으로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속해 있던 광양현(光陽縣)과 경상우수영 (慶尙右水營)에 속해 있던 하동부(河東府)의 수군 전력의 실태를 파악하 고자 하였다. 이들 두 군현은 19세기 ‘중기(重記)’ 자료가 남아 있다. 중 기 자료는 작성 당시 지방 군현의 군비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좋 은 자료이다. 따라서 이 중기 자료를 중심으로 19세기 조선 해군 전력의 일단을 살펴보았다. 이와 더불어 각종 관찬 자료와 읍지(邑誌), 사례(事 例) 등을 비교 검토하였다. 이 연구를 통해 19세기 조선 해군 전력의 일 단을 확인하였다. 당시 조선 정부는 해양 방위[海防]에 상당한 관심을 가 지고 있었지만 이에 대응한 해군 전력의 향상은 적절히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본 연구를 통해 일부 확인되는 것처럼 특히 지방 군현의 수군 전력은 형식적 전력을 유지하는 데 그쳤고, 그 실제는 전력 이 약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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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24.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Hasimdangga Eumsikbeop』 is the second cookbook discovered in the Honam region. It is believed to have been copied by Hong Ju-song between the late 1800s and early 1900s, and excluding the missing parts, it contains a total of 14 items, including 7 liquor items and 7 general food items. Judging from the proofreading marks, it was not considered a complete creation. However, it was confirmed that the book was not influenced by existing ancient cookbooks from the Seoul-Gyeonggi, Chungcheong, and Yeongnam areas. Therefore, it is highly likely that the book was based on an undiscovered recipe book from an ancient family. It is valuable as a basis for comparative research on regional food culture in the traditional era in that the manufacturing methods, ingredient quantities, and description methods are different from existing cookbooks in many ways and contain unique terminologies and regional dialec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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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24.04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armillary sphere, an astronomical observation device embodying the Orbital Heaven Theory of the Later Han Dynasty in China, holds both historical and scientific significance. It has been produced in various forms by many individuals since its inception in the era of King Sejong in the Joseon Dynasty. A prominent figure in this field was Nam Byeong-cheol (南秉哲, 1817-1863), known for his work 'Uigijipseol' (儀器輯說), published in 1859, which detailed the history, production methods, and usage of the armillary sphere. This text particularly highlights 21 applications of the armillary sphere, divided into 33 measurements, covering aspects like installation, time, and positional measurements, supplemented with explanations of spherical trigonometry. Despite numerous records of the armillary sphere's design during the Joseon Dynasty, detailed usage information remains scarce. In this study, the 33 measurements described in 'Uigijipseol' (儀器輯說) were systematically classified into six for installation, nineteen for position measurement, seven for time measurement, and one for other purposes. Additionally, the measurement methods were analyzed and organized by dividing them into the ecliptic ring, moving equatorial ring, and fixed equatorial ring of the armillary sphere. In other words, from a modern astronomical perspective, the results of schematization for each step were presented by analyzing it from the viewpoint of longitude, right ascension, and solar time. Through the analysis of Nam's armillary sphere, this study not only aims to validate the restoration model of the armillary sphere but also suggests the potential for its use in basic astronomical education based on the understanding of the 19th-century Joseon armillary sphere.
        3,000원
        4.
        2023.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연구의 목적은 독립 이후 보고타의 수도 위상에 대한 논쟁과 대립 이 19세기 각기 다른 정치 엘리트 그룹 간의 경쟁 구조와 어떤 상관성 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해 분석하는 것이다. 콜롬비아의 경우, 독립 이 후 지역을 기반으로 각기 다른 엘리트 그룹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형성되는 독특한 정치 구조를 구축하였다. 이러한 엘리트 그룹 간의 정 치 경쟁 구조는 19세기 동안 아홉 차례의 무력 갈등을 발생시켰고, 이 과정에서 수도 보고타의 위상에 대한 논쟁을 유발하였다. 보고타를 중심 으로 한 전통적인 엘리트 세력이 보고타의 수도 위상을 유지하게 되면서 이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전략으로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통해 근대화 발 전을 시도했다. 본 연구는 수도 이전을 둘러싼 정치적 경쟁 구조 논의를 보고타의 사례로 분석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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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22.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is study investigated the maintenance and management of government office building in Dongnaebu, Gyeongsangdo in the mid-19th century. In the late Joseon Dynasty, Dongraebu was an important point of national defense and a place of trade and diplomacy with Japan, so it had many government facilities. There are very few government facilities remaining today, and no structure remains. Therefore, it is possible to grasp information about the government facilities through the old materials. Currently, there are public documents related to the local government offices such as Eupji, Eupsarye, and Junggi. Through comparison between public documents, we will examine the maintenance and management of Dongnaebu government facilities in the mid-19th century. As a result of the research, Dongnaebu government facilities were supervised by department and managed like articles. In addition, the name, size, and changes were all recorded in the management of the goods, and the authority of responsibility was clearly stated. This result is because the remaining material has the purpose of preparation as an accounting book. As a result, it was found that the government facilities in the late Joseon Dynasty were managed by a systematic department with clear author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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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22.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연구에서는 19세기 수많은 작곡가에 의해 완성된 ≪들장미≫ 노래가 독일정원의 장미꽃 문화와 무관하지 않음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어 19세기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본 독일정원의 장미 꽃 문화로 탄생된 ≪들장미≫ 노래와 그 의미를 새롭게 주목하고자 한다. 괴테의 들장미 시는 1770년경에 작시 되지만 19세기 들어 장미꽃-붐과 함께 독일어권의 많은 작곡가에 의해 ≪들장미≫ 노래로 작곡된다. 그리고 괴테의 시를 가사로 한 ≪들장미≫ 노래는 19세기 독일정원 특히 장미원에서 소통력을 더욱 발휘했던 문화적 소리였음을 알아차리게 했고 동시에 시청각적 정서활동을 지원하는 매개체로 작용했다. 이는 당시 자연을 배경으로 한 시민들 의 생활음악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음악사에서 19세기 독일정원의 장미꽃 문화로 탄생된 ≪들장 미≫ 노래와 그 의미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한다. 논문투고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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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22.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중화회관은 각 국가에 있는 화교들이 만든 상공회의소 혹은 교민협회 같은 역할을 수행한 조직이다. 베트남은 중국과의 역사적 배경에 따라 17세기 중반 명향사라는 조직이 먼저 등장했는데, 이는 단순한 화교 커뮤니티로 출발해서 명향회관이라는 조 직화를 거쳐 중화회관을 조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두 기관은 지연(地緣)이라는 공통 점을 통해 자연스럽게 시기별로 연결되었다. 베트남 정권은 명향사를 화교를 관리하 는데 활용하였고, 이는 중화회관 시기에서도 이어졌다. 명향사의 특성은 베트남 중화 회관이 다른 국가와 다른 점은 갖게 하였다. 천후사당과 관우사당을 두고 복과 안녕 을 빌었으며, 중요한 화교 조상을 기리는 사당을 두었다. 또한 혈통별로 각기 달리 화교를 관리하여 중화회관의 효율적 관리와 회원들의 이익을 도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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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21.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analyze changes to body measurements and silhouettes after wearing an early 19th century women’s corset. Two types of corsets were tested. Changes in body size and silhouette were compared based on the levels of tightening strength of the corset. The tightening strength was adjusted in 4 steps by making the length of back fastening string 10-40 cm shorter than the standard. The silhouette was compared with the front silhouette and the side silhouette. The results were as follows. After wearing the experimental 19th century corsets, the chest circumference and front interscye length increased. However, the chest circumference did not increase proportionally to the tightening strength. The underbust circumference, waist circumference, and back interscye length also decreased. The waist width was decreased to create a slim front silhouette. The change in the body silhouette differed depending on the style of the experimental corset. The experimental corset made with the six-piece torso pattern changed the posture so that the shoulders were pulled back and the chest was pushed forward. The experimental corset with the side bodice pattern resulted in the subject’s shoulders reclining backward and the chest and abdomen extending forward. The results of this study show that women’s body sizes and silhouettes could be changed by wearing the early 19th century corsets, but the changes in body size and silhouette vary depending on the wearer's individual body type or corset sty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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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21.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최초 중남미 화교는 16C후반~19C초까지 스페인이 식민 지배하던 필리핀에서 재이주한 중국인으로 판단된다. 중남미에 본격적으로 화교가 송출된 것은 쿨리(화공) 무역에 기인한다. 1단계(1800~1874)는 노예제도 폐지로 서구 열강이 플랜테이션에서 필요한 인력을 화공으로 대체하였고, 이들은 중남미 화교 1세대가 된다. 2단계(187 4~1949)에서는 불평등 계약이었던 ‘채무화공’ 제도가 폐지(1874)되면서, 합법적인 중남미 이민이 다양화 되었다. 쿨리로 시작했던 화교들은 요리·이발·재단사로 창업하게 된다. 총리아문이 설치(1861)되고, 1879년 쿠바에 영사관이 설치되면서 화교들도 보호를 받기 시작했다. 3단계(1949~2000)는 중남미 화교들의 ‘현지화’ 시기이다. 2019 년 중남미에는 227만명의 화교가 있고, 이는 전 세계 화교 중 4.6%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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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2021.03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청대 袁永綸이 쓴 필기 『靖海氛記』는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까지, 중국 남부 해상에 창궐하던 해적을 토벌한 기록이다. 중국의 역사 사료 중 『정해분기』 만큼 해적에 대한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헌은 드물다. 안타깝게도 1830년에 초판이 출간 된 후, 중국에서는 유실되어 전하지 않다가, 2007년 대영도서관에서 판본이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정해분기』에 대한 전면적인 연구는 상당히 부족한 편이다. 이에 본 논 문은 작가 원영륜과 『정해분기』의 판본, 영역본을 소개하고, 『정해분기』의 내용을 해적단의 형성과 세력 확장, 분열과 투항이라는 흐름에 따라 나누어 살펴본 후, 이를 기초로 그 특징과 의의를 분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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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2020.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러시아가 한국에 가졌던 관심 분야중 하나는 가린의 접경 지역 여행기와 「國譯 韓國誌」를 통해 나타난 것처럼 안정적인 식량자원 공급지로서 가치이다. 러시아는 동해안 탐사의 결과 200여개의 해안지형과 해양 지물에 지명을 남겼을 정도로 큰 영향력을 미쳤다. 대부분은 사라졌지만, 일부는 남아 프리모르스키 주 인근 바다의 해양 지명으로 Bukhta Reyd Pallada, Zaliv Posiet 등으로 구글 어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해안지역 조사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부분이 내륙에 대한 조사이며 러시아 정부가 한국에 관한 가진 관심의 방향이 표현된 것이 한국지(KOPEИ)로 생각된다. 전체 14장으로 편집된 「국역 한국지」의 내용 가운데 한국사와 한국의 언어, 행정 및 정치제도에 관한 내용을 제외한다면 19세기까지 서구 열강에 한국과 관련되어 알려진 한국의 영역에 관한 것을 포함한 자연지리학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경제와 통상 관련된 내용도 풍부하여서 이에 관한 지리학적 연구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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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2020.10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Historically, rhythm has played a key role not only in musical composition, but also in architectural design. In 1893, architectural theorist and art scholar August Schmarsow, in "The Essence of Architectural Creation,” created a new definition of architecture as space-creation and characterized rhythm as a design principle. However, this new idea was confronted by Heinrich Wölfflin. While Schmarsow’s theory represents a dynamic world-view based on anthropomorphism, the architectural theory of Wölfflin is based on the notion of harmony, displaying a kind of conservative stasis. These two main streams have greatly influenced the development of modern architecture. The concept of space has prevailed in the discourse of modern architecture, but the principle of rhythm has seldom received any positive recognition. This article introduces and develops the concept of rhythm and disputes whether Behrens and Frankl in particular, two who dispute Schmarsow’s theories, have used the concept of rhythm in terms of space. I conclude that they could not overcome the notion of the physical—the body —, thus their use of the term rhythm is incongruous with the notion of space. The idea of rhythm in architectural creation remains an up and coming id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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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2020.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차이니스 레포지터리』의 「잡록」과 「사건일지」란의 소개 내용을 중심으 로, 19세기 초 신교 선교사들의 눈에 비친 중국 사회의 부조리, 자연 재해, 국가 기 능, 지역 소식, 인물들에 대한 정보들을 살펴보았다. 이 두 항목에서 주로 그려진 서사는 당시 중국에 와 있는 선교사들이 직접 문화접촉의 현장에서 마주했었던 문화적 차이를 드러내 주면서, 동시에 해당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들 삶의 현장성을 그대로 반영해 준다고 파악된다. 본 논문은 중국의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경계 지역에서 형성되는 현장성을 미세서사의 형식으로 재현하고 있는 『차이니스 레포지터리』 의 서사에 주목하면서, 그 안에 가로질러 있는 신교 선교사들의 근대적 열망을 추출 해 보았다. 필자 또한 이들의 이 같은 서사가 단순히 물리적 혹은 계량적 묘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당대의 사회 모순과 다양한 층위에서 살고 있는 약자들의 삶이 녹아 있다고 판단한다. 본고는 이 같은 외연에서의 미세서사와 그 내면을 채우는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긴장을 어떻게 읽고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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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2018.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의 목적은 19세기 조선 정부의 울릉도·독도 통치의 일환으로 시행된 울릉도 수토제(搜討制)의 운영 실태와 그 의의를 연구하는 것이다. 조선과 일본이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인 독도를 하나의 셋트로 인식하여 왔음은 양국의 역사 및 지리 문헌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조선 정부의 울릉도 수토는 조선 정부가 울릉도와 독도를 자국의 고유한 영토로 통치하였음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다음 몇 가지를 중점적으로 연구하였다. 첫째, 필자는 19세기 울릉도 수토 연도에 관해 조사하여 논문으로 보고한 적이 있다. 이 글에서는 필자의 이전 논문에 누락되었던 것과 새로 발견한 사료적 근거들을 추가하고, 오류를 교정하며, 과도하게 추정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삭제하여 현 단계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수토 일람표를 제시하였다. 둘째, 필자의 이전 논문에서 소홀하게 다루었던 울릉도 개척기, 특히 1889∼1894년의 울릉도 수토제 운영 실태를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셋째, 감영의 장계(狀啓)에 인용된 수토관의 첩정(牒呈)을 활용하여 19세기 전 기간에 걸쳐 수토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 었는지 수토 노정과 수토 내용을 살펴보았다. 19세기 전반기 조선의 역사는 소수의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기’로, 이양선의 출 몰로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안으로는 민란 등 소요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울릉도 수토도 잘 행하여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론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논문은 세도정치기에도 울릉도 수토가 정기적으로 잘 진행되었고, 19세기 후반 울릉도 개척시기에도 수토제가 계속 존속되었음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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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2018.08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Although milk, which is a representative western food, has a more than 100-year history in Korea, the preference is controversial. This study examined the milk history of Choseon in 1884~1938. This period was divided into 4 periods regarding the westerner’s records and advertisements. Westerners who visited Choseon in 1884~1895 (1st period) recorded the eating habits of Choseon,i.e., no milk consumed, even in insufficient food situation. Among the westerners, medical missionaries began to show or/and recommend condensed milk for sick children. In 1896~1909 (2nd period) newspapers, general shops in Hanseong for westerners showed advertisements of dairy products. In the 1900s, condensed and raw milk were advertised through newspapers. Domestic ranching systems to produce raw milk were established at that time mainly by Japanese. In the 1910s (3rd period), raw milk and condensed milk were advertised in newspapers. Since the mid-1920s (4th period), dairy products were bisected into condensed and powdered (dried) milk. Moreover, many Japanese manufacturers appeared in the advertisement in the 1920s. These results suggest that milk has been recognized as a symbol of an enlightenment food in Korea since the late 1900s, but the old negative wisdom, unfamiliar taste, and high price of milk at that time limited its app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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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2018.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이 글은 19세기 중엽 상하이가 개항된 이후 중국을 대표하는 근대 도시로 성장하는 가운데 동북아해역 지식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어가는 과정에 대해 살펴본다. 상하이가 근대 동아시아에서 서학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중심도시가 된 데에는 서양인 선교사들의 역할이 컸다. 이 서양 선교사들은 여러 단체들을 만들어 중국인들에 대한 선교와 지식 보급을 목적으로 교육 및 출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생산된 한역서학서는 상하이를 비롯하여 중국의 각지로 전파되었고, 심지어 조선과 일본에도 전해졌다. 이렇게 하여 상하이는 근대 동북아해역 지식네트워크의 중심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경우는 막부말부터 메이지 시기에 이르기까지 일찍부터 상하이와의 무역을 통해 상하이에서 생산되는 한역서학서를 많이 수용했지만, 조선의 경우는 쇄국정책으로 인해 단지 베이징과의 육로 교통망을 통해 한역서학서를 수용하였고 그것의 종류 역시 대단히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조선 역시 시기는 일본보다 다소 늦지만 개항이후 관료들이 상하이를 방문하고 또 선교사들에 의해 상하이에서 생산한 서학이 수용되었다. 또 이처럼 상하이에서 생산된 서학이 중국을 비롯해 조선과 일본에 전파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통망이 중요하다. 상하이를 중심으로 형성된 동북아해역의 교통망에 대한 연구는 바로 상하이 지식네트워크 형성에 대한 연구의 토대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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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2018.06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고는 18세기 후반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신고전주의, 그리고 낭만주의로의 진행에 근거하여 당시에 나타났던 사조들 중 하나인 네오르네상스란 개념이 원래는 건축적, 회화적으로 독일에서 먼저 사용되었으며 이후 이탈리아가 동일한 진행을 따르고 있음을 밝힌다. 나아가 19세기 유럽 예술계에서 다소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던 이탈리아의 19세기 대표 화가로 프란체스코 아예즈를 주목하고 이 화가의 작품을 통해 당시 이탈리아의 낭만주의 미술이 고전에 상당히 근거하고 있으나 전유럽 공통의 낭만주의적 경향을 동시에 띄고 있음을 밝히는데 의의를 둔다. 또한 아예즈의 회화가, 니체가 구분한 세 종류의 역사 중에서 가장 건강하고 발전적인 성향인 ‘비판적 역사’의 방향을 따르고 있음에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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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2017.12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본 논문은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조각 작품 <14살의 어린 무희 Little Dancer Aged Fourteen>(1881)에 대한 연구이다. <14살의 어린 무희>는 그녀의 정체성을 매춘부로 드러냈으며, 이에 제6회 인상파전에서 발표되었을 당시 엄청난 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드가가 <14살의 어린 무희>의 정체성을 매춘부로 드러내기 위해 적용했던 이론은 당시 유행했던 발레-팬터마임과 관상학이었으며, 이 두 이론을 적 용했던 이유는 둘 다 인간에 대한 본질을 파악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14살의 어린 무희>의 발레-팬터마임에서 차용된 오만함의 자세는 오페라를 찾은 부르주아 남성들과 은밀한 관계를 맺었던 어린 무용수의 부정적 이미지를 함축하여 암시했고, 관상학에서 범죄자나 매춘부들에게서 나타나는 것으로 정의한 악덕 관상을 어린 무희의 얼굴에 새김으로써 무용수라는 직업 이면의 매춘을 상상하도록 했다. 예술작품 안에서 다양한 형태의 무용수 묘사는 고대에서부터 지속되어 왔지만, 근대 하층 노동자 계급의 표상인 파리 무용수의 조각적 형태의 매우 사실적인 재현은 드가의 <14살의 어린 무희>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14살의 어린 무희>는 매춘부라는 주제를 당시의 사회 문화적 담론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전통적 미술의 기준에 도전했다. 결국 드가의 <14살의 어린 무희>는 근대 생활의 양상과 그 시대의 이슈를 드러냈던 것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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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2017.12 KCI 등재 구독 인증기관 무료, 개인회원 유료
        조선후기 실학자의 일본인식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선행연구가 있지 만 조선통신사의 일본 왕래가 저조해진 19세기에 활약한 실학자에 대한 그것은 비교적 양이 적은 것으로 보인다. 본고에서는 그 중에서 최한기 (崔漢綺)와 이규경 (李圭景)의 일본인식에 초점을 맞춰서 살펴보았다. 최한기의 일본관은 세계 각국의 지리, 제도, 산물, 역사, 종교, 풍토, 문화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지구전요 (地毬典要)󰡕에 집중적으로 나 타나 있다. 그 저본은 세계지리서인 『해국도지 (海國圖志)』와 『영환지략 (瀛環志略)』이지만 두 책의 일본 기술이 미비한 부분을 신유한 (申維翰) 의 『해유록 (海游錄)󰡕에 의거해서 보충했기 때문에 그의 일본에 관한 지 식・이해는 신유한에 의거하고 있다. 최한기는 일본의 세습제도에 대해 “어찌 인간의 재능에 한계가 있겠 는가? 실로 정교 (政敎)의 구속에 의한 것이다”라고 비판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냉정하고 공평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의 일본 정보・지식은 상대적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나 ‘기학 (氣學)’이라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전통적 유교의 화의사상이나 역사적인 적개심, 멸시관도 극복할 수 있었다. 한편 이규경은 규장각검서관 (奎章閣檢書官)이자 『청령국지 (蜻蛉國 志)󰡕라는 일본에 관한 저술도 있는 실학자 이덕무 (李德懋)가 할아버지 였으므로 일본에 대해서는 최한기보다 풍부한 문헌과 지식・정보와 접 할 수 있었다. 그는 실제로 그것을 활용해서 일본의 신화, 역사부터 생활 문화와 속신 (俗信)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식을 그의 저서 󰡔오주연문 장전산고 (五洲衍文長箋散稿)󰡕 속에서 기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이규경은 일본인을 가리켜 ‘도이 (島夷)’, ‘왜이 (倭夷)’, ‘흑치 녹정 (黑齒綠頂)’ 등의 멸칭을 거리낌 없이 쓰고 그 방대한 지식을 가지 고도 일본이나 일본인에의 멸시관, 차별의식을 고치고 극복하기에 이르 지 않았음을 알 수 있으나 사고전서 (四庫全書)에도 수록된 일본의 유학 자 야먀노이 테이 (山井鼎)의 『칠경맹자고문 (七經孟子考文)』의 고증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듯이 이규경은 그러한 차별의식을 옆에 두고 일본의 문물이나 학술의 좋은 것을 평가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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